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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전선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운다 ②:
재앙으로 끝난 1936년 프랑스의 계급연합

지금 대다수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맞서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자본가 자유주의 세력의 체계적인 계급 협력을 가리키는 민중전선의 한국판이다. 그러나 지난 역사에서 민중전선은 모두 비극적이거나 우울한 결말을 맞이했다. 민중전선의 역사적 배경을 다룬 첫 연재(〈레프트21〉 45호)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프랑스 민중전선 경험을 다룬다. 앞으로 스페인, 미국, 칠레, 중국, 해방 정국의 조선을 차례로 다룰 예정이다.

1930년대는 위기의 시대였다. 경제는 대공황에 허우적댔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파시스트가 권력을 잡았다. 독일의 히틀러가 군비를 늘리며 세계대전 위험이 높아져 갔다.

프랑스도 혼란에 빠졌다. 정부 정책으로 말미암아 노동자·농민과 중간계급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극우파들도 세를 늘려갔다. 극우단체 회원이 1백만 명에 이를 정도로 프랑스에서 파시즘의 위협은 실질적이었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것에 한껏 고무된 이들은 1934년 2월 6일 의사당에서 무력 시위를 벌였다. 이 때문에 급진당(이름과 다르게 전혀 급진적이지 않은 중간계급 기반의 친자본가 정당이었다) 달라디에 정부는 사실상 강제로 퇴진당하고 우파 정부가 들어섰다.

노동자들은 저항에 나서기 시작했다.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은 2월 12일 하루 총파업을 호소하고 사회당도 시위를 조직하기로 했다. 굼떴지만 공산당도 따로 시위를 준비했다. 당일 노동자 1백만 명이 파리 시내를 뒤덮으며 파시즘에 맞섰다.

따로 행진을 시작한 사회당과 공산당 대열이 행진 과정에서 합쳐지자 노동자들은 한목소리로 반파시스트 구호를 외치며 하나가 됐다. “이런 조우가 기뻐 날뛸 것 같은 열광을 촉발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단결! 단결!’의 박수갈채와 구호들과 함성들.”

노동자들은 단결을 원했고, 정말이지 단결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미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재앙적인 정책(3기 ‘초좌익주의’)으로 독일 공산당은 사회당을 파시스트와 다르지 않은 ‘사회파시스트’라 규정하고는 공동투쟁을 거부한 바 있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손쉽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이런 재앙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공동전선 즉, 노동자 계급의 단결된 투쟁이 절실했다.

파시즘의 위협 앞에서 프랑스 좌파는 단결했다. 그런데 문제는 단결의 범위가 노동자 정당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공산당과 사회당뿐 아니라 중간계급 정당인 급진당도 연합을 한 민중전선이 결성됐다. 파시즘에 맞서려면 계급을 뛰어넘는 광범한 연합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한편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 위협을 느낀 소련 지배자들은 영국·프랑스와 군사적 동맹을 맺어 독일을 견제하려 했다. 그래서 1935년에 코민테른은 “평화를 지키고 전쟁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통일된 민중전선”을 채택했다. 코민테른이 애초 표방한 세계 혁명은 온데간데없고 소련 방위만 남은 것이다.

코민테른 총서기 디미트로프는 자본가 계급을 파시즘에 가까운 분파와 ‘민주’적인 분파로 나누고 ‘민주적’ 자본가들과 동맹을 주장하고 나섰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1936년 5월 선거에 공산당은 “강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프랑스를 위해”라는 두루뭉술하고 민족주의적인 구호로 참가했다.

이 선거에서 민중전선은 큰 승리를 거둔다. 사회당은 97석에서 1백47석으로, 공산당은 10석에서 72석으로 의석을 크게 늘렸다. 급진당만 1백59석에서 1백6석으로 줄었다.

민중전선의 승리로 사회당 당수 레옹 블룸이 새 총리가 됐지만, 공산당은 장관을 배정받지 못했다. 블룸과 스탈린은 ‘빨갱이’를 장관에 앉혀 프랑스 지배계급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1936년 6월 프랑스 총파업 이 거대한 투쟁에서 계급연합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잠재웠다.

선거에서 좌파가 선전하고 제한적으로 경제가 회복하자 노동자들은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블룸이 총리에 취임하기도 전인 5월부터 파업 물결이 일었다.

파업은 기계공업 부문에서 모든 산업 분야로,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초콜릿 공장, 인쇄소, 호텔, 식당, 극장, 자물쇠 공장, 백화점 등 노동조합이 취약한 곳까지 파업이 확산됐다. 6월에는 프랑스 전체 노동자의 4분의 1인 2백만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1871년 파리 코뮌 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자 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파업 가운데 4분의 3은 점거파업이었다. 요구안을 정하기도 전에 점거부터 들어갈 정도로 전투적인 투쟁에 사장들은 경악했다. 노동자들은 사장을 감금하기도 하고, 공장에 붉은 깃발을 내걸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게임을 즐기고 노래를 부르며 파업을 즐겼다.

당시 사회당 좌파 마르소 피베르는 이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실제 노동자들은 사회 전체를 바꾸고 싶어 했다.

