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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내란 청산과 극우 팔레스타인·중동 이재명 정부 이주민·난민 긴 글

신탁통치가 분단을 막을 수 있었을까?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 민중의 독립 열망을 짓밟고 열강이 대신 통치한다는 신탁통치가 결정됐다. 이는 최근 트럼프의 가자지구 ‘평화 이사회’ 구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기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독립 염원을 거스르며 트럼프가 의장을 맡고 영국 등이 동참하는 외세의 식민 통치 기구이다.

1946년 1월 한반도는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당시 좌익 세력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합리적인 한반도 통일의 길이라며 지지했다. 이는 민중의 즉각적인 독립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입장이었다. 반면, 우익 세력은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하며, 반탁 운동을 반소·반공 운동으로 연결시켜 정세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당시 좌익 세력의 관점은 오늘날 좌파계 학자들도 공유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서중석 교수는 당시 김규식의 주장을 지지하며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키지 않으면 분단되고 분열될 것”이었다며, 빨리 “미소공위에 협력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과연 당시 좌파는 통일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신탁통치를 받아들여야 했을까? 열강에 의한 신탁통치가 한반도의 분단을 막을 수 있었을까?

태평양전쟁과 미·소의 이해관계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의 우세가 확실해지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됐다.

1943년 12월 카이로회담에서 미·영·중은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했다. 사실상 공동 신탁통치 방안을 포함한 것이었다.

이미 3월에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후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데 적합한 지역으로 한국과 인도차이나를 거론한 바 있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통해 한국을 둘러싼 전후 강대국 사이의 갈등을 처리하고, 특히 태평양 지역에서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고자 했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개최된 회담에서 연합국들은 자국의 이해에 따라 극동 문제에 대한 입장을 달리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나치 독일의 위협이 가중되자 소련에게 극동의 안전은 매우 중요해졌다. 소련은 1941년 4월에 일본과 5년 시한의 소·일 중립조약을 체결해 현상 유지를 모색했다. 반면, 미국은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일본을 협공하길 바랐다.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지자 소련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대일전 참전을 결정한다. 스탈린은 러일 전쟁으로 상실한 뤼순과 다롄항의 확보, 만주철도에 대한 지배권 인정, 사할린·쿠릴 열도의 인도 등을 약속받았다. 러일전쟁 전에 제정 러시아가 차지했던 동북아시아에서의 이권과 세력권을 회복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필리핀이 50년간의 후견을 필요로 했으므로 한국은 20~30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신탁통치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고 대답했다.

얄타회담에서 한국 신탁통치 방안은 구체적으로 합의되지는 않았다. 미국은 7월 포츠담 회담에서 이를 확정 지으려 했지만,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처리하는 문제를 두고 연합국 사이의 이해가 충돌하면서 한국 처리 방안은 논의되지 못했다.

결국, 미국과 소련이 전후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 채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구체적 논의는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릴 때까지 미뤄졌다.

소련은 8월 9일 만주, 내몽골, 한반도 세 방면에서 일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미군보다 한 달 먼저 한반도에 진주한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합의를 존중했다.

당시 소련의 관심은 일본 점령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유럽의 전후 보상에서 이권을 획득하는 데에 쏠려 있었다. 그러려면 미국과 합의한 얄타 체제를 유지해야 했다.

반면, 미국은 최전방부대가 아직 오키나와에 있었고 이른 시일 안에 한반도에 상륙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서둘러 미·소 양국의 군사 점령 분계선을 확정하려 했다. 그리하여 38선을 중심으로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점령하는 ‘일반 명령 1호’가 발표된다.

