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의 소련국가자본주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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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권력이 사라진 국가를 노동자국가라 부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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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이하 전진)은 옛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다. 노동자연대도 그렇다. 그래서 얼핏 보면 두 조직의 소련관 차이는 반혁명이 일어난 시점을 1928년으로 잡느냐 1930년대 후반으로 잡느냐 하는 문제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전진은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면서도, 그 이전 시기의 노동자국가 존속을 설명할 때는 정설 트로츠키주의의 판단 기준을 상당 부분 유지한다. 그 결과 노동자의 권력 상실을 서술하면서도 노동자국가는 존속했다고 주장하는 모순에 빠진다. 이 글은 토니 클리프와 국제사회주의 전통의 국가자본주의론에 기초해 이 모순과 그것이 오늘의 전략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한다.
노동자연대 지지자가 전진의 글을 읽는다면 맨 먼저 떠올릴 질문은 “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보는가”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이미 권력을 빼앗겼는데도 왜 그 국가를 그렇게 오랫동안 노동자국가(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보는가”일 것이다. 우리는 소련이 사회주의가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만으로 스탈린주의와 이론적으로 단절했다고 보지 않는다. 어떤 기준으로 노동자 권력의 존재와 소멸을 판단하는지, 혁명적 정당과 노동계급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생산력 발전과 노동자의 자기해방을 어떤 관계에 놓는지, 그리고 무엇이 한 사회를 자본주의로 만드는지가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본다.
국가자본주의 문제에는 소련에 어떤 딱지를 붙일 것이냐보다 훨씬 많은 것이 걸려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본질, 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 비판, 그리고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핵심으로 곧장 이어진다. 1 크리스 하먼의 말을 빌리면, 국가자본주의는 “실천을 이끄는 이론”이다. 2 그래서 이 글은 전진의 소련관을 역사 해석의 문제로만 다루지 않고, 그 소련관이 전진의 국유화 강령, 노동자정부 구상, 중국·북한 인식,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본다.
분석 대상과 전진의 입장
분석 대상 자료는 전진 온라인신문의 교육 자료 〈사회주의 기초학습 #7〉 사회주의 바로알기: 중국,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2025년 12월)와 3 2024년 2월 17일 제정된 전진의 기본강령과 대중투쟁강령이다. 4 교육 자료는 소련사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을, 강령은 조직의 공식 입장을 제시한다. 두 문서는 작성 시기와 성격이 다르므로 구별해 읽어야 한다. 기본강령은 10월혁명으로 수립된 노동자국가가 1920년대의 당내 민주주의 파괴와 관료화를 거쳐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관료집단의 반혁명을 통해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쓴다. 5 강령이 반혁명의 시점을 1930년대 중반으로 잡는다면, 교육 자료는 1936년 헌법, 1937년 대숙청, 1939년 당 대회를 잇는 과정을 서술한다. 이하에서는 이 차이를 염두에 두고 두 문서의 공통된 시기 구분을 ‘1930년대 중후반 전환설’이라 부른다. 따라서 진정한 쟁점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권리와 생산 통제가 이미 파괴되고 강제적 축적이 진행되던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상당 기간을 여전히 노동자국가의 시기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교육 자료에서 전진의 입장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1917년 혁명은 진정한 노동자국가를 세웠고, 이 국가는 내전과 신경제정책을 거치며 관료적으로 퇴보했다. 둘째, 1936년 헌법이 노동자 권력을 법률적으로 박탈했고, 1937년 대숙청이 반혁명을 물리적으로 완수했으며, 1939년 제18차 당 대회가 그 형식상 정점이었다. 셋째, 그 뒤의 소련은 관료가 지배계급이 된 국가자본주의였고, 노동계급이 국가의 부의 축적을 위해 착취당했다는 점에서 시장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공통된 결론이 가리는 이론적 모순
전진과 노동자연대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양쪽 모두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기해방과 연결하고, 소련·중국 등의 국가 소유를 사회주의의 충분조건으로 보지 않는다. 스탈린주의의 노동자 억압과 민족 억압을 비판하며, 관료적 명령을 민주적 계획과 구별한다. 국제주의를 국가의 지정학적 이익과 패권 유지에 종속시키는 것도 거부한다. 전진은 중국·북한·옛 소련 블록을 사회주의로 보지 않는다. 1989~91년의 이행을 지배계급의 연속 속에서 일어난 형태 전환으로 보고, 소련이 동유럽에 대해 제국주의적으로 행동했다고도 본다. 기본강령은 스탈린주의 관료를 “일종의 ‘집단적’ 자본가 계급”으로, 그 체제를 노동계급이 잉여가치를 수탈당하고 관료가 국유화된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추진하는 “축적을 위한 축적체제”로 규정한다. 6 전진은 이런 규정을 통해 반스탈린주의 입장을 표방한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론의 정식을 채택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분석까지 일관되게 수행한 것은 아니다.
전진의 교육 자료 마지막 부분도 다양한 노동자 정당의 존재, 노동자평의회, 대표 소환권, 정치파업과 집회·시위의 자유를 옹호한다. 여성과 피억압 민족 등 피억압자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노동자국가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산 현장의 노동자 자주관리와 민주적 계획의 결합도 강조한다. 이는 노동자연대가 제시하는 사회주의의 기본 조건들과 상당 부분 겹친다. 7
바로 이 공통점 때문에 전진의 모순은 더 선명해진다. 전진은 미래 노동자국가에 요구하는 민주적 기준을 과거 소련의 노동자국가 여부를 판정할 때는 끝까지 적용하지 않는다. 미래의 노동자국가에는 노동자평의회, 복수 정당, 소환권, 정치파업, 생산 통제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과거에는 이런 것들이 대부분 사라졌거나 심각하게 무력화된 뒤에도 노동자국가가 상당 기간 지속됐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이 제도들이 무력화된 뒤에도 노동자국가가 존속했다면, 노동계급의 지배는 어떤 관계를 통해 유지됐는가?
전진이 표방하는 자기해방 원리를 그 자신의 소련사 서술에 일관되게 적용하면, 노동자 권력이 사라진 뒤에도 노동자국가가 존속했다는 설명은 무너진다. 이것이 논쟁의 핵심이다.
강령의 공통분모와 이론적 정합성
강령에는 눈여겨볼 문장이 하나 더 있다. 구소련·중국·북한 체제에 “어떤 이름을 붙이든” 중요한 것은 그 체제가 타도돼야 할 반동적 체제라는 점과 고립된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며, “이 공통분모의 범위 내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경향은 하나의 당으로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8 이는 국가자본주의라는 규정을 제시하면서도, 그 규정에 대한 동의를 조직적 단결의 필수조건으로 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전진은 2022년 10월 통합사회주의조직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2024년 2월 본조직으로 출범했다. 9 서로 다른 경향의 통합이 이론적 절충의 배경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출범 경위만으로 특정 논증의 성립 과정을 단정할 수는 없다. 이 글은 통합 당사자들의 의도를 추정하기보다, 공표된 문서의 논리적 정합성을 검토한다.
전진의 시기 구분에는 선행자가 있다. 1936년 헌법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노동자국가)를 법률적으로 청산했고, 대숙청이 반혁명을 완수했으며, 1939년 제18차 당 대회가 그 형식상 정점이라는 주장이 그렇다. 1918년 당원 가운데 1939년에도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원의 약 10퍼센트만 당에 남아 있었다는 수치, 대숙청을 관료의 “예방적 내전”이라 부른 트로츠키의 말을 인용하는 것까지 같다. 이 논지는 교육 자료가 직접 인용하는 미국 마르크스주의자 월터 돔의 《스탈린주의의 삶과 죽음》(1990)에서 체계적으로 전개됐다. 따라서 돔의 책은 교육 자료의 논리를 검토하는 중요한 비교 대상이다. 물론 돔의 모든 주장을 전진의 공식 입장으로 보지는 않겠다. 10
따라서 비판의 핵심은 국가자본주의라는 결론 아래 노동자의 자기해방과 충돌하는 판단 기준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약점은 세 지점에서 드러난다. 노동자 권력의 판단 기준(제1부), 반혁명 시점(제2부), 자본주의 규정의 근거와 소련 경제의 특징·위기를 설명하는 방식(제3부)이다. 그리고 이 약점들이 과거 운동의 전략(제4부)과 오늘의 강령(제5부)에 어떤 함의를 갖는지 검토한다. 제6부에서는 이 차이들의 밑바탕에 놓인 더 근본적인 쟁점, 곧 정통성과 과학과 자기해방의 문제를 다룬다.
제1부 노동자 권력의 기준
1 노동자 권력과 혁명적 간부의 잔존
전진의 교육 자료는 스탈린의 강제 집산화와 산업화를 우호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노동자 민주주의의 파괴, 농민에 대한 폭력, 노동자의 생활수준 저하와 노동강도 증대, 강제수용소,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 후퇴를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11
그런데 바로 그 서술 안에 “스탈린과 관료들이 지배하는 노동자국가”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농민을 강제로 집단농장으로 내몰고, 노동자의 권리를 파괴하며, 노동자를 축적의 수단으로 삼는 국가가 여전히 노동자국가라는 것이다. 12
여기서 첫 번째 문제가 드러난다. 전진의 서술에서도 대숙청 이전에 노동자 통제를 약화시키는 중대한 변화들이 이미 진행됐다. 성과급이 확대되고 스타하노프 운동이 벌어졌으며, 노동규율과 이동에 대한 통제가 강화됐다. 좌익반대파도 1927~29년에 분쇄됐다. 따라서 대숙청 이전의 노동자국가 존속을 주장하려면,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의 지배가 어떻게 유지됐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렇다면 노동자국가라는 규정의 근거는 무엇인가? 노동자의 실제 생산 통제라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전진의 글 자체가 그 파괴를 서술하기 때문이다. 국가 정책이 노동자들의 생활 개선을 일관되게 지향했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국가적 축적을 추진했다고 한다. 국제 혁명을 촉진했다는 것도 아니다. 스탈린주의가 국제 혁명을 배신하고 좌절시켰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서술에서 결정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혁명에서 기원한 당과 국가의 연속성, 당 안에 남아 있던 혁명적 세대와 노동자적 요소들, 그리고 그 요소들이 대숙청으로 제거됐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전진이 인용하는 대목은 1939년에 이르러 노동계급의 “대리인조차” 권력에서 제거됐다고 설명한다. 13 돔의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돔도 노동자들이 이미 권력을 잃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는 1936년이면 노동자들이 소비에트에서 민주적 권리를 이미 잃었다고 쓰고, 14 1928~29년의 ‘대전환’, 곧 강제 집산화, 대규모 강제노동수용소 설치, 신경제정책(NEP) 민간 경제 폐지를 상세히 서술한다. 15 그렇다면 돔은 무엇을 근거로 1939년까지를 노동자국가라 부르는가? 그가 제시하는 결정적 표지는 제18차 당 대회 이후에야 노동계급이 권력 안의 “대리인(surrogates)”마저 빼앗겼다는 것이다. 16 뒤집어 말하면, 그 전까지는 노동계급이 권력을 쥐고 있지 않았어도 볼셰비키 전통을 지닌 당 간부층이라는 대리인이 남아 있었으므로 노동자국가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비판은 이 대리 관계를 겨냥한다. 노동자가 실제로 통치하는 것과 노동자 운동 출신 간부가 국가기관에 남아 있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혁명적 전통을 지닌 인물이 관료 국가 안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과 노동계급이 그 국가의 지배계급인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전진의 서술에서는 이 서로 다른 것들이 노동자국가의 존속이라는 하나의 결론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전진은 간부층과 노동계급 사이의 실제 통제 관계를 입증하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지배를 간부층의 존재로 대체하는 이 논리가 바로 대리주의다. 여기서 대리주의란 당이나 지도부가 노동계급의 통제를 벗어나 노동계급 스스로의 결정과 행동을 대신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전진 자신의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전진의 강령은 노동계급의 해방이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며”, 노동자국가의 본질은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사회를 지배하는 노동자계급”이라고 쓴다. 17 이 기준에서 문제는 대표나 위임의 존재 자체가 아니다. 노동자들이 대표를 통제하고 교체할 수 없는 상태를 노동계급의 지배로 간주하는 것이 문제다. 대리인의 존재를 노동자국가의 근거로 삼는 논리는, 정설 트로츠키주의의 핵심적인 정치적 난점, 즉 노동자가 아닌 다른 세력(소련 군대나 농민 게릴라)이 노동자를 해방해 줄 수 있다는 논리와 궤를 같이한다. 18 정설 트로츠키주의의 정식은 마르크스주의를 거꾸로 세웠다. 노동자국가인지 아닌지가 더는 노동자가 권력을 쥐고 있느냐가 아니라 소유 형태로 판정됐으며,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는 개념은 그림에서 빠져 버렸다. 그리고 그 논리를 1945년 이후 동유럽에 적용한 제4인터내셔널은 노동자들이 독립적인 권력 주체로 나서지 않은 채 수립된 정권들을 ‘기형적 노동자국가’라 불렀다. 노동자 자신의 권력 장악을 노동자국가 성립의 필수조건에서 빼 버린 것이다. 전진의 ‘대리인’ 논리도 간부의 혁명 경력으로 노동계급의 실제 통제를 대신한다는 점에서 바로 이 약점을 되풀이한다. 19
2 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의 지배 기반
노동자국가론의 전통적인 방어 논리는 부르주아 국가와의 유추를 사용한다. 부르주아지가 직접 정부를 운영하지 않아도 자본주의 국가는 존속한다. 가령 중간계급 운동인 파시즘이 국가권력을 장악해 부르주아 정치인들을 억압해도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다. 그렇다면 관료들이 노동자들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해도 국가는 여전히 노동자국가일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유추에는 두 계급의 지배 기반이 다르다는 문제가 있다. 부르주아지는 국가의 직접 운영에서 배제되더라도 국가 바깥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노동자를 고용하며 잉여 생산물을 전유하는 계급으로 존속할 수 있다. 그들의 경제적 지배는 일상적인 정부 운영에 직접 참여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집단적 소유와 통제를 실현한다는 것은 생산수단을 개별 노동자에게 사유재산으로 나눠 준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민주적 조직을 통해 생산과 사회를 집단적으로 통제한다는 뜻이다. 그 집단적·민주적 통제의 기관들을 빼앗기고 국가가 노동자들 위에 선 독립적 권력이 된다면, 노동자들에게 부르주아지의 소유에 해당하는 별도의 지배 기반이 남는 것은 아니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주창자 토니 클리프가 지적하듯, 생산수단이 국가에 집중된 사회에서는 경제적 통제와 정치적 권력이 긴밀하게 결합돼 있다. 20 노동자가 정치 권력을 잃은 시점과 사회 성격이 바뀐 시점을 거의 10년 가까이 벌려 놓는 전진의 구도는 이 융합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노동자 민주주의는 노동자국가의 부차적 요소나 그저 바람직한 정치 형태에 그치지 않는다.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으로 존재하는 구체적 방식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썼듯 노동계급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를 지배계급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며, 마르크스가 1871년 파리코뮌을 노동자국가의 싹(시초)으로 환영하고 레닌이 소비에트에서 노동자국가의 토대를 찾은 것도 이 때문이다. 클리프의 물음은 단순하다. 스탈린 치하 소련에 노동자국가의 무엇이 남아 있었는가? 국가 소유가 어떻든, 답은 ‘아무것도 없었다’이다. 노동자들이 국가를 통제하지 않는데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한다는 이유만으로 노동자가 권력을 쥘 수는 없다. 21
사회주의자에게 민주주의는 몇 년마다 투표하는 제도만을 뜻하지 않는다. 생산자들이 생산의 목표, 노동의 조건, 잉여 생산물의 사용, 국가기구의 구성과 활동을 실질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집단적 능력을 뜻한다. 그런 능력 없이 국가가 노동자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 노동자들과는 분리돼 설정된 노동자 이익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일이 된다.
따라서 전진 서술에 대한 핵심 비판점도 단순한 ‘민주주의 부족’ 문제가 아니다. 노동계급이 지배할 수 있는 사회적·정치적 형태가 1920년대 말에는 완전히 사라졌는데도 도대체 어떤 관계를 통해 그 계급의 지배가 계속됐다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3 헌법을 해석하는 기준
전진이 반혁명의 완수를 판정하는 표지는 세 가지다. 트로츠키를 따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법률적으로 청산한 것”이라고 보는 1936년 헌법, 물리적 사건인 대숙청, 제18차 당 대회에서 드러난 당원 구성의 변화다.
헌법, 숙청, 당원 구성은 모두 중요한 정치적 증거다. 그러나 어느 것도 그 자체로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확정하지는 못한다. 누가 생산을 통제하고 잉여를 전유하는지, 그 잉여의 용도가 어떤 압력에 의해 결정되는지와 연결해 해석해야 한다. 이는 정치적 권력을 생산관계와 분리하자는 뜻이 아니다. 국유 경제에서는 국가권력에 대한 통제가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와 직접 연결되므로, 법률상의 선언과 실제 권력관계의 변화를 구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진의 글도 1936년에 이르러 노동자들이 이미 소비에트에서 민주적 권리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인정한다. 22 그렇다면 헌법 개정은 권력 상실의 출발점이라기보다 이미 진행된 변화를 법적으로 공식화한 사건일 수 있다.
소유의 법률적 형태만으로 생산관계를 판정할 수도 없다. 사적 소유는 고대 노예제와 중세 사회에도 존재했으므로 자본주의만의 특징이 아니다. 반대로 법적으로 국유나 집단 소유의 형태를 취한다고 해서 생산수단이 생산자들의 사회적 소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사적 소유가 국유로, 시장이 계획으로 대체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노동자들이 생산과 국가를 실제로 통제하는지 물어야 한다. 소유 관계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법적 명의와 실제 지배 관계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23 24
트로츠키도 국가 소유를 사회주의적 소유로 보지는 않았다. 《배반당한 혁명》에서 그는 번데기가 곧 나비는 아니며 수많은 번데기가 나비가 되지 못한 채 죽는다고 비유했다. 국가 소유는 사회적 특권과 차별이 사라지고 국가의 강제가 불필요해지는 만큼만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며, 소련 국가가 인민의 통제를 벗어나 그 위에 군림할수록, 소련의 국가 소유를 사회주의적 소유로 보기는 어려워진다. 25 이것은 레닌의 기준과 같은 방향이다. 레닌에게 노동자국가는 출발부터 완전한 의미의 국가와 구별되는 반국가, 즉 사멸해 가는 국가다. 소련 국가는 사멸하기는커녕 줄곧 강화됐다. 26 1930년대 초에 이미 국가가 인민 위로 까마득히 올라서 있었다면, 트로츠키 자신의 비유로도 그 국가 소유는 나비가 되기는커녕 번데기 상태로 썩어 가고 있었던 셈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전진이 트로츠키의 헌법 해석을 빌리면서 그 해석이 무엇을 예측했는지는 버린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모스크바 재판과 스탈린 헌법을 사적 자본주의를 “합법적 수단”으로 부활시키는 조처로 봤다. 관료가 “은밀한 타격”으로 경제적 반혁명을 일으킬 길을 새 헌법이 열었다고 본 것이다. 27 그러나 1930년대 후반과 전후의 전개는 이 전망과 달랐다. 트로츠키는 관료 내 우파가 득세하면 전통적 자본주의가 복원되고 스탈린 분파는 좌우 사이에서 분쇄될 것이라고 봤다. 그는 관료를 계급이 아니라 ‘카스트’로, “프롤레타리아 위에 붙은 혹”으로 봤고, 혹은 아무리 커져도 독립된 유기체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1939년에는 “명예롭지 못한 몰락을 불과 몇 년 또는 몇 달 앞둔” 보나파르트 과두제에 새 지배계급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우스운 꼴이 될 것이라고 샥트먼을 반박했고, 1940년에는 장기전이 되면 소련 내부 모순이 “부르주아-보나파르트 반혁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썼다. 28 하지만 진정한 위협은 사적 자본주의의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관료적 지배계급의 부상이었다. 29 전쟁이 끝났을 때 실제로 일어난 일은 정반대였다(이 글의 제29절).
전진은 소련 관료가 새로운 지배계급이 됐다는 결론에서는 트로츠키와 결별한다. 그러나 노동자의 실제 권력 상실과 노동자국가의 소멸 사이에 긴 간격을 설정하는 판단 기준은 유지한다. “테르미도르 관료집단”, “예방적 내전”, “전체주의” 같은 용어의 공유보다 훨씬 근본적인 이론적 연속성이다.
돔은 이 난점을 “형태는 내용을 반영하지만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정식으로 풀려 한다. 스탈린주의 국가들에서 사회화된 형태는 “프롤레타리아적 과거의 잔재”이고, 지금은 자본주의적 내용이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국유 형식에 담긴 “프롤레타리아적 내용”을 부정한다며 클리프와 샥트먼을 비판한다. 30 이 정식은 국유라는 형식 자체가 프롤레타리아적 내용을 지닌다는 트로츠키 정설파의 전제를 버리지 않는다. 돔은 관료가 새로운 지배계급이 됐다는 점에서 정설파와 다르지만, 국유 형식에 프롤레타리아적 내용이 남는다는 설명에서는 공통된 전제를 유지한다.
트로츠키의 사고에는 결정적 전환점이 있다. 돔이 지적하듯, 1928~31년의 트로츠키는 노동자들이 당과 소비에트를 개혁으로 되찾을 수 있느냐를 노동자국가의 기준으로 삼았다. 되찾을 수 없다고 미리 답하는 사람은 새로운 당과 “두 번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31 그러나 트로츠키는 1933년에 소련 공산당(과 국제 공산당, 즉 코민테른) 개혁 노선을 포기했다. 나중에는 그 기준을 국유화와 대외무역 독점이라는 소유관계로 옮겼다. 32 돔 자신도 개혁 가능성이라는 1928년의 기준이 노동자국가 여부를 판정하기에는 “불충분”했다고 인정한다. 33 그러나 개혁 가능성만으로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판정할 수 없다면, 국유 형식이나 대리인의 존재만으로도 판정할 수 없다. 어느 기준이든 노동계급이 국가와 생산을 통제하는 실제 관계와 연결돼야 한다.
따라서 전진이 1928년 이후에도 노동자국가가 존속했다고 주장하려면 그 존속의 근거를 명확히 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실제 통제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1920년대 말의 변화에 답해야 한다. 국유 형식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대숙청 뒤에도 그 형식이 유지됐다는 사실에 답해야 한다. 혁명적 간부의 잔존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간부들과 노동계급 사이의 통제 관계를 입증해야 한다.
4 혁명의 잔재와 계급 지배의 구별
이 문제를 더 정밀하게 보려면, “노동자 혁명의 잔재”로서 노동자의 권리와 방어 능력을 노동계급의 지배권과 구별해야 한다. 어떤 사회는 혁명에서 비롯한 복지, 교육, 고용상의 보장, 평등주의적 언어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그런 것들은 노동자들이 방어해야 할 실제 성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과의 존재는 누가 생산과 국가를 지배하는지에 대한 답을 대신하지 못한다.
이 구별은 단순하지만 결정적이다. 노동자가 기업 경영자의 뜻을 일부 좌절시킬 수 있다고 해서 그 기업의 경영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국가의 일부 조치를 저지하거나 자신의 권리를 일정 정도 방어할 수 있다고 해서 그 국가의 지배계급이 되는 것도 아니다.
1928년 이전에는 소련 체제에 10월혁명이 남긴 조직적 제약이 일정하게 작동했다. 그때까지는 노동자들이 저항할 수 있었고, 노동조합과 당내 좌익반대파가 관료를 압박하고 제약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1928~29년 이후 노동조합을 국가에 완전히 통합하고 그 독립성의 흔적을 모두 없앴다. 34 그 뒤에도 노동자들이 국가의 일부 조치를 좌절시키는 일은 있었다. 그러나 국가가 노동자들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국가를 통제한 것은 아니다.
전진은 1928년 이후에도 소련에 노동자국가의 잔재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시장자본주의와 달랐던 점, 즉 해고가 자유롭지 않고 기업이 파산하지 않았다는 점을 든다. 주로 러시아 혁명이 남긴 이 잔재가 한편으로 노동자 권리를 지키는 수단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비효율을 유지시켜 성장을 둔화시켰다는 것이다. 35 이 설명도 돔의 것과 거의 같다. 돔은 스탈린 치하에서 자본주의의 작동이 “노동자국가의 사회주의적 잔재” 때문에 가장 심하게 뒤틀려 있다고 쓰고, 스탈린주의가 전통적 자본주의와 다른 점은 주로 “혁명적 노동자국가의 잔재”가 낳는 모순에서 온다고 본다. 36 에르네스트 만델도 혁명의 잔재와 관료의 억압을 대비해 설명한다. 만델은 소련 사회의 모순적 발전을 “역동성과 부동성의 결합”으로 설명하면서, 역동성은 “10월혁명에 남아 있는 것”의 산물이고 부동성은 관료의 목조르기 탓이라고 했다. 하먼이 지적한 난점은 시기별 성장의 차이다. 관료적 억압이 극심했던 스탈린 시대의 빠른 성장과 이후의 둔화를 단순히 ‘혁명적 잔재’와 ‘관료적 억압’의 대비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37
이 설명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경험적으로 더 나은 설명이 있다. 마이크 헤인스는 소련의 완전고용이 “생산하고 또 생산하라는 압력”에서, 즉 서방의 전시경제와 비슷한 조건에서 나왔다고 설명한다. 특히 스탈린 사후의 노동력 부족 속에서 노동자들은 이직을 협상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저들이 압력을 가하면 나는 그만둔다”는 말이 유행했다. 38 동시에 사회보장 급여가 근속 연수에 묶여 있어서 해고는 노동자에게 심각한 위협이었다. 고용 할당제에 따라 임시 거주 허가가 없는 허가를 받고 대도시에서 일하던 소련 내 이주 노동자 리미트치크 같은 노동자들은 농노처럼 기업에 매여 있었다. 39 이런 특징은 1917년의 유산만으로 설명하기보다 축적 압력과 노동력 부족이 결합한 노동 통제의 결과로 분석할 수 있다.
