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의 중국론: 올바른 결론, 흔들리는 토대
〈노동자 연대〉 구독
1. 평가 대상과 기준
이 글의 분석 대상은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이하 전진)이 2025년 12월 17일 공개한 교육 자료 〈사회주의 기초학습 #7 사회주의 바로알기: 중국,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다. 이 문서는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주의 반혁명에서 출발해 1927년 중국 혁명의 패배, 1949년 혁명, 마오 시대의 국가 주도 축적, 문화혁명, 개혁개방, 1989년 톈안먼 항쟁, 오늘날의 중국을 거쳐 북한과 ‘중·러·북 동맹’까지 다룬다.
노동자연대와 마찬가지로 전진도 1949년 이후 중국을 자본주의 사회로 본다. 다만 1978년을 경계로 그 이전은 ‘국가자본주의’, 그 이후는 ‘시장자본주의’로 구분한다. 따라서 이 글은 스탈린주의나 사회민주주의의 관점을 논박하는 글이 아니다. 결론을 일정 부분 공유하는 조류 안에서 그 결론을 어떤 이론으로 뒷받침하는지 따지는 내부 비판이다. 우리가 보기에 전진의 중국론은 올바른 결론에 도달했지만 그 결론을 떠받치는 이론적 토대가 흔들린다.
이런 비판은 더 까다롭지만 그만큼 필요하다. 같은 결론에 이르더라도 근거는 다를 수 있고, 그 근거가 다르면 조건이 바뀌었을 때 전혀 다른 정치적 결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은 자본주의다’라는 결론을 시장의 존재에서 끌어내면, 중국 국가가 시장 통제를 강화하고 국유 부문을 확대할 때 이를 사회주의로의 회귀(또는 이행)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세계 자본주의의 경쟁이 강제하는 자본 축적에서 그 결론을 끌어내면, 소유 형태나 국가 개입의 정도가 달라져도 체제의 계급적 성격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
2. 전진 문서의 논지 전개
전진 문서의 논지는 ‘사회주의의 정의 → 소련의 반혁명 → 중국으로의 이식 → 시장으로의 전환 → 제국주의 경쟁 → 국제연대’ 순서로 전개된다. 비판의 대상을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그 논지를 재구성한다.
2-1. 출발점: 사회주의의 정의
전진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가 노동자 민중에게 강요하는 착취·차별·억압을 일소한 사회로 정의하는 데서 출발한다. 전진은 중국의 빈부 격차가 극심하고, 노동자에게 자주적 노조를 만들 권리가 없으며, 마윈·마화텅·레이쥔 같은 억만장자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전진은 이들을 제프 베이조스, 마크 저커버그, 팀 쿡의 중국판이라고 부른다. 북한에서는 선거, 언론, 집회·결사, 이동, 사상의 자유가 더욱 심각하게 제약된다고 서술한다. 2024년 중국 지린성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벌인 파업을 휴전 뒤 거의 유일하게 확인되는 파업으로 소개한다. 전진은 이런 사회가 ‘사회주의’로 불리면 우파가 이를 반공주의의 도구로 이용할 수 있으므로 ‘가짜 사회주의’임을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2-2. 소련: 노동자 국가에서 국가자본주의로
전진은 1917년 10월 혁명으로 노동자 국가가 성립했다고 설명한다. 소비에트 정부는 평화, 민족자결, 토지, 여성 해방 문제에서 당대 가장 진보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독일 혁명의 패배와 내전이 낳은 소모 속에서 선진 노동자층이 소멸하고 관료가 성장했다. 신경제정책 시기 네프맨과 쿨락이 성장했고, 당내 투쟁에서 스탈린의 중도파가 좌익반대파와 부하린 우파를 차례로 제거했다. 강제 집산화와 관료적 공업화가 뒤따랐고, 성과급과 스타하노프 운동, 노동수첩과 결근 형사처벌이 도입됐으며, 낙태 금지와 동성애 처벌로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가 후퇴했다.
전진은 1936년 헌법이 노동자 대표제를 폐지하고 부르주아식 개인 투표를 도입한 것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법률적 청산으로, 1937~1939년 대숙청을 반혁명의 물리적 완수로 본다. 이 시기 구분은 사실상 월터 돔의 《스탈린주의의 삶과 죽음》에 기댄 것이다. 반혁명 이후 소련은 관료가 지배계급인 국가자본주의이며, 통상적인 시장자본주의와 달리 해고가 제한되고 기업이 파산하지 않는 등의 특징은 주로 노동자 국가의 잔재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설명한다.[전진의 소련국가자본주의론에 관해서는 같은 필자의 글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의 소련국가자본주의론 — 노동자 권력이 사라진 국가를 노동자국가라 부를 수 있는가?’를 보시오.]
2-3. 중국: 1927년 패배와 마오주의
전진의 서술에 따르면, 1921년 창당 때 계급 독립성 원칙을 가졌던 중국공산당은 스탈린과 부하린의 코민테른에 의해 국민당 안으로 ‘용해’됐다. 1925~1926년 파업 물결로 노동자의 힘이 성장했는데도 코민테른은 국민당을 협력 조직으로 받아들이고 소비에트 건설을 막았다. 결과는 1927년 4월 상하이 학살이었다. 이 패배는 중국에서 노동자 혁명의 가능성을 오랫동안 봉쇄했고, 그 폐허 위에서 노동자 대중운동을 농민과 지식인의 게릴라 운동으로 대체한 마오쩌둥주의가 주류가 됐다. 전진은 마오주의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냉소주의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스탈린주의 철학을 공유하며, 인민전선과 ‘4계급 연합’, 일본 제국주의를 ‘주요 모순’으로 놓는 계급 협조 노선을 받아들였다고 본다.
2-4. 1949년과 마오 시대
전진은 1949년 혁명을 국민당과 제국주의를 몰아낸 민족해방 혁명으로 평가하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고 본다. 노동계급이 독자적 정치 주체로 조직되지 않았고 노동자 평의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잡은 것은 중국공산당 관료였고, 그들은 스탈린주의의 관료적 명령경제를 중국에 ‘이식’했다. 전진은 마오주의를 일국사회주의 철학의 변형이자 사회주의의 외피를 쓴 민족주의로 규정하고, 이 체제가 박정희식 국가 주도 개발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오 시대 서술은 독일 출신의 활동가이자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연구하는 랄프 루쿠스의 《자본주의로 가는 공산주의의 길: 1949년 이래 사회적 소요와 억압은 어떻게 중국의 혁명(진화)을 추동했는가》에 크게 의존한다. 이 책을 바탕으로 단웨이를 중심으로 한 피라미드형 노동 위계, 정규직·일반 도시 노동자·임시 농민공으로 나뉜 노동 분업, 노동점수제 아래 농민의 빈곤, 호구제도에 따른 이동 통제, 혼인법의 성과와 그 뒤의 후퇴, 여성 노동을 통한 ‘숨겨진 축적’을 서술한다. 이어 1956~1957년 주변부 노동자의 파업, 백화제방과 반우파 투쟁, 대약진과 대기근, 류사오치·덩샤오핑의 조정, 사청운동, 문화혁명을 다룬다. 문화혁명 부분에서는 보황파와 조반파의 분화, 임시직 노동자들의 동일노동·동일임금 요구와 ‘경제주의’ 낙인, 성무련의 체제 비판, 1968년 이후 군대의 진압과 ‘계급대오 정화’가 강조된다.
2-5. 개혁개방, 톈안먼, 오늘의 중국
전진은 덩샤오핑 분파의 집권을 지배계급 내부 투쟁의 결과로 본다. 대미 화해와 기술 수입은 이미 마오 생전에 시작됐으므로 마오와 덩 사이에 분명한 단절선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진은 관료적 명령경제의 비효율 속에서 지배계급이 권력 유지를 위해 시장자본주의로 전환했다고 보고, 1978년을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민공사 해체, 농민공과 경제특구, 국유기업 개혁과 ‘철밥통’ 해체, 1982년 헌법의 파업권 삭제, 한 자녀 정책이 서술된다.
톈안먼 항쟁 부분에서는 루쿠스와 비슷한 관점을 가진 지한(吉漢)의 글에 기대어 1989년에 학생운동과 노동자운동이라는 ‘두 개의 운동’이 있었다고 본다. 학생은 개혁을 지지하는 자유민주주의를, 노동자는 시장주의 개혁과 관료 독재를 동시에 거부하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곧 ‘사회주의민주’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공자련(노동자자치연합회)의 성장, 규찰대와 결사대, 총파업 준비, 학생 지도부의 총파업 반대와 무기 반납이 서술된다. 전진은 진압 뒤 중국이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완수하고, 1990년대 신자유주의 재편 속에서 세계의 공장이 됐으며, 오늘날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투는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성장했다고 설명한다.
