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표현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국가 규제에 기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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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몇 년 새 혐오표현 규제 법률을 제정하려는 시도가 수차례 있었다. 현재까지는 모두 철회·폐기됐거나 계류 중이다. 민주당 의원들이 가장 많이 시도했고, 정의당과 진보당도 차별금지법 계열 발의에 참여했다. 민주당은 이상민, 박주민, 권인숙, 윤후덕 등이 대표적이고, 진보당은 손솔이 대표적이다.
규제 방식이 넓고 추상적일수록, 특히 형사처벌을 도입할수록 표현의 자유 침해 위험이 커진다. 표현의 자유를 상대적으로 덜 침해하는 것은 폭력 선동, 진정한 협박, 반복적 표적 괴롭힘처럼 해악이 구체적인 경우를 좁게 규제하는 입법이다.
반대로 ‘모욕’, ‘적의’, ‘정신적 고통’, ‘배제·제한을 담은 게시물’ 같은 개념을 넓게 써서 일반 정치표현까지 끌어들이는 법은 표현의 자유 침해 소지가 크고, 동시에 활동가·소수파 시위까지 압박하는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윤후덕안과 신장식안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실질적 위험성이 크다.
물론 극우의 혐오표현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분 나쁜 말이나 무례한 언사가 아니다. 특정 집단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비하하며, 그들이 사회에서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정치적 행위다.
혐오표현은 인종, 종교, 성적 지향 등을 근거로 사람들을 모욕하고 굴욕감을 주는 표현으로 정의할 수 있다. 혐오표현은 사적인 편견의 독백이 아니라, 상대에게 들리고 보이도록 던져지는 공격적 표현이다.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국가 규제가 적절한 대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핵심 쟁점이 드러난다. 혐오표현이 해롭다는 사실과, 국가가 그것을 규제해야 한다는 결론은 같은 말이 아니다. 전자는 사회적 해악에 대한 판단이고, 후자는 국가 권력의 역할에 대한 판단이다. 둘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혐오표현 규제에 신중한 이유는 비교적 분명하다. 하나는 혐오표현에 맞서는 더 나은 방식이 반론과 공개적 맞대응일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특정 표현을 법으로 금지하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더 많은 금지가 쉬워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혐오표현 금지가 더 광범한 검열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오늘은 극단적 혐오를 막는다고 시작한 규제가 내일은 더 광범한 표현 통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우려는 결코 공상적이지 않다. 국가는 언제나 ‘해로운 말’만 정교하게 골라서 통제하는 중립적 기계 장치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법은 문장으로 써지지만, 그 문장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결국 경찰, 검찰, 법원, 행정부 같은 국가 기관과 이른바 ‘여론 주도층’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생긴다. 무엇이 ‘혐오’이고 무엇이 ‘선동’이며 무엇이 ‘사회 질서 위협’인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이 결정은 결코 순수하게 중립적일 수 없다.
그래서 좌파가 혐오표현을 반대하면서도 국가 규제에는 신중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관된 태도다. 혐오표현은 차별받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정치적 무기다. 그러나 국가의 규제 권한도 늘 소수자 보호만을 위해 사용되지는 않는다. 오늘은 극우의 노골적 모욕을 겨냥한 법이 내일은 소수자의 분노, 저항하는 사람들의 급진적 구호, 반전 운동과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언어, 체제를 비판하는 말들을 겨눌 수 있다. 규제의 칼은 한 번 쥐여지면 극우만 베고 멈추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마음에 드는 의견만 허용하는 체제가 아니다. 혐오스럽고 어리석은 견해를 가진 사람조차 시민으로서 발언할 권리가 있다. 국가가 어떤 의견은 너무 불쾌하거나 해롭다고 해서 공론장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하면, 그것은 시민을 동등한 정치적 존재로 대우하지 않는 일이 된다. 이 문제는 혐오표현 규제 유혹이 왜 민주주의 자체와 긴장을 빚는지를 잘 보여 준다.
또한 정부가 안보나 외교 같은 다른 가치들을 내세워 표현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경향을 우려의 눈으로 보면,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정당성과 깊이 연결돼 있다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본지의 관점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단지 검열이 확대될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고,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것만도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가 애초에 중립적 심판자가 아니라는 데 있다. 현실의 국가는 기존 질서와 권력 관계를 반영하고 수호하는 기구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 규제 권한은 추상적으로 행사되지 않고, 대체로 아래를 향해 행사된다.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 부당하게 비하되는 사람들, 그리고 저항하는 사람들의 말이 더 쉽게 ‘문제적’ 표현이 된다.
바로 그래서 혐오표현과 맞서는 좌파의 과제는 국가에 금지 권한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그것을 정치적으로 분쇄하는 데 있다. 혐오표현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조직된 연대로 맞서고, 거리와 학교와 직장과 문화의 공간에서 그것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검열이 아니라 투쟁이다. 필요한 것은 침묵의 강요가 아니라 집단적 반격이다.
결국 핵심은 간단하다. 극우의 혐오표현은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 대응을 국가 규제 입법에 맡기는 것은 또 다른 위험을 부를 수 있다. 혐오를 막겠다며 국가에 쥐여 준 권한은 종종 차별과 억압 받는 사람들과 급진적인 저항을 향해 되돌아온다. 그래서 혐오표현 반대와 국가 규제 반대는 모순이 아니다. 그것은 혐오의 해악과 국가 권력의 위험을 동시에 보려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