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 ─ 진정한 변화를 위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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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의 지도자이자 지난 반세기 동안 쿠바 국가의 수반이기도 했던 피델 카스트로가 사망한 후(관련 기사: 본지 187호 ‘피델 카스트로(1926~2016): 제국주의에 맞선 투사이자 억압적 국가의 지배자’), 쿠바 혁명에 대한 재조명이 이어지고 있다.
우파들은 ‘사회주의’ 쿠바를 증오한다. 그들은 “카스트로의 가장 큰 기여는 혁명과 현실의 머나먼 거리를 일깨운 것”(〈조선일보〉)이라며 쿠바 혁명과 사회주의 이상을 싸잡아 조롱했다. 야만적이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도널드 트럼프는 “총살형, 절도,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가난, 기본권 부정[이라는 유산을 남긴] … 야만적 독재자가 죽었다”고 떠들었다.
자본주의의 야만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런 조롱에 분노할 것이다. 쿠바 혁명은 냉전의 한복판에서 세계 최강대국이 후원하는 독재자를 몰아냈고,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의 주역 중 하나였던 체 게바라는 오늘날까지도 저항의 영웅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제국주의에, 오만한 지배자들에 맞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웅전 이상이 필요하다. 쿠바 혁명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쿠바의 특수성, 카스트로가 이끈 투쟁의 성격과 목표, 혁명으로 탄생한 체제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종속
쿠바는 라틴아메리카 최후의 스페인 식민지였고(1898년에 독립), 스페인이 떠나자마자 미국 제국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쿠바 최초의 헌법은 미 군정사령관 사무실에서 작성됐으며, 거기에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위협받을 시에는 언제든 쿠바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조항이 들어갔다.
쿠바는 미국의 설탕 농장으로 전락했다. 쿠바 전체 노동 인구의 41.5퍼센트가 설탕 산업에 종사했고, 전체 농토의 83퍼센트가 설탕 생산에 쓰였다. 설탕 산업의 63퍼센트는 미국계 자본의 소유였고, 생산된 설탕의 80퍼센트는 미국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쓰였다. 다른 산업은 모두 저발전 상태로 묶였고, 공산품 대부분은 미국에서 수입됐다. 쿠바 경제는 사실상 미국에 종속돼 있었다.
그래서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은 쿠바에 특히 끔찍한 타격이었다. 대부분 이런저런 방식으로 미국 자본의 ‘마름’ 노릇을 하던 쿠바 자본가들은 공황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자본가들이 이럴진대 노동자·농민의 처지는 말할 나위 없이 끔찍했다. 아사자가 속출했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쿠바 노동자들은 1933년에 총파업을 벌여 친미 독재자 제랄도 마차도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봉기는 급격하게 성장해 수도 하바나에는 노동자 평의회의 맹아라 할 만한 조직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봉기는 2년 후 처참히 패배했는데, 지도부를 장악한 쿠바 공산당(CCP, 나중에 카스트로가 만든 공산당(PCC)과는 다른 당이다)이 총파업을 주저앉히고, 마차도의 뒤를 이은 풀헨시오 바티스타와 타협했던 것이다. 스탈린의 민중전선 전략을 받아들인 쿠바 공산당은, 말로는 1933년 봉기의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강경 군부 독재를 추구한 바티스타를 ‘진보적 세력’이라 봤던 것이다. 공산당의 이 같은 잘못된 분석과 실천 때문에, 노동자 투쟁으로 궁지에 몰렸던 쿠바 지배자들이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장교 출신 친미 인사인 바티스타는 이후 노동자 투사 수백 명을 학살했고, 어용 노총 CTC를 만들어 노동운동을 통제했다. 노동계급은 분열되고 사기 저하돼 힘을 거의 잃어버렸다. 공산당은 바티스타 내각의 장관 두 자리와 CTC 지도부 자리를 얻었지만, 이를 지렛대 삼아 노동자 투쟁이 국가에 맞서는 것을 억누르는 구실을 했다. 대중의 신뢰를 잃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민족주의
저항이 분쇄됐지만 바티스타는 쿠바 사회를 ‘정상화’시킬 수 없었다. 세계적 경제 공황이 이를 허락치 않았다. 설탕 산업은 전쟁 특수로 조금씩 수출을 늘렸지만, 전반적으로 취약한 경제는 낙후한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다.
