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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와 노동자 투쟁
다가올 고통전가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세계경제 위기가 심화하면서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특히 세계의 엔진으로 불려 온 중국 경제가 휘청대면서 어두운 그림자는 짙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진정한 문제는 지배자들에게 위기를 해결할 카드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유럽 등 세계 지배자들은 대중에게 끔찍한 내핍을 강요하기 시작했고, 한국 정부도 긴축으로 방향을 잡았다. ‘2008년에 살을 잘랐다면 이제는 뼈를 깎을 차례’라는 얘기도 나온다. 사실 용산 살인 진압도, 쌍용차 살인해고도 바로 2008년 위기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2008년 위기 이후 한국에선 주변부 미조직 노동자들이 공격의 타깃이 됐다. 노동조합에 가입조차 못한 비정규직과 서비스업이 집중적인 타격을 입었고, “조직 노동은 위기의 주요 타격 대상에서 얼마간 빗겨나” 있었다(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 조직된 정규직은 단기간의 회복 국면에서 투쟁보다는 ‘있을 때 벌자’는 심정에 끌렸다.

대신 쌍용차나 현대차 비정규직처럼 부도기업이나 집중 공격으로 불만이 누적돼 온 부문에서 투쟁이 솟구쳤다. 이런 투쟁은 매우 격렬했고 장기간 지속됐지만, 노동조합 운동의 전반적 사기저하 속에서 정치적으로 확대되지는 못하고 패배를 겪었다.

그러나 위기가 심화하면, 공격은 지금까지처럼 주변부 노동자들에게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미조직 부문에서 시작해 점차 조직된 비정규직으로, 조직된 정규직으로 확대될 것이다. 주요 부문에서 공격이 확대될 가능성은 점차 커지고 있다. 그래서 최근 금속노조 노동연구원은 “다가올 큰 싸움을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미조직에서 조직 부문으로

물론, 경제 위기가 계급투쟁에 미치는 영향은 보다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위기는 분노뿐 아니라 엄청난 공포를 수반한다.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질 수 있고, 가계 대출, 고액 등록금과 치솟는 물가, 노후 걱정이 앞설 수 있다.

지금 많은 노동자들이 위축돼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 수년간 노동조합 운동의 사기가 꺾여 온 것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 위기 상황에선 노동자들도 일정한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고, 사회적 타협 없이는 성과를 낼 수 없을 것이라는 개혁주의가 이 과정에서 투쟁의 분출을 말리는 구실을 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이윤 드라이브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 힘을 발휘하려면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나 공포를 분노와 행동으로 바꿀 잠재력은 존재한다. 무엇보다 경제 위기가 낳은 정부의 레임덕과 지배자들의 정치 위기 심화는 기층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키울 수 있다.

그리고 좌파 활동가·대의원·간부 들의 구실도 크고 작은 투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다음의 몇 가지 상황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첫째, 심각한 경제 위기는 정치적 휘발성을 키우고 있다.

최근 〈조선일보〉는 현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대량 실업, 부의 편재, 금융의 폭주에 분노하는 시위대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한날한시에 세계를 휩쓰는 현상은 1930년대 대공황 이래 처음 나타난 역사적인 사태다. 한국 역시 정치·경제의 ‘복합 위기’로 말려들었다.”

광범한 고용불안은 노동자들을 압박해 경제투쟁을 제약하는 효과를 낼 수 있지만, 동시에 사회적 공분을 키우고 뿌리깊은 불만을 누적시킨다. 이 속에서 갑작스럽게 정치투쟁이 폭발할 수 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제한적 방식으로 전개됐는데도, ‘희망버스’라는 연대 운동이 전국적 투쟁으로 발전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휘발성

둘째, 선거는 모순적 효과를 낸다.

