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친미 우익 독재자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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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와 우파의 이승만 띄우기가 한창이다. 그들은 왜 이승만을 찬양할까?
우선, 그들은 이승만에 의해 세워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을 강조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건국에 두자는 것은 일제 강점기 친일파와 해방 후 미군정에 협력했던 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주장이다.
얼마 전 뉴라이트인 안병직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일제 시대에 성장한 지식층을 전부 친일파로 단죄한다면, 해방 이후 누가 국가 경영을 맡을 수 있었겠나” 하고 반문하며 “친미와 친일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힘”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이런 주장은 해방 후 미군정이 친일파를 등용한 논리이자, 이승만이 분단 정권을 수립한 후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친일파와 미군정에 협력했던 자들을 등용한 역사를 정당화해 준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우파에게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민중의 열망은 정반대였다.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압도적인 사람들이 장차 건설될 국가에서 ‘친일파가 배제’돼야 한다고 답했다. 또, 80퍼센트에 가까운 사람들이 새로운 국가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형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방 후 일본의 폭압적 지배 기구는 급속히 붕괴했다. 해방 당시 총독부의 조선인 경찰관 수는 8000명 정도였는데, 해방 직후 이들 중 대부분이 도주해 출근율이 20퍼센트도 안 됐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은 식민지 통치 기구 자체를 부활시킬 뿐 아니라 과거 총독부 관료였던 사람이나 한민당 당원을 각 부서 최고직에 대거 임명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는 빠르게 조직돼 13개도에 145개의 지부가 설립됐고 자치기구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공업 부문 총자산의 90퍼센트를 차지했던 일본 자본가들이 도망간 공장에서 자주관리운동이 분출했다.
1945년 11월 4일까지 16개의 산별노조에 728개의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됐다. 당시 노동조합 전국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남한 조합원 수는 1945년 말 25만 명 수준에서 1946년 5월 10일 기준 46만 7000명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당시 미군정 사령관 하지가 남한의 정세를 ‘불만 댕기면 즉각 폭발할 화약통’에 비유했다. 그가 주한미군의 처지를 ‘금방이라도 폭발할 화산의 가장자리를 걷고 있는 형국’으로 묘사한 것은 미군이 제국주의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진주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 만큼 상황은 혁명적이었다. 미군정은 이런 상황을 통제하려고 친일파를 등용하고 경찰 탄압에 의존해야만 했다.
미군정, 대한민국의 뼈대를 만들고 이승만과 손잡다
이승만은 맥아더가 제공한 비행기로 서울에 도착해 하지의 비호하에 5만 군중이 동원된 환영 행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미군정이 1945년 12월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한국인들은 이승만을 지지하고 있지 않다”고 걱정할 정도였다.
이승만은 귀국 후 군정이 통제하는 은행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재산을 몰수당할 가능성이 컸던 사람들을 보호해 줬고, 경찰 고위 간부들과 긴밀히 연합해 남한 전역에서 좌파 세력을 탄압하는 데 동조했다.
뉴라이트와 우익들은 북한에서 1946년 2월 초 사실상의 국가기구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먼저 수립됐으므로,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는 1946년 6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정당하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단독 정부 수립은 남북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박명림 교수는 “미군정의 국가기구 창설 노력은 1945년에 이미 그 초기적 준비가 완료됐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1947년 냉전의 시작으로 알려진 트루먼 독트린과 함께 힘을 얻었다. 결국 1948년 5·10 총선거로 남한에 반쪽짜리 정부가 수립됐다.
뉴라이트와 우익들은 1948년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최초로 민주주의 선거에 의해 수립된 정부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당시 좌파뿐 아니라 중도파, 심지어 김구와 같은 우파조차도 남한만의 단독 선거인 5·10 총선거를 반대해 불참했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은 제주도에서 항쟁과 유혈 진압을 거쳐야 했다. 5·10 총선거는 민주주의 선거이기는커녕 내전과 유사한 상황에서 진행됐다. 제주도민들의 저항으로 제주에서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하자, 건국 운동 세력과 미군정은 선거를 물리적으로 보호한답시고 경찰 보조대인 향토보위단까지 조직했다.
그래서 뉴라이트 이영훈조차 “나라 만들기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총구를 앞세운 전쟁 과정”이고, “한국에서의 국민국가 만들기는 무척이나 폭력적인 과정”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얼마 전 고용노동부 장관 김문수는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4·3 폭동은 명백하게 남로당에 의한 폭동”이라고 발언해 논란이 됐다.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한 제주 4·3 항쟁을 깎아내려야 친일과 냉전을 합리화한 세력의 정당성이 확보될 테니 말이다.
결국 정통성 없는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는 여순 항쟁에 직면해야 했고, 국가보안법을 통해 강압적인 통치로 나아갔다. 이에 대한 불만은 한국전쟁 직전 1950년 5·30 총선에서 이승만의 참패로 나타났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정안기가 최근 광복절에 맞춰 《테러리스트 김구》를 출간한 것을 보면, 뉴라이트가 이승만의 ‘대한민국 수립’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 같은 우익인 김구조차 폄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공주의와 독재자 이승만
뉴라이트와 우익은 이승만이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세워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시켰다고 추켜세운다. 이승만이 미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확고하게 형성됐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4·19 혁명으로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은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해체되면서 자본주의의 승리를 주장하는 세력들에 의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뉴라이트 역사관은 이를 더욱 강화했다.
이승만의 한미동맹 체결이 북한의 재침략 의지를 단념시키고 국가 안보를 공고히 함으로써 남한은 향후 경제 발전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소에 의한 분단은 한국전쟁의 발발을 가져왔고 남북한 모두에서 권위주의 통치를 정당화했다.
한미동맹으로 한국 지배계급은 제국주의 국제 질서에 편승할 수 있었지만, 한반도는 냉전 제국주의 경쟁의 위험에 휘말렸다. 그 결과 한국은 베트남에 5만 명의 군대를 파병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경제 위기와 미·중 갈등 속에서 한미동맹의 강화는 한반도의 긴장과 위험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뉴라이트와 우익은 이승만이 경제 성장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 또한 강조한다. 특히 1950년 농지개혁으로 지주제를 해체하고 지주의 손을 떠난 지가증권이 산업 자본 육성에 활용됨으로써 한국 자본주의를 태동시켰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대표 한동훈도 작년에 개봉된 영화 〈건국전쟁〉에서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극찬한 바 있다.
물론 한국전쟁을 전후로 진행된 농지개혁은 지주를 소멸시키고 공업화의 조건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유상몰수·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으로 농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농민들은 땅을 분배받는 대가로 연간 수확량의 30퍼센트를 5년 동안 분할 상환해야 했다. 소작농의 상당수가 땅을 분배받지 못하고 농촌을 떠나 도시 빈민이 됐다.
이승만은 미군정이 관리하던 적산(일제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 여기엔 공장 등 산업 시설도 포함된다)을 민간에 헐값으로 매각해 특정 기업에게 혜택을 줬다. 그들이 재벌로 성장했다. 이승만은 농민과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서 자본주의의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승만은 조선인들의 자력 독립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아래로부터의 독립운동을 경멸했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힘을 빌리려는 외교 노선을 견지했다.
러시아 혁명으로 급진화된 분위기 속에서 3·1운동과 무장 독립 투쟁이 전개될 때, 이승만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 아래 둬 달라고 청원하고 있었다.
이런 굴욕적인 행위는 독립 운동가들의 반발을 샀고 이승만은 1925년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당했다.
미군과 우익, 친일파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아예 한국 땅을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가 아니라 민중에 의해 쫓겨난 독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