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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0 ‘스페인 독감’:
인플루엔자 팬데믹이 전쟁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다

전쟁보다 전염병으로 더 많이 죽다 미국에서 ‘스페인 독감’ 사망자(약 67만 5000명)는 제1차세계대전 미국인 전사자의 5배가 넘는다. 1918년 캔자스주 육군 병원 ⓒ출처 뉴욕 공립도서관

동물 유래 감염병은 인류 역사 내내 있었다. 소규모이던 수렵-채집 사회는 동물에게서 감염병이 옮으면 전멸하거나 긴 시간에 걸쳐 집단 면역을 획득했다. 신석기 혁명으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서 천연두, 흑사병 등 동물 유래 감염병이 더 큰 규모로 사회를 위기에 빠뜨렸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도 그중 하나다. 《전염병의 세계사》를 쓴 시카고대학교 역사학 교수 윌리엄 맥닐은 1550년대에 유럽에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창궐해 잉글랜드 주민 약 5분의 1이 사망하고 이후 대서양 너머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정착촌으로 번진 사례를 소개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는 전파 속도와 범위에서 차원이 다른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찾아왔다. 제1차세계대전 마지막 해인 1918년에, 흔히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진 H1N1 인플루엔자가 세계를 강타했다. 바이러스 진원지가 어디였는지는 지금도 논란이 있지만 스페인이 아닌 건 분명하다.

당시 미국·프랑스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 대부분은 제1차세계대전에 한창이었다. 열강은 전염병 위험을 과소평가했다. 또한 자기 나라는 청정 지역으로 비치길 바랐다. 무엇보다 전염병 소식 때문에 전쟁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약해지길 원치 않았다.

따라서 전염병 관련 보도를 강하게 통제했다. 이들 정부들은 대개 전시 검열을 시행하고 있었다. 일례로 미국은 1918년에 내란선동법을 제정해 “미국 정부에 불충·불경한 악의적 발언을 주장·인쇄·작성·출판”하면 최대 20년형에 처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립국이라 검열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스페인에서 이 인플루엔자에 관한 보도가 많아 ‘스페인 독감’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제국주의 전쟁

진흙과 포탄에 찢긴 사지로 범벅이 된 참호속에서 전염병이 창궐했다. 부상자로 포화 상태인 야전 병원에서 병사들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주요 합병증인 폐렴으로 죽어나갔다. 야전 병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환자들이 후방으로 이송되면서 바이러스는 서유럽과 미국 전역으로 번졌다. 그 과정에서 바이러스는 치명적으로 변이했고, 1918년 10월이 되자 막대한 사망자를 낸 두 번째 팬데믹 물결이 시작됐다.

강대국들은 방역보다 전쟁을 우선한 탓에 팬데믹 초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했다.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됐던 우생학과 인종차별 이데올로기가 이를 부채질했다. 지배자들은 유색인종·노동계급·빈민이 선천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전염병에 취약하다고 생각했다.

바이러스는 식민지로도 번져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팬데믹 물결이 몰아쳤다. 1920년까지 이어진 팬데믹 물결로 당시 세계 인구의 3분의 1(약 6억 명)이 감염됐고 약 5000만~1억 명이 사망했다. 적게 잡아도 제1차세계대전 전사자 1800만 명을 몇 배나 웃돈다.

특히 빈국들에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목숨이 희생됐다. 이런 곳들에서는 사망자 통계 자체도 정확하지 않지만,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당시 영국 식민지인 인도 서부 펀자브·뭄바이 등지에서만 적어도 2000만 명이 희생됐다고 추산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 지배한 한반도도 팬데믹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통계연감》을 보면, 당시 조선인 인구의 약 43퍼센트인 755만 명이 “무오년 독감”에 감염됐고, 14만여 명이 사망했다. 조선총독부가 전염병의 심각성을 경시하고 보도 통제와 검열을 시행해 질병 확산을 부채질했다고 오늘날 연구자들은 지적한다. 식민 지배와 계급 격차의 영향으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망률이 두 배 넘게 차이났다(각각 0.71퍼센트와 1.88퍼센트).

