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부하린의 제국주의론과 오늘날의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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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전쟁과 혁명의 시대가 낳은 이론
1914년 8월, 유럽 사회주의자들은 역사적 선택의 기로에 섰다. 제2인터내셔널이 수십 년간 전쟁 반대를 맹세했지만, 독일 사회민주당은 전쟁 공채에 찬성했다. 프랑스 사회당(SFIO)은 ‘혁명적 프랑스 수호’를 내걸었고, 영국 노동당도 참전 지지로 돌아섰다. 레닌이 이 소식을 처음 듣고 이를 ‘가짜 뉴스’로 의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만큼 충격적인 배신이었다.
이런 시대적 맥락에서 니콜라이 부하린의 제국주의론이 탄생했다. 1915년 저작 《세계경제와 제국주의》는 전쟁이 자본주의의 내재적 논리에 따라 필연적으로 귀결됨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려 했다. 레닌이 이 책의 초고에 서문을 쓰고, 이듬해 자신의 《제국주의론》에 부하린의 분석을 대거 차용한 점은 이 저작의 가치를 잘 보여 준다.
부하린은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분석한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들을 세계경제 차원으로 확장했다. 그는 제국주의가 우연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등장하는 필연적 산물임을 논증하려 했다. 이 글은 부하린 제국주의론의 핵심 개념인 세계경제,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 자본의 국제화와 ‘국가화’(자본과 국가의 융합 그리고/또는 자본 축적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 개입 확대) 사이의 모순, 전쟁의 불가피성을 추적한다. 또한 카우츠키 및 레닌의 분석과는 어떤 관계였는지 살펴본다. 나아가 부하린 이론의 현재적 함의와 한계도 검토한다.
2. 세계경제: 분석의 출발점
부하린 이론의 출발점은 자본주의를 국민경제가 아닌 세계경제로 파악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값싼 상품은 자본주의의 강력한 대포’라며 자본주의가 지구 전체를 재편한다고 지적했다. 생산자는 어디서든 국제시장의 압력을 피할 수 없다. 자본주의 경제는 본질적으로 경쟁하며 지리적으로 팽창한다. 이는 다른 사회 조직 형태를 침식하고 파괴한다.
부하린은 이 전제를 받아들이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세계경제가 개별 국민경제의 총합이 아니라 자체 논리를 지닌 무질서한 통일체라고 규정한다. 마치 개별 기업이 국민경제의 일부이듯, 각 국민경제는 세계경제 체계의 일부에 불과하다. 따라서 근대 국민경제들 사이의 투쟁은 무엇보다 세계경제의 다양한 경쟁적 부분들 사이의 투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 세계경제는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집중과 집적 법칙의 산물이다. 마르크스는 경쟁과 위기가 자본의 집적(개별 기업이 생산수단에 투자하며 성장하는 과정)과 집중(소수 자본가가 경제의 점점 더 큰 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낳는다고 분석했다. 이 과정이 심화되면 독점이 형성되고, 독점 기업들은 시장의 논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비튼다. 산업 스파이, 원자재 통제, 신용 접근 차단 등 온갖 경제 외적 수단이 동원된다.
이 과정은 국가기구와 긴밀하게 맞물린다. 마르크스가 이미 지적했듯이, 자본의 집중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통합을 낳는다. 독립적이고 느슨하게 연결된 각 지방들이 하나의 국민국가로 통합되며 하나의 정부, 하나의 법전, 단일한 국가적 계급 이해, 하나의 관세 구역이 형성됐다. 국가와 시장은 겉으로는 종종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이 둘의 구조적 연계를 포착했다. 상품 교환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행위조차 법적 관계, 즉 강제력을 가진 외부 권위를 전제로 한다.
3. 국가자본주의: 핵심 개념의 정초
자본의 집중·집적이 독점의 형성으로 이어지면, 독점 자본과 국가 권력의 융합이 심화된다. 부하린은 이것을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라고 불렀다. 국가자본주의는 어떤 국민경제가 세계경제의 경쟁 압력에 맞서 내부 자본들을 조직하고, 국가 권력을 동원해 그 자본들의 이익을 집단적으로 관철시키는 경향을 가리킨다.
부하린이 분석한 국가자본주의는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된다. 첫째, 생산과 기술의 차원에서 그것은 자유시장의 무정부성을 국가 통제로 대체하는 것을 뜻한다. 생산과 분배가 일정 수준 조직된다. 둘째,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국가자본주의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한 형태다.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와 노동력을 판매하는 노동자 사이의 근본적 자본-임노동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금융자본 하에서는 개별 자본가의 사적 소유가 집단적 자본가 소유로 대체될 뿐이며, 국가자본주의는 이 집단적 자본가 소유의 최고 형태다. 셋째, 국제관계 차원에서 국가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경쟁의 심화를 뜻하며, 이는 경제 전쟁의 준비와 장차 무력 전쟁의 위험을 증폭시킨다.
