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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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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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문제를 둘러싸고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논쟁이 반복돼 왔다. 많은 사람들은 식민지가 사라진 오늘날에는 제국주의가 과거의 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 중 일부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강제적으로 지배하는 것 자체가 현대 자본주의의 역학과 모순되는 낡은 관행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제국주의를 단순히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위한 정부 정책이거나, 자원 강탈을 위한 군사적 침략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들은 현상만을 포착할 뿐,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근본적 본질을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 제국주의가 단순히 체제의 역학과 분리된 정부 정책이라면, 정책 반대나 정부 교체를 통해 제국주의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제국주의가 체제 자체로부터 유기적으로 형성되는 체제의 특성이라면, 제국주의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체제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특정 발전 단계에서 나타나는 체계적이고 필연적인 속성으로 보며 그 개념을 다시 바로 세워야 한다. 제국주의는 단순한 정책적 선택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로, 자본과 국가가 서로를 매개로 삼아 확장하는 역학의 총체적 표현이다. 곧, 제국주의는 자본 축적과 국가간 경쟁이 서로 만나면서 만들어 내는 세계 자본주의의 역학이다.
먼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의를 검토하고, 그다음 미·중 패권 경쟁의 사례를 통해 오늘날 제국주의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의 축적》(1913):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영역으로 확장해야 생존할 수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가 순전히 자본가와 노동자만 있는 시스템 안에서는 생산된 잉여가치를 모두 실현(판매)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으려면 아직 자본주의화되지 않은 비자본주의적 지역(식민지, 농촌 등)이 반드시 필요한데, 바로 이것이 제국주의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비자본주의적 지역을 침탈하고 병합해서 확장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전 세계가 완전히 자본주의화돼 더는 흡수할 비자본주의적 영역이 사라지면 자본주의는 경제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
룩셈부르크의 이러한 제국주의론에는 과소소비론이라는 결함이 있다.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소비(수요) 부족을 제국주의적 확장의 근본 원인으로 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내부의 대중적 소비 능력은 생산력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며, 이로 인해 잉여가치 실현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수요의 공백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제국주의의 동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의 목적은 소비가 아니라 축적이다. 잉여가치는 반드시 소비재로 실현될 필요가 없다. 자본가는 잉여가치를 가지고 새로운 생산수단(기계설비류와 원자재)을 살 수 있다. 즉, ‘생산수단을 만들기 위한 생산수단’의 시장(부문 I)이 확장되면서 잉여가치가 실현될 수 있다. 과소소비론은 현상(상품이 안 팔리는 것)을 원인으로 착각한다. 시장에 상품이 넘치며 안 팔리는 것은 소비자가 돈이 없어서보다는, 자본가가 투자를 멈췄기 때문이다. 이윤율이 떨어지면 자본가는 투자를 줄이고 노동자를 해고한다. 그 결과 노동자의 구매력이 떨어지고 시장에 재고가 쌓이는 것이다. 따라서 위기의 근본 원인은 소비 부족이 아니라 생산의 중심 동력인 이윤율의 하락에 있다. 과소소비론은 자본주의를 마치 소비가 목적인 체제처럼 다룬다. 하지만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호황기는 대중의 소비가 늘어났을 때가 아니라,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새로운 기계설비류에 막대한 투자를 할 때였다. 소비는 이 축적 과정에 종속된 변수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본질이 “생산을 위한 생산, 축적을 위한 축적”에 있다고 강조했다. 제국주의(간) 전쟁도 룩셈부르크의 생각처럼 상품을 판매할 시장이 없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고 있는 이윤율을 방어하기 위해 자본이 국가 권력을 동원해 세계적으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1917): 자본의 국제화와 국가화의 변증법적 통일
니콜라이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는 레닌의 《제국주의》와 같은 해인 1917년에 출판됐지만, 집필 자체는 레닌보다 한 해 전인 1915년에 완료됐다. 그래서 이론의 계보를 따질 때는 부하린 다음에 레닌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구나 레닌이 부하린의 원고를 읽어 본 뒤 추천사(서문)를 써 주며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부하린에 따르면, 자본 축적이 강화되면서 국가에 의해 국내에서는 경쟁이 제한되지만, 국제적으로는 국가별 자본블록이 군비 경쟁을 하며, 이 경쟁은 전쟁을 통해 해결된다. 이제 전쟁은 우연이 아니라 국가간 경쟁의 필연적 산물이 됐다. 분쟁이나 전쟁을 끝내는 공식적인 합의와 ‘평화’는 다음 번 분쟁이나 전쟁을 위한 숨고르기에 해당하는 일이 번갈아 일어난다.
부하린의 분석 틀을 고전적 제국주의론의 출발점으로 삼으면 매우 유용하다. 부하린은 제국주의의 역학을 이중의 경향으로 설명했다. 첫째, 자본의 국제화 경향이다. 자본은 이윤을 찾아 국경을 초월해 전 지구적 생산망을 형성한다. 둘째, 자본의 국가화(국가와의 유착) 경향이다. 국제화된 자본은 자국 국가의 보호와 지원에 오히려 더 의존하게 되며, 더 나아가 국가 기구와 결합해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부하린이 말한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는 국가와 자본이 단순히 협력하는 관계를 넘어, 하나의 조직으로 융합된 새로운 단계의 자본주의 형태를 뜻한다. 이는 제1차세계대전 시기 자본주의의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제시한 핵심 개념이다.
부하린은 자본의 집적·집중 과정이 정점에 달하면, 개별 기업 간의 경쟁이 트러스트 간의 경쟁으로, 최종적으로는 국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집합적 자본가’처럼 조직되는 현상을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라고 규정했다. 이 단계에서 국가는 단순히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부구조를 넘어, 스스로가 ‘집합적 자본’ 구실을 하는 실체로 변모한다. 즉, 국가가 자본 축적의 핵심 주체로 나서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 내부에서는 경쟁이 최소화되고 생산이 조직되는 반면, 세계 시장에서는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 간의 경쟁이 제국주의적 갈등과 심지어 전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는 국가가 자본의 소유주이자 직접 운영자 노릇을 하며, 국가 권력과 자본의 논리가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조직체로 융합된 상태를 가리킨다. 결국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는 국가도, 자본도 아닌 국가화된 자본 또는 자본화된 국가라고 표현할 수 있는 둘의 완전한 융합체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부하린은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세계적 체계로 확장됐다는 사실(자본의 국제화 경향)을 전제한다. 상품, 자본, 기술, 노동, 원료의 흐름이 국경을 넘어가면서 생산과 교환의 세계적 분업이 심화된다. 이 과정에서 각국 경제는 서로 의존하지만, 그 의존은 조화로운 통합이 아니라 경쟁의 고도화로 나타난다. 세계 경제는 단일한 총체(전체)로 성립하지만, 그것이 평화와 균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계적 연계가 심화할수록 충돌의 파급과 강도가 커진다.
