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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독일 총리 취임 90년:
히틀러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

1931년 돌격대를 이끌고 행진하는 히틀러. 히틀러는 나치당의 폭력 조직인 돌격대를 이용해 노동계급 조직을 파괴했다 ⓒ출처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로 임명되며 권력을 잡았다. 꼭 90년 전 일이다. 히틀러의 집권은 독일 노동계급의 치명적인 패배였다. 그 패배는 이후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과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히틀러는 군에서 전역하던 1920년 초부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치 활동을 시작한 지 불과 13년 만에 권력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와 나치의 승리는 불가피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히틀러는 20대 초반까지는 별 특별한 것이 없었다. 미술대학 진학에 여러 차례 집착적으로 도전하는 것을 빼면 인생에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그저 그런 청년이었다.

히틀러가 삶의 의미를 찾은 곳은 제1차세계대전의 전선이었다. 독일군에 자원 입대한 히틀러는 상병까지밖에 진급하지 못했지만 두 차례 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장에서의 강렬한 경험은 히틀러에게 삶의 활력소가 됐다.

독일의 패전은 히틀러에게 인생의 의미를 빼앗은 사건이었다. 독일을 패전으로 이끈 1918년 11월 독일혁명과 그 뒤에 들어선 바이마르공화국은 히틀러에게는 철천지원수였다.

1919년 초 히틀러는 군사 행정부의 정보 사무소에서 일하며 독일 동남부 바이에른의 뮌헨으로 배치됐다. 그런데 그 직후인 4월 바이에른에서 봉기가 일어나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됐다. 그러나 이는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고립됐다.

당시 바이마르공화국의 국방부 장관이던 사회민주당의 구스타프 노스케는 정규군인 제국군과 극우 준군사 조직인 자유군단을 보내어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을 분쇄했다. 그 때부터 바이에른은 여러 극우 세력과 (나중에 나치당의 돌격대가 되는) 자유군단이 설치는 지역이 됐다.

히틀러는 그런 극우 정당의 하나이자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삶의 의미와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 극우 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분기탱천시키는 데서 다른 극우 인사들보다 뛰어났던 것이다.

히틀러의 연설은 논리의 치밀함이나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정책의 제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간단하고 쉬운 언어, 엄청난 자기 확신, 지목된 몇몇 적들에 대한 원색적이고 집요한 공격이 특징이었다.

히틀러가 적으로 지목한 대상은 (독일 경제를 파탄 낸다 해서) 국제 유대인 금융자본, (국민을 분열시킨다 해서)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제주의, (독일 패전의 책임자라고 해서) 바이마르공화국, (사회를 여러 이익집단으로 쪼개 혼란에 빠뜨린다 해서) 의회제 민주주의였다.

히틀러는 이 재능으로 극우 세력 사이에서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1922년 10월 28일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을 하며 집권한 것에서 롤 모델을 발견했다.

1923년은 결정적인 해였다. 독일에 극심한 위기가 찾아왔다. 독일이 전쟁 배상금을 갚지 못하자 프랑스가 독일 서부 루르 지역을 점령했다. 물가가 폭등했다. 제1차세계대전 전에만 해도 1달러에 4.2마르크였던 환율이 천문학적인 4조 2000억 마르크로 치솟았다. 이 살인적 인플레와 노사관계 불안의 결과로 10월에 공산당은 매우 유리한 상황에서 봉기의 기회를 맞았지만, 최후 순간에 그냥 주저앉았다. 독일혁명은 결국 패배했다.

바로 다음 달인 11월 히틀러는 나치 돌격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맥주 홀 쿠데타’다. 노동자 혁명이라는 대안이 유실된 상황에서 나타난 반혁명적 쿠데타였다. 이 쿠데타는 하루 만에 진압되고 히틀러는 반역죄로 수감됐다.

그렇지만 히틀러는 극우 세력에서 가장 유망한 인물이 됐다. 결정적인 시기에 대담한 도전을 감행할 자질을 보인 것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재판 과정을 정치적 선전의 장으로 삼으며 당당히 임한 것도 한 요인이었다.

1923년의 대위기를 넘긴 독일은 잠깐 안정기를 누렸다. 전쟁 배상금이 감면되고 외국 자본이 유입되며 경제 상태가 개선됐다. 바이마르공화국을 떠받친 가장 중요한 세력인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은 계속 올랐다.

이 시기 독일 극우 운동은 위기를 겪으며 재편됐다. 대부분 나치당에 흡수되거나 사라졌다.

나치당 자체도 전술을 변경했다. 그 전에 나치당은 독일 북부 지역에서는 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하려 애썼지만 효과가 거의 없었다. 이제 나치당은 농촌과 소도시를 공략했다. 나라 경제의 전반적 상태는 호전됐어도 농민과 도시 하층 중간계급 사람들의 삶이 개선되지는 않는 상황에서 생기는 불만을 공략한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

그러자 나치당은 선거에 점점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의회제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서가 아니었다. 의회제 민주주의를 파괴하기 위해 의회제 민주주의를 이용한다는 전술이었다.

