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운다:
피노체트, 히틀러, 무솔리니: 미완의 쿠데타에서 권력 장악까지
〈노동자 연대〉 구독
12월 3일 쿠데타가 미수에 그친 뒤에도 윤석열은 계속 버티고 있다. 윤석열은 대통령 관저를 요새로 만들어 공수처의 체포영장 집행에 단단히 대비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윤석열이 무엇을 획책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윤석열은 쿠데타 기도 6시간 만에 계엄령을 해제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듯하다.
하루빨리 이전의 “정상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은 개혁주의자들은 윤석열의 버티기에 난감해하고 있다. 그럴수록 그들은 헌법재판소·국회·경찰 등 자본주의 국가기구들에 의지해 윤석열과 쿠데타 동조 세력에 맞서려고 부심한다. 하지만 역사에서 국가기구들에 의지해 쿠데타를 막으려다 재앙적 결과를 맞이한 사례들이 적잖음을 명심해야 한다.
현재 상황의 엄중함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처음에 미수에 그친 설익은 쿠데타가 그 뒤 더욱 무자비하고 냉혹한 반격을 가해 권력 장악에 성공한 역사적 사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은 역사가 반복되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로부터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칠레: 1973년 6~9월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렸다. 아옌데는 그 19일 전에 피노체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아옌데는 1970년 대선에서 승리해 집권했다. 사회당과 공산당을 비롯해 6개 정당이 참여한 “민중연합”이 배출한 정부였다.
아옌데 정부는 자본주의 국가를 이용해 대중의 낮은 생활수준을 개선하려고 한 개혁주의 정부였다
아옌데 정부의 개혁(특히 구리 광산 국유화 조처)은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투쟁을 고무했다.
칠레 지배계급은 계급투쟁 수준이 체제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고양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무자비하게 대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군부 내에서도 쿠데타가 공공연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첫 번째 쿠데타가 기도됐다.
1973년 6월 29일 로베르토 소우페르 대령이 지휘하는 산티아고 기갑연대가 수도의 거리를 점령하고는 권력 장악을 선언했다.
그러나 첫 번째 쿠데타 기도는 실패했다. 대중의 대규모 동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벌여 쿠데타를 막았다.
그러나 아옌데 정부는 노동계급의 힘에 의지해 지배계급과 전쟁을 벌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보해 지배자들을 달래려 했다.
양보의 대가
소우페르의 쿠데타가 실패하고 사흘 뒤, 아옌데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새로 구성한 내각에 군 장성들이 입각했다. 군대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사태를 해결하라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적은 누구인가? 전투적 노동자 운동이었다(공산당 지도자가 “초좌파”라고 부른).
그때 노동자들은 ‘코르돈 인두스트리알’(산업 벨트)이라는 투쟁 조직을 만들어 국가에 도전하고 있었다.
아옌데는 노동계급과 혁명의 힘을 믿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아옌데는 자본주의 국가를 수호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굴복했다.
노동자들은 아옌데의 전략적 실패에 대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아옌데도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쿠데타가 일어난 9월 11일 아옌데는 대통령궁에서 AK-47 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군사 쿠데타 과정은 극도로 야만적이었다. 쿠데타 당일 하루 동안 수백 명이 체포돼 군사시설, 감옥, 임시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후 수천 명이 산티아고의 국립축구경기장으로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다.
피노체트는 이후 17년 동안 철권 통치를 했다. 이 기간에 연행된 사람은 (인구가 대략 1000만 명인 나라에서) 10만 명을 헤아린다. 이 가운데 수천 명은 행적도 없이 사라졌다.
피노체트는 노동계급 활동가와 지도자들을 야만적으로 박멸한 뒤에 칠레를 노동자들의 방해가 없는 신자유주의 실험장으로 바꿔 놨다.
윤석열이 인생 책으로 꼽은 《선택할 자유》의 저자 밀턴 프리드먼은 이를 두고 “칠레의 기적”이라고 찬양했다.
독일: 1933년 1월~5월
1933년 1월 30일, 당시 독일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나치당의 선거 득표력은 약화되는 듯했던 때였다. 나치당은 1932년 11월 총선에서 1170만여 표를 획득했다. 7월 총선 때 획득한 1370만여 표보다 200만 표가 감소했다.