2-6. 북한과 결론
북한 부분에도 같은 구도를 적용한다. 전진은 소련이 이식한 스탈린주의 관료체제에서 출발해 한국전쟁을 모험주의로 규정하고, 이어 수령체제의 형성과 대기근 뒤 장마당(비공식 시장)·돈주(신흥 부유층)로 대표되는 시장화를 서술한다. 또 미국이 관계 정상화를 거부하자 북한이 핵무장과 고립을 택했고, 우크라이나 전쟁 뒤에는 ‘중·러 제국주의’의 품에 안겼다고 설명한다.
결론부는 두 가지 과제를 제시한다. 첫째, ‘가짜 사회주의’의 역사를 올바로 해석하고 개량주의와 스탈린주의 모두와 단절하는 것이다. 대안의 원칙으로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복수 노동자 정당, 평의회, 소환권, 정치파업의 자유), 피억압자의 자기조직화, 아래로부터의 피드백에 기초한 민주적 계획경제, 세계혁명의 전망이 제시된다. 둘째, 중국·북한 노동자와의 국제연대를 건설하는 것이다.
3. 먼저 인정해야 할 장점
전진 문서의 장점은 다음 일곱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반(反)진영론이 일관된다. 중국의 대미 경쟁을 ‘반제국주의’로 미화하는 한국 좌파 일부의 경향에 맞서, 전진은 중국 지배계급도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계급이며 노동자는 어느 쪽 지배계급도 지지할 이유가 없다고 못 박는다. 이는 우리가 밝혀 온 원칙과 일치한다. 곧 사회주의적 해결책은 한 지배계급을 다른 지배계급에 맞서 지지하는 데 있지 않고 국가적 특성이 무엇이든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에 맞선 연대와 공동 투쟁에 있다는 것이다. 필자도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진영론을 비판하며, 양국의 제국주의적 경쟁과 민족주의에 맞서 노동계급의 국제적 연대와 자기행동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둘째, 사회주의의 기준을 국유화가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권력과 민주주의에 둔다. 1936년 스탈린 헌법이 노동자 대표제를 폐지하고 ‘전 인민’을 내세운 것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법률적 청산으로 읽는 대목에서도 노동자 권력의 문제를 강조한다. 다만 반혁명의 결정적 시점을 이 헌법에 두는 시기 구분은 뒤에서 비판할 것이다. 성과급을 ‘사회주의적 분배’로 포장한 것을, 성과급이 자본주의 생산에 가장 적합한 임금 형태라고 본 마르크스의 분석으로 논박하는 대목은 필자가 중국공산당의 ‘노동에 따른 분배’ 담론을 비판하며 쓴 논리와 같다. 이정구가 파리 코뮌은 국유화를 시행한 적이 없는데도 마르크스가 노동자 국가로 규정했다는 점을 들어 국유화가 사회주의의 잣대가 아니라고 강조한 것과도 합치한다. 1
셋째, 젠더 문제를 자세히 다룬다. 루쿠스의 연구에 기대어 1950년 혼인법의 성과와 1953년 이후 캠페인 축소, 노동점수에서 남성 노동이 10점일 때 여성 노동은 최고 5.5점으로 평가된 사실, 단웨이 지도자가 전통적 가부장의 역할을 이어받은 과정을 짚는다. 이어 대약진 시기 공공식당·보육원을 통한 가사·돌봄노동의 일시적 사회화와 그 후퇴, 1980년대 초 도시 여성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한 캠페인, 게일 허셔터가 ‘숨겨진 축적’이라 부른 여성의 무급 재생산노동을 서술한다. 이 부분은 에이드리언 버드의 책 제5장 ‘여성과 페미니스트 운동’ 절과 이정구의 책 제13장 ‘중국 여성의 불평등한 현실’이 다루는 문제의식과 이어진다. 러시아 혁명 부분에서 콜론타이와 1918년 가족법, 스탈린 치하의 낙태 금지와 ‘어머니 영웅’ 칭호까지 연결해 서술한 점도 교육적 가치가 크다.
넷째, 문화혁명을 위로부터의 권력투쟁과 그 통제를 벗어나려 한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교차한 과정으로 읽는다. 임시직·계약직 노동자들이 ‘전국홍색노동자조반총단’을 조직하고 내건 ‘동일노동 동일임금 동일권리’ 요구가 ‘경제주의’로 낙인찍혀 탄압받은 과정을 밝힌다. 아울러 성무련이 중국 지배층을 ‘붉은 부르주아지’로 규정하고 파리 코뮌을 모델로 삼은 사실, 사상자의 약 75퍼센트와 정치적 박해의 90퍼센트가 1968년 중반 이후에 일어났다는 연구를 소개한다. 이는 문화혁명을 사회적 불만을 이용한 위로부터의 권력투쟁과 그 통제를 벗어나려 한 대중 행동이 교차한 과정으로 본 필자의 서술과 합치한다. 에이드리언 버드도 1966년 말부터 파업 물결이 일었고, ‘새로운 관료 부르주아지’와 사회의 적대를 분석해 노동자 무장의 필요성을 도출한 마르크스주의 분석이 등장했다고 쓴다. 2 나이절 해리스도 성무련에 한 절을 할애해 이 흐름을 분석했다. 3
다섯째, 톈안먼 항쟁에서 노동자의 역할을 부각한다. 노동자들이 학생 조직과 별도로 일찍부터 독자적 조직화를 시도했다는 점, 5월 20일 계엄 선포 뒤 노동자들이 인간 띠와 바리케이드로 군대 진입을 막고 규찰대와 결사대를 조직한 사실을 지적한다. 아울러 서우두 제철소 10만 노동자의 파업설이 지도부를 혼란에 빠뜨린 점과 진압 뒤 노동자 탄압이 학생 탄압보다 훨씬 가혹했다는 점을 서술한다. 톈안먼을 ‘학생 민주화 운동’으로만 기억하는 통념을 교정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찰리 호어도 톈안먼 항쟁에서 공개적인 노동자 조직이 등장했고, 베이징과 적어도 15개 다른 도시에 노동자자치연합회가 세워졌다고 기록했다. 버드가 프로미스 리를 인용해 공자련을 ‘도시 동원의 등뼈’로 평가한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여섯째, 마오와 덩샤오핑 사이에 체제의 계급적 성격에 명확한 단절선이 없다고 지적한다. 대미 화해와 기술 수입은 이미 마오 생전에 시작됐고, 중·소 분쟁 속에서 중국이 더 적극적으로 미국의 손을 잡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호어는 1971~1975년 대외무역이 세 배로 늘고 공장 설비를 대량 수입했으며, 지배계급 내부 분열 때문에 축적 방식의 결정적 전환은 마오 사후에야 가능했다고 쓴다. 버드도 제1장 ‘이행’ 절에서 1969년 중·소 국경 충돌과 1970년대 세계경제 위기라는 외부 압력이 개혁파의 결의를 강화했다고 설명한다. 4 이 연속성 인식은 개혁개방을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반혁명’으로 보는 통념을 반박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일곱째, 이중 노동체제가 마오 시대부터 구축됐다고 서술한다. ‘철밥통’을 보장받은 국영기업 정규직은 전체 노동자 가운데 소수에 불과했고, 그 아래 일반 도시 노동자와 임시 농민공이 피라미드를 이뤘다는 것이다. 해리스는 일찍이 1978년에 한 장 전체(8장 ‘임시직·계약직 노동: 노동자-농민 제도’)를 할애해 이 문제를 분석했다. 전진의 서술은 이를 루쿠스의 자료로 보강하고 있으며, 한국의 정규직·비정규직 분할과 연결해 설명한 것도 좋은 시도다.
이러한 장점 덕분에 전진의 문서는 입문자에게 중국 현대사의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소개하는 자료로서 쓸모가 있다. 문제는 이 서술들을 엮는 이론적 토대에 있다.
4. 첫째 문제: 흔들리는 ‘자본주의’의 기준
전진은 자본주의를 규정할 때 경쟁적 자본 축적보다 착취와 비민주성을 주된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착취와 비민주성은 전자본주의 계급사회에도 존재했다. 그 결과 소련에 대해서는 ‘노동자 국가의 잔재’라는 설명을, 중국에 대해서는 ‘이식’이라는 설명을, 개혁개방을 설명할 때는 ‘비효율’이라는 설명을 끌어오게 됐다.
