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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가 사회주의라는 신화와 현실

피델 카스트로가 이끈 쿠바 혁명은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인구 8백만 명의 작은 섬나라가 전 세계에 군사적·경제적 힘을 오만하게 과시하던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고 미국이 선호하는 자국 지배자를 거꾸러뜨릴 수도 있음을 보여 준 것이기 때문이다.

집권 3년째인 1961년 카스트로가 이 혁명에 ‘사회주의’의 이름을 붙이면서, 한 세대의 급진주의자·반제국주의자들은 쿠바에서 다른 사회로 가는 길이 열렸다고 여겨 크게 고무됐다.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체 게바라는 오늘날까지도 반항과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21세기 사회주의’를 자처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죽을 때까지 카스트로와 돈독한 우애를 과시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쿠바는 황갈색 군복을 입은 게릴라가 다스리는 나라이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누릴 수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북한과 함께) ‘지구상의 마지막 사회주의 국가’라는 수식어는 쿠바를 일컫는 흔한 표현이다.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과연 카스트로는 게릴라 혁명으로 노동자·민중이 해방되는 지상 낙원의 잠재력을 보여 준 것인가?

독재자의 몰락: 게릴라 투쟁과 노동자 총파업

피델 카스트로, 아르헨티나 출신 의사 체 게바라가 이끈 게릴라 82명은 1956년 12월 12일 쿠바 해안에 상륙했다. 그로부터 만 2년 후인 1958년 12월 31일 부패한 친미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도망치면서 쿠바 혁명은 승리를 거두었다.

게릴라 투쟁은 고난으로 가득했다. 피델 카스트로가 1953년 몬카다 병영을 습격한 날짜를 따 이름 붙인 게릴라 조직 ‘7·26 운동’은 조직원이 가장 많을 때도 수백 명을 넘지 않았고, 가장 적을 때는 20명이 채 안 됐다. 이들이 가장 많은 시간 한 일은 정부군을 피해 행군(도주)하는 것이었다. 훈련 수준은 보잘것없었고, 주로 산지 주변의 농민들이었던 신병들은 종종 탈영했다.

완전히 열세였던 이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게릴라 혁명의 신화 때문에 간과되곤 했던) 다른 요건들이 중첩된 결과였다.

바티스타는 1952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지만, 노동자 대중의 심각한 반발에 직면했다. 쿠바 민중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수십 년간 계속된, 미국과 친미 지배자들의 지배에 진력내고 있었고, 몇 차례 중요한 저항으로 그 분노를 표출했다. 급진적 학생운동 조직이었던 디렉토리오 레볼루시오나리(‘혁명적 간부회’라는 뜻, 이들은 1933년 대중 파업으로 쿠바에서 노동자 소비에트가 잠시 건설됐을 때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소속 활동가들은 바티스타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특히 외화 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대부분 미국을 상대로 한) 설탕 수출이 1953년부터 위기에 빠지자, 1955년 노동자 50만 명 이상이 대중 파업을 일으켰다. 당시 쿠바는 라틴아메리카 전체에서 노동조합 조직률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공산당 기층 활동가들과 소수 트로츠키주의자 등 급진 좌파들이 노동조합 기층에서 적극 활동하고 있었던 만큼, 파업의 기세는 거셌다.

그러나 부패한 친 바티스타 성향의 노총 위원장 에우세비오 무얄이 배신한 덕분에 바티스타 정부는 파업 조직을 파괴할 수 있었고, 이듬해인 1956년에 파업은 대패로 끝났다. 수치스럽게도, 스탈린의 민중전선 전략에 따라 바티스타 1기 정부(1940~1944년) 시기부터 입각해 있었던 공산당 지도부는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를 사실상 외면했다.