국가는 단순히 일반적 착취 조건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잉여가치의 생산자이자 착취자로서 직접 행동한다. 부하린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국가권력은 거의 모든 생산 부문을 흡수하며, 국가는 일반적인 착취 과정의 조건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점점 더 직접적 착취자가 돼 집합적 자본가로서 생산을 조직하고 지휘한다.
이 분석이 갖는 중요한 정치적 함의는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관한 것이다. 부하린에게 국가는 어떤 자율적 힘이 금융자본과 독점자본에 의해 포획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가장 중요한 정치 조직이며, 그 본질적 기능은 피억압 계급에 대한 착취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있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국가 장치를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없다. 이 결론은 후에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발전시키는 명제의 선구가 됐고, 실제로 레닌은 처음에는 부하린의 분석에 반대했다가 나중에는 이를 수용했다. 1
레닌의 파트너 크룹스카야는 1917년 여름 “그는 국가 문제에 관해 더는 부하린과 이견이 없다”고 말한다. 1917년 여름 도피 중이던 핀란드에서 《국가와 혁명》을 집필한다. 이 책에서 레닌은 부하린의 주장대로 “부르주아 국가 기구는 분쇄돼야 한다”는 점을 핵심 명제로 내세운다.
4. 모순된 두 가지 경향(자본의 국제화와 국가화)의 통일
부하린 제국주의론의 정수는 현대 자본주의가 모순되는 두 가지 경향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통찰이다. 한편으로는 자본의 국제화 경향이,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국가화’ 경향이 작동한다. 이 두 경향은 서로를 보완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밀어내는 관계다.
자본의 국제화는 생산, 무역, 투자가 국경을 넘어 세계적 규모로 조직되는 현상이다. 국제 분업이 심화하고 자본시장이 통합되며 다국적기업이 등장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본의 국제화 과정은 자본과 국가의 유착을 더욱 촉진한다. 기업 간 경쟁이 국가 규제 산업 간 경쟁으로 바뀌면서 국가는 자국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골적인 행위자가 된다. ‘미국 석탄’이나 ‘일본 자동차’처럼 국가 단위로 국제 경쟁을 논하는 것이 이 경향의 표현이다.
이 두 경향의 모순된 통일이 제국주의를 낳는다. 세계경제 수준에서 경쟁은 자원과 세력권을 둘러싼 끊임없는 다툼을 수반한다. 국내 경쟁은 지역·국가·국제 차원으로 판을 넓힐 수 있으나, 제국주의적 경쟁 수준에 이르면 더는 상위 수준으로 옮겨 갈 곳이 없다. 이것이 전쟁이 자본주의의 내재적 법칙이 되는 이유다. 부하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이 세계경제 영역으로 확대되면 전쟁은 경쟁의 한 방법이 된다. 전쟁은 세계시장 법칙의 압력 아래 상품 생산 사회의 내재적 법칙이 된다”고 썼다.
군사력은 국제적 성공을 가르는 최종 결정자다. 자국 산업이 세계 평균보다 생산성이 낮거나 비용이 높을 때 정부는 수입 관세를 부과하고, 강대국은 경쟁국에 제재를 가해 그 경제를 마비시킨다. 이런 관세와 제재는 경제 전쟁의 행위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군사력이 국제적 성공을 결정짓는다. 19세기 말까지 세계의 대부분이 분할되고 글로벌 생산·무역 체계가 수립되면서, 많은 영토를 갖지 못한 국가는 자연자원이나 대량의 국내 노동력 없이는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는 자원의 강제적 재분배 문제를 제기했고, 그것은 오직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다. 1914년 독일이 직면했던 상황이 바로 그것이었다.
5. 카우츠키 비판: 초제국주의론의 환상
부하린의 이론적 논적은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아마 가장 영향력 있는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카를 카우츠키였다. 카우츠키는 전쟁 개전 전에는 전쟁 공채를 개인적으로는 반대하면서도 공개적 비판은 거부했고, 나중에는 ‘민주주의’ 독일이 ‘전제주의’ 러시아에 맞서 방어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개전 후 1년이 지나 독일의 팽창적 야욕이 분명해진 뒤에야 비로소 카우츠키는 공개적으로 전쟁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이 자본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세계경제가 국제적 차원에서 통합돼 가면서 전쟁은 자본주의 체제의 관점에서 비합리적인 것이 됐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카우츠키는 ‘초제국주의’론을 제시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세계대전의 결과로 최강국들의 연방이 형성돼 군비 경쟁을 포기하는 단계가 올 수 있다. 즉, 자본주의적 국제화가 심화되면 자본가들은 전쟁의 비용과 손실을 피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협력하는 일종의 세계 카르텔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우츠키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20년 국제연맹 창설을 이 초제국주의로의 변화의 일환으로 봤다. 이는 레닌이 국제연맹을 “인도주의라는 가면을 쓴 제국주의 강도들의 소굴”이라고 부른 것과 대조된다.
