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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 극우 최일붕 글 모음 제국주의 팔레스타인·이란전쟁 이주민·난민 긴 글

긴 글
자본주의는 어떻게 제국주의로 진화했는가?
발생에서 제국주의 단계 진입까지 궤적

어느 좌파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세계의 종말보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를 더 어려워한다.” 자본주의가 ‘대안 없는’ 체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권력자들이 자본주의를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이자 초역사적 질서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는 첫걸음은 자본주의에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특정한 시기와 조건 속에서 폭력을 통해 탄생했으며, 언제든 소멸할 수 있는 체제다. 마르크스가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는 자본주의의 시작과 전개, 그리고 종말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를 분석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인 중세 말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해 19세기에 전 세계로 확산됐다. 이 압축된 연대기 안에는 큰 쟁점이 숨어 있다. 본격적인 발전 시점은 언제인가? 왜 유럽인가? 확산은 어떤 수단으로 이뤄졌는가?

이 글은 자본주의의 기원부터 제국주의 단계 초기에 이르는 역사적 궤적을 대략적으로 다룬다. 서사의 방법론은 생산관계의 변혁과 이윤율 역학을 중심에 두는 마르크스 자신의 역사유물론에 기초한다. 논의의 종착점은 20세기 초다. 이 시기는 자유경쟁 자본주의가 독점 자본주의로, 그리고 국가와 자본의 융합, 식민지 분할, 군비 경쟁 체제로 질적 전환을 겪는 국면이다.

레닌과 부하린이 정립한 제국주의 이론은 느닷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태동기부터 내재한 경향, 즉 폭력적 탈취, 경쟁의 무정부성, 자본 축적(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잇따른 재투자)의 필요성, 세계적 확장이 특정 위기 국면에서 집약된 결과다. 이러한 논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관철됐는지 추적한다.

1. 자본주의의 핵심적 특성

무엇이 자본주의를 이전의 모든 계급사회와 구별하는가? 자본주의는 두 가지 대분할을 토대로 삼는 체제다.

첫째, 자본가 사이의 분할, 즉 경쟁이다. 자본주의를 일론 머스크,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제프 베이조스 같은 개인의 탐욕으로 축소하는 통속적 시각은 본질을 놓친다. 자본가가 탐욕스러워 축적하는 것이 아니다. 축적하지 않으면 뒤처지기에 축적할 뿐이다. 경쟁에서 밀린 자본은 인수되거나 파산한다. 이러한 경쟁과 축적의 상호 강제는 자본가 계급이 이전의 어떤 사회도 상상하지 못한 규모로 생산력을 발전시키도록 내몬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는 “생산도구와 생산관계, 나아가 사회관계 전체를 끊임없이 혁신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한 이유도 이 역학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역동성은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경쟁이라는 채찍이 만들어 낸 구조적 산물이다. 이 채찍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더 오래, 더 적은 임금으로 일하게 만들고, 경쟁 우위를 확보할 신기술에 끊임없이 투자하도록 강제한다.

둘째, 자본과 노동 사이의 분할이다. 자본주의는 보편적 상품 생산 체제라는 점에서 유일무이하다. 이전 사회에도 시장과 상품은 존재했지만, 자본주의에 이르러서야 상품 생산이 사회적 생산의 지배적 형태로 자리 잡는다. 결정적으로 노동자의 노동력 자체가 상품이 되고, 임금 노동이 노동의 주된 형태로 자리 잡는다. 생산수단 통제권이 새로운 착취 계급(자본가)의 손에 넘어가면서, 생산자(노동자)는 노동 능력을 파는 것 외에는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 없어진다. 노동의 대가는 노동으로 생산한 재화의 가치보다 훨씬 낮고, 그 차액인 잉여는 자본가의 손에 들어간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착취라고 불렀다. 자본가는 자신의 영리한 투자와 신기술이 부를 창출한다고 믿지만, 이윤을 창출하는 원천은 결국 노동자의 노동이다. 사용자는 끊임없이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려 하고, 노동자는 이에 맞서 집단으로 조직하는 것이 득이 된다. 착취를 둘러싼 영속적 갈등이라는 적대 관계야말로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핵심 사회관계다. 서로 목을 조르며 경쟁하는 자본가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유일한 요인은 피착취자들의 저항이라는 위협이다.

이 두 분할이 결합하면서 체제의 본질적인 비합리성이 비롯한다. 경쟁은 자본주의를 무정부적 체제로 만든다. 생산한 상품의 시장이 존재하는지는 판매대에 오르기 전까지 아무도 모른다. 그 결과 아무도 사지 않는 상품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한편, 절실히 필요해도 이윤이 나지 않아 생산하지 않는 필수재가 극심하게 부족한 모순이 공존한다. 인류가 인간의 필요와 지구의 건강에 맞춰 생산을 합리적으로 계획할 능력은 자본 축적 과정에 밀려 상실된다. 자본주의는 이전의 그 어떤 체제보다 생산적이고 역동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킬 잠재력은 낭비되고, 체제는 필연적으로 비인간성과 불평등, 불황과 전쟁, 파괴로 얼룩진다. 이러한 규정은 단순한 도덕적 고발이 아니라 이후 서술의 이론적 골격이다. 경쟁적 축적이 강제되는 상황이야말로 1873년 최초의 대규모 공황을 낳고 제국주의로의 이행을 추동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2. 본원적 축적

자본주의에는 자체의 기원에 관한 신화가 있다. 그 신화에 따르면, 봉건 사회에서 부지런하고 검소한 근로자는 부를 모았고, 게으르고 방탕한 근로자는 빈민이 될 운명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이 신화를 “선행 축적”이라는 이름의 정치경제학으로 포장해 퍼뜨렸다. 마르크스는 이를 정치경제학의 옷을 입은 “원죄에 관한 유치한 설화”라고 조롱했다. 이 ‘원죄’는 아무리 일해도 자기 노동력 외에는 팔 것이 없는 대다수의 빈곤과, 일을 그만둔 지 오래됐는데도 끊임없이 불어나는 소수의 부에 대한 기원 설화다.

