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후 3주 동안 규제 완화만 줄창 강조:
21대 국회와 문재인 정부의 행로가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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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이 끝나자마자 여당은 인터넷은행의 대주주 자격 조건을 완화하는 인터넷은행법 개악안을 통과시켰다. 공정거래법을 위반해 규제를 받은 KT가 K뱅크의 대주주 노릇을 할 수 있게 원포인트 개악을 한 것이다. 이는 새 국회의 정치적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지금 기업주들을 대변하는 우파 언론들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화학물질등록및평가등에관한법(화평법) 등 규제 완화 법안들을 통과시키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전자는 보건·의료 분야에서 영리화를 대폭 확대할 목적이고, 후자는 제조업을 위한 것이다.
이에 발맞춰 기획재정부가 4월 말 내놓은 방안들을 보면, 원격의료 등 그동안 의료 영리화의 상징처럼 돼 있던 것들을 코로나 국면에서 필수적인 비대면 서비스라고 포장해 규제 완화의 우선 목록으로 올려 놨다.
5월 6일 정세균 국무총리는 제4기 공공데이터전략위원회 출범 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자율주행·AI(인공지능) 등에 필요한 고품질 공공데이터와 통합기업정보·바이오 데이터 등의 금융·의료 분야 핵심 데이터를 과감히 개방해 신산업 창출을 추진하겠다.”
정부·여당은 올해 1월 의료와 금융 규제 완화를 위해 진보·좌파 진영이 반대해 오던 데이터3법(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법 개악안)을 통과시켰다. “가명 정보” 개념을 도입해 개인 정보들을 영리 추구의 재료(부품)로 삼겠다는 것이다. 재계는 최근 이 개악 법안에 대한 시행령 개정안이 양에 안 찬다고 불평을 해 왔는데, 정세균의 6일 발언은 이에 대한 응답인 셈이다.
정부는 코로나19 확진자 동선 체크 등에 이 가명 정보가 효과적으로 활용됐다며 이번 규제 완화를 정당화하고 있다. 진보 진영이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에 독립적이지 않았던 것이 개악을 막는 데에도 악영향을 끼친 것이다.
사실 경기도 이천의 물류센터 건설 현장 화재 사고도 문재인 정부가 약속했던 안전 규제를 실행하지 않거나 개악한 것의 간접적 결과이기도 하다.
정부는 정부 예산으로 4인가구 기준 100만 원을 모든 가구에 지급한다고 광고했는데, 실은 소득 하위 70퍼센트 가구에는 그중 20퍼센트를 지자체가 부담하는 것이다. 상황이 너무 안 좋아 생색은 내지만 주기 싫은 티를 이렇게 낸다. 기업주들에게는 수십조 원을 퍼 주고도 더 큰 선물을 주려고 안달이면서 말이다.
요구 목록들
다른 한편 여권은 “전 국민 고용보험”을 차기 국회의 개혁 의제로 띄우고 있다. 경제활동인구 2800만 명에게 고용보험을 다 적용하자는 것이다.
물론 고용보험의 전면적 확대는 노동계가 요구해 왔던 것이기도 하다. 특수고용 노동자들과 임시직 노동자들에게 고용보험이 적용돼야 한다. 그러나 다른 규제 완화 정책들과 달리, 준비된 것 없이 애드벌룬부터 띄운 것이라서 정부에 우호적인 언론들조차 난점 해소를 어떻게 할지부터 보도하는 모양새이다.
고용보험료는 사업자와 노동자 본인이 반반씩 부담하는데, 정해진 고용주가 없는 특수고용 노동자는 어떻게 할 것이냐가 핵심이다. 특수고용 자체가 고용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만든 고용 방식이니 말이다.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 문제를 정부가 회피해 온 탓인데, 정부는 그 문제에는 침묵한다.
문재인 정부가 이것을 개혁 의제로 꺼낸 것은 첫째, 실제로 고용 위기가 심각하고, 둘째, 사회적 대화를 위한 거래 목적일 것이다.
5월 6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고용 감소 폭이 통계청이 발표한 것보다도 심각하다고 발표했다. 통계청은 전년 대비 0.7퍼센트 감소로 봤는데, 실제로는 7.6퍼센트 감소했다는 것이다.
“고용보험 전면 확대”는 민주노총 등 노동계 지도자들이 코로나19 위기 긴급 사회적 대화를 요구하면서 노동계의 핵심 요구로 삼은 것이다.
