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종전 80년:
아시아를 피로 물들인 제국주의간 전쟁
〈노동자 연대〉 구독
올해로 태평양 전쟁이 끝난 지 80년이 됐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며 각축전을 벌였던 미국과 일본은 오늘날에는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중국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 동맹이 돼 있다.
이재명 정부는 (중국도 신경 쓰기는 하지만) 한미일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한국 지배계급의 오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날 미중 경쟁이 점점 심화되면서, 태평양전쟁을 낳았던 제국주의간 경쟁의 논리가 점점 강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태평양전쟁을 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18~19세기부터 아시아·태평양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자본주의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20세기 초에야 비로소 신흥 강대국이 된 미국과 일본은 다른 선진 제국주의 열강을 부지런히 따라잡아야 했다.
미국은 자국 기업을 위해 유럽의 식민지를 개방하는 ‘문호 개방’ 정책을 개발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군대를 배치했다. 1898년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카리브해의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에서 괌과 필리핀을 빼앗았다. 그리고 하와이를 합병해 태평양 패권 전략의 전초 기지로 삼았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강력한 국가 개입에 기초한 자본 축적에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며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에도 나섰다. 1879년 오키나와 섬을, 1895년 대만을 점령했다. 1905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장악했다. 같은 해 사실상 조선도 점령했다.
제1차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국 편에서 참전해 산둥반도와 만주, 내몽골 지역으로 진출했다. 승전국으로서 얻은 이권에 힘입어 일본 경제는 192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호황은 지속되지 못했다. 1929년 대공황을 시작으로 1930년대 세계 경제가 전례 없는 대불황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강대국들은 보호무역 조치를 실행하고 경제적·정치적 블록을 형성했다. 국제 무역이 급감했다.
그러나 자본들은 해외에서 얻는 원료와 천연자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해외 원료와 천연자원을 지배하기 위해 국민국가의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이 크게 중요해졌다. 제1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제국주의간 충돌의 역학이 다시금 빠르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경제 금수 조치와 진주만 공습
일본은 성장과 확장을 지속하려면 기존 제국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조차지, 베트남, 말레이반도는 프랑스와 영국이, 필리핀은 미국이 식민 지배하고 있었다.
1930년대 들어 일본 왕실과 군부는 일본 자본주의의 성장을 위해서는 동아시아에서 제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점령했다. 1937년에는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했다(중일전쟁).
당시 일본 육군 장관은 “한 달 안에” 중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일본군은 중국 난징에서 30만 명을 학살하고 방화·약탈·강간을 자행했다(난징대학살).
그러나 중국의 광활한 영토와 끊이지 않는 중국 내 무장 저항 때문에 일본은 중국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일본군은 중국이라는 수렁에 빠졌다.
일본은 일단 채택한 군사적 확장 노선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석유와 고무 등 원료가 풍부한 동남아시아에서 새로운 전쟁을 벌여 교착 상태를 돌파하고자 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계속 세력을 확장하려 하자 일본은 미국 제국주의의 이해관계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극동에서 일본의 우위”가 현실화되는 것을 우려했다.
“우리[미국]의 전반적인 외교적, 전략적 입지가 상당히 약화될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 인도, 남태평양의 시장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고무, 주석, 황마 등 중요한 원료에 대한 우리의 접근 통로가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제약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940년에 작성된 미국 국무부 비망록)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자 미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 금수 조치를 내렸다.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점령했을 때는 일본에 대한 석유 봉쇄를 단행했다. 당시 일본은 석유의 66퍼센트를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일본의 침략 전쟁을 비판한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는 경제적 경쟁이 격화하며 미국과의 전쟁 위험이 고조되던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썼다.
“경제적 공세가 계속된다면 일본은 곧 원자재, 특히 석유가 부족해져 중국에서의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 일본에게는 두 가지 암울한 선택지 밖에 없었다. 미국에 타협하거나, [미국과의] 전쟁이라는 거대한 도박을 하거나.”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 니콜라이 부하린(1888-1938)은 《세계경제와 제국주의》에서 “군사력이야말로 서로 투쟁하는 ‘국민적’ 자본가 집단들의 최후 수단”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미국과 일본의 경쟁은 전쟁으로 치달았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 해군 기지를 공습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유럽과 미국의 식민지들을 잇달아 공격해 점령해 나갔다. 일본 지배계급은 미국·영국 등 서방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겠다며 제국주의 확장 정책(“대동아공영권”)을 정당화했다.
그러면서 이에나가 사부로는 일본 지배자들이 “대동아공영권” 운운한 것을 이렇게 꼬집었다. “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 사람들의 독립과 평등을 위한 평등주의적 연대가 아니었다. … 만일 일본이 진정 아시아 사람들을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킬 의도였다면, 조선의 독립이 첫 단계가 돼야 했다.”