마르크스가 이 설화에 맞서 제시한 개념이 바로 ‘본원적 축적’이다. 흔히 ‘시초 축적’이라고 번역되지만, 이 말은 자본주의 초기에만 일어난 일회성 사건이라는 오해를 부를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제이자 근원적 조건이라는 의미를 명확히 하고자 ‘본원적 축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한편, ‘원시적 축적’은 마르크스 자신이 말한 ‘ursprüngliche Akkumulation’을 직역한 느낌이 강한데, 우리말에서 ‘원시적’은 ‘문명 이전의’, ‘미개한’이라는 뉘앙스를 띠기 쉽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본원적 축적’이 가장 무난하고 정확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표현은 또한 자본주의적 축적의 본래적·근원적 전제를 가리킨다는 뜻을 더 잘 담아 낸다.

그가 지적했듯이, 친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이 평화로운 교역과 기술 혁신의 목가로 묘사한 실제 역사에서 폭력은 정복, 노예화, 강탈, 살인 등의 형태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농들은 토지로부터 강제로 ‘자유로워져야’ 했다. 지주들은 공유지와 숲, 강을 무단으로 탈취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본원적 축적이 단지 부자들이 돈이나 땅을 긁어모은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원적 축적은 생산수단의 축적이자, 자본가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무산 노동계급의 창출이었다.

본원적 축적이 지닌 변증법적 성격도 간과할 수 없다. 본원적 축적은 노동자를 농노제와 봉건적 예속에서 해방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친자본주의 역사가들은 농노 해방을 자본주의 체제의 공적으로 자축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이 새로운 자유인들은 모든 생산수단을 빼앗긴 뒤에야 비로소 자신을 파는 판매자가 됐다.”

자본주의가 필요로 한 존재는 ‘이중으로 자유로운’ 노동자였다. 그는 봉건적 속박에서 자유로워진 동시에,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굶어 죽을 자유가 있는 노동자였다. 본원적 축적은 이처럼 두 개의 새로운 사회계급을 낳았다. 하나는 생존수단과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력을 파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자유로운’ 노동자다. 두 계급은 서로 의존한다. 자본가는 이윤을 위해 노동자가 필요하고, 노동자는 생존을 위해 일자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두 계급은 착취 조건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충돌한다.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사회관계는 바로 이 역사적 폭력의 산물로 생겨났다.

본원적 축적은 나라마다 다르게 진행됐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그 과정은 언제나 “대량의 노동자가 갑자기, 강제로 생존수단을 빼앗겨 자유롭고 ‘의지할 곳 없는’ 프롤레타리아로 노동시장에 내던져지는” 계기를 포함했다.

또한 본원적 축적은 처음부터 국제적 차원을 띠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16~18세기 중상주의 시대에 상인 계층의 부상은 식민지 정복을 추동했고, 막대한 부가 유럽으로 유입됐다. 17세기 말부터는 ‘자유로운 노동’이 아니라 노예제에 기초한 고수익 생산 형태도 발전했다. 마르크스는 아메리카 선주민 제노사이드, 아프리카인 노예화, 동인도 정복과 약탈이 “자본주의적 생산 시대의 장밋빛 새벽을 알렸다”고 썼다.

노예제와 식민지 약탈은 영국의 농촌 노동자를 채찍질하고 굶기고 위협해 토지에서 몰아낸 과정과 동일한 체제의 구성 요소였다. 요컨대 자본주의는 봉건제 내부의 균열, 봉건제에 맞선 투쟁, 중상주의의 부상, 부를 창출하는 새로운 방식의 발전 속에서 형성됐다. 그러나 그 모든 발전의 길을 닦은 것은 “피와 오물 속에서 태어난” 체제를 위한 본원적 축적이었다.

본원적 축적을 자본주의 전사(前史)의 종결된 국면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본원적 축적을 봉건적 생산관계의 해체와 임금 노동자 형성이라는 초기 단계의 폭력적 과정에 국한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성숙한 뒤에는 본원적 축적이 원칙적으로 종료됐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은 물론, 실제 자본주의 형성사의 역사적 흐름과도 맞지 않는다.

본원적 축적이 한때의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요점은 그것을 ‘자본주의 이전의 일회성 사건’으로 국한하지 않음과 동시에, 또한 ‘수탈이 곧 자본주의’라는 식으로 단순화하지도 않는 것이다.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 16~18세기 인클로저(공유지 사유화와 농민 추방), 20세기까지 이어진 식민지 토지 강탈, 노예 노동과 임금 노동의 차이를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자본주의가 성립하려면 직접 생산자가 생산수단에서 분리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영국에서는 16~18세기 인클로저가 농민을 토지에서 몰아내어 도시 임금 노동 시장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이러한 분리만으로 자본주의가 자동으로 탄생하지는 않았다. 기원전 2세기 로마 공화정기 이탈리아에서는 부채로 농민이 토지에서 쫓겨났으나, 뒤이어 나타난 체제는 임금 노동이 아니라 대규모 노예제였다. 결국 본원적 축적은 단순한 수탈을 넘어, 수탈과 생산관계의 특정한 재편이 결합된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자유로운’ 임금 노동과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의 통제가 결합돼야만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성립한다.

자본주의는 유럽 내부에서 폐쇄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유럽·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를 잇는 세계사적 과정 속에서 형성됐다. 이 때문에 본원적 축적의 경계는 명확히 닫히지 않았다. 인클로저는 영국에서 18세기까지 이어졌고, 식민지 세계에서는 토지 강탈과 선주민의 생산수단 박탈이 20세기까지 계속됐다. 남아프리카 등지에서 백인 식민 정착자가 선주민의 토지를 강탈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노예제 역시 자본주의 외부에 병존하던 단순한 잔재가 아니었다. 노예 노동 자체는 임금 노동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서양 노예제, 플랜테이션, 면화 공급, 식민지 무역은 산업 자본주의의 성장 조건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따라서 노예제와 식민지 약탈은 자본주의 외부의 전근대적 잔재가 아니라, 자본주의 형성의 조건이자 세계 체제의 일부로 기능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880년대 식민지 쟁탈전을 ‘완료된 본원적 축적 이후의 일탈’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성립한 자본주의가 경쟁과 위기, 과잉 축적, 원료·시장 확보 압력 속에서 토지 강탈, 강제 노동, 식민지 지배, 비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파괴를 대규모로 재동원한 과정이었다. 즉,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정상 작동하다가 우연히 벗어난 예외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축적에 필요한 수탈적·폭력적 계기가 세계적 규모로 재편된 형태였다.