부하린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세계 수준의 경쟁은 자원과 세력권을 둘러싼 끊임없는 경합을 낳는다. 경쟁이 더 높은 수준으로 격상될 수 없는 상황, 즉 국가 단위의 자본 블록들이 “무장하고 언제든 서로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게 된 상황에서 카우츠키가 상상한 “평화로운 국가들의 협주”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국제국가나 세계 정부는 행성 간 경쟁으로 무대가 옮겨질 때나 가능하다.
역사는 부하린의 손을 들어줬다. 국제연맹은 강대국 사이의 이해관계를 봉합하지 못했다.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세계는 훨씬 야만적인 제2차 세계대전에 휩쓸렸다. 코민테른은 국제연맹의 평화 기치를 위선으로 규정했다. 이를 ‘제국주의적 장물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신성동맹’이라며 신랄하게 공박했다. 무솔리니의 말처럼 “국제연맹은 참새들이 소란을 피울 때는 잘 작동하지만, 독수리들이 싸울 때는 전혀 쓸모가 없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국제법과 유엔의 승인을 무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6. 레닌과의 대화: 공명과 긴장
부하린의 《세계경제와 제국주의》는 레닌의 《제국주의론》보다 약 1년 앞서 쓰였다. 레닌이 이 책의 초고를 읽고 1915년 12월 서문을 쓴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레닌은 이 분석을 지지하면서도 자신의 이론적 관심은 다른 방향에 집중했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제국주의의 다섯 가지 본질적 특징을 중심으로 구성된 개설서라면, 부하린의 저작은 제국주의의 기저 역학을 체계적으로 해명하려 했다.
그런데 1918년 초 러시아 내전 상황에서 두 사람 사이에 국가자본주의를 둘러싼 긴장이 발생했다. 혁명은 성공했지만 당시 러시아 경제는 파탄 상태였다. 레닌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독일의 전시 경제 체제에 주목했다. 독일은 전쟁을 위해 국가가 모든 자본을 효율적으로 통제했다. 레닌은 이를 ‘국가자본주의’라 부르며 “우리가 배워야 할 모델”로 제시했다. “러시아는 너무 뒤처져 있다. 소규모 장사꾼들의 무질서보다는 국가가 통제하는 대기업, 즉 국가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가는 길목에서 더 진보적인 단계다.”
부하린과 그의 분파인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레닌의 이런 입장에 경악했다. 그들에게 국가자본주의는 타도해야 할 제국주의의 완결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가를 분쇄하기 위해 혁명을 했다. 그런데 다시 국가가 자본을 관리하는 체제로 돌아가자고? 이는 노동자를 국가의 부품으로 만들고 부르주아 전문가에게 머리를 숙이는 꼴이다.” 부하린은 《코뮤니스트》 4월호에 〈현대 경제학의 몇 가지 기본 개념들에 대해〉라는 논문을 발표해 레닌의 입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국가자본주의 수용이 혁명의 순수성을 더럽힌다고 비판했다. 자본주의의 가장 고도화된 형태인 국가자본주의를 혁명의 도구로 쓸 것인가(레닌), 아니면 즉각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것인가(부하린)? 혁명 초기의 처절한 고민이 응축된 논쟁이었다. 당시 레닌은 부하린을 향해 “국가론은 잘 알지만, 경제 실무는 깡통이다”라고 꼬집었다.
부하린의 주장은 당시 러시아 현실에서 비현실적이었고, 레닌의 주장도 내전으로 강제 종료됐다. 백군이 곡창지대를 점령해 도시가 굶주리고 기업주가 태업하자, 레닌은 1918년 6월 국가자본주의를 포기하고 ‘전시 공산주의’로 급선회했다. 국가는 모든 상거래를 금지하고 물자를 배급했으며, 작은 공장까지 모두 몰수했다. 국가자본주의를 혐오한 부하린에게 ‘전시 공산주의’는 진정한 공산주의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3년 뒤 부하린이 신경제정책(NEP)의 옹호자가 된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혁명이 해외로 확산됐다면 이 모순도 해결됐겠지만, 현실에서 이 논쟁은 후진국 혁명의 핵심적 모순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따라서 국제적 차원의 연속 혁명이 요구된다.
7. 이론의 현재성과 한계
부하린 이론에는 약점도 있다. 그는 국가자본주의 형성 경향을 실제보다 완결된 것으로 파악해, 내부 모순을 간과하고 외부 위기만 중시했다. 이 점에서는 레닌이 옳았다. “독점은 특정 산업에서 창출되는 무정부성을 전체 자본주의 생산에서 심화시키고 강화한다.”
또한 부하린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으킨 위기의 깊이를 과대평가해 임박한 전반적 붕괴를 예견했다. 그의 논리는 대략 이렇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위해 끊임없이 확장해야 하나 지구 전체가 이미 열강에 의해 분할됐다. 더는 확장할 공간이 없어 열강은 서로의 몫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국주의 전쟁은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체제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과정이며 그 끝은 자본주의의 전반적 붕괴다.