실업이 전혀 없었다는 주장도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다. 훗날 고르바초프의 최고 경제 자문이 되는 아벨 아간베갼은 1965년 노보시비르스크 경제·산업조직 연구소 소장 시절에 일부 주요 도시의 실업률을 8퍼센트, 소도시를 20~30퍼센트로 추산했다. 다만 국가가 임금 수준을 통제해 급속한 축적기에도 임금이 노동력 가치를 훨씬 웃돌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에, 기업들은 축적이 부진할 때도 장차 일손이 모자랄 때를 대비해 대량 해고보다 유휴 노동력을 기업 안에 유지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은 경제에 간접 비용(개별 기업의 부담을 덜어주는 사회화된 노동력 유지 비용)을 부과했지만, 그 점은 서구 자본주의의 사회복지도 마찬가지다. 40
돔 자신의 서술도 ‘혁명 잔재’론을 약화시킨다. 그는 소련 경영자들이 대량 해고로 노동자를 규율할 수 없다고 불평하는 모습을 소개하면서, 시장 지향적인 동구와 서방 사회민주주의 나라들 사이에 고용 안정성 면에서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쓴다. 그가 드는 사례는 스웨덴과 오스트리아다. 41 스웨덴의 고용 안정이 노동자국가의 잔재일 리는 없다. 고용 안정은 노동력 부족, 노동계급의 잠재적 저항, 지배계급의 안정 욕구가 결합해 나타나는 것이며, 소련의 경우 그 결합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은 군사적 경쟁 속의 쉼 없는 축적 드라이브였다.
둘째, 이론적으로 국가자본주의론은 이런 특징을 국가자본주의 자체의 성격으로 설명한다. 국가 운영자는 경기순환을 어느 정도 억제하고 기업의 붕괴를 금융 지원으로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손실 기업을 계속 지원하면 위기 때 자본의 가치가 파괴되고 재편되는 과정도 제약된다. 비효율적 기업이 인위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단기적 안정의 대가로 생기는 장기 침체 요인이다. 42 여기서도 돔은 스스로 다른 설명을 제공한다. 그는 독점 시대에는 대기업의 파산이 사회 불안정을 키우고 국민경제를 위협하므로 국가가 붕괴 위기의 대기업을 되살리는 일이 잦다고 쓰고, 스탈린주의에서 비수익 기업이 존속하는 것을 그와 “유사한” 현상으로 설명한다. 43 그렇다면 파산이 없다는 것은 노동자국가의 잔재가 아니라 집중과 국가 개입이 극에 이른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를 자본주의의 “부분적 부정”이라 부른다. 이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사적 소유와 시장 조정의 일부가 변형될 수 있다는 뜻이지, 국가자본주의와 노동자국가가 같은 계급적 내용을 갖는다는 뜻은 아니다. 44
셋째, 역사적 유산과 현재의 계급적 성격을 구별해야 한다. 혁명에서 유래한 제도나 노동자의 방어 수단이 반혁명 이후에도 남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모순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잔재가 노동자국가의 존속을 입증하는지, 아니면 새로운 체제 안에서도 계속되는 노동자의 저항과 제도적 관성을 보여 주는지다. 전진 강령은 국유화된 생산수단이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형식적 조건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노동계급으로의 권력 이전을 핵심 조건으로 제시한다. 45
그러나 ‘형식적 조건’이라는 단서는 국유화를 앞세우는 전략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될 수 없다. 노동자 권력이 주요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장악하는 법적 수단이라는 한정된 뜻에서 국유화의 역할은 분명하다. 사회주의에 필요한 것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생산자들의 집단적·민주적 통제이며, 국가 소유 자체가 이런 관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전진의 정식을 평가하려면 강령에 노동자 권력이라는 조건이 쓰여 있는지를 확인하는 데서 멈출 수 없다. 소련사 서술에서는 노동자의 실제 지배가 사라진 뒤에도 노동자국가의 존속을 인정하고, 오늘의 선동에서는 국유화를 앞세운 뒤 노동자 권력을 뒤따르는 과제로 배치하는 문제가 남는다. ‘형식’과 ‘내용’을 말로 구별하면서 실제 논증과 실천에서는 그 우선순위를 뒤집는 것이다.
엥겔스와 코널리가 본 국유와 사회주의
엥겔스의 논의도 국유 형식과 노동계급 권력을 구별할 근거를 제공한다. 《사회주의: 공상에서 과학으로》에서 엥겔스는 주식회사나 트러스트나 국가 소유로 변형된다고 해서 생산력의 자본주의적 본질이 제거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현대 국가는 그 형태가 어떻든 본질적으로 자본가의 기구, 곧 “총국민자본의 이상적 인격화”이며, “현대 국가가 생산력 장악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것은 더 많은 시민을 착취한다. 노동자는 임금노동자, 곧 프롤레타리아로 남는다. 자본 관계는 폐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점으로 치닫는다.” 46
그러나 엥겔스의 논지는 국유화의 역할을 부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반뒤링론》에서 그는 국가 소유가 갈등의 해결책은 아니지만 그 안에 해결의 형식적 수단과 지렛대를 품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형식적 수단’은 자본주의 국가의 소유 확대를 사회주의로 가는 독립적인 단계로 승인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 수단을 사회적 해방에 쓰려면 노동계급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실제로 공동 소유·통제해야 한다. 이 계급적 전환을 생략한 채 국유화에 사회주의적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은 엥겔스의 논지를 거꾸로 세운다. 엥겔스가 비스마르크의 국유화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가짜 사회주의”를 조롱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가 담배 산업을 접수하는 것이 사회주의라면 나폴레옹과 메테르니히도 사회주의의 창시자로 꼽아야 하고, 벨기에 국영 철도, 프로이센 왕립 도자기 공장, 심지어 매춘업소의 국영화도 사회주의적 제도가 될 것이라고 했다. 47
아일랜드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조합 지도자로, 영국 지배에 맞서 일어난 1916년 부활절 봉기를 주도한 일로 처형된 제임스 코널리(1868~1916)는 1899년에 이 논지를 국가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식화했다. 전화 국유화, 철도·운하 국유화, 국가의 농업 지원 같은 중간계급 개혁가들의 국가 활동 요구를 “사회주의적”이라 부르는 것은 심히 오해를 낳는 일이며, “사회주의는 무엇보다 생산 기구에 대한 노동자들의 협동적 통제를 뜻한다. 이 협동적 통제 없이는 국가에 의한 공적 소유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일 뿐이다.” 국가 소유와 통제가 곧 사회주의라면 군대, 해군, 경찰, 판사, 교도관, 밀고자, 교수형 집행인이 모두 사회주의 관료가 될 것이다. 코널리의 결론은 이렇다. 중간계급 개혁가들의 “이것저것을 정부 소유로 만들라”는 요구에 우리는 “그렇다, 노동자들이 정부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 준비가 된 만큼만”이라고 답한다. 48 몰리뉴가 정리하듯, 마르크스와 엥겔스, 코널리, 룩셈부르크, 레닌, 부하린, 트로츠키, 루카치, 그람시 등 스탈린주의 이전의 모든 혁명적 사회주의자에게 노동계급의 주도적 구실 없는 사회주의란 있을 수 없었다. 49
노동계급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그 권력을 이용해 주요 생산수단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확립해야 한다. 기존 지배계급의 경제 권력을 그대로 둔 채 정치적 지배를 지속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몰리뉴는 국유화를 이 경제 권력 확립의 형식적 메커니즘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제시하는 혁명적 국유화는 중앙 권력의 법적 조처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행동을 결합하고, 자본가에 대한 보상 없이 이뤄지며, 노동자들의 민주적 통제 아래 놓인다. 이는 국유화 일반의 정의가 아니라 노동자 권력 아래에서 수행할 국유화의 강령적 내용이다. 따라서 국유화는 노동자 혁명에 앞서 완료돼야 할 전제가 아니라, 노동자 권력 아래에서 주요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법적·형식적 수단이다. 50
국유화가 사회주의 강령의 일부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통제해야 생산과 분배에 관한 집단적 결정을 실제로 집행할 수 있다. 국유화를 지지하는 근거는 국가 경영의 효율성이나 소유 명의 변경 자체의 진보성에 있지 않다. 노동자들의 생산 통제를 위한 투쟁에 어떤 구실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자본주의 아래의 국유화 요구도 이런 투쟁의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을 실제로 만드는 것은 노동자들의 독립적 조직화와 투쟁이다. 국유화 구호가 그 힘을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51
이 점에서 필자가 최근 글에서 비판한 것은 전진의 국유화 요구와 노동자 권력 사이에 설명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정도가 아니다. 발전산업·쿠팡·조선산업 등에 대한 실제 선동에서 국유화 조처가 전면에 서고, 그 조처를 강제하고 넘어설 노동자 자신의 힘과 권력은 뒷전으로 밀린다는 것이다. 강령에 노동자 통제와 노동자정부를 명시했다고 해서 이런 실천상의 종속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특정 상황에서 국유화를 요구하는 것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오늘의 중심 구호로 삼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제35절에서는 이 전략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52
제2부 반혁명의 시기 구분
5 라이만의 연구로 본 1928년의 전환
체코의 역사가 미할 라이만의 《스탈린주의의 탄생》은 1928년의 전환이 얼마나 컸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 책은 1969년 서독 외교부에서 우연히 발견된 소련 사료 문서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라이만에 따르면 1921~25년 신경제정책하에서 경제가 회복되자 사회적·경제적 영역에서 무력 사용이 크게 줄었고, 대중적 예방 테러는 사실상 중단됐으며, 평시의 합법성과 법 절차가 자리 잡았다. 노동자들은 새 노동조합법과 노동권, 공장 안의 한결 느슨해진 감독을 실제로 누렸다. 스탈린의 영향력이 커진 시기였지만, 정치체제로서의 스탈린주의는 아직 성립하지 않았다. 53
전환의 방아쇠는 1927년의 대외 위기였다. 그해 4월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노동자 운동을 학살하면서 중국 정책이 파탄 났고, 한 달 뒤에는 최대 교역국 영국이 단교하고 교역을 사실상 끊었다. 산업화 자원을 대외 교역으로 조달할 길이 막혔고, 전쟁 공포가 퍼지자 농민은 잉여 곡물을 내놓지 않았다. 지도부는 억압 기구에 기댔다. 1927년 12월과 1928년 1월, 지방 당 관리들은 농촌에서 곡물을 거둬들이지 못하면 자신이 처벌받을 것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1928년 3월에는 보안경찰 합동국가정치국(이하 오게페우)에 경제생활과 당 조직 활동을 감시할 특별 권한이 주어졌다. 라이만은 이로써 소련이 내부 생활 조건과 권력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향해 큰 걸음을 내디뎠다고 쓴다. 1928/29년 통제 수치(아직 확정되지 않은 5개년계획의 첫해 계획)는 실제 가용 자원이 아니라 경제의 ‘필요’를 추정해 짜였고, 경제가 아직 갖지 못한 자원으로 수지를 맞췄다. 라이만은 그것을 “조직된 빈곤과 기근의 계획”이라 부른다. 1928년 12월에 공개된 5개년계획 초안은 같은 방식을 되풀이하면서 산업 투자의 78퍼센트까지를 중공업에 배정했다. 라이만은 스탈린의 계획 실행에는 “인민과 분리되고 인민에게 적대적인” 지배층이 필요했다고 쓴다. 54 라이만의 표현으로 이것은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라는 사회적 교의의 의미와 본질과 완전히 결별”한 것이었다. 55
에이드리언 버드가 정리하듯, 1928~32년에 걸쳐 시행된 억압 조처들은 1917년 혁명의 주된 성과였던 노동계급 권력의 마지막 흔적을 파괴했다. 1928년까지 어느 정도 독립적이었던 노동조합이 공장장·당조직과 함께 기업 운영에 관여하던 트로이카 체제 대신 1인 경영제가 도입됐고, 경영진에게 노동자를 징계·해고할 권한이 확대됐으며, 법원은 징계와 해고에 대한 노동자의 이의 제기를 심리하지 못하게 됐고, 노동조합은 법정에서 조합원을 변호하기를 거부했다. 동시에 일요일 휴무제가 폐지되고, 배급제가 도입됐으며, 노동계급을 원자화하는 성과급제가 극적으로 확대돼 1932년에는 노동자의 68퍼센트가 성과급을 받았다. 56 성과급의 확대는 전진이 대숙청 전에 이미 일어난 일로 열거하는 바로 그 사실이다.
라이만은 스탈린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역사적 증거는 1928년에 질적 전환이 시작됐다는 국제사회주의 전통의 해석을 뒷받침한다. 관료는 다른 사회 세력들이 서로를 마비시킨 틈을 타 일련의 임시방편적 조처를 폭력으로 관철했고, 그 조처들이 모여 국가자본주의라는 출구가 됐다. 57
라이만의 서술은 돔과 전진의 시기 구분에 특히 불리하다. 그 서술이 1927~28년부터 노동 통제와 국가권력의 중대한 변화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오게페우가 경제와 당을 감시하는 권한을 얻은 것도, 인민에게 적대적인 지배층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1928년 돈바스의 기술자들을 ‘사보타주’ 혐의로 엮은 샤흐티 재판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희생양에게 돌리는 방법을 처음 보여 줬다. 이 재판은 1930년대 대숙청의 초석을 놓았다. 58 대숙청은 1928년 전환의 귀결이었지 출발점이 아니었다. 59
요컨대 쟁점은 연대 자체가 아니다. 무엇이 사회의 성격을 바꿨느냐가 쟁점이다. 국가자본주의론은 노동자의 소비와 생활 조건이 경쟁적 축적에 체계적으로 종속된 데서 답을 찾는다. 전진은 그 변화를 묘사하면서도 사회 성격의 변화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6 관료적 왜곡과 1928년의 반혁명
노동자연대는 1920년대 중반까지의 소련을 관료적으로 일그러진(왜곡된) 노동자국가로 본다. 내전을 거치며 신경제정책하에서 관료 기구는 이미 비대해져 노동자 대중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레닌 자신도 1922년 3월 제11차 당 대회에서 “[국가]기구는 자신을 지도하는 손을 따르지 않았다”고 개탄하며, 모스크바에서 책임 있는 지위를 맡은 공산주의자 4700명을 두고 “누가 누구를 지도하고 있는지” 물었다. 60 레닌은 이미 1921년 1월 노동조합 논쟁에서 소련을 “관료적으로 일그러진 노동자국가”라고 규정했다. 61
물론 이 시기의 관료층은 아직 독자적 지배계급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직접적·간접적 압력과 통제 아래 있는 층이었다. 62 그리고 러시아가 이미 1920년대 중반에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던 것은 아니다. 관료는 아직 축적을 위해 대중의 소비를 희생시키는 자본의 인격화가 아니었다. 1921~28년에는 관료적 왜곡에도 불구하고 소비가 이후와 같은 규모로 강제적 축적에 종속되지는 않았고, 생산·소비·축적이 대체로 균형 있게 성장했다. 63 관료가 경제와 노동자·농민을 포괄적으로 지배하는 체제도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국가기구의 내부 분열이나 통제의 불완전성 자체가 노동자국가의 증거라는 뜻은 아니다. 핵심은 관료를 제약하던 노동계급의 조직적 영향력이 어떤 상태였는가이다. 신경제정책하의 경제는 상당 부분 국가의 직접적 통제 밖에 있었고, 국가기구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당과 국가에는 1917년의 이상과 이념에 여전히 충실한 혁명가들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이 잔존 혁명가들의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가기구의 완전한 관료화를 방해하고, 국제 혁명이 일어날 경우 관료제에 도전하거나 그 전복을 도울 가능성이 있었다. 또, 그들이 노동자들과 맺은 관계도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스탈린주의 관료는 프롤레타리아 전위인 좌익반대파를 분쇄한 뒤에야 쿨락과 네프맨에게 등을 돌리고 노동자와 농민에게서 독립한 지배를 확립할 수 있었다. 64
물론 이 시기에도 노동계급이 건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전과 제국주의의 군사 개입과 경제 황폐화로 노동자들은 크게 약화되고 탈계급화했으며, 노동계급과 국가를 잇는 관계는 당내 혁명적 인자들과 노동조합 등을 통해 매우 약화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시기를 노동자국가의 역사로 보는 근거는 혁명가들이 국가 안에 생존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그들과 노동자 조직의 관계, 생산 현장에 남은 영향력, 관료의 축적 정책에 대한 제약을 함께 고려한 판단이다.
그러나 결정적 전환이 1928년에 일어났다. 65 클리프 국가자본주의론의 시기 구분은 기준이 일관된다. 1928년까지는 대중이 어느 정도 관료를 통제할 수 있었다. 관료가 그 통제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 “혁명적인 질적 변화의 단계”에 이르렀다. 66 그 근거는 생산관계의 변화다. 1928~29년 소련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제1차 세계대전 전보다 15.6퍼센트 높았고 노동시간은 22.3퍼센트 짧았다. 5개년계획과 함께 비로소 한편에서는 자본이, 다른 한편에서는 빈곤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67 오링컨이 인용하는 수치로는 1928년 실질임금을 100으로 잡을 때 1932년에 88.6이었다. 알렉 노브는 1933년을 평화 시기에 생활수준이 가장 급격히 떨어진 해로 꼽았다. 68 1928년은 소비가 축적에 종속되는 전환이 시작된 분수령이었다.
하먼은 1928~29년의 전환으로 시작돼 이후 몇 년간 전개된 변화들을 이렇게 요약한다. 공장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노동자 통제마저 파괴됐다. 노동조합의 독립성이 완전히 폐지됐다. 실질임금이 30~40퍼센트 떨어졌다. 오게페우는 당내 토론의 마지막 잔재를 없애 버릴 자유재량권을 얻었다.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가 국가 정책이 되면서 관료와 노동자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농민은 이른바 ‘집산화’로 땅에서 쫓겨났다. 강제노동수용소의 수감자 수는 2년 만에 20배로 늘었다(그리고 이후 10년 동안 다시 10배로 늘었다). 러시아화가 비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자치를 파괴하는 데 쓰였다. 이 변화들이 같은 전환 과정에서 결합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모두 1927년의 전쟁 위협과 1928년의 곡물조달 위기가 몰고 온 경제 위기에 대한 스탈린파 관료의 대응이 낳은 부산물이었다. 69 하먼은 1928년에 이미 새로운 계급이 권력을 잡았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그 계급이 노동자들과 직접 군사적으로 충돌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노동자의 직접적 권력이 내전 이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70 1928년까지 국가 정책은 관료의 이해관계와 아래로부터 오는 노동자·농민의 압력이 뒤섞인 결과였다. 1929년부터는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 조건을 체계적으로 허무는 방향으로 단호하게 움직였다. 71 빈스와 핼러스도 1928년을 소비에트 공화국이 끝난 해로 본다. 1928~33년 산업 투자는 1923~28년 수준의 여섯 배로 늘었다. 72 헤인스도 1928~29년을 “위로부터의 반혁명”이라 부른다. 이를 통해 혁명의 잔재가 마침내 파괴되고 새로운 체제가 무자비하게 수립됐다고 본다. 73
이렇게 보면 두 서술 사이의 차이가 선명해진다. 전진의 서술은 대체로 노동자국가가 퇴보하다가 193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파괴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노동자연대의 서술은 내전과 제국주의와 경제 붕괴 속에서 관료적으로 왜곡된 노동자국가가 1928년에 시작된 반혁명, 곧 제1차 5개년계획과 뒤이은 강제 집산화를 거치며 국가자본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이때 관료는 노동자들의 압력과 통제 아래 있던 층에서 지배계급으로 바뀌었다. 1930년대 후반의 대숙청은 이 새로운 지배를 공고히 한 것이다. 74
7 새 지배계급의 형성과 노동자국가의 소멸
전진식 입장을 가장 강하게 옹호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관료들이 아직 독립적인 지배계급으로 완성되지 않았고, 혁명의 유산과 노동자적 ‘요소’(노동계급의 ‘대리인’)들이 그들을 제약했으므로, 국가는 퇴보했어도 1930년대 중후반까지 여전히 노동자국가였다.
이 추론에 동의할 수 없다. 새로운 지배계급이 완전히 응집하지 않았다는 것과 이전의 지배계급이 여전히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별개의 명제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배층 안에 심각한 분열이 있을 수 있다. 그 지배층의 국가기구가 불안정할 수도 있다. 옛 혁명의 기억과 조직적 잔재가 그 지배를 방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노동자들이 생산, 분배, 국가 정책과 무력을 결정하는 주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이 점에서 ‘반혁명의 완성’이라는 표현도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나는 노동자들이 권력을 빼앗기는 결정적 변화다. 다른 하나는 이미 권력을 빼앗은 새로운 지배세력이 자신의 적과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고 지배를 안정시키는 과정의 완결이다. 전진이 ‘반혁명의 완수’로 규정하는 1930년대 후반의 대숙청은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
물론 실제 역사는 두 단계가 깔끔하게 분리돼 진행되지 않는다. 권력 상실, 생산관계의 변형, 새로운 계급의 형성은 일부 겹친다. 그렇다고 그 개념적 구별까지 없애서는 안 된다. 특히 1928년 이후를 분석할 때는 이 구별이 더욱 중요하다. 노동자와 농민의 삶이 강제적 축적에 체계적으로 종속되고 있었는데도, 아직 모든 혁명적 간부가 제거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그 국가를 노동자국가라고 부르면, 계급 지배를 판정하는 중심이 실제 생산관계에서 국가라는 정치적 상부구조의 인적 구성으로 옮겨진다.
8 대숙청과 반혁명의 공고화
국제사회주의 전통의 국가자본주의론도 대숙청의 역사적 비중을 부정하지 않는다. 클리프는 모스크바 재판을 한 편만 무장하고 조직된, 대중에 맞선 관료의 내전이라고 쓴다. 그것은 관료가 인민의 통제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과정의 “완성”이었다. 75
이 점만 보면 전진과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가 있다. 클리프의 시기 구분에서 대숙청은 1928년부터 형성된 새로운 계급 지배의 공고화에 해당한다. 전진의 서술에서는 그 과정이 노동자국가를 최종적으로 소멸시키는 사건에 해당한다.
전진의 글은 대숙청이 당을 참수하고 변모시켰으며, 국가기구와 노동자국가의 무장력인 군대를 분쇄했다고 서술한다. 이는 대숙청을 계급적 반혁명의 결정적 물리적 사건으로 파악하는 설명이다. 76 물론 대숙청의 폭력성과 그 질적 중요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강조해야 하는 것은 이미 형성되던 관료 국가의 통일과 새 지배계급의 공고화다. 잠재적 경쟁 세력, 독립적 권위, 혁명적 전통의 잔재를 제거함으로써 국가기구가 스탈린주의 관료 집단에 더욱 완전하게 종속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구의 분쇄’와 ‘기구 내의 대규모 인적 숙청’을 구별해야 한다. 전자가 기존의 계급 지배를 수행하던 기구를 해체하고 다른 계급의 통치기관으로 대체하는 것을 뜻한다면, 후자는 기존 기구를 유지하거나 강화하면서 그 인원을 대거 교체하는 것이다. 히틀러의 집권도 국가기구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동반했지만, 국가기구 전체를 분쇄하지는 않았고 그 국가는 본질이 같은 (자본주의적) 국가로 남았다. 77 인적 교체의 규모만으로 국가의 계급적 전환 시점을 결정할 수는 없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그 군대의 간부 중 누가 10월혁명에 참여했는지만으로는 그 군대가 노동계급의 무장력인지 판정할 수 없다. 노동자들이 군대의 활동과 지휘 구조를 통제할 수 있었는지, 그 군대가 어떤 사회관계를 방어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헤인스의 분석은 전진의 해석이 왜 성립하기 어려운지를 보여 준다. 공포정치는 일단 가동되자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러나 그 근저의 논리는 항상 “1928~33년의 반혁명을 강화하고 공고히 하는 것”, 그리고 경쟁적 축적이라는 새 체제의 목적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78 스탈린 시대의 공포정치는 지배층 자신과 그 가족도 겨냥했다. 이 탄압은 1930년대 대숙청에 그치지 않았다. 칼리닌과 몰로토프의 아내에 대한 체포, 카가노비치 형제들의 수난이 그 사례다. 동부 시베리아의 한 관리는 당과 소비에트 간부가 모두 체포돼 일할 사람이 없으니 간부를 보내 달라고 호소했다. 79
클리프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 소련에서는 개별 기업의 효율과 경영자의 소득 사이에 직접적 연관이 없었다. 그래서 개별 관료를 겨냥한 공포정치가 효율을 강제하는 수단이자 대중의 분노를 달래는 희생양 장치가 됐다는 것이다. 80 하먼도 대숙청을 관료 내부에 대한 공포정치로 서술한다. 착취에 조금이라도 주저하는 자, 잉여 추출과 축적을 가로막을 수 있는 자를 제거해, 위에서 오는 요구가 아래의 압력을 이기게 만드는 장치였다는 것이다. 81
1939년설의 가장 체계적인 옹호자인 돔조차 숙청을 새로운 관계를 만든 사건이 아니라 굳힌 사건으로 서술한다. 그에 따르면 숙청은 “1930년대 중반에 확립된 분권적 구조와 사회관계를 굳혔다(cemented).” 82 또, 그는 숙청이 생산을 확대하기는커녕 교란했다고 인정한다. 83 그렇다면 쟁점은 사실상 ‘숙청 이전의 어느 시점에 새로운 생산관계가 확립됐는가’로 옮겨 간다.
돔의 답은 1934~36년, 곧 성과급, 스타하노프 운동, 기업 독립채산제가 강화된 시기다. 그러나 그가 드는 조처들은 대부분 1928~33년에 시작된 흐름의 연장이었다. 성과급을 “사회주의적 축적”의 수단으로 옹호한 보즈네센스키의 글은 1931년에 나왔다. 결근 한 번에 해고와 주택 박탈을 가하는 조처도 1930년대 초에 이미 입법됐다고 돔 스스로 쓴다. 84 물론 어떤 조처가 일찍 시작됐다는 사실만으로 질적 전환의 시점이 확정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을 전환점으로 삼으려면, 그 조처들이 1928~33년과 구별되는 어떤 새로운 생산관계를 성립시켰는지 입증해야 한다.
그렇다면 대숙청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게서 권력을 빼앗은 사건이라기보다, 이미 지배하고 있던 계급이 축적 압력에 맞게 자기 자신과 사회를 재편한 사건으로 읽는 것이 증거에 더 맞는다.
전진이 인용하는 1939년 당원 구성 수치, 즉 1918년 당원 중 당시까지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원의 약 10퍼센트만 당에 남아 있었다는 수치는 하먼도 똑같이 인용한다. 85 같은 수치를 놓고 하먼은 공고화의 증거로, 전진은 성립의 증거로 읽는 셈이다. 1939년에 옛 볼셰비키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그 전 10년간 노동자국가가 존속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전진은 노동자 권력의 상실과 생산관계의 전환을 서술하고도, 노동자국가의 소멸을 판정할 때는 헌법과 숙청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다. 그 결과 이미 성립한 착취 계급의 지배를 노동자국가의 역사 안에 남겨 둔다.