따라서 본원적 축적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첫째, 그것은 자본주의 성립의 역사적 전제다. 둘째, 그것은 자본주의가 위기와 확장 국면마다 생산자를 생산수단에서 분리하고, 토지와 자원, 노동력을 자본의 지배 아래 강제로 편입시키는 반복적 과정이다.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본원적 축적을 과거에 종결된 사건으로 다루기보다, 자본주의의 발생과 세계적 확장을 매개하는 폭력적 축적 과정으로 파악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인식이 있어야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외적 일탈이 아닌 자본주의적 축적의 내재적 경향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의 먼 과거에 있었던 단순한 준비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성립할 수 있게 만든 폭력적 전제였고,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재등장한 수탈의 과정이었다. 자본주의의 기원은 근면과 절약의 훈화가 아니라, 생산자와 생산수단을 강제로 분리하고 그 폭력을 세계적 규모로 조직한 역사 속에 있다.

3. 왜 서유럽이었나?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드러내지만 또 다른 물음에는 답하지 못한다. 왜 하필 서유럽이었을까? 왜 산업 자본주의는 라틴아메리카나 아시아, 아프리카가 아닌 유럽에서 발전했을까? 이는 역사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질문인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편향된 질문이기도 하다.

니얼 퍼거슨류의 우파 역사가들은 이 사실을 동양 사회의 ‘후진성’을 보여 주는 증거로 삼는다. 《시빌라이제이션》(21세기북스, 2011)에서 그는 자본주의가 서구에서 발전한 원인을 ‘서구적 가치’나 모종의 ‘타고난’ 혁신성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설명은 동양 사회가 인류사 대부분의 기간에 과학, 문화, 물질적 혁신의 본류였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아울러 세계 각 지역의 발전을 서로 분리된 것으로 묘사하는 역사 서술에 의존한다.

이 관점을 실증적으로 해체하는 저작으로 케네스 포메란츠의 《대분기》(에코리브르, 2016)가 있다. 포메란츠는 기대수명 같은 지표를 통해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에 1750년까지도 강한 유사성이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유럽의 19세기 대분기는 상당 부분 석탄이라는 지리적 행운에 기인했다. 석탄은 토지의 집약적 이용에 실패한 유럽의 약점을 보완하며 에너지 집약 산업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또 다른 결정적 차이는 교역에서 비롯된다.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에 그 어떤 아시아 나라보다 큰 필수 물자의 공급원이 됐다. 반면 아시아 지역은 인구와 내수용 수공업이 성장하면서 핵심 자원을 수출할 수 없었기에, 성장이 노동집약적·자원절약적 경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니얼 퍼거슨(그리고 한국경제신문사가 낸 《국가의 부와 빈곤》의 지은이 데이비드 랜즈 등)에 대한 반론이 단순히 지리적 우연성 문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핵심은 유럽이 특별히 상업적이고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출현했다는 설명이 틀렸다는 것이다. 상업, 교역, 상인은 유럽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탈라트 아메드가 지적하듯이, 지중해와 중국, 아라비아반도에 걸쳐 오래전부터 수익성 높은 교역이 이뤄졌고 활발한 시장 도시들이 존재했다. 상인들은 전자본주의 농경사회 내부에서 하나의 계급으로 등장했으며, 서로 교류가 거의 없던 사회들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출현했다. 기원전 2000년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기원전 300년경의 인도, 중국, 그리스, 로마가 그랬다.

상인들은 경제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정치에도 흔적을 남겼다. 불교, 힌두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은 상인들이 오간 교역로를 따라 전파됐고, 세계 주요 언어들도 교역로와 시장에서 서로 소통하며 발전했다. 기성 농경 지배계급은 상인들을 유용한 동맹자로 거듭 활용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어디까지나 종속적인 동반자였다. 상인의 부는 기존 지배계급이 통제하는 잉여 생산물의 일부를 취하는 데서 나왔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상인들을 필요로 하면서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무리 강력한 상인이라도 하루아침에 투옥되거나 처형당할 수 있었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자본 형태 구분이 결정적인 분석 도구가 된다. 상인 자본은 교역과 금융에서, 고리대 자본은 대부와 이자에서 이윤을 얻는다. 반면 생산 자본은 노동자를 고용해 재화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이윤을 얻는다. 상인 자본과 고리대 자본은 과거의 거의 모든 제국에 존재했다. 그러나 생산 자본은 극히 드물고 일시적인 형태로만 나타났다.

상인들은 스스로 생산력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출현하려면 상업 활동을 넘어, 생산 자체가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돼야 했다. 다시 말해, 노동력을 구매해 상품을 생산하고 이윤을 축적하는 생산 자본이 사회의 중심으로 떠올라야 했다.

일부 지역에서 상인들은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그들은 산업 및 농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국가 형태가 등장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변화가 특정 지역에서만 일어나고 다른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가?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은 이 문제를 생산력, 생산관계, 상부구조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경제 발전은 새로운 사회관계를 촉진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회관계는 곧 기존 지배계급, 그리고 그 지배를 떠받치는 국가·법·이데올로기와 충돌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생산이 새롭고 선진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면서 구체제를 침식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돌파구는 결국 성공적인 혁명 투쟁에 달려 있었다.

이 패턴은 유럽 봉건제 자체의 성립에서도 확인된다. 10~11세기 서유럽에서 발전한 새로운 생산 기술은 작물과 가축을 세심하게 돌볼 때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노예 노동에 의존해서는 이를 달성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토지 소유자들, 즉 귀족과 교회는 농민 가구에 더 많은 책임을 위임하기 시작했다. 생산력의 변화가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진한 것이다.

사회의 경제적 토대는 그에 조응하는 법적·정치적 상부구조를 낳는다. 생산 방법과, 소수가 다수에게서 잉여를 착취하는 방식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 그러나 생산력이 더 발전하면 기존 상부구조는 질곡이 되고, 양자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이는 유럽 봉건제의 등장뿐 아니라 ‘자유로운’ 노동에 기초한 착취, 즉 자본주의의 등장에도 적용됐다.