그러나 이 분석은 자본주의의 적응력과 회복력을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실제로 1920년대에 자본주의는 붕괴하지 않았고 일정한 경기 회복이 전개됐다. 부하린은 위기를 일시적 격화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의 전조로 과잉 해석한 셈이다.
또한 부하린은 전시 체제를 분석하면서 국가가 경제 전체를 단일하게 통제하는 구조가 형성된다고 봤다. 그 구조 속에서 국가는 기업을 철저히 통제하고 노동을 징발하며 생산을 꼼꼼하게 지휘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가 진화한다고 봤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자본주의 국가 내부에 총체적 통제를 방해하는 정치적 모순들이 존재했다. 군수산업 자본가와 소비재 자본가,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이해관계가 충돌했고 각자는 국가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국가가 이들을 완벽하게 단일한 방향으로 조율하기란 당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동맹국 및 중립국과의 관계, 금융 신용도의 유지 필요성 등은 국가의 경제 통제를 외부에서 제약했다.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와 법적 절차는 국가의 자의적·전면적 개입에 제동을 걸었다. 또한 아무리 전시 총동원 체제라 해도 노동자들의 파업, 태업, 정치적 반발은 국가의 통제 범위를 제한했다.
부하린은 전쟁이 이런 마찰들을 일시적으로 억누르는 현실을 보면서, 국가가 자본주의를 완전히 장악하는 방향으로 수렴한다고 과잉 일반화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이 모순들은 다시 표면으로 올라왔고 총체적 국가 통제는 실현되지 않았다.
캐나다의 마르크스주의자 데이비드 맥낼리는 부하린이 20세기 초 자본과 국가의 통합이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시기를 자본주의 발전의 내재적 경향으로 과도하게 일반화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국가와 자본의 관계가 유동적으로 변했다는 점에서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핵심은 그 관계가 유동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국가와 자본이 여전히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이다. 설령 거대 기업들이 특정 국민국가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보여도, 위기가 닥치면 자국 국가에 손을 벌린다. 화웨이와 5G를 둘러싼 미·중 충돌은 개별 기업 간 경쟁이 아닌 국가 간 경쟁임을 보여 준다.
더구나 부하린 이론이 갖는 정치적 함의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국가자본주의와 국유화를 사회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임금 노동의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요소를 제거하지 않으며, 사회의 계급 조직을 그대로 남겨 두기 때문이다.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라는 비꼬는 표현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은행 구제를 가리켜 쓰였을 때, 부하린의 분석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으로 다시 살아났다.
8. 오늘의 세계를 분석하는 도구
부하린의 제국주의론은 단순한 역사적 문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세계 질서를 분석하는 데에도 유효한 방법론적 도구다. 현재 세계 패권을 둘러싼 미국, 중국, 러시아의 구도는 부하린이 100여 년 전 개념화한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들 사이의 경쟁’이라는 틀로 정확하게 포착된다. 이 세 국가는 부하린의 분석이 예측하는 패턴을 뚜렷하게 구현하며, 그 상호작용은 21세기 제국주의의 전형적 지형도를 이룬다.
물론 부하린이 살았던 1910년대와 지금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핵무기의 존재, 경제적 상호의존의 심화, 기후 위기라는 새로운 변수가 추가됐다. 그럼에도 경제적 경쟁이 지정학적·군사적 대결로 전환된다는 부하린의 핵심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1) 미국: 쇠락하는 헤게모니와 제국주의의 구조적 강박
부하린의 이론으로 볼 때, 가장 우세한 제국주의 강대국은 현상 유지를 통해 이익을 얻는다. 기존 세계 질서의 규칙과 제도를 자신이 설계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이 구축한 브레턴우즈 체제, 달러 기축통화 제도, WTO, IMF, 세계은행은 모두 미국 자본의 이익을 국제적 규범으로 관철하는 제도적 장치들이다. 국제법과 자유무역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내용은 미국 국가자본주의의 세계 지배다. 달러가 기축통화 노릇을 하는 한 미국은 사실상 무한정의 신용을 누리고, 미국 재무부 채권이 세계의 안전 자산으로 통용되는 한 미국은 구조적 이점을 향유한다. 체제 자체가 그렇게 짜여 있으니, 가만히 있어도 이득이 굴러 들어온다는 뜻이다. 이 구조는 처음부터 ‘공정한 국제 경제 질서’가 아니라 미국 국가자본주의의 패권적 이익을 위해 설계됐다.
