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피노체트 쿠데타 50년:
영웅적인 노동계급 반란의 패배에서 배울 교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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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월 11일 칠레 군장성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의 좌파 정부를 전복했다.
칠레군은 대통령궁을 보병과 탱크로 포위하고 전투기로 폭격했다. 아옌데는 사망했다.
뒤이어 유혈낭자한 탄압이 벌어졌다. 쿠데타 당일에만 수백 명이 체포됐다. 이후 수천 명이 국립축구경기장으로 끌려가 고문받고 살해됐다.
당시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시체 안치소를 취재한 〈뉴스위크〉 기자는 이렇게 썼다. “사망자 대부분은 가까운 거리에서 턱 밑에 총을 맞아 죽었다. 몇몇은 기관총에 맞아 온몸이 벌집이 됐다. … 모두 젊었고, 손이 거친 것을 보면 모두 노동자들이었다.”
이듬해 말 피노체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까지, 당시 칠레 인구 1000만 명 중 최소 3만 명이 군부에 의해 살해됐다.
군부는 칠레 최상의 노동계급 투사들을 체계적으로 색출해 고문·살해했다. 손발이 잘린 시체들이 매일같이 산티아고의 마초포 강을 떠내려 왔다.
당시에 미국 정부는 칠레 군부가 “정치적·경제적 질서를 복구하려는 굳은 결의”를 보였다며 이 쿠데타를 환영했다.
자기 앞마당인 중남미에서 좌파 정부가 사라지기를 바란 미국 제국주의자들은 칠레 군부를 배후에서 지원했다. 100만 달러를 들여 칠레 장교들을 훈련시켰고, CIA 요원들을 파견해 노동운동 활동가 색출을 도왔다.(이는 1968~1989년 미국이 중남미의 우익·군부를 지원해 좌파 정부들을 상대로 암살·쿠데타를 도운 비밀 작전 ‘콘도르 작전’의 일환이었다.)
칠레 군부가 일으킨 그 쿠데타는 당시 칠레의 계급투쟁 수준이 칠레 자본주의를 위협할 정도로 고양된 데 대한 대응이었다.
쿠데타 전에 칠레에서는, 1968년 유럽에서 시작된 국제적 항쟁 물결의 영향을 받아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보여 주는 대규모 저항으로 발전했다.
그러자 칠레 지배계급의 최후 보루인 군부가 나서서, 사회주의적 혁명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던 이 저항을 무자비한 대량 학살로 분쇄해 버린 것이다.
아옌데의 부상과 집권
쿠데타와 함께 생을 마감한 아옌데는 심각한 경제 위기와 급격한 노동계급 투쟁 고양을 배경으로 부상했다.
이미 1960년대부터 칠레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세계 시장의 불안정으로 칠레의 주요 산업인 구리 광업(대개 미국계 기업들이 통제하고 있었다)이 영향을 받아 칠레 경제 전체가 수렁에 빠지고 있었다.
기독민주당의 전임 우파 정부는 국가 투자를 통한 산업 부흥, 토지개혁을 통한 경제 현대화를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실현하지 않았다. 인플레이션과 노동계급 생활고가 극심해졌다.
이를 규탄하는 계급투쟁이 고양됐다. 노동자 파업이 3년 새 3배 가까이 늘었다(1967년 1939건 → 1970년 5295건). 또, 정부의 토지 개혁 약속 파기에 항의하는 무토지 농민 운동이 급성장했다. 학생들도 교육 개혁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였다.
친자본주의 정치 세력들은 위기의 책임을 두고 분열했다.
1970년 대선에서 아옌데는 사회당·공산당이 주도하는 선거연합, 민중연합(UP)의 후보로 출마해 당선했다.
신임 아옌데 정부는 대중 투쟁으로 드러난 변화 염원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아옌데가 은행, 대지주 토지, 구리 광산 등 칠레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기를 바랐다.
집권 첫 해에 아옌데 정부는 구리 광산들, 공장 90곳, 대규모 농토 1000여 곳을 국유화했고, 최저임금을 인상했으며, 토지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구리 광산 국유화는 의미가 큰 조처였는데, 구리 산업이 칠레 경제의 핵심이었을 뿐 아니라 국유화된 광산들이 미국계 기업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이 조처는 칠레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상상력을 크게 고무했다.
아옌데의 개혁은 임기 첫해에 실질적 효과를 냈다. 실업률이 떨어졌고, 생산직 노동자의 임금이 38퍼센트, 사무직 노동자의 임금이 120퍼센트 올랐다.
