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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혁명 60주년:
민중이 혁명으로 독재자를 몰아내다

이윤이 우선인 체제가 낳은 두 개의 위기(코로나19와 경제 위기)가 대중의 삶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는 탄생부터 지금까지 전염병·기아·독재·경제 위기·전쟁 등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몬 긴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낳은 절망에 대한 대안 또한 계속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 글의 주제인 1960년 4월혁명일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중 운동과 좌파가 붕괴돼 저항이 다시 일어나기 힘들 것 같았던 곳에서 한국전쟁이 중단된 지 7년 만에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의 배경

4월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부정선거가 원인이 돼 일어났다는 것이다. 물론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벌어진 극심한 부정선거가 혁명의 계기가 된 것은 맞지만 혁명의 원인과 배경은 좀 더 넓게 볼 필요가 있다. 4월혁명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와 제국주의가 후원하는 부패한 독재 정부들에 대항한 운동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열강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연이어 반제국주의 저항이 벌어졌다. 그 결과 1947년 인도와 1949년 중국에서 제국주의가 물러났다. 이후 알제리와 베트남 등지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들이 이어졌다. 1956년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1959년 미국이 후원하던 독재 정부들 가운데 하나인 쿠바 바티스타 정부가 무너졌다.

한국은 미국이 전쟁까지 치르며 지키고자 한 냉전의 전진기지였다. 이런 미국에게 4월혁명은 분명 심각한 상황이었다. 주한미군사령관 맥그루더는 시위 진압을 위해 한국이 요청한 군대 투입을 허가했다. 미국은 겉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얘기했지만,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민중 저항을 강력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0년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경제와 정부를 지탱시킨 힘은 미국에서 왔다. 미국은 한국에 매년 평균 2억 달러에 가까운 물자와 재원을 원조했다. 하지만 1958년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자 경제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1960년 실질 실업률은 34.2퍼센트에 달했다. 대중의 고통은 하루하루 커졌다.

반면 일본이 남겨둔 공장 등의 재산을 거의 공짜로 받은 자본가들은 미국의 원조를 분배한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급속히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4월혁명에서 부정축재한 재산의 환수와 부패한 관료·기업인 처벌 요구가 제기된 것은 이 같은 계급 불평등 현실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승만은 해방 이후 미국의 도움으로 대중 운동과 좌파를 잔인하게 짓밟고 권력을 장악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끔찍한 억압과 통제를 실시했다. 이승만은 온건한 개혁과 평화통일을 주장한 진보당조차 용인하지 않고 당수인 조봉암을 사형시켰다.

이승만 정부하에서 경찰은 대중을 억압하는 데 전면에 서 있었다. 이 때문에 4월혁명기 한 마을에서 원한에 사무친 사람들에 의해 경찰이 기름에 튀겨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50년대 내내 이승만은 대중의 불만을 억누르고 취약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야 했고 1960년의 대규모 부정선거는 그 결과였다.

혁명의 분출

3월 15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너무 높게 나와서 하향 조정을 해야 할 정도로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벌어졌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마산에서 시작됐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3월 15일 마산 시위 때 경찰이 발포한 최루탄에 맞아 죽은 중학생 김주열의 시신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사람들은 자유당 관계자의 집과 자유당사·경찰서를 공격하면서 그동안 쌓인 불만을 표출했다.

4월혁명 당시 계엄군 탱크 위에 올라선 시위대

4월 19일 서울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부정선거 규탄을 넘어 ‘이승만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향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이에 분노한 일부 시위대는 획득한 무기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4월 25일 서울에서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탱크와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의 시위 진압 시도에도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일부 사병들이 시위대 편으로 넘어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탱크 위로 올라가 환호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인 26일에도 계엄사령관의 시위 진압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병들은 시위대에 섞여 버렸다.

지배 집단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위기감을 느낀 미국도 이승만의 사임을 강력히 요구했다. 마침내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이승만 동상을 끌고 다니며 승리를 자축했다. 4월 28일 부통령 이기붕 일가는 경무대 관사에서 자살했고 5월 말 이승만은 미국으로 도피했다.

혁명의 전진과 후퇴

이승만 정권 붕괴 후 4월혁명에 어떤 기여도 하지 않은 민주당 장면 정부가 들어섰다. 4월혁명 당시 민주당은 시위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대중의 급진화를 두려운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박근혜 퇴진 이후 적폐 청산의 요구가 제기된 것처럼 이승만 하야 이후 대중은 이승만의 적폐를 청산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물러난 후에도 이승만이 유지한 체제에서 이득을 얻은 세력들인 군·경찰 간부들과 판검사·고위관료들·기업주들은 여전히 권력과 부를 누리고 있었다.