노동자·농민의 생활 수준은 열악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이들은 1년 중 6~7개월을 사실상 실업 상태로 보냈다. 3분의 1 가까이는 어떤 종류의 교육과 사회 보장도 받지 못했고,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1퍼센트가 채 못 됐다.
이들뿐 아니라 중간계급 지식인들도 바티스타를 깊이 증오했다. 이들은 쿠바 경제의 후진성에 절망했고, 미국 제국주의가 쿠바에 가하는 멍에를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정치적·경제적으로 독립하지 않으면 쿠바에 미래가 없다고 봤다.
그들은 쿠바를 개혁해 고통받는 민중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어 했지만, 노동자 대중이 직접 사회를 운영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의 민주주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하는 쿠바 공산당(CCP)은 친미 독재자 바티스타 따위와 유착하는, 도무지 믿지 못할 자들이었다.
카스트로는 바로 이런 층을 대변했다. 민족주의 정당인 쿠바인민당(정통주의)의 신진 정치인이었던 카스트로는 토지 개혁, 부패 척결, 헌정 질서 회복 등 온건한 요구를 내걸었다. 이때 카스트로는 쿠바 내 외국 자본을 몰수해 민중을 위해 쓰는 것에 반대하며 “자유로운 기업 활동과 자본 투자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수단으로 삼은 것도 노동자 대중 투쟁이 아니었다. C 라이트 밀스가 《들어라 양키들아》에서 지적했듯,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추구한 혁명은 “어떤 의미에서도 임금노동 대중 vs. 자본가의 투쟁이 아니었다.” 체 게바라는 자신을 모종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여겼던 듯하지만, 노동자 투쟁은 기껏해야 게릴라 투쟁의 보조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게릴라 투쟁은 그 자체로는 바티스타 군대에 완전히 열세였다. 게릴라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 일은 정부군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혁명에서 주도적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계급들이 허약하고 정치적으로 무기력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은 두 차례 총파업을 벌여 바티스타 정권의 발밑을 흔들었지만, 게릴라 투쟁의 보조 부대 구실을 하는 데 그쳤다. 도시의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바티스타 암살을 시도했지만, 외려 그들 자신이 몰살당했다. 1953년 설탕 수출량이 줄어 위기를 겪은 쿠바 자본가들은, 카스트로가 내세운 공업화와 자본 육성 계획에 공감해 (비밀리에) 카스트로를 지원했다.
거의 모든 사회 세력의 반발에 직면한 바티스타의 기반은 점차 사라져 갔고, 마침내 미국 제국주의도 그를 지킬 수 없게 됐다. 바티스타는 치욕스럽게 도망쳤다.
새로운 사회?
1959년 1월 1일 쿠바 민중은 ‘바티스타 없는 쿠바’를 맞았지만, 쿠바를 둘러싼 상황은 간단치 않았다.
미국이 신생 ‘혁명’ 정부의 숨통을 조여댔다. 냉전 시기에 미국의 뒷마당인 중남미에서 친미 정부가 몰락한 것 자체도 미국 제국주의에 좋지 않은 일이었으며, 쿠바 내 친미 자본가들이 도피하면서 미국 자본이 손해를 입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미국은 반(反)카스트로 우익 반군을 무장시켰고, 쿠바에 경제 제재를 가했다. CIA가 조직한 피그스 만(灣) 침공은 미국에 처참한 군사적 실패를 안겨 주고 정치적으로는 카스트로 지지만 높이는 역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경제 제재는 그 후 반세기 동안 쿠바를 짓눌렀고 강력한 족쇄로 작용했다.
