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좌파 대통령 당선인, 벌써 배신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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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좌파 대통령 당선자 가브리엘 보리치가 취임 전부터 위험한 타협을 하고 있다.
칠레 일간지 〈엘 메르쿠리오〉는 내각 인선 중인 보리치가 핵심 장관직을 두고 중도 좌파인 사회당, 중도파인 민주당·자유당과 교섭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당들은 독재자 피노체트가 물러난 뒤 번갈아 집권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보리치가 학생 시절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된 교육 민영화 반대 투쟁도 사회당 미첼 바첼레트 정부 하에서 벌어졌다.
당시 민영화를 계획하고 운동을 진압했던 인물들이 새 정부의 장관으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보리치는 “좌우를 포용”하는 노선과 사회당 전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의 지지 선언 덕분에 결선에서 표를 끌어올 수 있었다고 여긴다. 보리치의 인선 논의는 이에 따른 논공행상인 것이다.
그러나 보리치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1차 선거 때 투표하지 않았던 120만 명(전체 결선 투표자의 6분의 1)이 극우 안토니오 카스트를 저지하려고 보리치를 찍은 덕분이었다. 카스트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결선 투표에서도 카스트에 투표했다.
더 중요한 동기는 보리치가 줄곧 견지한 정치적 방향이다. 보리치는 제도적 틀 안에서의 타협과 양보를 통한 점진적 개혁을 추구한다.
보리치는 당선 수락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확실한 진전은 광범한 합의로만 가능하다. 변화가 지속 가능하려면 점진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부문과 협력해야 한다. 조국의 부를 창출하기 위해 매일 애쓰는 노동자들, 재계와도 손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보리치는 운동에 자제를 요구한다. “모든 것이 한달음에 이뤄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 변화는 쉽지도 빠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책임감을 갖고 나아가야 한다.”
그 “책임감”은 신자유주의 우파를 안심시키는 것이다. “나는 선거운동 내내 공약한 바를 재확인한다. 사회적 권리를 확대하면서도 재정 책임을 다하고 거시 경제를 수호할 것이다 … 내게는 조국의 앞날을 위해 야당과 힘을 합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칠레의 부르주아지는 “사회적 권리 확대”를 위해 힘을 합칠 생각이 없다.
칠레 경제는 중국 경제의 성장에 기대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직후까지도 6.1퍼센트(2011년)에 이르는 높은 경제 성장률을 구가했다. 하지만 2013년 이후 국제 원자재 호황이 가라앉으면서 성장률은 1퍼센트대로 추락했다.
전임 피녜라 우파 정부는 자본의 편에서 노동계급을 맹렬히 공격했다. 팬데믹이 찾아오자 기업들에게 국내총생산(GDP)의 14퍼센트에 이르는 대규모 지원을 퍼주고 기업의 수익성 제고를 도모했다. 그럼에도 2020년에 칠레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 5.8퍼센트를 기록했다.
이제 경제 저성장, 물가 앙등, 국제적 금리 인상을 앞둔 칠레 지배자들은 보리치가 대규모 긴축을 시행하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2019년 항쟁 당시 500억 달러 이상(칠레 중앙은행 추산)이 국외로 유출됐던 것과 같은 일이 또다시 벌어질 것이라는 위협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대중의 운동은 단속하면서 자본가·우파들과 “거국적 협력”을 도모하는 보리치의 전략은, 2019년 항쟁에서 드러난 변화 염원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집권, 운동, 좌파
보리치는 대중의 극우 반대, 진보적 변화 염원 덕에 당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리치가 대중의 행동을 고취하는 방향으로 그 염원을 대변한 것은 아니었다.
2019년 10월 칠레 대중은 피녜라 정부의 지하철 요금 인상 시도를 계기로 시위에 나섰다. 이 시위는, 계엄과 시위대 수백 명의 죽음에도 굴하지 않는 거리 항쟁과 총파업으로 번졌다.
위기에 빠진 피녜라 정부는 지하철 요금 인상을 철회했지만, 운동의 요구는 이미 민주적 권리 확충, 복지 개선,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성차별 반대, 원주민 권리 보장 등으로 광범하게 확대됐다.
칠레 대중은 대대적인 사회 변화를 바랐다. 당시 한 여론조사에서는 정부가 내놓은 양보 조처를 불충분하다고 여긴 응답자가 80퍼센트나 됐다.
하지만 퇴진 위기에 몰린 피녜라 정부가 작은 변화를 약속했을 때, 운동은 기로에 섰다. 전진을 위한 전략이 중요해졌다.
염불보다 잿밥
기성 좌파 정당인 사회당과 공산당은 긴축과 민영화에 협조하거나 직접 추진하기도 하면서 대중을 배신한 전력 때문에 운동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 당들의 관심사는 운동의 성장이 아니라, 운동으로 드러난 반정부 정서를 선거에 이용하는 것이었다.