피델 카스트로, 1965년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에 상륙한 1956년 말은 파업 패배의 여파로 탄압이 혹심하던 때였다. 카스트로는 게릴라 상륙에 맞춰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기를 기대했지만, ‘7·26 운동’을 기다린 것은 정부의 가혹한 공격이었다. 82명 중 55명이 상륙 직후 사망하거나 사로잡혔다.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두 번에 걸친 노동자 총파업이었다. 1957년 8월 지도적 노동운동가 프랭크 파이스(‘7·26 운동’과 동맹을 맺은 활동가이기도 했다)의 죽음에 분노해 노동자 총파업이 벌어져 대승을 거뒀다. 이듬해인 1958년 4월 벌어진 총파업은 그만큼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바티스타 정부를 고립시키고 반정부 세력들에 대한 지지를 확산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 때문에 게릴라 투쟁 지지도 늘었다. 당시 ‘공산주의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미국 지배자들은, 쿠바 국내에서 바티스타 지지 세력을 더는 발견하기 어려워지자 바티스타의 만행을 지원하는 데에 점차 소극적이 됐다.

그러나 쿠바 상륙 이전부터 토지 개혁, 부패 종식, 헌정 회복 등을 내세운 민족주의자 카스트로는 노동자 운동(과 공산당)을 심각하게 불신했고, 기껏해야 게릴라 투쟁의 보조 수단이라 여겼다. 카스트로와 함께 게릴라 투쟁을 이끈 체 게바라는 공산주의 혁명가를 자처했지만, 노동자들의 자력 해방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제1 원칙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대중 파업으로 무얄을 축출하고 노총 위원장이 된 데이비드 살바도르는 전투적 좌파였지만, 노동운동은 ‘전 인민을 대표하는 투쟁’의 보조자로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7·26 운동’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했다. 노동운동 내 급진좌파 조직은 바티스타 정부의 탄압으로 재기 불능의 타격을 입어, 카스트로에게서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을 건설할 수 없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분명 바티스타를 끌어내리고 카스트로를 권좌에 올린 ‘보이지 않는 손’이었지만, 게릴라 투쟁의 지원 부대로 스스로 한계 지은 후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냉전의 장기말과 국가자본주의 쿠바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 없는 쿠바’를 맞이한 민중은 새 세상이 온 느낌을 받았지만, 쿠바를 둘러싼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대미 설탕 수출 산업에 의존하던 쿠바 경제는, 미국이 신생 ‘혁명 정부’를 흔들려 무역 봉쇄를 펴고 우파 쿠데타를 획책하면서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혁명 직후 피델 카스트로는 주요 강령이었던 토지 개혁을 통한 농업 집산화 대신 자영농 육성 카드까지 만지작거렸지만(이는 미국식 시장 자본주의 진영에 남겠다는 신호였다),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한때 강경 반공주의자였던 카스트로는 쿠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소련 편으로 급선회했다. 카스트로는 소련산 석유를 이용하려 미국계 정유 시설을 국유화했고, 소련과 군사협정을 맺었다. 이 때문에 불거진 대립으로 한때 미·소 간 핵전쟁 위기까지 치달았다(쿠바 미사일 사태).

1963년 흐루쇼프와 손 잡은 카스트로

열악해진 경제 상황을 돌파하고 공업화를 이루고자 카스트로가 선택한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강요해 수익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게릴라 투쟁 시절의 금욕주의적 구호들이 동원됐다. 급진화하던 노동자 운동은 체 게바라가 조직한 보안부대의 탄압에 직면했다. 노동조합은 국가 산하 기구로 전락했고, 카스트로가 재창당한 공산당은 노동자 투쟁의 도구가 아니라 국가기구를 운영하기 위한 도구가 됐다.

다른 하나는 혁명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국제 노동계급의 단결을 고무하는 방향이 전혀 아니었다. 교역국을 확보해 경제 고립과 소련에 대한 종속을 피하려는 것이 핵심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쿠바 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한 세대의 라틴아메리카 혁명가들이 노동자 운동과 무관한(데다 적대적이기도 한) 카스트로 식 게릴라 투쟁을 벌였고, 처참하게 실패했다. 체 게바라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급진주의자들이 정부군에 살해당했고, 한 세대의 노동자·민중 운동이 급진 사상으로부터 단절됐다.

