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44: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 전쟁에 목매는 지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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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본지는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연말까지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대학살로 점철된 제1차세계대전을 중단하라는 요구는 러시아 혁명의 크고 작은 투쟁마다 빠짐없이 제기됐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이끈 소비에트 정부에게 평화는 가장 우선적인 과제 중 하나였다.
소비에트는 전선 맞은편에 동맹을 갖고 있었다. 러시아와 교전 중이던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 제국 등 이른바 동맹국의 병사·수병·노동자들이 바로 그 동맹이었다.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 것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은 그 나라들에서도 벌어질 듯했다. 그런데 그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그때까지 볼셰비키는 피에 굶주린 장군·각료들을 상대로 협상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볼셰비키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전쟁광 지배자들과 협상하는 동시에 전쟁에 몸서리치는 대중에 호소해야 했다.
소비에트는 “강화의 모든 조건을 최종 확정하기 위한 과감한 조처 일체를 조금의 지체도 없이 즉각 취할” 준비가 돼 있음을 표명했다.
새 정부는 비밀 외교를 중단하겠다고도 선언했다. 협상에서 오간 모든 말들이 전 세계에 공개될 것이었다.
심지어 강화 요구 자체보다 이 선언이 유럽 지배자들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되면, 지배자들이 각자의 이익을 좇으며 자기들끼리 살갑게 거래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을 사지로 내모는 일이 더는 벌어지지 못할 것이었다.
동맹국이 휴전에 응하는 데 두 달이 걸렸다. 뒤이어, 당시 폴란드의 소도시였던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강화 협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동맹국 대표단은 강화 협상이 러시아 제국 분할에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데서는 견해가 일치했다.
혁명 전 제정 러시아는 전쟁에서 패하고 있었고, 그 뒤를 이은 소비에트 정부는 반혁명 세력과의 내전이 시작되고 있어 숨 돌릴 여유도 없었다.
동맹국 측은 강화 조건으로 러시아 인구의 4분의 1이 살고 러시아 산업의 4분의 1, 탄광의 90퍼센트가 포함된 영토를 요구했다.
러시아가 이런 조건으로 강화를 맺어야 할까? 이 질문을 두고 볼셰비키 내에서 입장이 갈렸는데, 이는 독일에서 혁명이 얼마나 빨리 일어날 것이라 보는지와 부분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니콜라이 부하린, 칼 라데크 등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혁명의 확산이라는 명분 하에 전쟁을 지속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병사들에게 러시아가 여전히 자신들의 적이라는 메시지를 주게 돼, 그 병사들이 자신의 지배자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기가 더 힘들어질 우려가 있었다.
소비에트의 외교 인민위원이었던 레온 트로츠키는 시간을 끄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했다.
해산
트로츠키는 러시아 군대를 해산시키되 강화 조약에는 조인하지 말자는 방안을 주장했다.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은 처음에는 트로츠키의 “전쟁도 아니고 강화도 아니다” 하는 입장에 동의했다.
그러나
가혹한 조건이었지만, 강화 조약으로 한숨 돌리게 된 소비에트 정부는 내전에 대처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면 동맹국 지배자들은 끝내 혁명을 피하지 못했다. 1년도 지나지 않아 독일과 헝가리 두 곳 모두에서 혁명이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