9 혁명기의 볼셰비즘과 내전 이후의 변화
시기 구분의 문제는 1928년 이전으로도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 혁명은 소수 음모가들의 쿠데타가 아니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농민·병사와 피억압 민족의 대중 운동 속에서 지지를 획득했고, 10월혁명은 그 운동을 기반으로 일어났다. 레닌의 생애 말년 반관료 투쟁도 이 혁명적 출발점과 연결돼 있었다. 이 출발점을 인정할수록 이후 변화의 규모를 더 엄격하게 검토해야 한다. 내전이 끝났을 때는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 노동자 시민군에 기초한 직접적 통치가 당과 국가기구의 통치로 대체돼 있었다. 혁명을 이끈 산업 노동자들은 전선에서 죽거나 굶주림을 피해 농촌으로 흩어졌고, 레닌의 말대로 프롤레타리아는 “탈계급화”했다. 86 반면 국가 관리의 수는 1920년 말 588만 명으로 불어나 산업 노동자의 다섯 배에 이르렀다. 87 우리가 이 시기를 곧바로 새로운 계급의 지배로 규정하지 않는 것은 당의 존재만으로 노동자 권력이 보존됐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다. 제6절에서 살폈듯, 약화된 노동계급이 당과 노동조합, 생산 현장을 통해 관료를 제약하는 관계가 남아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1928년 이전의 관료적 왜곡은 이 조건에서 비롯했다.
전진도 이 퇴보를 인정한다. 그 글은 소비에트가 내전에서 살아남지 못했고, 노동조합과 소비에트가 관료화하거나 위축됐으며, 볼셰비키당이 노동계급과 국가를 연결하는 유일한 노동자 기관으로 남았지만 그 당도 관료주의에 굴복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88
차이는 그다음 질문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당이 노동계급과 국가를 연결하는 유일한 기관이었다면, 그 연결은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가? 노동자들이 당의 정책을 결정하고 지도자를 교체할 수 있었는가? 당 밖의 노동자 조직이 독립적으로 국가 정책을 비판하고 바꿀 수 있었는가? 당의 일부 구성원이 노동자 출신이라는 사실과 당이 노동계급의 통제를 받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우리는 ‘당이 유일한 연결고리였다’는 서술을 설명의 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연결고리는 1920년대 말, 좌익반대파가 분쇄되고 스탈린이 반혁명에 착수하면서 끊어졌다. 그 뒤로 당의 잔존은 노동자 권력의 잔존을 보장하지 않는다.
전진의 글은 레닌이 관료화에 맞서 투쟁했고, 볼셰비키가 후퇴의 필요성에 정치적으로 순응한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인정한다. 따라서 전진이 모든 책임을 외부 조건으로만 돌린다고 말할 수는 없다. 89 우리는 레닌의 생애 말년 투쟁을 중요한 반관료 투쟁으로 평가하며 트로츠키의 1923년 반대파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를 한다. 그러나 그 평가만으로 1928년 이후 노동자국가의 존속까지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전진의 ‘대리인’ 논리를 검토하는 데 직결된다. 노동계급의 대리인으로 여겨지는 혁명가들이 당 상층부의 개혁을 해결책으로 삼고 있었다면, 그들의 국가기구 내 존재를 노동자 권력의 증거로 볼 수 있는가? 혁명가들의 성실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실성과 계급적 기능을 구별해야 한다. 노동자를 위해 통치하려는 의도는 노동자가 통치하는 것과 다르다. 이 차이가 흐려지면, 선의의 혁명가도 자신의 통치권을 노동자의 실제 의사보다 우선시할 수 있다.
제3부 소련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규정하는 관계
10 착취 일반과 자본주의적 착취의 구별
전진의 교육 자료가 소련을 자본주의로 규정하면서 직접 제시하는 논거는 노동계급이 체계적으로 국가의 부의 축적을 위해 억압되고 착취당했다는 것이다. 보조 논거로는 관료적 명령경제가 비합리적인 계획과 그것을 달성하려는 관료파벌들 간의 경쟁으로 운영됐다는 점을 든다. 90
착취의 지적은 국가자본주의론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론의 경제 분석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먼저, 어떤 사회가 착취 사회인지와 어떤 종류의 착취 사회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착취와 억압은 자본주의에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이 직접 생산자를 착취해 부를 쌓는 것은 노예제, 봉건제, 이른바 아시아적 전제국가에도 있었다. 따라서 소련이 비민주적이었다거나, 관료들이 특권을 누렸다는 사실만으로 자본주의라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설명해야 할 자본주의의 고유한 관계는 임금노동의 착취와 경쟁에 의한 축적 강제의 결합이다.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돼 노동력을 판매하는 관계, 잉여 생산물의 전유를 분석의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 자본은 단순한 기계나 공장이 아니고, 개별 자본가의 법적 소유 증서도 아니다. 생산자들이 자신의 생산물과 생산수단에 의해 지배되는 특정한 사회관계인 것이다.
전진의 강령은 이 점에서도 흔들린다. 기본강령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개별 자본가 소유에서 “주식회사나 국유기업 같은 집단적 소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을 취하지만 “생산수단과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권을 자본가 계급이 배타적으로 독점한다는 동일한 속성”을 지닌다고 정의한다. 91 그러나 생산수단에 대한 배타적 통제는 모든 계급사회의 공통점이다. 같은 강령의 다른 대목은 훨씬 정확하다. 자본의 목적은 더 많은 축적 그 자체이고, 더 많은 집중을 향한 자본의 운동은 경쟁자를 패퇴시키려는 자본 간 투쟁을 격화한다는 것이다. 92 전진 강령은 서방 자본주의를 설명할 때는 경쟁이 축적을 강제한다는 마르크스의 논리를 쓰면서, 검토 대상인 소련 설명에서는 경쟁이 축적을 강제하는 구체적 경로를 충분히 밝히지 않는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사회주의가 아닌 나쁜 체제’라는 규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산관계의 분석이어야 한다. 왜 관료들이 단순한 특권적 소비층이 아니라 잉여 생산물을 지배하고 확대 재투자를 결정하는 지배계급인지, 왜 노동자들이 국가의 집단적 주인이 아니라 노동력 판매자로 지위가 재생산되는지 밝혀야 한다. 전진의 교육 자료는 국가자본주의 규정의 체계적 논증을 별도의 문서로 미룬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논증을 다른 문서로 미룬다는 말은 이 교육 자료와 강령이 제시한 설명의 공백을 메워 주지 않는다. 여기서 검토한 설명은 소련을 왜 자본주의로 규정해야 하는지 충분히 입증하지 못한다. 93
11 자본주의의 두 조건과 전면 국유화에 대한 반론
클리프의 분석에서 핵심적인 관계는 두 가지다. 노동자가 생산수단에서 분리돼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는 점, 그리고 서로 경쟁하는 자본들이 잉여를 축적에 재투자하도록 강제된다는 점이다. 경쟁이 사라진다고 착취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쟁은 각 자본이 생산성을 높이고 축적을 확대하지 않으면 존립을 위협받게 하는 구조적 압력을 낳는다. 94 이 관계는 생산수단의 법적 소유자가 개인인지, 주식회사인지, 국가인지에 따라 자동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판정에는 소유 형식과 함께 임금노동 및 경쟁적 축적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95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가장 흔한 반론이 여기서 나온다. 개별 산업 안의 국유 부문이야 국가자본주의라 부를 수 있겠지만, 국가 부문이 지배적이거나 전면적이 되는 순간 질적 전환이 일어나 자본주의의 경제법칙이 더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임스 버넘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했다. 국가자본주의의 ‘자본주의’는 국가 통제 부문이 아니라 나머지 사적 부문에서 온다. 그러니 “10 곱하기 10% 국가자본주의는 100% 자본주의는커녕 0% 자본주의”이며, 곱해지는 것은 국가이지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96 이것은 전진이 소련 내부의 착취와 관료 파벌 경쟁만으로 자본주의를 입증하려 할 때 부딪히게 될 반론이기도 하다.
우리의 답변은 이렇다. 세계 경제 전체가 국유화돼 하나로 통합·운영된다면, 이 반론이 타당할 수 있다. 그 경우 자본 간 경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본 간 경쟁은 이윤을 극대화하고 자본을 축적하도록 압박하는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이다. 그러나 현실에서처럼 국유화가 한 나라 또는 몇몇 개별 국가에서 이뤄진다면 사정은 다르다. 국유화 이후에도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에서 분리된 채 임금노동자로 남고, 노동계급의 통제에서 독립한 국가가 국제적 경쟁에 대응해 잉여를 축적한다면, 자본주의의 핵심 관계는 유지된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국유화나 국제적 경쟁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임금노동의 착취와 경쟁적 축적의 압력이 결합하는 방식이다. 소련의 경우 이 압력이 개별 기업의 시장이윤 극대화와 같은 형태로 나타났는지는 별도로 설명해야 한다. 97
이 답변은 부하린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하린은 1915~16년 제국주의 연구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두 모순적 경향, 곧 국제화 경향과 국가화 경향을 지적했다. 국제화가 국제 경쟁을 격화시키고, 그것이 다시 국가와 대자본의 유착, 곧 국가자본주의를 향한 압력을 낳는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국가의 산업 접수를 ‘국가사회주의’나 ‘전시사회주의’라 부르는 당시의 유행에 부하린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라는 틀 안에서 가속된 집중이지 새로운 생산 구조, 곧 계급 간 관계의 변화가 아니며, 국가권력이 이 독점의 직접적 표현이든 독점이 “사적으로” 조직되든 원리상 아무 차이가 없다. 어느 경우든 상품경제(무엇보다 세계시장)와 프롤레타리아·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관계는 남는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판을 유지하는 한 미래는 국가자본주의에 가까운 경제 형태의 것이다.” 98 클리프는 바로 이 레닌·부하린의 제국주의 단계 분석에 자신의 소련 분석을 정초했다. 자본의 집적·집중이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대체하고, 산업과 국가의 ‘융합’은 총력전에서 가장 완전하게 발전한다. 전시경제는 너무나 철저히 계획되기 때문에 단순하고 몰역사적인 자본주의 개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는 자본주의로 보이지 않는다. 힐퍼딩이 나치 독일 경제를 두고 그런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클리프는 전시경제가 자본주의의 한 형태로 남는다고 주장했다. 옛날식 ‘자유시장’ 경쟁의 구실은 거의 없지만, 새로운 형태의 경쟁, 곧 서로 다른 나라들의 국가자본주의 지배계급 사이의 군사적 경쟁이 그것을 완전히 지배하기 때문이다. 99 스탈린 치하 소련은 자본주의와의 급격한 단절이 아니라 지난 반세기 동안 서방에서 진행된 경향들의 증류물, 곧 국가독점자본주의의 가장 순수한 표현이었다. 100
이 관점에서 보면 “관료파벌들 간의 경쟁”만으로 소련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입증하기는 어렵다. 할당량과 자원을 둘러싼 흥정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독립된 자본들이 경쟁을 통해 서로에게 축적을 강제한다는 사실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소련을 “단일 일터”에 비유하는 논의는 국가 차원의 자원 배분과 세계적 경쟁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101 그러나 이 비유를 국내의 모든 상품 관계와 노동시장을 부정하는 문자 그대로의 묘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제13절에서 다시 다룬다. 한편 세계경제 전체가 단일한 통제 아래 통합돼 자본 간 경쟁이 사라진다는 가정은 실제 소련과 구별해야 한다. 그런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부하린이 말한 “노예시장 없는 산업 노예제 경제” 같은 새로운 계급사회일 수도 있다. 102 103 현실의 소련은 세계 자본주의의 경쟁 관계 속에 존재했다.
마르크스가 세계시장을 위해 생산하는 미국 남부의 노예 플랜테이션을 분석한 방식도 참고할 수 있다. 플랜테이션 내부에는 임금노동과 다른 착취 관계가 있었지만, 세계시장의 경쟁은 그 생산에 자본주의적 압력을 가했다. 104 이는 분석 단위를 개별 생산조직 안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소련 내부의 임금노동 관계를 입증할 필요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12 돔의 내부 경쟁과 가치법칙 분석
돔은 바로 이 공백을 소련 내부의 경쟁으로 메우려 했다. 그는 클리프가 소련을 “하나의 거대한 공장”으로 보고 가치법칙을 외부의 군사적 경쟁을 통해서만 들여온다며, 그것은 결국 소련이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의 자본주의임을 부정하는(그러나 노동자국가로 보지도 않는) ‘제3체제’론이라고 비판한다. 105 대신 그는 소련 내부의 경쟁에서 가치법칙을 찾는다. 핵심 근거는 1930년대 중반의 경제 개편이다. 국유 기업들이 법적으로 독립된 채산 단위가 됐고, 1936년에는 국가 보조금을 끊고 각 기업이 수익을 내야 한다는 원칙이 섰다. 돔은 여기서 “자본은 다수 자본으로서만 존재한다”는 마르크스의 원리가 스탈린주의에서 재확인됐다고 본다. 106 전진의 “관료파벌들 간의 경쟁”이라는 설명도 이 논변과 비교해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돔의 논변은 네 가지 핵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첫째, 그가 묘사하는 경쟁의 실체다. 돔 스스로 소련 계획 체계 안의 경쟁은 “판매를 둘러싼 것이 아니라면, 자원·노동력·자금·할당을 둘러싼” 것이었다고 쓴다. 107 그가 인용하는 잘레스키의 묘사도 유리한 지위, 적당한 할당량, 쉬운 주문을 따내려는 부처와 기업 사이의 암투다. 108 이것은 (폴 스위지가 지적했듯이) 제너럴모터스 같은 거대 기업의 하위 단위들이 본사의 자원 배분을 놓고 벌이는 경쟁과 같은 종류다. 109 돔은 거대 기업도 공장끼리 경쟁을 부추겨 경영자와 노동자를 압박한다고 반박한다. 110 그러나 이 반박은 오히려 요점을 확인해 준다. 제너럴모터스 안의 공장 간 경쟁이 제너럴모터스를 자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내부 경쟁이 자본주의적 축적을 집행하는 것은 제너럴모터스 자체가 임금노동을 착취하고 다른 자본들과 경쟁하기 때문이다. 소련에는 개별 공장들 사이의 경쟁이 없었다는 비판에 대한 국가자본주의론의 답변도 같다. 자본주의 기업 안의 여러 부서들 사이에도 시장 경쟁은 없듯이, 소련의 국유 경제 내부에서도 개별 기업들 사이의 경쟁이 생산과 투자를 좌우하는 시장 원리로 작용하지 않았다. 111
둘째, 파산의 부재다. 돔이 의존하는 해럴드 버먼 자신이 1936년의 보조금 폐지 원칙에 “수많은 예외”가 있었다고 쓴다. 112 돔은 다른 곳에서 스탈린주의하에서는 수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이 계속 운영되도록 허용된다고 인정한다. 113 헝가리 경제학자 코르나이가 ‘연성 예산 제약’이라 부른 이 현상이 뜻하는 바는, 국가가 기업 손실을 지속적으로 보전할 경우 시장 경쟁의 규율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다만 파산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경쟁이나 가치법칙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국가 지원은 서방 자본주의에도 존재한다. 돔이 입증해야 할 것은 소련 기업의 손익이 자원 배분과 축적을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강제했는가이다. 114
셋째, 결정적 대목에서 돔이 기대는 것은 결국 외부의 경쟁이다. 그는 1930년대 중반 이후 자본주의적 관계가 제도화된 “주요 원천”으로 전쟁 위협을 든다. 무기 생산이 1936년 이후 다시 급증했고, 군수 부문에 필요한 품질을 확보하려면 공급 기업들 사이의 경쟁을 강화해야 했다는 것이다. 115 그렇다면 내부 경쟁을 강제한 것은 외부의 군사적 경쟁이다. 돔은 클리프가 가치법칙을 외부에서 들여온다고 비판했지만, 정작 자신의 설명에서 가장 구체적인 인과 사슬은 클리프의 것과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돔은 국내 기업 간 관계를 강조하지만, 그 관계가 왜 축적을 강제하는지 설명하려는 순간 자신이 비판한 세계적 경쟁의 압력에 기대야 한다. 뒤에서 보듯(제14절) 그 압력은 1928년의 전환을 설명할 때도 핵심적이다.
넷째, 돔은 가치법칙이 노동자국가에서도 작용한다고 본다. 과도기 노동자국가의 노동자들도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하지만, 착취하는 계급이 없으므로 착취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116 이 전제를 받아들이면 가치법칙이 작용한다는 사실만으로는 1928~36년과 1939년 이후를 가를 수 없다. 두 시기를 가르는 기준은 다시 누가 국가를 지배하느냐로 돌아가고, 앞서 봤듯 그 ‘누구’는 노동자 자신이 아니라 대리인이어도 된다. 따라서 가치법칙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1939년이라는 연대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그 작동 방식과 지배계급의 변화가 언제,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보여 줘야 한다. 전진의 서술도 이 연결을 입증하지 못한 채 1930년대 중후반이라는 결론을 유지한다.
우리가 보기에 소련 내부의 개별 기업 간 시장경쟁이 크게 제한됐다고 해서 가치법칙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세계 자본주의와의 경쟁, 특히 군사적 경쟁이 소련 국가에 자본 축적을 강제했고, 이를 통해 가치법칙이 소련 내부의 생산과 노동의 배분을 규정했다.
13 단일 공장 비유의 한계와 임금노동 관계
돔의 클리프 비판에도 짚을 만한 대목은 있다.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론 첫 버전(1948년)에서 소련 노동자가 고용주를 바꿀 자유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것을 밀고 나가면 노동력이 온전한 상품인지, 따라서 소련 노동자가 임금노동자인지가 흐려진다. 117 실제로 빈스와 헤인스는 1980년 글에서, 노동력을 사는 회사가 ‘USSR 주식회사’ 하나뿐이므로 소련에는 진정한 노동시장이 없다는 주장에 “이견이 없다”고 양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국가자본주의론 내부에서도 논쟁과 수정을 낳았다. 던컨 핼러스는 이 양보를 반박하면서, 클리프는 소련 노동자가 법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노동자임을 이미 상당한 분량을 들여 입증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노동력이 상품이 아니라면 자본도 자본주의도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고,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소련에 노동시장이 실재했음을 보여 줬다. 118
따라서 소련에 관한 정보가 공개된 이후의 국가자본주의론에는 내부 논쟁과 발전이 있었다. 소련의 국영기업들이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노동자를 고용하고, 생산수단과 원료를 구입하며, 계약과 은행 계정을 통해 거래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임금도 중앙에서 형식적으로 결정된다고 해서 수요와 공급, 숙련과 지역, 성별 등의 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기업 간 노동력 확보 경쟁과 노동자의 이직도 중요한 요소이긴 했다. 따라서 이렇게 발전한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 내부에는 실질적인 상품 관계가 전혀 없고 외부 경쟁만이 체제를 자본주의로 만든다는 식이 아니다. 국가 전체 수준에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제적·정치적·군사적 경쟁이 축적을 강제한다고 설명하면서 국내의 상품·임금 관계와 기업·부처 간 경쟁을 분석한다.
필자가 다른 곳에서 정리했듯, 소련의 임금률은 공식적으로는 중앙 계획 당국이 정했지만 실제로는 부문별 수요와 공급을 반영해 노동력을 배분하는 고전적 기능을 했다. 경영자들은 상여금, 성과급, 노동 기준량(노르마) 조작으로 필요한 노동자를 끌어오려 경쟁했고,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찾아 직장을 바꾸는 것으로 교섭력을 높였다. 젊은 노동자의 20퍼센트가 취업 첫해에 직장을 옮겼다. 119 캘리니코스의 논증은 클리프의 분석에서 임금노동 관계를 더 분명하게 설명한다. 노동자가 노동력을 팔아야 사는 존재라는 것(임금노동)과 그 노동력을 구매한 자본이 축적하도록 강제된다는 것(자본 간 경쟁)이 자본주의의 두 조건이라면, 국가자본주의론은 앞의 조건을 소련 내부에서, 뒤의 조건을 세계 체제 차원에서 찾는다.
전진도 소련 기업과 부처가 자원과 유리한 할당량을 놓고 경쟁하고, 관료적 명령경제가 실제로는 복잡한 흥정과 충돌로 작동했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이 설명을 자신의 시기 구분과 일관되게 연결하지 못한다. 120 이런 관계들이 노동계급을 지배하고 축적을 조직하는 기본 관계로 자리 잡은 시점은 언제인가? 그것들이 이미 1920년대 말에 경제 체제의 운동을 규정하고 있었다면, 노동자국가라는 명칭이 계속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진은 경제적 내용은 국가자본주의적으로 서술하면서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노동자국가로 남겨 둔다. 이 모순은 설명 몇 마디를 보태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노동자국가를 판정하는 기준 자체를 바꿔야 한다.
돔은 모든 현상을 근본적으로 그 내적 동학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는 변증법의 원칙을 들어 국가자본주의론의 구도를 비판한다. 121 그러나 자본의 내적 동학은 원래 세계적이다. 하먼이 가치법칙을 설명한 대목을 보자. 가치법칙은 상품생산 사회, 특히 그 가장 발전한 형태인 자본주의적 생산이 있는 사회에서 작동한다. 서로 독립적으로 조직된 노동 행위들의 조직자들은 서로 경쟁하고, 그 경쟁이 그들에게 더 강도 높은 노동을 강요하고 더 선진적인 생산수단에 투자함으로써 노동생산성을 계속 끌어올리도록 강제한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그들은 각각의 구체적 노동을 체제 안의 다른 모든 구체적 노동 행위와 끊임없이 관련짓는다. 마르크스의 말로 하면, 구체적·개별적 노동을 추상적·사회적 노동으로 변형시킨다. 가치법칙은 체제의 각 단위가 다른 모든 단위의 생산성과 관계 맺도록 강제하는 압력, 곧 체제의 개별 부분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욕구와 의도를 압도하는 강제적 경제력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료의 전제적 지배’나 개별 기업 안의 계획과 대립하기는커녕 정반대다. 가치법칙은 경영자들에게 전제적이 되도록, 노동자들을 쥐어짜도록 강제하며, 외부 경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업 내부의 배치를 ‘계획’하도록 강제한다. 이를 요약하면, 시장의 무정부성이 공장 내부의 전제적 통치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122 서방과의 군사적 경쟁 속에서 서방의 무기·중공업 생산자들이 노동비용을 줄이면 소련도 따라 해야 했고 그 역도 성립했다. 그리하여 소련의 구체적 노동이 세계 규모의 추상적 노동과 연관됐다. 123 군사적 패배의 위협은 작은 개인 기업이 파산의 위협에 떠밀리듯이 거대한 국가자본주의 지배계급이 자기 기업들에 가치법칙을 부과하도록 강제한다. 소련이라는 국민경제를 분석 단위로 고정해 놓고 그 안에서만 가치법칙을 찾는 쪽은 오히려 일국적 시각이다.
14 세계적 경쟁과 국내 축적의 연결
군사적 경쟁은 전자본주의 사회에도 있었고 혁명 정부에도 가해질 수 있다. 따라서 군사적 위협 자체가 국가자본주의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국가자본주의론에서 결정적인 것은 그 압력이 임금노동의 착취, 노동자 통제로부터 독립한 관료의 잉여 전유, 재투자 강제와 결합되는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관계 변혁의 중요한 고리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의 ‘외부’와의 경쟁, 특히 군사적 경쟁이다. 스탈린 자신이 1931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선진국들에 50년 또는 100년 뒤졌습니다. 10년 안에 이 격차를 메워야 합니다.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들이 우리를 분쇄해 버릴 것입니다.” 124 이미 1928년 11월에 그는 “충분한 방위 산업 기반 없이는 우리 나라의 독립을 지킬 수 없다… 그것을 획득하지 못하면 우리는 쓸려 나갈 것”이라고 했다. 125 데렉 하울은 1928년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성립 시점으로 잡는 이유가 그때부터 국제적 경쟁이 소련 국내 과정을 좌우하는 주요 결정 요인이 됐기 때문이라고 명시한다. 1927년 중국 혁명의 패배와 영국과의 외교 단절로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제15차 당 대회는 5개년계획을 군사적 공격 가능성에 대비하는 방향으로 세웠다. 126
빈스는 이를 수치로 보여 준다. 기계제작 공장에서 군수 공장이 소비한 철강 비중은 1932년 46퍼센트였고 1938년에는 94퍼센트에 이르렀다. 127 클리프가 인용한 대로 1938년에는 전체 건설의 29퍼센트가 군수였고, 그는 “군수산업은 소련 경제 체제에서 결정적 지위를 차지한다”고 썼다. 서방과의 경쟁은 탱크, 총, 미사일 하나하나까지 서방과 맞서는 군사 장비 축적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128 클리프의 핵심 통찰도 여기에 있다. 소련과 서방의 경쟁은 주로 군사적이었기 때문에 국가는 탱크와 비행기 같은 특정 사용가치를 추구했다. 그러면서도 경쟁적 축적이라는 작동 원리 때문에 소련 경제는 양차 대전 중의 자본주의 전시경제처럼 여전히 자본주의였다. 129 상대적으로 작은 경제 규모로 서방의 군사력에 맞서려는 압력은 소련 노동자들에게 더 큰 축적 부담을 지우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소련 관료는 클리프가 말한 “자본의 극단적이고 순수한 인격화”였고, 사적 소유가 아니었어도 소련을 거대한 자본주의 기업처럼 운영했다. 130
이것은 곧 본원적 축적이었다. 서방이 근대 초 몇 세기 동안 했던 일, 곧 수백만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삼고 원주민을 학살하고 농민을 땅에서 몰아내 새 공장에서 남을 위해 일해야만 살 수 있는 계급을 만든 일을 스탈린 국가는 훨씬 빠르게 재연했다. 혁명 직후 대중의 소비를 지향했던 경제는 서방과의 축적 경쟁을 위해 소비를 삭감해야 했다. 인용된 추계에서 소비의 비중은 1927년 67.2퍼센트에서 1940년 37.8퍼센트로 떨어졌다. 농민이 수탈당해 1930년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대기근이 일어났고, 서방이 노예제로 본원적 축적을 했듯 스탈린 국가는 강제노동수용소를 대규모로 활용했다. 131 클리프의 말로 “소련의 본원적 축적에서는 영국에서보다 훨씬 많은 피가 흘렀다. 스탈린은 영국이 수백 년 걸려 한 일을 수백 일 만에 해냈다.” 132 이 대목은 자본주의 탄생의 역사 일반과도 잇닿아 있다. 헨리 헬러가 이행 논쟁을 재검토하며 강조하듯, 자본주의의 탄생에서 국가는 결코 주변적 요인이 아니었다. 시장은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한 중립적 경제 실체가 아니라 국가의 규제·법률·강제의 틀에 의존했고, 영토국가의 형성과 중상주의·식민주의를 통한 국가의 시장 창출, 그리고 부르주아지의 국가권력 장악이 자본주의를 공고히 했다. 헬러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초기 자본주의 발전이 제약된 이유로 영토국가 형성의 지체를 강조한다. 133 버드도 폴라니를 인용해 “자유방임에는 자연적인 것이 전혀 없었다… 자유방임은 국가에 의해 강제됐다”고 지적한다. 134 국가가 본원적 축적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예외가 아니라 상례였다. 이 관점에서 1928년 이후 소련의 국가 주도 축적도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와 연결해 분석할 수 있다.
