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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 극우 최일붕 글 모음 제국주의 팔레스타인·이란전쟁 이주민·난민 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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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제국주의 이론과 반제국주의 전략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단 등 유럽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들은 자국 전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레닌은 전시에 일관된 정치 실천을 하려면 제국주의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그는 1915년 중반부터 몇 개월 동안 집중적 탐구를 해서 1916년 봄 취리히에서 얇은 소책자를 썼다. 그것이 바로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이하 《제국주의론》)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아마도 제국주의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심층적 이론서라기보다 부제로도 달렸듯이 대중적 개설서였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을 집필할 때 영국 자유주의자 J. A. 홉슨의 《제국주의론》과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 루돌프 힐퍼딩의 《금융자본》을 많이 참고했고,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를 쓴 볼셰비키 동료 부하린에게도 빚을 졌다. 이 책들이 이론적 저서인 반면 레닌의 책은 정치적 소책자였다.

그러나 레닌이 대충 탐구하고 《제국주의론》을 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레닌은 망명지 취리히에서 이 책을 쓴 탓에 (1917년판 서문에 썼듯이) 프랑스어와 영어, 특히 러시아어 문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애를 먹었지만, 그런 조건에서도 방대한 문헌을 참고했다. 레닌이 제국주의 관련 문헌들을 살펴보면서 생각을 메모해 놓은 기록인 《제국주의론 노트》에는 책 148권과 논문 232편의 내용 발췌와 주석이 있다.

이런 심층 탐구를 통해 레닌은 제국주의의 본질이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한 결과(최고 단계)임을 밝혔다. 레닌은 1917년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독자들이 근본적인 경제 문제, 즉 제국주의의 경제적 본질을 이해하는 데 이 소책자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그것을 연구하지 않고서 현대의 전쟁과 현대의 정치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레닌은 차르 체제의 검열을 의식해 주로 “경제적 분석으로 작업을 제한”했지만, 비록 “암시나 이솝 식의 언어”로나마 정치적인 문제를 다뤘다. “제국주의가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라는 것, 사회애국주의는 사회주의를 완전히 배신하고 부르주아지 편으로 넘어간 것이라는 사실, 노동계급 운동 내의 이러한 분열은 제국주의의 객관적 조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레닌은 홉슨과 힐퍼딩을 많이 참고하고 의존했지만, 그들이 결코 이르지 못한 혁명적인 정치적 결론으로 나아갔다. 애초 레닌은 완벽한 제국주의 이론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자 운동이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에서 끌어내야 할 실천적 교훈과 과제를 제시하고자 이 책을 썼고, 이 책은 그 목적에 딱 알맞았다.

지금부터는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의 핵심을 살펴본 뒤, 그가 제국주의의 경제 문제들을 근본적인 정치 문제들과 관련지어 내놓은 분석들과 혁명적 전략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레닌 주장의 핵심 요지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제1차세계대전이 양 진영 모두의 제국주의 전쟁임을 증명하고 있다. “세계를 나눠 먹기 위한 전쟁, 식민지와 금융자본의 ‘세력권’을 분할하고 재분할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다. 레닌은 이 전쟁의 계급적 성격을 알려면 교전국 지배계급들이 처한 객관적 상황을 분석해야 한다면서, 이 전쟁이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로부터 비롯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레닌은 그러한 변화이자 제국주의의 특징으로 다음 다섯 가지를 꼽았다.

⑴ 생산과 자본의 집중이 고도로 발전해서 독점체들이 형성되고 이들이 경제생활에서 결정적 구실을 한다. ⑵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이 융합되고, 이 금융자본을 바탕으로 하는 금융과두제가 형성된다. ⑶ 상품 수출과 구분되는 자본수출이 중요해진다. ⑷ 독점자본의 국제적 연합체들이 형성되고 이들이 세계를 분할한다. ⑸ 거대 자본주의 열강 간의 전 세계 영토 분할이 완료된다.

이 설명의 난점은 각 항목의 상대적 중요성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섯 가지 특징 가운데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훨씬 덜 중요하거나 적절하지 않다. 가령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이 융합된 금융자본의 발전 수준은 제국주의 강대국마다 달라 주로 독일에서 더 두드러졌다. 이는 영국의 현실과는 맞지 않았다. 또, 식민지의 경제적 구실이 중요하긴 했지만, 자본 수출의 증대와 식민지 확장 사이의 관계는 불균등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자본 수출국이 아니라 자본 수입국이었다.

따라서 위 정의를 도그마로 취급하면서 제국주의를 판별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다. 레닌도 《제국주의론》에서 이 특징을 나열하기 전에 “모든 정의의 가치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이라고 전제했다.

레닌이 주장하고자 했던 핵심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근본적 특징(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발전이자 그 직접적 연장”이라는 것이었다. 레닌은 “제국주의가 현재 형태의 자본주의와 뗄 수 없이 결합돼 있다”는 것을 《제국주의론》 곳곳에서 거듭 강조했다.