그런데도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 독일 지배계급이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겪고, 사회적 교착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치를 노동조합과 좌파 정당을 향해 휘두를 몽둥이로 이용해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힌덴부르크는 헌법 제48조를 이용했다. 48조는 윤석열이 여러 차례 언급한 “비상대권” 같은 것이다. 애초 사회민주당 소속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애용한 권한이었는데,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총리에 취임하는 데 이용된 것이다.
군 장성, 국가 고위 관료, 대자본가들은 독일 국가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고 재무장을 추진할 정부, 즉 헌법의 외피를 쓴 독재 정권을 원했다.
그럼에도 새 정부 구성을 놓고 나치당, 군 장성, 대통령 ‘고문’ 사이에 치열한 협상이 벌어졌다. 일종의 ‘거국 정부’였던 것이다. 나치당은 장관직을 두 개만 배분받았다(헤르만 괴링, 빌헬름 프리크). 나머지 장관직은 독일국가인민당(DNVP)에 돌아갔다. 이 당은 바이마르공화국과 베르사유 조약을 거부하는 반유대주의 극우 정당이었다. 부총리는 힌덴부르크의 측근인 프란츠 폰 파펜이 맡았다.
자본가들이 먼저 나치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2월 20일 히틀러의 최측근 헤르만 괴링은 재계 인사들과 만나 선거 자금 지원을 요구했다. “이번 선거를 끝으로 앞으로 100년 동안 선거는 없을 것이며, 선거 결과로 권력 판도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기업 총수들은 모두 300만 마르크의 기부금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새로 총리가 된 히틀러는 3월 5일 제국의회 선거를 다시 실시했다. 좌파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좌파 정당 지도자들을 구속하고 경찰(나치 수천 명이 충원된)이 무제한적 무기 사용을 승인받는 등 공포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나치당은 이전 선거보다 500만 표를 더 얻어 제1당이 됐지만, 과반을 얻지는 못했다.
그전 몇 해 동안(특히, 1930~32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독일 노동계급 운동은 나치를 박살 낼 기회를 허비했지만(후술하겠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노동자 운동이 나치를 패퇴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나치는 신속하게 반격에 나섰다. 3월 23일 제국의회에서 전권위임법을 통과시켰다. 공산당이 불법화됐다. 친자본주의 정당들도 차례로 “자진 해산”을 선언했다.
오토 벨스 사회민주당(사민당) 대표는 의회에서 유일하게 전권위임법을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너무 작은 용기였고 너무 늦게 발휘한 용기였다.
나치는 5월 1일 노동조합을 공격했다. 노조를 해산하고 노조원들을 구속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이제 사민당도 불법화됐다.
사실상 나치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집권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계급 조직들이 있던 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불가피하지 않았다
사민당은 조직 노동계급의 기반이 상당한 정당이었다. 사민당은 헌법과 법이 파시즘으로부터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켜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믿음에 따라 1932년 4월 대선에서는 ‘차악’이라며 육군 원수 출신 힌덴부르크를 지지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그해 7월 힌덴부르크는 비상대권을 발동해 프로이센 주 정부를 해산했다. 프로이센 주는 사민당의 아성이었다. 이 사건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숨통이 실질적으로 끊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민당의 개혁주의를 반대하는 정당의 구실이 중요했다. 공산당은 자본주의와 나치의 분쇄를 원하는 수십만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대중 정당이었다. 공산당원들은 거리와 지역사회에서 나치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부는 사민당과 공동으로 반나치 투쟁을 벌이기는 거부했다. 공산당 지도부는 사회민주주의가 파시즘의 쌍둥이 형제인 ‘사회 파시즘’이라는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의 당시 노선을 충실히 지지했다.
사민당의 개혁주의와 공산당의 종파주의가 결합돼, 저항과 반격의 잠재력이 충분했던 독일 노동계급은 변변한 투쟁을 하지 못한 채 패배했다.
이탈리아: 1922년 10월~1925년 12월
1922년 10월 28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조직 ‘검은 셔츠단’이 로마에 입성했다. “로마 진군”으로 불리는 봉기였다.
