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생각한다
빅뱅을 낳을 세계의 경제와 정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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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의 다중 위기는 모든 면에서 악화되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악화시키고 있다. 종말론적 전망은 피해야 하지만, 이 체제가 과연 앞으로 어떻게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먼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자. 미국과 다른 나토 회원국들이 공급하는 무기로 우크라이나군이 성공을 거두면서, 러시아가 핵무기를 동원한 확전을 고려해 그럴 개연성이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군은 크림반도와 러시아 영토를 잇는 다리를 폭파하는 공격을 했다.(16면에 실린 “러시아와 미국 모두 ‘아마겟돈’ 운운하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새 국면”를 보시오.) 이는 미국과 나토 강대국들을 전쟁에 더 직접적으로 관여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젤렌스키는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하기 전에 선제 타격을 해야 한다고 미국에 요구했다. 60년 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카스트로가 흐루쇼프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도 흐루쇼프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14~15면에 실린 “미국과 러시아가 핵전쟁 문턱에 갔을 때”를 보시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중 갈등이 초래한 국제 질서 불안정을 더 심화시켜, 나머지 지역에서의 지정학적 위기를 더욱 첨예하게 만들고 있다.(본지 428호 “세계 곳곳에서 제국주의적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를 보시오.) 개전 몇 달 만에 대만해협에서 미-중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됐다.
중국 포위 전략의 한 축으로서 한·미·일 군사 공조 강화는 중국의 신경을 건드릴 뿐 아니라, 미국의 오랜 봉쇄·제재에 시달려 온 북한의 위기감과 반발도 자극하고 있다.
최근 핵추진 항공모함까지 동원된 한·미·일 동해 해상 훈련에 대응해 북한은 중·단거리 미사일을 연이어 발사했다. 이 훈련은 북한뿐 아니라 몇 주 전 동해 북단에서 진행된 중국·러시아 등의 연합 훈련도 의식한 것이었다. 지난 10여 년간 중국은 러시아·북한과 가까워졌고,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공식 지지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북한이 이번 미사일 발사를 전술핵 운용 훈련이라고 밝히자 일본 우파는 이를 재무장 정당화에 재빠르게 이용하고 있다. 한국 우파도 핵 보유 필요성을 주장하는데, 미국은 난색을 표하며 ‘확장 억제’(기존의 ‘핵우산’보다 포괄적이고 강한 표현)를 한국에 제공하겠다는 입장이다.
경제 불안정
위기의 또 다른 측면으로, 증대하는 경제 불안정이 있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인플레이션을 잡는다며 일제히 금리를 급격하게 올리면서 금융 시장은 두려움에 질렸다.
얼마 전 영국에서는 파운드화가 붕괴하고(본지 434호에 실린 “파운드화 가치 급락: 영국발 금융 공황이 올 것인가?”를 보시오), 금융 시장을 키워 온 파생금융상품으로 인해 연기금이 붕괴 직전까지 갔다.
이는 영국 보수당 정부가 자신의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고집하며 저지른 어리석은 짓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장의 더 광범한 불안정을 배경으로 벌어진 일이다. 이 불안정은 또 경기후퇴를 낳을 공산이 크다.
한국에도 금융 위기와 경제후퇴의 복합 위기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한국은 원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미국보다 먼저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지만, 지금 고환율-고물가-고금리가 서로를 부추기는 악순환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금리 인상은 불리한 패를 쥐고도 요행을 바라며 상대를 따라 판돈만 올리는 도박꾼의 행동과 닮았다.
수출 중심 경제인 한국은 세계경제 침체의 타격을 더 크게 받을 것이다. 6개월 연속 무역 적자는 1997년 ‘IMF 위기’ 이후 25년 만이다. 에너지 수입 가격이 오른 탓도 있지만, 반도체 수출 부진 탓이 크다. 9월 반도체 수출은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삼성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은 전기 대비 23퍼센트, 전년 동기 대비 32퍼센트 줄었다.