4-1. 너무 느슨한 기준
전진은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근거를 이렇게 제시한다. 국가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을 체계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했다는 점에서 소련은 본질적으로 시장자본주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노동자 민주주의에 기반하지 않은 관료적 명령경제의 이식이 곧 또 다른 거대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수립을 뜻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 기준은 너무 넓다. 직접 생산자를 착취해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 체제는 자본주의 이전에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 잉카, 전근대 중국의 공납제 국가도 농민의 잉여생산물을 거둬 대규모 토목사업과 군사력에 투입했다. 노동자 민주주의의 부재는 그 사회가 사회주의가 아님을 판단하는 핵심 근거이지만, 그것만으로 생산양식이 자본주의임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노동자가 권력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곧바로 그들을 지배하는 계급이 자본가계급이라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자본주의를 다른 계급사회와 구별하는 생산관계와 축적의 동력을 밝혀야 한다.
국제사회주의 전통의 국가자본주의론이 결정적으로 강조한 것은 다른 기준이다. 해리스는 17~18장에서 이 논리를 가장 정교하게 전개한다. 자본가들 사이의 세계적 경쟁은 자본을 소수에게 집중시켰고, 레닌 시대에 이미 국민경제의 주요 생산 부문을 소수 대기업이 지배했다. 독점을 유지하려면 국가가 외국 경쟁자를 배제하거나 그 활동을 제한해야 했고, 국가는 대기업과 유착해 세계시장에서의 경쟁 조건을 다른 국가와 협상하는 주요 행위자가 됐다. 경제 위기와 전쟁 때문에 각국 부르주아지는 생존을 위해 기업 활동을 국가의 지도에 종속시킬 수밖에 없었다. 전시에 국가는 모든 노력을 외부의 적을 향해 조직하는 하나의 거대한 국민적 복합기업의 이사회가 됐다. 이런 제도적 변화는 중심 동력, 곧 생존의 조건으로서의 축적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다만 이제 생존을 걸고 경쟁하는 단위는 개별 사적 자본가를 넘어, 다른 나라 지배계급과 맞서는 한 나라 지배계급의 총자본이 됐다. 5
해리스는 여기서 엥겔스를 인용한다. 근대 국가는 형태가 어떻든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기구이며 관념적 총자본가다. 국가가 더 많은 생산력을 인수할수록 더욱 현실적인 총자본가가 되고, 더 많은 시민을 착취한다. 노동자는 여전히 임금노동자, 곧 프롤레타리아로 남는다. 자본 관계는 폐지되지 않고 오히려 극단으로 밀려간다. 6 버드도 클리프의 결정적 통찰을 요약한다. 소련을 세계 체제에서 떼어 놓고 이해할 수 없으며, 다른 국가의 군사적 위협으로 표현되는 세계 자본주의의 경쟁적 축적이라는 역학의 압력 아래 놓고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7
요컨대 소련과 중국이 자본주의인 이유는 단지 착취가 존재해서가 아니다. 착취는 모든 계급사회에 있었다. 세계 체제의 경쟁이 가치법칙을 이들 사회에 관철해 소비가 축적에, 축적이 경쟁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필자도 같은 기준을 제시했다. 법적 소유권이 아니라 실제 생산관계를 봐야 한다는 점이다. 상품·화폐·임금의 존재만을 따질 것이 아니라, 노동력이 어떤 생산관계 아래 놓여 있는지, 노동자들이 생산과 국가를 직접 통제하는지, 인간의 필요와 경쟁적 축적 중 어느 쪽이 사회의 우선순위를 정하는지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필자는 중국 관료가 미국·소련·일본 등과 경제적·군사적으로 경쟁해야 했고, 그 경쟁 때문에 국가 정책에서 생산성 향상과 중공업·군사력 확대가 인간의 필요보다 우선시됐다고 설명했다. 이정구는 이를 “국가가 생산수단을 통제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하고 그 잉여가치로 더욱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체제”라고 요약한다. 8 여기서 핵심어는 ‘더욱 부강한 국가’, 곧 다른 국가와의 경쟁이다.
물론 전진의 문서에도 경쟁은 등장한다. 하지만 그 장(場)과 성격이 다르다. 전진은 월터 돔을 인용해 스탈린 치하 계획경제 안에서 각 부처 내 기업들이 특권적 지위, 합리적 할당량, 쉬운 주문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고 묘사한다. 과거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정글이 펜싱 대회처럼 보일 만큼 지저분한 영향력 쟁탈전이었다는 것이다. 이 묘사는 흥미롭지만, 체제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관료 내부 분파 사이의 경쟁에서 찾는 것은 논점을 벗어난 얘기다. 내부 경쟁은 어느 거대 관료 조직에나 있다. 봉건 궁정에도, 교회에도, 현대 자본주의 대기업 내부에도 있다. 소련과 중국에서 그 내부 경쟁이 자본주의적 축적 논리에 종속되는 이유를 알려면 ‘외부’, 곧 세계적 군사·경제 경쟁을 봐야 한다.
전진의 소련 서술에는 스탈린이 소련은 선진국보다 50~100년 뒤처져 있으니 10년 안에 따라잡지 못하면 짓밟힌다고 한 유명한 연설(버드는 이를 마오의 처지와 비교하며 인용한다) 9 이나, 1927~1928년 전쟁 공포 같은 세계 자본주의·제국주의 체제의 압력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전진이 인용한 월터 돔의 한 구절은 스탈린이 서유럽 자본주의가 민족국가를 강화해 발전했듯 제국주의가 약탈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독립적인 힘을 구축하려 했다고 말하지만, 전진은 이 대목을 자본주의 규정의 근거로 발전시키지 않는다. 중국 부분에서도 한국전쟁, 1964년 핵실험, 삼선건설(三線建設), 1969년 중·소 국경 충돌 같은 군사적 압력이 사회관계를 어떻게 규정했는지에 대한 분석은 부차적이다. 삼선건설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이 소비를 억제하고 막대한 자원을 내륙 군수공업에 쏟아부은 축적 결정이었다는 점은 체제의 성격 규정과 연결되지 않는다.
4-2. ‘노동자 국가의 잔재’라는 설명의 자기모순
더 심각한 문제는 돔식 시기 구분을 받아들이면서 생긴 내적 모순이다. 전진은 반혁명 이후 소련 경제가 통상적인 시장자본주의와 다른 형태를 띠었다고 인정한다. 산업이 국유화돼 있고, 시장의 역할을 관료적 명령경제가 대체했으며, 노동자 해고가 자유롭지 않고, 기업은 충분한 생산성을 확보하지 못해도 파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차이점들이 주로 러시아 혁명이 남긴 노동자 국가의 잔재에서 비롯한다고 설명한다. 그 잔재가 한편으로는 노동자 권리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비효율적인 생산을 유지해 자본주의의 자유로운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소련에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몰라도 전진의 중국론에 적용하면 무너진다. 전진은 1949년 중국에서 노동자 혁명이 없었고 노동자 국가도 수립되지 않았다고 본다. 옳은 지적이다. 그런데 마오 시대 중국에도 평생고용(‘철밥통’), 파산하지 않는 국유기업, 명령에 의한 자원 배분이 있었다. 전진 자신이 인용하는 루쿠스의 단웨이 서술이 바로 그것이다. 노동자 국가가 없었던 중국에 왜 ‘노동자 국가의 잔재’와 같은 특징이 나타났는가?
전진의 틀 안에서 가능한 답은 소련 체제를 ‘이식’했기 때문이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식은 형태가 어떻게 전파됐는지를 말해 줄 뿐, 왜 그 형태가 중국의 조건에서 재생산되고 오히려 강화됐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중·소 분쟁으로 소련 기술자가 철수한 1960년 이후에도 중국의 명령경제는 20년 가까이 유지됐다. 게다가 이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중국의 명령경제적 특징은 수입된 ‘노동자 국가의 잔재’라는 기묘한 결론에 이른다. 같은 논리를 동유럽, 북한, 베트남, 쿠바에 적용하면 문제는 더 커진다. 이 나라들 어디에도 노동자 혁명은 없었지만 비슷한 특징이 나타났다. 더구나 버마, 시리아, 알제리, 탄자니아처럼 소련 체제가 직접 이식되지 않았던 나라들에서도 국가 주도 축적과 국유화, 명령식 자원 배분이 서로 다른 정도로 나타났다.