전진의 교육 자료에도 스탈린이 포위에 맞서 자립적 요새를 쌓으려 했다는 서술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국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정책적 선택으로 다뤄질 뿐이다. 전진은 그 압력이 국내의 임금노동·잉여 전유·재투자 관계와 어떻게 결합해 체제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규정하는지 밝히지 않는다. 전진의 기본강령도 마찬가지다. 강령은 관료 체제가 “축적을 위한 축적체제”라고 규정하지만, 관료가 왜 축적하도록 강제됐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 공백 때문에 전진의 이론은 ‘새로운 계급사회’ 이론이나 ‘관료적 관리주의’ 이론에 답할 근거가 불충분해진다. 착취와 관료 내부 파벌 경쟁만으로는 소련이 자본주의인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새로운 착취 사회인지를 가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데 동의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소련이 서방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사회, 곧 지배계급과 경제 메커니즘이 자본주의와 완전히 다른 계급사회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샥트먼이 이 견해에 이론적 형태를 부여했고, 조지 오웰의 《1984년》이 그것을 응축했다. 이 견해는 매우 위험한 실천적 결론을 낳을 수 있었다. 소련이 서방 자본주의만큼 나쁠 뿐 아니라 질적으로 더 나쁘다고 믿게 되면, 소련과 소련에 동조하는 좌파에 맞서 서방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논리가 생긴다. 오웰이 공산당 동조자 등의 명단을 영국 당국에 제공한 일, 샥트먼이 1961년 미국의 쿠바 침공 기도를 지지한 일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간 사례로 논의된다. 다만 이론과 개별 정치적 선택 사이의 관계를 단일한 원인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135 클리프는 그런 이론이 자칫 소련을 서방보다 더 반동적인 사회로 그리게 되고, 결국 서방 제국주의를 ‘차악’으로 지지하는 데로 나아가기 쉽다고 경고했다. 136
필자가 최근 전진의 국유화 강령을 비판한 것도 이 약점과 연결된다. 국가가 주요 산업을 소유하더라도 노동자들이 생산과 국가를 통제하지 못하고 국가가 세계적 경쟁에 대응해 축적을 강제한다면, 국유화된 경제는 노동자를 해방하기는커녕 착취를 조직하는 수단이 된다. 그런데 전진은 국유화와 민주적 계획경제를 해법으로 앞세우면서, 소유 명의의 변경이 이런 축적 압력과 그것을 집행하는 국가권력을 어떻게 바꾸는지 밝히지 않는다. ‘노동자 통제’와 ‘세계혁명’을 강령에 덧붙이는 것만으로는 이 공백을 메울 수 없다. 국유화로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그 성과를 분배하자는 논리와 단절하려면, 노동자 권력과 혁명의 국제적 확장이 전략을 규정해야 한다. 이 문제는 제35절에서 다시 다룬다. 137
15 계획의 계급적 목적
전진은 관료적 명령경제의 비효율성을 강조한다. 아래로부터 피드백이 불가능하고, 잘못된 목표가 수정되지 않으며, 관료적 경쟁이 경제의 합리성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기업과 부처가 유리한 할당량과 쉬운 주문을 둘러싸고 벌이는 협상·이면거래·협박, 중공업과 군수 부문을 앞세운 우선순위 체계와 그 때문에 자원을 박탈당한 비선호 부문의 만성적 목표 미달, 중국 대약진운동 시기 간부들의 과장·왜곡된 보고를 다룬다. 138
우리도 그러한 문제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 문제가 정보 처리의 실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동자와 관료 집단의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대립한다. 관료 집단은 노동자에게 더 많은 잉여를 생산하게 하려 하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강도와 착취를 제한하려 한다. 노동자가 계획에 저항하는 것은 계획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계획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충돌하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비효율’이라는 말을 재검토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생산 할당량의 상향을 막기 위해 작업 속도를 조절하거나, 낮은 임금과 열악한 조건 때문에 이직하는 것은 경영자의 눈에는 비효율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눈에는 자신의 삶과 몸을 방어하는 행동이다. 국가계획의 목표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으면 노동자의 정당한 저항이 경제 운영의 장애로만 보이게 된다.
소련 관료 집단이 실제로 계획한 것은 생산물의 수량뿐 아니라 사회관계 자체였다. 노동자들이 저항하기 어렵게 만들고, 자주적 노동조합과 정당을 금지하고, 교육과 선전과 경찰을 통해 순응을 조직하는 것이 경제계획의 사회적 전제였다. 클리프가 제1차 5개년계획을 전환점으로 본 이유가 이것이다. 자본의 인격화로 변모한 관료는 “노동자 통제의 모든 잔재를 제거하고, 노동과정에서 자발적 동의를 강제로 대체하고, 노동계급을 원자화하고, 모든 사회·정치 생활을 전체주의적 틀에 밀어 넣어야” 했다. 139 따라서 명령경제에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주의적 대안은 아니다. 누가 계획의 목표를 설정하고, 누가 희생의 규모를 결정하며, 누가 그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지를 바꿔야 한다. 전진은 노동자 자주관리와 민주적 계획을 강조하면서도, 소련 경제의 비효율을 설명할 때는 ‘아래로부터의 피드백’ 부족을 앞세운다. 이 설명에서는 노동자의 결정권을 박탈한 계급 지배의 문제가 정보 전달의 결함으로 좁혀진다. 사용자가 노동자의 의견을 듣는 기업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하에서는 노동자가 의견의 제공자가 아니라 최종 결정권의 주체여야 한다.
16 비효율과 경제 위기의 설명
전진은 관료적 명령경제가 본질적으로 비효율적이었고, 지배계급이 권력 유지를 위해 결국 시장자본주의로 전환했다고 요약한다. 그러나 비효율이라는 일반적 특성만으로 시기별 성장과 위기의 차이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소련 경제는 전쟁의 파괴와 회복이라는 변동 속에서도 1930년대 산업화와 전후 수십 년 동안 빠르게 성장했다. 높은 성장률은 자원 낭비나 낮은 효율과 양립할 수 있으므로, 성장 자체가 비효율성 주장을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설명해야 할 것은 빠른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방식이 왜 이후에는 제약으로 바뀌었는가이다. 흐루쇼프는 서방을 경제력으로 “매장하겠다”고 큰소리칠 수 있었다. 140 만델은 한때 이 성장률만으로도 소련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보다 우월함이 입증된다고 했다. 소련은 “계획에 계획을 거듭하고 수십 년에 수십 년을 거듭하면서” 과거의 진보가 미래의 가능성을 짓누르는 일 없이 고른 성장 리듬을 유지하며, “성장 속도의 둔화를 낳는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법칙은 모두 제거됐다”는 것이다. 141 이런 성장을 근거로 국가자본주의를 진보적으로 보는 견해와, 만행을 근거로 역사적 퇴행인 “야만”으로 보는 견해를 클리프는 모두 거부한다. 스탈린주의 사회는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노동계급을 늘렸지만, 세계적 수준에서는 이미 사회주의의 물질적 조건이 갖춰져 있으므로 진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142
이 성장이 관료의 소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한다. 만델은 관료의 물질적 이해관계가 관료 자신에 대한 재화·서비스 공급을 늘리는 방향으로 작용하며 “축적률 극대화의 방향으로는 결코 작용하지 않는다”고 썼다. 하먼이 소련 경제학자 셀류닌의 수치로 반박했듯 사실은 정반대였다. 셀류닌은 가격 왜곡을 보정하면 소련 국민소득의 40퍼센트가 축적으로 갔다고 추산하고 그것을 “본질적으로 전시 기준”이라 불렀다. 서방의 총축적률 평균은 15~20퍼센트다. 소비재는 1928년 산업 생산의 60.5퍼센트였다가 1940년 39퍼센트, 1960년 27.5퍼센트, 1985년 25.2퍼센트로 줄었다. “경제는 점점 더 인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작동하고 있다.” 하먼의 풍자대로, 관료가 이 철강을 먹어 치웠다고 믿지 않는 한 이것을 관료의 소비를 위한 정책이라 부를 수는 없다. 143 관료는 축적을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대규모 축적과 산업화를 주재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살아 있는 노동이 축적된 노동을 늘리는 수단에 불과한” 부르주아 사회와 “축적된 노동이 노동자의 존재를 넓히고 풍요롭게 하고 증진하는 수단에 불과한” 공산주의 사회를 날카롭게 대비했을 때, 소련은 이 점에서 부르주아 사회 쪽에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위기의 원인이다. 위기를 “관료적 계획의 본질적 비효율”로 설명하면 계획 대 시장이라는 자유주의적 프레임에 양보하게 된다. 그 프레임에 따르면 1989~91년은 비효율적 계획이 효율적 시장에 패배한 사건이 된다. 하먼이 만델을 비판하며 지적했듯, 관료적으로 관리되는 경제가 시장 기반 자본주의보다 본래 덜 효율적이기 때문에 ‘가치법칙과 모순된다’는 해석은 서방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의 주장이고, 동시에 소련을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새로운 계급사회, 곧 자본주의와 완전히 다른, 대개는 아무런 역학도 없는 ‘동양적 전제’나 ‘관료적 관리주의’로 보아 자본주의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매스미디어는 ‘공산주의의 위기’가 서방 자본주의의 효율성을 보여 준다고 끊임없이 선전한다. 이 주장에 한 치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 144
국제사회주의 전통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 블록의 위기를 서방과 같은 법칙으로 설명한다. 하먼은 소련 블록에도 과잉축적과 경기변동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1966~74년 저점과 고점 사이의 성장률 격차는 소련이 130퍼센트, 폴란드가 288퍼센트였다. 소련 경제학자들의 추산을 인용한 자료에서도 1960~72년 이윤율이 하락한 것으로 나타난다. 145 만델 자신도 성장률 하락이 5개년계획을 거듭할수록 국민소득 1퍼센트를 늘리는 데 필요한 투자량이 늘어나는 ‘자본계수’의 상승을 표현한다고 인정했다. 하먼이 지적하듯 자본계수는 마르크스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론 자본계수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똑같은 지표는 아니다. 후자는 가치 구성과 노동생산성의 변화를 함께 검토해야 하는 개념이다.) 유기적 구성의 상승은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 경제의 근본 모순, 곧 이윤율 저하 경향과 경제의 증대하는 정체의 토대였다. 그것이 소련 위기의 근저에도 있다면, 이는 1930년대보다 말기의 비효율과 비합리성이 더 컸다는 일반론으로 얼버무릴 일이 아니라 매우 의미심장한 발견이다. 146 물론 자원 배분이 관료의 지령으로 이뤄졌으므로 위기는 공장 폐쇄와 실업 급등보다는 성장률 둔화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해석은 위기의 형태가 다르더라도 경쟁적 축적과 수익성 압박이라는 공통된 역학이 작동했다고 본다. 147
전진의 강령은 이 공통의 법칙을 보지 못한다. 기본강령 2장은 전후 호황을 제2차 세계대전의 대량 파괴와 노동계급의 역사적 패배로, 1970년대 이후 위기를 이윤율 저하로,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노동자 빈곤화에 따른 “생산과 소비의 간극”으로 설명한다. 148 이 서사에서 소련·동유럽의 몰락은 신자유주의·세계화 흐름 속에서 일어난 일로 한 줄 언급될 뿐이다. 소련 블록 경제가 서방과 같은 시기에, 곧 1970년대에 둔화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설명되지 않는다. 관료제의 결점에서 문제를 찾는 사람들은 소련 블록 경제가 오랫동안 번영하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 성장이 더뎌지고 1980년대 중반 이후 정체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자본의 세계화라는 세계적 맥락 속에 소련 블록 위기를 놓는 국가자본주의론은 이 물음에 일관된 설명을 제시한다. 149
하먼은 1990년에 이 메커니즘을 이렇게 요약했다. 스탈린주의 관료는 1930년대의 세계 대불황과 커지는 전쟁 위협에 대외 교역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국내에서 자본을 축적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서방과 제3세계의 많은 자본주의 지배계급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행동했다. 그 시기 전체가 서방의 케인스주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수입대체 성장, 중국과 심지어 인도의 스탈린주의 ‘계획’ 모방처럼 상대적으로 자족적인 경제의 시대였다. 그러나 1960~70년대에 이런 접근은 어디서나 세계경제의 세계화와 점점 더 모순에 빠졌다. 자본의 집중으로 최첨단 산업에서 앞서 나가는 데 필요한 자원이 거의 모든 나라의 국내 자원을 넘어섰고, 국경 안에서 발전한 산업들은 새로운 국제 분업의 일부로 재편돼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재편은 영국처럼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제한적인 국가자본주의에서도 고통스러웠다. 소련 블록의 더 자급자족적이고 완전한 국가자본주의에서는 파괴적이었다. 소련 지배계급은 모든 자본주의 지배계급을 주기적으로 괴롭히는 문제, 곧 과거에 성공적 축적을 가능하게 했던 바로 그 방법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문제에 부딪혔다. 세계 체제의 일부이므로 방식을 바꾸려 해야 했지만, 그 시도는 통제할 수 없는 사회 세력을 풀어놓았다. 150 이미 1970년 영국 국제사회주의자들(IS, 이후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전망 문서에서 클리프는 소련 블록이 서방 자본주의의 위기와 비슷한 원인을 가진 경제 위기의 결과로 결국 와해될 것이라고 썼다. 1989~91년 소련 블록의 노동계급이 정권 퇴진과 블록 해체에 결정적 구실을 했을 때, 그 전망의 설명력을 평가할 중요한 증거가 제시됐다. 151
여기에는 눈여겨볼 대칭이 있다. 캘리니코스가 지적했듯, 군사화된 국가자본들로 이뤄진 세계 체제라는 부하린의 분석은 클리프의 소련 국가자본주의론과 키드런의 상시군비경제론 모두의 바탕이다. 152 클리프의 이론은 소련 블록의 축적을, 키드런의 이론은 전후 서방의 장기 호황과 그 종말을 같은 메커니즘, 곧 군사적 경쟁으로 설명한다. 상시군비경제론은 군비 지출을 (케인스주의처럼) 단순한 수요 주입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 이론의 핵심은 군비 지출이 잉여의 일부를 민간 자본의 재축적에서 빼내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과 이윤율 저하를 늦췄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전후 호황을 군사적 경쟁과 자본 축적의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153
반면 전진의 강령은 전후 호황에서 전쟁의 파괴와 노동계급의 패배를 강조한다. 이 설명과 소련 분석 사이의 관계는 강령 안에서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다. 돔이 전후 호황을 “예기치 않은 호황”이라는 제목 아래 다루며 이 시기를 쇠퇴의 시대 속 예외로 취급하는 것도 궤를 같이한다. 154 전진의 강령이 쓰는 “쇠퇴하는 자본주의”라는 틀과 돔의 “자본주의 쇠퇴의 시대”라는 틀은 이 점에서 닮았다. 그러나 ‘쇠퇴’라는 시대 규정만으로는 각 시기의 호황과 위기가 생기는 구체적 경로가 설명되지 않는다. 전진이 소련 사회 분석과 전후 호황 설명을 직접 연결한 적은 없다.
1989~91년의 이행을 하먼이 자본주의 형태의 변화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한 자본주의적 착취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옆걸음질 치기”였다. 155 전진도 이행 과정에서 지배계급의 연속성은 인정하므로 결론은 비슷하다. 그러나 전환의 동력을 “비효율”로 설명하는 한, 그 결론은 이윤율과 세계적 경쟁이라는 공통의 법칙이 아니라 계획이라는 형식의 결함에 기대게 된다. 하먼이 지적했듯, 소련 블록 국가들의 위기가 세계 체제 안의 경쟁적 축적의 결과라면 서방 모델의 자본주의로 옮겨 가는 것으로는 위기가 끝나지 않는다. 브레즈네프와 고르바초프 시기에 시작된 경제 위기가 1990년대 초에 더 깊어지고 2008년 세계 위기에서 다시 맹렬하게 돌아온 것이 시장화가 자본주의적 위기를 없애 주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다만 각 위기의 구체적 원인까지 동일했다는 뜻은 아니다. 156
17 산업화와 노동자 해방의 관계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에서 생산력은 공장과 기계의 양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인간의 지식, 협력 능력, 창의성, 스스로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역량도 생산력이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이런 능력을 해방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이어야 한다. 따라서 “먼저 산업화를 위해 노동자를 복종시키고, 나중에 풍요가 생기면 민주주의를 제공한다”는 구상에는 근본적 문제가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조직할 권리와 정치적 능력을 잃고, 국가에 대한 복종만을 배우며, 별도의 지배층이 축적을 독점한다면, 그 과정에서 생산력과 노동계급의 규모가 커질 수는 있어도, 동시에 해방을 가로막는 새로운 지배관계가 강화된다.
이것은 산업 발전을 거부하는 주장이 아니다. 문제는 산업 발전의 주체와 방식이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교육과 토론의 시간을 확보하고, 생산자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것은 생산력 발전이 끝난 뒤의 보상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발전 방식의 일부다.
전진의 글도 노동자들이 정치에 참여할 시간과 에너지를 얻으려면 임금을 높이고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원칙을 자신의 소련사 서술에 적용하면 모순에 부딪힌다. 157 노동자들에게서 시간과 권리와 주도권을 빼앗아 산업화를 추진하는 체제를 노동자국가의 발전 과정으로 계속 묘사할 수 있는가? 노동자의 자기활동을 파괴하는 축적이 나중의 자기해방을 준비한다는 설명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우리에게 물질적 조건과 정치적 주체는 그렇게 분리될 수 없다. 노동자의 해방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무력하게 만드는 과정은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파괴한다.
제4부 소련 분석과 국제 운동의 전략
이론은 정치적 선택을 정당화하거나 제약하는 데 영향을 준다. 국가자본주의론이 “실천을 이끄는 이론”(하먼)이라면,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론도 실천을 이끌었다. 제4부에서는 1928~38년 국제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경험을 통해, 노동자국가 규정이 당대의 정치적 선택을 어떻게 제한했는지 살펴본다. 이 역사적 검토가 당시 운동의 모든 오류를 오늘의 전진에 귀속시키는 것은 아니다. 전진이 1930년대 후반까지의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규정할 때, 우리는 그 규정이 당시 국제 운동의 전략적 선택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까지 검토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18 노선과 활동 조건을 함께 검토하기
우리는 1920년대 말과 1930년대의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왜 자신의 정당성을 실제 노동자 운동의 영향력으로 바꾸기 어려웠는지 짚어 봐야 한다. 여기에는 탄압과 객관적 패배뿐 아니라, 운동이 자신을 무엇의 일부로 이해했는지, 누구에게 호소했는지, 어떤 조직을 개혁하려 했는지의 문제가 포함된다.
1929년 망명 이후 트로츠키가 국제 조직 건설에 힘을 쏟은 것은 단순히 소련 안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사회주의 투쟁이 본질적으로 국제적이며, 소련에서 자신이 여전히 노동자국가로 여긴 것을 구하려면 국제 혁명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처음부터 새로운 공산당들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 국제 좌익반대파는 코민테른의 분파를 자처했다. 목표는 코민테른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도부를 바꾸고 조직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선전과 활동의 주된 대상도 기존 공산당의 당원과 지지자였다.
이것은 코민테른이 노동계급이 독립적으로 싸우면서 필요에 따라 협력할 상대인가, 아니면 혁명적 정당성을 본래 보유하고 있어 되찾아야 할 중심 조직인가가 걸린 문제였다. 소련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새롭게 세워야 할 사회인가, 아니면 잘못된 지도부 때문에 일그러진 자기 국가인가. 두 질문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서로 강하게 연결돼 있었다.
19 스탈린의 좌선회와 관료의 독자적 이해관계
1928~29년 스탈린의 전환은 좌익반대파의 분석을 근본적으로 시험대에 올렸다. 스탈린은 부하린과의 동맹을 깨고 강제적 산업화와 농업 집산화를 추진했다. 국제적으로는 1928년 코민테른 제6차 대회를 거쳐 초좌파적 종파주의 노선이 채택됐다.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으로 규정해 공동 투쟁을 거부하고, 별도의 적색 노동조합을 조직하며, 여러 나라에서 권력 투쟁을 즉각적 과제로 제시하는 노선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제3기’ 정책이다.
이 전환은 왜 좌익반대파에게 큰 문제였는가?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의 기존 비판에서 스탈린은 우파와 좌파 사이를 동요하는 중도 세력이었다. 주된 자본주의 복고 위험은 부농과 네프맨, 그리고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부하린의 우파에서 나온다고 봤다. 좌익반대파는 산업화와 경제 계획을 그 위험에 맞서는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그런데 스탈린이 우파를 공격하고 산업화와 집산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국가를 노동자국가로 보고, 국영 산업의 확대를 사회주의 방향의 핵심 지표로 본다면, 이 전환에 상당한 ‘좌파적’ 또는 ‘사회주의적’ 내용이 있다고 해석할 여지가 생겼다.
국제사회주의 전통의 비판은 스탈린주의 관료가 좌파와 사적 자본주의 사이에서 동요하는 수동적 중간 세력이 아니라, 독자적인 계급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세력은 좌파를 제거하기 위해 우파와 협력할 수 있었고, 이후 자기 국가기구에 의존해 우파도 제거할 수 있었다. 사적 자본가와 부농을 공격하는 것은 반드시 노동자 권력을 강화하는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새로운 관료 지배계급의 권력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158
하먼이 지적하듯, 트로츠키가 1928년 이전에 싸웠던 계획·산업화 개념과 스탈린이 실행한 것 사이에는 날카로운 대조가 있었다. 트로츠키가 산업 성장을 주장한 목적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 자신감, 사회적 비중을 높이는 것이었다. 반면 스탈린의 산업화는 생활수준 삭감과 경찰 탄압을 수반했다. 농촌에서 새로 유입된 노동력이 급증하면서 기존 노동자들의 조직적 전통을 이어 가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스탈린의 정책과 트로츠키의 정책 사이에는 형식적 유사성이 있었다. 이것이 한때 트로츠키 자신도 혼란스럽게 했고, 라데크와 프레오브라젠스키 같은 사람들이 스탈린주의에 투항하게 했다. 그러나 결국 트로츠키 자신도 깨닫게 됐듯이,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둘은 정반대였다. 159
전진의 글은 분명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노선을 바꿨다는 점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 권력이 누구(어떤 계급)의 권력이었는지에서는 여전히 노동자국가라는 규정을 10년 가까이 유지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관료 집단의 독자적 이해관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집단이 구축하는 국가를 노동계급의 국가로 남겨 두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20 강제 산업화의 목표와 사회적 내용
전진은 좌익반대파의 산업화와 스탈린의 산업화를 구별한다. 전자는 노동자 민주주의와 농민의 설득을 전제로 했지만, 후자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파괴와 농민에 대한 폭력에 기초했다는 것이다. 이 구별 자체는 옳다. 우리도 이 점을 지적한 바 있다. 트로츠키가 노동자와 빈농·중농의 생활수준 개선을 목표로 했다는 것도 인정한다. 160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실제 스탈린의 산업화가 시행됐을 때 트로츠키가 그것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묻는다. 우리는 트로츠키가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노동자들의 권력 상실과 그 권력의 회복을 위한 독자적 투쟁보다 산업화 문제를 중심에 놓았다고 비판한다. 특히 1931년 4월의 강령적 문서 〈소련 발전의 문제들〉은,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새로운 혁명 없이, 개혁의 방법과 경로로” 관료를 자신에게 복종시킬 가능성을 잃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못 박았다. 161 노동자들이 정치 권력을 잃었다는 사실과 그 권력을 되찾기 위한 투쟁은 전면에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조치가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희생을 비판하면서도 5개년계획을 계획경제의 우위를 입증한 증거로 찬양하는 모순에 빠졌다. 1932년 1월 그는 “계획적 지도의 거대한 우위가 그 무엇으로도 반박할 수 없는 힘으로 입증됐다”고 썼다. 162 1930년 4월에는 실질임금이 반 토막 나던 바로 그 시기에 노동계급을 여전히 이 나라의 “지배계급”이라고 불렀다. 163 이 시기 트로츠키는 노동자들의 희생과 관료적 운영을 비판하면서도, 산업화 자체를 새로운 착취 계급의 형성과 연결해 해석하지는 않았다.
물론 전진의 자료는 스탈린 산업화를 사회주의적 승리로 찬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진이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의 노선을 노동자 자기해방 원리의 일관된 대안으로 제시하려 한다면, 우리가 방금 지적한 이 모순을 설명해야 한다. 스탈린의 산업화는 노동자국가 내에서의 잘못된 산업화였는가, 아니면 노동자들의 지배권을 부정하는 새로운 생산관계의 구축이었는가? 이 차이는 ‘좋은 계획 대 나쁜 계획’의 차이보다 훨씬 크다.
21 좌익반대파 일부의 투항과 그 이론적 근거
전진의 글은 각주에서 좌익반대파를 모두 트로츠키와 동일시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프레오브라젠스키 등의 일부가 강제 집산화에 찬성하고 스탈린과 같은 길을 걸었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그 투항을 가능하게 한 이론적 전제까지 비판해야 한다. 일부 지도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서 멈출 수 없다. 164
우리의 비판은 이 사실의 이론적 의미를 더 멀리 밀고 나간다. 헤인스가 보여 주듯 좌익반대파의 많은 구성원들은 1928~29년의 급속한 산업화와 집산화를 자신들의 노선이 채택된 것으로 오해하고 투항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이반 스미르노프는 “중앙위원회는 야만적이고 때로는 어리석지만 미래를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165 헤인스는 이것을 치명적 실수라고 부른다. 라이만도 스탈린이 좌익반대파의 강령에서 빌려 온 것은 주로 겉모습이었고, 노동자와 농촌 빈민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고 그들의 공적·정치적 참여를 실제로 늘린다는 핵심은 빼 버렸다고 지적한다. 166
좌익반대파의 일부 지도자들이 스탈린에게 항복한 데에는 탄압, 고립, 절망, 개인적 약점이 작용했지만, 그들이 항복을 정당화할 수 있었던 정치적 논리나 이론적 근거도 있었다는 점을 봐야 한다. 스탈린이 비록 관료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수행하고 있지만, 반대파가 요구한 산업화와 계획의 방향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국유화된 산업의 확대가 사회주의적 방향을 나타내고, 스탈린 관료 집단은 독자적인 착취 계급이 아니라 노동자국가 안의 동요하는 관료층이라면, 스탈린의 ‘좌선회’는 반대파에게 타협과 복귀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이론적 혼란이 탄압과 결합돼 프레오브라젠스키, 라데크 등의 항복을 낳았다. 1928년 이후에도 “관료가 지배하는 노동자국가”가 존속했다고 보는 전진의 틀은 그 오해가 전제한 가정을 완전히 끊어 내지 못한다. 국가가 강제하는 급속한 자본 축적도 국유 경제를 토대로 하는 것이라면 노동자국가의 틀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가정 말이다.
