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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투쟁 30주년 :
5월 투쟁을 제대로 기억하기

1991년 5월 투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자연히 그 투쟁의 정치적 의의도 잊혀진 기억이 됐다.

민주화 투사를 자칭하는 민주당 정치인들도 5월 투쟁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 안 한다. 당시 민주당(당시 당명은 신민주연합당, 김대중이 총재였다)이 한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항쟁 때보다 더 별 볼 일 없었다. 민주당은 6월항쟁으로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봤다. 그래서 대중 투쟁의 필요성을 전보다 더 못 느끼고 대중 행동 참여를 극구 피했다. 민주당은 노태우 정권 퇴진 요구를 반대했고 6월에 있을 지방선거에 목을 맸다.

5월 투쟁의 주축이었던 학생 투사들 중 대다수는 석 달 뒤인 8월에 전개된 소련 붕괴에 커다란 충격을 받아 정치적으로 해체됐다. 대다수는 운동을 포기했다. 살아남은 일부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개혁주의(시민운동, 유러코뮤니즘, 사회민주주의 등)로 이동했다. 극소수는 자율주의(아나키즘)로도 향했다. 또 다른 소수는 국제사회주의경향의 트로츠키주의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대안을 찾았다.

91년 5월14일 열린 강경대 열사 장례식 겸 6인 분신 합동 추모제 ⓒ출처 강경대 열사 추모사업회

개혁주의로 이동한 어제의 투사들에게 5월 투쟁은 아무런 제도적 성과를 남기지 못한 투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 투쟁과는 달리 5월 투쟁은 패배한 투쟁으로만 남게 됐다.

그러나 1991년 5월 투쟁이 없었다면 1987년의 성과물들은 심각하게 위협당했을 것이다. 5월 투쟁은 비록 패배했지만 노태우 정부의 권위주의적 반동, 즉 1987년 6월항쟁 이전으로 회귀하려는 시도를 막았다. 형식적·제도적 민주화가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자동으로 보장해 주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대중의 투쟁이다. 이것이 5월 투쟁의 중요한 정치적 의의다.

강경대

5월 투쟁은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1학년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것에 항의하는 데서 시작해 빠르게 반정부 시위로 확산됐다.

노태우 정부 때 벌어진 최대 규모 거리 시위였다. 투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전국적으로 40만 명가량 참가했다. 5월 투쟁의 핵심 사회 세력은 (노동자도 많이 참가했지만) 학생이었다. (전국적으로 벌어졌지만) 시위의 중심 무대는 서울이었다.

투쟁은 4월 하순부터 시작됐는데, 투쟁의 절정과 퇴조가 모두 5월에 교차해 5월 투쟁으로 불린다. 반면, 우파들은 이 시기를 ‘분신 정국’으로 부르곤 했다. 5월 투쟁 동안에 10명이 분신 자살(그리고 1명은 투신 자살, 2명은 경찰에 살해됨)을 한 것을 두고 ‘운동권’이 목숨마저 투쟁 수단으로 동원했다고 비난하고 싶어서였다. 경찰이 학생을 살해한 국가 폭력에 침묵하거나 동조한 자들이 ‘인명 경시’ 운운하는 것은 역겨운 위선이었다.

5월 투쟁은 1987년 투쟁을 통해 획득한 피지배 계급의 성과물을 도로 빼앗으려던 노태우 정부에 맞선 투쟁이었다. 노태우 정부(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5일)는 군복 벗은 군인들의 정부였다.

노태우 정부는 특히 1989년부터 반동적 공세를 본격화했다. 한국 경제가 점점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던 ‘3저 호황’(저금리, 저달러, 저유가 덕분에 한국 경제가 급성장한 상황)이 1989년에 끝나고 한국 경제에 불황이 찾아 왔다. 노태우 정부는 경제적 불안정에 대응하려고 노동자와 학생들의 투쟁을 단속하고자 했다.

노태우 정부는 현대중공업 파업 등 노동자 투쟁을 대규모 경찰력을 동원해 공격했다.(‘[역사를 기억하며] 19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 노동자 투쟁이 (학생의 지지와 함께) 정치적이 되던 때’를 보시오.) 남북 자유 왕래 운동과 통일 운동도 탄압했다.(‘역사를 기억하며: 1989년 남북 자유왕래를 향한 투쟁’을 보시오.)

양심수 현황을 보면, 노태우 정부의 반동 공세와 그에 맞선 저항이 매우 치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노태우 정부 5년 동안 양심수는 6614명이었다.

