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혁명 65주년:
미국 제국주의가 후원하는 독재자를 혁명으로 몰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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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이 파면됐다. 1960년 이승만도 4월혁명으로 쫓겨났다. 윤석열과 이승만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외쳤지만, 그 진실은 비상계엄을 통해 아래로부터 저항을 탄압하려다 권좌에서 쫓겨난 것이다.
윤석열의 12·3 쿠데타 기도가 헌재 판결문에서도 말한 “시민들의 저항”으로 좌절됐듯이, 4월혁명도 맨몸으로 탱크와 총칼에 맞선 아래로부터 대중적 저항의 위대함을 보여 줬다.
이승만은 1948년 집권 이래 경찰과 군을 동원해 정치적 탄압에 의존한 독재자였다. 4월혁명은 제국주의가 후원하는 부패한 독재자 이승만에게 맞선 민중혁명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전광훈을 비롯한 우익들은 5.16 군사 쿠데타가 4월혁명을 계승한 것이라며 4월혁명을 군사 쿠데타와 동일 선상에 놓고 말하고 있다. 기가 찰 노릇이다.
5.16 쿠데타는 4월혁명 정신의 계승이 아니라 완전한 부정이었다. 박정희는 4월혁명으로 싹트기 시작한 민주주의를 반동적 군사 쿠데타로 일거에 날려버렸다. 노동조합, 학생 자치 기구 등은 해체당했고, 집회 시위 결사의 자유는 부정당했다.
박정희 이후 전두환이 또다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4월혁명은 온전히 평가받지 못했다. 실제 정당한 역사적 평가는 1987년 군사정권에 맞선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투쟁 이후에나 이루어졌다.

정치 위기와 경제 위기
4월혁명의 배경에는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경제적 위기가 근본에 깔려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집권 자체가 정당성이 없었다. 1948년 이승만은 분단을 획책하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선거에 반대한 제주 4·3항쟁을 무참히 짓밟고 초대 대통령이 됐다.
처음엔 미군정이, 정부 수립 후엔 이승만이 제주 도민들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다 진압 명령을 거부한 부대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여순 반란 사건)
이승만은 국가보안법을 통해 강력한 탄압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한국전쟁 와중에는 계엄령을 선포해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키며 자신에게 유리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뤘다. 1954년에는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횟수의 제한 없이 대통령 출마를 가능케하는 사사오입 개헌도 단행했다.
이승만 정권의 장기 독재에 민중의 불만이 커지고 평화통일을 주장한 진보당 조봉암의 지지가 높아지자, 진보당을 해산시키고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사형시켰다.
그야말로 정치적 탄압에 의존한 장기 집권이었다. 4월혁명 직전에는 국가보안법을 더 개악해 언론 및 야당의 정치활동을 탄압했다.
이승만 정권은 정경유착의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그 출발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축적됐으나 패망 후 한국에 남기고 간 재산 즉, 귀속재산의 불하였다. 이승만의 자유당을 지지한 사람들은 귀속재산을 10분의 1에 불과한 가격에 특혜 불하됐고, 15년 이상 할부의 지급조건을 책정했을 뿐만 아니라 저리의 은행 융자를 받았다.
남한의 재벌 자본은 바로 이 과정에서 중요한 기초를 마련했다. 자유당에 부정선거 자금을 제공한 재벌은 167개사였고 이들이 제공한 총액은 94억 4천만 환에 달할 정도였다. 또한, 미국의 원조 자금은 이승만 정권의 지배 수단이 됐다. 자유당은 미국의 원조를 받는 공장 건설의 50퍼센트 이상에 개입했다.
김동춘 교수는 “시설은 귀속업체의 불하로부터, 원료는 원조 원면으로부터, 그리고 기업자금은 대충자금으로부터 확보할 수 있었던 이들은, 극단적으로 말해 별다른 자본 없이도 권력과 선이 닿으면 하루아침에 재벌이 될 수 있었다”라고 전했다.
이러한 부정축재와 생활고에 대한 불만은 4월혁명에서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요구로 터져 나왔다.
한편, 남한만의 단독정부로 수립된 이승만의 집권은 미·소 냉전체제의 결과였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남한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핵심 국가인 일본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중요해졌다.
그래서 4월혁명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맥그루더는 이승만 정부가 요청한 군대 출동을 허가했고 서울에 계엄군 투입도 허가했다.