사회당·공산당 왼쪽의 급진 좌파들은 염불보다 잿밥에만 관심 있던 두 당에 비판적이었지만 이들과 다른 전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급진 좌파들은, 정치로부터 독립적인 ‘순수한’ 대중운동이 타락한 기성 좌파들의 전략에서 자유로울 것이라며 운동을 무비판적으로 찬양했다. 그래서 운동을 더 전진시킬 전략을 제시하거나 그럼으로써 성장하려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긴 공백 덕분에 보리치가 부상할 수 있었다. 보리치는 별다른 세력도, 대표성도 없었지만, 보리치를 고리 삼아 운동을 단속하려던 사회당·공산당의 도움으로 대(對)정부 “평화협정” 체결을 주도했다. 운동의 성장에는 별다른 구실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 과실을 이용하려고만 했던 이런 세력들 덕에, 위기에 처했던 피녜라 정부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거대한 항쟁이 분출했지만 투쟁을 전진시킬 급진적 정치 전략이 부재한 상황에서 기성 권력자들과 타협을 도모하는 온건 개혁주의 전략이 득세하는 것은 칠레만의 일이 아니다. 2011년 이집트, 2010년대 그리스, 2019년 수단에서도 그런 일은 거듭됐다.
단속
보리치의 정치적 롤모델은 스페인의 포데모스였다. 스페인에서도 사회당은 긴축을 추진한 전력 탓에 운동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포데모스는 이런 사회당과 2019년부터 연정을 추진했다.
포데모스 지도부와 마찬가지로 보리치도 운동을 더 전진시키기보다는 어느 정도 수준에서 단속해, 그런 운동이 제3 정당의 선거적 성취로 수렴돼야 한다고 봤다.
보리치는 포데모스를 본뜬 ‘광범전선’ 결성을 호소했다. 공산당을 비롯해, 이제껏 운동의 외곽에 있던 소수 좌파·페미니스트들이 모여들었다.
보리치의 ‘광범전선’과 공산당은 새 헌법 제정 요구를 이용해 운동을 기존 체제의 틀 안으로 단속했다. 운동의 자생성만 일면적으로 찬양하던 칠레의 급진 좌파들도 새 헌법 제정을 둘러싼 논쟁으로 용해됐다.
이후 칠레 정국은 헌법을 새로 제정해야 할지 말지부터 재론하는 지리한 과정에 휘말려 들어갔다. 새 헌법의 내용이 무엇일지는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다.
그런 과정 끝에 대통령에 당선한 보리치는 이제 운동을 더 단속하고 타협을 밀어붙이려 한다. 자신이 칠레 자본주의 국가를 운영할 만한 사람임을 자본가들에게 납득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계급을 공격하라고 요구하는 체제에서, 그런 타협으로는 약속한 개혁을 실현할 수 없다.
그런 방향을 추구했을 때의 결과를 시사하는 사례들이 있다.
보리치가 모델로 삼은 포데모스가 바로 그런 사례다. 포데모스는 한때 자신이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던 사회당이 이끄는 연립정부에 참가했다.
그 정부는 팬데믹·경제 위기에서 대중의 안전보다 대기업의 이익을 우선하다 위기에 빠졌다. 포데모스는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극우 정당 ‘복스’보다 더 많이 득표하겠다는 목표도 달성하지 못했고, 몸소 후보로 출마한 당 대표 이글레시아스는 초라한 성적을 거둔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칠레 역사에는 훨씬 더 비극적인 사례가 있다.
1970년 집권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는 사회주의 정부를 자처하며 주요 산업 국유화를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아옌데도 급진적 운동을 단속하면서 지배자들과의 타협을 통해 변화를 이룬다는 전략을 추구했다.
그 대가는 칠레 대중의 피로 치러야 했다. 아옌데 정부는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몰락했고, 이후 유혈낭자한 학살과 독재가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칠레에는, 피노체트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극우가 피노체트 퇴임 이래 가장 크게 성장해 있다.
운동과 전략
그럼에도 카스트의 패배와 보리치의 집권은 노동자 대중에 자신감을 줬다. 이는 운동이 전진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
하지만 그런 전진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지금 칠레 자본주의가 처한 중첩된 위기 속에서 자본가·우파들은 기득권을 지키려고 공격을 벼르고 있다. 보리치식 “조국을 위한 화합과 단결”(사실은 기성 권력자들과의 타협) 전략은 대단찮은 개혁조차 성취하기 어려울 것이다.
칠레 노동계급, 혹은 적어도 그들의 가장 선진적인 부위는 지난 상황 전개에서 올바른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 진정한 변화로 가는 길이 의회 내 타협과 “거국” 정부에 있지 않음을 명심하고, 변화의 진정한 동력인 전투적인 대중운동을 재건하는 데에 다시 매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