아옌데는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여겼지만 사실 그의 개혁은 케인스주의 정설에 입각한 것들이었다. 아옌데는 국가에 의한 투자로 경기를 활성화하고 유효수요를 늘리려 하면서, 민간 자본가와 지주들에게도 각종 혜택과 후한 보상을 제공했다.
아옌데의 전략에서 이런 경제적 ‘상생’은 정치적 ‘협치’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옌데는 의회를 이 같은 개혁을 추진할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반면 칠레 자본가들은 아옌데의 친서민 개혁을 증오했고, 특히 국유화 시도를 중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선거 패배의 책임 소재를 두고 분열해 있었고, 그 때문에 마땅찮지만 양보를 감내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아옌데 정부의 개혁을 더 많은 변화를 쟁취할 신호로 여겼고, 부실 사업체 국유화를 넘어서는 더 과감한 변화를 요구하며 조직과 투쟁을 확대했다.
경제 위기와 양극화 심화
아옌데 정부는 노동자 투쟁의 확대를 부담스러워했다. 특히, 집권 1년 만에 세계 경기 둔화로 칠레 경제가 다시 위기에 빠지면서 개혁을 제공할 여지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경제 위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파업 횟수가 폭증하고 있었다. 몇몇 파업에서는 노동자들이 자기 일터의 조건을 직접 결정할 권한을 요구하기도 했다.
반면 자본가들은 가뜩이나 마뜩찮던 양보들을 이제는 거둬들여야 한다는 태세를 굳히고,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사회 세력 사이에서 타협을 추구한다는 아옌데 전략은 막다른 길에 봉착하게 될 터였다.
아옌데 집권 1년째인 1971년 11월, 칠레 자본가들은 중간계급 수천 명을 동원해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가 내건 명분은 생활고에 대한 항의였지만, 그 진정한 목적은 아옌데 정부를 흔들고 우파를 정치적으로 재결집하는 것이었다.
1972년 10월에는 트럭 소유주들이 ‘파업’을 벌였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중소 자본가들이었고, 그들이 벌인 ‘사장 파업’의 목적은 칠레 경제를 혼란에 빠뜨려 아옌데의 통치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 칠레 자본가들은 잇달아 공장과 일터를 폐쇄했다.
아옌데는 자본가들을 달래려고 시도하며, 노동자들에게는 나서지 말고 “생산에 전념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아옌데와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협상이 파행과 교착을 거듭하는 동안 ‘사장 파업’은 계속되며 칠레 경제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반격에 나서지 않았다면 아옌데 정부는 이때 전복될 수도 있었다.
정점으로 치달은 계급투쟁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준동에 맞서려면 더 효과적이고 전투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당시 칠레 마르크스주의자 마리오 나인은 이렇게 술회했다. “노동자들은 화물차를 압류했고, 사장들이 닫아놓은 슈퍼마켓 문을 다시 열었다. 생산을 중단시키려 한 공장주들은 쫓겨났다.
“노동자들은 공장과 기업들을 점거했고, 그 자산을 압류해 집단적 노동자 민주주의라는 원칙에 따라 운영했다.”
노동자들은 ‘코르돈 인두스트리알’(‘공단’이라는 뜻, 이하 코르돈)이라는 투쟁 조직을 만들어, 서로 다른 공장·지역사회·일터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생산 활동을 직접 조율했다.
나인은 이렇게 말했다. “코르돈은 물자의 생산과 유통을 집단적으로 토론해 결정하고, 원자재 조달과 공장 운영을 조직했다. 코르돈은 특정한 정치적 소속을 뛰어넘어 노동계급을 규합하고 조직했다.
“코르돈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토대를 놓았고, 이후 모든 피억압자들의 운동으로 번졌다.” 코르돈이 성장하면서 노동자 등 서민들은 곳곳에서 ‘공동조직위원회’를 꾸려 지역·도시의 치안·유통을 직접 운영하려 했다.
코르돈과 공동조직위원회는 자본주의를 뛰어넘은 사회의 모습을 힐끗 보여 줬다.
이에 자본가들은 저항을 모조리 분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코르돈이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2년 말부터 친기업 언론들은 공공연히 군부 쿠데타를 선동하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우익(극우 포함)과 전투를 벌이던 노동자들은, 이제 무장하지 않으면 모두 분쇄될 것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코르돈의 무장과 자기 방어를 허용해 달라고 아옌데에게 호소했다.