분단과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남한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남한에 제공된 미국의 경제원조 규모는 31억 4천만 달러였다. 브루스커밍스에 따르면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액수는 유럽 전체에 대한 군사원조 액수보다 상당히 높고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대한 군사원조 액수의 4배”에 달한다고 한다.
1950년대 말 미국이 국제수지 압박을 받으며 경제위기에 빠지자, 미국은 원조 액수를 줄이고 그동안 무상으로 제공하던 것을 유상원조나 차관으로 전환했다. 이로 인해 남한 경제는 어려움에 처하는 상황이 됐다.
1959년에 발표된 미국의 ‘콘론 보고서’는 한국 상황에 대해 “젊은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지고, 또 양심이란 것을 지키는 사람은 전부 소외되거나 배척되고,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만이 출세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불원 한국 사회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마치 4월혁명을 예견하기라도 하듯이.
이런 정치·경제적 위기로 인한 대중의 불만은 학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터져 나왔다.
진짜 부정선거 3·15
이승만은 민중의 불만을 억누르고 독재정권을 영구히 유지하고자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1960년 3·15 부정 선거는 그 연장선에서 벌어졌다.
자유당 정부는 1959년 내무장관에 최인규를 임명하고, 전국 각 기관장에게 부정선거 방법을 지시했다. 4할 사전 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 완장 부대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등 그 방법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미국에서 갑자기 죽었고, 결국 이승만 단독 출마가 됐다. 당시 이승만은 85세로 고령이었기 때문에 유고 시 권력은 부통령에게 넘어가게 된다. 문제는 부통령 후보로 자유당의 이기붕보다 민주당 후보 장면의 인기가 높았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를 달라”며 시위를 벌였다(2·28 대구 학생 시위). 이승만 정부는 장면 후보 연설에 노동자와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에도 출근과 등교를 하도록 시켰다. 이날 시위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총체적 선거 부정에 항의해 벌인 시위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후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투쟁은 3·15 선거가 다가오면서 전국적으로 한층 더 확대됐다.
어찌나 부정선거가 심했던지 군대의 개표 결과는 유권자의 120퍼센트가 이승만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 드러났고, 이승만의 득표율은 80퍼센트, 이기붕의 득표율은 70~75퍼센트 정도로 하향 조정하라는 경찰 지령이 나올 정도였다. 결국 이승만 963만여 표(88.7퍼센트), 이기붕 883만여 표(79퍼센트)를 얻어 당선됐다.
3·15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이 마산 지역에서 터져 나왔다. 이날 경찰의 총격과 함께 최루탄 발사로 김주열 학생이 사망했다. 이기붕은 “총을 줄 때는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고 답해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저항이 만만치 않자 결국 정부는 책임을 물어 내무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강학을 해임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교복 차림의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떠올랐다. 분노한 시위대는 3만여 명으로 불어났고 시청과 경찰서, 파출소를 비롯 자유당 사무실을 습격했다.
이승만 정권은 초등학교를 제외한 전국 각급 학교에 3일간 등교 중지령을 내리고, 마산·창원 지역의 통금 시간을 연장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공산당이 들어와 뒤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는 특별담화문도 발표했다. 이는 폭력 진압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으로 학생들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마산 시민들의 저항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저항에 나섰다. 국회 의사당에서의 투쟁을 마치고 돌아가던 고려대생의 대열이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 ‘반공청년단’과 조직깡패 100명이 일시에 쇠파이프, 쇠갈고리, 몽둥이, 벽돌, 삽 등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습격했다. 고려대 학생 수십 명이 부상을 입고 길바닥에 쓰러졌으며, 그 일대는 피바다로 변했다.
피의 화요일
4월 19일,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제 부정선거 규탄을 넘어 “이승만 독재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서울시내 전역의 시위 군중의 수는 10만을 넘어섰다. 시위대는 국회의사당에서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를 표적으로 하는 혁명의 대열로 바뀌고 있었다.
경찰이 일제히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경무대 앞 시위 희생자는 사망 21명, 부상 172명이었다. 마치 시가전을 치르고 난 전쟁터 같았다. 곳곳에서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20만 명 정도 되는 시위대가 도심 거리에 넘쳐흘렀다.
정부는 서울 전역에 계엄을 선포하고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했다. 유혈 사태가 벌어진 부산·대구·광주·대전에도 계엄을 선포했다.