레닌은 자유경쟁이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여지던 시절과 달리, 생산과 자본의 집중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독점이 자유경쟁을 대체했다고 지적했다. 수지맞는 거래를 위한 ‘제휴’가 시장 경쟁을 대체했는데, 그런 제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독점 기업들과 국가의 연계다. 독점 기업들은 국가권력을 이용해 해외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려 하고, 독점 기업들 간의 경쟁은 세계 여러 지역을 차지하려는 국가들 간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자본에 비례해”, “힘에 비례해’ 세계를 분할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역동적 성격 탓에 힘의 순위가 바뀌면서 강대국들은 다시 재분할을 둘러싼 투쟁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레닌은 자본주의에서 평화는 잠시 숨 돌릴 틈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레닌은 강대국 간 적대와 전쟁이 단순한 일탈이나 일시적 국면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에 본질로 내재한 경향의 결과이고, 따라서 오직 사회주의 혁명만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카우츠키 비판

레닌의 이런 주장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이자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인 카우츠키와 정면 대립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제국주의론》 1920년판 서문에서 “이 소책자는 카우츠키주의를 비판하는 데 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 일반, 특히 공산주의 운동은 카우츠키주의의 이론적 오류에 대한 분석과 폭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첫째, 카우츠키는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한 단계가 아니고,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도 아니며, 금융자본이나 금융자본의 일부가 선호하는 ‘정책’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유무역을 통한 시장 확대로 성장할 수 있는 산업자본은 금융자본과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자본의] 팽창 열망은 … 제국주의의 폭력적 방법들이 아니라 평화적인 민주주의에 의해 가장 잘 촉진된다.”

레닌은 이런 주장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금융자본에 대한 카우츠키의 주장과 달리, 독점 기업은 국민경제 내 그저 개별 인자들이 아니라 지배적인 형태의 자본이라고 레닌은 강조했다. 그들이 발휘하는 정치적 영향력은 현 단계 자본주의 경쟁이 취하는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카우츠키처럼 영토 합병을 금융자본이 ‘선호하는’ 정책이라고 보면, 제국주의적 강압을 다른 자본주의적 정책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보게 된다. “그 결과 경제에서 독점과 정치에서 독점적이지 않고 강압적이지 않고 침략적이지 않은 행동 방식이 양립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둘은 양립할 수 없다고 레닌은 강조했다. 제국주의는 “특별히 추악한 지나친 행위들”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토대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게다가 합병을 통해 건설된 제국들은 단지 자기 지역 사람들을 착취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다른 자본가들이 자기 지역 사람들을 착취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으려 한다. 영국은 인도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처음에는 프랑스를, 나중에는 독일을 몰아냈다. 합병, 즉 제국 건설의 논리는 경쟁 제국 간 군사적 갈등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카우츠키는 “초제국주의” 단계로의 진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제1차세계대전 개전 직후에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일부 군수 사업가들을 제외하면 자본가 계급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세계대전 후에 군비경쟁을 계속해야 할 경제적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는 바로 이런 분쟁 때문에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는 또 하나의 새로운 단계”, “카르텔 정책이 대외정책으로 확장되는 ‘초제국주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자본의 집적과 집중 과정이 계속되면 국경을 초월해 통합된 거대 다국적기업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국경을 초월한 경제 통합 과정이 정치에도 반영돼 세계 자본가들은 군비 경쟁을 포기하고 서로 연합하며 단결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대해 레닌은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 때문에 세계를 새로 분할하려는 국가 간 갈등이 재발할 것이므로 초제국주의가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레닌은 당시 중국에 대한 열강의 태도를 예로 들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방금 거론된 아시아 국가들에서 영토, 이익, 세력권을 지키거나 확대하기 위해 서로 편을 갈라 동맹을 맺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국제 제국주의’ 또는 ‘초제국주의’ 동맹이 될 것이다. … 이런 동맹의 실례들은 20세기 역사에서도, 예를 들면 중국에 대한 열강들의 태도에서 나타나고 있다. … 이런 동맹들이 일시적이지 않을 것이라든가 … 마찰·분쟁·투쟁들을 제거할 것이라고 상정하는 것이 과연 ‘생각할 수’ 있는 일인가?”

레닌은 그에 대해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자본주의 하에서 세력권·이익·식민지 등의 분할을 하는 데 있어 분할 참가국들의 국력, 즉 전반적인 경제력·재정력·군사력 등을 고려하는 것 외에 다른 근거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분할 참가국들의 국력은 불균등하게 변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개개의 기업·트러스트·산업부문·국가 들이 균등하게 발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 자체가 불균등의 분포를 바꿔 국가 간 힘의 균형을 끊임없이 바꿔 놓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는 안정적이고 영속적인 의견 일치가 유지될 수 없다고 레닌은 강조했다. 세계 자본주의는 전쟁과 불안정한 평화를 반복해서 겪을 수밖에 없다.