자본주의가 출현하려면 직접 생산자가 생산수단에서 분리돼야 했다. 그러나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세계 최초의 산업 기업들조차 반드시 임금 노동자를 고용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수형자나 노예에 의존했다. 노예제는 지배계급이 피착취자에게서 잉여를 수취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처럼 보였다. 그러나 노예제에는 중대한 약점이 있었다. 노예들은 자신의 처지에 격렬히 분개했고, 이는 생산물의 품질 저하로 이어졌다. 또 노예 노동을 유지하려면 감시와 감독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그래서 지배계급 내부에서도 일찍부터 노예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대부분의 농업 계급사회에서 노예제보다 반자유 노동인 농노제가 더 일반적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려면 노예나 농노 노동보다 더 큰 잉여를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생산 방식이 필요했다. 그것이 ‘자유로운’ 임금 노동에 기초한 생산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생산 방식은 구래의 농경 지배계급, 적어도 그 핵심 집단의 통제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기존 국가와 법, 지배 이데올로기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새로운 생산 방식이 구체제를 내부로부터 서서히 침식하더라도, 기존 지배 체제(국가·법·이데올로기)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관계를 확립하기 위한 결정적 계기는 결국 성공적인 혁명 투쟁이었다.

따라서 상업의 존재만으로는 자본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 상인 자본과 고리대 자본의 존재만으로는 자본주의의 발생을 설명하기 어렵다. 상업과 시장, 상인 계급은 유럽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중국, 인도,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지중해 세계에도 활발한 교역과 도시, 상인 계층이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 상인 자본은 대체로 기존 농업 지배계급이 장악한 잉여의 일부를 흡수하는 데 그쳤고, 독자적인 생산관계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자본주의가 성립하려면 상업의 확대뿐 아니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근본적 변화, 그리고 구 지배계급의 정치적·법적 통제로부터 새로운 생산 방식이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필요했다.

조선 후기 상인 자본도 기존 봉건 질서에 단순히 기생한 보수적 세력이 아님과 동시에, 곧바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진보적 세력도 아니었다. 상인 자본은 시장과 화폐 경제를 확대해 낡은 질서를 흔드는 역할을 했으나, 기존 국가 권력과 특권적 유통망, 고리대, 독점 구조와 얽혀 직접 생산자를 수탈하고 기존 질서 내에 머무르는 반동성도 보였다.

조선 후기 상인의 역할을 둘러싸고 한국 근대 경제사 학계에서 논쟁이 존재한다. 핵심 쟁점은 상인이 자본주의 이행의 주체였는지, 그리고 상인 자본이 기존 질서를 해체했는지 아니면 그 안에서 기생했는지 여부다. 첫째 입장은 상인을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존재로 파악한다. 둘째 입장은 새로운 생산 방식을 지향한다는 뜻에서 이들을 진보적으로 평가한다. 셋째 입장은 상인을 이 두 가지 성격이 통합된 모순적 존재로 규정한다.

첫째 입장, 즉 상인을 보수 반동적 존재로 파악하는 견해는 상인 자본의 기생성과 독점성, 기존 국가 권력과의 유착, 농민 및 수공업자에 대한 수탈을 예리하게 포착했다는 장점이 있다. 조선 후기 상업 변동에서 시전상인과 사상 모두 이윤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본질적 차이가 없었으며, 핵심은 상인 개인의 성격 변화가 아니라 유통체계, 교통로, 시장권 등 상업 구조 전체의 변화였다.

물론 조선 후기 상인은 단순히 기존 질서에 기생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상품 유통과 화폐 경제를 활성화하고 시장권을 확대했으며, 물자 집산과 일부 생산 부문에 대한 자본 투입도 촉진했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이런 상인 자본의 성장과 생산 지배 과정을 조선 사회의 내재적 발전을 보여 주는 중요한 근거로 삼았고, 이를 통해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에 맞서려 했다. 1 (여기서 ‘자본주의의 맹아’라는 표현에 대해 한마디 하고 넘어가겠다. ‘맹아’는 학술적·논쟁사적 용어로는 쓸 수 있으나 일반 독자에게는 딱딱하다. 뜻을 쉽게 풀어 쓰려면 ‘자본주의의 싹’이 낫다. 그래서 이론적 맥락에서는 ‘자본주의의 맹아’를 쓰되, 다른 맥락에서는 ‘자본주의의 싹’이라고 쓰겠다.)

그러나 상인을 곧바로 진보적 계급으로 규정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상인 자본은 생산관계를 직접 변혁하기보다 유통, 가격, 신용, 독점 등을 통해 기존 생산자의 잉여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도 상인 자본이 교환가치 생산을 확대하고 기존 생산조직을 해체하는 효과를 낸다면서도, 그것이 곧바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성립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둘째 입장, 즉 상인을 새로운 생산 방식을 향한 진취적 세력으로 보는 견해는 식민사관의 조선 정체론을 반박하는 데 기여했다. 강만길의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창비, 2018)은 조선 후기 실학자의 상업관, 도고 상인의 활동, 상인 자본의 형성과 상업 경제의 발달을 다룬 대표적 연구다. 이 연구는 조선 후기의 상업과 시장경제 발전을 실증적으로 밝히고, 이를 역사 변화의 중요한 계기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입장은 상업의 발달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형성과 쉽게 동일시할 위험이 있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핵심은 단순히 시장과 상인이 확대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직접 생산자가 생산수단에서 분리되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임금 노동자가 대규모로 형성되며, 생산 과정이 자본가의 지배 아래 조직되는 데 있다.

물론 조선 후기에도 자본주의 맹아로 볼 만한 변화들이 있었다. 《조선후기 농업사연구》를 쓴 김용섭에 따르면, 농민층 분화가 심화되고, 토지에서 밀려난 몰락 농민이 늘어났으며, 일부는 품팔이·고용 노동·수공업 노동 등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이런 변화는 직접 생산자가 생산수단에서 분리되는 경향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본격적으로 형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시기의 임노동은 아직 대체로 부차적·임시적 형태에 머물렀고, 노동자가 자본가의 생산 과정에 지속적으로 종속되는 관계도 일반화되지 않았다. 많은 임노동자는 여전히 소농적 기반, 부업, 계절적 고용, 관청·상인·부농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종속과 뒤섞여 있었다. 따라서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의 직접적 대립도 아직 사회 전체를 규정하는 중심적 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조선 후기 상업과 시장의 발전은 정체론을 반박하는 중요한 근거이지만, 그것을 곧바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성립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상인 자본의 성장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형성 사이에는 구분이 필요하다. 전자는 구래의 농업 사회 내부에서도 상당히 발전할 수 있었지만, 후자는 생산수단에서 분리된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고용돼 생산 과정 자체가 자본의 지배 아래 들어갈 때 비로소 성립한다.

