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카리아트’가 새로운 투쟁의 주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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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삭감을 수반하는 파견 노동, 외주화, 사유화의 증가 탓에 이제는 괜찮은 정규직이 없다는 정서가 생겨났다. 극단적 불안정을 특징으로 하는 노동자 집단을 뜻하는 새로운 ‘프레카리아트’에 관한 생각이 일부 좌파 사이에서 유행하게 된 것은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이런 주장들은 노동계급이 아직도 자본주의에 도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둘러싼 논쟁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떤가? 새로운 ‘프레카리아트’는 존재하는가? 노동 환경은 얼마나 바뀌었고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최근 상황에는 연속성과 변화가 모두 있다. 첫째로 한국 노동자의 절반은 여전히 정규직으로 고용돼 있다는 점을 봐야 한다. 올해 3월 현재 정규직은 전체 임금 노동자의 51.5퍼센트이고, 비정규직의 21.3퍼센트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상시 고용된 상용직이다.
물론, 정규직화 요구는 어느 때보다 커졌다. 이는 고용불안과 일자리에 관한 두려움이 커졌음을 보여 준다.
현재의 노동자들, 특히 청년 노동자들이 왜 두려워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엄연한 사실들이 많다. 한국에서 20~24세 청년 실업률은 정부 공식 통계로만 8퍼센트다. 더구나 실질적인 체감실업률은 이것의 4.3배에 달한다는 통계도 발표됐다.
취업자 구조에도 변화가 있었다. 지난 10여 년간 한국에서 기간제 일자리가 92만6천 명에서 1백98만9천 명으로 두 배 이상 뛰었다. 기간제가 전체 비정규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증가해 24퍼센트나 된다.
상대적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파견· 용역 노동자도 두 배 가량 증가했다.
그런데 이런 노동자들의 다수는 아주 불안정한 단기·일용직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된 상용직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간제의 59.6퍼센트, 파견직의 66.2퍼센트, 용역직의 61.6퍼센트가 여기에 해당한다.
작업장에 임시직이나 파견직을 도입하는 것의 한 가지 효과는 불안정성을 높이는 것인데, 이 효과는 임시직·파견직뿐 아니라 기존의 정규직에게도 해당한다.
그러나 파견 노동자로 직접 고용 노동자를 대체하는 데는 한계도 있다. 노동자들에게서 최대한 얻어 내려면 고용주들은 자신들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교육받은 노동자들이 필요하다. 경제 위기 때마저도 많은 고용주들이 잘 훈련받은 숙련 노동자를 보유하려고 애쓴다. 게다가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을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비정규직으로 고용해서는 수 년~십수 년 씩 일을 시키기도 한다. 오랫동안 그 일을 해서 숙달된 노동자를 해고하고 새로운 노동자를 다시 교육시키는 것은 자본가에게도 손해이기 때문이다.
제조업
더는 정규직 일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더불어 이제는 “진정한” 일자리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진정한 일자리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제조업이나 숙련 육체 노동을 생각한다. 이 직종은 한때 노동계급 투사를 많이 배출했던 곳으로, 예를 들면 자동차 공장, 금속산업이 있다.
한국에서 제조업의 고용 비중이 축소되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이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1970년 15.9퍼센트를 기록한 이래 꾸준히 성장해 지난해엔 27.6퍼센트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말은 제조업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 줄어들었지만(규모로만 보면 제조업 노동자 수는 1980년대보다 1백만 명 넘게 늘었다), 각각의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더 강해졌음을 뜻한다. 서비스업으로 분류되는 많은 직종에도 전통적 노동계급 직종이라고 여길 만한 것들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버스·철도 노동자, 우체국 노동자, 배달 노동자 등이 있다.
그러나 변화도 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노동자 조직의 중요한 부위로 떠올랐다. 유럽이나 이집트에서도 교사, 강사, 공무원, 보건 노동자 등이 파업에 중요한 일부였다.
자본주의는 역사 내내 끊임없이 스스로 변해 왔다. 끊임없는 이윤 추구 압박에 자본가들은 새로운 산업과 기술에 투자하고, 이에 따라 노동계급의 구성이 변한다.