세계 경제 안에서 경쟁의 형태는 바뀐다. 전통적인 자유 경쟁 자본주의에서는 많은 기업이 가격과 시장을 두고 경쟁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의 집중·집적이 진행돼 기업 집단이 등장하는데, 기업 집단 간의 경쟁은 국가를 매개로 한 경쟁으로 재편된다(자본의 국가화). 그래서 국가가 경쟁의 핵심 도구가 된다.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가 형성된다.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가 중심인 제국주의 단계에서 국가는 ‘야경국가’가 아니라, 국내의 대자본을 통합한 기구 구실을 한다. 관세, 보조금, 군수 주문, 식민지 행정, 외교, 전쟁 준비, 신용·통화 정책 등이 자본 축적의 조건을 마련하는 수단이 될 뿐 아니라, 경쟁은 ‘기업 대 기업’보다 ‘국가로 조직된 자본블록 대 국가로 조직된 자본블록’의 형태를 띠게 된다.
여기서 제국주의의 필연성과 함께 핵심 모순이 생겨난다. 생산과 자본 축적이 세계적 규모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그것이 국민국가라는 분열된 정치적 틀 안에서 전개됨에 따른 모순이다. 자본은 더 큰 시장, 더 싼 원료, 더 높은 이윤을 찾아 세계적으로 움직이지만, 그 필요를 충족시키는 실질적 강제력과 조직력은 여전히 국가에 집중돼 있다. 따라서 세계 경제의 통합 경향은 국민국가 간 경쟁을 오히려 더 격화시키고, 결국 세계 분할과 재분할을 둘러싼 무력 충돌로 치닫는다.
이 충돌에서 비롯하는 게 바로 제국주의 경쟁이다. 제국주의 경쟁은 단지 강대국들 사이의 시장 경쟁만이 아니고, 외교 정책의 선택이나 영토 확장 문제만도 아니다. 제국주의는 자본 축적 조건을 둘러싼 세계 체제 내부 경쟁의 표현으로 이해돼야 한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전쟁을 지도자의 오판이나 외교 실패 같은 우발적 사건으로 봐서는 안 된다. 국가로 조직된 대자본들이 세계 경제와 지정학 무대에서 충돌하는 한, 전쟁은 제국주의 단계의 거듭되는 산물이다. 국내적으로는 생산이 조직되고 계획의 요소가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제적으로는 그 조직화가 국가별 자본블록으로 분열된 채 맞부딪치기 때문에 더 파괴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한다. ‘국내의 조직화’와 ‘국제의 무정부성’이 결합돼 전쟁을 낳는다. 이렇게 전쟁에는 구조적 성격이 있다. 그래서 ‘우발’이 아니라 체제의 ‘정상’ 작동으로 여겨야 한다.
제국주의가 국가간 대립과 전쟁을 구조적으로 만들어 낸다면, 제국주의 경쟁 속에서 국가는 중립적 조정자가 아니라 국내 대자본의 이해관계를 세계적 경쟁 속에서 관철하는 기구이므로, 국가의 초계급성에 기대는 개혁주의적 처방은 근본적 해법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노동계급 혁명과 국제주의가 진정한 대안이다. 노동계급은 자기 국가의 전쟁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주의적 관점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자기들 혁명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지금까지 봤듯이, 부하린의 제국주의론은 한편으로 ‘세계 경제의 통합’과, 다른 한편으로 ‘국가로 조직된 자본블록들의 분열과 경쟁’이 (변증법적) 통일을 이룬 결과로 군비 경쟁과 전쟁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의 분석은 (아래에서 보겠지만 레닌의 분석도) 제국주의를 단순한 대외 정책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특정 단계로 이해하게 하며, 노동자 국제주의와 혁명이라는 정치적 결론에 이른다.
부하린의 분석은 (레닌의 분석도) 제1차세계대전부터 제2차세계대전까지 이른바 “현대의 30년 전쟁”을 설명하는 데 특히 설득력이 있다. 이 접근법을 이어받아 우리는 오늘날의 다국적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활동하면서도, 동시에 자국 정부의 외교력과 군사력에 의지하는 현상을 제국주의의 본질로 파악한다.
레닌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1917)
블라디미르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보통 1916년 상반기에 쓰여지고 이듬해 출판된 그의 저작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제시된 그의 분석들을 가리킨다. 핵심 요지는 위에서 언급된 바, 즉 제국주의는 몇몇 나라의 외교 노선이나 침략 성향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구조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레닌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세계 자본주의가 독점 단계(소수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자본주의는 경쟁 중심에서 독점 중심으로 옮아갔다. 생산과 자본의 집중이 심화하면서 산업의 핵심을 대기업 집단인 트러스트와 카르텔 등이 장악하고 (경쟁은 사라지지 않더라도) 독점이 지배적 지위를 차지했다. 일단 독점 단계에 접어들면 경쟁의 성격 자체가 변한다. 더는 값싼 상품을 파는 것만으로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경쟁의 승패는 원자재 공급원을 확보하고, 경쟁자의 시장 접근을 차단하며, 유리한 국가적 ‘연줄’을 동원할 능력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은행이 단순한 중개를 넘어 산업에 대한 통제력을 갖고 산업자본과 결합해, “금융자본”이 형성된다. ‘금융자본’이 경제 전반을 ‘조직’하며, 국가 권력과도 결합해 해외 시장과 원료의 통제권을 가지려 한다. 레닌이 (당시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루돌프 힐퍼딩을 따라) 말한 ‘금융자본’은 당시에는 은행과 산업의 결합이라는 형태를 띠었다. 오늘날에는 금융자본의 형태가 중앙 은행의 역할, 자본 시장 증권화, 파생 상품, 자산 운용, 그림자 금융 등으로 훨씬 복잡해졌다. 그럼에도 제국주의에서 금융자본이 하는 역할은 여전하다. 첫째, 금융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있는 자본을 거대 금융기관으로 통합해 국가 재정정책과 연결시킨다. 둘째, IMF나 세계은행을 통한 부채 관리는 타국의 경제 구조를 지배하는 일종의 ‘경제 신탁통치’ 수단이 된다. 셋째, 미국 달러화는 글로벌 금융 결제망을 통해 적대국을 고립시키는 지정학적 무기 구실을 한다. 금융은 이제 지정학적 경쟁의 직접적 수단이다.
그런데 레닌은 당시 영국 좌파 경제학자 존 홉슨이 부각한 금융의 ‘기생성’ 강조를 많이 받아들였다. 홉슨은 금융자본이 산업자본과 대립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노회찬·심상정 등 21세기 사회민주주의자들도 금융자본의 기생성을 강조하며 금산분리(금융자본/산업자본 분리)를 강화하는 데 앞장섰다. 그들은 금융사가 같은 기업집단 내 다른 기업 지분을 일정 정도 이상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융산업구조개선법(금산법) 개정안을 제출하며 금융자본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주장했다.
레닌은 금융자본이 득세하는 제국주의에서는 그에 따라 상품 수출보다 자본 수출(특히 해외 직접 투자)이 중요해졌다고 주장했다. 선진국에서 축적된 막대한 자본은 후발 지역(대부분 식민지·종속국이었다)으로 투자된다. 거대 기업들은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고 국제적 카르텔·신디케이트 같은 형태로 결합해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나눠 갖는 경향이 있게 된다. 국제 독점체들이 형성되며 세계가 경제적으로 분할된다.