우리의 설명은 훨씬 간명하다. 평생고용, 연성 예산제약, 명령식 자원 배분은 그 자체로 노동자 권력의 흔적을 입증하지 않는다. 자본이 빈약한 후발국이 세계 경쟁 속에서 급속한 축적을 강행할 때 국가자본주의가 취할 수 있는 특정한 제도적 형태다. 해리스는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소련은 선진 자본주의의 경향, 곧 경제의 국가화와 사회의 군사화를 극단으로 밀어붙였고, 제도적으로는 선진국보다도 ‘앞선’ 단계, 곧 하나의 이사회 아래 있는 거대한 국민적 복합기업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선진국에서 국가자본주의로의 흐름을 가로막던 옛 사회 세력을 1917년 혁명이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10 중국에서 같은 역할을 한 것은 1949년 혁명과 뒤이은 토지개혁, 옛 사적 자본가계급의 해체였다. 이 설명에서는 노동자 국가가 있었든 없었든 동일한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평생고용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해리스는 8장에서 ‘철밥통’이 전체 노동자 가운데 소수에게만 주어졌고, 그 특권은 바로 임시 노동자층이라는 완충 장치를 전제로 성립했음을 보여 준다. 핵심 산업의 숙련 인력을 붙잡아 두려는 경영상의 필요와 도시 인구를 통제하려는 국가의 필요가 결합된 결과였다. 이를 ‘노동자 국가의 잔재’로 부르면, 그 상대적 고용 안정이 노동자계급 내부의 위계와 분열을 유지하는 장치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가려진다. 전진이 루쿠스를 인용해 ‘이 세 층위의 노동 분업이 자본주의 경제를 연상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쓴 대목은 오히려 국제사회주의 전통의 설명을 뒷받침한다.
4-3. 시기 구분의 문제
시기 구분도 문제다. 우리는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28년을 반혁명의 결정적 시점으로 본다. 내전과 외국 간섭 전쟁으로 노동계급이 파괴된 뒤 점차 자의식을 갖춘 새 지배계급이 1928년 제1차 5개년 계획과 함께 국가자본주의 지배계급으로 스스로를 공고히 했다. 11 경쟁적 축적의 요구가 소비와 생산 전체를 체계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해리스도 해외 혁명의 실패, 내전 속 러시아 노동계급의 파괴, 그리고 1920년대 말 공업화와 재무장의 시급성을 스탈린적 전환의 토대로 본다. 스탈린과 그 추종자들의 특수한 역사적 임무는 세계경제가 소련에 강제한 국가 생존의 명령을 공산당과 소비에트 국가 안으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12
돔과 전진은 1936년 헌법과 1937~1939년 대숙청을 반혁명의 완수로 본다. 이 차이는 사소하지 않다. 1928~1936년 사이의 소련, 곧 강제 집산화와 굴라크, 성과급과 스타하노프 운동이 전개된 시기를 여전히 노동자 국가로 봐야 하는가? 전진 문서도 이 시기를 이미 가치법칙이 노동자 국가의 목을 조르고 있음을 보여 준 시기이자, 전통적인 자본주의 경쟁 방식이 다시 등장한 시기로 묘사한다. 굴라크 인구가 1928년 3만 명에서 1930년 60만 명, 1930년대 중반 200만 명 가까이로 늘었다는 수치도 전진이 직접 인용한다. 그러면서도 반혁명의 완수는 대숙청까지 미룬다.
여기서는 반혁명의 기준이 생산관계의 전환보다 정치적 상부구조, 곧 헌법의 조문과 옛 혁명가들의 물리적 제거에 놓인다. 이는 4-1에서 지적한 기준의 불명확성과 연결된다. 착취와 비민주성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새로운 계급 지배로 굳어진 시점은 밝히지 않은 채, 법률적 선언과 숙청의 완료를 결정적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준에 따르면 경제적 토대와 실제 계급 권력이 이미 바뀐 뒤에도 여러 해 동안 ‘노동자 국가’가 존속했다는 모순된 결론에 이른다.
4-4. ‘비효율’로 설명되는 역사
전진은 중국의 대약진운동이 관료적 명령경제에 내재한 비효율성 때문에 처참하게 실패했다고 쓴다. 1978년의 전환을 두고도 관료적 명령경제가 본질적으로 비효율적이었으며 지배계급이 권력 유지를 위해 결국 시장자본주의로 돌아섰다고 설명한다. 북한에 대해서도 관료적 명령경제가 합리적으로 경제를 조직해 내지 못하면서 한계를 드러냈다고 쓴다.
비효율이라는 말만으로는 무엇을 위해 자원을 동원했고 어떤 한계에 부딪혔는지 설명할 수 없다. 1949~1957년 공업 생산은 해마다 약 20퍼센트씩 늘었다. 13 호어도 1950년대 중국 경제가 이전 어느 때보다 빠르게 성장했다고 보며, 마오의 말을 인용해 국민소득 대비 축적률이 1957년 27퍼센트, 1958년 36퍼센트, 1959년 42퍼센트였다고 지적한다. 마오 시대는 해외 부채 없이 교육받은 건강한 노동력과 경제 자원을 집중할 수 있는 강력한 자율적 국가를 남겼으며, 이것이 이후 급성장의 토대가 됐다. 14 필자도 마오 시대 축적이 막대한 인간적 희생을 치렀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 현대적 제조업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기대수명은 1949년 41세에서 1978년 65세로, 영아 사망률은 1000명당 195명에서 52명으로 개선됐다. 15 이런 성장 실적만으로 비효율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질적 비효율’이라는 말만으로는 이 체제가 발휘한 축적 능력과 그 뒤의 한계를 함께 설명할 수 없다.
물론 마오 시대 경제에는 낭비와 과장 보고, 자원 오배분이 만연했다. 16 이런 비효율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원인을 알려면 소비를 억누르고 중공업과 군사력에 자원을 몰아넣은 축적 방식과 그 불균형을 분석해야 한다. 1978년 1인당 곡물 생산과 열량 섭취가 1955년과 비슷했고 식용유 원료 생산은 3분의 1이 줄었다는 사실은 생산 확대가 곧바로 생활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며, 인간의 필요가 축적에 종속됐음을 보여 준다. 17
비효율을 최종 원인으로 삼는 설명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서사, 곧 시장이 계획보다 효율적이어서 개혁개방이 필요했다는 주장에 틈을 준다. 관료적 명령경제와 노동자가 통제하는 민주적 계획경제가 어떻게 다른지 밝히지 않은 채, 역사를 비효율적인 계획에서 효율적인 시장으로의 전환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민주적 계획경제라는 전진 자신의 대안이 무엇에 근거하는지도 불분명해진다.
우리가 제시하는 설명은 다르다. 문제는 효율 일반이 아니라 국민국가 안에서 자급자족을 추구한 축적 방식이 생산과 교역의 국제화 앞에서 부딪힌 한계였다. 이미 1978년에 해리스는 가장 선진적인 생산력이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고 있으며 생산력의 미래가 국제경제에 있는 한 국가 단위의 자급경제를 강화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라고 썼다. 18 1969년 중·소 국경 충돌은 국방 관련 중공업 현대화의 필요를 부각했고, 1970년대 초 세계경제 위기는 상대적으로 자급적이던 중국 경제조차 세계 정치경제의 경쟁 압력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19 톈안먼 학살 뒤 중국 지배계급 대부분은 세계경제와 대체로 차단된 자립경제라는 마오주의 모델이 수명을 다했다고 이해했다. 20
개혁이 ‘시장화’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개방’, 곧 세계시장으로의 통합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진 자신도 개혁의 기원을 중·소 분쟁과 대미 화해라는 지정학에서 찾는다. 그런데 결론에서는 다시 비효율이라는 범주로 돌아간다. 하나의 문서 안에 두 설명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은 채 병존하는 셈이다. 지정학적 압력과 세계적 축적 경쟁을 체제 분석의 중심에 놓았다면, 비효율을 독립적인 최종 원인으로 삼지 않고도 개혁개방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5. 둘째 문제: 1949년 혁명의 주체와 ‘이식론’
전진은 1949년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는 올바른 판단에서 멈추고, 누가 왜 국가자본주의를 건설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스탈린주의의 이식’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5-1. 누가 혁명을 했고, 왜 국가자본주의였는가
전진은 1949년 혁명이 국민당 군대와 결탁한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냈다는 점에서 민족해방 혁명이었으나 어떤 의미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고 옳게 판단한다. 중국 노동계급이 독자적 정치 주체로 조직되지 않았고 노동자 평의회도 등장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홍군은 주로 농민으로 구성됐고 일부 농민과 지식인이 장교를 맡았다고 지적한다. 여기까지는 우리의 설명과 합치한다. 1949년 혁명은 노동계급 투쟁이 보조 요소에 불과한 ‘군사적·영토적 전투’의 정점이었으며, 노동계급이 독자적으로 권력에 도전하지 못했기에 그 혁명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인민해방군은 도시로 진격하며 노동자는 일터에 머물라고, 국민당 관리는 자리를 지키라고 포고했고, 옛 국가기구를 해체하지 않고 대다수 국민당 관리를 흡수했다. 21 상하이 상공회의소의 환영이 너무 열렬해서 미국 총영사가 미군이 해방했어도 이보다 더 기뻐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썼을 정도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누가 이 혁명을 주도했고, 왜 그 결과가 국가자본주의였는지 물어야 한다. 전진 문서는 이 질문에 충분히 답하지 않는다. 전진은 ‘중국에 이식된 스탈린주의’, ‘소련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복사판’이라는 말로 이 공백을 메운다.