셋째 입장이 가장 타당하다. 이 입장은 상인 자본을 모순된 존재로 보는 견해로, 상인 자본이 지닌 역사적 한계와 파괴적 효과를 동시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 상인 자본의 진보적 효과와 보수적 한계를 함께 보는 변증법적 입장이다. 상인 자본은 봉건적 생산양식의 기생자인 동시에 그 침식자였다. 낡은 생산양식에 붙어 이윤을 흡수하면서도, 시장과 화폐 관계를 확대해 그 생산양식을 허무는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강만길의 자본주의 맹아론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조선 후기 도고상업을 전통 사회의 기반을 허물고 근대적 생산양식의 전제를 마련한 발전된 상업 형태로 봤다. 또한 경강상인의 생산 분야 침투, 개성상인의 인삼 재배 자본 투입, 시전상인의 공장 지배, 도고자본의 특권성·매점성·배타성 등을 분석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상인의 구실을 진보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상인은 한편으로 봉건적 질서를 뒤흔드는 시장 확대와 화폐 경제의 매개자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지배계급, 국가 권력, 특권적 유통망, 고리대, 독점 구조와 얽혀 직접 생산자를 수탈하고 생산관계의 근본적 전환을 가로막기도 했다.

요컨대 상인 자본은 낡은 생산양식을 침식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낳지는 않는다. 상인이 진정한 산업 자본가로 바뀌려면 유통 지배를 넘어 생산 과정을 장악하고, 임금 노동을 조직하며,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조선 후기에는 그런 요소들이 부분적으로 나타났지만, 그것이 안정적이고 보편적인 자본주의 이행으로 발전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서양과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에도 상인의 역할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맹아를 보여 주는 한 요소였을 뿐, 그 자체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이 절의 결론을 내려야겠다. ‘유럽적 가치’가 자본주의를 창출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나중에 그런 가치를 형성하고 정당화했다. 자본주의는 유럽 고유의 정신이나 문화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된 생산력과 생산관계 발전의 산물이었다. 유럽과 동아시아는 18세기 중반까지도 생활수준, 시장, 기술, 생산 능력 면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보였으나, 19세기에 유럽이 도약했다. 내부의 정신적 특질 덕분이 아니라, 석탄의 지리적 입지와 아메리카 식민지의 결합(위에서 언급한 포메란츠의 논의를 보라), 세계적 교역망, 그리고 토지와 노동력에 대한 폭력적 수탈이 맞물린 결과였다. 농업은 약 1만 년 전 중동에서 처음 시작됐고, 이후 새로운 생산력의 누적적 성장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가 연결된 대륙을 가로질러 확산됐다. 유럽의 자본주의 발흥은 이 장기적 세계사 과정의 한 국면이었다. 따라서 서구에 본질적으로 우월한 가치나 특별한 역사적 사명이 있었다고 볼 이유는 없다. 우파 역사가들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4. 산업혁명, 프랑스 혁명, 19세기의 확장

1760년대에 시작돼 1840년대에 완성된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는 단순한 맹아적 요소의 결합을 넘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생산양식으로 확립됐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기계제 공장과 새로운 산업 프롤레타리아를 낳았으며, 프랑스 혁명은 봉건적 특권과 구체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부르주아 혁명과 산업혁명이 결합하면서 자본 축적은 사회 재편의 기본 법칙이 됐고, 자본주의는 유럽을 넘어 세계를 자신의 논리에 맞게 재편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19세기의 확장은 단순한 경제 성장기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세계 체제로 성숙하는 단계였다.

‘이중혁명’(부르주아 혁명과 산업혁명)은 자본주의의 진보성과 파괴성을 동시에 드러냈다.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은 빈곤과 고된 노동을 해소할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으나, 그 발전은 여전히 경쟁적 축적의 논리에 종속돼 있었다. 새로운 공장제 생산은 노동자를 대규모로 결집시켰으며, 이들은 착취에 맞선 집단적 저항과 사회주의 정치의 사회적 기반이 됐다. 따라서 19세기 자본주의의 성숙은 부르주아 사회의 승리인 동시에, 그 사회를 넘어설 조건과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이었다.

특히, 1848년 혁명 이후 유럽은 급속한 경제 확장기를 누렸다. 그 선두에는 철도 열풍이 있었다. 1850년부터 1870년 사이에 수만 킬로미터의 선로가 깔렸으며, 이는 강철과 광업 등 연관 산업의 성장을 자극했다. 미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확장이 일어났다. 미국 철도 기업들은 유럽에서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다. 남북전쟁 당시 북부 진영의 전비 조달에 중추적 역할을 한 제이 쿡 앤드 컴퍼니 같은 투자은행은 전후 철도 투기와 확장의 중심이 됐다. 철도, 금융, 광업, 제철업의 결합은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보여 줬지만, 동시에 투기와 과잉 투자, 이윤율 압박이라는 모순도 키웠다.

5. 1873년: 자본주의 최초의 대규모 공황 2

거대 은행이 무너지고 기업이 줄도산하며 자본주의의 기둥이 흔들릴 만큼 심각한 경제 위기가 세계를 덮쳤다. 수천 명이 파산하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는 1929년이나 2008년의 금융 위기 상황을 보여 주는 단면이 아니다. 그보다 56년이나 135년 전에 세계를 강타한 경제적 재난의 요약이다.