따라서 트로츠키가 항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평가하는 것과 그의 분석을 검토하는 일은 구별해야 한다. 그가 항복하지 않고 투쟁을 계속했다는 것은 위대한 정치적·도덕적 성취다. 그러나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항복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던 전제들이 그의 이론 안에도 어느 정도 남아 있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트로츠키의 용기와 그의 분석의 한계를 동시에 인정한다. 혁명적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가장 훌륭한 지도자의 최종 선택만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통 내부에서 왜 다른 선택들이 가능해졌는지까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어야 한다.
22 감옥 안의 논쟁과 노동자의 독립적 행동
스탈린 정부의 정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1930년 5월 스탈린의 보안경찰 오게페우에 체포돼 1935년 12월 소련을 떠날 때까지 수감과 유배 생활을 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안테 칠리가는 회고록에서 소련 감옥 안의 논쟁에 대해 전했다. 그 논쟁은 167 노동자국가 규정의 문제가 단순한 사후적 학술 논쟁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1930년대 초 일부 좌익반대파 수감자들은 강제 산업화와 집산화를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소련이 더는 노동자국가가 아니라는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좌익반대파 수감자들은 트로츠키가 소련이 더는 노동자국가가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1932년 여름에야 감옥에 도착한, 앞서 본 1931년 4월의 강령 문서 〈소련 발전의 문제들〉은 첫 장부터 소련을 “프롤레타리아 국가”로 규정했다. 5개년계획의 목표뿐 아니라 방법까지 사회주의적이라고 강조했고, 산업화의 “전례 없는 속도”가 “사회주의의 경제적 방법”의 효력을 입증했다고 찬양했다. 168 1932년 강제 집산화가 낳은 기근과 강제 산업화의 참상이 분명해지자, 수감자들(베르흐네우랄스크 격리 수용소의 공산주의자 수감자 140명 중 120명이 트로츠키주의자였다)의 논쟁은 체제의 계급적 성격을 둘러싸고 격렬해졌다. 169 칠리가를 비롯한 일부는 관료가 프롤레타리아에 적대적인 실제 계급이며 정치혁명뿐 아니라 사회혁명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칠리가를 포함한 10명가량은 서면 선언을 내고 ‘트로츠키주의자 집단’을 탈퇴했다. 칠리가의 회고에 따르면, 그들은 트로츠키의 노선이 체제의 토대를 바꾸지 않은 채 관료의 인적 구성을 교체하고 제한된 자유를 도입하는 데 그칠 것이라며 “1830년의 반복”이라고 비판했다. 170
칠리가의 핵심 문제 제기는 트로츠키 견해의 수신자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트로츠키의 비판과 조언은 주로 당 중앙위원회와 당 기구에 전달되는 것으로 보였다. 칠리가는 당시 접한 문서에서 노동자들에게 독자적인 파업과 투쟁을 호소하는 내용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칠리가가 문제 삼은 것은 트로츠키가 노동자 생활수준의 하락을 두고 “우리의 가장 귀중한 자본인 노동력을 낭비하고 있다”며 국가의 노동력 관리라는 관점에서 논평했다는 점이다. 171
이것은 전진의 서술에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진다. 1930년 무렵 임금이 깎이고 노동강도가 높아진 소련 노동자가 있다고 하자. 그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작업 속도를 늦추거나 파업을 조직한다면, 그 투쟁의 목표는 노동자국가를 교정하는 데 머물러야 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착취 계급의 지배를 타도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가?
두 설명이 어떤 경우에는 전술적으로 비슷한 행동을 지지할 수도 있지만, 투쟁의 범위와 목표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크게 달라진다. 전자를 택하면 국가의 발전과 계획의 성공이 노동자 투쟁의 한계를 설정할 여지가 생긴다. 후자는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화와 지배계급 타도를 일관되게 연결할 근거를 제공한다. 그렇다고 노동자국가론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이 노동자 투쟁을 억제한다는 뜻은 아니다. 계획이 노동자 투쟁 때문에 차질을 빚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투쟁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먼저 그 계획이 누구의 이해관계를 구현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우리가 오늘의 국유화 요구에 대해 지적하는 것도 같은 논리다. 국유화된 기업과 산업은 여전히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아래 운영되고 그 안에서 계급투쟁은 계속되므로, 일부 개혁주의적 노조 지도자들이 국유화라는 지위를 그 부문 노동자 투쟁을 억제하는 논거로 쓰려 할 때 국가자본주의 개념은 유용한 경고가 된다. 172 우리가 노동자국가 규정을 중대한 정치 문제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3 코민테른의 분파라는 자기 규정
초기 좌익반대파가 공산당 노동자들에게 접근한 것은 그 자체로 잘못이 아니었다. 혁명적 노동자들의 큰 부분이 공산당에 남아 있었으므로, 그들과 토론하고 함께 싸우는 것은 필요했다. 트로츠키의 이 판단을 단순한 비이성적 집착으로 취급할 수 없다. 문제는 공산당 노동자들에게 접근하는 것과 코민테른을 개혁해야 할 자신의 조직으로 규정하는 것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좌익반대파는 실제로는 코민테른 밖으로 쫓겨났지만, 정치적으로는 그 내부 분파를 자처했다. 이 때문에 조직적 실재와 자기 규정 사이에 틈이 생겼다. 공산당 노동자들의 눈에는 소련과 코민테른이 여전히 10월혁명을 대표하는 거대한 세력이었고, 반대파는 그 바깥에서 공격하는 작은 조직으로 보였다.
그런데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 자신도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이라는) 그 거대한 조직의 기본적인 역사적 정통성을 대부분 인정하고 있었다. 스탈린의 ‘좌선회’는 이 어려움을 더욱 키웠다. 반대파가 비판하던 우파적 정책을 스탈린이 폐기한 것처럼 보이자, 공산당 노동자들에게 반대파의 독자적 존재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는 반대파가 성장하지 못한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물론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규정하면 반드시 코민테른에 남아야 한다는 논리적 필연은 없다. 실제 트로츠키도 1933년 이후 노동자국가 규정을 유지하면서 새 인터내셔널 건설로 나아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노동자국가라는 판단, 혁명의 정통성을 소련 국가와 당에 연결하는 사고, 코민테른 개혁 전략이 서로를 지탱했다.
따라서 1928~33년의 노동자국가 규정을 사후적으로 유지하려면, 그 규정과 결합했던 전략적 한계와 어떻게 거리를 둘 것인지 설명해야 한다. 국가의 명칭만 유지하고 그 명칭이 실제 운동에서 수행한 기능을 무시해 버릴 수는 없다.
24 독일 파시즘에 관한 트로츠키의 성취
독일 파시즘에 대한 분석은 트로츠키 사상의 가장 강한 면을 보여 준다. 우리는 트로츠키가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을 동일시하는 스탈린주의 노선을 비판하고, 파시즘에 맞선 공동 저항을 주장한 것을 트로츠키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정치적 성취로 평가한다. 클리프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에 이른 계기도 바로 독일 공산당이 사회민주당과의 공동전선을 거부해 나치의 집권을 허용했다는 트로츠키의 고발을 읽은 것이었다. 173
트로츠키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정치적 차이를 감추라고 하지 않았다. 서로 비판하면서도 파시스트의 공격에 맞서 노동조합, 신문사, 인쇄소, 회관, 그 밖의 다른 노동자 조직들을 공동으로 방어하자고 했다. 공동 행동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그 경험 속에서 지도부의 정책을 판단하며, 더 큰 정치적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구상은 지도부들 사이의 외교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실제 행동 능력을 중심에 놓았다. 당의 기존 노선이나 권위보다 노동자들이 살아 있는 조직을 지키고 함께 싸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트로츠키 안의 혁명적·자기해방적 경향을 최대한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바로 이 성취가 소련 문제에서의 약점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독일에서는 노동자들의 독립적 조직과 공동 행동을 해체하는 정책을 노동계급에 대한 치명적 위협으로 파악했다. 그런데 소련에서는 그런 독립적 조직이 이미 파괴되고 국가에 종속돼 있었는데도 그 국가를 노동자국가로 규정했다.
물론 독일과 소련의 역사적 조건은 달랐다. 그러나 자기해방이라는 기준이 국가의 기원이나 성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면 문제가 남는다. 독일 노동자의 해방에는 실제 조직과 능동성이 필수이지만, 소련 노동자의 계급 지배는 그런 조직과 능동성이 사라져도 어떤 다른 형태로 지속될 수 있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에 관한 트로츠키의 탁월한 분석을 상대화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분석에서 중심을 이뤘던 노동자의 집단적 행위 능력을 소련 문제에도 일관되게 적용하라는 것이다.
25 올바른 예측과 조직 성장 사이의 간격
예측의 정확성이 입증되면 노동자들이 그 조직을 지지하게 된다는 식의 인식은 현실의 정치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 중국 혁명의 패배(1927)나 독일 파시즘의 승리(1933)는 트로츠키의 경고를 입증했다. 그러나 노동자 대중이 직접 경험한 것은 트로츠키 분석의 정확성보다 자신들의 조직과 투쟁이 패배했다는 사실이었다. 패배는 자신감과 행동 능력을 떨어뜨리고, 새로운 소규모 조직보다 이미 알고 있는 대규모 조직과 국가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강화한다. 트로츠키 자신도 “프롤레타리아 전체가 최대의 패배를 겪고 있을 때 혁명적 경향이 폭풍 같은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고 썼다. 174 그러나 이것으로 설명이 끝나지는 않는다. 1936년 프랑스에서는 수백만 명이 파업과 공장 점거에 나선 고양기였는데도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정체했다. 혁명적 고양기에 혁명 정당이 저절로 성장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기계적 결정론이다. 175
이 점에서 전진의 역사 서술은 핵심 문제를 놓친다. 전진의 글은 개혁주의와 스탈린주의 지도부의 배신이 혁명을 좌절시켰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지도부의 잘못이 거듭 드러났는데도 왜 혁명적 대안이 대중적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는지는 별도로 설명해야 한다. 잘못된 지도부의 영향력은 단순히 노동자들이 속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조직적 유대, 과거의 성과, 일상적인 의존 관계, 대안의 불확실성, 패배의 기억과 두려움에 바탕을 둔다. 새로운 혁명적 조직은 올바른 논리를 제시하는 것만으로 이런 관계를 대체할 수 없다.
우리는 좌익반대파가 이런 조건 때문에 노동자들의 삶에서 고립되고 소규모 선전그룹으로 밀려났으며, 그 고립이 다시 조직의 구성과 정치문화에도 영향을 줬다고 본다. 작은 전술적·조직적 차이가 격렬한 분파 싸움으로 확대됐고, 일부 활동가들은 실제 대중조직 건설보다 종파적 삶에 익숙해졌다. 이것을 전진의 설명에 적용하면, 혁명을 배신한 지도부와 올바른 노선을 지킨 반대파의 대립으로만 서술해서는 크게 부족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노동자들이 실제로 누구를 믿고 왜 따랐는지, 혁명가들이 그 관계를 바꿀 수 있는 활동을 했는지까지 분석해야 한다.
26 1933년의 전략적 전환과 남은 문제
히틀러의 집권 뒤에도 코민테른은 초좌파적 종파주의 노선을 정당화했다. 트로츠키가 기대했던 공개적 재검토와 책임 추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코민테른을 혁명적 조직으로 개혁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1933년 7월 새 인터내셔널 창설로 방향을 바꿨다.
이 전환은 실질적 변화였다. 그리고 그 변화는 소련 내의 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 트로츠키는 새 당이 필요하다고 보기 시작했고, 스탈린주의 관료 집단을 정상적인 당대회나 소비에트 대회의 절차로 제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33년 10월 그는 “관료는 오직 힘에 의해서만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손에 권력을 넘기도록 강제될 수 있다”고 썼고, 3년 뒤 《배반당한 혁명》에서는 당과 국가 어느 쪽도 개혁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어떤 악마도 자기 발톱을 스스로 자른 적이 없다.” 176
따라서 1929년의 트로츠키와 1936년의 트로츠키를 하나로 뭉뚱그려 비판해서는 안 된다. 당내 개혁 노선에서 ‘정치혁명’ 노선으로, 일당제 옹호에서 소비에트 내 다당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실제 변화가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근본적 문제가 남았다고 본다. 노동자가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며 관료 집단을 강제로 타도해야 한다는 판단에 이르렀는데도 그가 국가 자체의 계급적 성격은 여전히 노동자적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혁명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사회적 계급 지배를 바꾸는 혁명이 아니라 정치적 통치 형태를 바꾸는 혁명이라는 구분이 제기됐다. 트로츠키는 이것이 “깊은 사회적 결과”를 낳는 정치혁명이라고 했지만, 사회혁명은 아니라고 했다. 177
전진의 1930년대 후반 전환설은 관료 집단이 새로운 자본가 계급이 됐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반혁명의 시점을 1930년대 후반으로 옮겨 놓았다고 해서 그 이전 시기를 설명하는 노동자국가론의 모순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1928년의 반혁명과, 전진이 국가의 노동자적 성격이 소멸했다고 보는 1930년대 후반 사이에 남은 10년 가까운 간격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트로츠키 자신도 1935년에 “1924년, 그것이 소비에트 테르미도르의 시작이었다”고 인정했다. 178 그러면서 그는 프랑스 혁명에서 테르미도르가 혁명의 본질적 성과를 보존한 비혁명적 정권의 수립이었고 반혁명과 다르다고 덧붙였다. 클리프가 논증한 것은 물질적 현실을 검토하면 1924년의 소련 테르미도르 이후 다시 한번 변화가, 이번에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179 이런 질적 변화가 일어났는데도 노동계급은 여전히 지배계급이라는 것이 트로츠키의 입장이었고, 전진은 그 입장을 1930년대 후반까지 그대로 따른다.
27 소련 외교와 국제 노동운동의 독립성
스페인으로 넘어가기 전에 1928~36년 소련 외교정책 전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 소련 외교는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불가피한 외교적 거래를 넘어 국제 노동운동과 혁명을 소련 국가의 외교적 필요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변화를 입증하는 데 자본주의 국가와 조약을 맺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트로츠키 자신도 노동자국가가 생존을 위해 제국주의 국가와 군사협정까지 맺을 수 있다고 봤다. 그의 기준에서 결정적인 문제는 그 협정을 위해 상대국 노동자들에게 자국 부르주아지와 군대를 지지하게 하느냐였다. 따라서 핵심 질문은 ‘노동자국가가 자본주의 국가와 협정을 맺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 협정을 위해 다른 나라 노동계급의 독립적 계급정치를 희생시키는가’이다. 특히 1935~36년의 사례들을 레닌 시기의 외교 원칙과 대조하면 이 차이가 선명해진다.
레닌 시기의 국가 외교와 계급정치
레닌은 고립된 노동자국가가 자본주의 국가와 평화조약·통상협정·차관·양허협정까지 맺을 수 있다고 봤다. 1921년에는 외국 자본가에게 광산과 공장 등을 양허하고 이윤을 보장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이것을 세계 자본주의에 일정한 “공물”을 바치는 후퇴라고까지 표현했다. 180 따라서 ‘부르주아 국가와 협정을 맺었으니 노동자국가가 아니다’라는 논리는 레닌의 입장이 아니다.
그러나 레닌은 코민테른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원칙을 세웠다. 1920년 민족·식민지 문제 테제에서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과 “일시적 동맹”을 맺을 수 있지만 그들과 융합돼서는 안 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181 원칙은 두 층으로 나뉘었다. 소련 국가는 적대적 자본주의 국가와도 타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라의 노동계급과 공산당은 자기 지배계급에 대한 정치적 독립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1928~36년의 변화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이 두 층위의 관계가 뒤집혔는가 하는 것이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스탈린-라발 공동성명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훨씬 극단적인 양보였다. 소련은 영토와 자원을 대규모로 포기했고, 레닌 자신도 그것이 흔히 “치욕적인” 평화라고 불리는 가혹한 평화임을 인정했다. 182 그의 논리는 독일이 진보적이라거나 독일의 군사력이 평화를 수호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혁명 정부가 당장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으므로 독일 제국주의 앞에서 군사적으로 후퇴한다는 것이었다. 더 결정적인 점은 조약 체결 뒤에도 볼셰비키가 독일 제국주의에 대한 혁명적 선동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18년 11월 레닌은 독일 제국주의와 “선전과 내부로부터의 침식”을 통해 싸워야 했다고 회고했다. 183 소련 정부는 독일 정부와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독일 노동자들에게는 계속 자국 정부에 맞서 싸우라고 했다. 두 층위는 분명히 구별됐다.
그 뒤 1920~21년 영국과 통상협정을 협상하면서 소련 정부는 영국이 요구한 “공식 선전” 제한에 상당한 양보를 할 준비가 돼 있었다. 레닌은 1920년 12월 영국이 소련 정부가 공식 선전을 하지 않고 동방에서 영국의 이익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원칙적으로 선언하라고 요구했다고 설명하면서, 소련 정부는 공식 선전을 하지 않을 것이고 동방에서 영국의 이익을 침해할 의도도 없다고 말했다. 영국과의 무역협정을 위해 “최대한의 양보”를 할 필요가 있다고까지 했다. 184 따라서 ‘레닌 시대에는 소련의 외교적 필요 때문에 국제 혁명운동에 아무런 제약도 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과장이다. 실제로 그런 제약과 타협은 있었다.
그래도 1935년과의 차이는 남는다. 영국과 통상협정을 맺으려고 소련 정부가 자기 정부 기관의 선전을 제한하는 것과, 프랑스와 군사동맹을 유지하려고 프랑스 공산당이 자국 군국주의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부르주아 정당과 장기적 정치 블록을 형성하고 국내 계급투쟁의 수위를 조정하는 것은 같은 층위의 일이 아니다. 게다가 같은 1920년의 코민테른 문서는 부르주아 세력과 동맹을 맺더라도 노동계급 운동은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1935년 5월의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 자체는 이 기준으로 보면 문제가 아니다. 히틀러의 독일을 견제하려고 프랑스와 군사협정을 맺는 것은 브레스트나 라팔로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있다. 트로츠키도 적과의 실무적 협정은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다”고 봤다. 그는 1918년 레닌이 “영·프 제국주의 강도들에게서 감자와 무기를 받는 데” 찬성표를 보탠다는 쪽지를 보낸 일화를 들어, 제국주의자들과의 실무적 협정은 전적으로 허용되지만 그들과의 정치적 연대는 결코 허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185
질적으로 다른 대목은 조약 직후 스탈린과 프랑스 외무장관 피에르 라발의 회담이었다. 회담 뒤 공동성명에서 스탈린은 프랑스가 안보에 필요한 수준으로 군사력을 유지하는 국방 정책을 “이해하고 전적으로 승인한다”고 선언했다. 주소련 미국대사 윌리엄 불릿이 미 국무부에 보고한 라발의 설명에 따르면, 라발은 스탈린에게 프랑스 공산당이 군사예산과 2년 복무제에 반대하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했고 스탈린은 “동의한다”고 답했고, 이를 에둘러 표현하는 공개 성명을 내기로 약속했다. 그것이 바로 앞의 공동성명이다. 불릿은 별도의 소식통을 근거로 스탈린이 코민테른을 통해 프랑스 공산당에 군비 반대 선동을 중단하도록 지시하기로 했다는 정보도 보고했다. 186 이는 소련의 외교적 합의와 프랑스 공산당의 노선 전환을 연결하는 중요한 동시대 증거다. 다만 불릿의 보고는 라발의 설명과 별도 소식통에 기초한 것이므로, 스탈린의 직접 발언록과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트로츠키가 공격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스탈린의 범죄는 계급의 적과 이런저런 실무적 협정을 맺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정부의 국방정책을 승인한 데 있다고 명시했다. 187 실제로 공동성명 이후 프랑스 공산당은 계급 협조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당은 곧 급진당 대회에 보낸 편지에서 “노동과 저축의 열매인 사적 소유는 존중돼야 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88 1918년의 논리가 ‘독일 제국주의에 굴복해 일시적으로 조약을 맺지만, 독일 노동자는 독일 제국주의에 맞서라’였다면, 1935년의 논리는 ‘프랑스와 군사조약을 맺고, 프랑스 공산당도 프랑스 국가의 군사력 강화에 대한 태도를 바꿔라’였다. 따라서 우리 비판의 초점은 스탈린이 협정에 서명했다는 것이 아니라 소련의 외교 동맹을 위해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자국 제국주의의 군사력을 지지할 수 있다는 노선을 채택하게 했다는 것이다.
라팔로 조약과 프랑스 민중전선
1922년 라팔로에서 소련은 자본주의 독일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고, 서로 전쟁 배상 청구를 포기하고, 경제적 최혜국 대우를 약속했다. 레닌은 이를 자본주의 국가와 맺을 수 있는 정상적인 형태의 협정으로 긍정 평가했다. 그러나 소련이 독일 정부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독일 공산당에 독일 부르주아 정부를 지지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같은 해 코민테른 제4차 대회는 독일을 포함한 유럽에서 노동계급 투쟁은 “부르주아지와의 가장 격렬한 투쟁, 결국 내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규정했다. 189 모스크바와 독일 부르주아 정부 사이에는 외교·통상 협력이, 독일 공산당과 독일 부르주아지 사이에는 계급투쟁이 병존했다. 1921~22년의 공동전선 정책도 개혁주의 정당과 공동 행동을 하되, 그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독립적 투쟁과 부르주아 권력에 대한 도전을 강화한다는 논리였다.
1934년 9월 소련의 국제연맹 가입은 외교 노선의 큰 전환을 보여 준다. 그전까지 소련과 코민테른은 국제연맹을 베르사유 체제를 유지하는 제국주의 열강의 기구라고 공격했다. 히틀러 집권 뒤 소련 지도부는 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한 ‘집단 안보’ 체제에 소련의 안전을 의탁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때부터 ‘어느 나라 부르주아지가 소련의 외교적 동맹이 될 수 있는가’가 코민테른의 정치 노선을 좌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당시 트로츠키주의 비판의 핵심이었다.
1935~36년 프랑스에서는 두 층위의 경계가 흐려졌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당시 코민테른 서기장 디미트로프는 프랑스에서 부르주아 정당인 급진당까지 반파시즘 민중전선에 끌어들일 것을 명시적으로 제기했고, 동시에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의 과제로 “평화의 대의를 지키는 프랑스-소련 조약”이 반동 세력에 의해 파괴되지 않게 하는 것을 들었다. 190 실제 프랑스 민중전선은 공산당·사회당뿐 아니라 부르주아 급진당을 포함하는 정치적 연합이었다. 1936년 5~6월 선거 승리를 계기로 거대한 공장 점거 파업 물결이 일어나자(제25절),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는 “핵심 요구가 쟁취된 순간부터는 파업을 끝낼 줄 알아야 한다”며 타협과 복귀를 주장했다. 그는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구호는 여전히 “모든 것을 민중전선을 위해! 모든 것을 민중전선을 통해!”라고 강조했다. 191 레닌 시기에도 긴장과 타협은 있었지만, 국가 간 협정과 각국 노동운동의 정치적 독립성을 구별한다는 원칙이 제시됐다. 1935~36년에는 소련의 프랑스 동맹을 안정시키는 문제가 프랑스 공산당의 국내 정치 전략과 직접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차이는 단순한 ‘공동전선이냐 민중전선이냐’ 이상의 문제다.
질적 차이를 가르는 기준
이 차이는 조약 체결 여부만으로 판정할 수 없다. 상대국의 정부와 군사정책을 정치적으로 정당화했는지, 동맹을 유지하려고 현지 공산당에 자국 부르주아지에 대한 태도를 바꾸도록 요구했는지, 그 과정에서 독립적인 노동자 투쟁을 억제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1935년 스탈린-라발 공동성명과 프랑스 공산당의 노선 전환, 1936년 프랑스 파업에 대한 태도는 이 질문들을 연결해 검토할 사례다. 스페인에서는 여기에 독립적인 혁명 세력에 대한 직접적 탄압이 더해진다(제28절).
이 기준으로 보면 1928~36년 시기에 ‘노동자국가도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는 외교’라는 설명으로 가장 처리하기 어려운 것은 1935년 스탈린-라발 공동성명에서 프랑스 공산당의 국방·민중전선 노선과 1936년 프랑스 파업 억제를 거쳐 1936년 스페인 혁명 억제와 POUM 탄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이다. 이 흐름 속에서 소련 외교는 노동계급의 국제적 계급투쟁과 나란히 존재하는 별도의 국가적 전술에 머물지 않고, 다른 나라 노동운동의 전략을 소련 국가의 외교적 필요에 맞춰 조정하는 원리로 변해 갔다. 초기 볼셰비키 외교의 두 층위 원칙이 뒤집힌 것이다. 트로츠키가 스탈린-라발 공동성명을 단순히 잘못된 조약이 아니라 국제주의로부터의 정치적 단절로 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론적 문제가 남는다. 트로츠키는 이런 외교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소련을 여전히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규정했다. ‘노동자국가가 어떻게 이런 반혁명적 외교정책을 펼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그에게 소련의 계급적 성격을 재검토하게 만드는 압박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노동자국가 규정을 폐기하지는 않았다.
반면 우리의 국가자본주의론은 바로 이런 현상을 1928년 이후 소련 사회에서 일어난 물질적 변화, 곧 세계적 경쟁 압력 아래서 축적을 강제당한 관료 지배계급의 형성이 대외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설명한다. 1930년대 중반 트로츠키 이론이 겪은 긴장과 클리프가 국가자본주의론으로 넘어간 논리적 경로는 이 지점에서 만난다. 전진이 1930년대 후반까지 노동자국가 규정을 유지하는 한, 전진의 이론도 이 긴장을 그대로 떠안는다.
