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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능력주의, 공정
평등을 원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글은 11월 1일에 같은 제목으로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에서 한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발제와 정리 발언을 녹취한 것이다.

세계적 마르크스주의 석학이자 《평등》의 저자인 알렉스 캘리니코스

먼저 핼러윈에 끔찍한 참사를 겪은 한국인들에게 애도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 충격적이고, 이른바 공권력이 보통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심한지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평등을 다룬 제 책을 번역해서 출판한 책갈피 출판사에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책의 영문판은 2000년에 출판됐습니다. 여러 면에서 굉장히 오래 전이죠.

당시는 경제적으로 보면, 예컨대 중국이 WTO에 가입하는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여전히 전진·확장하던 때였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당시는 ‘제3의 길’이 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제3의 길’은 시장 경제와 사회 정의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이 이런 주장의 대표 주자였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여러모로 변했지만, 제 책의 기본 논지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르주아 혁명의 이상과 모순

첫째 요지는, 평등이라는 이상은 1640년 영국 혁명, 1776년 미국 독립혁명,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등 위대한 부르주아 혁명의 시기에 강력한 정치적 이상으로 제기됐다는 것입니다.

평등이라는 이상은 급진적인 해방의 가능성을 제시해 줍니다. 예컨대 1776년 7월에 작성된 유명한 미국 독립선언문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여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됐고 생명권·자유권·행복추구권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그 모순이란,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이 남성만을 가리키고 여성은 배제됐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은 버지니아의 노예 소유주였습니다. 그는 흑인 노예들을 결코 평등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죠.

문제는 단지 제퍼슨의 인종차별만이 ─ 그것도 분명 문제지만 ─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의 첫 장들에서 밝히듯, 경제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모순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자본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듯합니다. 모두가 평등한 주체로서 시장에 참여한다는 거죠.

하지만 그 이면을 들춰 보면, 사실 경제적으로 자유는 없고 불평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노동시장에서 하는 거래를 떠올려 보십시오. 언뜻 보면 둘은 자유롭고 평등한 시장 행위자입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자본가는 그 대가를 지불한다고 하죠.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평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노동자가 가진 것은 오직 자신의 노동력뿐입니다. 그래서 노동자는 살기 위해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하고, 그것도 자신이 착취당하는 조건으로 판매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표면적 평등 이면에는 불평등이 있습니다.

능력주의에 대한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의 비판

둘째 요지는, 이런 모순이 대략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떤 형태를 취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소득과 재산의 불평등이 계속 증가했습니다. 이 과정은 제 책보다 나중에 나온 토마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에 매우 잘 묘사돼 있습니다.(피케티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루겠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평등에 관한 사상을 발전시킨 일단의 철학자들이 북미와 영국에서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로 불리게 되죠. 《정의론》으로 유명한 존 롤스, 로널드 드워킨, 아마티아 센, G.A 코헨 등이 그런 사람들인데, 이들은 급진적인 평등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이들이 특히 비판하는 대상 하나는 바로 능력주의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부르주아 주류 담론에서는 평등이 능력주의와 동일시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지위·부·권력의 불평등이 능력으로 정당화됩니다. 지위의 불평등한 분포가 재능의 불균등한 분포를 반영한다는 것이죠.

이런 관념의 문제점 하나는 완전히 허구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지금 영국에는 국가 지도자가 둘 있는데요. 한 명은 국왕 찰스 3세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을까요? 얼마 전에 엄마가 죽어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다른 한 명은 최근에 총리가 된 이른바 ‘선출된 정치인’ 리시 수낙입니다. 수낙은 찰스 3세보다도 더 부유합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부자가 됐을까요? 근면 성실하게 일해서? 절대 아닙니다. 억만장자 인도인의 딸과 결혼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이것이 이 사회에서 나타나는 능력주의의 현주소입니다. 한국에도 이런 사례는 차고 넘칠 것입니다.

자본주의 지배자들 이들은 능력보다 세습과 특혜, 부정 부패로 부와 권력을 축적했다 ⓒ출처 경제단체협의회

평등주의 철학자들은 이런 지적에서 멈추지 않고 능력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했습니다.

능력주의의 전제는 ‘어떤 능력이 뛰어나면 이를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롤스는 바로 여기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왜 재능이 있다고 해서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냐고 말이죠.

가령 제가 타고난 유전자 덕분에 달리기나 수학을 잘한다고 해 봅시다(물론 실제로는 둘 중 어느 것에도 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제가 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제 유전자가 그렇게 구성된 것일 뿐이죠.

또, 수낙처럼 제 부모님이 저를 좋은 중등학교와 대학교에 보내 준 덕에 금융가에 취직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 봅시다. 그 역시 제가 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논증에 기초해 롤스는 재능의 분포가 “도덕적으로 임의적”(롤스의 표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즉, 재능 여부에 따라 어떤 대접을 받거나 받지 못할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롤스는 마르크스가 《고타 강령 비판》에서 제시한 것과 비슷한 논지를 전개합니다.