노동조합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던 사장들은 결국 6월 7일 마티뇽 협정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주 40시간 노동제(당시로는 획기적이었다), 2주 유급휴가제, 상당한 수준의 임금 인상, CGT 인정 등 대대적인 양보를 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민중전선 지도부는 이런 투쟁을 고무하기는커녕 파업을 끝내고 투쟁을 정리하려 했다. 민중전선 정부의 내무장관 로제 살랑그로는 이렇게 말했다. “나로서는 질서와 무정부 상태 사이에서 이미 선택을 했다. 나는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질서를 유지할 것이다.”

민중전선 정부 총리 레옹 블룸 기업주들은 그를 구세주처럼 여겼다.

총리였던 블룸은 나중에 당시 사장들이 자신을 ‘구세주’처럼 여겼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사장들의 진짜 ‘구세주’는 공산당 지도부였다.

노동자들이 이미 따낸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파업을 계속하자 공산당 지도부는 본격적으로 투쟁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파업과 투쟁이 계속돼 소련의 동맹인 프랑스 지배자들을 더욱 곤경으로 몰아넣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공산당 서기장 모리스 토레즈는 “파업을 시작했으면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공산당 일간지 〈뤼마니떼〉는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며 “공산당은 질서를 의미한다”고 선언했다.

엉뚱한 데

새롭게 투쟁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공산당을 자신들의 정당으로 생각했다. 1936년 초 9만 명이던 공산당 당원 수는 거대한 파업을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나 연말에 29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부는 자신들이 얻은 권위와 노동자들의 신뢰를 엉뚱한 데다 썼다. 노동자 계급의 잠재력을 한껏 끌어올려 투쟁을 전진시키는 게 아니라 투쟁을 통제하고 결국 잠재우는 데 이용한 것이다.

공산당 지도부는 한발 더 나아가 민족주의 관점에서 독일에 반대하는 일부 우파까지 포괄하는 ‘프랑스인 전선’을 구성하자고 했다.

민중전선이라는 계급연합 정책에 매인 공산당은 공공연하게 자본가 편을 든 카미유 쇼탕이 총리가 됐을 때도 지지했다. 쇼탕 이후 더 보수적인 달라디에가 총리가 됐을 때도 지지했다.

공산당이 계급연합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지배자들은 반격을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 가운데 하나였던 주 40시간 노동제를 되돌리려 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이에 저항했지만 처참하게 패배했다. 경찰은 체포한 노동자들에게 파시스트 식 경례를 한 채 “경찰 만세”를 외치라고 강요하기까지 했다.

이 패배 후 자행된 대규모 해고와 탄압으로 노동자 운동은 완전히 후퇴했다. 1936년 파업 시작 전 78만 명이던 CGT 조합원 수가 파업 후 4백만 명으로 늘었다가 이런 탄압을 거치며 다시 1백만 명으로 줄었다.

나아가 1939년 9월 말 의회는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1940년 6월에 의회는 앙리 페탱에게 독재권을 주기로 했고, 페탱은 파시스트들이 포함된 정부를 구성해 독일이 프랑스 북쪽 절반을 점령하는 데 협력했다.

혁명세력의 마비

프랑스에서 이 같은 재앙을 낳은 민중전선은 우리에게 뼈아픈 교훈을 준다.

첫째, 계급연합으로 우파나 파시즘의 준동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히틀러와의 협잡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급진당 소속 총리 달라디에였다. 페탱에 권력을 줘 나치가 득세할 수 있게 한 것도 민중전선으로 선출된 의회였다.

1936년 여름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공화국을 지키려고 스페인 정부는 바로 프랑스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프랑스 사회당 소속 총리 블룸은 무기를 지원하고 싶었지만, 급진당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결국 블룸은 ‘비개입’ 정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은 이에 강력히 반발했지만, 민중전선을 깨지 않으려다 보니 별다른 것을 할 수 없었다. 프랑스 민중전선 정부가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군대가 일으킨 반란을 못 본 체한 덕분에 파시스트들은 독일과 이탈리아 무기로 무장 할 수 있었다.(스페인 내부의 민중전선이 내전 패배에 끼친 영향은 다음 호에서 다룰 것이다.)

둘째, 민중전선은 노동자 투쟁을 억누르며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갉아먹었다.

실제 프랑스 공산당의 활동과 주장은 민중전선이 설정한 한계 즉, 급진당이 용인할 수 있는 한계에만 머물렀다. 이는 노동자 계급의 패배와 사기저하로 이어졌다.

프랑스 노동자들의 거대한 총파업은 분명히 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 그러나 민중전선에 매인 공산당은 혁명이 아닌 ‘질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 혁명을 지도했던 트로츠키는 민중전선을 이렇게 비판했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정치연합은 그 기본 이해관계가 1백80도 반대인 두 계급 사이의 동맹인지라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세력을 마비시키는 데에만 이바지할 뿐이다.”

재앙으로 끝난 민중전선 전략을 민주노동당 지도부를 비롯해 한국의 진보진영 일부가 여전히 추구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민주노동당은 1930년대 프랑스 공산당에 견주면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지므로 민주당 바짓가랑이를 잡다 뒤통수만 맞고 비웃음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

노동자 정당이 취해야 할 태도는 계급 동맹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공동전선 즉, 노동자 계급 내의 동맹을 통한 공동 투쟁이다.

프랑스 민중전선을 두고 한 트로츠키의 말은 7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

“노동계급 정당은 파산한 정치꾼 정당을 구하려는 가망 없는 노력에 정신을 쏟아서는 안 된다. 이와 반대로 모든 힘을 다해 대중이 급진당의 영향력에서 해방되는 과정을 가속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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