1873년 9월 18일, 당시 미국 최대 은행 제이 쿡 앤드 컴퍼니가 파산을 선언했다. 남북전쟁 당시 북부의 자금 조달에 막중한 역할을 했고, 철도 붐을 떠받친 채권 발행의 중심이었던 바로 그 은행이다. 공황의 파급 효과는 극적이었다. 미국 전역에서 100여 개 은행이 추가로 문을 닫았다. 11월까지 55개 철도회사가 파산했고, 이듬해 9월까지 더 많은 회사가 그 뒤를 이었다. 약 1만 8000개 사업체가 문을 닫은 것으로 추산됐으며 실업률이 치솟았다. 뉴욕에서는 전체 노동인구의 4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다. 전미경제연구소(NBER)에 따르면 공황 이후 경기 하강은 65개월, 즉 5년 반 동안 지속됐다. 이는 1929년 월가 대공황 이후의 경기 수축기보다 22개월이나 길다. ‘최초의 대규모 공황’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닌 이유다.

공황과 뒤이은 불황은 저항을 불렀다. 1874년 맨해튼에서 실업자 10만 명이 시위를 벌였고, 이는 폭동으로 이어졌다. 3년 뒤에는 철도 파업이 전국으로 확산했다. 노동자들은 더는 임금 삭감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민병대인 주 방위군이 소집됐으나, 이들 다수가 철도 노동자여서 파업에 공감해 권력자들이 신뢰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정부는 연방군을 투입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차량기지와 차량을 불태웠다. 미국이 6년 전 파리 코뮌과 유사한 봉기에 직면했다는 관측마저 나왔다. 파업은 잔혹하게 진압되며 52일 만에 막을 내렸다. 군대와 민병대의 진압으로 노동자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저항과 함께 정치적 반동도 뒤따랐다. 공황의 피해자들은 공화당 그랜트 행정부에 책임을 물었다. 그 결과 1874년 선거에서 남부 인종차별주의 세력에 기반을 둔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했다. 이는 사실상 ‘재건’의 종언을 의미했다. ‘재건’은 정복된 남부 주에 ‘자유 노동’ 조건을 재창출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려던 북부 지배계급의 기획이었다. 경제 위기가 어떻게 해방 기획을 좌초시키고 인종차별주의 반동을 강화하는지 보여 주는 사례다.

1873년의 공황은 미국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으나 본질적으로는 국제적 위기였다. 미국 경제가 곤경에 처한 주요 원인은 미국 전역의 건설 자금을 조달하던 유럽 내 미국 철도채권 시장이 위기 확산으로 고갈됐기 때문이다. 1872년 베를린에서는 최대 철도 재벌인 유대계 베텔 헨리 슈트라우스베르크가 무리한 금융 투기 끝에 파산을 선언했고, 곧이어 오스트리아 빈의 주식시장이 폭락했다. 1873년 빈의 ‘검은 금요일’은 이러한 글로벌 연쇄 위기의 단면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 경제적 격동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살펴본다. 여기에 개혁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중요한 논쟁 지형이 있다. 개혁주의자들은 다른 경제 정책을 폈다면 파국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는 위기를 체제의 불가피한 속성으로 본다. 통설적 설명이 제시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일부 이론가는 오랜 성장기가 필연적으로 ‘비합리적 과열’, 즉 확장의 과실을 최대한 차지하려는 경쟁 속에서 점점 더 투기적인 투자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 경제 생산 기반의 급속하고 무계획적인 확장이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를 낳아 이윤을 압박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특수한 요인들도 거론된다. 1871년 프로이센이 승리한 뒤 프랑스 경제는 독일 제국에 지불해야 했던 배상금 탓에 침체했다. 독일의 금융 투기는 이 배상금 유입으로 부풀었으나, 1873년 말 배상금 지급이 끝나자 독일 경제도 하강했다. 유럽과 미국 양쪽에서 인플레이션을 잡으려 한 시도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비스마르크의 금본위 통화 고정과 단일 통화(그린백)를 갓 확립한 미국 그랜트 정부의 동조는 유효 수요를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 다양한 요인들이 공황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사태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주요국 경제의 근저에 도사린 문제가 없었다면, 이 요인들을 모두 합쳐도 경기 순환상의 온건한 하강에 그쳤을 것이다. 그 근저에 놓인 문제가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이윤율 저하 경향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는 저서 《장기 불황》(연암서가, 2017)에서 자본가들이 1873년에 이르기까지 인간 노동을 대규모 기계 투자로 대체하려 했다는 점을 논증한다. 경쟁에 내몰린 개별 자본가에게 이는 비용을 절감할 논리적 방책으로 보였다. 그러나 인간 노동 착취가 모든 가치와 이윤의 궁극적 원천이기에, 이 과정은 체제 전체의 이윤율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마이클 로버츠는 1873년 공황에 앞서 이윤율이 저하했음을 보여 주며, 위기를 심화시킨 결정적 요인이 바로 이윤율 저하였다고 논증한다. 요컨대 1873년 사태는 자본주의의 핵심 역학, 즉 경쟁이 강제하는 기술 투자가 어떻게 스스로 발밑을 파는지를 보여 주는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실증이다.

6. 장기 불황에서 제국주의로: 보호주의, 국가-자본 융합, 영토 분할

1873년 이후 지속된 장기 불황은 자본주의 구조 자체를 변형하는 지배계급의 대응을 촉발했다는 결정적 의미가 있다. 지배계급은 깊어지는 경제 불황에 보호무역주의로 대응했다. 자본주의 기업은 규모가 커지고 수는 줄어들면서 국가와 유착했다. 국가와 자본의 융합, 국내 이윤율 저하와 성장 둔화는 국제 경쟁 격화로 이어지며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첫째, 식민주의의 성장이다. 1885년 베를린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를 분할했다. 1870년 아프리카 대륙의 10퍼센트만이 식민 지배를 받았다. 1900년에는 그 수치가 90퍼센트에 이르렀다. 한 세대 만에 대륙 하나가 통째로 분할됐다. 새로운 영토 약탈은 원료와 시장, 투자처와 전략 거점을 확보해 이윤을 끌어올리는 방편이었다. 이는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장이 위기 국면에서 노골적인 영토 분할과 군사적 강압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둘째, 제국주의 경쟁에 따른 군비 지출 증가다. 군비 지출은 자본주의 경제가 불황에서 탈출하는 데 일조했다. 군비 지출의 이점은 생산재(기계·원료)나 소비재 생산의 이윤율을 압박하지 않으면서 경제에 재정을 주입한다는 점이다. 즉, 군비는 과잉 축적 체제가 이윤율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수요를 창출하는 통로였다. 이 통찰은 훗날 ‘상시군비경제론’으로 발전할 싹을 품고 있다. 다만 이 시점에서 주목할 부분은 군비 지출이 낳은 즉각적인 역학이다. 아프리카 분할은 제국주의 경쟁을 일시적으로는 안정시켰을지라도, 정세는 필연적으로 다시 불안정해지며 전쟁 가능성을 키웠다.

