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80년 — 그저 이례적인 역사적 사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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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홀로코스트, 즉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시작된 지 80년이 되는 해이다. 무엇이 이런 인종 학살을 낳았고 어떻게 해야 이런 끔찍한 비극을 피할 수 있을지 살펴본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1월 27일)이 되면 우리는 “절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 하고 외칠 것이다. 나치는 1941~1945년 사이에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다. 유럽 유대인 인구의 3분의 2였다.
여기에 더해 장애인과 로마인[“집시”는 이들을 속되게 이르는 말], 성소수자, 정치적 반대자들을 포함해 500만 명 이상이 나치 정권의 손에 끔찍하게 살해됐다.
이런 충격적인 참상은 이해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진정한 설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절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구호가 단지 구호로만 남지 않으려면 무엇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여러 죽음의 수용소로 이르는 길을 닦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역사 내내 우익·반동 통치자들은 대량 학살을 자행해 왔다. 나치 또한 인종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파시스트 정권은 여느 권위주의 내지 군부 독재와는 달랐다.
파시즘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에 성장했다. 사회적 위기, 이를 돌파할 노동자 운동의 부상과 실패가 이들의 성장을 가속시켰다. 파시즘은 노동계급 조직과 민주적 권리를 분쇄할 수 있는 대중 운동을 건설했다.
소위 “국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의회 민주주의는 보통 때는 자본가들에게 이윤 생산을 위한 안정을 가져다준다.
위기가 일부 고조되더라도 지배계급은 “무해한” 야당이나, 필요하다면 경찰과 군대를 이용한 탄압에 기대어 노동계급을 단속하려 들곤 한다.
그러나 위기가 심각해서 달리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하면 지배계급은 기꺼이 민주주의를 버릴 것이다.
나치가 권력을 잡다
192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의 노동자 운동은 거의 권력을 잡을 뻔했다. 노동자 운동의 위협을 저지하려면 경찰, 심지어 군사 독재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지배계급은 이런 노동계급 운동들을 분쇄하려면 이를 수행할 다른 대중 운동에 기대야 했다.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던 레온 트로츠키는 1930년대에 파시즘을 두고 “[노동계급의] 적대 계급이 쥔 면도칼”이라고 했다.
“부르주아 독재가 의회라는 연막과 함께 ‘일반적인’ 경찰력과 군대로도 더 이상 사회의 균형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될 때, 파시스트 정권의 차례가 온다.”
1920년대 내내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나치의 정식 명칭)의 힘은 미미했다.
1928년 총선에서 나치당은 2.8퍼센트를 득표하고 12석밖에 얻지 못했었다. 그러나 1929년 월스트리트 증시 대폭락 이후 2년 만에 나치는 제1 야당이 됐고 1932년 총선에서 제1 당이 됐다.
[그러나] 1933년이 돼서도 나치의 선거 전망은 어두웠고 [공산당이 불법화된 상태에서 치른 5월 총선에서 나치의 득표는 공산당과 사민당의 득표 합계보다 적었다] 파시즘은 결코 선거로 권력을 잡은 적이 없었다.
독일 지배계급은 이미 1930년에 사실상 민주주의를 껍데기만 남겨 놓았다. 군 장성, 우익 정치인들이 포진한 “남작들의 내각”을 통해 대통령 긴급 명령으로 독일을 다스렸다.
그러나 이들은 커지는 위기와 노동계급 반란에 대처할 수 없었다.
결국 지배계급은 나치의 요구를 들어주고 히틀러를 총리로 앉혔다. 질서 회복을 위한 “필요악”이었다.
그 특정한 시점에서 나치의 목표와 독일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바로 노동계급을 짓밟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홀로코스트와 나치의 다른 범죄들이 그저 독일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화학 복합기업 이게파르벤 같은 대기업들이 홀로코스트 당시 나치가 시행한 강제 노역에서 득을 본 것은 분명 사실이다.
이게파르벤은 아우슈비츠-모노비츠 강제수용소에 특수 목적 공장을 두고 수용소 유대인들의 노예 노동을 사용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는 단지 경제적 측면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홀로코스트가 자본가들의 이해관계의 연장선 상에 있었다면 왜 나치는 유대인들을 노예 노동으로 이용하지 않고 절멸하려 했겠는가?
제2차세계대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 나치는 안 그래도 모자라는 귀중한 군사적 자원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으로 돌렸다.
학살
심지어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에게 패배하고 있을 때에도 나치는 대량학살에 자원을 퍼부었다.
지배계급은 파시즘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나치는 단지 지배계급의 꼭두각시가 결코 아니었다. 나치의 사회적 기반은 트로츠키가 말한 “프티부르주아,” 즉 영세 자본가들, 자영업자, 농민층에 뿌리가 있었다.
이들은 자본가 계급처럼 부가 많지도 않았고 노동계급처럼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반격할 힘도 없었다.
그래서 “프티부르주아”는 대자본과 노동계급 사이에 짓눌린 처지가 됐다. 나치는 자본가들에게 노동계급을 분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런 중간계급 층들을 드높이겠다고도 했다.
이것은 곧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나치의 거리 돌격대인 “갈색셔츠단”은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두 번째 혁명”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온갖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자본주의에 도전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돌격대의 언사는 자본가들을 걱정스럽게 했다.
히틀러는 1934년 ‘장검의 밤’에 갈색셔츠단 지도자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순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트로츠키는 나치의 중간계급 기반을 “인간 먼지”에 비유했다. 이들을 뭉치게 하기 위해서 나치는 갈수록 유대인 혐오에 기대게 됐다.
이는 홀로코스트를 설명하는 데에서 중요하다. 지배계급은 나치에 기댔고, 나치는 유대인 혐오, 종국에는 인종 학살을 이용해 기반을 결집시켰다.
나치의 유대인 혐오는 그들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었고 오랜 유대인 박해의 역사 위에서 만들어졌다. [이번 호 관련 기사 ‘유대인 혐오의 뿌리는 무엇인가’를 보시오.]
오히려 나치의 독특한 점은 학살을 대공업 규모로 자행한 것과 나치 이데올로기의 목적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목적은 바로 자신들의 대중운동을 동원하고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나치를 흉내 내려 하고 사회에 널리 퍼진 인종차별을 먹고 자라나는 세력들이 존재한다.
반드시 이들에 맞서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못하도록, 파시즘을 낳는 이 썩어 빠진 체제를 끝장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