한편, 노태우 정부는 정계 개편을 통해 통치 기반의 취약성을 메우고자 했다. 노태우는 1987년 12월 대선에서 총 유효표의 30퍼센트를 득표했다. 그만큼 통치 기반이 약했다. 1990년에 노태우는 일부 야당들과 합당해 이런 취약성을 보완하고자 했다. 민주정의당(여당),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이 합당해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출범했다. 이름하여 “3당 합당”이다.

노태우 정부는 내각제로 개헌해 권위주의 세력의 장기 집권을 꾀했다. 내각제로 정부 형태를 바꾸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6월항쟁의 성과물인 대통령 직선제를 폐기하는 것으로 이해돼 반발이 컸다.

게다가 노태우는 군부와 연결돼 있는 극우파 노재봉을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국무총리로 임명했다(1991년 1월). 노재봉 내각은 ‘공안’ 내각이었다. 공안公安의 정치적 의미는 탄압이 운동 전반에 가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공안 정국’은 특정 단체나 특정 운동 등을 넘어 노동계급 운동과 좌파 운동 전반을 탄압하는 정치 상황을 가리킨다.

차기 권좌를 노리던 김영삼은 이런 권력 후계 구도에 반발했다. 그래서 집권당 내부에 심각한 갈등이 존재했다. 이 갈등은 5월 투쟁의 또 다른 중요한 정치 요소였다.

학생과 노동자들은 가공할 국가 폭력에 맞서 저항했다. 그렇다고 해서 1991년 5월이 혁명적 상황이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 체계의 동요가 거의 없었고 노동계급은 계급적으로 동원되지 못했다. 많은 참가자들이 제2의 6월항쟁이 도래하기를 기대했지만, 투쟁은 그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노태우 정부는 대중 투쟁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일정한 양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5월 27일 노재봉이 국무총리에서 사퇴했고, 다음 날 노태우는 내각제 포기를 선언했다.

이것은 운동의 압력에 밀린 결과였다. 그와 동시에, 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노태우는 투쟁의 퇴조가 확연해진 시점에 노재봉을 물러나게 했다. 사실, 여권은 언론을 통해 노재봉의 퇴진을 미리부터 기정사실화해 놓은 채 실제로는 퇴진시키지 않고 적당한 때를 보고 있었다. 이렇듯 지배자들은 투쟁이 진정 국면에 들어갈 때 양보 조처를 취하려고 한다. 그렇지 않고 상승세일 때 양보 조처를 취했다가는 오히려 투쟁을 더욱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노재봉의 사퇴는 군부 세력의 반동 시도가 저지됐다는 뜻이었다. 그와 동시에, 차기 통치자를 꿈꾸던 김영삼의 경쟁자가 제거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노재봉이 사퇴하자 주요 시위 지도부였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는 빠르게 투쟁의 중심 무대에서 벗어났다. 6월 1일 (5월 투쟁의 중심 무대였던 서울이 아니라) 부산대학교에서 전대협 출범식을 치렀다.

6월 25일 치러진 광역의회 선거에서 민자당이 압승했다. 이미 5월 투쟁 한복판에서 민주당이 선거 심판론을 제기했다. 전대협 지도부도 ‘선거 혁명’을 말하며 민주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선거를 치른 6월은 투쟁하던 5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5월 투쟁이 패배로 끝나자 집단적이고 투쟁적인 해결책을 지향하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투쟁보다 선거를 중시하는 선거주의 전략으로는 우익적인 집권당을 패퇴시킬 수 없음을 확인시켜 줬다.

교훈

5월 투쟁이 패배했다고 해서 잊혀진 기억이 돼서는 안 된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혁명적 정당은 계급의 기억이라고 말했다. 계급의 기억에는 승리한 경험(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뿐 아니라 패배한 경험(1923년 독일, 1937년 스페인 등)도 포함된다. 혁명가들은 1987년 6월과 7∼8월도 알아야 하고, 1991년 5월도 알아야 한다.

5월 투쟁이 당시 투쟁 참가자들에게 패배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것은 그 투쟁 자체의 패배 때문이 아니다.

학생 투사들에게 진정한 트라우마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몰락이었다. 5월 투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소련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1989년 3월 동독 인민들의 투쟁에서 시작된 동유럽의 대변동이 스탈린주의 정권들의 연쇄 몰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동유럽 스탈린주의 정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좌파들은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5월 투쟁의 패배는 좌파에게 정치적 좌절감을 안겨 줬다. 마침내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로 좌파는 정치적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투쟁의 패배는 극복할 수 있지만, 정치적 대안의 붕괴는 운동 전망을 상실케 한다.

5월 투쟁과 뒤이은 소련 몰락이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에게 주는 교훈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혁명적 정치 대안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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