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항쟁 70주년:
미국과 우익이 민중 저항을 학살로 짓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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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제주 4
독재정권 시절 내내
1987년 항쟁을 계기로 진상규명운동이 되살아나 전개되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특별법 시행 이후 정부가 인정한 희생자는 1만 4233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2003년 정부 기구인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12월
당시 제주도 인구 10퍼센트 가까이 희생된 4
제주 4·3항쟁 – ‘전후 한국 정치의 현미경’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이후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남한에는 조선인민공화국과 그 산하 지방 인민위원회 같은 자치기구들이 조직돼 있었지만,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제주도는 해방 이후 1948년 초까지 인민위원회가 실질적인 정치적 지도력을 행사했다. 반면에 한동안 미군정의 통제력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약했다. 지리적 고립 때문에 일제 통치와 미군정 통치 사이에 가장 긴 공백기가 있었고,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기 전에 인민위원회의 구성이 완료돼 자치권
1947년 3월 미국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유럽에서 마셜플랜을 실시했다. 제2차세계대전 종결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 및 군사질서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이는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됨을 의미했다.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서한을 보내어 독트린을 지지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냉전의 격화는 한반도에서 1
물론, 그 이면에는 해방 후 미군정에 대한 민중의 누적된 불만이 있었다. 해외 교포 등의 대거 귀환으로 인구가 급증하고 이는 사회적
더 나아가 미군정은 1946년 7월 제주도에서의 도제승격운동을 수용해 우익의 입지를 넓혀주면서, 동시에 인민위원회의 해체를 위해 좌익 계열을 공개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에 대한 불만은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민중항쟁으로 터져 나왔다. 저항의 바람은 곧 육지에서 제주도로 불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이에 대한 항의행동으로 3월 10일 총파업이 시작됐다.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도내 사업장 156곳이 파업했다. 학생들은 동맹휴업을 했다. 열흘가량 지속된 이 파업으로 관공서도 상점도 문을 닫았다.
미군정은 군정경찰이나 행정관료뿐 아니라 서북청년단 등 우익들을 동원해 좌익들을 탄압하고 마을을 수색하는 등 강경 탄압에 나섰다. 미군 방첩대는 제주의 총파업이
단독정부 수립 반대
1947년 10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 결렬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시켰다. 그리고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남한에서 단독으로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5
우익들은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한라산과 제주지역 오름 89곳에 일제히 봉화가 올랐다. 1500명의 민중자위대가 도내 경찰지서 10곳을 공격하면서 무장투쟁이 시작됐다.
미군정은 육지 각도 경찰청에서 8개 중대 1700여 명을 제주도에 파견했다. 또한 군함을 동원해 제주와 육지의 해상교통망을 모두 차단했다. 미군정은 제주도 저항이 육지로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
5
공무원의 투표사무 거부, 무장대 습격, 투표 참가 거부 등으로 제주도의 3곳 중 2곳의 선거가 무효화됐다.
육지에서 선거는 경찰과 이승만 일당의 깡패 조직들 때문에 폭력으로 얼룩졌다. 선거 열흘 전에 323명이 폭력에 의해 살해됐고 1만여 명이 체포됐다. 이승만과 미국은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 자유 선거로 대한민국이 수립됐다고 칭송했지만 5

미국의 개입
제주 4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남한의 국제적 지위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고, 유엔총회 회기 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승인을 받을지도 미지수였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내부의 불안요소 제거를 명분으로 제주도를
1948년 10월 19일 이승만 정부는 한국군 제14연대와 제6연대의 일부를 제주도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로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군인들이 이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저항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갓 출범한 이승만 정부의 토대가 허약함이 드러났다. 이승만은 그해 12월 1일에 좌익을 나라 전반에서 소탕해야 한다며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여수에서 군인들의 반란 이후 제주도에서 정부의 대응은 훨씬 강경해졌다. 그것은 본토로의 확전에 따른 두려움의 발로였다. 1948년 가을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그때부터 1949년 봄 사이에 제주 민간인 학살이 대거 벌어졌다. 이때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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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출간될 《마르크스21》 24호에 제주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