레닌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은 대중에 대한 기만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대중의 관심을 현 시대의 첨예한 모순들과 첨예한 문제들로부터 돌려 뭔가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미래의 ‘초제국주의’라는 거짓 전망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대중에게 자본주의 하에서도 영속적인 평화가 가능하다는 희망으로 가장한 반동적인 위안을 주는 것”.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은 역사의 검증을 견디지 못했다. 제1차세계대전의 참상은 강대국 간 협력을 자극하지도 못하고, 제2차세계대전을 막지도 못했다. 레닌의 반박대로 강대국들은 세계 재분할을 위한 전쟁에 뛰어들었다. 1930년대 일본이 극동에서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 다른 강대국 영향권 하의 지역으로 진출함에 따라 전쟁이 터졌다. 독일이 영국의 제국과 프랑스로 영토를 확장하려 하자 또 전쟁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강대국 간 전쟁이 발생하지 않고, 주요 선진국들이 미국의 주도 아래 협력을 유지하는 듯 보이던(1945년~2010년) 상황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과 유사한 주장이 계속되는 좋은 토양이 됐다. 주요 경제들의 상호 의존 때문에 전쟁은 득이 되지 않는다거나 세계화로 국가 간 적대가 사라졌다는 주장은 체제의 옹호자들뿐 아니라 좌파들에게서도 거듭 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소수 열강이 세계를 호령하는 데다 그들 간의 갈등이 증대하고 있다. 오늘의 세계 경제도 레닌이 말한 “불균등성과 모순”을 특징으로 한다. 레닌의 불균등 발전론과 그에 기초한 초제국주의론 비판은 오늘의 제국주의 위기, 특히 규칙기반 제국주의의 붕괴와 미·중 갈등 증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금융자본 개념을 둘러싼 혼란과 재정립

앞서 언급했듯이 레닌은 《제국주의론》을 쓸 때 홉슨과 힐퍼딩의 저작들을 참고했는데, 그러면서 그들의 금융자본 개념에 의존한 것은 모순과 난점을 낳았다.

홉슨과 힐퍼딩의 금융자본 개념은 서로 달랐다. 힐퍼딩은 금융자본을 금융과 산업의 융합으로 여겼고, 경제의 ‘조직화’라는 본질적으로 국가적 과정을 통해 등장하는 것으로 봤다. 반면, 홉슨은 금융자본을 초국적 존재로 보면서 기생적 성격을 강조했다. 그러나 힐퍼딩과 홉슨은 모두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레닌은 힐퍼딩이 사용한 금융자본이라는 용어를 분석의 핵심에 두면서 제국주의 체제의 특징을 묘사했고, 동시에 금융의 기생적 역할에 대한 홉슨의 묘사를 대폭 수용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난점을 드러냈다.

첫째, 홉슨과 힐퍼딩의 금융자본 개념을 차용하다 보니, 레닌의 《제국주의론》에는 금융업자나 은행이 제국주의의 주된 원인인 것처럼 해석될 여지가 있는 주장이 있다. 홉슨을 수용해 금융자본의 기생적 성격을 강조하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제국주의란 몇몇 나라들에 화폐자본이 대량으로 축적되는 것이고 … 그 결과 금리생활자, 즉 ‘이자놀이’로 생활하는 사람들, 어떠한 기업에도 전혀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 빈둥대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계급,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계층이 이례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제국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경제적 기초 중 하나인 자본수출은 금리생활자층의 생산으로부터의 이 완전한 단절을 한층 더 강화하고, 몇몇 해외 나라들과 식민지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에 의해서 생활하는 나라 전체에 기생성이라는 각인을 새긴다.”

이렇게 금융자본의 기생성을 강조하다 보니, 후대에 어떤 사람들은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금융자본에 맞서 일부 산업자본과 (반제국주의적) 동맹을 할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홉슨의 주장이자 정치적 결론이었다. 홉슨은 1902년 저작에서 제국주의를 특정 금융 기구들과 관련 있는 이익집단의 산물로 봤다. 그들은 국내 산업 투자에 따르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해외 대출의 대가로 이자를 챙긴다는 것이다. 홉슨은 문제의 근원이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선진국 경제의 과잉 저축 경향이라고 봤다(과소소비설). 그래서 저축으로 쌓이지 않고 소비되도록 분배 정책을 펴면, 외국 투자처를 확보하려고 싸울 필요가 사라질 것이라고 여겼다. 내수경제 확대와 산업자본 지원 같은 개혁으로 제국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얄궂게도, 레닌이 홉슨을 수용해 금융자본의 기생성을 강조하다 보니 《제국주의론》에서 주의를 기울여 비판한 카우츠키류의 주장에 뒷문을 열어 주는 일이 생긴 것이다.