우리의 답은 더 구체적이다. 이정구는 1949년 혁명을 일본과 서양 제국주의를 축출하고 독자적 국민국가를 세우려 한 좌파 지식인들이 지주제 폐지를 원한 농민을 지도해 일으킨 중간계급의 민족해방 혁명으로 규정한다. 또한 이 혁명에서 노동계급은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 응원자였다고 쓴다. 22 그리고 클리프가 이를 ‘빗나간(굴절된) 연속혁명’으로 설명했다고 소개한다. 노동계급이 취약하거나 무관심한 조건에서 도시 중간계급 지식인이 농민을 이끌고 반제국주의와 토지개혁 같은 연속혁명의 과제를 수행한다. 그 결과 세계 자본주의의 압력을 견디려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해 부국강병을 꾀하는 국가자본주의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23
필자는 중국공산당을 농민 정당으로 규정하는 것도 부정확하다고 본다. 그보다는 민족 독립, 지주제 폐지, 급속한 산업화라는 부르주아적·민주주의적 혁명의 과업을 수행하려는 스탈린주의적 지식인들이 지도하고 농민군을 대중적 기반으로 삼은 정당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권은 농민의 이해관계를 직접 표현하기보다 농민을 동원해 민족국가 건설과 산업화를 달성한 관료 엘리트 정권이었다. 버드도 중국공산당이 결코 진정한 농민 정당이 아니라고 짚는다. 대부분 농민 출신이지만 이미 농업에서 멀어진 전문가와 관료의 정당이었으며, 명확한 농민 강령도 없었다고 쓴다. 24
해리스는 이 사회 세력을 가장 깊이 해부한다. 20세기에 자본의 집중과 국가의 팽창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새로운 사회계층을 대량으로 만들어 냈다. 관리자, 교사, 의료인, 기술자, 연구자, 사무직원 같은 층이다. 이것은 후진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선진 공업국을 포함한 20세기 자본주의 전반의 경향이지만, 후진국에서는 특수한 정치적 결과를 낳는다. 이 층 가운데 상당수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채 대규모 조직에서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노동계급에 속한다. 그러나 일부는 생산수단을 통제할 권한에 더 가까이 있으므로, 이들 모두를 동일한 계급적 지위에 있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노동계급이 뚜렷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이 층의 정치적 지향은 양가적이 된다. 사적 소유가 아닌 생산수단의 통제, 국가 역할의 확대, 그 안에서 자신의 일자리와 승진 기회를 확보하는 쪽으로 끌린다. 반자본주의적일 수는 있지만, 독자적 정치 세력으로 나설 때는 기존 국가의 경계를 자신의 활동 범위로 받아들인다. 그 지향은 민족주의적이다. 25
해리스에 따르면, 스탈린주의는 완성된 형태로는 재산 없는 도시 중간계급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부분의 가장 일관된 표현이었다. 이 사회계층이 대중적 지지를 얻으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노동계급이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 것(코민테른의 변질이 이를 보장했다), 해외 대자본에 지배되는 사적 자본가들이 대안적 민족주의의 구심이 되지 못할 것, 소토지 소유자 같은 구(舊)프티부르주아지가 너무 약하거나 분열돼 있을 것이라는 조건이다. 26 1927년 이후 중국은 이 세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
해리스는 인도와 이집트를 비교한다. 인도에서는 국민회의가 간디로 상징되는 구프티부르주아지, 자본가, 지주, 그리고 관료적 중간계급을 느슨하게 묶었고, 네루는 말로는 관료층 쪽에 기울면서 실제 행동에서는 간디의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집트에서는 관료, 특히 군부가 국가를 해방하려는 동력을 내부에서 만들어 냈지만 옛 장교단과 기존 계급에 묶여 있었다. 두 나라 모두 사회 전체에 뻗어 있고 축적의 명령에 복종하는 권력 도구가 없었다. 27 중국공산당은 달랐다. 독자적 군대와 영토를 가진 채 옛 지주·자본가계급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적 권력이었고, 그래서 집권 뒤 옛 지주와 사적 자본가들을 지배계급의 자리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해리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 국가는 계급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보나파르트적 파당이 아니라 지주와 자본가보다 훨씬 큰 독자적 권력을 가졌으며, 국민적 축적이라는 독자적 목적을 위해 그들을 제거했다. 28
이 분석이 왜 중요한가? 이식론은 형태의 전파를 설명할 뿐, 사회적 역학을 설명하지 못한다. 중국공산당이 소련 모델을 채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채택한 주체가 누구였고 왜 그 모델이 그들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는지를 밝히지 않으면 반쪽짜리 설명이 된다. 국가 주도 발전 모델이 나세르의 이집트, 빈 벨라의 알제리,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 은크루마의 가나에서 서로 다른 정도로 채택되고 제약에 부딪힌 이유 29 도, 중국공산당이 그 모델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던 이유도 이식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모델에 매혹된 것은 새로운 독자적 지배계급을 형성하려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에게 사회주의는 집단적 자력 해방(자기해방)의 사회가 아니라 ‘경제 발전 모델’이 됐다. 30
5-2. 연속혁명론의 난제 외면
전진은 트로츠키주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자처한다. 그렇다면 1949년 혁명이 연속혁명 이론에 제기한 난제를 정면으로 다뤄야 한다. 트로츠키는 식민지·반식민지에서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지주제를 폐지하는 과제는 노동계급 권력만이 달성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1949년 중국에서는 노동계급이 아닌 세력이 이 과제를 상당 부분 완수했다.
이정구의 책 제14장은 이 사실이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얼마나 혼란에 빠뜨렸는지 보여 준다. 그들은 내전에서 공산당을 지지했지만, 농민에 기반한 공산당이 승리할 가능성은 낮고 승리하더라도 도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와 대결해야 할 것이라고 봤다. 실제로 공산당이 승리하자 혁명적 공산당 다수파는 현실을 이론에 꿰어 맞춰 신중국을 노동자 국가로 규정하기에 이르렀고, 소수파 지도자 왕판시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소수파의 다른 지도자 정차오린만이 중국공산당이 “관료 계급”이자 “국가 자산계급”을 대표하고 1949년 신중국은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1952년 체포돼 27년을 노동교화소에서 보냈고, 동지이자 아내인 우징루도 평생 박해받다가 정차오린이 석방된 지 석 달 만에 사망했다. 31 이정구는 결론에서 소련 사회와 1949년 신중국의 성격에 대한 정치적 혼란이 분열과 사기 저하, 마오 세력으로의 투항을 낳았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러한 약점은 국가자본주의론과 빗나간(굴절된) 연속혁명 이론이 왜 혁명적 실천의 등대가 되는지를 보여 준다고 평가한다. 32
필자는 더 거슬러 올라가 1932년 트로츠키의 예측에서 무엇이 적중하고 무엇이 빗나갔는지를 따진다. 트로츠키는 〈중국의 농민전쟁과 프롤레타리아〉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직접적 지도가 없는 농민전쟁은 아무리 완전한 승리를 거둬도 권력을 새로운 부르주아 집단, 이런저런 ‘좌파’ 국민당이나 ‘제3당’에 넘겨줄 뿐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는 농민군을 지휘한 공산당 자신이 권력을 쥐었고, 새 지배 집단은 옛 지주 질서를 복원하기는커녕 철저히 해체하고 국유화를 지렛대로 삼아 국가 주도 축적을 실행했다. 필자가 보기에 트로츠키가 예견하지 못한 것은 비노동자 권력이 취할 구체적 형태, 곧 국유화된 자본주의였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스스로 권력을 잡지 못한 채 농민전쟁 지휘부가 국가를 접수하면 결과는 어떤 이름을 달든 노동자 권력일 수 없다는 트로츠키 명제의 핵심은 확인됐다. 승리한 군대의 참모부가 노동자의 손바닥만 한 집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저택에 들어서고 지휘부가 스스로를 ‘교양 있는’ 계층으로 느끼게 된다는 트로츠키의 사회학적 관찰은 새 지배층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 변화는 일부 지휘관 개인의 타락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체제로 굳어졌다.