아옌데가 코르돈·공동조직위원회로 드러난 노동자 투쟁을 고무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그 투쟁에는 칠레 자본가, 군부, 그리고 그들을 후원하는 미국 제국주의에 맞설 힘이 있었다.
잘못된 전략이 낳은 비극
하지만 아옌데는 우파를 달래는 가망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아옌데는 코르돈을 “극좌파”라고 비난했고, 노동자들에게 “토지·재산 불법 점유”를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1973년 4월 칠레의 가장 중요한 산업체인 엘 테니엔테 구리 광산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자, 아옌데는 파업을 비난하고 진압 경찰을 파견했다.
아옌데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코르돈의 무장해제를 명령했으며, 군부에게 “질서 회복” 권한을 부여했다. “엄정한 직업의식이 있는 칠레군”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정국을 안정시켜 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부는 코르돈 노동자들을 진압하면서 코르돈을 공격하는 극우 깡패들은 내버려뒀다.
아옌데는 내각에 군부 인사들을 포함시키는 개각을 두 차례나 단행했다. 이후 쿠데타를 주도할 피노체트도 이때 아옌데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
이런 일련의 선택은 재앙으로 이어졌다. 자본가들은 기세등등해진 반면, 코르돈 노동자들은 정치적·물리적으로 무장 해제됐다. 마침내 군부가 아옌데 정부와 노동계급 투쟁을 박멸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이를 저지할 힘이 남지 않게 됐다.
오늘날에 주는 교훈
아옌데 정부의 진정한 한계는 의회와 국가기구를 이용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민중연합의 개혁주의 전략에서 비롯했다.
아옌데는 국가기구(와 군부)의 중립성을 정말로 믿었고, 대중 투쟁이 의회를 통한 ‘협치’를 방해할 만큼 고조되는 것을 매우 경계했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치명적이었다. 군부·경찰·공안기구 모두가 아옌데 정부를 전복하고 노동계급 투쟁을 압살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공모하고 있었다. 의회에서의 타협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권력을 가진 자본가 계급과 자본주의 국가에 맞설 수 없다.
투쟁이 승리하려면 노동계급은 의회 민주주의의 한계 안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 전진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칠레 노동계급에게는 민중연합으로부터 독립적인 대안적 정치 전략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칠레 좌파들은 노동자들이 자체 행동에서 적절한 정치적 결론을 끌어내는 일을 사실상 가로막았다.
칠레 좌파들도 의회를 통해 사회를 바꾼다는 전략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민중연합의 차이는 국유화 대상 기업의 개수나 국유 토지의 면적 같은 양적인 것들에 불과했다.
칠레 공산당이 특히 그랬다. 민중연합의 주요 세력이던 공산당은 계급 간 상시적 연합을 통한 집권을 추구하는 민중전선 전략(관련 기사 ‘민중주의의 고차원적 형태, 민중전선이란 무엇인가?’)을 추구하고 있었고, 운동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한사코 경계했다.
그래서 공산당은 코르돈을 가장 앞장서 비난·공격했고, 자신이 영향을 미치던 노동조합들(대표적으로 구리 광산 노동자들)이 코르돈과 연결되지 못하게 막았다.
코르돈이 부상하던 1973년 초 칠레 좌파들이 가장 몰두했던 것은 3월 총선이었다.
그 대가는 칠레 노동계급이 피로 치러야 했다. 좌파 정부의 전복과 노동자 운동의 참담한 패배는 당시 국제 ‘1968’ 운동의 자신감에도 큰 타격을 줬다.
대량 학살로 집권한 피노체트는 가혹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대거 실시했다. 피노체트는 17년 동안 칠레를 독재 통치했고, 죽을 때까지 자기 죄를 심판받지 않았다.
칠레 9·11 때부터 오늘날까지도 많은 좌파들이 칠레의 비극을 들어, 역풍으로 분쇄되지 않으려면 사회 변화의 폭을 지배자들이 용인할 만한 수준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합리화한다.
하지만 칠레 혁명과 그 비극적 종말의 진정한 교훈은 정반대다.
칠레 노동계급은 그들에게 사회를 바꿀 힘이 있음을, 사회주의는 정치인들이 자본주의 국가를 이용해 위로부터 선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줬다.
자본주의 국가는 아래로부터 노동계급 투쟁으로 해체돼야 함을, 그리고 이에 정향된 전략을 추구할 혁명적 좌파가 노동계급에 뿌리 내리고 있어야 함을 비극적으로 보여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