28 스페인 혁명에서 드러난 노동자 권력의 기준
스페인 혁명에서는 노동자 권력이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실제 행동 문제로 나타났다. 1936년 프랑코의 군사반란에 맞서 노동자와 농민들은 무장하고, 공장과 토지, 교통과 통신의 거점을 장악했으며, 지역의 공적 기능을 떠맡았다. 노동자 시민군이 결성됐고, 여러 지역에서 기존 국가의 권위가 크게 약화됐다. 이런 대중의 통제권과 자체 활동은 혁명적이었다.
반대로 반혁명적이었던 것은 노동자들이 장악한 공장과 토지를 돌려주게 만들고, 파업을 억제하고, 노동자 시민군을 해산시키며, 부르주아 공화국의 경찰과 군대를 재건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뿐 아니라 정부에 들어간 아나키스트 지도자들도 이 과정에 참여했다.
이 대목에서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판단하는 기준은 매우 명확하다. 누가 경제와 무장력을 통제하는가? 노동자의 독립적 조직이 강화되는가, 아니면 기존 국가에 흡수되고 무장해제되는가?
이 기준을 소련의 1928~36년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는가? 전진의 글 자체가 서술하듯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한 방어 능력을 잃고, 생산 현장에서 관료적 명령에 종속되며, 국가 축적을 위한 강도 높은 노동을 강요받았다. 그렇다면 전진의 서술에서는 스페인에서 노동자 권력의 파괴를 판정할 때 사용하는 기준과 소련에서 노동자국가의 존속을 판정할 때 사용하는 기준이 다르다. 우리는 이 불일치를 문제 삼는다. 한 나라에서는 노동자의 실제 통제권이 혁명과 반혁명을 가르는 기준인데, 다른 나라에서는 그 통제권이 사라진 뒤에도 과거 혁명의 기원이 국가의 성격을 보존해 준다는 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소련의 국가적 이해와 국제 혁명의 충돌
전진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이 소련의 생존과 성장을 국제 혁명보다 앞세웠고, 그 결과 다른 나라 노동자들의 투쟁을 배신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대숙청 이전의 소련에 대해서는 이 비판에 걸맞은 계급적 결론을 끌어내지 않는다. 192 소련 안에서 노동자들의 자체 활동을 억압하고, 소련 밖에서도 노동자들의 자체 활동을 국가적 이해관계에 종속시키는 권력이 있다면, 그 국내적 기능과 국제적 기능을 하나의 계급적 논리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은가?
물론 어떤 국가가 잘못된 대외정책을 한 번 취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계급적 성격이 즉시 바뀌는 것은 아니다. 혁명 정부도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반대로 자본주의 국가가 특정 조건에서 다른 나라의 해방 투쟁을 지원할 수도 있다. 대외정책 하나만으로 국가의 성격을 판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국내에서 강제적 축적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의 독립적 권력을 파괴하는 과정과, 국제적으로 노동자 혁명을 관료 국가의 이해관계에 종속시키는 과정이 지속적으로 결합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것을 노동자적 경제 토대와 반동적 관료 외교 사이의 모순으로만 설명하는 것보다, 새로운 지배세력이 자신의 국내외 지배 조건을 재생산하는 과정으로 보는 편이 더 일관된다는 것이 우리의 논리다.
스페인은 이 결합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 준다. 소련은 프랑코에 맞선 공화국 측에 무기를 제공했고, 스페인 공산당은 그 과정에서 급격히 영향력을 키웠다. 소련과 스페인 공산당은 전쟁의 목표를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기존 민주공화국의 수호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이 선호한 것은 노동자 권력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광범한 민중전선 정부, 중앙집권적 정규군, 기존 국가기구의 복원이었다. 소련과 코민테른의 관료들은 1936년 9월 들어선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를 민중전선 정부의 기반으로 받아들였고, 공산당은 시민군 해산과 공화국 군대 건설을 비롯한 부르주아 국가권력 복원을 추진했다. 코민테른 제4차 대회가 노동자 투쟁이 부르주아지와의 가장 격렬한 투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규정한 것과 달리(제27절), 스페인에서 공산당이 참여한 민중전선은 노동자들의 독립적 권력 기관을 약화시키고 기존 공화국 국가의 권위를 복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스페인에서 소련 보안경찰(NKVD)과 그와 연결된 세력(스페인 공산당과 카탈루냐 통합사회당(PSUC))이 독립적인 혁명가들을 억압하고 살해한 사실은 이 문제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당시 소련 국가에 대한 규정을 노동자국가로 유지하면서도 그런 행동을 단호히 반대할 수는 있다(트로츠키처럼). 그러나 왜 그 국가의 조직적 활동이 다른 나라 노동자의 권력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반복됐는지를 설명할 때, 노동자국가라는 규정은 분석을 돕기는커녕 방해한다.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바딤 Z. 로고빈(1937~1998)은 기밀 해제된 소련 문서를 조사해 스탈린 정부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스페인 혁명을 프랑코의 승리보다 더 큰 위협으로 여겼음을 밝힌 바 있다. 193 그 사실은 소련의 스페인 공화국 지원이 독립적인 노동자 권력의 확대와 일치하지 않았으며, 그 지원을 수행한 세력들이 혁명적 좌파의 탄압에 관여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소련의 외교적 이해관계와 스페인 노동자들의 독립적 혁명 정치가 충돌했음을 보여 준다.
안드레우 닌과 POUM
스탈린주의의 희생자가 된 반대파들을 그 이유만으로 정치적으로 무오류인 존재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스페인의 안드레우 닌과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에 대한 서술이 좋은 사례다. 닌이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살해된 일을 분명히 규탄하면서도, POUM이 민중전선 협약과 강령에 서명하고 카탈루냐 공화 정부에 참여했으며, 노동자들의 독립적 권력 기관을 건설하는 데 실패했음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1937년 5월 초 바르셀로나 충돌에서 무장한 노동자들은 도시의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POUM 지도부는 CNT 지도부를 뒤따라 “모든 무장 투사들은 바리케이드와 거리에서 철수해 일터로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194 이 후퇴는 노동자 저항의 패배로 이어졌다. 한 달여 뒤인 6월 16일 POUM은 탄압의 표적이 됐고, 닌은 체포돼 살해됐다. 195 스탈린주의의 범죄에 책임을 물으면서도 혁명적 세력의 정치적 오류를 짚어야 한다.
동시에 트로츠키의 반대 노선을 단순한 비타협성으로만 설명하지 말아야 한다. 트로츠키는 민중전선 정부에 정치적 지지를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프랑코에 맞선 군사적 협력은 지지했다.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들이 속한 아나키스트 노동조합 CNT와 반파시스트 방어 조직 안에서 활동하거나 협력하라고도 촉구했다. 정치적 독립성과 공동 투쟁은 양립할 수 있다.
이 역사에서 전진이 받아들여야 할 중요한 교훈은 계보와 도덕적 용기가 정치적 판단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스탈린에게 탄압받았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모든 이전 정책이 옳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1917년 혁명에 참여했다 해서 그 사람들이 1930년대에 점유한 국가기관이 노동자 권력의 기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대숙청으로 제거된 구볼셰비키들을 모두 ‘노동자 권력의 잔존 대리인’으로 묶으면, 그들의 실제 계급적 구실은 가려지고 혁명 경력만 노동자 권력의 증거로 남는다. 그들 가운데 실제 노동자 저항과 연결돼 있던 사람, 이미 관료적 지배를 집행하던 사람, 스탈린의 개인적 권력과 충돌했지만 노동자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는 않았던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
혁명의 승리 가능성과 필요한 노선의 구별
스페인 혁명의 패배를 논할 때 신중함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1937년 5월 노동자들이 바르셀로나를 장악하고 일정 기간 유지하는 것이 혁명을 전진시킬 수 있었다고 보지만, 그것이 스페인 전체의 승리를 확실히 보장했을 것이라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이 구별은 러시아 혁명의 퇴보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실패를 분석할 때도 필요하다. 트로츠키가 더 일찍 노동자국가론을 버렸다면 독일 파시즘을 막을 수 있었다거나, 좌익반대파가 더 많은 노동자의 지지를 획득해 스탈린을 타도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객관적인 패배, 탄압, 국제적 고립, 운동의 작은 규모는 실제 제약이었다.
그러나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략과 이론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독립적 행동을 더 일찍 중심에 놓을 수 있었는지, 스탈린의 ‘좌선회’에 덜 혼란스러워할 수 있었는지, 다른 반스탈린 노동자 세력들과 더 넓게 협력할 수 있었는지, 새 인터내셔널을 더 명확한 사회주의 전망 위에 세울 수 있었는지는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 소련 국가에 대한 특정한 성격 규정이 당대의 정치적 선택을 어떻게 제한했는지도 따져 보는 것이다.
29 제4인터내셔널의 소련 규정과 전후의 난점
우리는 제4인터내셔널을 순전한 허구적 조직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노동자 운동에 실제 기반을 가진 지부들이 소수 있었고, 그들에게 경험이 축적되고 대중 투쟁의 기회가 열렸다면 새 인터내셔널의 여러 약점을 극복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본다. 우리의 비판은 ‘소규모이므로 잘못됐다’는 식이 아니다(이런 식의 비판은 스탈린주의자들의 단골 메뉴다).
그러나 소련 사회의 성격에 관한 새 인터내셔널의 입장은 다른 조직적 약점보다 훨씬 근본적이었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조직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노동자들에게 어떤 사회를 위해 싸우라고 요구하는지, 사회주의 혁명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규정했기 때문이다.
전후의 역사가 이를 입증했다. 트로츠키는 제2차 세계대전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와 같은 혁명적 해일을 풀어놓아 제4인터내셔널의 지도로 세계 노동자들이 파시즘, 서방 자유민주주의, 스탈린 관료체제를 한꺼번에 쓸어버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서방 자유민주주의와 스탈린 관료체제는 어느 때보다 강해진 채 전쟁을 끝냈다. 196 소련과 판박이인 국가들이 동유럽에 수립되자 제4인터내셔널은 혼란에 빠졌다. 하먼이 정리하듯, 1947~49년의 논쟁에서 두 입장이 결정화됐다. 하나는 트로츠키의 어휘를 대부분 쓰면서도 스탈린주의가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혁명적 세력일 수 있다고 인정하고 동유럽 국가들을 ‘기형적 노동자국가’로 선포하는 것이었다. 만델, 프랑크, 파블로가 이 길을 택했다. 이 길은 어떤 자들을 트로츠키 이론의 정신에서 아주 쉽게 멀어지게 했다. 파블로는 스탈린주의 정당들이 혁명적일 수 있다면 인류는 “수백 년의 기형적 노동자국가”를 마주하고 있으며 혁명가의 임무는 스탈린주의 정당에 들어가 그 창조를 돕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아이작 도이처는 소련의 경제 성장이 (자동으로) 스탈린주의를 개혁으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했고, 1953년 베를린 노동자 봉기가 “민주적 개혁을 지지하던” 베리야의 몰락에 기여했으므로 “객관적으로 반혁명적”이었다고 썼으며, 헝가리 혁명을 비롯한 1950년대의 봉기들에 대해 동유럽이 “부르주아 복고의 벼랑 끝에 있었고 오직 소련의 무력(또는 그 위협)만이 그것을 막았다”고 썼다. 파블로 지지자 일부는 1956년 소련군의 헝가리 혁명 진압을 지지했다. 만델은 1956년 부다페스트 혁명가들의 방법보다 폴란드 공산당 서기장 고무우카의 방법에 명확한 선호를 표명했다. 197 이 사례들은 소련 관료를 사회주의 이행의 일부를 수행할 수 있는 세력으로 평가할 때 생기는 정치적 위험을 보여 준다.
1949년 중국혁명과 뒤이은 쿠바·베트남의 혁명도 같은 논쟁을 낳았다. 국제사회주의 전통은 이 혁명들이 노동계급의 독립적 권력 장악 없이, 주로 농민 기반의 군대와 민족주의적 지도부를 통해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다고 봤다. 반면 제4인터내셔널의 주요 분파들은 국유화와 소련과 유사한 제도의 도입을 근거로 이 국가들을 노동자국가로 규정했다. 198 이 판단에서 노동계급의 자기활동은 국가의 성격을 판정하는 필수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이 대목은 전진의 국가자본주의론을 평가할 때도 중요하다. 앞서 봤듯 전진은 중국·북한을 ‘가짜 사회주의’로 본다. 따라서 1938년 제4인터내셔널의 문제를 그대로 전진의 현재 강령 문제로 동일시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계승의 문제는 남는다. 1930년대의 트로츠키주의를 기본적으로 옳은 사회주의 정치였고 소련 국가의 최종 전환 시점만 뒤늦게 파악한 것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의 자기해방과 국유화된 국가의 진보성을 동시에 붙잡으려 했던 모순된 운동으로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후자를 택한다. 소련이 결국 국가자본주의라는 결론을 덧붙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 노동자가 지배하지 않는 사회를 오랫동안 노동자국가로 이해할 수 있었는지까지 따져야 한다.
30 소련 분석의 정치적 함의
하먼은 소련 경제의 역학을 경쟁적 축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론이 두 가지 똑같이 파국적인 결론 가운데 하나에 이를 수 있다고 정리했다. 첫째, 지배 관료를 서방 자본가 계급보다 더 진보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주의 투쟁은 이 지배자들에게 도움, 적어도 조언을 주는 데 종속되고, 사회적 격변이 그들의 지배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본주의 복원’의 두려움 때문에 위기 앞에서 마비된다. 둘째, 관료를 서방 자본가 계급보다 덜 진보적인, 무기한 인간 발전을 가로막는 전체주의 세력으로 보는 것이다. 1940~50년대 샥트먼의 길이었고, 하먼이 비판한 일부 ‘신계급’ 이론의 정치적 위험이기도 했다.
클리프의 이론은 그 진정한 역학을 파악함으로써 근본적으로 다른 결론에 이른다. 스탈린주의 관료는 서방 자본가 계급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자본 축적에 성공하면 할수록 관료는 자신을 타도할 잠재력을 가진 노동계급의 규모와 힘을 키운다. 클리프가 1940년대 말에 쓴 대로, “관료는 역사상 유례없는 최고의 집중을 토대로 노동계급을 늘린다. 그리고 집중된 임금노동과 집중된 자본 사이의 심연을 메우려 아무리 애써도, 관료는 조만간 자신과 격렬하게 충돌할 세력을 낳고 있다.” 이 말은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를 말하는 사람들이나 소련 관료가 자본주의의 모순에 종속되지 않는 ‘새로운 계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당시에는 훨씬 덜 인상적으로 보였다. 1989~91년 여러 나라에서 나타난 노동자와 대중의 저항은 이 전망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다만 그 저항이 사회주의적 대안의 승리로 이어진 것은 아니며, 각국의 체제 전환은 지배층의 재편과도 결합했다. 199 200
전진은 이 두 파국적 결론을 거부한다. 그러나 검토한 문서의 논증만으로는 그 거부를 일관된 계급 분석으로 뒷받침하지 못한다. ‘새로운 계급사회’론과 무엇이 다른지(제14절), 국유 형식이 왜 노동계급 권력을 대신할 수 없는지(제4절)를 끝까지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강조하는 이론적 근거는 소련이 세계 체제 안의 경쟁적 축적에 종속된 자본주의였고, 그래서 자본주의의 모순, 곧 위기와 노동계급의 저항에 똑같이 노출돼 있었다는 인식이다. 1989년은 “어떤 형태의 자본주의든 자신이 착취하는 사람들의 대중적 저항에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201 이 분석은 1989년을 사회주의의 실패나 효율적 시장의 승리로 해석하는 데 맞설 근거를 제공한다.
제5부 오늘의 정치적 쟁점
31 중국과 소련에 적용하는 노동자 권력의 기준
전진은 1949년 중국혁명을 어떤 의미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으로 보지 않는다. 노동계급이 독립적으로 조직돼 권력을 장악한 것이 아니고, 노동자평의회도 등장하지 않았으며, 실제 권력은 중국공산당의 관료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202 이 판단은 옳다. 필자가 다른 곳에서 정리했듯 1949년 혁명은 어떤 형태로든 노동자 혁명이 아니라 마오의 농민 기반 인민해방군이 농촌에서 도시를 군사적으로 정복한 것이었고, 노동계급은 이 과정에서 독립적인 국가권력의 주체로 등장하지 않았으며, 마오주의 정권 아래서 노동자 권력, 노동자 산업통제, 노동자 민주주의가 국가의 운영 원리로 확립되지 않았다. 또한 1978년 이후 덩샤오핑의 개혁은, 사회주의를 국가 소유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정적 반혁명의 순간이었어야 할 텐데도, 기존 당-국가의 지배가 유지되는 가운데 진행됐다. 그 과정에서 아래로부터의 저항이나 제도 변화가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트로츠키 등이 “개혁주의 영화를 거꾸로 돌리기”라 부른 것의 극단적 사례다. 203
우리가 가장 강하게 되물을 수 있는 지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다. 중국에서는 노동자의 자기조직화와 직접적 권력 장악이 없었다는 사실이 노동자국가가 아니었다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 그런데 전진의 교육 자료와 돔의 논의에서는 소련에서는 그런 권력이 사라진 뒤에도 1917년의 기원과 당내 잔존 요소(“대리인”)들이 노동자국가라는 성격을 보존한다고 한다. 물론 두 사회의 기원은 다르다. 러시아에는 실제 노동자 혁명이 있었고, 그 혁명이 남긴 제도와 기억과 사회적 성과가 있었다. 그 차이를 지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기원의 차이가 현재의 계급 지배를 무기한 다르게 판정할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회가 노동자 혁명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그 사회의 역사적 유산과 제도적 틀을 설명해 준다. 하지만 현재 노동자가 지배하는지를 알려 주지는 않는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현재의 생산관계와 권력 구조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
전진이 문화혁명의 급진적 조반파를 평가하는 방식도 같은 문제를 드러낸다. 그 글은 급진적 조반파가 생활조건 개선을 넘어 노동자 민주주의와 노동자 통제를 요구했고, 일부는 중국을 계급사회로,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붉은 부르주아지’로 규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고 긍정적으로 설명한다. 또한 조반파가 사상적으로 마오쩌둥을 넘어서지 못한 한계 때문에 탄압에 취약했다고 본다. 204 우리는 이 통찰을 좌익반대파에도 적용하라고 요구한다. 특정 지도부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을 넘어 노동자들 위에 군림한 당-국가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32 중국 분석과 진영론 비판
중국 문제에서도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중요한 분석 도구다. 중국의 경제 성장과 미국과의 경쟁은 좌파에게 한쪽을 지지하라는 압력을 낳는다. 그러나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중국 국가를 진보적 대안으로 볼 수는 없다.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중국의 큰 국가 부문과 경제에 대한 국가의 지도적 역할을 근거로 그 체제에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여하는 이들도 많다. 205 우리의 판단 기준은 다르다. 국가 소유의 규모가 아니라 노동자가 생산과 국가를 통제하는지, 기업과 국가의 축적이 어떤 경쟁 압력 아래 놓이는지 살펴야 한다. 이 기준은 중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것과 중국 노동자들의 독립적인 조직화와 투쟁을 지지하는 것을 함께 가능하게 한다.
이른바 진영론은 세계의 핵심 대립을 미국이 이끄는 진영과 그에 맞서는 진영 사이의 대립으로 보고, 후자에 속한 국가들에 대한 비판과 대중의 저항을 부차화하는 태도다. 몰리뉴는 반미 수사와 상당한 국가 부문의 존재가 그런 지지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여 왔다고 지적한다. 206 그러나 한 국가가 미국과 대립한다는 사실은 그 국가 안의 착취 관계를 없애지 않는다. 사회주의자는 제국주의적 공격에 반대하면서도 해당 사회 노동자와 피억압자들의 독립적 투쟁을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
에이드리언 버드가 2026년 초에 정리한 대로,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국가자본주의의 부상은 《이코노미스트》조차 인정하는 현실이 됐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보적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 위기와 국제 경쟁을 관리하는 도구다. 권위주의적이든 자유민주주의적이든 자본주의 국가는 축적과 자본가 계급의 권력에 헌신한다. 시진핑의 중국과 푸틴의 러시아에서 국가는 경제에서 더 능동적인 구실을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사회주의자가 지지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다. 두 사회의 국가 개입을 평가할 때도 불평등과 노동자의 통제권을 함께 살펴야 한다. 국가자본주의 조처의 부활은 국가권력이 자본주의적 축적의 중심에 있음을 부각한다. 국가는 중립적 중재자가 아니라 계급 도구다. 207 이 점은 마이크 헤인스가 2009년에 쓴 것과 같다. 부하린의 비유로 자본가 계급은 ‘사적’이라는 주머니와 ‘국가’라는 주머니가 달린 외투를 입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 통제 수단을 이 주머니에서 저 주머니로 옮긴다. 사회주의자에게 쟁점은 어느 주머니에 무엇이 들었느냐가 아니라 자본가에게서 외투 자체를 벗겨 내는 것이다. 208
전진은 중국·북한·러시아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진영론’을 막아 주는 것은 중국이 나쁘다는 판단이 아니라, 국유 생산수단의 규모가 사회의 계급적 성격을 말해 주지 않으며 세계적 경쟁에 종속된 국유 자본은 자본으로 행동한다는 개념이다. 전진의 소련 분석과 중국 분석도 이 기준을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33 생태 위기와 국가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론은 생태 위기를 설명하는 데도 중요하다. 자본주의적 축적이 환경 파괴를 낳는다는 주장에는, 사회주의를 자처한 소련과 중국에서도 심각한 환경 파괴가 일어났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이들 사회의 성장 압력을 지배 이데올로기보다 실제 생산관계와 세계적 경쟁 속에서 설명한다. 209 소유가 국가에 집중돼 있어도 생산과 투자가 경쟁적 축적에 종속된다면 생태적 필요는 후순위로 밀릴 수 있다. 전진도 생태 위기를 자본주의와 연결한다. 그렇다면 소련의 환경 파괴도 관료적 비효율을 넘어 자본주의적 축적의 강제로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전진의 소련 경제 분석은 이 요구를 충족하지 못한다. 쟁점은 계획의 정확성을 높이는 데서 더 나아가, 생산자들이 생산의 목적과 생태적 한계를 집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가이다.
34 여성과 피억압자의 해방을 판단하는 기준
전진의 글은 1917년 이후의 해방적 조치와 스탈린 시대의 후퇴, 중국에서의 여성 노동과 재생산의 부담, 관료적 축적을 위해 여성들이 동원되고 다시 가정으로 밀려나는 과정을 상당히 자세히 다룬다. 전진이 서술한 스탈린 시대의 후퇴는 노동자 권력의 파괴와 결합돼 있다. 바로 이 점이 노동자국가의 존속이라는 자신의 규정과 충돌한다. 210 버드도 같은 과정을 서술한다.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부상은 산업에서 노동자 권력의 마지막 불씨를 껐을 뿐 아니라 여성 해방과 전통적 성 역할 변혁의 토대를 제공했던 혁명적 변화도 되돌렸다. 혁명 직후 도입된 가사·육아 부담의 사회화 조처(직장 세탁소와 식당 등)는 스탈린 치하에서 노동력 재생산에서 사적 가족의 중심성이 재확인되면서 희생됐다. 1945년 이후 소련 블록에서 여성의 경제 참여가 서방보다 높았고 실제 이득도 있었지만, 그 확대를 추동한 중요한 요인은 국가의 노동력 수요였다. 그래서 그 이득은 불안정했고(체코슬로바키아는 1962~63년 성장이 둔화하자 “사회화된 가사노동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개념”의 포기를 선언했다), 여성은 계속 ‘이중 부담’을 졌으며, 성별 임금 격차와 성별 분업도 지속됐다. 211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노동자와 피억압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결정하고 방어할 수 없으며, 국가가 산업화·인구·군사적 필요에 따라 그들의 삶을 배치한다면, 그 국가의 노동계급적 성격은 무엇으로 유지되는가? 여성의 임신중지권이나 민족자결권의 후퇴 하나만으로 곧바로 국가의 계급적 성격이 바뀐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후퇴들이 노동자의 생산 통제 상실, 독립적 조직의 파괴, 관료적 축적의 강화와 결합된다면, 그것들은 단순한 잘못된 정책의 목록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누구를 위해, 누구의 결정으로 재생산되는지를 보여 주는 관계들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목적을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관계를 집단적·민주적으로 통제하는 데서 찾는다. 주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는 이를 위한 필수 조건이며, 노동자 권력 아래의 국유화는 그것을 실현하는 형식적 수단이다. 국유화나 산업화의 규모만으로 그 목적의 실현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전진이 제시하는 피억압자의 자기조직화 원리도 소련의 과거를 판정하는 데 적용돼야 한다. 이 원리를 파괴한 국가를 노동자국가로 남겨 둔 채 미래 사회주의의 원칙으로 내세우는 것은 이중 잣대다. 212
35 노동자 권력과 국유화 강령의 관계
이 차이는 역사 해석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늘의 강령과 직결된다.
첫째, 노동자 권력의 기준 문제다. 앞서 봤듯 전진은 교육 자료 말미에서 노동자 민주주의와 소환권을 강조하며, 대중투쟁강령도 노동자 민중 평의회 대의원을 언제든 소환할 수 있어야 하고 숙련노동자 평균임금을 넘는 보수를 받아서는 안 되며, 병사위원회가 지휘관을 선출해야 한다고 쓴다. 213 파리코뮌과 《국가와 혁명》에서 비롯한 이 기준들은 옳다. 그러나 그 강조가 이론적 무게를 가지려면, 노동자국가의 기준이 노동자들의 실질적 권력이라는 점을 역사 서술에서도 일관되게 적용해야 한다. 그 기준을 적용하면 1928~36년의 소련은 노동자국가일 수 없고, 그보다 앞선 시기의 상당 부분도 이미 노동자 권력의 조건을 잃어 가고 있었다. 미래의 노동자국가에는 소환권과 노동자 임금을 요구하면서 1928~36년의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보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다.
