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투쟁은 쓰라린 기억일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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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91년 5월 투쟁을 패배했다고 평가하며 당시 투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에게 ‘트라우마’(상처)로 남아 있다고들 한다. 강경대 열사 사망 20주기를 앞두고 특집 기사를 낸 〈한겨레21〉도 〈경향신문〉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강경대 열사가 사망한 직후 즉각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의 투쟁은 전노협의 하루 파업을 이끌었다. 전국적으로 50만 명이 운집한 5월 9일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회’가 있었기에 골수 우익인 총리 노재봉을 퇴진시키고 내각 사퇴를 이룰 수 있었다.
노태우 정권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90년 내내 하루에 세 명 꼴로 투사들을 구속하는 등 이른바 ‘공안정국’을 조성해 87년의 투쟁의 성과를 되돌리고자 무진 애를 썼다.
5월 투쟁은 독재를 강화하고자 한 노태우 정권의 시도에 항거해 87년의 성과를 지키고 반동의 공세를 저지시켰다. 5월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지배자들은 군부 출신이 아니라 김영삼을 내세워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십여 명의 열사가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도, 살인자 노태우 정권을 퇴진시키지 못한 점은 매우 아쉽지만, 이것은 당시 운동의 지도부가 부르주아 야당 ― 김대중은 내각 사퇴에 만족하고는 투쟁을 진정시키려 했다 ― 에 크게 의존하고 부르주아 개혁주의의 한계에 머문 채 노동자들을 계급적으로 동원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노협은 노태우 퇴진을 내걸고 정치 파업을 벌였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임금 인상 등의 경제적 요구를 함께 내걸고 파업을 조직해 노동자들을 진정 대중적으로 동원했더라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5월 투쟁이 끝난 후 투쟁을 냉철하고 곰곰히 평가해 보기도 전에, 당시 활동가들은 8월 소련에서 ‘공산당’의 쿠데타가 민중의 항쟁으로 패퇴되고 마침내 소련이 해체되는 세계사적 사건을 맞이했다. 그래서 소련을 위시로 한 동유럽 혹은 북한 체제를 대안으로 여기던 활동가들은 큰 절망감을 느꼈고 이런 패배감과 쓰라린 정서를 투영해 5월 투쟁을 일면적으로 돌아보는 것이다.
〈한겨레21〉이 말하듯이 “이후 91년 5월과 같은 급진적 거리 정치는 재연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91년 5월 이후, 특히 8월 이후 활동가들이 사기가 떨어지고 대안 부재로 방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저항은 거듭 일어났다. 학생들은 91년에는 노태우를 퇴진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95년에 학생들의 투쟁은 다시 부활해 광주항쟁을 학살한 전두환·노태우를 구속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이듬해인 96년에 등록금 투쟁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저항은 그해 말 노동법 날치기에 항의해 벌어진 역사적인 노동자 대중파업을 고무했다.
학생들은 2002년 여중생 사망 항의 시위와 2003년 반전 동맹휴업을 벌이며 사기를 회복하기 시작했고, 2008년 촛불항쟁으로 다시금 새롭게 급진화하며 ‘촛불세대’가 생겨났다.
그러므로 위기의 시대에 앞으로 거대한 투쟁이 도래했을 때를 대비해, 새롭게 급진화한 세대들이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에 바탕을 둔 진정한 사회주의 정치를 대안으로 삼고 운동을 건설해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