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슬’과 제주 4·3 항쟁 65년:
제국주의는 어제도 오늘도 야만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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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오멸 감독)이 ‘작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영화는 제주 4·3항쟁을 다룬다. 1948년 겨울, 한 마을 주민들이 군인들의 학살을 피해 중간산지대 동굴로 피신했다. 며칠만 있으면 마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에 지슬(감자의 제주도 방언) 몇 개 챙겨 온 것이 전부였다. 영화는 주민들의 순박함을 해학적으로 다루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4·3항쟁 과정에서 민간인 최소 3만 명이 학살됐다.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해안선 5킬로미터 밖 모든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한다’는 소개령을 내리고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토벌대는 무차별 방화와 학살을 자행했다.
4·3항쟁이라는 역사적 비극의 직접적 책임자는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다.
1945년 해방 직후 제주도는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지도하고 있었다. 미군정 요원이던 E 그랜트 미드에 따르면,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모든 면에서 제주도에서 유일한 당이었고 유일한 정부였다.” 미군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민위원들을 체포해 재판에 회부하고 탄압했다.
4·3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47년 ‘3·1절 사건’이었다. 제주도 곳곳에서 열린 1947년 3·1절 집회에는 10만 명가량 참가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남북 분단으로 이어질 수 있는 남한 단독 정부수립에 반대했다. 집회는 자연스레 거리 시위로 이어졌고, 경찰의 발포로 희생자가 발생했다(사망 6명, 중상 8명).
이에 항의해 3월 10일 총파업이 벌어졌다. 제주도청을 비롯한 관공서·은행·학교·통신기관 등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참가했다. 상인들은 철시했고 학생들은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파업이 잦아들자 관련자 검거 열풍이 불었다.
이 상황에서 1948년 남한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 반대 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1948년 4월 3일부터 무장투쟁이 시작됐다. 무장대는 농기구, 갈고리, 죽창, 몽둥이 등으로 무장했다. 그 구성도 청년과 농민 등 제주 주민이었다. 제주도 내 주요 좌파 지도자들이 운동을 이끌었다.
무장대는 호소문을 발표해 ‘단선·단정 반대’, ‘조국의 통일 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요구했다. 미군정은 즉각 각 도에서 차출한 경찰 1천7백여 명을 급파하고, 제주도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도 파견했다.
당시 진압을 이끈 일본군 소위 출신 박진경은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 명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이후 1년간 벌어질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런 강경 진압 결정은 미군정 최고위층이 내린 것이었다.
군, 경찰, 청년단으로 구성된 토벌대는 민가를 마구잡이로 공격했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학살 속에서 이승만 친미 독재 정권이 등장할 수 있었다. 미군정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한편 제주도의 비극은 제주도의 지정학적 중요성과도 관계 있었다.
미국은 제주도를 반드시 점령해야 할 곳으로 여겼다. 미군정 당시 제주도에 대규모 미군기지가 설치된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제주도는 “오키나와와 함께 소련을 반대하는 진지를 보장하는 것”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뉴욕 아메리칸 저널〉, 1947년 10월 30일).
오늘날 제주 해군기지 건설도 미국의 오랜 전략적 이해와 맞닿아 있다.
올해 제주 4·3항쟁 65주년을 맞이하지만, 아직도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친미 우파 세력들은 이를 되돌리려 했다.
박근혜는 대선 후보 시절 4·3의 아픔을 치유하는 길에 앞장서겠다고 공약했으나, 이는 또 다른 ‘먹튀’ 공약이 될 것이다. 박근혜는 이미 제주 4·3항쟁은 ‘북한의 지령으로 일어난 무장 폭동 내지 반란’이라고 망언을 한 남재준을 국정원장에 임명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도 강행하려 한다.
제주 4·3항쟁에 대한 진상 규명과 정당한 평가가 온전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또다시 제주도를 제국주의의 군사적 기지로 만드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