기생적 금융자본에 대한 강조는 또한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금융자본 수출을 가장 중시하는 듯한 인상을 줬다. 그러나 이것은 당대 상황은 물론 그 뒤에도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금융자본 수출은 당시 주로 영국 자본주의의 특징이었던 데다, 영국조차 이미 독일처럼 독점 대기업 육성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1930년대 독일의 유럽 재분할 추동력은 금융자본 수출이 아니라 중공업에서 나왔다. 그리고 선진국들은 식민지 노동을 착취하며 기생하기는커녕 새로운 산업들을 성장시키고 있었다.

기생성 강조는 노동귀족론이라는 약간 다른 형태의 문제로도 이어졌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겠다.

둘째, 홉슨과 힐퍼딩의 금융자본 개념은 초제국주의론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홉슨은 중국에 대한 열강들의 공동 착취가 국가 간 적대관계가 완화될 것을 예고하는 징후로 봤다. 힐퍼딩은 자본주의가 갈수록 조직되고 있다며 “조직 자본주의” 하에서는 경제 위기뿐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도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이 차용한 홉슨-힐퍼딩의 개념은 레닌이 이끌어 내려 한 정치적 결론, 즉 자본주의 체제가 계속되는 한 전쟁은 필연이라는 주장을 훼손할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긴장을 해소한 것은 힐퍼딩의 금융자본론을 더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부하린이었다. 부하린은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이 결합해 금융자본을 형성한다면서, 금융자본을 산업자본과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봐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또, 자본의 ‘조직화’ 과정(집적과 집중 - 거대 기업의 산업 독점 - 금융자본 형성)은 사적 자본과 국민국가의 융합에서 절정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생산력의 발전 과정 때문에, 세계시장을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서로 다른 국민경제 체제들은 날카롭게 충돌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자본 수출에 대해서도 부하린은 그것이 국가와 유착한 자본이 국제적으로 경쟁하는 체제의 부차적 특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경쟁은 자본 수출(새로운 투자 영역)뿐 아니라 상품 수출(시장 문제), 원료와 노동력 확보 등의 분야에서도 벌어진다. 부하린은 자본주의의 외연 확장 드라이브를 홉슨처럼 과소소비론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자본 순환 개념으로 설명한 것이다.

부하린은 힐퍼딩과 달리 자본의 집중과 집적이라는 한 가지 과정만 보지 않았다. 부하린은 자본주의의 조직화 과정이 생산력이 국제화하는 맥락 속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세계경제는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들”이 경쟁하는 무대이고, 이들 사이의 투쟁은 무엇보다 군사력에 따라 결정된다. 이처럼 국가화와 국제화라는 두 과정을 포착한 덕분에 부하린은 힐퍼딩과는 달리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을 예견할 수 있었다.

부하린의 제국주의론에도 약점은 있다. 그는 국가자본주의 경향과 자본의 국제화 경향이 서로 강화하는 측면만 강조했지, 서로 제약하는 측면은 과소평가했다. 그래서 국가자본주의에서는 (전쟁으로 치닫는 경향과 달리) 경제 위기 경향이 사라진다고 봤다. 부하린은 경제 위기에 대한 설명으로 불비례설을 받아들였고, 조직 자본주의는 그 불균형을 극복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개별 국민경제는 1백 퍼센트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이 점에서 레닌의 불균등 발전론은 부하린의 일면성을 보완해 줄 수 있다. 레닌은 국민경제 내 경제적 경쟁이 사라지고 국가 간 군사 경쟁으로 대체된다고 보기보다, 자본주의의 본질인 불균등 발전이 군사적 경쟁의 경제적 기초라고 봤다. 레닌은 “제국주의의 경제적 본질이 독점자본주의”라고 했지만, 그것을 경쟁의 종식으로 보지는 않았다. 독점에 관한 레닌의 분석은 실제로는 과점 경쟁과 더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혁명적 패전 입장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레닌은 전쟁 개전 자체보다 전쟁에 대한 각국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태도에 훨씬 놀랐다. 제2인터내셔널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태도를 분명하게 거듭 밝혀 왔다.

“그럼에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쟁을 신속히 끝내기 위해 개입해야 하고, 전쟁으로 말미암은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이용해 대중을 분기시켜 자본가 계급 지배의 철폐를 앞당기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1912년 바젤 대회 반전 결의 중에서)

심지어 1914년 7월 말까지도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런 내용의 선언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독일 당국이 1914년 8월 1일과 3일 러시아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8월 4일 의회에 전쟁 예산 승인을 요청하자,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찬성표를 던졌다. 처음에 레닌은 독일 군부가 적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쓰디쓴 진실을 인정한 뒤, 레닌은 재빨리 상황을 재평가하고 전쟁에 대한 혁명적 전략을 발전시켰다.

