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낸 ‘희망버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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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희망버스 투쟁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냈다. 남아 있는 한진중공업 해고자 94명 모두가 공장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받았고,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 위에서 내려와 3백9일 만에 살아서 땅을 밟았다.
이것은 희망버스의 승리고, 우리 모두의 승리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살리고 한진중공업 민주노조를 살린 게 희망버스입니다. 잊지 맙시다! 오늘부터 새로운 시작이고 출발입니다.”
노동자들은 많은 것을 얻어냈다. 1년의 유예기간과 퇴직금·학자금을 따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해고 전 근속년수를 인정받았고 유예기간 동안 생계비도 받게 됐다. 고소·고발과 손해배상 청구도 최소화하기로 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을 구속하려던 검찰의 시도도 보기 좋게 좌절됐다. 심지어 한나라당 홍준표조차 ‘눈치 없는 검찰’을 비판했다.
이 때문에 경총은 “기업의 정리해고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번 성과로 인한 대중의 사기 진작과 다른 작업장에 미칠 파장을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한미FTA와 희망버스라는 두 가지 전선에서 싸우기가 곤혹스러운 처지였다. 그래서 한진중공업 최종 교섭엔 청와대 관계자까지 직접 참가했다. 지난해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기륭전자·동희오토 투쟁이 승리한 것과 비슷한 사례다.
청와대
사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사태는 한진중공업 사측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사측은 2월 14일 1백70명을 정리해고했다. 노조는 이에 맞서 지난해 12월 20일부터 시한부 파업 등을 시작했고, 올해 2월 26일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파업은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채길용 집행부가 생산에 직접 타격을 주지 않는 ‘이상한 파업’을 조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측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비정규직을 동원해 조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노조 지도부는 ‘쌍용차처럼 강력히 싸우면 패배한다’며 조업을 막고 선박을 점거하길 회피했다. 비정규직을 노조로 조직하며 연대하려 하지도 않았다. 안타깝게도 전투적인 현장 활동가들도 노조 지도부를 강력히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길 주저했다.
그러는 동안 적잖은 노동자들이 무력감에 빠져 파업 대열에서 이탈했다. 배가 완성되면서 비정규직도 해고됐다. 노조 지도부는 소득도 없는 교섭에 매달리며 이를 막지 못했다. 암담한 상황에서 노동자 수백 명이 희망퇴직으로 공장을 나갔다.
1월 5일, 상황을 지켜보던 김진숙 지도위원은 2003년에 김주익 열사가 목숨을 끊었던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그러나 채길용 집행부는 김 지도위원의 고공 농성이 “교섭을 어렵게 한다”며 불편해 했고, 급기야 “노동자들의 등에 칼을 꽂는” 배신적 타협을 하고는 업무 복귀를 선언했다. 1차 희망버스가 감동적인 연대의 꽃을 피우고 사회적 지지가 넓어지던 바로 그때, 오히려 찬물을 끼얹으며 사측·정부에 투항했던 것이다.
그러나 희망버스 기획단은 단호하게 채길용 집행부의 배신을 비판하며 2차 희망버스에 시동을 걸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경이로운 투지가 노동자들의 행동을 대신할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던 상황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응원한 것은 바로 희망버스였다.
희망버스는 ‘연대 투쟁이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제기했다. 그리고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가능하다’고 외쳤다.
희망버스는 이명박 정부의 친재벌 정책에 분노하고 불안정한 일자리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이 투쟁은 연대성이 약화된 노동조합 운동의 공백을 메우며 순식간에 전국적 운동으로 부상했다. 1차부터 5차에 이르기까지 연인원 3만여 명이 버스에 올랐다.
‘피도 눈물도 없는 더러운 세상’에 대한 분노가 희망버스로 결집했다. 노엄 촘스키 등 세계적 저명 인사들과 단체들까지 희망버스에 찬사를 보내고 환호했다. 이명박 정부와 지배자들은 이 놀라운 힘에 위협을 느꼈다.
위협
경찰은 물대포를 쏘고, 무차별적으로 참가자들을 연행하며 불씨를 꺼뜨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희망버스가 낸 집회신고는 모조리 반려됐다. 두 명이 수배를 당했고, 4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소환장을 받았다. 우파들은 ‘훼방버스’, ‘절망버스’라는 비난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송경동 시인은 4개월의 수배생활까지 견디며 투지를 불태웠다.
한진중공업 사측이 국회 권고안 합의 이후에도 계속 버티던 상황에서도 희망버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결국 11월 26일 6차 희망버스를 앞둔 상황에서 조남호는 무릎을 꿇었다.
따라서 “야당의 적극적 지원”이나 “민주노동당의 적극적인 [야권]연대 전략”이 승리의 비결이라는 〈민중의 소리〉의 평가는 설득력이 없다. 조남호 청문회를 만들고 지지 여론을 확대한 것도, 민주당 등까지 희망버스에 동조하게 만든 것도, 바로 대중 스스로의 행동, 연대 투쟁의 힘이었다.
그리고 이런 힘을 결집시키고 열정과 자발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끈 희망버스 조직자들의 민주적 리더십도 큰 몫을 했다. 진보정당·민주노총 지도자들이 투쟁과 연대 건설보다는 선거·국회에서 민주당과의 공조에 치중하면서 생긴 공백을 희망버스가 메워 줬던 것이다.
희망버스는 경제 위기 시기에도 얼마든지 강력한 연대를 조직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는 진정한 ‘희망’을 보여 줬다. 이번 승리는 지난 몇 년간 조직 노동자들을 괴롭힌 쌍용차 트라우마, 즉 ‘전국적 연대는 불가능하고 강력한 투쟁은 고립되기 십상’이라는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었다. 물론, 앞으로 조남호가 뒤통수를 치며 약속을 번복하지 못하도록 강제할 한진중공업 노조의 투쟁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지금 재벌·기업주 들의 일방적인 고통전가에 대한 사회적 분노는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이 때문에 정부·여당은 최근 주간연속2교대제 시행과 비정규직 처우개선안 등을 내놨지만, 이들은 동시에 이런 양보 제스처가 부를 수 있는 투쟁의 분출을 막고 기업주들의 이익을 지켜야 하는 모순된 처지에 놓였다.
이런 상황과 이명박의 레임덕은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래서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에는 6년 만에 최대 규모인 4만 명이 쏟아져 나왔다. 작업장 밖에서 가해진 정치적 자극이 노동자들의 사기와 자신감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 것이다.
지금 희망버스 기획단은 “이제 한 정거장을 지났을 뿐”이라며 “1퍼센트에 맞서 모든 이들의 권리와 삶을 지키기 위해 계속 달릴 것”이라고 밝혔다.
한진중공업에서 협상이 타결된 날, 쌍용차 해고 노동자의 아내가 또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 벌써 19번째 죽음이다. 이 죽음 앞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은 “희망버스의 연대 행동이 쌍용차로 향해 죽음의 행렬을 끝내야 한다”고 했다.
희망버스 투쟁은 앞으로도 계속 전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조직 노동자들은 위축돼 있던 근육을 풀고 연대와 투쟁을 확대해야 한다. 이윤 체제의 작동을 마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현실화하며 ‘1퍼센트’를 위한 고통전가에 맞서는 투쟁에 주역으로 나서야 한다.
특히, 새롭게 급진화하며 희망버스와 한미FTA 저지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청년·학생 들은 앞으로도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활동가들은 이런 청년들의 활기와 자신감을 노동자 투쟁으로 실어 나르며 단결을 도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