경제적 분할과 함께, 강대국들이 식민지·반식민지의 영토를 정치적으로 분할·재분할하기 위한 경쟁이 격화된다. 세계가 이미 분할된 상황에서는 새로운 분할은 곧 ‘재분할’의 문제로 나타나고, 그 재분할 경쟁은 전쟁을 구조적으로 낳는다. 여기서 불균등 발전이 레닌의 핵심 개념이 된다. 즉, 각국의 성장 속도가 달라 그들 간의 세력 균형이 계속 흔들리므로, 기존 세계 질서가 고정될 수 없고 충돌이 거듭된다.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을 근거로 레닌은 칼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 — 강대국들이 전쟁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평화적으로 세계를 공동 관리할 것이라는 환상 — 을 반박했다. 자본 축적의 속도 차이로 인해 국가간 힘의 균형이 끊임없이 변하며, 이는 기존 국제 질서와 기존 합의를 반드시 파괴하기 때문이다.
제2차세계대전은 레닌 제국주의론의 강력한 역사적 확증이었다. 1930년대 대불황 속에서 각국은 보호무역주의, 군비 증강, 국가 개입을 강화했고, 이는 경제 블록 형성과 전쟁으로 이어졌다. 독일과 일본은 산업의 자급자족 권역을 확보하기 위해 고도로 산업화된 지역까지 포함하는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전쟁은 단순한 식민지 확보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블록 간의 생존 경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기존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미국은 세계적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소련은 산업적·군사적 안전을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
그런데 후대 역사가들은 레닌이 당시 자본 수출의 정도를 지나치게 일반화했다고 지적한다. 가령 미국과 일본은 1914년까지 순자본수입국이었다. 그리고 독일도(또한 일본도) 1930년대에는 자본 수출보다는, 국가와 중공업이 결합된 산업적·군사적 블록 형성을 통해 군사적 확장을 한 측면이 두드러졌다. ‘제국주의 = 자본 수출의 특별한 중요성’이라는 주장을 모든 경우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오류다. 이런 오류를 그대로 받아들인 1990년대 일부 한국 좌파는 한국이 제국주의 국가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했다.
후대 역사가들은 식민지로의 자본 수출이 그곳에서 산업 발전을 촉진한다는 레닌의 주장도 실제 현실과 달랐다고 지적한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제3세계(요즘에는 “글로벌 사우스”라고도 하는)의 산업화는 소수 나라에서만 일어난 데다(적으나마 이 산업화 사실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종속이론은 오류였다), 지체되거나 몹시 왜곡된 형태로 나타났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영토 식민주의가 해체됐어도 제국주의의 지배는 형태만 바뀌어 지속됐다. 냉전기의 군비 경쟁은 초과이윤(세계 평균 이윤을 넘는 특별히 높은 이윤) 확보가 아니라, 전략적 우위를 위한 체제 경쟁이었다. 군사비는 해외 투자 이익을 훨씬 초과했는데도 경쟁 구조상 감축이 불가능했다.
오늘날의 제국주의론은 레닌의 영토 분할 중심의 서술을 군사기지망, 채무·통화 종속, 공급망 통제, 제재와 기술 봉쇄 등의 요인들로 재구성해야 한다. 제국주의를 영토 점유로만 이해하면 지난 80년 간의 현실을 놓친다. 물론 영토 요소를 과소평가하면 군사·지정학의 강제력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레닌은 식민지·종속국에서 얻는 초과 이윤이 선진국 일부 노동자층의 생활 조건을 상대적으로 개선시키고, 그 결과 “노동귀족”층이 형성되며, 그 계층이 개혁주의와 애국주의를 강화하는 물질적 토대가 된다고 주장했다. 숙련된 군수산업 노동자들이 전형적인 ‘노동귀족’으로 봤다. 그들은 실제로 고임금을 받았고, 제국주의 전쟁 시기에 그들의 노동력 수요가 가장 많았으며, 가장 가난한 임시직 노동자들과는 크게 다른 생활 조건을 누렸다. ‘노동귀족’론에 따르면, 그들은 일종의 매수된 존재였으므로 결코 국제주의자로 나서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만약 ‘노동귀족’론이 옳다면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들 중 적어도 일부는 제국주의에 대한 충성에 깊은 이해관계가 있어서 식민지 노동자들과 연대할 가능성이 낮을 것이다. 그들은 체제를 전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체제를 지키는 구실을 하려 할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를 공문구로 만들 것이다.
하지만 제1차세계대전이 종전 무렵 바로 이 노동자들이 독일과 러시아 양국에서 혁명을 이끌었다. 전쟁 반대, 차르와 카이저 반대, 그리고 제국주의 반대라는 대중적 기치를 제시한 것도 그들이었다. 그리고 볼셰비키 당의 핵심 기반을 형성하게 된 것도 바로 군수품 공장 노동자들이었다. 레닌이 1917년에 발표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평의회)로!“라는 호소는 처음에는 전쟁 물자 공장 노동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제국주의를 정의할 때 범한 몇몇 지엽적 오류와 관련해 우리는 레닌 자신이 일반적으로 정의에는 조건적·상대적 성격이 있다는 단서를 달았음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그의 《제국주의》 저작이 엄밀한 이론적 완결판이 아니라 (부제목처럼) “대중적 개요”였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레닌의 핵심 개념 자체는 훼손되거나 실추되지 않는다. 곧, 그가 제국주의의 본질로 본 것은 제국주의가 독점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독점 자본들(트러스트, 카르텔 등)이 단순히 시장을 지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 기구와 긴밀하게 결합한다고 레닌은 강조했다.
특히, 그는 《국가와 혁명》과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서 제1차세계대전이 강제한 전시 경제 상황이 국가의 경제 통제를 강화시켰고, 이것이 독점 자본의 이익과 결합하면서 “국가적 독점 자본주의”가 형성됐다고 강조했다. 하르다하와 카라스는 공저 《사회주의 경제이론》에서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의 ‘국가독점 자본주의론’은 레닌이 특수한 전시 경제 상황과 관련해 주장했던 것을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발전 법칙으로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옳게 지적한다. 레닌이 말한 “국가적 독점 자본주의”는 부하린이 말한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와 같은 개념으로 봐도 무방하다.
독점 자본주의인 제국주의라는 레닌 이론의 강점은 제국주의를 단순한 대외 정책이 아니라 자본 축적의 변화, 국가 권력, 국제 경쟁, 전쟁, 식민지 억압을 하나의 연결된 체계로 파악하려 한 데 있다. 레닌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특정 단계이므로, 반전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은 단지 도덕적 반대가 아니라 체제 비판과 혁명 전략의 문제로 연결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그는 식민지·피억압 민족의 해방 투쟁을 제국주의 체제를 약화시키는 중요한 고리로 인정했다.
크리스 하먼과 고전적 제국주의론의 발전적 계승
룩셈부르크, 부하린, 레닌 등은 독점 자본의 형성과 지배, 식민지 분할 경쟁이라는 당시 현실을 제국주의의 핵심 특징으로 규정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고도화할수록 국내 시장만으로는 축적이 어려워지고, 자본이 해외로 확장하면서 국가간 군사적 충돌이 불가피해진다고 봤다.