해외 자본의 투자를 활성화해 공업화 재원을 확보하려던 카스트로에게 미국의 대응은 우려스런 일이었다. 카스트로는 혁명 직후 임금 인상, 주택임대료 대폭 감면, 전기·통신·의료 요금 인하, 교육 기회 확대 등 중요한 개혁을 단행했는데, 재원이 부족해 이를 거둬들이면 바티스타 몰락에 열광한 민중의 지지도 식을 터였다.
카스트로는 냉전 시대 전 세계 많은 국가 지도자들이 택한 길을 따랐다. 한 초강대국(미국)에서 멀어지자 다른 초강대국(소련)으로 다가간 것이다. 한때 공산당을 지독히 불신하던 반공주의자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사후적으로 자처하기 시작했다. 쿠바는 소련과 군사 협정을 맺고, 미국계 정유 기업들을 국유화해 소련산 원유를 정제했다. 이 때문에 불거진 대립으로 한때 미·소 간 핵전쟁 위기까지 치달았다.(쿠바 미사일 사태)
카스트로는 혁명 초기에 내세웠던 사기업 중심의 온건한 강령을 버리고, 강제적 집산화와 국가자본주의 계획 경제로 급선회했다. 혁명의 언어를 동원해 노동자들의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정당화했고, 비판과 저항은 규제됐다. 독립된 정치 활동을 조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한편, 카스트로는 제3세계 국가들에 혁명을 ‘수출’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쿠바와 같은 특수한 정치 상황이 아니고서야, 노동계급의 대중 투쟁과 유리된 (데다 때로 적대적이었던) 게릴라 투쟁은 처참히 실패하기 일쑤였다. 체 게바라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급진주의자들이 정부군에 살해됐고, 한 세대의 노동자·민중 운동이 급진 사상과 단절됐다.
결국 소련의 공식 위성국가가 된 쿠바는 공업화 계획을 포기하고 다시 설탕 수출에 의존하게 됐다. 공산당 지도자들의 사치와 특권, 관료의 지배 등 동구권 국가자본주의 국가마다 보였던 현상이 쿠바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단호한 반제국주의자였던 카스트로는 그 후에도 미국의 온갖 공격을 막아 내며 쿠바 민중을 위해 (진보적) 정책을 추진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다른 사회 체제와 다른 점은 부가 약간 더 공정하게 분배된다는 것이 아니다(사회주의가 아니라, 관료들이 지배하는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던 쿠바는 그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노동자 민중에 의해 운영되며 대중이 자신의 운명을 직접 개척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위로부터 선사되는 개혁으로 대체할 수는 없다.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은 1959년 쿠바 혁명이 미국의 콧대를 꺾은 것을 통쾌하게 기억한다. 또한 지난 반세기 동안 쿠바 민중들에 큰 고통을 안겨 준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온갖 보복 공격과 경제 제재였다고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쿠바 혁명이 ‘노동자가 생산수단의 작동자·운영자·소유자가 된 새로운 생산관계’를 지향한 혁명이 아니었다는 것, 진정으로 민주적인 사회는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방식으로만 건설할 수 있고 그런 사회는 여러 면에서 쿠바와 완전히 다를 것이라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한다.
쿠바 무상 의료의 이상과 현실
‘사회주의’ 쿠바의 가장 큰 성과로 알려져 있는 쿠바의 의료 체계는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혹독한 경제 제재에도 쿠바가 의사 1인당 환자 수를 미국의 3분의 1, 영국의 절반 수준으로 유지하고 제3세계 국가 1백여 곳에 의료진을 10만 명 이상 파견해 8천5백만 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한 것 등은 유례가 드문 성과였다. 이 때문에 쿠바는 세계보건기구(WHO)의 ‘만인을 위한 건강’이라는 선언을 현실화하려 노력하는 (거의 유일한) 국가로 비쳤다.
