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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전선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운다 ③:
스페인에서 노동자 혁명의 목을 졸라 버린 민중전선

지금 대다수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맞서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자본가 자유주의 세력의 체계적인 계급 협력을 가리키는 민중전선의 한국판이다. 그러나 지난 역사에서 민중전선은 모두 비극적이거나 우울한 결말을 맞이했다. 민중전선의 역사적 배경을 다룬 첫 연재(45호)와 프랑스 경험(47호)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스페인 민중전선 경험을 다룬다. 앞으로 미국, 칠레, 중국, 해방 정국의 조선을 차례로 다룰 예정이다.

1936년, 프랑스에서 노동계급의 전진을 가로막았던 계급동맹 전략이 스페인에서는 노동자 혁명의 목을 직접 졸랐다.

20세기 초 스페인은 낡은 봉건적 잔재가 있었고 산업 발전이 미약했다. 봉건 영주와 귀족들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고 매달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신흥 산업 자본가들이 봉건 지배계급과 단절할 의지나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저항에 나서는 것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봉건 영주와 귀족들과 기꺼이 손을 잡았다.

그래서 스페인에서는 낡은 왕정 체제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스페인 노동계급은 20세기 초부터 혁명적 잠재력을 드러냈다.

1909년에는 모로코전쟁에 반대하는 파업이 일어났다.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이 스페인에 저항의 불바람을 몰고 왔다. 총파업이 스페인 사회를 흔들었다.

이 운동은 3년 만에 진압되고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사독재가 시작됐다. 취약한 경제 때문에 독재는 오래 가지 못하고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만다.

스페인 민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화정을 요구하며 저항에 나섰다. 알폰소 13세가 도망가고 1931년 공화국이 선포됐다. 신흥 자본가들이 권력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집권한 ‘공화주의자’들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 주지도,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지도 못했다. 여전히 봉건적 지배자 노릇을 하는 교회를 억압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스페인은 1932년부터 경제 위기로 빠져들었다.

이 위기를 틈타 우익들은 더 우경화한 우익연합을 결성해 1933년에 집권했다. 우익 세력들은 3년간 시늉만 낸 개혁조차 뒤엎으려 했다.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에서 광부들이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하고 봉기를 일으키며 저항했다.

저항은 갈수록 격렬해졌고 그러자 우익들 사이에선 더 극단적인 파시스트들이 성장했다. 결국 1936년 2월 선거에서 우익연합을 이기고자 민중전선이 결성됐다.

우익연합의 반동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공화주의 자본가들과 스페인 좌파들이 동맹을 맺은 것이다.

민중전선에는 중도우파 자본가당인 공화연합부터 개혁주의 정당인 사회당(PSOE)과 이 당과 연계된 노동총동맹(UGT), 그리고 극좌파인 공산당과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이 모두 참여했다.

그러나 우익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계급을 뛰어 넘어 구성된 연합체가 진정으로 우익을 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곧 드러나기 시작했다.

반파시즘 투쟁의 동학

민중전선 내각의 자본가 장관들은 온건한 개혁 조처조차 우익과 기업주들이 반발하면 뒤로 물러섰다.

연합의 유지를 위해 좌파 정당들과 장관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감을 얻은 우익 군부와 봉건적 교회, 왕정 복고파와 파시스트들은 마침내 7월 17일에 프랑코가 이끄는 군사쿠데타를 시작했다.

민중전선 정부는 불법 쿠데타를 두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정부의 확신 없는 태도는 쿠데타 모의에 참가하지 않았던 군부와 지방정부들을 동요시켰다.

자본가들도 갈수록 프랑코 독재를 통해 스페인 자본주의가 처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낫다는 방향으로 이끌리기 시작했다.

공장과 토지의 옛 주인들은 도망가거나, 소유권은 보장해 줄 거라는 기대감으로 파시스트 편에 섰다.

결국 단숨에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하려던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대를 막아선 것은 민중전선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와 무토지 농민들이었다.

카탈루냐, 발렌시아 등 지역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저항을 조직했다.

저항에 나선 노동자와 농민 들은 도시와 공장, 토지를 자주적으로 통제·관리하기 시작했다.

기층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반파시즘 투쟁은 스페인에서 새로운 권력 수립, 즉 노동자 혁명을 일정에 올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공산당의 계급동맹 정책이 문제가 됐다.

공산당은 자본가계급과 동맹해서 민중전선 정부를 유지한다는 목적에 매달리며 오히려 노동자 혁명의 가능성을 가라앉히는 구실을 했다.