문재인의 5월 1일 노동절 메시지도 정부의 방향을 시사한다. “노동자는 이제 우리 사회의 주류이며, 주류로서 모든 삶을 위한 ‘연대와 협력’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정부도 노동자, 기업과 함께 혼신을 다해 일자리를 지키겠습니다.”
문재인이 “사회의 주류”라고 한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의 생일 격인 노동절에 정작 노동계급 연대를 위한 대중 집회와 행진을 열지 않았다.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정부에 협조한 결과인데, 경찰은 소규모 행진조차 가로막았다.
문재인의 메시지는 이제 위상이 오른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노동자 대중을 설득하라는 것이다. 무엇이 노동계에 대한 양보 목록이 될지는 봐야 알겠지만, 정부와 사용자들의 요구 목록에 투자 확대를 위한 규제 완화(투자를 해야 일자리가 생긴다면서), 임금 억제·삭감, 보험료 인상 등이 포함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IMF 공황 국면에서 개최된 1998년 제1차 노사정위원회에서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리해고와 파견법 도입을 노조 인정, 실업급여 증액 등과 맞바꾸는 데에 합의해 준 전례가 있다.
친기업에 포퓰리즘 소스 치기
문재인 정부는 2018년 봄 지방선거에서 압승했으나, 노동개악을 본격화하려고 한 2018년 후반부터 지지율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국 국면 등을 거친 뒤인 지난해 가을부터는 청년층에서 지지율이 더욱 떨어져 위기감에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역대급 반사이익 효과(해외 선진국들의 코로나19 방역 실패, 재난 긴급 소득 지원 확대에 반대할 정도로 수구 반동적인 미래통합당에 대한 반감 등)로 올해 4월 총선에서도 압승했다.
그러나 반사이익은 자체 동력으로 지속되기 어렵다. 게다가 경제 공황에 대한 실망스런 대처가 앞으로 화두가 될 것이다. 총선은 운좋게 넘겼지만, 문재인 정부는 여전히 위기 대응 능력의 시험대에 있다. 경제 위기에 지금처럼 대처하면 정치 위기까지 더해져 훨씬 심각한 위기로 발전할 수 있다.
부패 혐의로 반사이익을 까먹을 수도 있다. 벌써 총선 직후 위성정당 비례로 당선된 양정숙의 부패 혐의 건이나 부산시장 오거돈의 성추행 사퇴 건이 그런 위험을 드러냈다. 양정숙은 민주당이 비례 후보로 선출해 위성정당으로 보낸 것이므로 핑계를 댈 여지가 없다. 조국 재판, 라임 사기 사태와 청와대의 관계 의혹, 드루킹 2심, 울산시장 개입 건 등 여러 수사와 재판도 위험 요소다. 그래서 민주당은 검찰개혁을 핵심 ‘개혁’ 의제로 삼는다.
책임론
이번 총선 결과로 역대 어느 정권보다 유리한 정권 후반기를 맞게 됐고 정권 재창출의 기회를 잡게 됐지만, 이는 야당 탓을 하기 어렵게 됐다는 뜻이다. 공식 정치는 전국 선거 3개(대선, 총선, 지방선거)를 치른다.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 이후 3년 새 이 세 선거에서 모두 대승했다. 촛불에 무임승차한 민주당이 최대 수혜자가 됐는데, 승차 비용 책임론이 본격화될 수 있는 것이다.
통합당은 전통적으로 자본가들의 제1선호 정당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각별히 둔감하고 무능한 데다가 총선 패배 후에는 자중지란에 빠져서 당분간 자본가들이 예전처럼 전폭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운 상태다. 그렇다고 우파 정당이 예전의 지위를 잃었다고 속단하는 것도 위험하다. 민주당의 배신이 낳을 환멸로 반사이익을 얻을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참에 통합당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업주들을 위한 규제완화와 노동개악을 추진해 그들의 신뢰를 붙잡으려 할 것이다.
이 과제에 성공하려면 진보 진영 지도부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개혁주의 지도자들을 포섭할 포퓰리즘적 행보가 여전히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되는 이유다. 당장의 총선 결과가 문재인 정부의 이런 방향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 등장 이후 노동운동의 대표적 조직들은 민주당과의 ‘전략적 연대’ 노선에 기울어 왔다. 문재인 정부와 협력해 개혁을 성취하고 우파의 재복귀를 막겠다는 민중주의(포퓰리즘) 전략이다.
지금 노동운동의 대표적 조직들의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경제 공황이 시작되고 침체가 더 깊어질 국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들의 다수는 보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초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김명환 집행부의 경사노위 참가안이 부결될 때와 분위기가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