다음은 1924년 4월에 열린 바이에른 주의회 선거 뒤에 히틀러가 한 말이다. “악취가 진동하더라도 제국 의회에 들어가서 가톨릭 세력과 공산당 세력과 맞붙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1925년에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일단 의회에 들어간 이상은 이것도 의회제를 포함하여 기존 체제에 맞서 싸우는 다양한 투쟁 수단의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의회에 진출한 민족 진영 의원이 고생만 죽어라 하고 별로 얻은 것도 없이 매달리는 그런 ‘능동적 협력’은 참여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참여는 극렬한 반대와 저항이요, 의회 안에서 기존 체제를 끊임없이 비판하는 것이다. 의회라고 해도 좋고 의회제라고 해도 좋고 그것이 얼마나 모순인지를 의회에서 비판하는 것이다”(이언 커쇼, 《히틀러Ⅰ: 의지 1889~1936》, 교양인, 2009, 346쪽).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나치당은 바이에른 지역에 국한된 지역 정당에서 전국에 조직을 둔 정당이 됐다. 그렇지만 나치당은 여전히 총선에서 얻는 득표율이 5퍼센트도 안 되는 군소 정당이었다. 독일 국민의 대다수는 히틀러와 나치당의 주장을 아직은 터무니없는 소리로 여겼다. 당 운영비를 대부분 당원들이 납부하는 당비로 충당하는 나치당은 재정이 쪼들렸다.

세계 대불황

나치당이 권력에 다가선 결정적 계기는 1929년 10월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대불황이었다. 세계 대불황으로 독일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생산이 급속히 줄어들면서, 1929년에는 130만 명이던 실업자가 1930년에는 300만 명으로, 1931년에는 430만 명으로, 1932년에는 510만 명으로 급증했다.

심각한 불황과 그것이 낳은 절망 속에서 나치당은 급성장했다. 빵 가게를 운영하다가 유대인 채권자의 빚 독촉에 시달려서 가게를 헐값에 처분하고 행상을 하며 근근이 먹고살게 된 사람이 나치당으로 모인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나치당은 1930년 9월 18퍼센트를 득표하며 제1 야당이 됐다. 그리고 1932년 7월에는 37퍼센트를 득표하며 제1당이 됐다. 히틀러 연구의 권위자인 이언 커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맺힌 것이 많고 자긍심을 잃어버린 사람은 모든 것이 ‘빨갱이’ 정부의 정책 때문이라는 설명에 혹했고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배신감과 피해의식이 너무나 컸다. 그냥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 정도가 아니었다. 1930년에 이런저런 동기로 나치당에 들어온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체제’ 자체에 극도의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히틀러가 잘 간파한 대로 가장 두드러진 감정은 증오심이었다. 히틀러는 줄기차게 증오심을 파고들었다. 사람들이 히틀러에게 모인 것도 그래서였다”(이언 커쇼, 《히틀러Ⅰ: 의지 1889~1936》, 교양인, 2009, 460쪽).

나치당의 폭력 조직인 돌격대도 이제는 성장의 요인이 됐다. 제복을 맞춰 입은 돌격대의 대규모 거리 행진은 미래를 잃은 청년들에게는 나치당이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고 역동적이고 활력에 넘치는 젊은 조직이라는 인상을 줬다. 제복은 소속감을 느끼게 해 줬다. 거리 시위를 홍보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라고 느끼게 해 줬다.

돌격대는 1931년 10만 명으로 성장했고, 1932년 초 30만 명으로, 그해 7월에는 40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제 나치당은 독일 지배계급에게 유력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히틀러와 나치당을 후원하는 자본가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독일 지배계급은 아직은 나치당에 권력을 완전히 내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히틀러에게 정부에 들어와 부총리를 하라고 제안했다. 히틀러는 부르주아지의 정부에 입각할 수 없다며 거절하고 총리직을 달라고 요구했다.

몇 달 동안 이어진 팽팽한 기 싸움은 결국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총리에 오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나치당이 선거에서 승리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 직전에 열린 1932년 11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1위를 했지만 의석을 절반 이상 차지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정부를 구성할 권한이 없었다. 대통령(힌덴부르크)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비유를 빌리면, 충치를 앓던 환자가 결국 피를 보더라도 치과에 가서 충치를 뽑아 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애석하게도, 히틀러와 나치당이 급성장하는 상황에서 변변한 저항이 일어나지 않았다.

당원이 100만 명 이상이던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은 합헌주의를 고집하며 무기력했다.

조합원이 500만 명인 독일 노총 ADGB의 지도부도 다를 것이 없었다.

혁명적 당을 표방했고 당원이 10만 명이 넘은 공산당은 나치와 사회민주당이 다를 바 없다(“사회파시즘”론)는 초좌파적 종파주의 노선에 빠져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당시 트로츠키는 설득력 있는 분석과 함께 나치에 맞선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단결 투쟁이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에 구현할 세력은 안타깝게도 없었다.

결국 1930년대의 위기는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야만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