전진의 중국 서술에는 이 난제를 둘러싼 격론이 없다. ‘연속혁명’이라는 말은 북한 부분에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혁명, 나아가 민족해방혁명이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으로 전진하는 연속혁명의 전망이 시작도 못 한 채 닫혔다는 문장에 한 번 나올 뿐이다. 1932년 트로츠키의 농민전쟁 경고도, 중국 트로츠키주의의 이후 역사도, 정차오린의 국가자본주의 분석도, 1952년 트로츠키주의자 대탄압도 언급되지 않는다. 트로츠키주의 조직이 국가자본주의론의 가장 이른 중국인 이론가를 잊은 채 국가자본주의를 논하는 셈이다. 이는 역사 서술의 누락일 뿐 아니라, 전진이 연속혁명론을 어떻게 이해하며 그 이론의 전망에서 벗어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밝힐 기회를 놓친 것이기도 하다.
5-3. 마오의 자율성과 ‘냉소주의’라는 설명
이식론은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그 틀만으로는 마오가 스탈린주의의 기본 전제를 공유하면서도 모스크바와 충돌하고 독자적 전략을 추구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필자는 이 관계의 긴장을 자세히 추적했다. 천두슈 이후 모스크바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바탕으로 부상한 지도자들과 달리, 마오는 징강산과 장시의 농민 게릴라군이라는 실질적 권력으로 부상했다. 1935년 쭌이회의에서는 군사적 실패의 책임을 진 친방셴 등 친소 지도부가 후퇴하고 마오의 지위가 강화됐다. 모스크바는 그 변화를 사후에 받아들였다. 스탈린은 그런 중국공산당을 ‘마가린 공산주의자’, 겉은 붉고 속은 흰 ‘붉은 무 공산주의자’라고 조롱하며 장제스 정부를 중국의 유일 합법 정부로 여기기도 했다. 시안사변 때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장제스를 제거하고 서북항일정부를 세우려 했지만 스탈린은 그의 즉각 석방을 요구했고, 마오는 이에 격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도 스탈린은 공산당이 장제스를 타도하기보다 국민당 정부에 참여하기를 바랐다.
마오는 제2차 국공합작에서 제1차 때와 달리 군대와 당의 조직적 독자성을 지켰다. 국민당에 타협적이던 왕밍은 스탈린의 입장을 대변했고, 마오는 그를 ‘우경 기회주의’로 비판했다. 필자의 결론은 마오가 스탈린주의의 기본 틀을 공유하면서도 중국 내 권력을 확대하는 데 필요한 독자적 전략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마오의 통일전선론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관점에서는 친부르주아적이었으나 스탈린의 국민당 의존 정책보다는 독립적이었다. 당과 군대의 조직적 독자성을 지키는 것과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성을 지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중국 역사가 선즈화는 중·소 협상에서 소련이 잃게 된 뤼순과 철도 등의 전략적 이권을 보전하려는 계산이 스탈린의 한국전쟁 승인에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해석한다. 33 중·소 관계 악화와 1960년 소련 기술고문 철수는 두 국가 사이의 제국주의적 경쟁이 낳은 결과였다. 34 중국공산당의 변모도 이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중국공산당이 1925~1927년 실제 노동계급 운동을 이끌던 시기에 소련 관료의 이해관계와 중국 노동계급의 이해관계 사이의 모순이 당을 파괴했고, 그 뒤 당은 자신이 이끈다고 주장하는 계급으로부터 고립된 채 서서히 재건됐다. 35
이 사실들은 중국 국가자본주의가 소련 모델을 단순히 옮겨 놓은 결과만은 아니며, 중국공산당 자신의 축적 기획이었음을 보여 준다. 중·소 분쟁 자체가 두 국가자본주의 사이의 경쟁이었다. 전진도 이 분쟁을 자국 이익을 위해 각자 분투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대립으로 읽는 점에서는 옳다. 그러나 그렇다면 중국이 소련의 제도를 본뜬 사실을 넘어, 두 국가가 어떻게 독립적인 축적 단위로 행동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복사판’이라는 비유만으로는 바로 이 핵심을 밝힐 수 없다.
또, 전진은 마오쩌둥주의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냉소주의에서 출발한다고 쓴다. 이것만으로는 심리적 묘사에 머무는 반쪽짜리 설명이다. 필자는 이 태도를 낳은 물질적 조건을 설명했다. 1926년 말 당원의 약 66퍼센트가 노동자였지만 1928년 10퍼센트, 1929년 3퍼센트, 1930년 말에는 거의 0퍼센트로 떨어졌다. 1956년 당원 가운데 농민은 약 69퍼센트, 노동자는 14퍼센트였고, 1957년에도 노동자 당원 수는 지식인 당원 수보다 적었다. 버드가 제시한 수치도 이런 급격한 하락을 보여 준다. 상하이 학살 전 3분의 2이던 노동자 당원 비율이 1930년 9월 2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졌다. 36 필자는 마오주의의 부상이 중국 농촌의 필연적 산물이 아니라 혁명의 패배와 스탈린주의 정책의 실패라는 조건 위에서 마오 분파가 내린 주체적 선택이었으며, 역설적으로 스탈린의 실패가 마오의 성공을 이끌었다고 결론지었다. 냉소주의라는 묘사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냉소를 낳은 계급 기반의 변화를 보여 주지 않으면 도덕적 비난에 머문다.
5-4. 토지개혁: 농민의 압력과 공산당의 통제
토지개혁 서술에서도 중요한 문제가 드러난다. 전진은 〈레프트 보이스〉의 지지자 소우 미의 글을 인용해 1947년 국민당과 결별한 뒤 공산당이 전국적 토지개혁을 요구하자 농민 대중 사이에 거대한 운동이 촉발됐다고 서술한다. 농민들이 토지를 몰수·재분배하고 지주를 살해하며 마오에게 토지 몰수 및 재분배 강령을 시행하도록 강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민의 압력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공산당의 토지정책을 설명할 수는 없다. 해리스가 추적한 과정에서는 농민의 독자적 행동과 이를 통제하려는 당의 갈등이 핵심으로 드러난다. 항일전쟁기 공산당은 지대와 이자 인하를 ‘토지 문제의 해결’이라 불렀다. 1946년 5월에도 지주의 ‘초과’ 토지를 사들여 반값에 되파는 안을 내놓았고, 1935년부터 공산당이 장악한 산간닝 변구에서조차 토지가 재분배되지 않았다. 1947년 10월 토지법은 항일전쟁기의 온건한 토지정책을 뒤집고 지주 재산의 몰수를 규정한 혁명적 조치였지만, 몰수 권한은 간부에게 남겨 두고 빈농과 고농에게는 분배만 맡겼다.
허베이에서 당의 조처가 지체되는 사이 빈농들이 직접행동에 나섰다. 농민 협회가 우후죽순 생겨나 지주와 부농, 일부 중농까지 공격했고, 이를 제지하려던 간부들도 타도됐다. 농민들은 농촌의 완전한 평등과 당 자체를 감독할 권리를 요구했고, 도시로 행진해 농촌 부자들의 도시 재산까지 몰수했다.
당 지도부는 급격히 우선회했다. 법 공포 석 달 만에 당시 지도부의 일원인 런비스(任弼時)가 농민이 제대로 교육될 때까지 재분배를 중단하라고 요구했고, 이어서 마오가 직접 “좌경적 일탈”을 비판했다. 마오는 과거 해방구의 새 부농을 중농으로 취급하고 옛 지주와 부농을 재분류하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도시로 도망간 지주를 추적하지 말고, 빈농 협회에 부농과 지주, ‘계몽된 향신’도 받아들이도록 했다. 또한 “대중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하려는 잘못된 태도”와 빈농·고농 노선의 일면적 선전을 비판하면서 ‘민족 부르주아지’와 지식인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질책했다. 1948년 봄 마오는 토지개혁이 급하지 않으며 1~3년 미룰 수 있다고 했고, 사업을 맡을 간부의 수와 역량이 충분해야 하며 대중의 자발적 활동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해리스의 요지는 농민의 독자적 토지혁명이 국민당을 무너뜨리는 동력으로 충분히 발전하도록 허용되지 않았고, 토지개혁이 당의 군사적 승리와 통제에 종속됐다는 것이다. 인민해방군이 ‘비적’으로 소탕한 수많은 무리 가운데 일부는 1947년에 시작된 토지혁명을 이어 가려던 고농이었을지도 모른다. 37
전진과 우리의 서술에서 중요한 차이는 이 대목에 있다. 중국공산당의 대리주의는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의 자발적 행동을 억누르는 데도 작용했다. 해리스는 공산당이 피착취 대중의 독립성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까 두려워 그 운동을 끝까지 발전시키기를 거부했고, 이것이 집권까지 ‘지구전’이 필요했던 한 이유라고 설명한다. 38 농민의 압력이 공산당을 움직인 것과 공산당이 그 압력을 통제한 것은 양립할 수 있다. 따라서 밝혀야 할 것은 그 압력이 언제 당의 정책을 바꿨고, 당이 어디서 그 흐름을 가로막았는지다. 〈레프트 보이스〉의 인용문만으로 이를 대신하면, 대중의 독립적 행동을 공산당이 통제하고 억제했다는 전진 자신의 기본 논지가 흐려진다.