볼셰비키

그러나 세계 노동 대중이 팬데믹에 속수무책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삶을 지키기 위해 투쟁에 나섰다.

미국 노동자들은 팬데믹이 한창인 1919년 초부터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1월에 뉴욕시에서는 재봉사 3만 5000명이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했다. 이들은 대부분 여성 노동자였다. 시애틀에서는 당국이 전염병을 이유로 이동 통제령을 내리고 집회 일체를 금지했지만 제철 노동자 6만 명이 파업에 나섰다. 이 파업은 도시 전체 총파업으로 확산돼 이듬해인 1920년 1월에 (한때 전염병 때문에 격리됐던) 주방위군이 폭력 진압할 때까지 이어졌다.

당시 미국에서 구독자 수가 많기로 손꼽히던 언론들은 1919년을 “파업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한 해”(《리터러리 다이제스트》)로 기록했고, 당시 상황을 이렇게 보도했다. “파업이라는 열병이 공기 중에 퍼져 있다. 이 전염병은 미국의 산업 여러 부문을 강타하고 주저앉혔다.”(《아웃룩》)

노동자들, 팬데믹 와중에 삶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다 임금 인상,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는 미국 노동자들

팬데믹이 비교적 늦게 덮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노동자들이 전례 없는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정부가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해 방역이 뚫리자, 항만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여 항구를 자체 방역했다. 전염병이 시드니 등 주요 도시로 번진 후에도,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감축을 위해 파업했다.

이런 노동자 투쟁들은 (팬데믹 와중인!) 1918년 11월 시작된 독일 혁명과, 그보다 앞서 승리한 러시아 혁명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러시아 혁명은 인플루엔자 팬데믹을 저지하는 데에도 중요한 기여를 남겼다.

러시아 혁명은 팬데믹의 온상인 제1차세계대전을 종식시켰다. 요크대학 역사학 교수 존 웨스트모어랜드는 소비에트 정부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정을 맺지 않았다면 러시아 인구 2억 명(당시 세계 인구의 10퍼센트가 넘는다)한테 팬데믹이 훨씬 더 확산되고 사망자도 늘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강화 협정으로 러시아령에서 독일로 넘어간 폴란드에서는 H1N1 인플루엔자 팬데믹이 두드러지게 창궐했다.

러시아 혁명은 공중보건체계에도 크게 기여했다. 로라 스피니는 《네이처》, 《내셔널 지오그래픽》, 《뉴 사이언티스트》 등에 글을 쓴 과학 전문 기고가인데, H1N1 인플루엔자 팬데믹을 다룬 자신의 저서 《흰 말의 기사(騎士)》에서 이에 관해 다뤘다.

“1920년에 러시아는 세계 최초로 중앙집권적 공중보건체계를 전면 추진했다. …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를 주도했다. [1917년] 혁명이 승리했지만 기근·전염병·내전으로 노동계급이 절멸로 내몰릴 수 있음을 레닌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 레닌의 조처는 [러시아에서] 전염병과 기근에 대처하는 데에 특별한 기여를 했다.

“레닌은 의학이 생물학·실험과학뿐 아니라 사회학도 포괄해야 함을 이해했다. 질병의 양상·원인·효과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공중보건의 기초인 역학(疫學)이 과학으로 온전히 인정받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스피니는 《스미소니언 매거진》에 글을 기고해, 당시 혁명 러시아의 조처를 “서유럽이 본땄고,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오늘날 체계와 유사한 — 인용자] 고용자 부담 의료보험 체계를 수립했지만 팬데믹 이후 몇 년간은 [러시아처럼] 국가가 관장하는 체계를 운영했다”고도 했다.

혁명 러시아는 제국주의가 아니라 반제국주의가,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가 진정 대중을 위하는 방식으로 전염병에 맞설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 때문에 통제하지 못할 전염병이 연거푸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오늘날, 대중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사회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배울 교훈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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