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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전선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운다 ④:
해방 직후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전선론의 비극

지금 대다수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맞서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자본가 자유주의 세력의 체계적인 계급 협력을 가리키는 민중전선의 한국판이다. 그러나 지난 역사에서 민중전선은 모두 비극적이거나 우울한 결말을 맞이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험에 이어서 이번 호에서는 해방 정국의 조선을 다룬다.

해방 이후 한국은 온갖 모순이 중첩돼 왔다. 그중 하나는 제국주의 세력이 한반도를 분단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좌익과 우익은 각각 소련과 미국의 힘에 편승하려 했고, 결국 이것이 통일된 독립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게 했다는 인식이 광범하다.

이런 인식은 통일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면 좌익과 우익이 협력을 해야 하고, 모든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지 말고 민족적 대의 앞에 서로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여전히 한국이 분단 국가라는 사실이 해방 당시 좌우합작과 계급협력을 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주장을 꽤 설득력 있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생각은 아마 상식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오늘날 당시 여운형의 좌우합작 운동을 지지하는 정치적 스펙트럼은, 대다수 자주파, 좌파 민족주의자(대표적으로 서중석 교수), 진보신당의 일부 PD 이론가(장석준)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대표와 함께 있는 여운형 해방 정국에서 좌파들은 제국주의 세력에 기대 독립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전선론으로 표현된 계급협력 노선은 결과적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격렬한 좌우 대립, 특히 공산당의 ‘비타협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분단을 저지하고, 친일·반동 세력을 청산하고, 사회·경제적 모순을 과감하게 개혁하는 데 좌우합작과 계급협력이 효과적이었을까? 사실, 당시 역사는 오히려 계급협력과 민족단결 논리가 이런 과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효과적이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겠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조선은 식민지에서 해방됐다. 식민지 시절 억눌렸던 조선 민중은 새로운 독립국가에서는 마땅히 과거 일제에 부역했던 자들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민중은 새로운 독립국가가 정치적으로 자주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오랜 사회 경제적 모순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군산 종연조선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방은 누구를 위한 해방 … 이냐? 노동자에게서 직장을 빼앗고 빵을 주지 못하는 독립이라면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의의가 있으랴. … 노동자 대중에게 완전한 해방을 가져오는 그날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기를 여기에 맹서한다.”

스탈린의 국제 노선

그들은 이런 과제를 누가 대신해 줄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공장과 작업장을 접수해 스스로 운영하려 했다. 일본인 소유 작업장은 물론 친일 조선인 자본가 소유의 작업장도 접수 대상이었다. 가혹한 식민지 소작제에 시달렸던 소작농민들도 대지주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을 대신해 조선을 점령한 미국과 소련 양대 제국주의는 조선 민중이 스스로 민족 독립 국가를 건설할 권리를 부정했고, 노동자와 빈농이 급진화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안타깝게도 당시 좌파들은 제국주의적 점령에 맞서 저항하지 않았다. 여운형 등의 중도좌파든 공산당이든, 거의 모든 좌파들이 제국주의 세력을 활용해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조선공산당은 당시 스탈린의 국제노선에 충실했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아직 본격화하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의 전후 세력권 조정 협상은 끝나지 않았고, 이를 위해 소련과 미국의 ‘협력’ 관계는 일정 기간 유지됐다. 따라서 각국의 공산당들은 이 협력 관계를 해칠 급진적 주장과 실천을 회피해야 했다.

스탈린의 국제노선을 따라 조선공산당은 당면 혁명의 과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제한했다. “조선의 객관적 정세는 우리로 하여금 무조건하고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의 제 과업의 수행을 강경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요 조선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단계는 아직 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힘있게 주장한다.”

조선공산당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아래로부터의 힘에 의존한 것도 아니었다. 조선공산당은 당시 미국과 소련의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고, 이 국가가 수행할 각종 개혁 조처들을 미국과 소련이 지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스탈린-루즈벨트의 국제혁명 노선’ 덕분에 “조선과 같은 데에 있어서는 평화적으로 혁명의 성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소련군만 아니라 미군도 “해방자”로 환영했다. 미국을 “우리 민족의 직접 원조자로서 해방자로서 … 우리의 역사에 빛날” 것으로 칭송했다.

조선공산당은 새로 건설될 국가는 좌우합작, 민족통일전선, 즉 계급연합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언제든가 민족적 범죄자인 친일 분자만을 제하고는 누구든지 환영한다.”

그래서 조선공산당은 이승만을 그들이 선포한 인민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삼으려 했다. 심지어 공산당은 자신이 ‘반동적 민족자본가’로 규정했던 김성수를 내각에 영입하려고까지 했다.