그러나 부하린은 세계 경제의 발전이 균등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했다. 후발 강국들은 기술을 도입하고 선진국을 추격하거나 추월할 수 있으며, 이 불균등 발전은 기존 세력 배분을 늘 불안정하게 만든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수립한 국제 질서는 바로 이 법칙에 의해 조금씩 잠식됐다. 서독과 일본의 전후 부흥, 신흥공업국들의 등장,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국의 “굴기(崛起)”가 미국 헤게모니의 경제적 토대를 잠식했다. 1990년대 초에만 해도 미국은 세계 GDP의 약 25퍼센트를 차지했지만, 중국의 부상과 함께 이 비율은 점차 하락했다. 제조업의 경우 미국의 세계 제조업 생산 비중 감소는 더욱 극적이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대응은 부하린이 예측한 논리를 교과서적으로 따른다. 경제적 우위가 약화되자 미국은 군사적 수단으로 패권을 유지하려 한다. 냉전 종식 후 미국 전략가들은 근본적 문제에 직면했다. 소련이라는 적이 사라진 상황에서 동맹국들이 왜 미국의 군사적 우산을 필요로 하느냐는 점이었다. 해답은 새로운 위협을 창출하거나, 아니면 군사적 주도권 자체를 통해 경쟁국들에 대한 레버리지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말 PNAC(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 보고서가 밝혔듯, 걸프만 석유 자원 통제는 미국 에너지 안보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유럽과 중국 등 경쟁국에 대한 에너지 지렛대를 확보하려는 목적이 컸다. 중동을 통제하는 자가 자신의 경쟁자들을 길들일 수 있다는 냉정한 계산이 그 배후에 있었다.
이것이 2003년 이라크 침공의 구조적 배경이다.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라는 명분은 구실일 뿐이었다. 핵심은 세계 2위 원유 매장국인 이라크를 지배해 중동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중국과 유럽에 대한 에너지 카드를 쥐려 했다. 이런 분석은 음모론이 아니다. 이라크 점령 당시 제이 가너 미군 사령관은 이라크를 ‘중동의 석유 보급 기지’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는 부하린이 분석한 제국주의 논리를 당사자가 스스로 확인해 준 셈이다.
클린턴부터 바이든까지 이어지는 나토 확대, 아시아 중심축 이동, 이란 봉쇄 등은 특정 지도자의 이념이 아니다. 이는 미국 국가자본주의의 구조적 요구를 반영한다. 오바마가 이라크 철군을 계승하면서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확대하고 드론 공격과 공습을 감행한 것은 기질 차이가 아니다. 구조적 강박의 표현이다. 부하린과 레닌의 언어로 말하자면, 제국주의는 정책 옵션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한 단계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에서 보듯, 군사적 과잉확장은 역설적으로 패권의 약화를 가속한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겪은 20년간의 수렁은 수조 달러의 재정을 소진했다. 이는 미국의 대외적 신뢰를 손상시켰고 국내 정치의 균열을 심화했다. 일찍이 베트남에서도 그랬듯이, 군사적 개입의 실패는 ‘제국의 과잉확장’의 역설적 결과다. 군사력으로 패권을 유지하려다 오히려 패권의 물질적 기반을 소진하는 것이다. 부하린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현재의 전쟁이 끝나면 새로운 문제들이 칼로 해결돼야 할 것이다”라고 쓴 것처럼, 미국도 한 전쟁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다음 전쟁의 논리적 필요에 직면했다. 이 끝없는 군사 개입의 순환 자체가 미국 패권 쇠퇴 메커니즘의 일부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미국 내부에서도 부하린이 말한 국가자본주의적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와 반도체법(CHIPS Act)은 사실상 반도체·청정에너지·전기차 산업에 대한 대규모 국가 보조금 지급이다. 이는 자유무역과 시장경쟁의 미사여구를 유지하면서도 현실에서는 국가가 전략 산업을 직접 육성하는 국가자본주의적 산업 정책의 전형이다. 부하린이라면 이를 세계경제의 경쟁 압력에 응답하는 미국 국가자본주의의 자기 강화 운동으로 파악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산업 정책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은 차이가 거의 없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과 바이든의 보조금 정책은 방법만 다를 뿐, 목표는 같다. 중국과의 첨단기술 패권 경쟁에서 미국 자본의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2) 중국: 신흥 국가자본주의의 구조와 확장 논리
중국은 부하린의 국가자본주의론이 가장 선명하게 적용되는 현대적 사례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자국 체제를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혹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이 미사여구는 부하린이 날카롭게 비판한 바로 그 혼동을 재현한다. 국유화, 즉 국가 통제를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착각이 그것이다. 부하린이 1918년 논문에서 강조했듯, 사회주의의 기준은 국가가 생산을 통제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계급이 국가를 통제하느냐다. 중국 공산당은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집단적 자본가 역할을 한다. 임금 노동이 존재하고, 잉여가치가 추출되며,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돼 있다. 국가 소유든 민간 소유든, 자본주의의 근본적 관계는 온전히 작동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중국 경제 구조는 당-국가가 금융 시스템과 핵심 국유기업을 직접 통제하며 동시에 민간 자본을 포괄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시진핑 시대 이후 국유 부문 역할은 더욱 강화됐고 민간 기업도 당 위원회 설치와 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알리바바, 텐센트, 디디추싱 등 거대 플랫폼 기업 규제 강화는 단순한 반독점 조치가 아니라 민간 자본이 당-국가의 전략적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신호였다. 이는 부하린이 말한 국가자본주의 특성, 즉 “부르주아지의 최고 권력”으로서 국가가 다른 형태로 구현됐다. 여기서 당-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집단적 의지를 표현하는 조직 역할을 한다.