이처럼 자본주의 내 변화로 말미암아 노동의 성격, 즉 노동의 종류와 방식이 계속해서 바뀐다. 이런 변화를 보며 지배계급과 일부 좌파들은 계속해서 체제가 상상 이상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대체로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 사상이 낡았다는 주장과 붙어 다닌다.
자기 해방
그러나 자본은 전능하지 않다. 자본은 어디에서나 저항에 부딪힌다. 스페인, 그리스, 중동, 영국에서 말이다. 세계화 덕분에 고삐 풀린 다국적 자본들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세계를 누빈다는 주장과는 달리, 대다수 다국적 기업들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국내 시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해외 판로 개척과 국제 금융 거래는 비교적 쉬워졌을지 몰라도 생산 이전은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과정이다.
대기업들은 자신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해 자국 정부의 지원과 보호에 기대기도 한다. 자본가들이 실제 하는 행동을 보면 자본을 해외로 이전시키겠다는 위협은 흔히 침소봉대다. 의미있는 해외 이전이 일어나는 부문, 예를 들어 자동차 산업에서 자본가들은 자본과 함께 투쟁도 옮겨 갔음을 깨닫는데,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화하기 때문이다.
노동 세계의 변화를 둘러싼 주장이 새롭지 않듯이, 불안정 노동에 관한 주장도 새롭지 않다. 지난 10여 년간 비정규직 전투는 반복해서 일어났다. 예를 들어, 현대차를 비롯한 제조업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최근에도 강력한 싸움을 벌였고, 올해엔 청소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임금 인상을 따냈다.
‘불안정’ 노동자들이 독특하고 독립적인 집단을 형성했다는 주장에는 그 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과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주장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말이 안 된다. 애초부터 두 집단 사이에는 항구적 분할은 없다. 많은 노동자들은 한때는 비정규직을 얻을 것이고, 또 다른 때에는 정규직 고용 계약을 할 것이다. 경기 침체 때는 공공 서비스가 대폭 삭감되면서 모든 노동자들의 지위가 어느 정도 불안정해질 수 있다.
두 가지 함정
그러면 좌파는 불안정 노동자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
첫째는 불안정 노동자나 새로운 산업의 노동자는 조직할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이다.
하지만 공공노조를 비롯한 일부 노조들은 청소 노동자들을 조직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했고 싸워서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어떤 부문의 노동자라도 조직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일부 민주노총 지역본부나 일반노조 등은 다양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금호타이어 노조 등은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따내기도 했었다.
활동가들은 노조가 없는 작업장과 새로운 산업 부문을 조직할 방안을 계속해서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프랑스의 최초고용계약법 반대 투쟁이나 스페인의 ‘분노한 자들’ 운동 같은 청년 노동자들의 투쟁은 거대한 저항운동과 파업을 촉발하고 여기에 노동계급의 다양한 부문을 끌어들이고 고무할 수 있다.
그러나 둘째 위험도 있다. 바로 새로운 ‘불안정’ 노동자만을 조직화할 가치가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는 기존 조직 노동자들에 대한 깊은 회의를 반영한다. 물론 노조는 움직임이 둔할 수 있다. 특히 노조 상층 간부층이 오랫동안 형성된 곳에서 그렇다.
그러나 올해 그리스, 튀니지, 이집트에서는 대중파업이 정부를 뒤흔들고 독재자를 몰아냈다. 노동자들은 생산의 핵심이기 때문에 사회적 힘이 있다. 조직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자본을 멈출 수 있는 힘이 있고, 그러면서 지배계급에 맞선 투쟁에서 실업자와 학생 같은 다른 집단을 이끌게 된다.
핵심은 노동자들 사이의 단결을 구축하는 것이다. 전체 노조 운동이 임시직, 저임금, 불안정 노동에 맞선 전투를 벌이도록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단결을 구축해야 한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탓에 노동계급의 힘이 사라졌다는 관념을 거부해야 한다. 새로 등장한 미조직 노동자의 힘이든, 정규직 조직 노동자의 힘이든 말이다.
이 글은 영국의 반자본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 리뷰》에 실린 글을 한국 상황에 맞게 번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