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표현 처벌로 극우를 저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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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운동이 그렇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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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있으면 이재명 정부가 취임한 지 반년이 된다. 하지만 극우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제1야당 국민의힘(국힘)이 극우화했다. 국힘 대표 장동혁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또 다른 극우 정당인 자유통일당(전광훈), 자유와혁신(황교안) 등과 연대하겠다고 밝혔다. 사법부를 비롯해 일부 국가기관들의 “내란 청산”(군사 쿠데타 부역자들의 숙정) 방해 행위도 그 위험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러자 11월 11일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정부는 두 가지 대책을 논의했다. 첫째, (특검에만 의존할 수 없다며) ‘헌법존중 정부혁신 티에프’(TF)를 꾸려 윤석열의 12.3 친위 쿠데타에 가담한 공직자들을 조사하기로 했다.(관련 기사: ‘내란 청산은 왜 중요한가’) 둘째, “혐오 표현 처벌 장치”를 마련하기로 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혐오 표현 금지 법안(혐오집회금지법,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등)을 발의했다(이 법안들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혐오집회금지법은 좌파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정보통신망법 개악 논란: 왜 집권만 하면 표현의 자유 침해 입법을 하려 하나’를 보시오.) 손솔 진보당 의원도 ‘정당 현수막 인종혐오 표현 규제’ 법안을 발의했다.
국힘은 이런 법적 규제를 가당찮게도 “표현의 자유 침해,” “독재”라며 반발한다. 자신들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방향 감각을 헷갈리게 만들려는 수작일 뿐이다.
국힘이 강변하는 “표현의 자유”는 결과에 상관없이, 원하는 것을 언제든, 누구에게든 말할 권리를 뜻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극우적 발언을 정상화하고, 이를 비판하는 것은 불관용이라고 되받아치려는 것이다.
그러나 국힘은 표현의 자유를 폭력적으로 억압하려 했던 윤석열의 쿠데타를 비호하고 있다. 국힘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관련 기사: ‘표현의 자유 폐지하려는 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할 수 없다’)
표현의 자유는 결코 자본주의 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극우의 것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사회의 민주적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한 운동의 수단일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다시 말해, 표현의 자유는 착취받거나 차별받는 집단이 기성 질서를 수호하는 (정치적·경제적) 권력자에 맞서는 물질적이고 대중적인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가령, 20세기 초 미국에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우블리)이 벌인 표현의 자유 투쟁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IWW의 연사들은 거리 연설을 금지하는 법률들에 맞서 거리에서 부패한 지방정부 관료들과 기업주들을 비판했다. 경찰은 잔혹하게 탄압했다. 한번은 5,000명이 넘는 연사들이 동시다발로 체포되기도 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물러나지 않고 싸웠다. 1906~1917년 적어도 26개 지역들에서 표현의 자유 투쟁을 벌여, 다른 많은 평범한 미국인들도 표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도록 고무했다.
이렇듯 노동계급 투쟁의 전통에서 표현의 자유 옹호는 ‘정중한 토론과 대화’에 중점을 두는 자유주의적 관점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의 목표는 기성 시스템을 제거하고 새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권력자에 맞서 저항할 권리를 제한하는 것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한다.
혐오 표현 금지법의 역효과
많은 사람들은 SNS와 거리 현수막에 휘갈겨져 있는 극우의 혐오 표현을 혐오할 것이다. 그래서 혐오 표현을 법으로 금지하려는 시도는 흔히 “민주주의 지키기”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사회주의자들도 전술 차원에서는 극우에 대한 법적 처벌을 요구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서울 서부지법 폭동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 요구는 마땅하다. 무엇보다, 윤석열을 비롯한 군사 쿠데타 세력들은 중형에 처해야 한다.(그래서 노상원에게 특검이 징역 3년 구형한 것을 우리는 개탄한다.)
그러나 이런 요구를 제기할 때조차 “국가가 우리를 지켜 준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각종 혐오 표현 금지법 제정에 대한 접근은 그런 가정을 깔고 있다. ‘국가기관은 중립적이다’, ‘사법부는 공정하다’, ‘경찰은 적법하게 법을 집행한다’ 등등.
(1)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는 중립적이지 않으며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한다. 외관상 중립적(또는 공정한) 조처로 보이는 혐오 표현 금지도 실은 경찰, 법원, 정보기관 같은 국가기관들에 의해 집행된다. 권위주의와 냉전 반공주의, 국가보안법, 무소불위의 공권력 행사 등을 통해 형성돼 온 이 억압적 국가기관들은 대중 운동이 자본주의 질서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단속해 왔다.
