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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제2차세계대전의 결정적 전환점

2월 2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종료된 지 80년이 되는 날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8월 23일에 시작돼 1943년 2월 2일에 끝났다.

독일(과 다른 추축국들)과 소련은 스탈린그라드(현재 지명은 볼고그라드)를 장악하기 위해 폐허가 된 거리와 부서진 건물 잔해들 속에서 처절한 백병전을 벌였다.(〈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과 독일의 두 저격수가 벌이는 대결을 다룬 영화다.) 이 유혈낭자한 전투에서 양측 군대의 사상자 수는 200만 명이 넘었다.

독일군은 제6군이 궤멸당하는 등 패배했고, 전쟁 전반의 전세도 열세에 몰렸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소련의 적군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진군을 시작했다.

일본이 연합국에 의해 패배해 강점에서 풀려난 한국에서는 1944년 6월 6일(디데이) 연합군의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작전명 ‘오버로드’)을 제2차세계대전의 전환점으로 보는 견해가 흔하다. 물론 노르망디 패배는 독일군에 커다란 일격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노르망디 손실은 동부 전선에서의 (스탈린그라드) 손실과는 비교가 안 됐다. 1945년까지 동부 전선에서 죽거나 다친 독일군은 600만 명이었다.(소련은 군인 1300만 명이 전사했고 민간인 700만 명이 희생당했다.)

히틀러는 1944년 봄에 이렇게 불평했다. “모든 사달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비롯됐다.”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세계대전은 실은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1942년 독일군 27개 사단이 프랑스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던 반면, 무려 200개 사단이 소련과의 전쟁에 투입됐다.

이 유럽 전쟁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국과 미국은 오히려 부차적인 존재였다. 미국 합참이 1942년 8월 작성한 문서도 이 점을 인정한다. “연합군이 [유럽] 대륙에 제2전선을 형성하더라도 그것은 소련 전선에 비해 분명 부차적일 것이다. … 이 전쟁에서 소련이 없다면, 유럽에서 추축국을 패퇴시킬 수 없[다.]”

스탈린의 거래와 오판

1941년 6월 22일 독일군과 그 동맹들이 소련을 침공했다(작전명 ‘바르바로사’).

동부 전선의 전쟁은 통상적인 전쟁이 아니었다. 나치는 “인종 전쟁”이라고 불렀다.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상충하는 세계관 사이에 벌어지는 전투[이자] 볼셰비키 코미사르와 공산주의 인텔리겐치아[를 상대로 한] 섬멸전[이다.]”(안토니 비버,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다른세상)

대학살이 처음으로 전쟁 과정의 일부가 됐다. 나치 군대는 소련과 동유럽에서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제6군 사령부는 우크라이나의 동부 전선에서 스탈린그라드까지 줄곧 그들 뒤를 따라온 SS[나치 친위대] 특무 부대 4a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 키예프에서 유대인들을 일제 검거하여 바비 야르 계곡으로 수송할 수 있도록 병력을 제공하기까지 했다.”(안토니 비버, 위의 책)

독일군은 ‘전격전’을 벌여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모스크바를 위협했다. 또, 소련 남서부로 진군해 스탈린그라드에 당도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대담한 공격에 전혀 대처하지 못하고 연패했다. 전쟁 직전에 스탈린이 벌인 모스크바 재판이라는 대량 유혈숙청과, 히틀러와 맺은 불가침조약에 대한 스탈린의 환상 때문이었다.

1939년 8월 23일 소련 외무부 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스탈린(뒤편 왼쪽에서 넷째)이 지켜보는 가운데 독소불가침조약문에 서명하고 있다 ⓒ출처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

먼저, 1936~1938년 스탈린은 1917년 혁명을 이끈 선임 볼셰비키 당원들을 모두 숙청했다. 노동자 혁명의 역사적 기억을 완전히 지워 버리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적군 장군들도 대거 숙청됐다. 1918~1921년 내전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붉은 나폴레옹’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도 숙청됐다. 그가 내전 동안에 트로츠키와 긴밀하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고문당하고 결국 처형됐다.

소련군 원수 5명 중 3명, 사단·군단급 지휘관의 80퍼센트, 군관구 사령관 16명 등 군 핵심 인사들이 나치의 침공 전야에 숙청당했다.

그 결과,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부대 지휘관들의 회전문 현상이 생겨, 규율과 상호 조율이 와해됐다.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적군의 규모를 걱정하는 장군들에게 “그 군대는 지휘관이 없다”고 안심시켰다. 스탈린의 혁명 동지 대량 숙청이 소련을 나치의 침공 타깃으로 만든 것이다.

그다음,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소련군은 독일군이 침공할 때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그 조약은 제2차세계대전 개전 직전인 1939년 8월에 (세계를 놀라게 하며) 체결됐다. 스탈린은 독일의 서유럽 침공을 용인함으로써 소련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제 딴에는 피하려 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히틀러와 한 야합은 단순한 외교술이 아니었다. 그 결탁에는 소련으로 망명한 독일 공산당원들을 독일 보안경찰 게슈타포에 넘겨주고, 독일에 전쟁 물자를 제공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스탈린은 어떻게든 히틀러의 군대를 도발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 강박 때문에 스탈린은 집착적 오판을 거듭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히틀러의 의도에 관한 소련 측 첩보원들과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관의 경고를 무시했다.

또, 발트해 항구들에서 독일 선박이 갑자기 선적을 중단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보고서도 무시했다.

