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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항쟁 70주년:
미국과 우익이 민중 저항을 학살로 짓밟다

올해는 제주 4·3항쟁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 세 번째로 “제주 4·3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다. 그러나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집권 반년이 지나도록 어떻게 완전한 해결로 나아갈지 뚜렷한 방향과 원칙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독재정권 시절 내내 “4·3항쟁”은 대한민국 수립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정의된 금기의 단어였다.

1987년 항쟁을 계기로 진상규명운동이 되살아나 전개되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공포됐다. 그러나 특별법은 희생자 피해배상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역사적 재평가도 충분치 않았다. ‘이명박근혜’ 정부는 이마저도 되돌리려 했다.

특별법 시행 이후 정부가 인정한 희생자는 1만 4233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2003년 정부 기구인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가 추정한 2만 5000~3만 명에 턱없이 못 미친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12월 ‘제주4·3특별법 전부개정 법률안’이 발의됐다. 4·3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4·3항쟁 당시 군사재판을 무효화하는 것이 개정안의 골자다.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당시 미군정의 책임을 묻고, 미국과 유엔의 책임 있는 조처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당시 제주도 인구 10퍼센트 가까이 희생된 4·3항쟁은 냉전 형성기에 일어난 세계사적 사건으로 미국이 적극 개입한 결과다. 브루스 커밍스는 4·3항쟁을 ‘전후 한국 정치의 현미경’이라고 한 바 있다. 4·3항쟁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첨예하다. 그 명칭도 폭동, 사건, 항쟁 등 관점에 따라 다르다.

제주 4·3항쟁 – ‘전후 한국 정치의 현미경’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이후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남한에는 조선인민공화국과 그 산하 지방 인민위원회 같은 자치기구들이 조직돼 있었지만,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제주도는 해방 이후 1948년 초까지 인민위원회가 실질적인 정치적 지도력을 행사했다. 반면에 한동안 미군정의 통제력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약했다. 지리적 고립 때문에 일제 통치와 미군정 통치 사이에 가장 긴 공백기가 있었고,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기 전에 인민위원회의 구성이 완료돼 자치권(통치력)을 일부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7년 3월 미국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유럽에서 마셜플랜을 실시했다. 제2차세계대전 종결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 및 군사질서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이는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됨을 의미했다.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서한을 보내어 독트린을 지지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한국은 그리스와 비슷한 전략적 상황에 놓여 있다…미 점령지역에 과도 독립정부의 즉각적인 수립은 공산주의 진출에 대한 보루를 세우는 일[이다.]”(허호준, 《그리스와 제주, 비극의 역사와 그 후-그리스 내전과 제주 4·3 그리고 미국》에서 인용)

냉전의 격화는 한반도에서 1·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나타났고,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1948년 5·10단독선거로 나아가게 된다. 이에 대한 반대가 4·3항쟁이 발발하는 직접적 계기였다.

물론, 그 이면에는 해방 후 미군정에 대한 민중의 누적된 불만이 있었다. 해외 교포 등의 대거 귀환으로 인구가 급증하고 이는 사회적·경제적 어려움을 동반했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재외 도민의 송금 감소, 대일 교역의 불법화와 원료 공급의 단절 상태로 빚어진 조업 중단 사태 등으로 실업률이 급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에 의한 곡물수집정책과 귀환자의 재산압수 방침은 도민들의 반발과 생활고를 초래했다.

더 나아가 미군정은 1946년 7월 제주도에서의 도제승격운동을 수용해 우익의 입지를 넓혀주면서, 동시에 인민위원회의 해체를 위해 좌익 계열을 공개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에 대한 불만은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민중항쟁으로 터져 나왔다. 저항의 바람은 곧 육지에서 제주도로 불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1절 사건’이 발생했다. 3월 1일 제주도 곳곳에서 열린 3·1절 집회에 5만 명이 넘게 참가했다. “통일 독립”, “친일파 처단”, “부패 경찰 몰아내자” 같은 구호들이 나왔다. 앞서 대구 10월항쟁을 경험한 미군정은 3·1절 집회를 앞두고 “응원 경찰” 명목으로 제주에 육지 경찰을 보충했다. 결국 제주시 관덕정 앞 행진에 선제 발포를 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다쳤다. 연행 선풍이 불었다.