크리스 하먼은 이 통찰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면서도, 자본주의가 특정 단계에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재편되므로 제국주의도 시대에 따라 다른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 유의한다. 이 점에서 보면, 냉전 종식 이후 많은 사람들이 제국주의 시대가 끝났다며 ‘세계화’와 국제 기구(국제사법재판소, 국제형사재판소, 유럽연합 등)가 국가간 갈등을 완화하고 평화를 가능케 할 것이라며 품은 기대가 환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의 군사 개입, 이라크 전쟁, 금융 위기,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경쟁 등은 오히려 강대국간 긴장을 심화시켰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제국주의 경쟁과 동시에 전개되는 과정이었다. 자본은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서로 얽히지만, 바로 그 상호의존이 위기 국면에서는 더 격렬한 국가간 경쟁을 촉발한다. 세계화는 국가를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재무장시켰다.
특히 미국의 패권은 하먼의 분석에서 여전히 중요한 사례가 된다. 미국은 군사력, 금융 시스템, 달러의 국제 통화 지위 등을 통해 세계 질서를 주도해 왔다. 이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말한 ‘제국’이 아니라, 자국 자본의 축적을 보장하는 국제적 틀을 구축하는 패권 국가의 역할이다. 그러나 하먼은 이 패권이 안정적이지 않다고 강조한다. 다른 강대국들, 특히 중국과 러시아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며 미국 중심 질서에 도전한다. 그 결과 세계 체제는 협력과 경쟁이 뒤섞인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다. 제국주의는 단일한 지배가 아니라 복수의 국가들이 끊임없이 힘을 겨루는 역동적 장(場)이다.
하먼도 경제 결정론의 틀로 제국주의를 보지 않는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근저에 놓인 동인인 것은 맞지만, 국가들은 안보, 전략, 이데올로기(가령 쿠바에 대한 적대) 같은 비경제적 요인에도 반응한다. 전쟁과 군사 개입은 항상 즉각적인 이윤 계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윤과 천연자원 확보 같은 경제적 요인들도 결국 국제적 국가 체계 안에서 작동한다. 국가는 자본 축적의 일반적 조건을 보장해야 하는데, 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외교적·군사적 선택을 한다. 따라서 정치와 경제는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동일한 체제의 서로 다른 표현이다.
결국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발전의 특정 단계이자 지속적인 구조적 경향으로, 자본 축적의 세계적 확장이 국가간 경쟁으로 나타난 결과다. 이러한 제국주의 역학 속에서 세계 경제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은 오늘날의 전쟁, 무역 분쟁, 금융 위기, 동맹간 갈등을 하나의 통합된 틀 속에서 설명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하먼은 강조한)다.
따라서 제국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해진다. 제국주의는 강대국의 과도한 탐욕이나 이례적 폭력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 체제가 작동하는 ‘정상적’ 방식이다. 그것은 자본이 이윤을 위해 세계를 재편하려 하고, 국가가 그 과정을 지원하고 조직하려 하며, 그 결과로 경쟁과 충돌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시스템적 현실이다. 제국주의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특정 지역이 아니라 전 지구적 관계망이다. 제국주의를 이해하는 일은 오늘날의 국제 정치와 경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하먼의 제국주의 분석도 제국주의를 도덕적 비난이나 음모론적 설명에서 해방시킨다. 제국주의는 몇몇 탐욕스러운 지도자(그게 트럼프일지라도)의 악의나 과오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세계 규모로 조직되는 방식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자본 축적이 계속되는 한은 국가간 경쟁과 군사적 긴장은 거듭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국주의를 종식시키려면 단순히 정책을 바꾸거나 지도자를 교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체제 자체의 전복이 요구된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하고 ‘승리’를 선언한 시점에서 쓰여졌음에도 크리스 하먼은 다음과 같이 10년 뒤의 미래를 내다본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장기적으로 제국주의 체제를 안정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모순을 증폭시킬 것이다. 이라크 석유를 통제해도 미국 자본주의의 이윤율을 높여 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점령의 결과로 인한 불안정과 사회적 격변이 중동 지역의 다른 곳으로 번진다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이라크 점령에서 물러나는 것은 군사적 도박에서 얻은 이득을 포기하고, 다른 국가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의 누적적 상실이라는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승리한 미국은 여전히 약한 미국이다. 다른 열강과의 분열은 계속될 것이며, 미국 권력자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재발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들에 대한 저항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더 쉽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야수가 상처를 입어도 그것이 세계를 덜 야만적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먼은 이미 집필 당시에 현대 세계 질서를 미국의 단극 체제로 보는 관점에 이의를 제기한다. 세계는 복수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경쟁하는 다극적 구조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도전자로 부상하고 있다. 중국은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군사적 전통과 에너지 자원을 무기로 미국의 독주에 균열을 내고 있다. 하먼의 분석은 2003년에 제시됐지만, 오늘날 미·중 패권 갈등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을 예견한 듯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하먼의 저작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제국주의론을 21세기의 조건에서 재해석하고 발전시킨 커다란 이론적 성취다. 첫째, 경제적 환원론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축적의 구조적 산물로 파악하는 변증법적 시각을 견지한다. 둘째, 레닌과 부하린의 고전적 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특히 국가자본주의적 경쟁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셋째, 냉전과 탈식민지화, 세계화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일관된 이론적 틀로 설명한다. 넷째, 이론적 분석이 학술적 탐구에 그치지 않고 반전·반자본주의 운동의 전략 수립에 기여하는 실천적 함의를 지닌다. 하먼의 제국주의 분석은 국가와 자본이 여전히 밀접하게 연계된 현대 세계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기 위한 급진적 통찰을 제공한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의 통일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이라는 자본주의하의 이중의 경쟁을 상정한다. 자본들 간의 경제적 경쟁은 개별 자본들이 수익성 있는 사업을 위해 국경을 넘어 시장, 자원,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다. 이는 자본주의 본연의 확장적 속성에서 비롯한다. 국가들 간의 지정학적 경쟁은 주권 국가들이 영토 권력, 안보, 국제 체제 내에서의 서열을 지키기 위해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는 과정이다.
데이비드 하비도 캘리니코스와 비슷한 틀로 설명한다. 다만, 하비는 각각 “자본의 논리”와 “영토의 논리”라고 불렀다. 그러나 첫째, 하비는 이 두 논리를 이분법적으로 상정한다. 하비의 모델에서는 영토의 논리가 자본주의 바깥에서 작동하는 별도 원리처럼 보인다. 그래서 국가의 행위가 때때로 자본의 요구와 충돌하거나, 국가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된다. 지정학이 자본주의에 외재한 자율적 원인처럼 다뤄진다.
그러나 두 논리를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지정학적 경쟁은 존재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들어 국가의 권력이 자본의 축적을 돕고, 자본의 확장이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식으로 두 경쟁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게 얽힌다. 국가 간의 전쟁이나 갈등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반영하거나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국가간 지정학적 경쟁은 자본간 경쟁이 고도화된 형태다. 즉, 지정학적 경쟁과 경제적 경쟁은 별개의 두 논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단일한 본질이 국제 사회에서 발현되는 두 측면이다.