크리스 하먼의 지적처럼 “한반도 분할은 제2차세계대전 연합국들 간의 최후의 중대한 협정이었다.” 그리고 5년 후 가장 큰 충돌, 비극적인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핵심 결론은 1) 임시민주정부 수립, 2)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3) 미·영·소·중 4국의 5년간 신탁통치 실시였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에 자신에게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관철시키려 했다. 미국은 한국 신탁통치를 적극 지지했다. 영국과 중국이 미국에 우호적이었으므로 신탁통치를 통해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반면, 소련은 신탁통치보다 빠른 독립을 좀 더 선호했다고 알려져 있다. “소련은 한국에서 미국이 주도권을 쥐게 될 다국적 신탁통치안을 통해서보다는 즉각적인 독립 정부의 수립을 통해서 자기들의 이익이 더 잘 확보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 소련은 또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제안한 미국에 협력함으로써 동유럽에 대한 자기들의 계획에 미국이 반대하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브루스 커밍스)

그런데 12월 27일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고 보도하면서 반소·반공 운동의 불을 지폈다. 〈동아일보〉의 오보는 미군정이 의도적으로 조작했거나 방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1945년 10월 미국 국무부 극동부장 빈센트가 신탁통치를 언급해 소란이 벌어진 바 있기 때문이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탁치안이 실시되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미국 합동참모부에 보고하기도 했다.

12월 29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발표된 직후 좌익과 우익 모두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12월 31일 반탁 대회는 서울 인구 120만 명 중 30만 명이 참가했다. 독립을 갈망해 온 사람들에게 5년간의 신탁통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탁통치 반대, 완전 자주 독립 전취” 같은 구호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12월 31일 신탁통치 철폐 성명서를 발표했던 조선공산당은 돌연 1월 3일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로 선회했다. 박헌영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입장이 180도 바뀐 것이다. 이러한 혼란으로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는 1월 1일부터 5일간 발간되지 못했다.

1946년 1월 5일 박헌영은 기자회견을 통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내용을 지지하며 조선은 현재 민주 변혁 과정에 있다”고 밝혔다.

1월 21일 소련은 타스통신을 통해 “오랫동안 조선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고, 조선의 신속한 독립을 주장한 것은 소련”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즉시 독립을 열망했던 한국인들에게 신탁통치는 청천병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대중 열망과 반대되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함으로써 민중의 지지는 점점 약화됐다.

군정 사령관 하지가 “흥미 있는 것은 반탁소동으로 빨갱이와 우파가 균형을 이루었다”고 말한 것처럼, 우익은 반탁운동으로 불리했던 세력을 만회할 수 있었다.

신탁통치가 통일을 가져올 수 있었을까?

조선공산당은 3상회의 결정을 따르는 게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38선을 사이에 두고 미·소 열강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면 5년간 신탁통치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공산당은 1946년 1월 3일 임시정부 수립의 의의를 강조하고 신탁통치는 ‘후견제’라고 역설했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 좌파계 학자들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1945년 10월 31일 조선공산당조차 “신탁통치는 현대식의 식민지”라고 규정한 바 있다. 당시 한국인들은 즉각적인 독립을 열망했다. 아무리 후견제로 단어를 바꿔도 열강이 대신 통치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좌파라면 민중의 독립 열망을 지지하고 신탁통치에 반대해야 한다.

또한 좌파들은 소련이 제안했다고 하는 임시정부 수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은 친소 정부 수립의 한 방편으로 이뤄진 것이다. 미국도 친미 정부 수립을 고려했기 때문에 이에 동의했다. 두 제국주의 국가 모두 자신에게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하려다 제 1,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것은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소련은 “앞으로 수립될 민주 임시정부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민주적 제 정당·사회 단체를 망라한 대중 단결의 토대 위에 창설돼야 한다”며 반탁 세력을 배제하고자 했다. 반면, 미국은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이어야 한다며 반탁의 우익 세력도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국 국무부 외교관 볼의 말처럼, “미국은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기어코 봉쇄하려 했고, 소련 역시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저지하려 한 데서 결렬이 온 것”이다.

무엇보다 제국주의 세력 간의 협상에 의존해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게 훨씬 비현실적이다. 이미 국제 정세는 미·소 냉전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1946년 초에는 동유럽 문제를 둘러싸고 미·소 간의 불화가 고조됐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남북에 각각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현실론을 앞세워 신탁통치를 정당화하는 것은 민중의 열망을 무시하고 자주적인 투쟁 의지를 꺾는 일이다. 미·소 제국주의 점령에 맞서 독립국가 건설 투쟁이 대안이다. 조선공산당의 전략은 통일정부 수립은 커녕 분단을 통한 전쟁을 막지 못했다.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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