심지어 전쟁 직전에 300대가 넘는 독일군 정찰기가 소련 영공 안으로 진입했지만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히틀러 정부의 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이런 스탈린을 두고 “뱀에 홀린 토끼”에 비유했다.

1941년 6월 22일 오전 3시 독일군이 소련 영내를 폭격했다. 하지만 소련 주민들은 6월 22일 저녁에서야 (스탈린이 아니라) 외무장관 몰로토프의 짧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히틀러는 히틀러대로 오판하다

히틀러는 소련을 이기면 전쟁이 (독일의 승리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독일군이 소련군을 물리친 뒤 이란의 유전 지대를 거쳐 영국 제국의 ‘왕관의 보석’, 인도로 진군해서 일본군과 합류할 것이다. 그러면 미국과 영국은 평화협정을 맺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기대와 달리, 독일군은 모스크바까지 진격하지 못했고 소련을 정복하지도 못했다. 그렇기는커녕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에서 세계 역사상 최대이자 가장 참혹했던 전투를 치르고 패배했다.

제풀에 분노한 히틀러는 제6군에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사령관인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중장은 소련군에 항복했다. 제6군 병력 25만 명 중 절반이 전사·동사·아사·병사했다. 9만 명이 포로가 됐고, 그중 5000여 명만이 1955년에 독일로 최종 귀국했다.

골수 반공주의자인 영국 총리 처칠은 적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의 내장을 찢었다”고 인정했다.

소련도 승리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적군도 거의 50만 명이 죽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동안 적군 병사들의 평균 기대수명은 24시간이었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그 뒤 벌어진 쿠르스크 전투(1943년 7~8월)에서 재기불능으로 무너졌다.

쿠르스크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차전(戰車戰)이었다. 독일의 전투력을 최대 규모로 집중시킨 전투 중 하나였지만 대패했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배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앞에서 봤듯이, 소련군의 승리는 “위대한 전쟁 지도자” 스탈린의 지도 덕분이 전혀 아니었다.

스탈린은 소련 인민이 나치 독일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는 투쟁을 할지 확신하지 못해 불안해 했다.

그래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스탈린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마라!”는 명령을 내렸다. 후퇴하는 병사들은 장교들이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지휘관에 의해 처형당한 소련군 병사는 대략 1만 3500명이었다.

‘절대 후퇴 금지’ 명령이 효과를 낸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용감하게 도시를 방어한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련이 파시즘에 맞서는 최후의 보루라는 생각, 소련 체제가 파시즘보다야 낫다는 생각 등이 소련 주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의 중요한 동기가 됐을 것이다.

반파시즘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

제2차세계대전 동안 연합국의 지배계급들은 파시즘 패퇴와 민주주의 수호의 필요성이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 정치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상이몽을 했다.

미국은 장제스(중국 국민당)의 항일전을 지원하는 등 애초에 아시아에서 일본과 세력권을 분할하려고 했다.

그게 뜻대로 되지 않자 미국은 일본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원(석유가 핵심이었다) 공급을 중단시켰다.

일본은 자국의 남진을 가로막는 주된 장애물이던 진주만의 미군 함대를 공격했다.

미국은 그제야 참전했는데, 참전의 직접적 동기는 극동 지역에서 벌어진 식민 제국들 간의 분쟁이었다.

영국은 1940년 봄 프랑스가 함락당했을 때부터 1943년 연합군이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할 때까지 주로 아프리카 북부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수에즈 운하와 유전 지대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처칠은 프랑스에 제2전선을 형성해 달라는 소련의 요청을 묵살했다. 오히려 지중해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1943년 말부터 소련이 동부 전선에서 이기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미국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소련의 적군이 유럽을 휩쓸 것이었다.

그러자 미국의 루스벨트(프랭클린 로즈벨트)는 프랑스에 제2전선을 형성하자고 영국을 압박했다. 유럽에서 적군이 급속도로 진군하자 처칠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리하여 1944년 6월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실시됐다.

히틀러가 패배하기 전에 영국과 미국은 장차 서방과 소련 사이에 벌어질 제국주의적 갈등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련도 제국주의적 동기에 따라 움직였다. 스탈린은 이미 독소불가침조약을 이용해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해 연안 국가들을 점령· 병합했다.

그리고 전후 자국의 세력권을 넓히는 데 온통 정신을 쏟았다. 그래서 1944년 독일군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저항 세력의 봉기를 분쇄하고 있을 때 스탈린은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소련군에 명령했다.

바르샤바와 반나치 저항 세력이 초토화된 뒤에야 비로소 소련군은 비스투라 강을 건너 바르샤바를 점령했다.

그리고 미·영·소 세 강대국은 모두 나치당뿐 아니라 독일인 전체를 적대함으로써 히틀러가 독일을 계속 지배하는 데 일조했다. 영국·미국의 공군은 독일의 민간인 지역을 융단 폭격해, 함부르크·쾰른·드레스덴 등지에서 10만 명이 죽었다. 소련의 국영방송은 “독일인을 죽이자!” 하고 선동했다.

그러니 독일 노동계급이 자기 지배자들에게 등을 돌릴 리 없고, 그 덕분에 히틀러는 최후의 순간까지 독일군을 더 쉽게 통솔할 수 있었다.

수많은 보통 사람들은 진정으로 파시즘을 증오하고 그에 맞선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연합국(소련 포함)의 지배계급들을 움직인 동기는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중의 반파시즘 정서를 이용해 자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데 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