레닌은 무엇보다 전쟁의 계급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지금 벌어지는 전쟁(제1차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자본주의가 최고의 발전 단계에 이른 시대 상황의 결과이다.”

전쟁의 성격을 분명하게 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과 뗄 수 없었다. 레닌은 근본적이고 항구적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뒤집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노동계급이 계급투쟁이라는 무기를 이용해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싸워야 하고, 그것은 내전에서 절정에 이를 것이다. “현재의 제국주의 전쟁을 (자국 지배계급에 맞선) 내전으로 전환시키는 것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프롤레타리아 전술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레닌은 에두름 없이 직설적이고 선명하게 주장했다. 레닌은 내전으로 지배계급을 타도하려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자국의 패배를 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각국 정부의 군사적 실패는 국가 간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혁명적 패전 입장에서 후퇴하면 계급 투쟁을 주저하게 될 것이라고 레닌은 경고했다. 계급 투쟁이 국방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전쟁을 벌이는 자국 정부에 맞서 투쟁하는 사람들은 혁명적 선전으로 말미암아 자국이 패배하더라도 투쟁을 늦추거나 후퇴해서는 안 된다. 자국 정부군의 패배는 정부를 약화시키고, 자국의 억압을 받는 소수민족의 해방을 촉진하고,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내전을 부추길 것이다.”

레닌의 전략은 개혁주의자들의 조국 방위 입장과 극명하게 대립하는 것이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그동안 독일 노동계급이 이룩한 성취를 러시아 전제정부로부터 지켜야 한다며 조국 방위 입장을 정당화했다. 레닌은 이런 ‘인민적’ 조국 방위 입장이 강도들의 제국주의 전쟁을 미화한다고 규탄했다.

레닌은 평화주의도 날카롭게 비판했다. 대중의 평화 염원 정서에 공감하면서도 운동의 전략으로서 평화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평화를 바라는 대중의 염원은 흔히 저항의 시작, 전쟁의 반동적 성격에 대한 분노와 자각을 드러낸다. … 사회민주주의자[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자를 뜻했다]는 그런 정서가 추동하는 모든 시위에 가장 열렬한 일부로 참가할 것이다. 그러나 병합 없는 평화, 민족 억압 없는 평화, 약탈 없는 평화, 현 정부들과 지배계급들이 벌일 새로운 전쟁의 씨앗이 없는 평화가 혁명적 운동 없이도 가능하다는 견해로 대중을 기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레닌은 “부르주아적 사회관계의 토대가 지속되는 한 제국주의 전쟁은 제국주의 평화로 귀결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혁명적 투쟁을 지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 ‘평화 강령’은 대중을 속이는 짓이다. 레닌은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모든’ 전쟁을 반대하지는 않는다며,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전쟁인 내전을 거부하는 것은 극단적 기회주의로 타락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레닌은 어느 프랑스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날카롭지도 않고 대담하지도 않으면서 우아한 옷을 걸친 사상은 죽은 사상이다. … 강력한 사상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분노,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열렬히 환영받는 사상이다.”

정말이지, 혁명적 패전 입장은 그런 반응을 불렀다. 많은 사람들이 레닌의 입장에 경악했고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반전 사회주의자들의 국제회의인 치머발트 회의(1915년)에서도 레닌의 입장은 “유치하고 위험하고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이유로 부결됐다.

트로츠키도 혁명적 패전 입장은 상대국(독일)의 승리를 뜻하므로 러시아 혁명이 일시적으로 성공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실패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심지어 많은 볼셰비키 활동가들도 혁명적 패전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레닌의 주장이 옳았음이 현실에서 입증됐다. 전쟁의 참상이 드러나고 노동계급의 고통이 증대하면서 제국주의 전쟁을 자국 지배계급에 맞선 내전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전쟁을 지속한 임시정부를 타도한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과, 자살적 작전에 투입되기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킨 수병 투쟁으로 시작된 1918년 11월 독일 혁명으로 마침내 제1차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제국주의와 개혁주의의 관계: 노동귀족론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 지도자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피비린내 나는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나서자 레닌은 왜 이런 재앙이 발생했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에서 기회주의(개혁주의를 이르는 레닌의 용어)가 득세한 것과 제국주의 사이에 물질적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노동귀족론이다.