불안정을 격화시킨 요인은 1873년 이후 나타난 극심한 성장 불균등이다. 영국은 공황 이후 주요 경쟁국으로 급부상한 독일이나 미국보다 훨씬 느리게 성장했다. 영국의 장기 경제 쇠퇴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영국은 제국이라는 배경 덕분에 공황의 충격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했고, 미국과 독일이 겪은 금융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이 두 요인 덕분에 영국 자본은 다른 나라가 강제당한 자본주의적 구조조정을 거치지 않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국이라는 완충 지대가 패권국의 상대적 쇠락을 재촉한 셈이다. 이러한 불균등 발전은 기존 세계 분할에 대한 재분할 요구로 이어져 제1차 세계대전의 화약고가 됐다.

이 시기에 남은 이데올로기적 잔재도 언급할 만하다. 1873년 공황과 뒤이은 장기 불황은 빈민을 비롯한 노동계급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겼다. 이는 식민지 민중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향한 고질적인 인종차별과 착취를 재난 수준으로 강화했다. 또한 슈트라우스베르크 같은 유대인 은행가와 기업인이 위기의 주범으로 몰리면서 유대인 혐오의 불길이 타올랐다. 슈트라우스베르크의 몰락은 단순한 한 기업인의 파산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시 독일의 우파 세력과 정적들은 경제적 고통에 분노한 대중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그를 먹잇감으로 삼았다. “유대인 투기꾼들이 건전한 독일 경제를 망쳤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을 악용해 ‘유대인 금융자본’ 음모론을 퍼뜨린 것이다. 슈트라우스베르크 파산 사건은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현대적이고 조직적인 유대인 혐오가 급격히 확산되는 비극적인 기폭제가 됐다.

경제 위기, 식민지 확장, 인종차별, 유대인 혐오의 결합은 20세기 파국의 원형을 보여 준다. 고조되는 제국주의 경쟁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살육으로 치달았다.

7. 왜 자본주의는 전쟁으로 치닫는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전환기에 가장 뜨거운 이론적 쟁점은 전쟁 문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20년 동안 열강 사이에는 평화 공존을 약속하는 구속력 있는 협정이 약 100건 체결됐다. 1899년에는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가 “모든 국민에게 진정하고 항구적인 평화의 혜택을 보장하고, 무엇보다 기존 군비의 점진적 발전을 제한할 가장 객관적인 수단을 모색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이는 “피의 니콜라이”로 불린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시작됐다. 승산 없는 군비 경쟁을 멈추려 한 그 후발 열강 통치자의 속셈은 명백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더 폭넓고 순전한 믿음이 존재했다. 유럽 지배계급을 설득해 행동을 바꾸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인명과 재산을 파괴하는 전쟁이 체제에 이익이 될 리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 생각의 좌파 버전을 발전시킨 인물이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적 이론가 카를 카우츠키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카우츠키는 전쟁으로 득을 보는 집단이 자본가의 일부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자본 수출에 의존해 끝없이 확장하는 제국을 원하는 금융 자본가와, 전쟁 및 전쟁 위협으로 이윤을 얻는 군수업자가 이에 해당한다. 이 소수가 다수의 산업 자본가에게 식민지의 원료와 노동이라는 이익을 오직 전쟁과 제국 건설로만 지킬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실제로는 각국 자본가가 평화롭게 합의해 세계를 분할하고 착취할 수 있다. 그는 《제국주의와 전쟁》(1914)에서 전후 군비 경쟁을 지속할 경제적 필연성은 전혀 없다고 썼다. 군비 경쟁은 기껏해야 소수 자본가 집단에만 득이 될 뿐이며, 오히려 자본주의 산업 전체가 각국 정부 간의 충돌로 위협받는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멀리 내다보는 자본가라면 동료들에게 “만국의 자본가여, 단결하라!”고 외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우츠키는 평화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적 평화가 가능하며, 제국주의는 체제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라고 믿었다.

이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한 인물이 바로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의 레닌과 부하린이다.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와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를 거쳐 발전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의 핵심 논지는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국가 간의 시장 쟁탈을 둘러싼 군사적 경쟁은 평화적 경쟁이 필연적으로 발전한 결과다. 체제가 노후화하며 그 성격도 변했다. 초기 자본주의의 소규모 자본 단위들은 서로를 흡수합병해 거대 기업과 독점체로 응집했다. 이 단계에서 경제는 정치와 체계적으로 융합한다. 산업화한 나라는 생산 규모가 국내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면서 해외로 뻗어 나가야만 했다. 대기업의 이해관계는 국가와 밀접하게 융합하고, 국가는 ‘국익’을 명분으로 이들을 정치적·군사적으로 지원한다. 국가는 군비를 증강하고 자원을 독점하며, 교역로와 시장을 지키기 위해 타국을 침공해 세력권과 동맹을 구축한다. 나아가 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다른 열강과의 전쟁도 불사한다.

이 이론이 제시하는 결정적 통찰은 ‘재분할의 역학’이다. 전쟁은 열강 간의 새로운 세계 분할이라는 타결로 끝나지만, 이 합의는 오래가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경쟁과 생산에 종속된 체제이며, 생산은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이에 따라 일부 자본주의 국가가 타국보다 빠르게 성장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세계 재분할을 요구한다. 1873년 이후 제국의 완충 지대 속에서 정체한 영국과 급성장한 독일·미국의 대립 구도가 이 도식의 역사적 실체다. 부하린이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 간의 경쟁’으로 정의한 제국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증명됐고, 1920~1930년대에 새로운 차원에서 재확인됐다.