쿠바는 혁명 직후부터 공공의료 확충에 힘을 기울였다. 노동자·농민의 기초 건강을 보완하기 위해 공공의료 체계를 도입하고 1차 의료에 집중 투자했으며, 의료 설비뿐 아니라 최소한의 음식 배급, 주거 제공, 무상 교육 등으로 생활 조건 전반을 개선하려 했다. 소아과·산부인과를 육성해 영·유아 사망률을 크게 떨어뜨렸다.
이는 게릴라 투쟁의 근거지였던 시골의 현실에 영향 받은 것이었는데, 당시 농민들은 극도로 빈곤한 데다 의료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해 건강 상태가 최악이었다. 이를 개선하는 것은 공업화를 위해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것과 조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실현 과정에서 중요한 제약에 부딪혔다.
쿠바는 의약품과 의료 설비 생산에 필요한 공업 발전 수준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거의 상시적으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미국의 경제 제재 때문에, 냉전 시기 쿠바 의료는 소련의 지원 없이 유지될 수 없었다. 그러나 소련에서 수입되는 의약품은 실제 필요량을 충족하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질도 낮았다. 이 때문에 카스트로 정부는 1970년대부터 약초, 침술, 대안치료 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1986년에 동구권의 경제 지원이 중단되고 뒤이어 소련이 붕괴하면서 물자 부족은 더욱 심해졌다(소위 “특별한 시기”). 그리고 이 때문에 새로운 문제가 불거졌다.
동구권의 경제 지원을 대신할 ‘외화 벌이’를 위해 의사 수만 명이 외국으로 파견되면서 공공의료의 질이 상당히 하락했다. 그에 더해, ‘외화 벌이’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쿠바의 의료 체계는 민중을 위한 열악한 의료(“페소 의료”)와 외국인 의료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고급 의료(“달러 의료”)로 양분됐다. 의료 설비와 의약품이 “달러 의료”에 동원되면서 “페소 의료”의 개선은 더 더뎌졌다.
쿠바가 전 세계 인민에 의료를 무상으로 공급한 것은 단일 국가로서는 유례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림자도 있었다. 의료진 파견 여부는 쿠바(와 소련)의 외교 정책의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
쿠바 의료진의 지원을 받는 국가에서의 문제도 있었다. 쿠바가 2000년대 초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외화 소득을 얻을 때는 그곳 정부가 쿠바 의료진을 이용해 현지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과 해고를 부추기는 경우가 적잖았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에 맞서는 노동자 투쟁을 고무하고 연대해야 하지만 쿠바는 현지 정부와의 관계를 우선시했다.
쿠바 관료들의 통제와 차별 문제도 심각했다. 쿠바는 미국에 대비해 낮은 영·유아 사망률을 ‘체제 우월성의 증거’로 부각했는데, 경제 위기로 빈곤이 심화되는 상황에서도 영·유아 사망률을 낮게 유지하려 고위험 태아에 대한 낙태를 강제하기도 했다. 이 경우 산모의 선택권이 보장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인민은 접근할 수 없는 “달러 의료” 서비스를 공산당 고위 간부들이 사실상 자유롭게 이용하기도 했다.
쿠바의 의료는 좋은 개혁을 단호히 시행해 열악한 조건에서도 비교적 수준 높은 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민영화와 양극화로 고통 받는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무상의료를 요구할 좋은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짚어야 한다. 첫째,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이를 일관되게 구현하려면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통제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특히 의료의 질 개선은 정치·경제적 양극화 및 인민의 삶의 질 개선과 긴밀히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은 ‘자본주의의 바다에 사회주의의 섬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제재와 세계경제 불황이 야기한 제약은 쿠바 의료의 발목을 결정적으로 잡았다. 진정한 변화는 국제적이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한 나라 안에서 계획을 철저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국제적 노동 대중의 저항을 건설할 때에야 이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