노동귀족론은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타당성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비판하기 앞서, 레닌이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배신을 비판하고, 그것이 낳은 파괴적 효과에 주목하면서 혁명적 조직의 재건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었음을 지적해 두겠다. 당시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적 원칙을 버리고 노동조합 관료와 개혁주의 정치인들의 우경화에 편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제국주의가 소수 부유한 나라들에 초과이윤을 안겨줘, 노동계급의 상층을 매수해 개혁주의를 조장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1915년에 쓴 ‘인터내셔널의 붕괴’에서 노동귀족의 경제적 기반이 제국주의와 그 초과이윤에 있다고 주장했다. 《제국주의론》 1920년판 서문에도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런 엄청난 초과이윤(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나라의 노동자들로부터 짜내는 이윤 이상으로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에)으로 노동계급 지도자들과 노동귀족 상층을 매수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 이 부르주아화한 노동자층, 다시 말해 ‘노동귀족’은 생활양식에서, 임금 수준에서, 모든 세계관에서 전적으로 소시민적인데, 이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한 기둥이고 요즘은 (군사적으로는 아니라도) 부르주아지의 주요한 사회적 기둥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실질적으로 노동계급 운동 내에서 암약하는 부르주아지의 첩자이자, 자본가 계급의 노동 관리인들이며 실제로 개혁주의와 배외주의를 전파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째, 레닌은 해외투자에서 비롯하는 물질적 이득이 어떻게 특정 노동자 집단으로 흘러 들어가는지 경제적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않았다.

선진국 노동자들이 식민지 노동자들에 비해 생활수준이 높다고 해서, 그것이 선진국 노동자들이 식민지 노동자들의 착취로부터 득을 얻은 결과라거나 제국주의적 수탈에 가담하고 있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하게 후대의 “불균등 교환” 이론들도 남반구의 저임금이 전 세계 잉여가치 창출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은 북반구에서 주로 남반구로 향하지 않았다. 착취율은 실질임금뿐 아니라 노동생산성에 의해 결정되는데, 선진국의 생산성 수준이 훨씬 높기 때문에 기업들이 북반구에 더 많이 투자하는 것이다.

둘째, 사실 레닌은 초과이윤으로 매수된 특정 집단이 누구인지 그 범위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다. 1916년 ‘사회주의의 분열과 제국주의’에서는 노동조합원 전체를 노동귀족이라고 규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노동자 ‘상층’과 ‘진짜 프롤레타리아 하층’, ‘특권적인 노동조합원’과 ‘최하위 진정한 대중’을 대립시키기도 했다.

이런 레닌의 주장은 레닌의 후배들 사이에서 노동조합 문제를 둘러싼 혼란을 가중시켰다. 기존 노동조합에서 활동하지 말라거나(적색 노동조합), 투쟁의 성과를 계급운동 전진의 걸림돌로 여기는 초좌파적 결론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레닌 자신은 《좌익 공산주의 - 유치증》에서 노동조합 문제를 다루면서 이런 초좌파적 주장을 비판했다. “반동적 노동조합에서 활동하지 않겠다는 것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후진적 노동자 대중을 반동적 지도자들의 영향력 아래 내버려 두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복잡한 전술적 결정을 해야 하는 미숙한 서유럽 혁명가들과 코민테른 지도자들에게 레닌의 노동귀족론은 개혁주의 문제를 이해하고 제대로 대처하는 섬세하고 날카로운 무기가 되지 못했다.

셋째, 노동귀족론은 제1차세계대전 전후로 국제 노동운동이 개혁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진영과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으로 분열한 것을 설명하는 데서 완전히 실패했다. 베를린, 페트로그라드, 셰필드와 글라스고, 토리노 등 유럽 전역에서 전쟁에 맞선 노동계급의 저항을 주도하고, 볼셰비키와 신생 공산당의 편으로 결집한 것은 다름 아닌 잘 조직되고 비교적 임금 수준이 높은 당시 금속 노동자들이었다.

물론 레닌이 개혁주의 지도자들을 일컬어 노동운동 안에 있는 “부르주아지의 대리인”이라고 부르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부르주아적 노동자 정당”이라고 정의한 것은 옳았다. 그 주장은 거듭 입증되며 시간의 검증을 통과했다.

그러나 노동귀족론이 옳았다는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 고위 상근간부층과 그 정치적 표현의 등장은 초과이윤과 아무 관계가 없다. 노동조합 고위 상근간부층의 형성에 관한 선구적 분석은 레닌이 아니라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시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했던 룩셈부르크는 차르 치하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레닌보다 개혁주의의 뿌리와 위험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사실, 1914년 8월 4일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들이 전쟁 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일탈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 전조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1900년대 초반부터 그 당 내부에는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흐름이 강력하게 존재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선거를 중시하며 정치를 그에 종속시켰고, 부르주아 국가에 적응하며 체제내화하고 있었다. 노동조합 관료층의 정치적 표현으로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체제 유지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1904년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군국주의 반대 선전을 하자고 독일 사회민주당 당대회에서 제안했을 때 지도부는 이를 거부했다. 1907년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군사 예산안에 반대표를 던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재정을 간접세로 마련해 부담이 자당 지지층인 노동계급 대중에게 돌아간다는 것 때문이었지, 군비 증강 자체를 반대해서가 아니었다.