둘째, “어떤 이름을 붙이든”이라는 태도의 문제다. 강령은 소련과 중국·북한의 사회 성격 규정을 단결의 조건에서 뺐다. 서로 다른 경향이 단결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명칭의 차이가 언제나 분석의 차이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논쟁하는 명칭들은 서로 다른 계급 분석을 함축한다.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보느냐, 1930년대 중반까지 노동자국가였다고 보느냐, 끝까지 퇴보한 노동자국가였다고 보느냐는 국유 형식과 노동계급의 실제 권력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물음에 대한 서로 다른 답이다. 그 답은 오늘날 전진의 국유화 요구와 노동자정부 구상에 직결된다. 사회 성격 규정을 최소한의 공통분모로 남겨 두는 한, 강령의 다른 부분은 서로 다른 전제에서 읽힐 수 있다. 하먼이 만델을 두고 지적했듯, 같은 ‘정설 트로츠키주의’ 분석에서 정반대의 전망들(고르바초프에 대한 비판적 지지, 소련 말기 공산당 보수파 지도자 리가초프 지지, 독립적 노동계급 조직화)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분석만으로는 어떤 정치적 결론이 타당한지 충분히 가려지지 않는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론적 차이를 조직적 단결의 장벽으로 삼지 않는 것과 그 차이에 대한 논증을 생략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214
셋째, 국유화를 앞세우고 노동자 권력을 뒤로 미루는 전략의 문제다. 전진의 대중투쟁강령은 철도·전기·가스 같은 기간산업에서 출발해 자동차·조선·반도체 같은 민간 대기업까지 몰수·국유화하고, 그것을 “전체 산업의 국유화로 이어지는 출발점”으로 삼자고 한다. 물론 공기업도 착취와 억압의 장소임을 인정하고 노동자 산업통제, 평의회, 노동자정부를 결합한다. 그러나 강령의 서술은 몰수·국유화에서 산업통제와 평의회를 거쳐 노동자정부로 나아가는 순서다. 국유화의 확대가 앞에 서고, 그것을 실행할 권력의 계급적 성격은 뒤따르는 문제가 된다. 215
이 문제는 강령 문구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진은 태안화력 김충현 노동자 사망 뒤 발전산업 국유화를 요구했고, 2026년 6월 13일 정의로운 전환 대행진의 리플릿에서도 발전산업 국유화와 공공재생에너지 확대를 앞세워 직접고용의 해법으로 제시했다. 쿠팡에 대해서도 김범석의 경영권 박탈과 국유화를 요구했다. 2024년 총선에서는 이장우 노동당 후보의 공약이 조선산업 국유화와 노동자 산업통제 투쟁 촉구에 못 미친다는 점을 비판적 지지의 비판 지점으로 들었다. 전진에게 국유화는 미래 사회에 관한 선전에 그치지 않고 당면 선동과 선거 개입의 중심 잣대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문제를 ‘국유화와 노동자 권력의 연결에 대한 설명 부족’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전진의 실제 선동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에서 국유 재산으로 무게중심을 옮긴다. 노동자 통제와 노동자정부를 강령에 명시했다는 반론은 이 비판에 답하지 못한다. 대안을 문서에 제시하는 것과 그 대안을 관철할 계급적 힘을 조직하는 것은 다르다. 노동계급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그 권력으로 생산수단을 수용한다는 혁명적 전략을, 국유화의 확대가 노동자 권력으로 이어진다는 순서로 뒤집을 수는 없다. 216
노동자 통제를 결합하자는 말도 그 자체로 해답이 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하의 노동자 통제는 자본가나 국가 관료 경영진의 존재를 전제로, 그들의 경영권에 도전하고 특히 정리해고 권한을 분쇄하는 투쟁이다. 노동자들은 이를 통해 경영진의 행동을 제약할 수 있다. 이 투쟁은 국유기업과 민간기업 모두에서 유효하며, 국유화될 때까지 미뤄야 할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적 통제를 쟁취하는 것과 노동계급이 국가와 주요 생산수단을 장악해 사회 전체의 생산·투자·분배를 결정하는 것은 다르다. 국유화와 사업장 통제를 합쳐 놓았다는 이유로 이 간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217
노동자 통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경영 책임을 노동자에게 넘기는 자주관리와도 구별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개별 기업을 떠맡아도 시장 경쟁의 압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스스로 노동조건을 깎거나 기업의 파산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 그래서 공장 폐쇄에 맞설 때는 노동자 협동조합에 대한 국가 지원으로 경영 책임을 떠넘기게 할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특별한 목적으로 국유화를 요구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1866년 제1인터내셔널 제네바 대회에 보낸 지침에서 강조했듯, 개별 노동자들의 협동조합만으로 자본주의를 변혁할 수는 없다. 사회적 생산 전체를 협동 노동의 체제로 바꾸려면 국가권력이 생산자들 자신에게 넘어가야 한다. 218
자동차·조선·반도체처럼 세계시장 경쟁에 깊이 노출된 산업에서는 국유화와 노동자 권력의 구별이 더욱 중요하다. 자본주의 국가하에서 소유 명의만 바뀌면, 국가는 이제 소유주로서 경쟁력과 축적을 이유로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노동자 통제를 개별 사업장의 권한으로 제한한 채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넓혀 가는 구상은 이 압력을 제거하지 못한다. 소련과 동유럽의 경험은 국가 소유의 확대와 계획의 존재가 경쟁적 축적에 대한 대안이 아님을 보여 준다. 세계 혁명이 필요하다는 일반 원칙을 인정하더라도, 오늘의 선동을 일국적 소유 형태의 변경에 집중시키는 문제는 남는다.
더구나 조선·반도체·AI는 한국 국가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는 부문이다. 이 부문의 국유화를 선동의 중심에 놓으면 계급적 요구가 국가 경쟁력이나 기술 주권을 강화하자는 산업정책과 뒤섞일 위험이 커진다. 쿠팡 문제를 미국 국적 총수에 대한 반감과 연결하는 경우에는 좌파 민족주의와도 겹칠 수 있다. 전진이 이미 이런 입장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유 형태를 앞세우는 전략에 이런 위험이 내재한다는 점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노동자의 국제적 공동 이익과 한국 자본주의의 경쟁력 강화 사이에 선을 긋는 일이 국유화 구호의 부속 조건이 돼서는 안 된다. 219
여기에는 《이행강령》 방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문제도 있다. 이행 요구가 대중의 현재 의식과 투쟁에서 출발해 권력 문제로 이어지는 다리라면, 그 연결은 실제 투쟁의 발전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주요 산업 전체의 무상몰수를 당면 선동의 중심에 놓는 것만으로 그런 다리가 놓이지 않는다. 현재의 투쟁 수준과 노동자들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을 건너뛰면, 사회주의 강령의 선전 구호를 당면 행동을 조직하는 선동 구호처럼 쓰게 된다. 구호의 급진성은 이 전략적 비약을 보상하지 못한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이 문제에 명확한 기준을 제공한다. 국유화하는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인 한, 그 국유화는 사회주의적 조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적 조처다. 기간산업의 국유화가 자본가 계급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경우도 많다. 의회 입법을 통한 공적 소유의 확대나 군사적·관료적 방식의 국유화만으로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이 되지는 않는다. 국유화를 추진하는 좌파 정부를 우파에 맞서 지지할 수 있지만, 그런 정부의 성립이나 국유화의 범위를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척도로 삼아서는 안 된다. 220
한국의 경험도 이 점을 뒷받침한다. 1997년 산업은행의 출자전환으로 사실상 공기업이 된 기아차에서도 인력 감축은 계속됐다. 산업은행이 20년 넘게 대주주였던 대우조선해양에서도 2022년 하청노동자 파업에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가 뒤따랐다. 국유기업에서도 착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국유화를 노동조건과 복지 향상의 일반적 전제조건처럼 내세워서는 안 된다. 소유주가 국가로 바뀌어도 노동자들은 고용과 임금, 노동조건을 지키기 위해 그 국가와 경영진에 맞서 싸워야 한다. 221
그렇다고 국유화 요구를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공장 폐쇄나 정리해고에 직면한 경우, ‘노동자 통제하의 무보상 국유화’는 중요한 선동·선전 구호가 될 수 있다. 파산했거나 공적자금에 기대는 기업의 소유주에게 보상금을 안겨 줄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일자리를 지키는 데 돈을 쓰라고 요구해야 한다. 이 투쟁에서 출발해 누가 부를 만들며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통제해야 하는지에 관한 선전을 넓힐 수 있다.
민영화와 국유 산업의 분할에 반대하는 투쟁에서도 국유화나 재국유화 요구를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어적 요구의 정당성을 주요 산업 전반의 무상몰수를 오늘의 중심 구호로 삼는 근거로 내세우면 논점을 바꾸는 셈이다. 특정한 공격에 맞서는 국유화 요구와, 국유화의 확대를 사회주의적 변혁의 주된 경로로 제시하는 전략은 구별해야 한다.
폐업과 해고를 막고 노동자 투쟁을 전진시키는 국유화 조처는 무조건, 그러나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여기서 ‘무조건적’이란 보상 철폐와 노동자 통제라는 요구가 전부 실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조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부나 국가 경영진을 신임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보상과 통제 문제를 계속 제기하고,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서 독립적으로 조직하고 싸워야 한다. 특정 국유화 조처에 대한 이런 태도를 국유화 중심 전략에 대한 지지로 바꿔 놓을 수는 없다. 222
발전 비정규직의 직접고용을 진전시키는 힘도 국유화 구호 자체가 아니라 현장의 조직력과 파업 능력이다. 통합 국유화를 해법의 앞자리에 놓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조처를 요구하는 수단으로 배치하면, 노동자 자기해방의 관점은 국가에 해법을 청원하는 정치에 밀린다. 노동자 통제 투쟁은 현재의 해고와 외주화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힘을 키우고 경영권을 침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 힘이 어떻게 국가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과제다.
이것이 필자가 전진의 국유화 강령을 비판하는 핵심이다. 전진의 강령이 노동당류의 좌파적 사회민주주의보다 급진적이라는 사실도, 실제 선동에서 노동자 자신의 힘과 권력보다 국가 소유 형태를 앞세우는 문제를 해소하지 못한다. 노동자정부와 세계혁명을 강령의 끝에 명시하는 것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국유화의 형식적 역할은 인정하되, 그것을 노동계급의 독립적 조직화와 권력 장악이라는 전략에 종속시켜야 한다. 국유화 요구를 폐기할 것이 아니라, 국유화 중심의 전략을 바꿔야 한다. 223
제6부 혁명적 전통과 자기해방의 기준
36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익과 실제 노동자의 권력
필자는 트로츠키의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에서 ‘형식주의’와 ‘객관주의’를 본다. 형식주의는 국유화나 당의 역사적 기원 같은 형식을 실제 사회관계보다 앞세우는 경향이다. 노동자가 국가를 통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국유화된 생산수단과 옛 자본가의 부재를 이유로 노동자국가라는 규정을 유지하는 것이 그 사례다. 객관주의는 사회주의를 노동자들이 의식적으로 만드는 사회관계라기보다, 생산력과 소유 형태의 발전이 객관적으로 준비하는 결과로 보는 경향이다. 이 경우 노동자들의 실제 정치적 능력과 의사가 약화돼도, 국가가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경제적 토대를 보존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국가의 사회주의적 의미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마르크스·엥겔스의 문헌을 훑으면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이 반대 명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공산주의는 “수립돼야 할 상태, 현실이 맞춰야 할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폐지하는 현실의 운동”, 곧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이다. 《철학의 빈곤》에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국유 재산의 이론가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론가”다. 《공산주의의 원리》의 첫 원리는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조건에 관한 교의”다. 《공산당 선언》은 프롤레타리아가 정치적 지배권을 이용해 부르주아지에게서 모든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손, 곧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집중한다고 쓴다. 이 모든 정식에서 사회주의적 변혁의 주체는 프롤레타리아다. 프롤레타리아는 정치 권력을 이용해 주요 생산수단을 공동 장악하고, 국유화를 그 법적·형식적 수단으로 삼는다. 국가 소유가 먼저 수립돼야 노동자 혁명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소유 명의의 변경이 노동계급을 저절로 지배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아니다. 사회주의는 선진적 이론가들이 국가 소유에 기초해 작성하고 프롤레타리아(또는 다른 사회 세력)를 동원해 세우는 계획경제의 청사진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을 해방하는 과정에서 수립해야 하는 사회 형태다. 그리고 그 국가는 프롤레타리아가 인수한 기존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다. 224 파리코뮌의 교훈대로 “노동계급은 기존 국가기구를 단순히 손에 넣어 자기 목적에 쓸 수 없다.”
전진의 역사 서술은 실제 노동자의 지배가 사라진 뒤에도 노동자국가라는 규정을 유지함으로써, 실제 노동자들에게서 유리된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익’을 국가에 귀속시킨다. 그 국가가 현존 노동자를 억압하더라도, 미래의 노동자 해방을 위한 어떤 객관적 요소를 보존한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분리를 경계한다. 노동계급의 장기적 이익을 고려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노동자의 장기적 해방을 주장하는 조직과 국가가 그 해방의 주체인 노동자들의 조직적 권리와 정치적 판단을 무력화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이다. 자기해방이라는 말의 가장 엄격한 의미는 여기에 있다. 노동자의 해방을 노동자 대신 수행하는 역사적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37 과도기라는 반론으로 해소되지 않는 모순
전진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반론할 수 있을 듯하다. 노동자국가가 퇴보했다는 것은 바로 노동자들이 직접 통치하는 상태가 심각하게 약화됐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혁명적 당의 핵심, 국유화된 경제, 노동자적 제도와 기억, 노동자 운동 출신 당 간부들의 영향력, 국제 혁명을 통해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이런 모순적인 국가를 이미 자본주의 국가라고 규정하면, 실제 퇴보 과정과 반혁명의 질적 단절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이 반론은 쟁점을 비껴간다. 노동자 권력이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으며, 내전과 기근 속에서 위임과 집중이 불가피할 수 있다는 점은 논쟁거리가 아니다. 전진이 설명해야 할 것은 노동자 통제의 불완전성이 아니라, 그 통제가 파괴되고 노동자들이 강제적 축적에 종속된 뒤에도 노동자국가가 존속했다는 주장이다.
우리도 모든 노동자가 매 순간 직접 행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전문가의 사용, 가장 적극적인 노동자들의 선도적 역할, 이행기에 남는 상품 관계와 불평등을 인정한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조직을 통해 궁극적인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계다. 따라서 쟁점은 민주주의가 완벽했는지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통제가 불완전하지만 실재했는지, 아니면 이미 독립적인 권력이 노동자들을 지배하고 있었는지다. 노동자국가 여부를 판단할 핵심 기준은 노동자들이 국가와 생산수단을 통제하고 있는가이다. 다만 그 통제의 부재만으로 국가자본주의라는 적극적 규정까지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제3부에서 논했듯, 임금노동의 착취와 잉여 전유, 경쟁적 축적의 관계를 함께 분석해야 한다. 클리프는 1920년대에는 내전과 고립의 엄청난 궁핍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생산에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음을 보여 줬다. 노동조합·당위원회·경영자가 함께 관여하던 공장 운영에서 노동자 조직이 행사하던 영향력은 1928~29년의 전환을 거치며 결정적으로 약화됐다. 이 변화는 단일한 법령이나 날짜만으로 환원하기보다, 1인 경영제의 강화와 노동조합의 종속, 노동규율의 강화가 결합한 과정으로 살펴야 한다. 225
또한 국제 혁명이 일어나면 소련이 다시 노동자 권력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과, 그때까지 소련이 노동자국가였다는 것은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에도 혁명적 조직과 노동자적 전통이 존재하며, 국제적 격변이 그 사회의 혁명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회복 또는 전환의 가능성은 현재의 계급 지배에 대한 정의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전진은 ‘노동자 권력이 약화됐지만 당 안의 혁명적 대리인들이 그것을 보존했다’고 답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경우에는 그 대리인들이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지고 있었는지, 노동자들이 그들을 통제할 수 있었는지, 그들이 국가의 핵심 결정을 실제로 규정했는지 입증해야 한다. 단순한 생존과 부분적 영향력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과도기의 모순을 인정한다는 말로 노동자 권력이 없는 노동자국가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런 설명은 반혁명의 과정을 해명하는 대신, 이미 이뤄진 계급 지배의 전환을 가린다.
38 이론의 수정과 혁명적 전통의 계승
1948년 클리프는 자신의 책 첫 등사판에서 당시 혁명적 운동이 거대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썼다. 현실에 대한 낡은 분석의 문자에 매달리는 것은 원래 그 분석을 낳았던 혁명적 정신을 버리는 데로 이어질 수 있다. 그 위험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스승들의 가르침에 근거한” 소련 사회의 근본적 재분석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226 트로츠키 자신이 그 모범이었다. 그는 스탈린주의 권력의 가혹한 경험에 비추어 자신의 설명을 바꾸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1931년의 개혁 노선을 1933년에 버렸고, 1936년에는 혁명 없이는 어떤 출구도 없다고 썼다. 문제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재분석을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까지 밀고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며, 그의 추종자들 다수가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관한 판단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클리프의 재분석이 트로츠키의 혁명적 유산을 비판적으로 계승할 길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227 캘리니코스가 《소련 국가자본주의》 신판 서문에서 썼듯, 클리프의 책은 “스탈린주의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자로 계속 남는 것이 가능한지를 보여 주는 데 결정적”이었다. 228 전진은 소련이 자본주의였다는 결론을 받아들였지만, 그 결론에 맞게 노동자국가의 판단 기준을 재검토하지 않았다. 결론만 바꾼다고 낡은 분석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재분석에는 용어와 결론의 교체를 넘어, 기존 개념이 실제 사회관계를 얼마나 설명하는지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노동자 권력의 기준, 반혁명의 시점, 자본주의의 규정, 위기의 원인을 처음부터 다시 묻는 것이다.
맺으며: 자기해방의 기준으로 소련을 판단하기
전진은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면서도, 그 결론과 충돌하는 노동자국가의 판단 기준을 유지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순은 네 지점에 집중돼 있다.
첫째, 노동자 권력의 기준을 노동자의 실질적 지배에서 찾는다고 하면서도, 그 지배가 사라진 뒤에도 당의 연속성과 혁명적 간부의 잔존, 곧 ‘대리인’의 존재를 근거로 노동자국가 규정을 유지한다. 둘째, 그 결과 반혁명의 최종 전환점을 1930년대 중후반에 두면서 헌법·숙청·당원 구성의 변화에 결정적 비중을 부여한다. 셋째, 착취와 관료 내부 경쟁을 강조하지만, 그것을 세계적 경쟁에 의한 축적 강제와 충분히 연결하지 않는다. 넷째, 소련의 비시장적 특징은 “노동자국가의 잔재”로, 위기는 “명령경제의 비효율”로 설명한다.
이 네 지점은 모두 월터 돔이 체계화한 ‘1939년 반혁명’론과 맞닿아 있다. 돔은 내부 경쟁에서 가치법칙을 찾아 1939년설에 경제적 근거를 대려 했다. 그러나 그가 묘사한 경쟁은 자원 배분을 둘러싼 관료 내부 경쟁이었고, 그 경쟁을 강제한 구체적 원인으로 그가 드는 것은 결국 외부의 군사적 위협이었다. 전진의 교육 자료도 국내 경쟁과 잔재를 논하지만, 그것들이 계급적 전환의 시점 및 세계적 경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체계적으로 논증하지는 않는다.
결국 전진의 설명은 국가자본주의라는 결론에 정설 트로츠키주의의 판단 기준을 접합한 이론적 절충이다. 노동자가 지배하지 않는 국가를 노동자국가로 남겨 두는 한, 이 모순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 불일치는 오늘의 강령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유화와 노동자 권력을 문언상 결합하면서 실제 선동에서는 국가 소유의 확대를 앞세우는 전진의 전략은, 노동자의 실제 지배보다 소유 형식에 무게를 두는 같은 약점을 드러낸다.
이 글의 서술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1917년의 핵심은 볼셰비키당이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뿐 아니라 노동자·병사·농민의 대중적 자기조직화와 통치다. 내전기의 핵심은 혁명 정부가 살아남았다는 사실과 노동자들의 직접적 지배가 약화됐다는 사실이다. 1920년대의 핵심은 “관료적으로 일그러진(왜곡된) 노동자국가”(레닌)에서 노동자들의 압력과 당 안의 혁명적 전위가 관료를 어떻게 제약했는가, 그리고 그 제약이 어떻게 분쇄됐는가다. 우리는 1928년을 그 제약이 결정적으로 무너지고 국가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시작된 시점으로 본다. 국유화된 경제의 확대 속에서 노동자국가가 더 심하게 퇴보했다는 서술보다, 노동자와 농민을 국가적 축적의 대상으로 만드는 관계가 어떻게 체계화됐는지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 산업화와 집산화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추구하다 관료적으로 왜곡된 정책으로 평가될 것이 아니라, 누가 그것을 결정하고 누가 그 비용을 부담했는지에 따라 평가된다. 그리고 그 결정과 비용 부담을 강제한 것은 세계 체제 안의 군사적·경제적 경쟁이었다.
물론 1930년대 후반 대숙청도 큰 사건이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계급의 살아 있는 권력을 처음 제거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권력을 상실한 노동계급의 혁명적 전통과 잠재적 저항의 연결고리를 대규모로 절단하고 새로운 지배계급을 공고히 한 사건으로 서술해야 한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역사 서술도 달라진다. 그것은 스탈린주의에 맞서 올바른 노선을 지켰지만 주관적·객관적 조건 때문에 패배한 운동의 역사에 그치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독립성과 국제 혁명을 방어한 위대한 성취와, 소련 국가의 역사적 정당성을 끝까지 붙잡으려 한 이론적 약점이 함께 존재한 운동의 역사가 된다. 특히 스탈린의 ‘좌선회’는 좌익반대파를 혼란에 빠뜨렸고, 좌익반대파의 독자적 존재 이유를 공산당 노동자들에게 설득하기 어렵게 했다. 1933년 트로츠키가 소련 공산당의 개혁 노선을 포기한 것은 중요한 진전이었지만, 소련 사회의 국유화된 토대를 노동자국가의 본질로 보는 입장이 계속 남으면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에 관한 모순도 남았다. 그 모순은 전후 제4인터내셔널의 주요 경향에서 동유럽과 중국의 노동자국가 규정으로, 일부 경향에서는 스탈린주의를 위로부터의 개혁 세력으로 보는 태도로 이어졌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의 가장 값진 유산을 부정할 수 없다. 독일에서의 파시즘 분석과 공동전선, 스페인에서의 노동자·농민·피억압민족의 독립적 투쟁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되는 정치를 보여 준다.
이렇게 재구성하면, 국가자본주의라는 결론은 러시아 혁명의 역사 마지막에 붙는 판정이 아니라 혁명의 퇴보 과정 전체를 다시 살펴보게 하는 분석 원리가 된다. 그것은 소련의 역사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오늘의 중국과 러시아, 2008년 경제 공황 이후 되돌아온 국가 개입, 진영론의 유혹, 생태 위기, 그리고 한국에서의 국유화 요구를 판단하는 도구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스탈린주의 러시아라는 현상에 대응해 정교화됐지만 고전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뿌리박고 있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도 전에 제시됐으며,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고 사회주의자가 직면한 정치적 도전에 대처하는 데 여전히 필수적이다. 229
전진이 자신의 노동자국가 규정을 방어하려면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한다. 어느 기구를 통해 노동자들이 결정했는가? 지도부를 바꿀 수 있었는가? 독립적으로 조직하고 파업할 수 있었는가? 축적의 속도와 비용을 결정할 수 있었는가? 국가의 군대와 경찰은 누구에게 책임을 졌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 채 혁명의 기원과 간부들의 생존을 내세우는 것은, 노동자 권력을 입증하는 대신 당과 국가의 연속성으로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언제부터 소련 국가를 ‘나쁜 국가’라고 볼 것인가가 아니다. 노동자의 자기해방을 말할 때 ‘자기’라는 말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것과 노동자가 생산과 국가를 통제하는 것은 다르다. 혁명에서 유래한 제도와 국유재산이 남아 있다는 사실도 그 통제 관계의 존재를 대신 입증하지는 못한다. 국유화가 노동자 권력의 경제적 지배를 확립하는 형식적 수단이라는 것과, 국가 소유의 확대가 노동자 권력을 낳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주장이다. 이 구별은 오늘의 선동에서도 지켜져야 한다. 노동자 자신의 힘과 권력을 국유화의 부속 조건으로 밀어놓는 전략은 자기해방의 원리와 충돌한다.
이 기준에서 보면, 1928년에 시작된 계급적 전환을 서술하고도 1930년대 중후반까지 소련을 노동자국가로 남겨 두는 전진의 설명은 성립하지 않는다. 국가자본주의라는 최종 결론으로도 노동자의 자기해방을 당과 국가의 대리적 행위로 대체하는 이 논리를 덮을 수 없다.
노동자연대의 기본입장은 이 문제를 두 문장으로 정리한다. “러시아 혁명의 경험은 노동자 혁명이 한 나라에 고립돼서는 살아남을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였다.” 230 이 정식은 국제적 고립과 국가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연결한다. 다만 고립이 언제나 자동으로 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노동계급의 약화, 관료의 독립, 강제적 축적의 확립이라는 구체적인 과정이 있다. 전진의 설명은 바로 이 연결에서 실패한다. 노동자의 생활과 생산이 경쟁적 축적에 체계적으로 종속되기 시작한 1928년의 전환을 서술하면서도 노동자국가의 소멸을 뒤로 미루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자기해방을 옹호하려면, 노동자 권력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는 판단 기준부터 바꿔야 한다.
참고 문헌
-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 〈사회주의 기초학습 #7〉 사회주의 바로알기: 중국,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 2025년 12월 17일(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342).
-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 “기본강령” 1~3장 및 “대중투쟁강령”, 2024년 2월 17일 제정.
- 노동자연대, “노동자연대 기본입장”, 2024년 6월 6일 개정.
- 최일붕, “[개정증보판]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전진’)의 국유화 강령”, 〈노동자 연대〉 599호, 2026년 9월 22일(https://ws.or.kr/article/39783).
- 최일붕, “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 국가자본주의론의 관점”, 〈다함께〉 16호, 2003년 10월 4일(https://ws.or.kr/article/884).
- 최일붕, “노동자 국가란 무엇인가”, 《현대사상》 제34호: 노동자국가, 2026년 6월 19일, 75~87쪽.
- 최일붕, “스탈린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자 연대〉 198호, 2017년 2월 24일(https://ws.or.kr/article/18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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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레닌, 《스탈린주의에 맞선 레닌의 투쟁》, 책갈피, 2024.
- 토니 클리프,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책갈피, 2011(부록 4 “가치법칙과 소련”은 데렉 하울).
- 토니 클리프, 《레닌 평전 3: 포위당한 혁명》, 책갈피, 2010; 《레닌 평전 4: 볼셰비키와 세계혁명》, 책갈피,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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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rah Bates, “State Capitalism in Russia—a theory that has stood the test of facts”, Socialist Worke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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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 Harman, “The gravedigger”, Socialist Worker Review 110, 1988년 6월.
- Chris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a review of Beyond Perestroika by Ernest Mandel”, International Socialism 2:47, 1990년 여름.
- Chris Harman, “State capitalism – the theory that fuels the practice”, Socialist Review 341, 2009년 11월.