둘째, 하비는 현대 제국주의의 특징을 “탈취를 통한 축적”(‘강탈’보다는 ‘탈취’가 나은 번역인 듯하다)으로 설명한다. 이는 자본이 생산 과정을 통한 정상적인 착취가 아니라, 공공재 민영화, 자산 탈취, 금융 사기 등을 통해 가치를 흡수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하비는 탈취를 통한 축적을 과대평가한다. 그럼으로써 하비는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인 확대 재생산을 소홀히 다룬다. 탈취를 통한 축적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부수적 현상으로서 항상 존재해 왔다. 그것을 마치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논리인 것처럼 강조하는 것은 위기의 본질을 착각하게 만들 것이다. 실제로 하비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주로 (이윤율 저하 경향이 아니라) 과잉 축적된 자본이 갈 곳을 찾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로 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이 탈취를 통한 축적을 하거나 “시공간적 경로 수정”을 한다는 것이다. “시공간적 경로 수정”은 자본주의 위기 때 잉여 자본을 흡수하고 새로운 축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공간을 건설하거나 투자처를 마련하는 과정을 뜻하는 하비의 용어다. 하비는 중국의 일대일로(BRI)도 전형적인 “시공간적 경로 수정”으로 본다. 중국 내부에 과잉 축적된 자본을 외부로 배출하기 위해 대규모 인프라(도로, 철도, 항만, 전력, 통신, 상하수도 등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하며 지리적 확장을 꾀한다는 것이다.
셋째, 하비는 이처럼 위기를 지나치게 유통과 공간적 재배치 문제로 파악한다. 그러나 위기의 근본 원인은 생산 영역에서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이다. 하비에게 제국주의는 자본의 과잉을 해소하기 위한 공간적 확장 전략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제국주의는 이윤율 하락 위기에 처한 대자본들이 국가 기구를 동원해 서로 생존 투쟁을 벌이는 지정학적 각축전이다.
넷째이자 마지막으로, 탈취를 통한 축적을 강조하는 하비에게는 자연히 저항의 주체가 노동계급이 아니라 탈취당하는 “사람들”이나 “지역 공동체”가 된다. 이것은 노동계급의 전략적 중심성을 약화시킨다.
결국 하비의 “공간의 정치경제학”과 달리 우리의 방법은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의 운동 법칙”이 제국주의 문제에 철저히 적용돼야 한다는 고전적 입장을 고수한다. 하비의 프레임으로 세계 정치를 보면, 국가 지도자들의 전략적 선택과 지정학적 야심이 어떻게 경제를 뒤흔드는지 이해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 모든 아수라장의 근저에 놓인 경쟁적 자본 축적의 논리와 계급 이익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반면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제시하는 ‘경제적 논리와 지정학적 논리의 (긴장 속) 통일’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면, 미·중 패권 경쟁의 성격을 아주 잘 알 수 있다. 미·중 갈등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이 아니라, 구래의 제국주의 강대국(미국)과 신흥 제국주의 강대국(중국) 사이의 충돌로 파악된다. 중국은 과거 종속이론의 예측과 달리, 세계 체제 내부에서 성공적으로 자본을 축적해 거대한 산업 기반을 닦았다. 이제 중국 자본은 저부가가치 생산을 넘어 첨단 기술(AI,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 자본과 직접적으로 경쟁하며, 이는 자본간 경쟁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격화된 결과다. 한편, 경제 성장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진다. 중국의 일대일로는 미국 중심의 지정학적 질서에 균열을 내려는 국가적 전략이다. 미국은 이를 자신의 패권에 대한 실질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공급망 분리”(사실상 중국 배제를 뜻하는 말)나 군사적 봉쇄를 통해 대응하고 있다. 미·중 갈등은 자본 축적이 일정 수준에 도달했을 때 국가 기구가 자국 자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공세적으로 바뀌는지를 보여 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그러므로 중국을 단순히 자본이 넘쳐서 공간적으로 확장하는 국가가 아니라, 국가 기구와 자본 축적이 극도로 밀접하게 결합된 국가자본주의적 제국주의 국가로 봐야 한다. 미·중 갈등은 하비처럼 두 논리(자본 논리와 영토 논리)의 분리가 아니라, 미국 자본과 중국 자본이 세계적 잉여가치를 누가 더 많이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각축전이 지정학적·군사적 갈등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 미·중 갈등은 제국주의 역학의 전형이다. 미국은 중국의 기술 부상이 자국 기업의 이윤을 잠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도체 공급망 통제라는 경제 전쟁을 수행한다. 동시에,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지정학적 포위망을 구축한다. 중국도 일대일로를 통해 이에 맞선다. 두 국가 간의 갈등은 글로벌 공급망의 통제력을 둘러싼 제국주의적 대립인 것이다.
글로벌 사우스와 좌파적 민족주의
종속이론의 핵심 주장인 ‘저발전의 발전’ 논리는 지난 삼사십 년 사이에 광범하게 비판받아 왔다. 글로벌 사우스의 나라들이 단순히 영구적 저발전 상태에 갇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한국, 대만, 브라질, 멕시코 등지에서는 1970~80년대에 상당 수준의 산업화가 이뤄졌다(“신흥공업국”의 등장).
그러나 이러한 산업화는 이곳 대중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현지 지배계급이 다국적기업 그리고/또는 제국주의 국가와 결탁해 노동계급 등 자국 대중을 착취·억압하는 사회 구조를 심화시켰다. 산업화의 과실은 소수 엘리트에게 집중됐고, 대중은 여전히 빈곤과 불평등에 시달렸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신흥국 지배계급의 관계를 단순한 지배-예속의 일방적 관계로 봐서는 안 된다. 현지 지배계급은 제국주의와의 연계를 통해 자신의 경제적·정치적 지위를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국 대중을 착취·억압한다. 따라서 제국주의는 단순한 외세가 아니라 국내 사회 구조와 긴밀히 연관돼 있다.
글로벌 사우스 대중의 고통과 저항은 21세기의 첫 십년 간 세계를 휩쓴 ‘대안적 세계화 운동’ 물결이 이는 데 매우 중요했다. 동시에, 그곳에서 개발주의적 현지 자본의 이데올로기인 민족주의는 점점 더 양날의 칼이 되고 있다. 착취, 억압, 부패로 고통받는 대중은 민족주의를 가장 증오받는 현지 지배계급 인물들에게 돌리기 시작한다. 좌파적 민족주의는 종종 대중이 이들과 싸우기 시작하도록 고무하지만, 착취자와 피착취자를 묶는 공통의 ‘국익’이 있다는 관념은 제국주의와 협력하고 있는 바로 그 현지 ‘진보’ 정치인들의 교묘한 정치적 책략에 대중을 무방비 상태로 내몬다. 그러나 현지 지배계급과 국가는 착취와 억압의 대리인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들은 제국주의와 협력하고, 그 억압과 착취를 현지 대중에게 전가한다. 그들은 모종의 ‘국익’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네의 이익을 위해 그렇게 한다.
레닌은 식민지·종속국의 반제국주의 운동을 동맹으로 보라고 제국주의 나라의 노동자 운동에 촉구했다. 하지만 그러한 나라에서의 해방 운동이 흔히 보이는 “부르주아적·민족주의적” 경향에 “붉은색을 입히는” 것에는 강력히 반대했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유의해야 한다.(이 점은 아래에서 설명될 비자이 프라샤드와 관련해서 특히 유의미하다.)