군국주의 반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당 지도부의 입장은 확고했다. 특히, 구스타프 노스케는 이를 열렬히 옹호하며 “(그 방침이) 국가 정체성 원칙을 받아들여 결정됐다”고 강조했다. 노스케는 독일 혁명 당시 반혁명 군부의 우두머리(국방장관이자 치안장관)가 된 자이다.

전쟁 위기가 심화되고 있던 1911년 여름, 독일이 프랑스령 모로코에 파병했을 때도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모로코인들이 프랑스 식민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독일이 자국 상인 보호 명분으로 군함을 보냈고, 영국·프랑스와 충돌했는데도 말이다. 제2인터내셔널 사무국이 소속 정당들의 공동 대응을 호소했는데,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선거 득표 손실을 우려해 외면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이 입장을 격렬하게 비판하며 그 이유로 당의 의회주의를 지목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부패해 가던 그때, 카우츠키는 모호한 평화주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레닌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8월 4일 배신 직후 엄청나게 놀랐지만, 그것이 우연이나 일탈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적 타락은 “노동운동의 ‘평화적’ 발전 시기의 산물”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피억압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중요성

레닌의 제국주의론의 또 다른 특징은 피억압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매우 중시하고 지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레닌의 고유하고 결정적인 기여였다. 레닌은 피억압 민중을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투쟁의 주체로 봤다.

제2인터내셔널은 식민지 해방 문제에 중요성을 일절 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식민지가 너무 후진적이어서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봤고, 심지어 식민주의를 지지하거나 기껏해야 식민지에서의 학대를 규탄하는 정도였다.

유럽 제국 내의 피억압 민족 문제에 관해서도 사회민주주의 정당 지도자들은 제국 해체와 피억압 민족 자결권을 지지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활동하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기존 제국을 그대로 둔 채 그 안에서 민족 자치권을 보장하자고 주장했다.

한편, 일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하에서 민족 독립 투쟁은 진보적 가치가 없고 국제 노동계급의 단결을 위협할 뿐이라며 초좌파적 관점에서 민족 자결권에 반대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부하린이 그런 입장이었다.

반면 레닌은 피억압 민족들의 반란이 제국주의를 약화시키고, 세계 지배계급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전쟁과 혁명을 낳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민족 투쟁을 진정한 계급 투쟁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여겼지만, 레닌은 “순수한 사회 혁명을 기대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생전에 혁명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영국에 독립을 요구하는 아일랜드의 1916년 부활절 봉기를 폄훼하는 사회주의자들, 특히 국제주의를 내세우며 민족 자결권을 반대한 일부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향해서 레닌은 이렇게 주장했던 것이다. 또,

“식민지와 유럽의 약소 민족들의 반란 없이도, 편견 투성이인 소부르주아지 일부의 혁명적 봉기 없이도, 정치적으로 각성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 및 반(半)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지주, 교회, 왕정, 민족적 압제에 대항해서 벌이는 운동 없이도 사회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 모든 생각은 사회 혁명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요컨대 레닌은 제국주의 시대에는 강력한 사회적 봉기들이 민족주의 형태를 띠면서 반자본주의 방향으로 발전하는 일이 자주 일어날 수 있다고 예견한 것이다. 비록 그 지도적 이데올로기 자체는 부르주아적일지라도 말이다.

레닌은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 운동이 비록 제국주의에 홀로 맞서기에 역부족일지라도 더 큰 투쟁을 촉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제국주의 투쟁의 독립변수로는 무기력한 소수민족들이 진정한 반제국주의 세력인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가 무대에 등장하도록 도와주는 효소나 세균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변증법이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과 국제적 연대 운동을 봐도 이 주장은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다.

레닌은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이 피억압 민족의 투쟁과 자결권을 지지해야 한다고 매우 강조했다. 그래야 양자의 단결이 가능하고, 그래야 공동의 적인 제국주의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는 선진국 노동운동 내의 국수주의 영향력에 맞서는 데에도 필요했다.

레닌은 민족주의가 노동계급을 분열시킬 것이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우려를 이해했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억압 민족의 노동계급이 피억압 민족의 권리를 지지해야만 국제 노동계급의 단결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룩셈부르크를 설득했다. 만약 피억압 민족의 민중이 억압 민족 내에서 자기 민족의 자결권을 옹호하는 세력을 찾아볼 수 없다면, 그들은 자기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민족주의를 따르게 될 것이다.

레닌은 민족해방 운동을 지지하기를 갖가지 이유로 꺼리는 사람들에 반대해, 피억압 민족의 투쟁을 지지하면서 그것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결합시켜 국제 노동계급의 단결을 이루려 했다. 역설적이게도, 민족 투쟁을 지지함으로써 민족주의 영향력을 무너뜨리고, 분리를 지지함으로써 단결과 연대를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피억압 민족과 식민지의 반제 투쟁을 중시하는 레닌의 입장은 수많은 피억압 민족의 민중이 러시아 혁명과 코민테른에 뜨거운 관심을 보인 것에서도 그 의의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민중도 예외가 아니었다.