당시 민주당 정부는 대중이 부여한 적폐 청산의 임무를 수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적폐 청산은 민주당 정부가 기반한 기성 체제(친제국주의적인 억압적 착취 체제)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주당 정부는 자신의 오른쪽과 왼쪽의 눈치를 보면서 분명히 오른쪽으로 행동했다.

부정선거 주동자와 발포 명령자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지만 대부분 무죄로 풀려났다. 민주당은 대중의 압력에 밀려 특별법을 제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대중이 원하는 것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으로 처벌 대상을 결정했다. 부정축재자 처벌은 아예 유명무실하게 돼 버렸다. 특별법에 따라 구성된 특검은 정부의 예산 배정 지연으로 활동이 늦어졌고 군부의 부정선거에 대한 조사는 정부와 미군의 반대로 아예 이뤄지지도 않았다.

대중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혁명이 더 전진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분명 민주당과 함께는 아니었다. 혁명 이후 급진화 경향이 나타났다.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파괴돼 침체에 빠져 있던 노동 운동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거리의 혁명에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우고 싸우기 시작했다. 1960년 한 해에만 새로 생긴 노동조합이 388개였고, 1959년에 비해 쟁의발생건수가 2배 이상 증가했다. 전국적으로 4만 명가량이 조직된 교원노조는 장면 정부의 노조 인정 거부에 저항하며 1961년 5·16 쿠데타가 있을 때까지 투쟁했다.

당시 정치적 급진화의 표현 중 하나는 통일운동이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자립 경제의 기반이 되는 새로운 통일 국가가 필요하다고 봤다.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분단됐고 전쟁을 겪었으며 미국이 후원하는 독재 정부 지배에 고통받던 사람들이 남북 자유왕래와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통일을 요구한 것은 완전히 정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공을 내세워 체제를 유지해 온 지배 집단의 처지에서 보면 이것은 상당히 우려되는 움직임이었다.

장면 정부는 이승만의 국가보안법을 보강한 반공법과 집회와 시위를 제약하는 데모규제법을 도입해서 급진화 경향을 억제하려 했다. 악법 도입에 반대하는 시위를 제압하려고 비둘기 작전이라고 알려진 군투입 계획까지 세웠지만 시위는 계속됐고 결국 악법 도입은 무산됐다.

이렇게 지배 집단을 긴장시킨 좌경화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의 급진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정부를 제거하고 대중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서 반동적인 대안이 준비되고 있었다. 바로 1961년 5·16 쿠데타였다.

하지만 당시 부활하고 있던 노동자 운동은 쿠데타를 저지하고 혁명을 더 전진시키기에는 아직 힘이 부족했다. 20여 년이 지난 후에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게 되는 노동자 운동은 일단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혁명의 계승

미래통합당과 우파는 이승만을 ‘위대한 건국 대통령’이라며 노골적으로 4월혁명을 모욕하지만, 오늘날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자신들이 4월혁명을 계승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계승한 것은 4월혁명이 아니라 4월혁명 당시의 민주당 정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단지 현재의 민주당이 4월혁명 당시의 민주당을 뿌리로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그때의 민주당과 지금의 민주당 기반에 변화가 있었지만, 둘 다 제국주의에 친화적인 착취 체제를 유지하려는 데서는 차이가 없기에 둘의 행동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과거 장면 정부는 미국대사관과 상의 없이 중요한 조처를 취한 적이 거의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한미동맹을 중시했다. 호르무즈해협 파병이나 한·미·일 동맹 강화에서 보듯, 현재의 문재인 정부도 제국주의 세계 체제 속에서 자국의 이해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제국주의 세계 체제에서 한국 국가의 위상은 꽤 달라졌지만 말이다.

과거 민주당은 조봉암의 진보당뿐만 아니라 그보다 온건한 민주혁신당조차 공식정치에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자유당과 함께했고 진보당 탄압을 묵인했다. 현재의 민주당은 통합진보당 탄압을 방관했고, 비례위성정당을 만들어 미래통합당과 함께 진보정당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민주당 모두 진보정당의 성장이 대중 운동에 자신감을 줘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체제를 위협하길 바라지 않는 것이다.

4월혁명이 결국 쿠데타로 파괴된 것은 현재 민주당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4월혁명 당시 민주당 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장면 정부는 혁명의 힘을 빼고 날을 무디게 하는 구실을 하고자 했고 그 결과 반동적 대안이 성장하는 길을 열어주게 됐다.

지금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와 평범한 사람들에게 떠넘기려는 시도에 맞서 문재인 정부에 대항하는 것이 고개드는 지긋지긋한 우파를 제압하는 길이기도 하고 계급 불평등과 억압에서 해방을 원한 4월혁명 계승의 출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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