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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전선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운다 ①:
민중전선의 역사는 계급 협력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편집자 주] 지금 대다수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맞서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자본가 자유주의 세력의 체계적인 계급 협력을 가리키는 민중전선의 한국판이다.

그러나 지난 역사에서 민중전선은 모두 비극적이거나 우울한 결말을 맞이했다.

〈레프트21〉은 이번 호부터 민중전선의 주요 사례들(프랑스, 스페인, 미국, 칠레, 중국, 해방 정국의 조선)을 살펴보는 연재를 시작한다. 첫 연재에서는 민중전선에 관한 개괄적 이해를 돕고자 민중전선의 역사적 배경을 다룬다.

민중전선 정책은 1935년 7∼8월 코민테른(국제공산당) 7차 대회에서 처음 채택됐다.

그 직전까지 스탈린의 코민테른1은 ‘사회파시즘’론을 채택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쌍둥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둘의 계급적 토대가 다르다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의 계급적 토대가 노동계급 조직이라면 파시즘은 중간계급, 미조직 노동계급 부문, 룸펜이 그 기반이었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은 칼의 양날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상호배타적 버팀목들이었다.

‘사회파시즘’론은 독일에서 재앙을 낳았다. 독일공산당과 독일사회민주당은 변변한 투쟁 한번 못해 보고 1933년에 히틀러에게 권력을 내 줬다.

1971년 9월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저항하는 칠레 대통령 아옌데 칠레 민중전선은 비극적 결말로 끝났다.

이 점에서 민중전선은 ‘사회파시즘’론이라는 백치병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모험주의적 좌익주의가 우익 중도주의 유형의 노골적 기회주의”로 변신한 것이었다. “뜨거운 우유에 덴 고양이는 찬물도 피하는 법이다.”

민중전선은 계급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함께하면 파시즘의 악몽을 끝낼 수 있다는 정책이다. 실천에서 이것은 노동계급과 자유주의 자본가의 체계적인 계급 협력을 뜻했다.

과거에 사회민주당들의 민족주의적·계급협력주의적 정책에 반대해 그들과 결별했던 코민테른이 이제 사회민주주의 세력보다 더 노골적인 계급 협력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것은 코민테른의 기본 테제를 근본에서 부정한 것이었다. 레닌 등이 작성한 코민테른 가입 조건(‘21개 조항’)에는 공산당과 자본가 정당의 연합 반대가 포함돼 있었다.

일국 사회주의

민중전선은 1935년에 채택됐지만, 그 기원은 1924년에 발표된 일국 사회주의론이었다.

일국 사회주의는 혁명 방위의 성패를 국제 계급투쟁이 아니라 소련 한 나라의 힘에 건다는 뜻이었다. 한 나라 안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면 국제 혁명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덤 같은 것이 된다.

일국 사회주의론은 각국 공산당이 민족주의로 향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그 결과 “각국의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노선에 따른 코민테른 붕괴의 시발점”(트로츠키)이 됐다.

이 정책에 따라 각국 공산당들은 소련의 ‘국경수비대’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소련에 군사적 개입을 못 하도록 막는 방패 구실이 공산당의 주요 임무가 됐다.

그러자면 공산당들이 잠재적 친구들과 사이가 나빠지는 일이 없도록 혁명 활동의 수위를 낮추고 자국 자본가들에게 개혁주의적 압력이나 행사해야 했다. 이 정책은 중국 혁명 등에 치명타를 가했다. 1920년대 중엽 중국공산당은 이른바 ‘진보적’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에 굴종했고, 1925∼27년 중국 혁명은 분쇄됐다.

민중전선도 소련의 대외 목표와 관계 있었다. 히틀러에 반대해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을 가능성이 있는 다른 나라 정부들에 압력을 넣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히틀러의 군비 증강 시도가 겨눈 목표물 중 하나가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영국·프랑스와 군사 동맹을 맺고자 안달했다. 마침내 1935년에 스탈린은 프랑스의 중도 우파 라발 정부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스탈린은 이 관계를 공고히 하려면 공산당이 ‘자유주의적’ 자본가 정부를 지원해야 한다고 봤다. 그것만이 파시즘의 진격을 막을 유일한 ‘현실적’ 방도라고 봤다(그 핵심 논지는 40년 전에 베른슈타인 등이 설파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물론 레닌 시대의 소비에트 정부도 자본가 정부들과 조약들을 맺었다 —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1920년 에스토니아와의 조약, 1920년 10월 폴란드와 체결한 리가 조약, 1922년 독일과 체결한 라팔로 조약 등.

그러나 당시 볼셰비키 지도자들 중 누구도 이 자본가 정부들을 “평화의 친구들”이라고 선전하지 않았다. 또, 독일·폴란드·에스토니아 공산당들에게 이 조약들을 조인한 자본가 정부들을 선거에서 지지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대중을 혁명적 의식으로 각성시키는 데 이용했다.

그러나 민중전선 시기 스탈린의 코민테른은 정확히 그 반대의 주장과 실천을 했다.