5-5. 1925~1927년 서술: ‘스탈린이 다 했다’의 한계
1927년 패배의 정치적 책임을 코민테른 지도부에 묻는 전진의 판단은 옳다. 그러나 서술의 연대기와 책임 배분은 단순화돼 있다. 전진은 인용문을 통해 중국공산당이 창당 이듬해 국민당과 반제국주의 연합전선을 건설하면서도 계급 독립성을 유지했으나, 불과 1년 뒤 코민테른에서 세력을 키운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지시로 국민당 대열 속으로 용해됐다고 쓴다. 1923년 초 스탈린과 부하린이 코민테른을 소련 대외정책의 도구로 빠르게 바꾸고 있었고 중국공산당 해산을 압박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으며, 트로츠키만이 반대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이정구의 서술을 보면 국공합작의 기원은 더 복잡하다. 이를 처음 추진한 인물은 1921년 중국에 온 마링(네덜란드인으로 본명은 헹크 스네블리트)이었다. 그는 그해 12월 쑨원을 만나 국공합작을 논의했다. 국민당이 노동계급과 연계를 맺고 선원 파업을 지도한다는 이유로 이를 ‘노동자 정당’으로 보고, 공산당원이 국민당 안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코민테른 식민지문제위원회에 제안했다. 1922년 8월 항저우 시후(서호)회의에서 그는 코민테른의 권위를 내세워 천두슈 등의 강한 반대를 누르고 동의를 얻어 냈다. 1923년 1월 이오페-쑨원 공동선언으로 합작 방침은 더욱 구체화됐다. 39 1923년 초 코민테른 의장은 지노비예프였고, 레닌은 병세가 악화해 정치 활동을 크게 제약받고 있었다. 스탈린은 삼두체제의 일원이었지만 아직 코민테른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더 불편한 사실도 있다. 마링과 이오페는 나중에 좌익반대파 성원이 됐다. 라데크는 1922년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서 천두슈의 국민당 입당 반대를 강하게 비판했고 1927년 3월까지 이 입장을 고수했다. 지노비예프는 1926년까지 코민테른 의장으로서 잘못된 중국 정책을 추진했다. 트로츠키도 1926년 통합반대파를 꾸리는 과정에서 동맹 세력과 타협했고, 중국공산당의 국민당 탈퇴 요구를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데 제약을 받았다. 1926년 9월 라데크에게 보낸 편지는 중국 혁명에 관한 이견을 본격적으로 다룬 문서였다. 40 트로츠키가 1923년 정치국에서 홀로 반대했다는 주장은 나중에 트로츠키 자신이 샥트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것이다. 트로츠키는 천두슈가 처음부터 입당에 반대했고 결정적 시기마다 탈퇴를 호소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스탈린과 부하린이 이를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다. 41
이 사실들은 스탈린주의의 책임을 덜어 주지 않는다. 5·30운동 뒤 홍콩·광저우 파업에서 소비에트에 견줘지기도 한 노동자 기구가 등장하고 이중권력의 가능성까지 제기된 뒤에도, 1926년 3월 장제스가 쿠데타를 시도한 중산함 사건 뒤에도, 1927년 3월 상하이 봉기 뒤에도 국민당 추종을 강요한 것은 스탈린과 부하린이었다. 중산함 사건 직전에 코민테른은 국민당을 준회원으로, 장제스를 명예 회원으로 삼았다. 42 그러나 스탈린주의가 공고해지기 전부터 잘못된 노선이 존재했고 훗날 반대파에 가담한 일부 인물도 이를 공유했다는 사실은 코민테른의 퇴보가 한 사람의 악의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일국적 안보의 압력이 조직 전체를 어떻게 잠식했는지 함께 살펴야 한다. 이는 전진이 소련 부분에서 강조한 관료적 퇴보의 논리와 맞는다. 하지만 ‘스탈린이 다 했다’는 서술은 오히려 그 논리를 약화시킨다.
또 전진의 서술에는 천두슈가 1925년 10월부터 여러 차례 국민당 탈퇴를 요구했으나 코민테른의 권위에 눌려 그 방침을 집행했고, 혁명 패배 뒤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다는 사실이 빠져 있다. 1927년 이후 트로츠키가 제시한 전략도 빠져 있다. 필자는 이를 비교적 자세히 재구성했다. 트로츠키는 1928년 〈6차 대회 이후의 중국 문제〉에서 혁명 퇴조기에 공산당이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로 구성되는 전권 제헌의회(국민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이를 8시간 노동, 토지 몰수, 완전한 민족 독립과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공산당이 지하에서 빠져나와 대중의 신뢰를 얻고 소비에트 건설과 직접적 권력투쟁의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32년 편지에서는 무장 농민 부대와 프롤레타리아 전위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농민전쟁의 혁명적·민주적 의의를 인정하면서 농민 조직과 군사동맹을 맺되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독립성과 지도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 대안을 다루지 않으면 1927년 이후 마오주의 외에 어떤 길이 제시됐는지 알 수 없다. 그 공백은 마오주의가 유일한 현실적 선택지였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6. 셋째 문제: 마오 시대 서술
전진은 마오 시대의 노동체제와 문화혁명을 비교적 충실하게 서술하지만, 대약진의 원인을 설명하고 마오주의 이론을 비판하는 데서는 약점을 드러낸다.
6-1. 1950년대 노동체제: 보강할 증거들
1950년대 노동체제에 관해 전진은 루쿠스의 아래로부터의 역사 서술에 기대어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비교적 충실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그 현실을 묘사하는 것과 그 체제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국가자본주의론의 연구는 여기에 사실을 보탤 뿐 아니라, 전진이 묘사한 노동 통제와 불평등을 경쟁적 축적의 구조 속에서 설명한다. 이런 분석을 보태야 중국공산당 집권 초기 노동체제가 작동한 원리를 규명할 수 있다.
1954년 헌법에는 파업권이 명시돼 있지 않았다. 또, 마오가 혁명 초기에 하루 10시간 노동의 필요성을 말했지만 노동시간은 곧 12시간, 심지어 18시간으로 늘었고, 숙련공 임금은 미숙련 노동자의 수준으로 깎였으며 성과급제 또한 도입됐다. 43 이정구는 1949년 이후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기는커녕 생산을 장려하고 관리하는 구실을 맡아 경영자를 양성하는 훈련장이 됐다고 기록한다. 당시 노동자들은 공산당이 말하는 ‘민주주의’가 ‘민(民)에 대한 주인(主人)’을 의미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44 필자도 공장에 스탈린식 ‘1인 경영’이 도입돼 관리자와 당 기구가 생산을 전적으로 지휘했으며, 마오가 관리자들에게 임금 격차와 작업 규율을 이용해 노동자의 독립적 행동을 억제하라고 촉구했다고 썼다.
해리스는 창당 초기 강령과 집권 후 실천의 대조를 보여 준다. 중국공산당은 1922년 2차 당대회에서 임시·계약 노동을 가장 악랄한 억압 형태의 하나로 규탄하고 폐지를 약속했다. 노동자를 상시 노동자와 임시 노동자로 분할하면 자본가를 향해야 할 적대감이 노동자 서로에게 향하게 된다는 정치적 위험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 집권 뒤 임시 노동자는 1957년 240만 명, 대약진 시기에는 비농업 노동자의 4분의 1이 넘는 1200만 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중앙 계획의 노동력 추산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생산 목표의 기한이 바뀔 때마다 관리자와 간부가 활용하는 완충 노동력이었으며, 주택·의료·교육·연금 같은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다. 때로는 국가에 고용 사실을 숨기려고 이들의 임금을 ‘잡비’에서 지급했다. 45 창당 초기 강령이 규탄한 제도가 ‘사회주의 건설’ 속에서 확대됐다는 사실은 전진이 강조하는 ‘가짜 사회주의’를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다. 하지만 전진은 이를 다루지 않는다.