공산당은 ‘혁명은 나중이다’ 하며 노동자·농민에게 공장·토지 점거와 자주 관리를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자본가들과 동맹을 유지하려, 적당한 수준에서 투쟁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재앙적 정책은 혁명적 열기로 달아오르던 스페인 노동자·농민의 투쟁에 찬물을 끼얹고 김을 빼는 구실을 했다.

결국 기층의 활력이 꺾이자 민중전선 정부는 더 노골적으로 혁명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좌파 정당들은 불법화되고 그 지도자들은 처형당하거나 살해됐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는 세계사의 줄기를 바꾸는 패배였다.

1939년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군사 반란이 성공하자마자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제2차세계대전의 도화선을 당겼다. 스페인에서는 민중전선 정부 지지자를 포함해 수십만 명이 학살됐고, 노동계급 투사 한 세대가 절멸했다.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노동자들이 너무 급진적으로 행동해서 반파시즘 진영이 분열하고 자본가들이 도망간 것이 패인은 아닐까?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한 과정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파시스트 군대는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나서 정규군에게 무기를 넘겨 받고 지역을 통제하며 저항한 곳에서 패배했다.

내전 초기, 카탈루냐 지방정부 수장 콤파니스는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든 것이 여러분 수중에 있습니다. … 지금의 나와 내 충성심을 믿어 주십시오” 하고 말해야 했다.

반대로 민중전선 정부는 처음부터 동요했다.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하기를 거부하다가 내각이 교체되기도 했다.

자본가들은 스스로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보다 차라리 파시스트를 선호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들의 지지가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가자 민중전선 정부는 대변할 사회 세력이 없는 껍데기가 됐다.

좌파는 민중전선 정부에 들어가지 말고 각 지역 혁명위원회들을 연결망으로 하는 전국적 대안 권력을 창출해야 했다.

민중전선 정부를 위해 혁명적 투쟁을 자제하는 것은 자멸의 길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에게 이 전쟁에서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 전쟁이 사회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옛 주인들이 떠난 곳에서 이들은 공장과 토지를 접수하고 모든 공공서비스와 치안을 통제했다. 이제 선택지는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둘 뿐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민중전선 정부는 노동자들에게서 가장 강력한 투쟁의 동력인 사회혁명의 열망을 제거하려 했다.

주요 책략은 좌파를 민중전선 정부에 포함시켜 발목잡고 뒤통수치는 것이었다.

혁명의 위력이 가장 강했던 카탈루냐에서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합(FAI)과 POUM은 지역판 민중전선 정부에 들어갔다가 그런 꼴을 당했다.

민중전선 정부는 POUM을 중앙정부에서 쫓아냈고 얼마 안 가 불법화한 뒤 그 지도자 안드레스 닌을 살해했다. 배신의 마지막 희생자는 공산당 자신이었다.

한편, 프랑코 진영의 주력 부대는 모로코 주둔군과 모로코인 용병이었기 때문에 민중전선 정부가 모로코 독립을 선언한다면 전세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령 모로코의 해방은 프랑스령 모로코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프랑스 자본주의를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는 민중전선 정부와 소련의 판단으로 이 해방적 조처는 거부됐다.

스페인 민중전선 정부가 이렇게 행동했는데도 ‘반파시즘’을 자처하던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자본가들은 결코 스페인의 노동자들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 압력에 굴복해 프랑스 민중전선 정부도 스페인 민중전선 정부의 군사 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이렇게 민중전선 정책 때문에 스페인 노동자들의 손발이 묶여 있는 사이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는 최신 무기와 병사 수만 명을 프랑코에게 지원했다.

스탈린과 민중전선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에서 핵심은 혁명의 국제적 확산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모국’인 소련을 군사적으로 보호하는 것이었다.

코민테른은 이를 위해 각국 공산당을 동원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특히 나치 독일의 위협이 현실이 되자 히틀러를 막으려고 서방과 맺는 동맹에 집착한 스탈린은 서방 자본가들에게 혁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스탈린은 스페인 내전 초기인 1936년 사회당 소속인 수상 카바예로에게 사유재산 보호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스탈린은 민중전선 정부를 위해 혁명을 교살하는 구실을 공산당에게 맡겼다.

공산당은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는데, 막상 민중전선 정부는 국내외 자본가계급에게 충성했다.

그리고 그 국제 자본가들과 이른바 ‘민주’ 진영 정부들은 볼셰비즘의 공포보다 파시즘의 승리를 보는 게 낫다고 결정했다.

요컨대, 민중전선 전략은 애초부터 그 목표가 체제 위기를 혁명으로 해결할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억제하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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