여기에는 중국의 경기가 가라앉고 있는 영향이 크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과 중국의 경제적 상호의존이 증대하면서 두 경제는 ‘동조화’돼 왔다. 그 결과 한국의 주식·부동산 시장이 취약해지고 기업·가계의 부채 위기와 외환 위기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금융 불안정이 깊어지고 있다.
이런 당면 위기들은 더 근본적인 이윤율 위기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이 구조적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중앙은행의 개입과 저금리에 중독됐다. 그 결과 거품이 끼고 취약한 금융 시스템이 형성됐고, 수많은 좀비 기업들이 경제를 짓누르게 됐다.
그래도 금리가 낮은 동안에는 이런 상황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중앙은행들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금리를 경쟁적으로 올리고 있다. 이는 상당한 불안정을 낳고 위기를 악화시킬 것이다.
또한 금리 인상은 미국이 위기의 대가를 이웃 나라들에 떠넘기는 것이기도 하다(근린궁핍화정책). 달러 대비 환율을 끌어올려 다른 나라들, 특히 개발도상국·빈국에서 수입 물가 상승과 결합된 생계비 위기와 부채 위기도 낳고 있다. 수개월 내로 혹독한 세계 경기후퇴가 올 공산이 매우 크다.
여기에다 에너지 위기도 있다. 이 위기는 더 큰 생태 위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에너지 위기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푸틴이 러시아의 가스·석유 수출을 지정학적 무기로 삼으면서 더 악화됐을 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른 페르시아만 연안국들이 푸틴에 호응해 석유를 감산해 유가 하락을 막으면서 더 악화됐다.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이런 결정은 그동안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의 반영이며, 미국 중간선거를 의식하고 야당인 공화당을 이롭게 하려는 것일 수 있다.(3면에 실린 “중동 산유국들의 석유 감산 — 미국의 패권은 쇠락하는가?”를 보시오.)
극우
위와 같은 다중 위기들은 정치적 불안정을 낳는다. 체제가 직면한 심대한 위기는 현재로서는 여러 유럽 나라들에서 극우가 전진하는 상황을 낳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인 조르자 멜로니가 총리직을 거머쥐게 됐다.(본지 435호 “멜로니의 이탈리아 총선 승리에 관한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의 성명”)
물론 이는 100년 전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과 같은 상황, 즉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한 상황은 아니다. 멜로니의 성공은 선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형제당이 이번 선거에서 얻은 표는 대부분 베를루스코니의 전진이탈리아당과 살비니의 동맹당의 득표 감소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파시스트 정당이 이끄는 정부가 유럽 주요국에 들어선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이는 다른 곳의 파시스트들을 고무할 것이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도 르펜이 상당한 성적을 거뒀지만, 르펜의 국민연합은 프랑스 정치에서 언제나 고립된 세력이었다. 이에 비하면 멜로니의 당선은 파시스트가 총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이탈리아 정치 체제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인플레이션과 우크라이나 전쟁, 이탈리아의 막대한 부채(이것은 유로존에는 시한폭탄과 같은 문제다)가 이런 사태를 낳은 핵심 요인들이었다.
유럽에서는, 난민에 대한 유럽연합의 계속되는 공격도 극우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했다. 유럽연합의 난민 공격은 현재 다른 심각한 위기 속에서 잠시 관심에서 밀려나 있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다시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브라질에서는 모두가 룰라의 낙승을 예상했지만, 실제 투표에서는 극우 대통령 보우소나루가 룰라를 바싹 추격했다.(6~7면에 실린 “룰라 대 보우소나루 결선을 앞둔 브라질 대선”을 보시오.) 보우소나루는 성령파를 비롯한 복음주의 교회를 이용해, 특히 경제적으로 더 부유한 층에서 지지 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5년 만에 시장주의적인 우파 정부가 등장해 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 윤석열의 지지율이 추락했고 정치적 불안정은 커지고 있다. 여기에 북한의 군사적 시위가 드세어, 남한의 여야 정치권을 더 날카롭게 균열케 하고 있다.