이승만은 공산당의 제안을 단칼에 거부했다. 오히려 공산당에게 민족단결을 해칠 행위는 하지 말라고 훈계했다. “급격한 분자가 선두에 나서서 농민이 추수를 못하게 하고 공장에서 동맹파업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 국체를 회복하여 국토를 찾자는 일점에 대동단결치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공산당은 합작의 파트너를 김구로 바꿨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조선공산당이 민족 단결을 내세우며 우파와 ‘상층 통일 전선’을 추구하는 것에 노동자·농민 운동 지도부도 보조를 맞췄다. 당시 노동조합 전국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와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지도부는 공산당이 통제했다. 전평은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데서 계급대립이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1)도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요, 2)농촌에서 농민과 지주의 대립이다. 이 두 모순을 잘 조정하는 것이 통일전선의 기초를 쌓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평은 투쟁을 자제하고 “양심적 민족자본가”와 협력해 생산에 힘쓰라고 강조했다. 노동자들의 공장관리운동 역시 급진적 방향으로 발전시키기보다는 자본가와 공동관리를 강조했다.

해방 직후 분출했던 농민들의 토지 접수 시도는 제지됐다. 또, 공산당은 “일제 및 비친일적 대지주에 대한 소작료 불납 투쟁을 극좌적 오류”라고 규정해, 농민 운동을 소작료 인하 운동으로 억제했다.

투쟁 자제

민족통일전선을 위해 계급 대립을 조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종의 자기기만이었다. 자본가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조선인 자본가들은 일본 제국주의 질서에 편승하거나 통합돼야만 자본을 모을 수 있었다.

조선인 자본가들은 해방 뒤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대중의 요구가 필연적으로 자신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위협할 것임을 거의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고, 이를 막아 줄 미군정과 우익 폭력집단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트로츠키는 스페인 혁명의 경험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는데, 이는 조선공산당의 계급연합 추구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매우 놀라운 것은 스페인 민중전선은 실제로 힘의 사변형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자본가계급의 자리에는 그 그림자뿐이었다. 스페인 자본가계급은 스탈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매개로 민중전선에 참여하라고 귀찮게 조르지 않고도 노동자계급을 자신에게 종속시켰다. 온갖 정치적 색조를 띤 착취자들의 압도 다수는 공공연하게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갔다.”

따라서 공산당과 전평이 추진한 민족통일전선은 사실상 공산당 지지 세력의 결집체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이 민족자본가의 그림자와 연합을 하려는 동안, 미군정과 우익들은 노동자와 빈농의 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해방 직후 궁지에 몰려 있던 친일·반동 세력들은 미군의 점령과 이에 편승한 우익 폭력, 그리고 좌파의 계급타협 정책 덕분에 숨을 돌릴 여유를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 등장할 분단 국가에서 좌익과 민중운동을 절멸시키리라 결심했다.

조선공산당의 태도는 1946년 7월 들어 변한다. 이른바 ‘신전술’ 채택이다. 즉 그동안 미군정과 우익의 폭력에 대한 최소 저항 노선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방어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신전술을 채택했다고 해서 미국과 전면적으로 대립하거나, 좌우합작을 원천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공산당은 여전히 소련과 미국 간 협의(미소공동위원회)에 매달렸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국 최종 결렬됐을 때, 공산당의 운명은 거의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국과 우익은 자신들의 분단 국가를 위협할 모든 잠재 세력을 문자 그대로 척결하려 했다. 공산당은 뒤늦게 모든 힘을 다해 투쟁해 보지만, 세력균형은 이미 매우 불리했다. 공산당의 협조 노선 와중에 노동자, 농민 운동은 탄압으로 상당히 약화됐고, 분단이 기정사실이 되자 상당수 대중은 낙담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1948년 제주도에서 벌어진 항쟁은 고립됐고, 미국과 이승만은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당시 좌우합작론과 민족통일전선론의 근본적 모순 중 하나는 양대 제국주의에 대한 의존이었다. 여운형과 같은 온건 좌파든, 공산당이든 그들의 프로젝트는 결국 미국과 소련의 협상에 근거한 것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갈라섰을 때, 그들의 노선은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좌우합작론과 민족통일전선론에서 더 중요한 모순은 그것이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당시 좌파들은 민족 독립국가 건설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면서 계급투쟁을 부차화했다. 이는 민족국가 건설과 계급투쟁을 분리시킨 것이다. 국가 건설은 좌우 합작을 통해,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협상에 따라 건설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논리는 결국 미군정과 우익을 강화했을 뿐이었다. 좌파가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틈을 타 우익은 세력을 결집시켰고, 친일 반동 세력은 전열을 재정비했고, 미군정은 각종 노동자 민중 조직을 파괴할 수 있었다.

결국 당시 민중이 요구한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서 좌우합작과 계급협조는 전혀 적절하지 않았다. 먼저, 통일 국가 건설이라는 과제를 해결하려면 미국과 소련 점령군에 맞선 투쟁이 필요했다. 둘째, 친일 잔재 청산과 사회 경제적 개혁을 위해서는 조선인 자본가와 대지주, 그리고 우익에 맞선 투쟁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특히 남한에서 친일 반동 우익 세력은 미국 제국주의에 밀착했고, 미국은 이들을 비호했기 때문이었다.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전선론은 이런 과제를 아래로부터 해결할 수 있는 대안(즉, 연속혁명)을 봉쇄하는 데 일조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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