이날 전국적으로 사망한 사람은 서울에서 104명, 부산에서 13명, 광주에서 6명 등이었다. 역사는 이날을 ‘피의 화요일’로 기록했다. 이승만은 여전히 “이번 시위 사태는 대중적 불만의 폭발이 아니라 장면 부통령과 천주교 노기남 주교의 공작”이라며 현실을 호도하고 있었다.
결국, 이기붕이 부통령과 공직에서 모두 사퇴하기로 발표하고 이승만의 자유당과의 결별이 이루어졌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4월 25일, 대학 교수들이 이승만의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거리로 나섰다. 탱크와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의 시위 진압 시도에도 민중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일부 사병들이 시위대 편으로 넘어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탱크 위로 올라가 환호하기 시작했다. 26일도 10만 명 가까이 모였다. 시위를 진압하려던 사병들은 시위대에 섞여 버렸다.
위기감을 느낀 미국은 이승만의 사임을 강력히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의 CIA 책임자 피어 드 실바는 이승만 정부에게 “2시간 안에 총사퇴하지 않으면 여러분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했다.
결국 이승만의 하야가 발표됐다. 4월 28일 이기붕 일가는 자살했고, 이승만은 도망치듯 하와이로 떠났다.
1960년 항쟁의 전 기간을 통해서 보면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당했다. 이 시기 항쟁은 주로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하층 노동자(32.8퍼센트)와 무직자(17.7퍼센트)들의 참여와 희생도 두드러졌다. 그야말로 민중항쟁이었다.
미완의 혁명
4월혁명은 부패한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함과 동시에 민족 통일, 자립 경제, 임금 인상, 부패 척결 등을 요구했다. 민중은 민주당에 지지를 보내 4월혁명의 요구가 해결되길 기대했다. 7월 29일 총선거에서 민주당 장면 정권이 압승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신·구파간 권력 다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4월혁명의 요구였던 부정 축재자 처벌을 회피하고, 시위대 학살 책임자 처벌도 미온적이어서 대중의 분노를 샀다. 미국의 원조를 더 늘리기 위해서 환율을 인상하고 부진한 기업체를 해산하는 등 미국의 요구도 적극 수용했다.
4월 혁명의 요구가 관철되기 위해서는 혁명이 더 전진할 필요가 있었다. 혁명 이후 사회 전반의 급진화 흐름이 나타났다. 브루스 커밍스는 “서울의 지배 집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시련이, 전쟁 전의 시기를 상기시키는 시련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명백한 좌경화 경향”이라고 지적했다.
반공 체제에 도전하며 통일운동이 등장했다. 기존의 북진통일론에 맞서 중립화 통일 방안을 제시하며, ‘가라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외쳤다. 이는 냉전체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반제국주의 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노동자 투쟁도 분출했다. 보건사회부의 집계에 의하면 1960년 한 해 동안에 388개 노조가 설립됐으며 203개 노조가 어용노조에서 새로 개편됐다. 노동조합원 수도 1959년 28만 438명에서 1960년 32만 1097명으로 증가했다. 교원노조와 은행원노조 그리고 언론인노조 등이 조직됐다.
특히,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시작된 교원노조는 조합원이 4만 명에 가까운 상당히 큰 노동조합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교원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노동자와 학생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도입해 탄압하고자 했다. 12월 도지사, 시장 선거에서 민주당이 겨우 11.7퍼센트를 차지한 것은, 정권을 갈아봤자 나아질 것이 없다는 민주당에 대한 절망감의 표현이었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제국주의나 봉건 지주 귀족들보다 노동자 투쟁을 더 두려워하는 후발국 부르주아지의 소심함과 무기력을 지적했었다. 민주당이 4월혁명을 진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열기를 통제하고 잠재우는 데 급급한 것이 딱 그 꼴이었다.
1961년 2월 주한미군원조사절단 부단장 휴 팔리는 “장면 정부가 이대로 4월을 넘기기는 어려울 것”이며 “공산혁명 혹은 이와 비슷한 극단적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 우려는 안타깝게도 5·16의 반동적 군사 쿠데타로 귀결됐다.
4월 혁명은 자본주의 생산을 멈출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이 충분치 않아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다. 이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자유민주주의를 안착시켰다. 윤석열은 자유민주주의조차 반동 쿠데타를 통해 권위주의 시절로 회귀시키고 싶어했지만, 이에 맞선 대중 저항은 이를 좌절시켰다.
4월혁명의 진정한 정신은 미국 제국주의가 후원하는 끔찍한 경찰국가 독재자를 대중 저항으로 타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