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 대선:
트럼프에 맞선 샌더스 발 ‘민주적 사회주의’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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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8일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2020년 미국 대선 레이스의 막이 올랐다.
트럼프에 맞서 민주당 주류가 내세운 후보는 오바마 정부 당시 부통령 조셉 바이든이다. 바이든은 당 지도부와 기성 언론에게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몇몇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린다. 적잖은 자본가들도 바이든을 지지한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업인 사이에서 바이든 지지는 트럼프 지지보다 높다.
바이든은 미국의 코소보 침공에 주도적으로 관여하고 2003년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한 호전적 제국주의자다. 트럼프의 대중 무역전쟁이 중국의 발전을 충분히 제어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하는 강경 친기업 인사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버니 샌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 열풍은 반(反)트럼프 열망의 구심이 돼 있다. 최근 보수 언론인 〈폭스〉의 여론조사에서조차 샌더스는 트럼프를 9퍼센트포인트 차로 앞섰다. 대선 출마 선언자 중에서 트럼프와 격차를 가장 크게 벌린 것이다.
샌더스는 지배 엘리트를 강경하게 비판하고 “정치 혁명”을 호소해 인기를 끌고 있다. 6월 12일 샌더스는 이렇게 연설했다. “오늘날 한 줌도 안 되는 억만장자들이 전례 없는 부와 권력을 누린다. 이들은 어떤 민주적 감시도 받지 않고, 납세자의 주머니를 털어 보조금을 챙기기 일쑤며, 권력을 휘둘러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부분을 지배한다. … 수많은 대중이 분연히 일어나 기업·권력자의 이해관계에 도전하는 ‘정치 혁명’만이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샌더스는 다양한 개혁 과제를 제시한다. “전국민 단일의료체계 확립, 무상 대학교육, 최저임금 인상으로 생활임금 성취, 값 싸고 질 좋은 주택 제공, 기업의 환경오염 강력 규제 등[은] … 21세기판 경제적 권리장전이다. 경제적 권리는 기본권이다. 그것이 민주적 사회주의의 핵심이다.” 대규모 사회 개혁과 복지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샌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정부 투자로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 골자였던 1930년대 뉴딜과 구분된다.
샌더스 열풍의 배경에는 끔찍한 양극화와 가난이 있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1929년 대공황 이후 최초로 이전 세대보다 기대 수명이 낮고, 실질 소득도 턱없이 낮다. 공식 통계로도 약 4000만 명이 빈곤층이고 노숙자가 50만 명을 넘는다. 반면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3명의 재산이 하위 50퍼센트 전체가 가진 재산과 맞먹는다.
샌더스는 이에 대한 계급적 분노를 대변했다. 2016년에 샌더스는 ‘점거하라’ 운동의 구호인 “1퍼센트 대 99퍼센트”를 차용해 많은 미국인들의 변화 염원을 표현했다. 당시 샌더스는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 거대 통신기업 버라이즌 노동자 파업을 지지했다.
그 후 3년 동안 미국에서는 여러 중요한 대중 운동이 성장했다. 트럼프 정부의 성차별·인종차별에 맞서 미국 전역에서 수백만 규모의 대중 시위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오랫동안 침체한 미국 노동운동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2018년 미국에서는 32년 이래 가장 많은 노동자가 파업에 나섰다. 특히 교사들이 곳곳에서 파업을 벌이며 투쟁을 주도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샌더스는 2016년에 이어 지금도 커다란 인기를 끌고 있다.
사회주의
샌더스 열풍으로 미국 공식 정치에서 사회주의가 의제로 부상했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에 따르면 미국인 열 명 중 네 명이 사회주의를 지지한다. 여성(48퍼센트), 유색인종(57퍼센트), 청년(18~34세, 58퍼센트) 사이에서 특히 지지가 크다. 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미국민주사회주의당(DSA)이 3년 만에 10배 가까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샌더스의 민주적 사회주의가 체제 변혁적 사회주의는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를 접수해 위로부터 사회를 개혁하는 것을 핵심 기치로 삼는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 가깝다.
때로 샌더스는 우려스런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샌더스는 국경을 이주민에게 온전히 개방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다. 미국민주사회주의당(DSA) 소속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의 대규모 개혁 정책 ‘그린 뉴딜’ 법안도 지지하지 않았다.
미국 제국주의(“안보”) 문제도 샌더스의 약점이다. 샌더스는 미국의 핵무장과 F-35 전투기 개발을 지지한다. (반핵·반전 운동의 지도자였던 영국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샌더스는 중국을 미국을 위협하는 경쟁자로 보고 중국에게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해, 트럼프와 같은 입장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쯤에서 샌더스가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밝힌 유진 뎁스의 행보를 돌아봐야 한다. 뎁스는 19세기 말 미국 최초의 전국 철도 파업을 이끌었고, 이 파업 때문에 감옥에 갇힌 뒤부터 사회주의자를 자처했다.
