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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사망 70년:
스탈린은 반혁명의 화신이었다

70년 전인 1953년 3월 5일 소련 독재자 스탈린이 사망했다.

그는 1917년에만 해도 볼셰비키 혁명가였다. 그러나 1930년대의 스탈린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끔찍한 독재자가 됐다. 그의 결정으로 수천만 명이 희생됐다.

그의 이런 이력 때문에 스탈린이 저지른 범죄 행위들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상을 폄훼하는 근거로 흔히 제시된다.

반면 일부 좌파에게 스탈린은 여전히 ‘사회주의’ 소련의 위대한 지도자였고, 그가 이끈 소련은 서방 제국주의에 맞선 보루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의 패배가 낳은 산물이었다. 그는 1920년대 후반 반혁명을 이끌며 소련에서 혁명적 전통의 숨통을 끊었다.

스탈린은 어떻게 냉혹한 독재자가 됐는가

스탈린은 한때 혁명가였으나 이후 수많은 혁명가들을 살육하는 독재자가 된다

이오시프 주가쉬빌리(스탈린의 본명)는 1878년 그루지야(지금의 조지아)에서 가난한 구두 장인의 집에서 태어났다. 아들이 성직자가 되길 바란 어머니의 뜻을 따라, 스탈린은 그루지야의 수도인 티플리스(트빌리시)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안 돼 스탈린은 무신론과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볼셰비키 활동가가 됐고, 혁명적 활동을 하면서 투옥되고 유형지로 추방되기를 거듭했다. 스탈린은 1913년에 또 체포돼,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지내야 했다.

2월 혁명으로 차르가 물러난 후, 러시아에는 임시 정부가 들어섰다. 동시에 노동자들은 소비에트, 즉 노동자 평의회를 건설했다. 이원 권력 상황이 된 것이었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스탈린은 카메네프 등과 함께 볼셰비키 신문인 〈프라우다〉의 편집부에 들어가 임시 정부 지지 방침을 주장했다. 이때 그는 당내의 보수적 경향을 대변했다.

그러나 레닌은 이와는 다른 견해를 펼쳤다. 그는 임시 정부를 지지해선 안 되고,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세력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망명지에서 돌아온 레닌이 당내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자, 스탈린은 곧 견해를 바꿔 대세를 따랐다.

신흥 관료층의 중심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권력을 잡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회를 운영하게 됐고,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이 꽃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내외 상황이 혁명을 위협했다. 러시아 혁명의 미래는 독일 혁명을 비롯한 국제 혁명의 성공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국제 혁명은 실패했고, 혁명 러시아는 고립됐다.

다른 한편, 제국주의 열강과 러시아 국내 반동 세력이 혁명을 분쇄하려고 달려들었다. 이 전쟁에서 볼셰비키 정부는 가까스로 승리했다.

그러나 혁명을 성공시킨 노동계급이 전쟁과 기근으로 거의 와해돼, 노동자 권력의 기반이 무너져 버렸다. 전쟁을 치르면서 당과 국가는 관료화됐고, 관료층이 새롭게 형성됐다.

이렇게 혁명이 변질되면서, 이제 스탈린은 1917년의 혁명가가 아니라 신흥 관료층을 대변하는 인사가 됐다. 1920년대 중반만 해도, 그와 신흥 관료층은 당을 둘러싼 농민과 자본가 같은 상이한 계급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신흥 관료층은 국제 혁명은 잊고 매사가 안정적으로 굴러가기를 희망했다. 그들의 눈에, 국제 혁명은 자칫 자신들이 손에 쥔 국가기구를 위험에 빠뜨릴 도박으로 보였다.

1923년 독일 혁명이 패배하고 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스탈린은 국제주의를 부정하고 ‘일국사회주의’론을 주창했다. 국제 혁명 없이도 소련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즉 무계급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국사회주의론은 관료층의 입맛에 잘 맞았지만,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중대한 일탈이었다. 그리고 이는 소련 사회의 중대한 변화를 함의했다.

국제 혁명에 기대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소련은 서구 열강과의 군사 경쟁에 밀리지 않을 무장력을 갖춰야 했다. 이는 관료가 노동자와 농민을 무자비하게 희생시켜 막대한 잉여를 확보해야 함을 의미했다.

국가자본주의 반혁명

1928년 스탈린이 시작한 5개년 계획을 계기로 많은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 무렵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 뒤처져 있다. 우리는 10년 안에 그들을 따라잡아야 한다.” 군사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중공업 기반을 급속히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스탈린 정권은 농업을 강제로 집산화했다. 농민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무자비하게 제압했다. 수많은 농민이 희생됐다. 훗날 스탈린은 처칠에게 집산화 과정이 “1000만 명”을 처리한 “끔찍한 투쟁”이었다고 인정했다.

영국 같은 곳에서 산업화는 10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의 삶이 망가졌다. 잔혹하게도 스탈린은 그 과정을 소련에서 단 20년 만에 밀어붙였다.

그 과정에서 혁명의 성과들은 거의 다 제거됐다.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자체 조직과 실질적 권리를 상실했다.