이후 1968~70년 설탕 ‘대수확’ 시기에도 독자적 공업화를 위한 잉여 생산물을 획득하지 못한 쿠바 경제는 소련과 동구권에 설탕을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입하는 위치로 확정됐다. 국내 경제는 소련 식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조직되고, 대외 정책은 ‘라틴아메리카에 혁명을 확산’하는 것에서 소련의 대외 정책에 종속되는 것으로 고착됐다. 비록 카스트로 자신은 1971년 칠레 아옌데의 집권을 찬양하고 1970년대 후반 중앙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반란을 고무하는 발언을 했지만, 이는 쿠바와 동구권의 이해관계를 감안한 것이었다.

시장 자본주의로의 전환

1986년 쿠바에 대한 동구권의 경제 지원이 중단된 데 뒤이어 소련이 붕괴하면서, 카스트로는 “평화 시대의 특별한 시기”를 선포했다. 카스트로는 냉전 해체 후 군 출신 인사들을 정부 요직에 더 많이 배치해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일본계 경영 컨설턴트를 초청해 구조조정을 시행하고 해외 자본과의 합작을 허용하고 관광 산업을 육성하는 등 시장 자본주의 체제와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1당 체제를 유지하면서 시장 자본주의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중국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동시에 카스트로는 미국의 무자비한 경제 봉쇄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빈곤으로 인한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이른바 ‘교정’ 과정을 시작했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을 연상시키는 강도 높은 채찍질로 노동자 서민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실업률과 빈곤율이 폭등했다.

카스트로 정부가 혁명 직후부터 노동력 육성을 위해 의식적으로 발전시킨 교육과 의료 또한 이 “특별한 시기”를 겪으면서 심각하게 악화했다. 쿠바 노동자들의 문맹률은 여전히 낮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고등교육 진입 기회는 사실상 차단됐다. 의사 4만 명 이상이 ‘외화 벌이’를 위해 외국으로 파견되고 국내 의료 설비와 의약품은 외국인 ‘의료 관광’에 동원되면서 서민들의 이용 기회는 크게 줄었다.

2000년대 초 몇 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곳곳에 좌파 개혁주의 정부가 등장하면서 쿠바도 조금씩 그 혜택을 보는 듯했다. 특히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수입할 수 있었던 것은 쿠바 경제에 일시적으로 중요한 도움이 됐다. 그러나 그 성과 역시 쿠바 내에서 불균등하게 배분됐다.

그나마도 세계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서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비슷한 시기 차베스가 사망하면서 쿠바 상황도 다시금 어려움에 빠졌다. 피델 카스트로가 공식 은퇴한 후 권력을 승계한 라울 카스트로가 차베스가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바마와의 협상에 나선 것은 이 때문이다.

오늘날 쿠바의 노동자 서민들은 심각한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극도로 억제돼 있다. 예나 지금이나 쿠바는 어떤 의미에서도 노동자들이 스스로 해방된 사회주의가 아니다.

제도적으로 조장된 인종차별·성차별 문제도 심각하다. 쿠바 백인 63.8퍼센트가 직업이 있는 반면, 흑인들 중 직업이 있는 사람은 34.2퍼센트밖에 안 된다. 혁명 직후부터 시작된 성소수자 탄압 역시 악명 높다.

쿠바 노동계급은 위대한 투쟁으로 독재자를 물리쳤지만, ‘전체 민중을 대표한다’는 게릴라 투쟁의 부차적 위치에 머무르면서 투쟁을 더 발전시킬 기회를 잃었다. 카스트로와 그의 동료들은 노동자들의 자력 해방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악용해 자본주의 국가를 통치했다.

경제 봉쇄가 해소되고 시장 자본주의로 전환하면서 쿠바에서도 노동자 계급이 성장할 조짐이 보인다. 노동자들이 수십 년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노동계급 고유의 투쟁과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쿠바에 이제껏 없었던 진정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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