- Mike Haynes, “S is for state capitalism”, Socialist Review 332, 2009년 1월.
- Henry Heller, “The state and the birth of capitalism”, Revue internationale de philosophie 285, 2018, pp 243~266.
- János Kornai, Economics of Shortage, North-Holland, 1980; “The Soft Budget Constraint”, Kyklos 39(1), 1986.
- “Editorial Note: Socialists, Labourites and Clause 4”, International Socialism(구판) 1, 1960년 봄, pp 3~4.
- International Socialists National Committee, “Nationalisation, Workers’ Control and Workers’ Management”, International Socialism(구판) 73, 1974년 12월(성명 작성: 1974년 10월).
- Michael Kidron, “A Permanent Arms Economy”, International Socialism 28, 1967, pp 8~12.
- John Molyneux, “State Capitalism Today”, Irish Marxist Review, 2021, pp 68~79.
- John Molyneux, The Future Socialist Society, Bookmarks, 1987, 특히 3장.
- Michal Reiman, The Birth of Stalinism: The USSR on the Eve of the “Second Revoluti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7.
- Vadim Z. Rogovin, 1937: Stalin’s Year of Terror, Mehring Books, 1998.
- Leon Trotsky, “An Open Letter to the French Workers: Stalinist Betrayal and the World Revolution”, The New International 2(5), 1935년 8월.
- “Why read State Capitalism in Russia?”, Socialist Review(archive), 2013.
후주
- John Molyneux, “State Capitalism Today”, Irish Marxist Review, 2021, p 68. ↩
- Chris Harman, “State capitalism – the theory that fuels the practice”, Socialist Review 341, 2009년 11월. ↩
-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 〈사회주의 기초학습 #7〉 사회주의 바로알기: 중국,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 2025년 12월 17일(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342). 이하 ‘교육 자료’. ↩
-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 “기본강령”(3개 장)과 “대중투쟁강령”, 2024년 2월 17일 제정, 전진 누리집 2024년 3월 게재. 이하 기본강령은 ‘기본강령 1장’ 식으로, 대중투쟁강령은 해당 절 제목으로 표시한다. ↩
- 기본강령 3장 2절 “노동자 스스로의 해방노선”. ↩
- 기본강령 3장 2절. ↩
- 교육 자료. ↩
- 기본강령 3장 2절. ↩
-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 “2022년 10월 1일 예비 출범선언문”과 “2024년 2월 16일 본조직 출범선언문”. 출범선언문 목록: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me_code=10&me_id=3. 두 단계의 출범 경과와 강령의 이론적 내용은 구별해 평가해야 한다. ↩
- Walter Daum, The Life and Death of Stalinism: A Resurrection of Marxist Theory, Socialist Voice, 1990, pp 170~185. 돔은 트로츠키의 관점에 1939년까지는 동의하며, 반혁명이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완성됐다고 본다고 서문에서 밝힌다(p 9). ↩
- 교육 자료. ↩
- 교육 자료. ↩
- 교육 자료. ↩
- 돔, 앞의 책, p 177. ↩
- 돔, 앞의 책, p 157. ↩
- 돔, 앞의 책, p 184. ↩
- 기본강령 3장 2절. ↩
- 최일붕, “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 국가자본주의론의 관점”, 〈다함께〉 16호, 2003년 10월 4일(https://ws.or.kr/article/884). 최일붕은 정설파가 1951년 동유럽 국가들을 “일그러진 노동자 국가”로 규정한 것이 노동자 국가 건설은 노동자 자신의 행위라는 마르크스의 핵심 원칙과 모순된다고 지적한다. ↩
- Tom Bramble, “Tony Cliff: Stalinism was not socialism”, Socialist Alternative(호주). ↩
- 토니 클리프,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책갈피, 2011, 197~198쪽. ↩
- Bramble, 앞의 글. ↩
- 교육 자료. ↩
- 최일붕, “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 앞의 글. 최일붕은 이 대목에서 클리프, 앞의 책, 339~342쪽에 근거한다. ↩
- Molyneux, 앞의 글, pp 68~69, 72. ↩
- L Trotsky, The Revolution Betrayed[국역: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 1995], 9장. 돔, 앞의 책, p 129에서 재인용. ↩
- 최일붕, “노동자 국가란 무엇인가”, 《현대사상》, 제34호: 노동자국가, 2026년 6월 19일, 75~87쪽. ↩
- 클리프, 앞의 책, 201~202쪽. ↩
- Chris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2:47, 1990년 여름. 하먼이 인용하는 트로츠키의 글은 The Class Nature of the Soviet State, In Defence of Marxism, “The War and the Fourth International”이다. ↩
- 톰 오링컨,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론》, 책갈피, 2022, 52~54쪽. ↩
- 돔, 앞의 책, p 242. ↩
- 돔, 앞의 책, pp 154~155에서 재인용. 원문은 Trotsky, “Our Differences with the Democratic Centralists”(1928), The Challenge of the Left Opposition (1928~29), pp 293~295. ↩
- 오링컨, 앞의 책, 48~51쪽. ↩
- 돔, 앞의 책, p 156. ↩
- Tony Cliff, Trotsky, Vol. 4: The Darker the Night the Brighter the Star 1927-1940, Bookmarks, 1993, p 55. ↩
- 교육 자료. ↩
- 돔, 앞의 책, pp 10, 232.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
- 마이크 헤인스, 《다시 보는 러시아 현대사》, 책갈피, 2021, 335쪽. ↩
- 같은 책, 340~341쪽. ↩
- 최일붕, “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 앞의 글. 원출처는 Abel Aganbegyan, “The real state of the economy”, Stephen F Cohen, ed, An End to Silence: Uncensored Opinion in the Soviet Union, Norton, 1982, p 224. ↩
- 돔, 앞의 책, pp 209~210. ↩
- 오링컨, 앞의 책, 8장. ↩
- 돔, 앞의 책, p 77. ↩
- 오링컨, 앞의 책, 5장. ↩
- 기본강령 3장 2절. ↩
- 엥겔스, 《사회주의: 공상에서 과학으로》, 3장. 번역은 최일붕, “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 앞의 글을 따랐다. 몰리뉴가 강조하는 “정점으로 치닫는다”는 대목은 Molyneux, 앞의 글, p 70에서 보충했다. ↩
- 엥겔스, 《반뒤링론》 제3편 제2장 및 《사회주의: 공상에서 과학으로》 3장. “해결의 형식적 수단과 지렛대”는 Anti-Dühring, Foreign Languages Press, 1976, p 360의 “the formal means, the handle to the solution”을 옮긴 것이다(https://marx2mao.redspark.nu/M&E/AD78.html). 《사회주의: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영어판에는 같은 대목이 “해결의 요소를 이루는 기술적 조건”으로 옮겨져 있다(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0/soc-utop/ch03.htm). 비스마르크의 국유화 비판은 Molyneux, 앞의 글, p 72; Mike Haynes, “S is for state capitalism”, Socialist Review 332, 2009년 1월에도 인용돼 있다. ↩
- James Connolly, “The New Evangel: State Monopoly versus Socialism”, Workers’ Republic, 1899; Molyneux, 앞의 글, pp 72~73에서 재인용. ↩
- Molyneux, 앞의 글, pp 73~74. ↩
- John Molyneux, The Future Socialist Society, Bookmarks, 1987, 3장 “The conquest of economic power”(https://www.marxists.org/history/etol/writers/molyneux/1987/future/03-economic.html). ↩
- “Editorial Note: Socialists, Labourites and Clause 4”, International Socialism(구판) 1, 1960년 봄, pp 3~4(https://www.marxists.org/history/etol/newspape/isj/1960/isj001/ednote3.html). ↩
- 최일붕, “[개정증보판]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전진’)의 국유화 강령”, 〈노동자 연대〉 599호, 2026년 9월 22일(https://ws.or.kr/article/39783). 이 글에서 인용하는 개정증보판은 2026년 10월 10일 저장된 4쪽짜리 인쇄본을 기준으로 한다. 이하 이 기사의 쪽수도 같은 인쇄본의 쪽수다. ↩
- Michal Reiman, The Birth of Stalinism: The USSR on the Eve of the “Second Revoluti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7, pp 2~3. ↩
- 라이만, 앞의 책, pp 11~12(중국 정책의 파탄, 영국의 단교와 전쟁 공포), p 44(지방 관리들에 대한 처벌 위협 지시), p 49(오게페우의 특별 권한과 “근본적 변화를 향한 큰 걸음”), pp 87~89(1928/29년 통제 수치, “조직된 빈곤과 기근의 계획”), pp 102~103(5개년계획 초안), p 119(“인민과 분리되고 인민에게 적대적인” 지배층). ↩
- 라이만, 앞의 책, p 86. Adrian Budd, “A new era of state capit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2026년 1월 8일에서 재인용. ↩
- Budd, 앞의 글. ↩
- 라이만은 스탈린주의를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라 “전면적 전체주의”로 규정한다(라이만, 앞의 책, p 120). 스탈린주의가 위기의 출구로서 형성됐다는 그의 설명은 같은 책, pp 115, 117~118 참조. 라이만의 서술이 클리프의 판단을 뒷받침한다는 지적과 “사회 세력들의 상호 마비” 논지는 크리스 하먼의 것이다. Chris Harman, “The gravedigger”, Socialist Worker Review 110, 1988년 6월, pp 17~21. ↩
- 라이만, 앞의 책, p 49(오게페우의 감시 권한), p 61(노동계급의 관심을 지도부의 실책에서 딴 데로 돌림), p 66(“이후 재판들의 모델”이 된 샤흐티 재판), p 119(인민에게 적대적인 지배층). ↩
- 헤인스, 앞의 책, 156, 218쪽. ↩
- 블라디미르 레닌, 《스탈린주의에 맞선 레닌의 투쟁》, 책갈피, 2024. ↩
- 토니 클리프, 《레닌 평전 4: 볼셰비키와 세계혁명》, 책갈피, 2013, 181쪽. ↩
-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 344. ↩
- 같은 책, p 344. ↩
-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 53. ↩
- 토니 클리프, 《레닌 평전 3: 포위당한 혁명》, 책갈피, 2010, 168쪽;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p 343~344. ↩
- 클리프,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앞의 책, 199쪽. ↩
- 같은 책, 41쪽 이하. ↩
- 오링컨, 앞의 책, 3장.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
- Peter Binns, Tony Cliff and Chris Harman, Russia: From Workers’ State to State Capitalism, Haymarket Books, 2017(초판 Bookmarks, 1987), p 26. ↩
- 같은 책, p 36. ↩
- Peter Binns and Duncan Hallas, “The Soviet Union: State Capitalist or Socialist?”, International Socialism(구판) 91, 1976년 9월, pp 16~27. ↩
- 헤인스, 앞의 책, 156, 218쪽. ↩
-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p 343~344. ↩
- 클리프,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앞의 책, 201쪽. ↩
- 교육 자료. ↩
-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 338. ↩
- 헤인스, 앞의 책, 218쪽. ↩
- 같은 책, 229~230쪽. ↩
- 클리프,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앞의 책, 281쪽. ↩
- Chris Harman, “The nature of Stalinist Russia and the Eastern bloc”, Binns·Cliff·Harman, 앞의 책, p 47. ↩
- 돔, 앞의 책, p 180. ↩
- 돔, 앞의 책, p 171. ↩
- 돔, 앞의 책, p 174. ↩
- Binns·Cliff·Harman, 앞의 책, p 33 주. 이 수치의 출처는 Solomon M Schwarz, “Heads of Russian Factories”, Social Research, 1942이며, 돔도 같은 수치를 인용한다(돔, 앞의 책, p 181). ↩
- 클리프, 《레닌 평전 3》, 앞의 책, 168쪽. ↩
- 같은 책, 223쪽. ↩
- 교육 자료. ↩
- 교육 자료. ↩
- 교육 자료. ↩
- 기본강령 1장 3절 (1). ↩
- 기본강령 1장 2절. ↩
- 교육 자료. ↩
- Binns·Cliff·Harman, 앞의 책, pp 66~67(빈스의 글). ↩
- Bramble, 앞의 글. ↩
- James Burnham, The Managerial Revolution, 1945, pp 104~105; Molyneux, 앞의 글, pp 71~72에서 재인용. ↩
- Molyneux, 앞의 글, p 72. ↩
- N Bukharin, Imperialism and World Economy(1917); Molyneux, 앞의 글, pp 70~71에서 재인용. 부하린의 국제화·국가화 변증법에 대한 정리는 Budd, 앞의 글 참조.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
- Bramble, 앞의 글. ↩
- Binns·Cliff·Harman, 앞의 책, p 72. ↩
- 오링컨, 앞의 책, 5장. ↩
- Binns·Cliff·Harman, 앞의 책, p 72. ↩
- 같은 책, p 76. ↩
- 돔, 앞의 책, pp 14, 16. ↩
- 돔, 앞의 책, pp 178~179. 돔은 소련 법제 연구자 해럴드 버먼의 서술에 의존한다(Harold Berman, Justice in the USSR, 개정판, 1963, pp 110~114). ↩
- 돔, 앞의 책, p 175. ↩
- 돔, 앞의 책, p 176. 원출처는 E Zaleski, Planning for Economic Growth in the Soviet Union, 1962. ↩
- Paul Sweezy, “After Capitalism – What?”, Monthly Review, 1985년 7~8월호. 돔, 앞의 책, p 225에서 재인용. ↩
- 돔, 앞의 책, p 225. ↩
- “Why read State Capitalism in Russia?”, Socialist Review, 2013. ↩
- 돔, 앞의 책, p 179. ↩
- 돔, 앞의 책, p 77. ↩
- János Kornai, “The Soft Budget Constraint”, Kyklos 39(1), 1986, pp 3~30. 코르나이는 이 개념을 Economics of Shortage, North-Holland, 1980에서 처음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
- 돔, 앞의 책, p 172. ↩
- 돔, 앞의 책, p 131. ↩
- 돔, 앞의 책, pp 220~221. ↩
- Duncan Hallas, “Eastern European class societies”, International Socialism 2:9, 1980년 여름, pp 128~130. 핼러스가 반박한 글은 Peter Binns and Mike Haynes, “New theories of Eastern European class societies”, International Socialism 2:7, 1980이다. Alex Callinicos, “Wage Labour and State Capit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2:12, 1981[국역: 알렉스 캘리니코스, “임금노동과 국가자본주의”, 하먼·캘리니코스 외,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풀무질, 1995, 226~257쪽]. 돔도 캘리니코스의 결론이 옳다고 인정한다(돔, 앞의 책, p 223). ↩
- 최일붕, “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 앞의 글. 최일붕은 이직률 수치의 출처로 S Batyshev, “Vybor oshibok”, Literaturnaya Gazeta, 1968년 3월 19일(Lane and O’Dell, The Soviet Industrial Worker, 1978, p 90에서 재인용)을 든다. ↩
- 교육 자료. ↩
- 돔, 앞의 책, p 221.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
- 최일붕, “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 앞의 글. 원출처는 C Harman, “The inconsistencies of Ernest Mandel”, International Socialism(구판) 41, 1969, pp 37~38. ↩
- 스탈린, “경영 일꾼의 과업에 관하여”, 1931년 2월 4일 연설. 번역은 최일붕, “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 앞의 글을 따랐다. 수치 범위는 J. V. Stalin, “The Tasks of Business Executives”, 1931년 2월 4일의 영어 공개본에 따라 보완했다(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stalin/works/1931/02/04.htm). ↩
- 라이만, 앞의 책, p 86; Budd, 앞의 글에서 재인용. ↩
- 데렉 하울, “가치법칙과 소련”, 클리프,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앞의 책, 부록 4, 415~416쪽. ↩
- Binns·Cliff·Harman, 앞의 책, p 75. ↩
- Sarah Bates, “State Capitalism in Russia—a theory that has stood the test of facts”, Socialist Worker, 2022. ↩
- 오링컨, 앞의 책, 5장. ↩
- Bramble, 앞의 글. ↩
- “Why read State Capitalism in Russia?”, 앞의 글. ↩
- Bates, 앞의 글에서 재인용. ↩
- Henry Heller, “The state and the birth of capitalism”, Revue internationale de philosophie 285, 2018, pp 243~266, 특히 pp 262~265. 페리 앤더슨을 따라 헬러는 자본주의적 시장이 영토국가의 창조물이며 경제적 제도인 만큼이나 정치적 제도라고 강조한다. ↩
- Budd, 앞의 글. 원출처는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Beacon Press, 1957, p 139. ↩
- Harman, “State capitalism – the theory that fuels the practice”, 앞의 글. ↩
- 오링컨, 앞의 책, 7장. ↩
- 최일붕, “전진의 국유화 강령”, 앞의 글, p 2, 비판 ⑶. ↩
- 교육 자료. ↩
- Cliff, State Capitalism in Russia, p 154;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에서 재인용. ↩
- 오링컨, 앞의 책, 8장. ↩
- E Mandel, Quatrième Internationale, 1956;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에서 재인용. ↩
- 오링컨, 앞의 책, 5장.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원출처는 Vasily Selyunin, Sotsialisticheskaya industriya, 1988년 1월 5일.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
- 오링컨, 앞의 책, 8장. 하먼의 원래 분석은 C Harman, “Poland: the crisis of state capitalism, part 1”, International Socialism(구판) 93, 1976 참조.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
- 최일붕, “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 앞의 글. 최일붕은 이 대목에서 C Harman, “Poland: the crisis of state capitalism, part 1”, 앞의 글, p 27과 크리스 하먼, “논리의 검증을 이기지 못하는 이론”,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논쟁》, 풀무질, 1995, 84~85쪽에 근거한다. ↩
- 기본강령 2장 1절. ↩
- 최일붕, “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 앞의 글.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
- Harman, “State capitalism – the theory that fuels the practice”, 앞의 글; Bates, 앞의 글. ↩
- Alex Callinicos, “Imperialism, Capitalism and the State Today”, International Socialism 2:35, 1987, p 82. 돔, 앞의 책, p 307에서 재인용. ↩
- Bramble, 앞의 글. 상시군비경제론의 논지는 Michael Kidron, “A Permanent Arms Economy”, International Socialism 28, 1967도 참조(https://www.marxists.org/archive/kidron/works/1967/xx/permarms.htm). ↩
- 돔, 앞의 책, 6장 2절 “The Unexpected Boom”(p 257 이하). 돔은 상시군비경제론을 “새로운 시대” 이론의 하나로 묶어 비판한다(7장 1절). ↩
- 최일붕, “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 앞의 글. 원출처는 크리스 하먼, “논리의 검증을 이기지 못하는 이론”, 앞의 글, 106쪽. ↩
- Harman, “State capitalism – the theory that fuels the practice”, 앞의 글. ↩
- 교육 자료. ↩
-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p 53~55.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
- 교육 자료. ↩
-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 67;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원문은 Trotsky, “Problems of the development of the USSR”, Writings of Leon Trotsky, 1930-31, p 215. ↩
-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 56. ↩
- 같은 책, p 58. ↩
- 교육 자료. ↩
- 헤인스, 앞의 책, 161~162쪽(‘현실 돋보기: 좌익 반대파’). 인용문은 162쪽에 있다. 헤인스는 이 인용문을 토니 클리프의 트로츠키 전기 4권(영어판 1993년)에서 가져왔다. 클리프에 따르면 이것은 이반 N 스미르노프가 1929년 10월 투항할 무렵 한 말을 빅토르 세르주가 전한 것이다.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p 104~105(국역: 《트로츠키 1927~1940》, 책갈피, 2018). 클리프가 밝힌 원출처는 Victor Serge, Memoirs of a Revolutionary, London, 1984, pp 252~253이다. ↩
- 라이만, 앞의 책, p 68 및 같은 쪽 각주. ↩
- Ante Ciliga, The Russian Enigma, Pluto Press, 1987, p 135;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p 110~111. ↩
- Ciliga, 앞의 책, pp 270~271. ↩
- Ciliga, 앞의 책, p 209;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p 111~112. ↩
- Ciliga, 앞의 책, pp 271~272. ↩
- Ciliga, 앞의 책, p 231. ↩
- Molyneux, 앞의 글, p 74. ↩
- Bramble, 앞의 글. ↩
-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 232. ↩
- 같은 책, p 232. ↩
-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 68;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
- 클리프,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앞의 책. 거의 100쪽에 달하는 제1장 전체가 이 역사적 현실 분석이다.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 69.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
- 레닌, 〈식량세에 대하여〉(1921년 4월), 《레닌 전집》(영어판) 32권. 레닌은 여기서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에 일정한 ‘공물’을 바친다”고 썼다. ↩
- 레닌,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 초안〉(1920년 6월 5일), 11항, 《레닌 전집》(영어판) 31권, 144~151쪽. ↩
- 레닌, 〈강화조약 비준에 관한 보고〉(1918년 3월 14일), 제4차 임시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레닌 전집》(영어판) 27권. ↩
- 레닌, 〈모스크바 당 활동가 회의 연설〉(1918년 11월 27일), 《레닌 전집》(영어판) 28권. ↩
- 레닌, 〈양허에 관한 보고〉(1920년 12월 21일), 제8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분파 회의, 《레닌 전집》(영어판) 31권. 1921년 3월 체결된 영국-소련 통상협정은 실제로 소련 정부가 아시아 민족들, 특히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부추기는 선전을 삼가도록 규정했다. ↩
- 트로츠키,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스탈린주의의 배신과 세계혁명〉(1935년 6월 10일), The New International, 2권 5호, 1935년 8월, 148~151쪽. ↩
- 주소련 미국대사 불릿이 국무장관에게 보낸 1935년 5월 15일자 전보(751.6111/76),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Diplomatic Papers, 1935, vol. I, 278~279쪽. ↩
- 트로츠키, 앞의 글. ↩
- Tony Cliff and Ian Birchall, France: The Struggle Goes On, 1968, “The party of permanent treason” 장. ↩
- 코민테른 제4차 대회, “코민테른 전술에 관한 테제”(1922년 12월 5일), 11항 “노동자 정부”. ↩
-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과제”,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주보고, 1935년 8월 2일. ↩
- 모리스 토레즈, 1936년 6월 11일 파리 지역 공산당 활동가 회의 연설, 〈뤼마니테〉 게재. 원문은 “Il faut savoir terminer une grève dès l’instant où les revendications essentielles ont été obtenues”, “Tout n’est pas possible”, “Tout pour le Front populaire! Tout par le Front populaire!”. ↩
- 교육 자료. ↩
- 최일붕, “스탈린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자 연대〉 198호, 2017년 2월 24일(https://ws.or.kr/article/18390). 최일붕은 이 대목을 포함한 자신의 서술이 Vadim Z. Rogovin, 1937: Stalin’s Year of Terror, Mehring Books, 1998에 크게 의존한다고 밝힌다. ↩
- Cliff, Trotsky, Vol. 4, 앞의 책, p 293. ↩
- 같은 책, p 294. ↩
- Bramble, 앞의 글.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고무우카는 헝가리 혁명 실패 후 개혁의 기대를 받으며 복귀했으나, 독재와 유혈 탄압 등 폭정을 자행하다 결국 실각했다. ↩
- Bramble, 앞의 글.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Cliff, State Capitalism in Russia, p 154. ↩
- Bates, 앞의 글. ↩
- Harman, “State capitalism – the theory that fuels the practice”, 앞의 글. ↩
- 교육 자료. ↩
- 최일붕, “마오쩌둥주의: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노동자 연대〉 596호, 2026년 8월 25일(https://ws.or.kr/article/39632). Molyneux, 앞의 글, p 75 및 주 31~32. ↩
- 교육 자료. ↩
- Molyneux, 앞의 글, pp 74~76. ↩
- Molyneux, 앞의 글, p 76. ↩
- Budd, 앞의 글. ↩
- Haynes, “S is for state capitalism”, 앞의 글. ↩
- Molyneux, 앞의 글, pp 76~77. ↩
- 교육 자료. ↩
- Budd, 앞의 글. ↩
- 교육 자료. ↩
- 대중투쟁강령 3장 3절 “노동자투쟁의 힘을 대표하는 노동자정부 수립”.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
- 대중투쟁강령 3장 1절 “기간산업 몰수·국유화와 노동자의 산업통제”. ↩
- 최일붕, “전진의 국유화 강령”, 앞의 글, pp 1~3. 발전산업·쿠팡·조선산업의 선동 사례, 강령의 서술 순서와 노동자 권력의 관계, 예상되는 반론에 대한 답변을 참조. ↩
- International Socialists National Committee, “Nationalisation, Workers’ Control and Workers’ Management”, 1974년 10월 성명, International Socialism(구판) 73, 1974년 12월(https://www.marxists.org/history/etol/newspape/isj/1974/no073/isnc.html). 성명은 자본주의 아래의 노동자 통제를 경영진의 권한에 도전하는 투쟁으로 설명한다. ↩
- 최일붕, “전진의 국유화 강령”, 앞의 글, pp 3~4. 노동자 통제와 자주관리의 구별 및 마르크스의 1866년 〈임시총평의회 대의원들에게 주는 지침〉에 관한 설명을 따른다. ↩
- 최일붕, “전진의 국유화 강령”, 앞의 글, p 2, 비판 ⑷~⑸. 민족주의·산업정책과 뒤섞일 위험과 《이행강령》 방법의 기계적 적용 문제. ↩
- Molyneux, 앞의 글, p 74. ↩
- 최일붕, “전진의 국유화 강령”, 앞의 글, p 2, 비판 ⑵. 기아차와 대우조선해양 사례. ↩
- International Socialists National Committee, 앞의 성명. 당시 영국 노동당 정부의 국유화 조처에 대한 입장을 “비판적으로,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지지한다고 설명하며, 자신들의 요구가 전부 실현되지 않아도 그 조처에 대한 지지는 유지한다고 명시한다. 본문은 이 구체적 사례에서 지지와 비판의 관계를 설명한다. ↩
- 최일붕, “전진의 국유화 강령”, 앞의 글, pp 2~3. 국유화 요구를 지지하는 것과 국유화를 선동의 중심에 두는 전략을 구별하고, 전진의 실제 선동이 국가 소유 형태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긴다고 판단한다. ↩
- Molyneux, 앞의 글, pp 73~74. ↩
- “Why read State Capitalism in Russia?”, 앞의 글. ↩
- Harman, “From Trotsky to state capitalism”, 앞의 글. ↩
- Bramble, 앞의 글. ↩
- Bates, 앞의 글에서 재인용. ↩
- Molyneux, 앞의 글, p 77. ↩
- 노동자연대, “노동자연대 기본입장”, 2024년 6월 6일 개정(https://ws.or.kr/page/what-we-stand-f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