이에 대한 항의행동으로 3월 10일 총파업이 시작됐다.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도내 사업장 156곳이 파업했다. 학생들은 동맹휴업을 했다. 열흘가량 지속된 이 파업으로 관공서도 상점도 문을 닫았다.

미군정은 군정경찰이나 행정관료뿐 아니라 서북청년단 등 우익들을 동원해 좌익들을 탄압하고 마을을 수색하는 등 강경 탄압에 나섰다. 미군 방첩대는 제주의 총파업이 “남한 전역의 파업으로 번질 수 있는 시금석일 수 있다”고 여겼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

1947년 10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 결렬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시켰다. 그리고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남한에서 단독으로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5·10 선거의 성공을 위해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를 이용했다.

우익들은 ‘남로당 중앙의 지시’에 의해 일어났다며 4·3항쟁의 의의를 축소하고 싶어 하지만, 4·3항쟁은 제주 주민들의 대중적 지지 분위기에서 일어났다. 물론 제주도 좌파가 중요한 구실을 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한라산과 제주지역 오름 89곳에 일제히 봉화가 올랐다. 1500명의 민중자위대가 도내 경찰지서 10곳을 공격하면서 무장투쟁이 시작됐다.

미군정은 육지 각도 경찰청에서 8개 중대 1700여 명을 제주도에 파견했다. 또한 군함을 동원해 제주와 육지의 해상교통망을 모두 차단했다. 미군정은 제주도 저항이 육지로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

5·10 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오면서 주한미군사령부는 미군에 특별 경계령을 내렸다. 선거 당일에는 미군 태평양함대 소속 순양함과 구축함 등 2척이 남한 해역에 들어왔다. 미군정 군수참모부는 실탄을 항공기편으로 제주도에 보냈다.

공무원의 투표사무 거부, 무장대 습격, 투표 참가 거부 등으로 제주도의 3곳 중 2곳의 선거가 무효화됐다.

육지에서 선거는 경찰과 이승만 일당의 깡패 조직들 때문에 폭력으로 얼룩졌다. 선거 열흘 전에 323명이 폭력에 의해 살해됐고 1만여 명이 체포됐다. 이승만과 미국은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 자유 선거로 대한민국이 수립됐다고 칭송했지만 5·10 선거는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는 노동자와 민중을 피로 짓밟고 세워진 친미·반공 정부였다.

제주도에 출동하는 경비대 대원들을 격려하는 이승만 ⓒ출처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미국의 개입

제주 4·3항쟁은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임을 입증시켰다. 미국은 한국의 분단을 주도했고 그에 맞선 4·3항쟁의 진압을 결정한 주체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후에도 1949년 6월까지 미군은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가졌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남한의 국제적 지위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고, 유엔총회 회기 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승인을 받을지도 미지수였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내부의 불안요소 제거를 명분으로 제주도를 “빨갱이 섬(Red Island)”으로 규정하고 소탕작전을 계속했다. 결정적 계기는 이른바 ‘여순반란’ 사건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이승만 정부는 한국군 제14연대와 제6연대의 일부를 제주도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로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군인들이 이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저항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갓 출범한 이승만 정부의 토대가 허약함이 드러났다. 이승만은 그해 12월 1일에 좌익을 나라 전반에서 소탕해야 한다며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여수에서 군인들의 반란 이후 제주도에서 정부의 대응은 훨씬 강경해졌다. 그것은 본토로의 확전에 따른 두려움의 발로였다. 1948년 가을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그때부터 1949년 봄 사이에 제주 민간인 학살이 대거 벌어졌다. 이때가 영화 ‘지슬’의 배경이다. 이승만은 1949년 봄 제주에 직접 내려가 “아직도 반도가 남아 있다는 말을 들으니 섭섭하다. ... 정부와 미국인은 항상 제주에 대하여 많이 근심하고 있[다]”며 학살 진압을 독려했다.

제주 4·3항쟁은 분단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한때 좌익들에게 유리했던 세력관계가 반대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벌어진 마지막 저항이었다는 점이 4·3항쟁의 비극적 결말을 낳았다. 그러나 분단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제주 4·3항쟁은 위대한 민중 항쟁의 전통 속에 중요하게 자리매김돼야 한다.

곧 출간될 《마르크스21》 24호에 제주 4·3항쟁에 관한 필자의 더 상세한 분석이 실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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