비자이 프라샤드의 “하이퍼 제국주의”론
비자이 프라샤드는 글로벌 사우스를 대변하는 중요한 저술가로 평가받아 왔다. 그의 저술들은 주류 담론에 이의를 제기해 왔다. 비자이 프라샤드의 제국주의론은 ‘하이퍼(Hyper-, 거대통합) 제국주의’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프라샤드에 따르면, 이는 고전적 제국주의를 넘어선 오늘날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인데, 과거와 달리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하고 통합된 블록”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이 핵심이었으나, 현재는 미국을 중심으로 NATO, 파이브 아이즈(Five Eyes: 아래에서 설명됨), 일본 등이 하나의 “글로벌 노스(Global North) 블록”으로 결속돼 있다고 한다. 이 블록의 목적은 쇠퇴해 가는 미국의 경제적 패권을 군사적·정치적 수단으로 방어하는 것이다.(필자가 뒤에 부연하겠지만, 프라샤드가 트럼프 치하의 미국이 유럽 동맹국들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를 보면서도 “블록”에 대해 얘기한다는 게 기이하다.)
프라샤드에 따르면, 금융과 과학 기술의 독점권을 가진 “글로벌 노스”가 자원 추출을 지속하며,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구 식민지 시대와 유사한 수탈과 부의 유출 구조에 머물게 된다. 동시에, 현대 제국주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프라샤드는 부채를 꼽는다. 그는 글로벌 사우스의 대외 부채가 약 11.4조 달러에 달하며, 수출 수입의 대부분(약 98퍼센트)이 부채 이자를 갚는 데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이는 해당 국가들이 자국민을 위한 복지나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밖에도 제국주의는 직접적인 군사 침공뿐 아니라 다양한 비군사적 수단을 동원한다고(“하이브리드 전쟁”) 프라샤드는 설명한다. 경제 제재, 법률을 무기로 삼는 “로페어”(lawfare), 정보 및 미디어 장악을 통한 여론 조작 등이 포함된다. 또한 “제국주의 블록”(글로벌 노스)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국가(베네수엘라, 쿠바, 이란 등)의 경제를 질식시키고 내부 혼란을 야기하여 정권 교체를 유도한다.
프라샤드는 최근 미국의 외교 정책이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하는 이유를 그 나름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서방의 금융 체계(IMF, 달러 패권)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경제 협력 모델을 제시하자, “제국주의 블록”은 이를 자기네 패권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봉쇄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다시 결집해 “새로운 국제경제질서(NIEO)”를 구축하고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프라샤드는 주장한다.
파이브 아이즈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최대의 기밀 정보 공유 동맹을 말한다. 비자이 프라샤드가 언급한 “글로벌 노스 블록”의 핵심적인 정보·군사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주요 구성은 영어 사용 5개국인 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로 이뤄져 있다. 파이브 아이즈는 미국 등 “글로벌 노스 블록”에 매우 중요하다. 프라샤드에 따르면, 파이브 아이즈는 미국이 전 세계를 통제하기 위해 구축한 “하이퍼-제국주의”의 물리적 기반이다. 이 정보망을 통해 미국은 자신들의 패권에 도전하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하이브리드 전쟁(경제 제재, 로페어 등)을 수행할 정보를 얻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파이브 아이즈는 제국주의 국가 간의 지정학적 경쟁에서 “미국 블록”의 결속력을 보여 주는 상징이지만,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경쟁 세력도 독자적인 정보망을 구축하려 하기 때문에, 파이브 아이즈는 제국주의 세력 간의 정보 전쟁이라는 면에서 이해돼야 한다.
프라샤드는 또한 제국주의가 단순히 경제적 현상일 뿐 아니라 인종주의를 바탕으로 한다고 지적한다. 서구 엘리트들이 유색인종 국가의 주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현대 제국주의 정책의 기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비자이 프라샤드의 제국주의론은 미국 주도의 통합된 제국주의 ‘블록’이 금융(부채), 군사력, 하이브리드 전쟁을 동원하여 글로벌 사우스의 자원을 약탈하고 주권적 발전을 가로막는 체제로 정의할 수 있다.
위에서 내가 설명한 제국주의론에 근거해 비자이 프라샤드의 제국주의론을 평가하자면, 그의 이론은 현대의 복잡한 금융 수탈을 잘 포착하고 있으나, 고전적 제국주의론의 관점에서 보면 몇 가지 중대한 난점이 발견된다.
첫째, 프라샤드는 제국주의를 ‘복수 강대국의 경쟁’으로 보지 않고 ‘단일 블록’으로 본다. 그는 현재의 세계를 미국 주도의 단일한 하이퍼 제국주의 블록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고전적 관점은 이를 다르게 본다. 제국주의는 단일한 지배가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복수의 국가들이 끊임없이 힘을 겨루는 역동적인 장이다. 프라샤드는 중국을 제국주의에 맞서는 대안적 세력으로 본다. 그는 중국 공산당을 지지해 온 한편, 시리아의 범죄적인 아사드 정권을 옹호했다.
프라샤드는 인도 국내 정치, 특히 극우 정당 인민당(BJP)의 무슬림 혐오를 자주 비판하지만, 중국 정부가 (거의 다 무슬림들인) 위구르족을 탄압하며 그들의 종교적·시민적 자유를 부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중국 정부의 행위를 일관되게 축소하거나 심지어 옹호하기까지 한다. 그는 중국 정부의 위구르족 탄압 사실을 미국 언론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위구르족의 “문화적 특수성이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고 주장한다. 티베트인들의 권리와 관련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중국은 오랫동안 프라샤드의 주된 맹점의 하나였다. 진영론자인 프라샤드에게 중국 공산당은 미국 제국주의의 견제자이자 균형자이며, 따라서 좌파는 중국이 ‘마르크스주의자답지 않은’ 행동을 하더라도 눈감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옹호자들은 중국을 온전한 사회주의와 시장 사회주의 사이의 과도기 사회로 보며, 중국 공산당을 시간이 흐르면서 글로벌 사우스를 사회주의로 이끌 해방자 세력으로 여긴다. 프라샤드도 옛 소련과 현 중국을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촉매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 그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점령(1979~1989)을 제국주의적 행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프라샤드는 자신이 속한 인도 공산당 ‘마르크스주의파’(CPM)가 수십 년간 집권해 온 케랄라, 서벵골, 트리푸라 지역의 선주민 수탈 문제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분명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프라샤드와 달리 우리는 중국을 국가자본주의이자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한다. 미·중 갈등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이 아니라, 구래의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 사이의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충돌이다. 프라샤드처럼 세계를 미국 블록 대 나머지로만 보면, 신흥 강대국(중국,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간과하는 진영 논리에 빠질 위험이 있다.
프라샤드를 진영 논리로 기울게 만드는 그의 논증은 이렇다. 그는 종종 세계를 “미국 등 글로벌 노스 블록 대 글로벌 사우스(제3세계)” 구도로 만들어 논증을 전개한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단지 중심부가 주변부를 수탈하는 질서가 아니라, 대자본과 국가가 유착한 경쟁 단위들이 영향력을 놓고 군사·외교·경제 수단을 동원해 서로 다투는 체제다. 반면, 프라샤드는 그의 논지가 미국 패권 비판에 집중될수록 제국주의를 미국의 정책 노선으로 오해하게 되기 쉽다. 그러면 개혁주의적 발상(국제 기구 개편 등)의 위험이 커진다. 이런 혼란은 반제국주의 전략을 혼란스럽게 만들면서, ‘미국에 맞서는 국가라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진영 논리로 기울게 만든다. 그러나 강대국간 경쟁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내장돼 있다면, ‘반미’가 곧 ‘반제’는 아닌 것이다. 강대국이 둘 이상 존재하는 순간, 세계의 피억압 민중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가 아니라, ‘어느 지배계급에도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 계급 정치로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를 중심에 둬야 한다.