개혁주의의 실패
극우의 잇따른 전진은,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개혁주의 문제에서 결코 분리해서 볼 수 없다.
멜로니의 성공은 이탈리아의 중도좌파 정당인 민주당, 더 일반적으로는 노동조합과 좌파의 실패가 남긴 공백 덕분이다. 프랑스에서 르펜과 국민연합이 전진할 수 있었던 것도 사회당이 실패하고 멜랑숑과 그의 당도 (선거를 넘어선)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극우 정당 국민의소리(Vox)의 부상도 포데모스가 참여하고 사회당이 이끈 연립정부의 실패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한국에서 우파 정부의 등장은 ‘촛불 개혁’을 표방하고는 개혁 염원 배신과 뻔지르르한 말잔치 사기극을 벌여 우파에게 반사이익을 안겨 준 부르주아 (노골적 친자본주의) 개혁주의 문재인 정부와, 단호하게 그 정부와 결별하지 못해 정신적 외상과 내상을 크게 입은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온건좌파 정당들의 무기력 탓이 크다.
한편, 심각한 위기와 양극화는 투쟁을 낳기도 한다. 올해 상반기 스리랑카에서 벌어진 항쟁이 그런 사례다. 현재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에도 생계비 위기에 항의하는 성격이 일부 있다.
생계비 위기가 투쟁을 전면화하고 추동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영국 상황이 이를 잘 보여 준다. 현재 영국에서는 25만 명이 파업을 벌이는 등 노동자 투쟁이 오랜 침체를 딛고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영국보다는 규모가 작아도 한국에서도 화물 운송 노동자들과 대우조선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이 광범한 지지를 얻어내 일정한 정치적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투쟁이 좌파적으로 되고 전면화하는 것이 자동적이지는 않다. 물론 심각한 위기 속에서 일부 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투쟁에 나설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정치인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투쟁을 필요한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한다.
여러 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가령 영국에서는 파업이 오랜만에 귀환했고 대중의 지지와 공감을 얻고 있지만, 대개 하루 이틀 파업 정도이고 파편화돼 있다. 노동조합회의 TUC의 지도자들은 이 투쟁들을 서로 연결시키거나 어느 수준 이상으로 고양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투쟁이 현재 대중의 분노와 (퍼펙트 스톰의 발생지가 될지도 모를) 영국이 직면한 위기의 수준에 조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간극은 파업뿐 아니라 노동조합들이 주도하는 생계비 위기에 맞선 거리 시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세부적 양상은 다를지라도 이런 영국 계급투쟁의 핵심 특징은 한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부 투쟁들에서 투쟁성이 발휘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문재인 정부 출범 후의 지난 몇 년간의 투쟁들은 노조 지도층의 조합주의적 시야를 벗어나지 않았고, 노동계급 전체의 지속적이고 좌파적인 투쟁으로 확대되지 못했다.
온건좌파 정당들은 이런 문제에 도전하지 않고 대체로 노조 지도층과 보조를 맞췄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연대〉 지지자들이 좌파적 노동조합 관료는 물론 매우 온건한 노동조합 관료나 개혁주의 정당들과 함께 광범한 운동을 건설할 기회를 무시하거나, 현실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오불관언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위기와 불만이 커지는 것을 운동을 건설할 더 큰 가능성을 실현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혁주의 정치인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싸울 땐 그들을 지지하면서도 그들의 약점과 실수들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 극우의 부상에 관해서 다룰 때 언급됐듯이 좌파의 실패가 남긴 공백은 쓰라린 대가를 치르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위기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모종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관여하는 동시에 배척질 없이, 온건, 급진 막론하고 좌파 전체로 연대를 확대하고 기층의 독립적인 투쟁과 행동을 고무하는 주장을 펼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