흔히들 이때 무솔리니가 정권을 장악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독재 정권을 수립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25년 12월이었다.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을 했을 때만 해도 군대는 파시스트의 권력 장악을 막을 힘이 있었다. 그러나 계엄령은 발동되지 않았다. 오히려 군 장성들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라고 요청했다. 내전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검은 셔츠단은 변변찮은 무장에 오합지졸의 조직이었다. 또, 무솔리니의 정당, 국가파시스트당의 의석수는 36석(전체 535석)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무솔리니는 군부, 대기업주, 우익, 로마 교황청의 지지를 받으며 총리가 됐다.
이탈리아 지배계급은 1919~20년 ‘붉은 2년’(비엔니오 로소)에 자신들의 질서가 도전받고 있다고 느꼈다. 자본가들은 무솔리니를 “빨갱이의 파업에서 이탈리아를 구할 애국자”라고 칭송했다.
무솔리니는 반동적 법률을 통과시켜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했다. 마침내 1925년 12월 24일 총리는 국왕에게만 책임을 지며 의회의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됐다. 지방 의회들은 해산됐고 상원이 지명한 집정관(포데스타)이 자치단체장이 됐다. 사실상 합법적인 독재 정권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은 필연적이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1922년 12월 공산당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1924년에는 파시스트가 사회당 대표 자코모 마테오티를 살해했다. 이에 대한 반발들이 무솔리니 정부를 위협했다.
하지만 사회당은 기회를 낭비했다. 사회당은 유권자의 3분의 1의 지지를 받는 대중 정당이었다. 그러나 사회당의 개혁주의 지도부는 군대와 경찰이 파시스트들과 협력하고 있는데도 자본주의 국가기구가 파시스트의 테러를 막을 수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었다.
사회당의 좌파가 분당해 1921년 공산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아마디오 보르디가를 중심으로 한 다수파는 파시즘을 그저 또 다른 우익 운동일 뿐이고, 자본주의하에서는 독재 정권이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든 아무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그래서 반파시즘 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세계 최초로 반파시스트 운동이 등장했다. 1921년 6월 제대 군인과 노동자들로 이뤄진 ‘아르디티 델 포폴로’(민중의 돌격대: ADP)가 조직됐다. ADP는 파시스트의 폭력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한 군사 조직인 동시에 대중 운동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었다.
ADP는 1921년 11월 무솔리니의 1차 로마 진군을 저지했다. 나흘 동안 게릴라 전투와 총파업이 벌어져 파시스트들은 결국 로마에서 철수했다.
또 다른 유명한 저항은 1922년 8월 파르마 전투다. 10월 로마 진군 직전에 파르마의 노동자와 농민들은 무솔리니의 최측근 이탈로 발보가 지휘한 파시스트들을 격퇴했다.
ADP에는 사회당과 공산당 당원들이 참가했다. 그러나 사회당 지도부는 1921년 8월 3일 무솔리니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면서 ADP의 투쟁은 역풍을 부른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파시즘의 위기 앞에서 타협은 재앙을 낳을 뿐이다.
반면, 공산당 지도자 보르디가는 ADP 지도부에 “비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이유로 공산당원들에게 탈퇴를 지시했다. 보르디가는 이념적 순수성을 반파시즘 공동 투쟁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1924~25년 공산당 내부에서 반파시즘 공동전선을 거부하는 보르디가 지지자들의 종파주의에 맞서 싸웠다. 이를 잘 보여 주는 문서가 1926년 1월에 발표한 〈리용 테제〉다. 공동전선을 핵심 전술로 제시한 매우 귀중한 문서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결정된 뒤였다. 그람시 자신도 1926년에 체포돼 1937년까지 수감됐다가 출소와 거의 동시에 사망했다.
이렇듯 정치적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ADP는 정치 지도부가 없는 채로 고립돼 버렸다. 이탈리아 노동계급과 좌파 전체가 파시스트 독재라는 대가를 치렀다. 로마 진군은 엉망진창이었지만, 결국 파시스트가 승리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패배했다면 그 결과는 상당했을 것이다. 무솔리니가 승리하지 못했다면 히틀러와 하인리히 힘러(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최고 책임자) 같은 자들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고 아우슈비츠가 야만의 대명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호에는 쿠데타에 맞서 승리한 사례로서 '1917년 러시아 코르닐로프 쿠데타'를 다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