제국주의 이론에는 소외라는 또 다른 함의가 들어 있다.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자본가도 노동자 못지않게 체제에 종속돼 있다. 자본가나 자본가 집단은 경쟁적인 자본 축적에 얽매여 있다. 자본 축적을 위해 착취하지 않는 자본가는 경쟁에서 뒤처진다. 어떤 자본가도 체제를 통제할 수 없다. 카우츠키가 주창한 ‘초제국주의’처럼 타국 자본가와 연대해 세계를 평화롭고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체제의 파괴적 역학을 이해하고 행동을 바꾸려는 자본가는 경쟁에서 뒤처질 뿐이다. 체제 안에 잔류하는 한 그들은 부와 권력의 수혜자다. 따라서 자신들의 체제를 ‘문명’이라 부르며 수호하고자 싸운다. 레닌이 1917년에 기술했듯, “자본가들이 세계를 분할하는 것은 개인적 악의 때문이 아니라, 생산 집적의 고도화로 이윤을 얻기 위해 이 방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핵전쟁의 위험처럼 여러 면에서 비합리적이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필연적 결과다.

이 이론적 대립이 지닌 실천적 함의도 주목할 만하다. 전쟁의 구조적 원인을 이해하면 이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카우츠키 노선이 지배계급 설득과 협정의 정치를 지향하는 반면,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을 통한 체제 전복만이 항구적 평화를 보장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글래스고 클라이드사이드에서 존 매클레인이 수행한 노동자 반전·반제국주의 선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볼셰비키가 공장 현장에서부터 반제국주의 운동을 조직해 동부 전선에서 전쟁을 종식시킨 실천은 ‘초제국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 이론의 타당성을 검증했다. 레닌은 자본주의적 평화가 일시적일 뿐이며, 항구적 평화는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8. 제국주의의 역학

지금까지 서술한 인과 사슬은 다음과 같이 압축된다. 자본주의는 자본 간 경쟁과 자본-노동의 적대라는 두 가지 분할 위에 선 일반화된 상품 생산 체제다. 그 성립 전제는 직접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폭력적 분리였다. 이 분리, 즉 본원적 축적은 국내 인클로저와 국제적 차원의 정복·노예화·약탈을 하나의 체제 안에 결합했다. 자본주의가 서유럽에서 먼저 성립한 원인은 유럽의 가치나 인종적 우월성이 아니다. 그 원인은 세계적 규모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조건들의 산물이다. 석탄의 입지, 아메리카라는 자원과 이주 배출구, 그리고 새로운 생산 방식이 기존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도록 이끈 사회적 투쟁과 혁명이 바로 그 조건이다. 자본주의는 단번에 성립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와 라인란트의 초기 태동을 시작으로, 17세기 영국과 네덜란드의 글로벌 무역망 구축과 부르주아 혁명을 통한 국가 재편, 대서양 노예제 및 아시아 교역망과의 연결을 거쳤다. 그 결과 18세기에 이르러 장차 세계 체제로 확장할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 성숙의 역학 자체가 위기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경쟁이 강제한 기계설비 투자는 생산력을 발전시켰으나 동시에 이윤율을 잠식했다. 1873년 공황과 뒤이은 장기 불황은 자본주의의 첫 번째 장기 구조적 위기를 보여 주었다. 이에 대응한 지배계급의 조치인 보호무역주의, 자본의 집적과 집중, 국가와 자본의 융합은 체제를 질적으로 변화시켰다. 대외적으로 이 변화는 폭발적인 식민지 확장(1870년 아프리카의 10퍼센트에서 1900년 90퍼센트로)과 군비 경쟁으로 나타났다. 대내적으로는 대기업과 독점체가 성장했다. 불균등 발전은 기존 세계 영토를 재분할하라는 요구를 낳았다.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적’ 평화 전망에 맞서 레닌과 부하린이 이론화했듯, 군사적 경쟁은 평화적 경쟁의 우연한 일탈이 아니라 필연적 결과였다. 1873년의 황폐화에서 자라난 독점, 국가와 자본의 융합, 식민지 분할, 군비 확장, 재분할 압력이라는 구조가 바로 제국주의 단계의 초기 국면이다. 이는 1914년의 대량 살육에서 첫 정점에 도달한다.

1873년 공황과 뒤이은 불황의 심각성은 이윤율 저하라는 생산 영역의 역학으로 설명된다. 투기, 배상금, 통화정책 등은 중요한 촉발제였으나 위기의 심도(深度)를 설명하는 근본 원인은 아니었다. 이 관점은 제국주의로의 이행을 이윤율 저하에 대한 계급적 대응으로 해석하도록 이끈다. 보호무역주의, 구조조정, 군비 지출, 식민지 확장은 서로 분리된 현상이 아니라 이윤율 저하와 불균등 발전 속에서 지배계급이 선택한 유기적 대응이었다.

9. 결론: 1873년의 여파

1873년 공황과 뒤이은 장기 불황은 빈민 등 노동계급에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 특히, 식민지 민중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향한 인종차별과 착취를 재난 수준으로 강화했고, 유대인 혐오의 불길을 부채질했다. 더구나 격화된 제국주의 경쟁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살육으로 치달았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체제도 이와 똑같이 혼란스럽고 살인적이다.

결국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외부에 덧붙은 단순한 정책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피와 오물 속에서 태어난” 체제의 발생사적 경향이었다. 즉, 폭력적 탈취, 경쟁적 축적 강제, 세계적 확장, 필연적 공황이 최초의 장기 구조적 위기 속에서 독점, 국가, 군대와 융합해 나타난 변혁이었다. 카우츠키가 이를 소수 자본가 집단의 정책으로 본 반면, 레닌과 부하린은 체제의 필연적 단계로 파악했다. 이것이 당시 이론사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할 길은 노동자 스스로 민주적 계획을 통해 생산수단의 소유권과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뿐이다. 근대의 역사에서 한 가지 점만은 분명하다. 자본주의에는 기원이 있고 여러 국면이 존재하며, 끊임없이 형태를 바꾼다는 사실이다. 시작이 있는 존재에는 끝도 있기 마련이다. 세계의 종말보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드는 현상이야말로 자본주의 체제가 역사를 은폐해 얻는 가장 큰 이데올로기적 이득이다. 그 역사는 “피와 불의 연대기”에서 세계 제패를 위한 쟁투의 시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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