프라샤드의 글에서 흔히 보이는 어휘는 “신식민지,” “종속,” “주변부” 같은 범주다. 물론 그런 범주는 현실의 불평등을 포착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탈식민주의 이후의 많은 나라를 뭉뚱그려 “신식민지”로 부르는 것은 진실을 놓친다. 나세르의 이집트나 네루의 인도 같은 정권을 신식민지/반식민지로 규정하는 것은 왜곡이라고까지 말해야 한다. 그들은 단지 정치적 독립뿐 아니라 독자적 자본 축적 중심을 세우려 했고, 강대국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도 단순한 꼭두각시는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탈식민주의 이후 일부 나라들이 실제로 ‘제2부 리그’의 발전된 자본주의로 올라섰다는 사실이다(한국·대만·싱가포르·홍콩, 브라질·멕시코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연해 중국沿海中國 등). 이 사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오늘날 중국 같은 나라를 분석할 도구가 빈약해진다. 그 결과 “반제국주의 진영의 지도국” 같은 그릇된 규정이 진정한 분석을 대체한다.
프라샤드는 반둥, 비동맹, 트리컨티넨탈 같은 ‘제3세계’ 프로젝트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반제국주의가 곧바로 거의 모든 계급(‘민중’)의 민족적 연대로 치환되는 순간, 노동계급의 독립성이(그리고 구조적 차별을 받는 대중의 처지도) 국가 프로젝트에 종속되기 쉽다. 라틴아메리카의 ‘반제’ 민족주의와 수입 대체 산업화 전략이 현실에서 종종 거의 모든 계급의 동맹을 상정했고, 그 결과 ‘진보적’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연합이라는 공산당식 도식과도 닮아갔다. 특히, 바르가스·페론 같은 개발주의 정권들은 서구 자본주의에 본질적으로 적대적이지 않았고, ‘반제’ 언사를 종종 자국 지배계급 부의 재편과 노동운동 분열에 이용했다.
‘제3세계 연대’의 이념들(주권, 발전, 평화공존)을 복원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도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떤 계급적 대가(강압적 축적, 임금 억제, 국가 폭력, 노동운동 통제)를 치르고 추진됐는지까지 함께 분석하지 않으면, 오늘의 전략은 다시 ‘국가를 좋은 방향으로’라는 처방으로 후퇴한다. 국가 주도의 발전 프로젝트가 좌절할 때, 그 좌절이 자동으로 ‘제국주의의 방해’만으로 설명되면 자국 지배계급의 책임과 자국 계급투쟁의 중요성이 흐려진다.
둘째, 프라샤드는 위기의 원인을 이윤율 하락으로 보지 않고 ‘부채와 수탈’로 본다. 그는 ‘부채’를 통한 금융적 예속과 수탈을 강조한다. 이는 데이비드 하비의 ‘탈취를 통한 축적’과 맥을 같이한다. 위에서 필자는 하비의 이론을 비판하며, 제국주의의 근본 원인은 유통이나 탈취가 아니라 생산 영역에서의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에 있다고 강조했다. 부채와 금융 제재는 제국주의의 수단일 뿐이다. 이를 근본 원인으로 보면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인 확대 재생산을 소홀히 다루게 돼, 위기의 본질을 착각하게 만든다. 제국주의 전쟁도 단순히 자원을 뺏기 위함이 아니라, 낮아지는 이윤율을 방어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동원해 세계적으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프라샤드는 흔히 IMF, 부채, 구조조정, 제도적 종속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제국주의를 설명한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금융·부채·제도로만 좁히면 제국주의가 가령 중동에서 치르는 전쟁의 물질적 동기(석유)가 흐려진다. 전후 세계에서 특히 석유를 둘러싼 지정학이 왜 핵심이 됐는지, 그리고 그 점에 어떻게 군사·동맹·대리전이 집중됐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1970년대 이후 결정적인 ‘만’(灣)은 멕시코만이 아니라 페르시아만이 됐고, 그 지역 국가들의 정책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뇌물, 협박, 무기 판매, 군사고문 파견 등으로 수행됐으며, 그 지역에서 세계 체제에 결정적인 전쟁들이 반복됐다.
따라서 프라샤드의 제국주의론이 제도·부채·무역조건에 치우칠수록, 전쟁이 왜 그렇게 반복적으로 발생하는지, 왜 특정 지역들이 구조적으로 전쟁의 초점이 되는지, 왜 군사력 경쟁이 체제의 부산물이 아니라 핵심 장치가 되는지에 대한 설명의 설득력이 약해진다. 고전적 제국주의론의 국가자본주의론 관점에서 본다면, 군사력은 정책 선택지가 아니라 경쟁의 본질이자 수단이다.
셋째, 프라샤드에게 저항의 주체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이지, 국제 노동계급이 아니다. 그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주권과 새로운 비동맹 운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관점은 좌파적 민족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글로벌 사우스의 지배계급들도 자국 대중을 착취·억압하며 제국주의와 결탁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는 존재들이다. ‘국익’을 강조하는 민족주의는 착취자와 피착취자를 하나로 묶어 노동계급의 독립적인 투쟁을 가로막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진정한 반제국주의는 특정 국가의 주권을 옹호하는 것을 넘어, 경쟁적 축적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국제 노동계급의 연대와 혁명이다.
요약하자면: 프라샤드의 이론은 제국주의의 포악함과 금융적 불평등을 성공적으로 폭로했다. 이는 훌륭한 일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정상적’ 작동 방식임을 강조한다. 제국주의가 단순히 “하이퍼 제국주의” 미국의 나쁜 정책이라면 그 위험을 정부 교체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겠지만, 제국주의가 체제의 필연적 속성이라면 체제 자체를 제거해야만 그 위협을 없앨 수 있다. 프라샤드의 이론은 ‘진영 논리’와 ‘반미 자주화’로 흐를 여지가 많고,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생산관계와 계급투쟁을 소홀히 다룰 우려가 있다.
자본의 무한한 축적 필요와 국가의 권력 의지가 결합되는 한, 전쟁과 수탈(탈취), 군비 경쟁은 멈출 수 없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세계적 규모로 확장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국가간 경쟁의 정치·군사적 표현으로, 전쟁은 이러한 경쟁의 극단적 형태다. 따라서 제국주의에 대한 효과적인 저항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 도전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적 제국주의론의 핵심 메시지다. 진정한 반제국주의는 단순히 특정 국가를 비난하는 것을 넘어(그것이 트럼프하의 미국일지라도), 경쟁적 축적 체제 자체에 도전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비자이 프라샤드는 제국주의의 현상들(금융 수탈, 미국의 패권)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지만, 그 해결책으로서 국가 간의 지정학적 재편(다극화)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와 우리의 정치적 차이를 요약하자면,
- 반제국주의의 기준을 “미국 반대”가 아니라 “노동계급 국제주의”로 재정의해야 한다. 제국주의가 체제에 내장돼 있다면, 어떤 ‘대항 강대국’에 기대는 순간 대중은 그 국가 지배 계급의 전략에 포섭된다.
