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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에 대해

6월 4일 국민모임, 노동당, 노동·정치·연대, 정의당 등 4개 진보세력 대표들이 9월까지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반새누리당-비새정치연합’을 기치로 걸고 이렇게 결의했다. “양당이 결코 대변하지 않은 국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진보적 정권교체로 나아가겠습니다.”

ⓒ사진 출처 노동당

연말정산, 성완종 게이트, 당청 분열, 무능하고 무책임한 메르스 대응 등에서 드러나듯이 박근혜 정권은 심각한 정치 위기를 겪고 있다. 정치 위기의 근저에는 경제 위기, 동아시아에서의 미중 간 긴장 고조와 한국 지배계급의 딜레마, 아래로부터의 저항 등이 놓여 있다. 지배계급조차 박근혜 정권의 문제 해결 능력을 심각하게 의심하고 있다.

한편, 새정치연합은 이로부터 반사이익도 못 누릴 정도로 불신과 냉소의 대상이 됐다. 새정치연합은 새누리당과 각을 세우지만, 그 당의 주된 기반이 (비록 비주류일지라도) 자본가 계급이기 때문에 노자 대립에서 흔히 자본가 계급을 지지하곤 했다. 문재인은 대표 취임 직후 대한상의 회장 박용만을 만나 “[새정치연합은] 반기업 정당이 아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새누리당과 야합해 공무원연금을 대폭 삭감함으로써 이 말을 증명했다.

노동운동 안에는 이런 상황을 돌파하려는 두 가지 흐름이 존재한다. 하나는 민주노총 총파업과 정치적 항의 운동 등으로 대표되는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주의 정당을 재건해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정권을 교체하자(“정치적 대응”)는 흐름이다.

‘노동자연대’는 개혁주의 정당 재건론에 종파적으로 대하지 않으면서도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을 고무하는 것을 크게 강조해 왔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금으로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에 더 신경 써야 한다. … 박근혜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는 기본적인 동력도 먼저 계급투쟁에서 찾아야 한다. 노동자 연대를 가로막는 각종 분열 이데올로기와 다계급적 민중주의 정치를 반대하고 반자본주의적·반제국주의적 대안을 발전시키는 것이 관건이다.”(김인식, ‘국민모임의 “새로운 정치세력 건설” 제안에 대해’, 〈노동자 연대〉 142호)

그러나 “지배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서로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 피해를 보는 지루한 전투들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선 중간계급의 일부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흐름이 성장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견해와 바람을 대변한다며 계급을 가로질러 국민적 또는 민중적으로 단결하자고 제안하는 포퓰리즘 경향이다.”(최일붕, ‘[2014년]상반기 투쟁을 돌아보며 주의할 것들’, 〈노동자 연대〉 137호)

노동운동 안에서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 이 예측이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네 진보 정치 세력들의 새 정당 건설 선언이 최신 사례다. 계급투쟁보다 “정치”적 대응을 통해 현 상황을 돌파하려면 분열돼 있는 진보 정치 세력이 결집해야 한다는 생각이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의 바탕이다.

새 정당의 기반과 강령

현재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의 기반은 네 세력이다 — 국민모임, 노동당(내 진보결집 지지 세력), 노동·정치·연대, 정의당.

(1) 국민모임: 지난해 12월에 출범한 국민모임은 진보적 지식인(김세균 교수로 대표되는)과 부르주아 포퓰리스트 정치인(정동영으로 대표되는)의 결합체였다. 국민모임은 부르주아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가세로 진보적 지식인들로만 한정돼 있었으면 얻지 못했을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국민모임은 상이한 전망을 놓고 그 내부에서 갈등을 겪었다. 새정치연합에서 이탈한 부르주아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대부분 노동자 진보 정당 건설 프로젝트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정치연합과 진보 정당 사이의 ‘오솔길’을 찾았다. 4월 재보선에서 정동영이 패배한 뒤 이들은 대부분 국민모임에서 철수한 듯하다(〈레디앙〉 2015년 6월 4일 자). 그 결과 이제 국민모임은 진보적 지식인들과 진보적 문화예술인들의 그룹이 된 것 같다.

(2) 노동당: 노동당은 한국 판 좌파 개혁주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노동당은 당의 전망을 놓고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나경채 대표와 김종철 전 부대표가 주도하는 ‘진보결집 전국당원모임’은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을 지지한다. 옛 사회당 계열과 진보신당 독자파 출신이 연합한 ‘신좌파당원회의’는 노동당 독자 노선을 옹호한다. ‘당의 미래’는 선 노동당 강화 후 진보 정치 연대연합을 주장하는데, 현 시점에서는 노동당 독자 노선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2년 진보신당과 사회당의 통합 이후 노동당은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그룹들이 당내 상시 분파로 존재해 거의 사사건건 갈등을 빚어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2년 대선이었다. 노동당(당시 당명은 진보신당) 대표단과 전국위원회는 김소연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옛 사회당 계열은 이 결정에 반발했다. 김순자 후보가 노동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김종철 전 노동당 부대표는 이런 노동당의 상태를 “늪”으로 묘사했다.(〈레디앙〉 2015년 1월 15일 자)

그러나 이런 갈등이 정치적 좌우 대립에서 비롯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대립 쟁점이 압도적으로 정당 통합이냐 독자 노선이냐에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가령 진보결집 쪽과 독자 노선 쪽 둘 다 공무원연금 개악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내놓지 않았다. 노동당의 공식 입장도 공무원연금 개악에 두루뭉술한 태도를 취할 뿐 분명하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 내부의 복잡한 역학力學 관계 때문에 노동당은 단일한 입장과 세력으로 진보 정치 재편 과정에 참여하지는 못할 것 같다. 6월 28일로 예정돼 있는 당대회가 당의 진로에서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3) 노동·정치·연대: 2012년 통합진보당이 분열하면서 민주노총은 더는 특정 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 그런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노동조합을 분열시킬 위험이 있으므로 바람직하지도 않다.