이런 논증을 통해 평등주의적 철학자들은 ‘심층적 평등관’이라고 부를 만한 급진적인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잠재력을 만개시킬 기회를 모두에게 평등하게 제공하는 사회를 조직하자는 것입니다.

이 모든 논의는 좋은 말입니다만,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자유주의자라는 것이죠.

사회주의자인 코헨 정도를 제외하면 이 철학자들은 모두 심층적 평등이 자본주의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오류입니다.

토마 피케티와 불평등

이 대목에서 피케티가 보여 준 것을 살펴봅시다.

피케티는 부의 불평등에 주목합니다. 피케티가 많은 연구와 방대한 통계를 통해 보여 준 바는, 20세기 중반부터 적어도 유럽에서는 부의 불평등이 줄었다는 것입니다.(불평등이 줄었다는 것이지 평등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피케티는 이렇게 불평등이 감소한 원인 중 하나로 제2차세계대전이 몰고 온 혼란과 파괴를 지목합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볼 수 있듯, 폭탄을 마구 투하하면 많은 부가 파괴되죠.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복지국가가 발전해 부가 어느 정도 재분배됐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계 최대 자본주의 경제 대국인 미국에서는 그런 재분배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1970년대부터는 재분배가 역전돼, 제1차세계대전 이전 수준의 불평등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신자유주의가 자본 축적의 장애물을 모두 제거하고 세법을 바꿔서, 특히 부자들이 더욱 부유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케티는 평상시 자본주의에서는 갈수록 부의 불평등이 커져서 부익부 빈익빈이 강화된다는 일반 법칙을 제시했습니다.

피케티가 제시한 이 법칙은 다소 기계적입니다. 피케티는 자본주의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경제적 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화합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계급투쟁의 구실을 간과합니다.

이 점에서 데이비드 하비가 옳은 지적을 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가 계급의 힘을 복원하는 프로젝트였다고 말입니다.

즉, 미국의 레이건이나 영국의 대처 같은 정치 지도자들이 영국의 광원 노조나 미국의 항공 관제사 노조 같은 조직 노동자 집단에게 커다란 패배를 안겨 주고 계급 세력 균형을 다시 자본가에게 유리하게 되돌려 놓았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계급투쟁

마르크스의 저작으로 돌아가 보면, 이런 논의를 마르크스는 다른 형태로 제시합니다.

《자본론》 1권에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 궁핍화가 자본 축적의 절대적 일반 법칙이라고 지적합니다.

마르크스는 왜 노동계급을 출발점으로 삼았을까요? 노동계급이 가치를 만들고 따라서 자본가들의 이윤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임금이 높든 낮든 노동자의 처지는 자본이 축적되는 것에 비례해 악화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노동계급 임금이 높든 낮든 노동자의 처지는 자본 축적에 비례해 악화된다 ⓒ조승진

다른 대목에서 마르크스는 절대적 궁핍화와 상대적 궁핍화를 구분했습니다.

절대적 궁핍화는 노동자의 임금과 소비 수준 자체가 절대적으로 줄어드는 것을 뜻합니다.

마르크스는 이 절대적 궁핍화를 특히 “산업 예비군”, 즉 실업자나 반(半)실업 상태의 노동자 그리고 오늘날 ‘불안정 노동자’로 불리는 집단의 존재와 결부시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 축적 과정 때문에 이런 집단이 계속 만들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반면, 상대적 궁핍화란 노동자의 실질 임금이 상승할 때조차 노동자가 창조한 가치에서 자본가들이 챙기는 몫이 더 커지는 상황을 말합니다. 노동자의 생활 수준이 하락하지는 않더라도 더 심하게 착취당하는 상황인 것이죠.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런 [절대적·상대적 궁핍화] 과정이 매우 뚜렷하게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지난 20여 년 동안, 특히 2008~2009년 국제 금융 위기 이후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변화 하나는, 국가가 금융 시장에 더 많은 지원을 제공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부자들이 소유한 자산의 화폐 가치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특히 팬데믹 기간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본주의는, 제 오랜 동료이자 동지였던 크리스 하먼이 말한 “자본의 내적 한계와 외적 한계” 모두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자본의 내적 한계란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한 위기로 치닫는 경향을 말합니다. 이 경향은 2007~2009년 국제 금융 위기 이후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자본의 외적 한계란 우리가 속해 있고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연을 자본주의가 점점 더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내적 한계와 외적 한계가 서로 갈마들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와 팬데믹은 자연 파괴의 사례인데, 그 와중에 2007~2008년에 시작된 경제 위기 역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2020년 이래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훨씬 격렬해졌습니다. 특히 이 위기는 지난 2년 동안 물가 급등으로 표현됐습니다.

현재 이에 대응해 한국을 포함한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금융 시장에 값싼 돈을 풀던 정책을 중단하고 금리를 급격하게 끌어 올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렇게 해서 실업률을 높이고 노동자들에게 더 낮은 임금 수준을 강요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계급 전쟁입니다. 이로써 저들은 임금을 억제해서 이윤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자본가들은 이번에도 자기가 일으킨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들이 치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계급 전쟁은, 팬데믹과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제국주의 간 전쟁이 절대적 궁핍화를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위기의 유일한 해결책은 노동계급이 집단적으로 투쟁해 기업주들과 그들의 체제에 맞서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단결시켜 싸우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제거해야만 이 끔찍한 체제에서 우리 자신과 지구를 해방시키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발제자 정리

매우 흥미진진한 토론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훌륭한 주장을 해 주셨는데, 특히 마지막 발언에 많은 공감을 표합니다.