중국 확장 논리도 부하린의 분석 틀에 정확히 부합한다. 급속한 경제 성장은 원자재, 에너지, 수출 시장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렸다. 이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세계적 확장이 일대일로(BRI) 구상의 경제적 동력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유럽에 걸쳐 항만, 철도, 도로, 에너지 인프라에 투자해 중국은 원자재 공급망과 수출 시장을 동시에 확보하고자 한다. 스리랑카 함반토타 항구, 파키스탄 과다르 항구, 지부티 해군 기지는 이 전략의 가시적 결과물이다. 이는 19세기 말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분할한 것과 형태는 다르지만 논리는 동일하다는 점을 부하린은 조금도 놀랍지 않게 여겼을 법하다. 세력권 확보를 위한 자본 수출과 인프라 투자는 제국주의의 새로운 형태다.
중국 국가자본주의 작동 방식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기술 패권 경쟁이다. 부하린은 독점이 형성되면 경제적 경쟁이 경제 외적 수단을 동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봤다. 오늘날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컴퓨팅, 5G 통신, 우주 기술은 단순한 산업 부문이 아니라 군사력의 결정적 요소이자 미래 세계경제의 기반 인프라다. ‘중국제조 2025’와 후속 전략은 핵심 기술에서 세계 표준을 장악하겠다는 국가자본주의적 야망의 표현이다. 국가가 막대한 보조금과 정책 금융을 동원해 전략 산업을 육성하는 이 방식은 부하린이 1910년대 독일과 미국의 강력한 무역 장벽 구축을 분석하며 서술한 내용과 본질적으로 같다. 당시 철강·화학·전기 산업이 지금의 반도체·AI로 바뀌었을 뿐이다.
미국과 중국의 충돌은 두 국가자본주의 사이의 세력권 재분할 투쟁이다. 화웨이와 5G를 둘러싼 분쟁은 표면적으로 기업 간 시장 경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차세대 통신 인프라 지배를 둘러싼 국가 간 전략 투쟁이다. 미국이 동맹국을 압박해 화웨이 장비를 배제한 것은 기술 안보 문제이자 세계 통신 인프라 표준을 미국 기업이 장악하려는 경제적 이해관계의 표현이다. 반도체 공급망을 둘러싼 미국의 대중국 수출 통제는 더 노골적이다. 최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와 설계 소프트웨어 수출을 막아 중국의 첨단 반도체 자급 능력을 봉쇄하는 것이 목표다. 이것은 부하린이 말한 “원자재 통제를 통한 경쟁자 배제”의 21세기 버전이다. 이에 맞서 중국이 희토류 수출 무기화를 위협하는 것도 같은 논리의 거울상이다. 경제적 경쟁이 비군사적 형태의 전쟁으로 전이되는 과정이 여기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남중국해 문제는 이 경제적 경쟁이 직접적 군사 긴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중국이 남중국해 암초를 인공섬으로 만들고 군사 시설을 건설하는 것은 해저 에너지 자원과 전략적 해상로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려는 시도다. 미국이 이에 대응해 항행의 자유 작전을 펼치고 해군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이 해상로에 대한 중국의 지배 시도가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이해관계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부하린이 지적했듯, 요충지를 둘러싼 강대국 간 각축은 언제나 경제적 경쟁의 군사적 표현이었다.
(3) 러시아: 주변적 제국주의의 구조와 우크라이나 전쟁
러시아는 부하린의 틀에서 가장 복잡하면서도 비극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에너지 의존적 경제와 강력한 핵무력, 취약한 제조업 기반이 결합한 비대칭적 구조의 독특한 행위자로 존재했다. 러시아의 경제 규모는 한국보다 약간 크고, 이탈리아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군사력과 핵전력은 세계 2위권이다. 이 비대칭성이 러시아 제국주의의 근본적 딜레마이며, 러시아 제국주의가 특히 공격적인 형태를 띠는 이유다.