‘노동자연대’는 이런 현실을 감안해 민주노총이 ‘진보/좌파 다원주의’ 정치 방침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민주노총의 투표 방침은 각 선거의 구체적인 조건을 따져 결정돼야 할 것이다.)

이런 민주노총 사정 때문에 주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결성한 정치 단체가 노동·정치·연대다.(‘노동자연대’도 이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초대를 받아 논의에 참여했다.) 노동·정치·연대는 2012년 통합진보당 부정 선거 사태 이후 분열하고 약화된 진보 정당을 재편·복구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노동·정치·연대는 새 정당이 노동조합 기반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통로가 될 듯하다.

(4) 정의당: 새정치연합에 대한 환멸 증대, 부르주아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이탈로 인한 국민모임의 위상 약화, 노동당의 내분, 노동·정치·연대의 노동조합 대표성 불충분 등 때문에 정의당이 진보 정치 재편에서 주도권을 쥐게 될 것 같다.

정의당은 서구식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지향한다. 천호선 정의당 대표는 “대한민국 원내정당 사상 최초로 사회민주주의를 천명하고 실천하는 정당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참세상〉 2015년 1월 15일 자).

정의당 지도부는 정당과 운동을 예리하게 분리시킨다. 천호선 대표는 “탈운동권 진보”가 “진보 정치의 현대화”라고 말했다. 노회찬 전 의원은 “정치와 정당은 선거에 나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라며, 이를 두고 “진보의 세속화”라고 불렀다. 심상정 의원은 “헌법 안의 진보”를 주장했다.

전형적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근접해 가고 있는 셈이다. 영국 노동당도 언제나 계급투쟁과 “정치 행동”(노동당에 투표하기)을 대립시켰다. 그래서인지 이번 4자 공동 선언에서 애초 노동당이 제안한 “운동 정당 지향” 문구가 최종 빠졌다.

또, 노동당이 애초 제안한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 계승” 문구도 최종 빠졌고, “무상보육·무상의료·무상교육” 요구는 그보다 더 모호한 “공공보육·공공의료·공공교육” 요구로 대체됐다.

한편, 4자 대표자들은 옛 진보당의 신당 참여를 배제했다. 2012년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 사태 이후, 한국의 특수한 정치 상황을 반영한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동거가 결정적으로 끝났음을 재확인하는 결정인 듯하다.

새 정당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전술

새 정당의 전망은 아직 유동적이고 강령이 확정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현재 진보 정치의 세력 관계상 향후 재편될 진보 정치는 사회민주주의가 유력할 것 같다. 즉, 2000년대 민주노동당 같은 좌파 개혁주의 정당에는 못 미칠 개연성이 크다.

군부독재 정권의 후예들과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정당이 지배해 온 한국 정치 현실을 감안하면, 이런 정치 프로젝트에도 진보성이 얼마간 있다.

그럼에도 새 정당의 진보성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금세 실망을 낳을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한국의 전투적이거나 선진적인 노동자들에게 새 정당이 최선의 정치적 대안이기에는 많이 불충분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새 정당에 참여하는 것은 선진 노동자들과의 접점을 잃을 수 있다. 또, 글머리에서 언급했듯이 ‘노동자연대’는 현 시기 우선순위를 계급투쟁에 맞추고 있다. 이런 이유로 ‘노동자연대’는 새 정당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노동·정치·연대에서도 탈퇴하겠다고 노동·정치·연대 지도부에 알렸다.

물론 훨씬 더 광범한 노동자 대중은 대안 부재 때문에 선거에서 새 정당을 지지할 수 있다. 그래서 새 정당에 초좌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스스로를 있으나마나 한 조직으로 만들 것이다. 일부 좌파들은 개혁주의 정당을 폭로하는 것을 거의 유일한 대응책으로 내놓는다. 그러나 이런 방식만으로는 개혁주의 정치가 노동자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에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다. 사회주의자들은 개혁주의 정치를 지지하는 노동자 대중을 우리 편으로 끌어오기 위한 전술들, 특히 공동전선을 구축할 줄 알아야 한다. 정의당 지도부가 정당과 운동을 예리하게 분리시키고 있지만, 이에 동의하지 않을 세력도 새 정당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과 공동전선을 맺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거에서 더 좌파적인 대중 정당이 부재한 가운데 새 정당이 새누리당이나 새정치연합 등 부르주아 정당과 맞붙는다면 새 정당에 (비판적) 투표를 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