정말이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자유와 평등을 대립시키곤 합니다. 그래서 평등 사회가 되면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당 지령에 똑같이 따르는 사회가 될 것처럼 묘사하죠.

그러나 사실 자유와 평등은 상호 의존적입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평등은 단지 돈의 불평등이 아니라 권력의 불평등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돈이 권력을 가져다 주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극소수의 대기업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돼 있습니다.

예컨대 트위터 사용자들은 일론 머스크라는 제멋대로이고 가학적인 억만장자가 트위터를 인수해 표현의 자유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아도르노가 잘 표현했듯, 평등한 세상에서는 두려움 없이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수자 우대

그래서 저는 소수자 우대 정책에 관해 말씀해 주신 분께 동의합니다.

우파가 소수자 우대 정책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 정책이 흑인 같은 집단이 겪는 특별한 불리함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자 우대 정책은 특히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거대한 투쟁, 대표적으로 흑인 평등권 운동이 남긴 성과입니다.

소수자 우대 정책은 불평등을 근절하지는 못하지만 특정 부정의·불평등을 완화시키는 시도입니다.

현재 미국 연방대법원의 다수파인 극우가 이를 공격하려 하죠. 이들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했듯 1960~1970년대 운동의 모든 성과를 무로 돌리고 싶어합니다.

능력주의

능력주의의 허구성 현실에서 사람들의 출발점은 매우 다르다 ⓒ출처 Yale Insights

능력주의가 지금 상황보다는 나은 것 아니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능력주의에는 아까 말씀드린 문제점 외에도 정치적 기획으로서 일관성이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분이 지적하셨듯, 실제 현실에서 사람들의 출발점은 개인마다 매우 다릅니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집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 아이가 삶에서 성공을 거둘 능력은 그 아이가 아직 태아일 때 어머니의 육체적·정신적 건강 상태에도 일부 달려 있습니다. 사회가 너무 불평등한 나머지 그 불평등이 처음부터 신체에 아로새겨지는 것이죠.

그런 현실을 바꾸려면 출발점을 똑같이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부의 상속을 철폐해야 할 뿐 아니라, 모두가 같은 위치에서 출발하는 단일한 평등주의적 교육 제도를 도입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함의가 무엇일지 생각해 봅시다.

일단 부를 대대적으로 재분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과연 자본가들이 ‘괜찮아, 우리 아이들도 다른 모든 아이들과 똑같이 경쟁시켜 줘’, ‘우리가 죽으면 우리 재산도 다 가져가’ 하고 말할까요? 정말로 그렇게 믿으신다면 제게 따로 연락 주십시오. 미국의 브루클린 대교를 아주 싼 값에 팔아 드리겠습니다. 제 말은, 자본가들이 그럴 것이라고 정말로 믿으신다면 무슨 말이든 곧이곧대로 믿으실 거라는 말입니다.

능력주의를 그것이 표방하는 바 그대로 실행할 유일한 방법은 부자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럴 힘이 있다면 뭐하러 그 힘을 능력주의에 낭비해야 하겠습니까? 곧장 완전한 평등을 실현하면 되죠.

금리 인상과 실업

금리를 인상하면 왜 실업이 증가하는지를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금리가 오르면 돈을 빌려 투자하는 것도 더 비싸집니다. 이자 부담이 늘어나면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은 결국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그 효과가 더 두드러집니다. 지난 15년간 경제 위기가 이어지면서 기업들이 갈수록 부채에 의존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금리를 올리면 취약한 기업이 더 많이 도산하고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돼 실업률이 높아집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더 낮은 임금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로써 물가 상승이 둔화하리라는 것이죠.

심지어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희생률이라는 개념을 고안했습니다. 희생률이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감내해야 할 실업률 수준을 뜻합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인플레이션은 임금과 하등 상관이 없고, 자연 파괴가 직간접적으로 생산 비용을 높인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착취

마지막으로, 불평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착취를 이해해야 한다는 첫 번째 발언자의 주장에 완전히 공감합니다.

이 체제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착취당한다는 것이 단지 자본가에게 이윤을 창출해 준다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동자는 착취당하기 때문에 힘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노동자가 자본가의 이윤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노동계급의 잠재력 노동자들이 이윤을 창출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타도할 힘을 가진다 ⓒ이미진

그래서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일손을 놓으면 자본가들은 이윤의 원천이 끊기게 되고, 경제가 (최소한 일부 부문이) 작동을 멈춥니다.

자본주의를 타도할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위대한 폴란드계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듯, 자본주의의 사슬이 만들어지는 바로 그곳에서 그 사슬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위기에서 빠져나갈 길도 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무하는 것이 한국의 노동자연대,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신다면, 노동자연대에 가입해서 함께 이 세상을 바꿔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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