부하린의 분석 틀로 볼 때 러시아는 매우 특수한 종류의 국가자본주의다. 1990년대의 “충격 요법”(소련 붕괴 후 단기간에 시장경제로 전환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시행했던 급진적 경제 개혁)과 대대적 사유화 과정에서 소련의 국유 자산들은 소수 올리가르히들에게 헐값에 넘어갔다. 푸틴은 이 과정에서 형성된 에너지 부문의 올리가르히들을 부분적으로 재국유화하거나 국가의 직접 통제 아래 두면서, 에너지 수출로 발생하는 자원 수익을 국가 권력의 재원으로 삼는 방식을 확립했다. 가즈프롬과 로스네프트는 사실상 국가의 경제적 무기다. 여기서 국가와 자본의 관계는 서방 자본주의에서처럼 크리스 하먼이 말한 ‘구조적 상호의존’ 관계라기보다, 국가가 자본을 직접 조종하는 관계에 가깝다. 이것은 부하린이 “국가 권력과 금융자본의 지도적 집단이 점점 더 밀착하는 관계”를 맺는다고 말한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의 러시아적 변형이다.
이 구조의 취약성은 명확하다. 에너지 수출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국제 유가의 등락에 국가 재정이 직접 종속된다는 뜻이다. 2014년 이후 서방 제재와 유가 하락이 겹치면서 러시아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 취약성은 러시아가 군사력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하는 역설적 압력을 낳는다. 경제적 쇠약이 군사적 공격성으로 이어지는 이 유형은 부하린이 분석한 약소 제국주의의 행태와 닮았다. 이는 국내 경제의 취약함을 군사적 확장으로 상쇄하려는 충동이다. 20세기 전반기 일본 제국주의가 바로 이런 유형이었다.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지렛대로 삼아 정치적 양보를 끌어내는 방식은 부하린이 말한 “경제적 전쟁 행위”의 전형이다. 노르트스트림 파이프라인은 2022년 폭발 사건 이후 현재는 물리적으로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이를 통한 독일과의 에너지 관계는 단순한 경제 거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독일을 러시아 에너지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러시아에 대한 나토의 군사적 압박에 독일이 완충국 구실을 하도록 유도하는 지정학적 전략이었다. 러시아가 에너지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가격 인상이나 공급 차단을 통해 우크라이나, 발트해 연안 3국, 폴란드 등 인접국들에 정치적 압력을 가해 온 역사를 보면 분명하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은 이 모든 논리의 군사적 귀결이자, 부하린의 제국주의 분석이 예측하는 패턴의 가장 극단적 표현이다.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의 전통적 세력권을 잠식한다는 인식 아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서방 진영으로 완전히 편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했다. 이것을 단순히 푸틴 개인의 야망이나 광기, 또는 러시아의 확장주의적 문화 유전자로 설명하는 것은, 부하린이 카우츠키의 ‘방어적 전쟁’ 담론을 비판할 때 지적한 바로 그 오류다. 즉, 세계 제국주의 체제에서 비롯된 구조적 원인을 개인적·문화적·이념적 요인으로 환원하는 오류다. 물론 푸틴 개인의 의사결정이 전쟁의 형태와 시기를 결정했다. 그러나 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압력은 한 사람의 의지 이전에 이미 형성돼 있었다.
냉전 종식 후 30년간의 과정을 보면 이 구조적 압력의 기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1990년대 나토가 동유럽으로 확장할 때 미국 등 서방은 러시아의 반발을 어느 정도 무시했다. 옛 소련 국가들의 나토 가입과 군사 인프라 확장은 러시아에 전략적 완충지대 상실로 인식됐다. 2008년 나토 정상회담의 조지아·우크라이나 가입 결정은 러시아를 자극해 조지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2014년 우크라이나 마이단 혁명과 러시아의 크름반도 합병은 이 긴장의 첫 폭발이었고, 2022년의 전면전은 그 논리적 연장이었다. 크름반도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이자 최종 종착지다. 이 역사적 연쇄를 보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푸틴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냉전 종식 후 누적돼 온 제국주의 경쟁의 산물이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 위 분석이 러시아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오해돼서는 안 된다. 침략은 명백한 자결권 침해이며, 우크라이나 민중이 겪는 고통은 실제적이고 극심하다. 부하린의 이론은 전쟁을 어느 일방의 도덕적 악으로만 환원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제국주의적 경쟁이라는 구조적, 곧 체제적 압력을 제거하지 않는 한 전쟁은 또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 우크라이나 민중은 강대국들 간 각축이 낳은 희생자이며, 이들의 자기결정권은 서방 제국주의의 위선적 논리에 의해서도 도구화되고 있다.
(4) 세 강대국의 삼각 경쟁: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적 무정부성
미·중·러 삼각 관계는 세계경제라는 ‘무질서한 통일체’ 속에서 국가자본주의가 각자 이익을 좇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삼각 관계는 단순히 두 개의 대결 진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중·러의 전략적 연대는 공동의 적에 맞선 편의적 동맹이지, 근본적 이해관계의 수렴이 아니다.