노동조합 운동의 자신감이 높지 않은 상황에서, 내년 선거는 일정하게 수동적 기대를 부추기는 효과를 내고 있다. 적잖은 노동조합 상층 지도자들은 투쟁보다는 야권연대를 통한 의회 진출로 노동조합 운동 위기의 돌파구를 찾고 싶어 한다.

동시에, 이명박의 선거 패배는 노동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지난해 진보교육감들이 당선한 이후 전교조 전북지부는 정부의 교원평가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걸었고,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전국적 조직도 건설됐다.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도 서울지하철·도시철도·공무원 등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 자극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선거 과정에서 운동의 요구를 제기하고 투쟁을 자극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활동가들은 선거에서 진보정당과 후보가 한나라당을 폭로하고 민주당이 대변하지 않는 투쟁의 요구와 목소리를 대변하도록 개입해야 한다.

셋째, 노동조합 운동 내 정치적 주도력 문제가 중요하다.

아직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전투성이 부족한 상황에선 운동의 향방과 논점에 개입할 수 있는 대의기구에 전투적 활동가들이 많아야 한다. 단결·투쟁을 통해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층 대의원·간부 들의 존재는 사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활동가들이 네트워크를 구성해 각각의 투쟁 경험들을 일반화하며 연대와 투쟁을 건설해 나간다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노동조합 운동은 위기이지만 여전히 적잖은 조직력을 유지하고 있고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경제 위기 고통전가에 맞선 저항에서 핵심적 구실을 할 수 있다. 아랍 혁명에서도, 월가 ‘점거하라’ 시위에서도 노동조합과 조직 노동자들의 참여는 운동을 전진시키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동력인 이윤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어마어마한 힘과 낮은 자신감 수준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노력과 대비가 절실하다. 그래야 다가올 전면적 공격에서 우리의 삶과 미래를 지킬 수 있다.

한국 노동자들도 유럽처럼 싸울 수 있을까?

이집트 혁명과 유럽 노동자 총파업, 미국 월가 시위로 이어진 세계적 저항이 한국의 노동운동을 자극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적잖은 노동조합 활동가들과 좌파들도 이런 투쟁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노동조합 운동이 침체를 겪으면서 ‘과연 한국 노동자들도 저렇게 싸울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제기되곤 한다. 일부에선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조직 노조운동에 대한 회의도 커지고 있고, 한국 노동자들이 보수화돼 더는 연대 투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간 위기를 거듭하다가 올여름 공공부문 파업으로 노동자 투쟁의 부활을 알린 영국 노동조합 운동은 사태의 다른 그림을 보여 준다.

바로 지난해 여름, 노조 상층 지도자들은 심지어 TUC(영국노총) 총회에 내핍을 강요한 총리 카메론을 불러 연설까지 듣자고 했고, 전국적인 집회 조직 제안도 반대했다. 많은 노조 지도자들은 ‘우리는 프랑스나 그리스와는 다르다’며 동조했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새로운 국면이 형성됐다. 첫째, 지배자들이 노동계급 전체를 향해 공격을 시작하면서, 교섭이나 타협으로 양보를 얻어낼 여지가 사라졌다. 둘째, 공식 노동조합 운동 밖에서 벌어진 투쟁이 기층의 자신감을 고무했다. 특히 전투적 학생 부위의 분출이 노동계급의 급진화에 일조했다. 긴축에 반대하는 운동들도 노동자들을 자극했다. 셋째, 이런 과정 속에서 투쟁을 호소하는 노조 간부들이 새롭게 당선했다.

한 부문의 투쟁이나 승리가 다른 부문을 자극하면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생각된 이들이 갑작스럽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경우는 이번만이 아니다.

지금 경제 위기와 계급투쟁 수준은 세계적으로 불균등하지만, 세계적 저항이 서로에게 자신감을 주고 있다. 한국 노동자들도 투쟁의 국면에선 사기 저하와 그간의 협소한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금 세계는 저항으로 들끓고 있고, 더디지만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는 한국 노동계급은 그런 운동의 일부가 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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