“현재 국면에서 많은 자본가 국가들도 평화 유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제국주의 전쟁의 위험에 맞서 노동자 계급과 모든 근로 민중 그리고 모든 국가들을 아우르는 광범한 전선을 창출할 가능성이 존재한다.”(1936년 5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이 ‘전선’은 제국주의의 현 상태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자본가 정당들과 동맹을 맺으려고, 세계 체제를 강타한 공황에 대한 혁명적 대안들을 모두 포기했다. 혁명적 변화에 관한 논의를 먼 훗날로 미루고 자본주의 수호 임무를 지닌 정부들을 “관용”으로 대했다. 이 관용은 노동자 운동을 억누르는 것을 뜻했다.

(반半)식민지 나라들에서는 반제국주의 투쟁을 위해 노동계급을 이른바 ‘진보적 민족 부르주아지’에 예속시켰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과 민족해방운동을 지구상 최대 식민제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종속시켰다(7차 대회는 6차대회에서 두드러졌던 반제국주의 미사여구들을 조심스럽게 거둬들였다).

스탈린은 1943년에 동맹국들에 보내는 우호의 표시로 코민테른을 해체했다.

산수와 역학

트로츠키

트로츠키는 민중전선이 고전적 멘셰비즘의 확장이라고 봤다. 그가 보기에, 1917년 2월 혁명이 민중전선의 역사적 사례였다.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자본가 정당인 카데츠와 연립정부를 구성해 긴밀하고 항구적인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볼셰비키는 민중전선에 조금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는 좌파 정당들이 카데츠와 맺은 동맹을 파기하고 진정한 노동자 정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러시아의 민중전선을 제압했던 10월 혁명의 이름으로 각국의 민중전선들을 지원했다.

민중전선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정확히 산수의 법칙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말했다.

“단결한 노동자 세력(‘통일전선’)이 민주주의자들 및 자유주의자들과의 보다 넓은 선거적, 정치적 연합(‘민중전선’)의 토대가 될 것이었다.

“독일의 세가 계속 확대됨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연합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연합체, 즉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신념과는 상관없이 파시즘(또는 추축국들)을 첫째 위험으로 간주하는 모든 세력의 ‘국민전선’으로 단결의 범위를 확대할 것을 고려했다.”

노동자들의 단결에다 자유주의 자본가와의 단결까지 더해졌기 때문에 민중전선은 공동전선의 진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정치의 영역에서는 “산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적어도 역학 하나는 더 필요하다.

“힘의 평행사변형의 법칙은 정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평행사변형에서 합력(合力)은 분력(分力)이 서로 다를수록 더 작아진다. 정치적 동맹자들이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다면, 합력은 0과 같아질지도 모른다.”

민중전선은 이해관계가 180도 다른 적대 계급 간의 동맹이다. 그래서 동맹의 성립은 노동계급의 양보를 전제로 한다.

그래 갖고는 중간계급을 획득하지 못한다. 노동계급의 단호한 지도력 제공만이 중간계급을 획득할 유일한 방법이다.

노동계급의 힘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하던 초기 코민테른은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제안한 공동전선은 (1) 노동계급 정당들의 협력을 뜻했다. 반대로 민중전선은 자본가 정당들을 포함시키는 계급 협력 전략이었다. (2) 공동전선은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려는 투쟁에 필요한 실천적 협정이었다. 그러나 민중전선은 공통의 선거 강령과 자본가 정부 지지를 포함했다. (3) 공동전선에서는 완전한 이데올로기적 독립성과 비판의 자유가 보장되지만, 민중전선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4) 공동전선은 혁명정당 활동의 한 부분이어서 다른 독립적 활동을 계속 수행할 수 있지만, 민중전선은 코민테른의 전체 전략이었다.

계급 연합 기구로서 민중전선은 파시즘을 저지하는 효과적 무기가 못 됐다.

예컨대, 1934년 프랑스에서 히틀러의 집권에 고무받은 파시스트들이 의회를 공격했다. 중도 좌파 정권이 몰락하고 강경 우파 정권이 들어섰다. 이때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이 극우파를 수세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1936년에 주류 친자본가 정당인 급진당과 단결하려는 시도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관용’ 정책과 똑같은 결과를 낳았다. 짧은 소강기를 거쳐 우파가 다시 주도권을 쥐었다.

물론, 노동 대중에게 민중전선이 ‘제3기’(사회파시즘) 백치병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히틀러의 승리는 정치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단결해야 한다는 열망을 고무했다.

이런 단결 염원 정서 덕분에 민중전선의 첫 번째 국면에서 공산당들은 큰 이득을 봤다. 프랑스공산당의 당원 수는 1934년 3만 명, 1936년 2월 9만 명, 1936년 12월 28만 8천 명으로 증가했다. 스페인공산당의 당원 수도 1934년에 1천 명을 밑돌았으나 1936년 2월 3만 5천 명, 1937년 7월 11만 7천 명으로 증가했다. 당시 공산당들은 처음으로 중간계급 당원과 동조자를 대거 획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8년에 민중전선의 실적에 대한 환상이 깨지자 상황이 반전했다. 공산당들의 당원과 지지자가 감소했다.

최종적으로 민중전선은 파시즘을 저지하지 못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는 파시즘에 권력을 내 주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미국에서는 공산당이 민주당의 루스벨트를 지지해 최종 독립적인 정당 건설 전망을 포기하면서 우울한 결말을 맞이했다.

민중전선의 운명은 그래서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였던 생 쥐스트의 예언, 곧 “혁명을 절반만 성공시키는 사람은 자기 무덤을 파는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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