스탈린은 1917년의 투사들 다수를 물리적으로 숙청했다. 많은 투사가 비밀경찰 감옥에서 고문당하고,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죽어 갔다. 1939년 소련공산당원 중 1917년 혁명 당시 볼셰비키 당원이었던 사람은 1.3퍼센트에 불과했을 만큼 숙청의 규모는 광범했다.

이렇게 스탈린은 소련에서 혁명적 전통을 파괴했다. 대숙청이 벌어지는 와중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살기가 더 좋아졌습니다, 동지들. 삶이 더 즐거워졌습니다.”

1917년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중에서 사형집행인 스탈린만 살아남았다

이후 소련은 어떤 점에서도 사회주의 사회라 볼 수 없었다. 스탈린이 이끄는 관료는 독자적 이해관계를 가진 지배계급으로 자리를 잡았고, 소련은 독재자가 지배하는 국가자본주의 사회가 됐다.

스탈린은 레닌의 후광을 업으려고 레닌 신격화에 앞장섰다. 그러나 소련의 현실은 레닌의 사회주의관과 완전히 대치됐다.

일례로 레닌은 기본적으로 국가를 계급 지배의 도구로 봤고, 노동자 국가는 계급 적대와 함께 소멸해 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1928년 이후 소련에서 국가는 인민에게 전제주의적 권력을 휘둘렀다. 그래서 스탈린은 사회주의가 오직 한 나라에 존재할 때는 국가가 강화된다는 궤변을 만들어 냈다.

스탈린이 만들어 낸 체제의 성격은 그가 죽었을 때에도 드러났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장례는 모스크바에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에 대한 개인 숭배가 넘쳐났다.

그러나 스탈린의 죽음을 계기로, 소련 곳곳의 강제수용소에서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정부는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 재소자를 대거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소련이 지배하던 동유럽에서 스탈린 체제에 맞선 거대한 저항이 분출했다. 1953년 6월 동독에서 임금 삭감에 대한 건설 노동자들의 항의로 촉발된 거대한 파업 물결이 일어났다.

동유럽 노동자들의 저항은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때 헝가리에서는 1917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노동자 소비에트가 등장했다.

소련군 탱크가 이 반란들을 진압했다. 하지만 대중 저항과 그 진압 과정은 스탈린 체제가 노동자 민주주의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 줬다.

국제 혁명의 무덤을 파다

스탈린주의 소련에서 대외 정책을 규정한 것은 제국주의적 경쟁이었다. 스탈린은 코민테른(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약칭)을 소련의 대외 정책에 종속시켰다. 그는 소련 바깥의 공산당들이 자국 정부에 소련과 우호적으로 지내라는 압력을 가하는 구실을 하기를 바랐다.

스탈린의 이런 정책은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 투쟁과 해방 운동의 패배를 초래했다. 1925~27년에 중국에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났을 때,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에 ‘진보적’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에 복종하라고 했다. 그 결과, 국민당에 의해 혁명이 분쇄됐다.

1934년부터 스탈린은 민중전선 정책을 폈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독일을 견제하려고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 손을 잡으려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각국 공산당에게 파시즘에 대항해 부르주아 정치 세력까지 포함한 모든 민주 세력의 대연합을 결성하라고 했다.

이런 계급 협력을 위해 공산당은 동맹 세력들이 놀라지 않게 노동계급의 행동을 통제해야 했다. 그 결과,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민중전선은 노동계급의 패배를 초래했다. 스탈린의 정책은 파시즘이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것이다.

옛 소련은 제국주의 국가였다

아직도 일부 좌파는 옛 소련이 서방 제국주의를 견제하는 균형추 구실을 하고, 제3세계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한 진보적 국가였다고 여긴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해 (공산당이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는) 중국에 대한 지지로도 연결되곤 한다.

물론 친서방 나라에 사는 좌파는 서방 제국주의에 우선 반대해야 한다. 자국 지배계급에 맞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스탈린의 소련도 국내에서 소수민족을 억압하고 대외적으로 서방 강대국들과 경쟁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스탈린은, 1945년 얄타와 포츠담 회담에서 루스벨트(와 그 후임자인 트루먼), 처칠과 함께 세계를 새로 분할하는 합의를 맺었다. 이들은 테이블 위에서 대중의 의사와 무관하게 각국의 운명을 결정했다. 이 합의를 위해 스탈린은 서방 세력권 안의 공산당들에게 자국 지배자들과 협력하라고 촉구했다.

스탈린은 소련이 독점할 수 있는 세력권을 확보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동유럽을 통제하고, 소련과 같은 체제를 이식했다.

스탈린은 제3세계 민족 해방에 대해서도 자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판단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정책이 이 점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스탈린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지지했다.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자국의 동맹국이 되기를 기대해서였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운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흔히 냉전은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로 여겨지지만, 실상은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적 충돌이었다. 두 강대국이 이끄는 진영이 서로 경쟁하면서 수많은 대리전이 벌어졌다.

한반도도 그 경쟁에 휘말렸다. 분단된 채 끝내 제국주의의 대리전 무대가 됐던 것이다. 1950~53년 한국전쟁의 참상에 미국 제국주의의 책임이 크지만, 스탈린도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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