코민테른 2차대회(1920년)는 민족해방에 관한 공산주의자들의 실천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뤘다. 그 대회는 “우리의 정책은 소비에트 러시아와 민족·식민지 해방 운동의 긴밀한 동맹을 구축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나라의 공산당은 종속 민족이나 권리를 박탈당한 민족(예컨대 아일랜드인과 미국의 흑인 등)의 혁명 운동과 식민지의 혁명 운동을 직접 원조해야 한다.” 이와 함께 “진정으로 공산주의적이지 않은 후진국의 혁명적 해방운동을 공산주의로 색칠하려는 시도에 맞서 단호하게 투쟁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됐다.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은 식민지와 후진국의 혁명운동과 일시적으로 협력해야 하고 심지어 동맹도 맺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운동과 뒤죽박죽 섞여서는 안 되고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독립성을 무조건 유지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아무리 맹아적 단계에 있더라도 그래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는 여러 난관이 있었다. 한편으로, 부르주아적 민족독립 운동의 현실과 그것이 진정으로 혁명적일 수 있다는 희망 사이에는 모순이 있었다. 부르주아적 민족운동은 피착취 대중의 각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코민테른이 점차 러시아 관료의 외교적 부속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1923년 10월 독일 혁명이 실패하고 1924년 1월 레닌이 사망한 이후 스탈린이 코민테른에서 영향력을 늘려 나가면서 이런 변화에 가속이 붙었다.

이 문제는 1925~27년 중국 혁명의 패배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특히, 중국 공산당을 국민당에 종속시킨 것은 코민테른 2차대회 정책을 정면 거스른 것이었다. 1925년 코민테른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중국 국민당을 모델로 한 민족혁명당을 만들라고 권고했다(‘9월 결정서’).

레닌 사후 코민테른은 식민주의에 맞서 단호하게 투쟁하지 않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에도 그 나라에 대한 외교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기회주의적으로 접근했다. 식민지 민중은 식민지의 후진성에 고통받고 있었다. 코민테른은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생산력 발전을 저해한다고 일면적으로 주장했다. 이는 식민지와 옛 식민지에서 경제발전이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은 소련식 길밖에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됐다. 그런 주장은 후진국의 이른바 ‘진보적 민족 부르주아지’와 동맹 맺고, 심지어 그들에게 종속되는 것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이것은 레닌의 견해와는 완전히 달랐다. 첫째, 레닌은 식민지의 “혁명적 민족 운동”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추구하더라도 식민주의를 받아들이는 개혁주의 경향과 “혁명적 민족 운동”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둘째, 레닌은 식민지로의 자본 수출이 식민지의 산업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봤다. “자본수출은 자본을 수입하는 나라의 자본주의 발전 속도를 크게 높인다. 그러므로 자본수출은 자본을 수출하는 나라의 발전을 어느 정도 억제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전 세계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더욱 확대하고 심화한다.”

이는 제국주의 본국의 노동계급뿐 아니라 식민지의 노동계급과 민중도 제국주의를 공격할 수 있음을 뜻했다. 레닌은 식민지의 정치적 독립은 정치 투쟁을 통해 달성될 수 있고 제국주의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독립은 다른 문제다. 레닌은 자본주의가 세계 시장을 확립해 일국 생산이 다른 나라의 생산에 의존하기 때문에 경제적 독립은 공상이라고 봤다.

레닌 사후 코민테른의 견해와 다양한 좌파적 민족주의 경제 이론들이 수렴된 결과로 생겨난 ‘종속이론’은 한때 크게 유행했다. 그 핵심은 선진국들이 ‘주변부’의 경제 발전을 체계적으로 방해하므로 발전을 이루려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떨어져 나와 자립 경제를 추구한 나라들은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종속이론이 틀렸음이 입증된 것이다. 오히려 레닌이 주장했듯이, 후진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고 심지어 새로운 제국주의 열강으로까지 발전하는 일이 벌어졌다. 오늘날 중국이 그런 사례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에서 당대의 독일과 일본을 그런 사례로 든 바 있다.

그렇다고 한국이나 타이완처럼 세계경제에 편입돼 급성장한 나라들이 대안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그런 나라들은 여전히 세계적 불평등과 전쟁 위험에 매여 있다.

지금 세계는 불안정과 갈등이 증대하고, 참혹한 전쟁에 휩싸여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인종 학살이 계속되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 전쟁 모두 종전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 간 갈등이 격렬한 한편, 지역적 충돌들도 증대하고 있다.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과 반제국주의 정치는 세계적 불평등과 전쟁으로 얼룩진 오늘의 세계를 제대로 알고 맞서는 데 여전히 훌륭한 지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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