일관된 노동운동·반제국주의 투사였던 뎁스는 1900~1920년 동안 다섯 번 대선에 도전했는데, 그중 한 번은 제1차세계대전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구속된 상태에서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얻은 표가 가장 많기도 했다.) 뎁스가 창설에 관여한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은 대규모 파업을 승리로 이끈 전투적 노동운동 단체였고, 뎁스가 창당한 미국 사회당은 미국 양당 정치가 직면한 가장 큰 좌파적 도전이었다.
샌더스 열풍의 진정한 동력인 분노와 변화 염원을 잘 모으려면 뎁스와 같은 독립적·좌파적 도전이 필요할 것이다. 2016년에 샌더스는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뒤 호전적 제국주의자이자 지배계급의 전사인 힐러리를 지지하라고 호소해 실망을 산 바 있다.
미국 좌파들은 샌더스를 중심으로 한 민주적 사회주의 열풍과 깊이 관계를 맺으면서도 진정한 사회주의 정치(와 조직)를 발전시키는 노력을 함께해야 한다.
민주사회주의당, 왜 성장했나?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많은 좌파들도 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미국민주사회주의당(DSA)의 성장에 주목한다.
DSA는 샌더스가 가난과 양극화에 대한 계급적 분노를 대변한 데서 큰 수혜를 입었다. DSA는 샌더스 선거 운동에 흠뻑 동참해 좌파적 목소리를 내고, 지역 운동에 몰두하던 관성에서 벗어나 전국에서 계급투쟁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DSA는 3년 만에 약 6000명에서 6만 5000명으로 10배 이상 성장했다.
이를 보며 많은 미국 좌파들은 (유진 뎁스 이후 오랜 과제였던) 대중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창당을 기대한다.
DSA는 민주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하거나 (샌더스 등)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 청중을 얻고, 자신들이 미는 의원을 당선시켜 입법 활동과 정치 논쟁으로 이목을 끌려고 한다. 미국 좌파 언론 《자코뱅》 편집자 바스카 슌카라는 이를 “선거의 힘을 활용해 노동계급의 힘을 키우는” 전략이라고 풀이했다.
그런 전략 하에서 DSA는 샌더스 대선 선거운동에 적극 참가했고, 2018년 11월 중간선거에 당원들을 민주당이나 무소속 후보로 출마시켰다. DSA는 민주당 지도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당선자를 배출했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가 대표적 사례다.
이 과정에서 DSA는 미국 곳곳에서 노동운동·사회운동과 관계를 맺고, 샌더스 지지로 모인 젊고 좌파적인 민주당 지지층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면서 DSA 안에서는 민주당을 견인하거나, 언젠가 민주당에서 독립해 좌파적 정당을 세운다는 생각(소위 “더티 브레이크”)이 함께 자라났다.
DSA는 이 전략으로 단기간에 몸집을 크게 불렸지만, 현실에서 DSA의 실천은 진보 청중들에게 민주당 가입을 촉구하고, 민주당 선거 운동과 의정 활동에 깊이 관계 맺게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DSA는 그 과정에서 민주당(의 최소한 일부)을 견인하겠다는 생각이겠지만, 거대한 자본가 정당인 민주당을 소규모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견인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강력한 견인 압력에 시달린 쪽은 DSA였다. 이미 2018년 중간선거 당시 DSA는 몇몇 지부들이 친제국주의적 정치 행보를 걸었던 민주당 주류 인사들의 선거 운동을 지지하면서 커다란 내부 논쟁을 겪었다. DSA 간판 스타 오카시오-코르테스가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간섭을 키우는 민주당 지도부의 입장을 지지하기도 했다.
흑인 공민권 운동의 지도자 제시 잭슨 목사가 1980년대에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두 차례 도전했을 때도 비슷한 동학이 있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공민권 운동의 동력을 민주당에 대한 투표로 제약하려 했고, 당시 잭슨은 아래로부터 운동을 중심에 두지 않았던 탓에 이에 끌려가 버렸다.
20세기 미국 사회주의자 핼 드레이퍼는 선거에서 당선해 노동계급을 위한 개혁을 한다는 “위로부터 사회주의” 전략으로는 체제에 일관되게 맞설 수 없고 외려 체제에 용해되기 일쑤라고 지적한 바 있다.
DSA의 핵심 성장 동력은 그저 의회를 영리하게 활용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계급적 변화 염원과 저항에 접속했기 때문이다. 한국 좌파들이 배울 교훈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