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이 보여 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생태학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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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 환경 보호, 생태 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 혁명이었다.
1908년 볼셰비키 과학자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가 쓴 소설 《붉은 별》에는 화성에 세워진 이상적인 사회주의 사회를 배경으로 에너지 위기를 걱정하는 두 화성인의 대화가 나온다.
스테르니라는 이름의 화성인은 지구인을 모조리 죽여 지구의 천연 자원을 갈취하자고 제안한다. 이 작품은 러시아 혁명 이전에 쓰였지만, 스테르니의 화성인 동료 네티는 사회주의자라면 “생명의 한 독자적 유형을, 되살릴 수도 대체할 수도 없는 그런 것을 통째로” 멸종시키자고 제안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스테르니를 호되게 비판한다.
소설 출간 9년 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차르 전제정이 타도됐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다.
혁명 러시아에서 가장 먼저 선포된 포고령 하나는 토지 공유화였다. 이후 삼림과 야생 생물에 관한 포고령으로 사냥과 벌채를 제약했다.
블라디미르 레닌 자신도 환경 보호에 관심이 많았고, 지리학자 블라디미르 수카초프가 쓴 습지에 관한 선구적 저작을 탐독했다.
혁명을 파괴하려는 백군에 맞서 전쟁을 하던 1919년에도 레닌은 시간을 내어 환경보호론자들과 만났다.
레닌은 볼셰비키 당원이자 교육인민위원[교육·과학·문화부 장관에 해당]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가 새로운 관점에서 자연을 다루는 것을 지지했고, 교육인민위원부가 환경 문제를 관할하도록 했다.
레닌은 루나차르스키의 “자포베드니크” 조성 노력을 고무했다. 자포베드니크란 연구 이외의 목적으로는 사실상 접근할 수 없는 자연 보호 구역이었다. 자본주의 나라들의 경우, 자연 보호 구역 지정의 제일 목적이 휴양지 조성인 것과 뚜렷이 대비되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1929년이 되면 러시아 곳곳에 약 61곳이 자포베드니크로 지정됐다. 총면적은 400만 핵타르에 이르렀다.
자포베드니크는 생태적 사고의 혁신을 낳았다. 볼셰비키 이전 생태주의자들은 주되게 식물과 토양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자포베드니크 덕에 과학자들은 생태계에서 동물이 수행하는 필수적 역할을 관찰할 수 있게 됐다.
자포베드니크 덕에,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학계에서 고립무원이던 생태학자 블라디미르 스탄친스키가 에너지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스탄친스키는 먹이사슬의 단계마다 에너지가 손실된다는 이론을 세웠다. 먹이사슬의 단계마다 매우 작은 에너지만 전달되기 때문에 먹이사슬 최상층 유기체 몫으로 남는 에너지가 매우 작고, 그래서 해당 생태계 내 포식자의 숫자가 제한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환경과학과 고고학의 기초인 “영양 단계” 모델의 바탕이 됐다. 볼셰비키는 스탄친스키의 이론을 받아들였고 스탄친스키는 소련 최초의 생태학 학술지의 편집자가 됐다.
서방에서는 연구 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지구과학자 블라디미르 베르나츠키 같은 사상가들이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베르나츠키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 재직하며 생물권(biosphere)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의 이론은 동식물에 의해 자연의 지질학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르 오파린 등 소비에트 생태학자들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이 있는 이론을 수립했다.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재배 식물의 기원을 발견했다.
생태학에 관한 이런 볼셰비키 전통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부상과 반혁명, 그리고 스탈린이 농학자 트로핌 리센코를 중용하면서 막을 내렸다. 리센코는 소련 내 생태학에 독재적 지배력을 행사했고,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관점에 따라 자포베드니크는 자연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키기 위한 도구로 변질됐다. 리센코에 반대한 바빌로프 같은 과학자들은 수감됐고 결국 이름도 없는 무덤에 묻혔다.
잠시였을지라도 러시아 혁명기에는 가능성이 만개했다. 과학의 잠재력이 폭발적으로 커졌고 인간의 인식을 제약하던 장벽들이 무너졌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생태학 전통은 혁명이 인류뿐 아니라 자연도 해방시킬 수 있음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