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 투쟁 20주년:
학생과 노동자 들은 어떻게 독재 정권에 항거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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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1학년이었던 강경대 열사가 전투 경찰 체포조 일명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 이날부터 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졌고, 수많은 학생과 청년 그리고 노동자들이 노태우 정권에 맞선 거대한 항쟁을 벌였다.
1991년 5월 투쟁의 배경에는 경기 후퇴가 있었다. 이 같은 경제 상황에서 노태우 정부는 1987년 민주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에 밀려 양보했던 것들을 다시 빼앗으려고 했다. 이미 1989년 봄부터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고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에는 군대까지 투입했다.
1990년 1월 22일 김영삼과 김종필을 끌어들인 이른바 3당 합당을 통해 여소야대 국회를 여대야소로 바꾸며 노태우의 공격은 더 강화됐다. ‘범죄와의 전쟁’을 핑계로 헌병들이 서울시내 곳곳에서 M16 소총을 지닌 채 순찰을 하기도 했다.
공안정국 속에 양심수는 1989년 1천5백25명, 1990년 1천6백28명으로 늘어났다. 강경대를 시위 현장에서 살해한 것은 이 같은 탄압의 결과였다.
당시에도 물가 인상과 등록금 인상이 이어지며 대중의 불만은 높아지고 있었다. 소비자 물가는 정부 공식 통계로도 1990년에 8.6퍼센트, 1991년에는 9.3퍼센트까지 치솟았다. 강경대 열사가 사망한 바로 그날 집회도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연행된 총학생회장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태우 정권의 대형 비리와 부패가 연일 폭로되면서 불만은 더욱 커졌다.
5월 투쟁의 전개
5월 투쟁은 바로 이런 불만과 분노가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강경대 열사가 사망한 바로 다음 날 내무부 장관을 경질하고 현장에 있었던 전경 5명을 구속했지만 이런 조처는 대중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다.
거리의 학생들은 ‘해체 민자당, 타도 노태우’를 외쳤고, 시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전투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숨겨 주는 사람들도 많았고 음식이며 물을 시위대에게 주고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안타깝게도 일부 젊은 학생과 청년, 노동자 들은 울분을 참지 못해 분신으로 저항했다. 이들의 죽음은 당시 노태우 정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깊은 절망 속에 빠뜨렸는지를 보여 줬다.
학생들의 투쟁은 노동자들에도 영향을 미쳐 노동조합들이 항쟁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5월 6일 당시 한진중공업 노조 박창수 위원장의 옥중 의문사는 노동자 투쟁에 기름을 부었다.
학생들은 5월 8일 전국의 대학 1백45곳에서 동맹휴업에 돌입했고, 노동자들은 5월 18일 1백56개 작업장에서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과 폭력 통치 종식을 위한 전국 총파업’을 조직했다. 학생들은 강경대 열사가 죽은 후 6월 말까지 거의 매일 밤낮으로 시위를 벌였다.
한편, 강경대 열사가 죽음을 당한 바로 다음 날 ‘고 강경대 씨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 범국민 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가 꾸려졌다. 대책회의는 당시 김대중이 이끌던 신민당부터 학생운동을 대표했던 전대협 그리고 노동조합까지 포함하는 조직이었다.
그런데 김대중의 신민당은 대책회의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내거는 것에 반대하면서 노태우 정권의 숨통을 틔워 줬다. 많은 단체들이 김대중을 비판했지만 김대중과 독립적으로 노태우 정권과 맞서려 하지는 않았다.
거리의 학생들은 김귀정 열사처럼 최루탄에 질식사하면서도 독재 정권에 끝까지 영웅적으로 맞섰다. 노동자들도 투쟁에 함께 했지만, 전노협이 나중에 ‘구체적인 요구와 목표를 바탕으로 투쟁이 집중되고 확대되’지 못했다고 자평했듯이, 정치적 요구에 물가 인상과 임금 감소에 반대하는 경제적 요구를 결합시키며 더 많은 노동자들을 투쟁에 동참시키는 것으로 나아가진 못했다.
노태우 정부는 이 틈을 파고들어 ‘유서대필’ 사건을 날조했다. 검찰은 강경대 열사의 장례식 날 ‘유서대필’ 사건을 조작 발표했다. 그러나 ‘유서대필’ 사건이나 총리 정원식이 외대에 갔다가 계란과 밀가루를 맞은 사건 때문에 5월 투쟁이 사그라든 것은 아니다. 이미 그 전에 우리편이 투쟁 확대의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영웅적으로
얼마 전 〈경향신문〉은 강경대 사망 20주기를 다루며 ‘5월 투쟁의 실패가 전투성 일변도에서 대중성 확보로 대전환하는 계기’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5월 투쟁이 더 나아가지 못한 이유는 전투성이 아니라 정치에 있었다.
민주주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도 독립적인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정치가 필요했다.
또한 91년 투쟁 이후 학생 운동이 상당한 후퇴를 한 이유는 단지 91년 5월 때문이 아니었다. 학생 운동 활동가들은 같은 해 8월 소련 몰락으로 결정타를 맞았다.
소련 몰락은 소련이 사회주의이며 대안이라고 생각하던 수많은 활동가들을 좌절하게 했다. 서방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는 착취·억압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착각한 스탈린주의 정치가 파산한 것이었다.
좌절한 많은 투사들이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청산하거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같은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소련을 국가 관료들이 주도하는 또다른 착취 체제로 분석하며 아래로부터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복원하는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그래서 중요했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당시 일부 활동가들이 좌절하지 않고 사회변혁의 길에 계속 헌신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구실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