가령 상하이협력기구(SCO)를 통한 중러의 협력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한 것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미국 군사기지를 축출하는 데 양국이 협력한 것은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중국과 러시아는 겉으로는 아주 친한 척하며 손을 잡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테이블 아래에서는 서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 경쟁하고 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이 지역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여겨왔지만, 중국의 일대일로 투자가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깊숙이 파고들면서 영향력이 중국 쪽으로 넘어가는 추세가 뚜렷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고 러시아가 서방 제재로 약화될수록, 중앙아시아에서의 러시아 입지는 더 줄어들고 중국의 영향력이 그 빈자리를 채우는 역학이 진행된다. 이것이 중러 연대의 이면에 잠재한 모순이다.
오늘날 미국의 상대적 쇠퇴와 중국의 급속한 부상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긴장은 인류에게 전례 없는 위험을 내포한다. 핵무기 시대에 강대국 간 직접 충돌은 인류 문명의 존속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부하린의 경고, “새로운 문제들은 칼로 해결돼야 할 것이다”는 핵무기 시대인 오늘날 더욱 무겁게 들린다.
여기서 부하린의 카우츠키 비판은 현재적 형태로 되살아난다. 오늘날에도 ‘카우츠키주의자들’은 존재한다. 경제적 상호의존이 깊어져 미·중 전쟁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나, WTO·G20 같은 국제기구가 갈등을 평화적으로 조율하리라는 기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부하린이 카우츠키에게 가했던 비판, 즉 세계경제의 통합이 일국적 또는 지역적 자본 블록들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지 않는다는 점을 망각한다.
오히려 경제적 상호의존이 깊어질수록 핵심 기술·자원·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둘러싼 갈등은 더 날카로워지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의 공급망에 깊이 의존하게 될수록, 그 의존을 무기화할 유인도 커지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가 바로 이 역설의 산물이다. 그리고 미국이 이란의 석유를 통제하길 원하는 것도 중국과의 제국주의 경쟁을 겨냥한 또 다른 사례다.
9. 맺으며: 부하린의 유산
마이크 헤인스는 ‘두 명의 부하린’이 있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1920년대 이후 부하린은 스탈린의 충실한 동맹이었다. 그는 온건한 ‘일국 사회주의’ 건설 가정을 공유한 우파 분파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이론적 공헌을 배반했다. 반면 초기의 혁명가 부하린, 즉 제국주의와 국가, 이행기에 관한 탁월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는 지속적 가치를 지닌 저작들을 남겼다.
그 유산은 순전히 이론적인 것만이 아니다. 경제적 경쟁이 지정학적·군사적 대립으로 전이된다는 명제, 전쟁이 자본주의의 우연적 결과가 아니라 그 논리적 귀결이라는 명제, 국가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 혼동돼서는 안 된다는 경고, 이 모든 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제국주의도 존속한다는 레닌의 강조와 경제적 경쟁이 지정학적 대결을 낳는다는 분석 틀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국제정치를 이해하는 필수 출발점이다. 이는 현대의 위선적이고 복잡한 세계 질서를 인식하기 위한 기초다.
부하린은 자신이 세우는 데 기여한 국가에 의해 수감됐고, 1938년 총살당했다. 말년의 비극적 굴복과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가족을 구하려는 비굴한 몸부림은 청년 시절 정립한 정교한 이론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이 비극이 인생 전반기의 이론적 성취를 퇴색시키지는 않는다. “어떤 결론도 피하지 말고 끝까지 생각하라”는 그의 명령을 이론에 적용하면, 부하린의 제국주의론은 자본주의 세계 질서를 해부하는 강력한 도구로 남는다.
참고 문헌
- Stephen F. Cohen, Bukharin and the Bolshevik Revolu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 Michael Haynes, Nikolai Bukharin and the Transition From Capitalism to Socialism (Routledge, 2019).
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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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당시 27세의 청년 마르크스주의자 니콜라이 부하린은 〈제국주의 국가의 이론에 관하여〉라는 글을 썼다.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는 국가와 자본이 하나로 통합된 ‘국가자본주의적 트러스트’가 된다. 이제 국가는 단순히 자본의 도구가 아니라 자본 그 자체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이 국가를 인수해서 사용할 수 없으며, 반드시 분쇄해야 한다.
당시 스위스에 있던 레닌은 부하린의 원고를 보고 화를 냈다. 레닌은 부하린이 “어느 정도 아나키즘적”이라고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국가를 ‘장악’해서 노동자 국가로 변모시켜야지, 아나키스트처럼 무작정 ‘파괴’를 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부하린의 글을 자신이 편집하던 잡지에 싣는 것을 거부하고, 부하린의 이론적 미숙함을 질타하는 글을 발표했다. 부하린은 결국 뉴욕의 멘셰비키 계열 신문에 그 글을 실었다.
그러나 1916년 후반, 레닌은 취리히 도서관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국가론을 다시 꼼꼼히 연구했다. 이 연구 노트가 반년쯤 뒤에 출판된 《국가와 혁명》의 초안이 된 ‘청색 표지 노트’다. 그리고 레닌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마르크스가 1871년 파리 코뮌을 분석하며 “노동계급은 기존의 국가 기구를 그대로 장악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고 천명했던 것을 확인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