- 글로벌 사우스 사회의 계급적 성격과 억압도 봐야 한다. 민족 해방과 개발은 언제나 계급투쟁을 동반했고, 종종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형태로 추진됐다. 이 문제를 보아 넘기면 전략이 민중전선으로 회귀한다.
- 제국주의를 수탈과 부의 유출 관계로만 좁히지 말고 경쟁과 전쟁의 논리를 중심 축으로 되돌려야 한다. 많은 좌파가 제국주의를 제3세계 수탈로만 정의하면서 제국주의 열강의 패권 추구, 무력 도발 경향, 전쟁 본능을 흐리고 카우츠키 “초제국주의”론의 변형으로 후퇴했다.
- 탈식민주의 이후의 분화를 전면에 놓아야 한다. ‘신식민지’라는 범주로 뭉뚱그리면 한국·대만·중국 같은 새로운 자본 축적 중심들의 등장을 설명하지 못한다.
한국과 한국 노동계급에 주는 함의
경제적 경쟁 논리와 지정학적 경쟁 논리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틀은 한국의 난처한 처지를 분석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그 곤란함은 단순한 외교 책략 문제가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가 처한 구조적 모순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모순의 본질은 세계적 수준에서 경제적 논리와 지정학적 논리의 충돌이다. 제국주의는 이 두 논리가 맞물리는 구조를 포함하고 있다. 한국은 이 두 논리가 가장 날카롭게 긴장을 빚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경제적 논리로 보면, 한국의 대자본(삼성, SK, 현대자동차, LG 등)은 이윤을 얻기 위해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과 공급망에 깊숙이 통합돼 있다. 자본은 국적을 불문하고 이윤이 발생하는 곳으로 움직이려 하며, 중국과의 경제적 단절은 자본 축적의 위기를 가져올 것이다. 지정학적 논리로 보면, 군사적·영토적 경쟁의 전형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한국 국가는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미국의 군사적 보호(한미동맹)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다. 따라서 한국 지배계급이 경제적 이익(중국)과 국가적 안보(미국)라는 두 마리 토끼를 놓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줄타기가 있어 왔다(한국식 “전략적 모호성”).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미국에 예속된 것은 아니다. 더는 그렇지 않다. 한국은 제국주의적 국가에 끼지는 못하지만, 군사력 면에서는 세계 5위를 기록하며 3년 연속 ‘Top 5’ 지위를 다졌고, 경제력 면에서도 세계 12~13위의 주요 경제국이다. 그러므로 한국은 단순히 미국의 지시를 따르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최근 폴란드에 대규모로 무기를 수출하거나 동남아시아에서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모습은 한국 자체가 자신의 경제적·군사적 이익을 확장하려는 독자적인 ‘국익’ 추구 동기를 가졌음을 보여 준다.
한국 자본주의가 세계 체제 내에서 그만큼 힘이 커졌음을 이용해 한국은 때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며 미·중 양측으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려 해 왔다. 이는 일부 주변부 국가들이 중심부 국가들 사이의 틈새를 이용해 자국 자본의 지위를 높여 온 행동의 일부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지정학적 경쟁이 경제적 경쟁을 압도하는 시기에 진입한 듯하다. 미국이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의 우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벼르는 것은 경제적 우위를 위해서 지정학적 승리를 중시하겠다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될수록 한국 지배계급이 누려 온 ‘전략적 모호성’ 운신의 폭은 좁아진다. 이미 한국은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어느 한쪽(주로 미국 측)에 서야 한다는 강력한 구조적 압박에 직면하고 있다. 이는 한국 내 외교 노선 갈등(소위 동맹파 vs 자주파의 외교 노선 차이)이 사실상 한국 지배계급 내의 생존 전략 논쟁임을 뜻한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좌파는 이재명 정부의 줄타기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려면 첫째, ‘국익’이 환상임을 알아야 한다. ‘국익’은 사실 한국 자본가 계급의 이윤과 국가 기구의 권력이다. 노동계급 등 서민층에 돌아오는 것은 전쟁의 위험과 경제 불안정뿐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전략적 모호성은 위기에 처한 세계 제국주의 체제의 축소판이다. 체제가 안정적일 때는 양쪽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었으나, 체제가 위기에 처하자 모호성은 오히려 양쪽으로부터 공격받는 약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트럼프의 포식성 제국주의로 한국의 좌파에서도 애국주의(역시 ‘국익’ 개념을 내세운다)가 득세하고 있다. (제국주의가 한국을 발전시켰다는 뉴라이트의 일면적인 언어도단을 여기서 다룰 가치는 없다.)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는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지만, 좌파적 애국(민족)주의는 분석의 단위를 ‘국가 대 국가’ 또는 ‘지배국 대 예속국’으로 설정한다. 예속론은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개념을 ‘민족’으로 대체했다. 이로 인해 피억압·피착취 계급인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투쟁보다는, ‘수탈’ 또는 ‘약탈’ 당하는 국가라는 구도 속에서 국내 중간계급(그리고 일부 국내 자본가)과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예속론은 외부적 요인(제국주의의 수탈 또는 약탈)에 모든 책임을 돌린다. 그래서 제국주의의 약탈성을 고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방법인 생산 관계, 계급 투쟁 등을 소홀히 다룬다. 그러나 한 나라의 발전 또는 저발전은 대외 무역 조건의 영향보다는, 그 나라 내부의 계급 구조와 생산력 수준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는 제국주의의 간섭을 받는 나라의 해방이 단지 미국 국가나 서방 자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뿐 아니라 아니라, 국내의 계급 구조를 혁파하고 생산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노동자 혁명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예속론은 제국주의로부터의 단절(특히 “반미 자주화”)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아래로부터의 혁명 전략이라기보다는 진영 논리에 따른 국제 반미 진영 가담하기를 뜻한다. 그러나 진영 논리를 거부해야 한다. 미국 편에 서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도 아니며, 중국이나 러시아 편에 서는 것이 ‘반제국주의’도 아니다. 양측 모두 자본 축적과 영향력 확대를 꿈꾸는 제국주의 세력일 뿐이다. 국제주의야말로 진정한 대안이다. 한국 노동자들은 자국의 ‘진보’ 정치인들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의 노동계급과 연대해 이 재앙적인 제국주의 경쟁 자체를 멈추게 하는 운동에 집중해야 한다.
더 읽을거리
안소니 브루어, 《제국주의와 신제국주의》, 사계절, 1984.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들을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정석적인 길잡이와 같은 책. 룩셈부르크, 힐퍼딩, 레닌, 부하린의 고전적 이론들에 대한 명료한 정리가 돋보인다. 그러나 1960~70년대를 풍미한 바란, 스위지, 프랑크의 종속이론,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에마뉘엘과 아민의 부등가교환론까지 다루는데, 굳이 이런 이론들까지 처음부터 읽으려 애쓸 필요는 없겠다.
크리스 하먼, 《크리스 하먼의 새로운 제국주의론》, 책갈피, 2009.
니콜라이 부하린, 《세계경제와 제국주의》, 책갈피, 2018.
블라디미르 레닌,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아고라, 2017.
알렉스 캘리니코스,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 책갈피, 2011. (학술적이라는 난점이 있지만, 인내심을 발휘하며 정독하면 얻을 게 많다.)
G. 하르다하 & D. 카라스, 《사회주의 경제이론》, 한마당,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