일본 지배자들은 아시아의 평범한 사람들을 제국주의 전쟁의 소모품으로 취급했다. ‘위안부’와 강제 징용 노동자들이 대표적 사례다.
일본 국가는 전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목적으로 ‘위안부’ 제도를 체계적으로 운영했다. 대부분 10대였던 식민지, 점령지의 여성들이 강제로 동원됐다. 최소 20만 명의 여성들이 ‘위안부’로 끌려갔고, 그중 조선인이 가장 많았다. “[‘위안부’] 여성들은 전투와 전투 사이의 성관계를 위해 바로 전선으로 끌려갔으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전투 중 사망했다.”(이에나가 사부로)
또한 최소 200만 명의 조선인들이 전쟁터, 탄광, 군수 공장으로 끌려갔다. “1930년대 말 인력 부족 문제가 심해지자 조선의 노동력을 활용할 계획이 수립됐다. 1941년부터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대규모 강제 동원이 이뤄졌다.”(이에나가 사부로)
일본인 노동자들도 일본 지배자들의 제국주의 야욕에 희생됐다. 군국주의 정책에 불만을 표하는 일본인들은 “비국민”이라며 탄압받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조선인들
미국은 나치가 유럽 곳곳을 침공하고 홀로코스트를 시작해도 진주만 공습 전까지 참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에서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것은 내버려 두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전면적 섬멸전에 나섰다. 그것을 위해 일본인을 비인간화하는 인종차별을 이용했다. 루즈벨트는 태평양 연안 지역의 모든 일본계 미국인을 수용소로 구금할 권한을 군에 부여했다. 트루먼은 대(對)일본 전쟁 전략을 이렇게 설명했다. “짐승을 상대할 때는 짐승처럼 대해야 한다.”
미국 지배자들은 일본 군부뿐 아니라 평범한 일본인들까지 무참히 살해했다. 전쟁 기간 동안 계속된 폭격으로 도쿄의 인구는 전쟁 전 700만 명에서 전쟁 후 200만 명으로 감소했다. 전쟁 막바지에 있었던 미군의 도쿄 대공습으로 8만 4,000명이 사망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한 것은,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일본인 민간인들을 정말로 “짐승” 이하의 존재로 여겼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히로시마에서 20만 명이 즉사했고, 12만 명 이상이 방사능 피폭으로 끔찍한 고통 속에 살다 죽었다.
나가사키에서도 8만 명이 사망했다. 그중에는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 중공업의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강제 징용돼 일하던 조선인들도 많았다.
핵폭탄 투하로 인한 사망자의 20퍼센트가 조선인이었다.

전쟁을 끝내는 데 핵폭탄 투하가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 전략폭격조사위원회는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더라도, 러시아가 참전하지 않았더라도, 침략 계획이 없었더라도 일본은 1945년 11월 1일 이전에 항복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전후 소련과의 경쟁을 앞두고 과시와 경고의 의미로 핵폭탄을 투하했던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에서 미국·영국에 비해 소련의 주도력이 컸던 것이 미국 제국주의자들로 하여금 조바심을 갖게 했다.
후버 정부와 루스벨트 정부의 국무부에서 국제 경제 자문 위원을 지냈던 역사학자 허버트 페이스는 핵폭탄이 “소련과의 문제 해결에서 미국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효과적 수단”이었다고 지적했다.
핵폭탄에는 미국이 전후 패권 질서를 주도하겠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핵폭탄의 위력을 최대한 잘 보여 줘야 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목표물로 선택된 이유는 경제활동과 인구가 집중된 도시이기 때문이었다.”(미국 전략폭격조사단 보고서)
즉,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핵폭탄 투하는 잔혹한 제국주의 경쟁의 논리와 일본인을 모두 “짐승” 취급한 인종차별을 잔인하게 보여줬다.

핵폭탄 투하와 함께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지만, 식민지 피억압 민중에게 진정한 해방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 전쟁은 어느 한 제국주의가 다른 제국주의에 승리한 전쟁으로, 전쟁이 끝나도 승전국끼리의 새로운 제국주의간 경쟁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이 시작됐다.
미국과 소련은 전 세계에서 “세력권” 재분할에 혈안이 됐다. 경쟁적으로 점령지에 자신들의 체제를 이식하고, 자국에 친화적인 정권이 수립되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해방을 염원하는 민중의 염원은 잔혹하게 진압됐다.
일본의 식민 강점에서 벗어난 한반도 민중의 해방 염원도 짓밟혔다.(관련 기사: 본지 217호, 1945년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해방의 꿈은 어떻게 분단과 전쟁에 짓밟혔는가?) 한반도 민중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마자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강제 분단과 점령, 억압과 전쟁을 경험해야 했다.
제국주의간 경쟁은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고,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긴장도 키우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는 이스라엘의 대학살과 점령을 지원하고 있다. 제국주의 시스템에 반대하는 정치와 운동이 절실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