그래서 혐오 표현 금지 권한이 법·치안·감시를 담당하는 억압적 국가기관의 수중에 들어가면, 그것은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계급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선택적으로 집행될 수 있다. 그리되면 민주주의가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의 억압 능력이 강화될 것이다.
무엇보다, 현재 한국 극우의 핵심은 법원·군·검찰·경찰 등을 관리하는 고위 관료들이다. 바로 이들이 곳곳에서 “내란 청산”을 방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극우에 대한 법률적 규제가 공정하게 적용될 리가 있겠는가.
가령, 지난 1월 서울서부지법 폭동 가담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은 너무 관대했다. 경찰·검찰 모두 폭동 가담자들에 대해 소요죄를 적용하지 않았다. 경찰은 당일 폭동을 배후에서 선동한 전광훈을 10개월이 지나서야 소환했다. 법원 판결도 관대했다. 징역형 3년 반이 지금껏 최고 형량이다.
따라서 혐오 표현 금지법들이 통과돼도 극우의 혐오 표현 차단 조처는 필요한 것보다 훨씬 적게 이뤄질 것이다.
(2) 이런 혐오 표현 금지법들은 피억압 대중 운동의 급진파를 향해 휘두르는 칼날이 될 수 있다.
현재 영국의 대테러 예방 프로그램 ‘프리벤트’(Prevent)는 무슬림들의 신앙 생활까지 감시 대상으로 삼고 있다. 독일 정부는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유대인 혐오’로 규정하고 탄압한다. 프랑스 정부가 노동조합들의 시위를 ‘폭력적 극단주의’로 분류하는 빈도수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국가보안법이 친북 주장과 그 활동,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금지하는 사상 통제법 구실을 오랫동안 해 왔다.
(3) 혐오 표현 금지법들의 모호한 개념 정의는 선택적 적용과 집행을 가능케 한다.
가령, 김태년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혐오 집회 금지법안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특정 집단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집회 주최를 금지”하고 집회 제한 대상에 “타인의 인격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모욕”을 포함한다.
“특정 집단,” “인격권 침해 모욕” 같은 기준은 지나치게 탄력적이다. 즉, 이 개념에는 내용이 비어 있고, 결국 경찰 같은 국가기관들이 정치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을 채워 넣을 수 있다. 결국 해석이 문제가 되며, 국가기관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개념을 확장·축소할 수 있다. 피지배 대중이 항의하고자 하는 대상에게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
벌써부터 국힘은 왜 “반미 집회”는 제한하지 않느냐고 반발하고 있다. 그러자 경찰은 극우의 명동 반중·혐중 집회를 불허한 뒤, (형평성을 내세워)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명동 거리 행진도 불허했다.
(4) 결정적으로, 법적 처벌은 극우를 제거하지 못한다. 가령, 독일은 혐오 표현이나 인종차별적 발언을 엄격히 금지한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 혐오 표현을 폭넓게 규정해 처벌할 수 있는 독일 형법 130조(국민선동죄)가 극우 방화벽으로 얘기된다. 이 법으로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망언을 내뱉은 극우 인물이 처벌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처벌은 극우에게 순교자의 이미지를 씌워 줄 뿐 극우의 영향력을 줄이지는 못했다. 파시스트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은 현재 원내 제2당이다.
사실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유대인 혐오 표현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나치는 그 법으로 처벌받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1933년에 히틀러가 집권했다.
대중 행동
극우에 맞설 수 있는 진정한 힘은 자본주의 국가의 법적 금지 조처가 아니라 대중 행동에서 나온다. 지난해 12월부터 5개월 동안 지속된 대중 운동이 없었다면 그나마 윤석열을 구속킬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역사적·국제적 경험이 가리키는 바다. 1936년 10월 나치인 모슬리를 꺾었던 영국의 케이블 스트리트 전투, 5년 전 나치 정당인 황금새벽당을 해산케 한 그리스 반파시즘 운동은 극우를 물리칠 힘이 노동운동과 반파시즘 운동 등 대중 운동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지 않고 국가의 법적 조처에 주로 의지하는 것은 극우에 맞선 대중 저항이 더는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경찰에 그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법 입안 과정 자체가 대중의 동원을 해제하고 경찰에 권한을 부여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극우 저지는 국가 기관이 아니라 대중 운동의 과제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