농민에 관한 서술도 보강할 필요가 있다. 국가는 1953년 11월 곡물 수매를 독점했다. 곡물 가격은 억제하고 공산품 가격은 올려 협상가격차(공산품에 비해 농산물 가격이 낮아지면서 벌어지는 격차)를 확대함으로써 농촌의 가치를 공업 부문으로 이전했다. 농민에게 국가 조세는 옛 지주에게 내던 지대 못지않은 부담이었다. 1955년 4~10월 상하이에서만 50만 명이 넘는 이주민이 농촌으로 강제 송환됐다. 46 필자도 마오 시대의 가격 체계가 농산물 가격을 억제하고 부등가교환을 통해 농업 잉여를 도시의 산업화에 동원하는 수단이었다고 썼다. 이정구는 인민공사 체제에서 농촌의 잉여 농산물을 수탈해 이득을 본 쪽은 노동자가 아니라 국가 관료였다고 지적한다. 47
이런 분석은 전진의 ‘관료적 명령경제’ 서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료적 명령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어떤 축적을 강요했는지를 묻게 한다.
6-2. 대약진: 비효율인가, 아니면 축적 압력과 주의주의인가
대약진운동에 대한 전진의 서술은 매우 약하다. 전진은 그 실패를 관료적 명령경제에 내재한 비효율 탓으로 돌리고, 불리한 기상 조건, 잘못된 관리, 과장된 보고를 부차적 요인으로 든다. 그러나 대약진은 단순히 비효율이 빚어낸 결과가 아니라, 급속한 축적을 목표로 삼은 정책적 선택이었다.
1957년 말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는 중국 지도부에 두 나라 사이의 발전 격차를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대약진은 ‘15년 안에 영국 추월’을 내걸고 공업 생산과 축적을 가속하려 한 시도였다. 후진성의 한계를 돌파하고, 생활수준 개선을 바라는 대중의 절박한 요구를 억누르며, 공업 전 부문의 성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려 한 것이다. 다른 공산당 지도자들은 소비재 공급을 늘려 대중의 요구에 응하자고 했지만 마오의 대약진은 정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1958년에는 전력 생산을 전년보다 18퍼센트 늘리는 목표가 제시됐고, 철강 생산 목표는 그해 도중 전년의 두 배로 상향됐다. 48
필자는 대약진을 단순한 정책 실수로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국제적 고립과 군사적 경쟁 속에서 중국 관료는 조속한 산업화를 체제 생존의 문제로 인식했다. 기존 방식으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압박이 커지자, 마오의 주의주의는 생산력의 한계를 대중의 열의와 초인적 희생으로 돌파하려는 형태로 나타났다. 인민공사는 국가적 축적 충동을 농촌 전체에 강제한 결과물이었고, 대약진은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도약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후진국에서 국가가 주도한 급속한 축적 시도였다. 파국의 원인은 주의주의뿐 아니라 이를 견제할 민주주의의 부재에서도 찾아야 한다. 불가능한 목표를 부과받은 관료들은 처벌을 피하려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보고했다. 49
이렇게 보면 대약진의 실패를 명령경제의 ‘비효율’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세계 자본주의의 경쟁적 축적 압력이 주의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해, 물질적 조건을 무시한 채 소비를 극한까지 억누르고 노동을 동원하려 했기 때문에 파국을 맞은 것이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원인을 비효율에만 두면 문제를 시장과 계획 가운데 어느 조정 기제가 더 효율적인가 하는 것으로 축소하기 쉽다. 그러나 축적 압력과 관료적 주의주의를 문제 삼으면, 해법도 노동자 민주주의를 통해 축적을 인간의 필요에 종속시키는 데서 찾아야 한다.
6-3. 마오주의 이론 비판의 부재
마오주의의 관념론을 해부하는 일도 필요하다. 마오는 인간이 객관적 현실의 노예가 아니라고 봤다. 의식이 사물 발전의 객관적 법칙과 일치하기만 하면 대중의 주관적 능동성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필요한 조건을 창조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주관이 객관을 창조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의식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조건과 한계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객관적 법칙을 인식해 행동하는 것과 물질적 제약을 의지만으로 넘어서는 것은 다르다. 생산력의 발전 수준과 구체적 사회관계가 행동의 가능성을 어떻게 제약하는지 밝히지 않으면, 남는 것은 물질적 조건과 무관하게 주관이 객관을 ‘창조’할 수 있다는 추상적 원칙뿐이다. 50
마오는 이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먼저 여론을 조성해 권력을 잡은 뒤 소유 문제를 해결하고, 그 뒤에 생산력을 크게 발전시키는 것이 일반적 법칙이라고 했다. 나라가 후진적일수록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더 어렵다는 레닌의 주장에 대해서는 옳지 않다고 반박했다. 경제가 후진적일수록 이행은 오히려 쉬우며, 가난할수록 사람들이 더 혁명을 원한다는 주장이었다. 유물론자 레닌에게 물질적 후진성은 자유 실현을 가로막는 가장 위협적인 장애물이었지만, 마오에게는 빈곤과 후진성이 오히려 혁명 의지를 키우고 의식 개조를 쉽게 하는 조건으로 뒤집혔다. 51 이 관념론의 뿌리는 작은 유격대의 생존 경험, 곧 사기와 의지가 생존을 좌우하던 군사적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인민은 공산주의라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물로 여겨지고, ‘인민의 군대 없이는 인민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엘리트주의가 여기서 나왔다. 52
마오주의에서는 이론과 실천이 서로를 검증하는 관계가 끊어졌다. 레닌의 《제국주의론》과 《국가와 혁명》에서는 마르크스의 《자본》에 기초한 분석이 10월 혁명 전후의 구체적 전술로 이어지는 맥락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마오의 철학적 저작은 당의 행동을 분석하거나 전술적 대응을 이끄는 지침이 되기보다, 이미 정해진 노선을 사후적으로 합리화하는 구실을 했다. 53 노동계급의 자기 활동에 기반하지 않은 당에는 자신의 분석을 노동자들의 경험에 비춰 검증하고 수정하도록 강제하는 토대가 약하다. 그 대신 실패를 분석의 결함이 아니라 사기 저하나 이데올로기적 일탈 탓으로 돌린다. 54
필자는 앞서 쓴 글의 부록에서 《실천론》과 《모순론》을 분석했다. 《실천론》에서 ‘실천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명제는 ‘예상한 결과의 달성’을 곧 진리의 입증으로 삼으면서 실용주의적 순환에 빠진다. 실천의 주체를 당과 지도부에 집중시키면, 이 명제가 결국 당 노선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로 뒤집힐 위험도 있다. 《모순론》은 차이와 모순의 구체적 관계를 충분히 구별하지 않은 채 모순 개념을 일반화하고, 내인과 외인의 관계를 경직된 위계로 다루며, 매 순간 단 하나의 주요 모순이 존재한다는 도식으로 변증법적 총체성을 위계적 목록으로 바꾼다. 이 도식은 항일전쟁기에 계급 모순을 부차화하고 민족 부르주아지와 협조하는 노선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사회주의 바로알기’를 표방한 교육 자료가 중국을 다루면서 마오쩌둥 사상의 논리 구조를 거의 다루지 않는 것은 큰 공백이다. 전진은 주요 모순론을 항일전쟁기 계급 협조의 근거로 짧게 언급할 뿐이다. 한국 좌파에서 마오주의의 영향력은 중국 체제에 대한 환상뿐 아니라 주요 모순론, 대중노선, 실천 중심 인식론, 단계혁명론 같은 이론적 도구를 통해서도 지속돼 왔다. 민족해방(NL) 계열의 ‘주요 모순’ 사고나 ‘대중노선’ 담론이 대표적이다. 체제 분석만으로는 이런 영향력에 대응할 수 없다. 중국이 자본주의임을 인정하면서도, 분단을 주요 모순으로 보고 계급 모순을 부차화하는 식으로 마오의 주요 모순론을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6-4. 문화혁명: 장점과 상하이 코뮌의 단순화
전진의 문화혁명 서술에는 앞서 말했듯 장점이 있다. 전진은 사청운동에서 문화혁명으로 이어지는 연속성, 마오가 당 기구 밖에서 대중을 동원해 류사오치·덩샤오핑 분파를 겨냥한 과정, 보황파와 조반파의 분화, 조반파 노동자의 요구, 성무련의 급진적 비판, 1968년 이후 군대의 진압을 서술한다. 우리의 서술도 같은 방향이다. 학생들은 마오를 숭배했지만 그들의 목표는 흔히 마오의 목표와 정반대였다. 많은 사람이 급속한 자본 축적과 그에 따른 가혹한 노동 규율에 도전하려고 마오를 지지했다. 55 버드는 1967년 여름 우한에서 고위 지휘관들이 반란을 일으켜 마오가 포함과 병력을 보내야 했으며, 질서를 완전히 회복하기까지 2년 동안 군대의 손에 수십만 명이 죽었다는 사실도 기록한다. 56
그런데 상하이 코뮌에 관한 전진의 서술은 수정이 필요하다. 전진은 1967년 초 조반파 운동 세력의 일부가 상하이의 통제권을 장악해 상하이 코뮌을 설립했고, 마오가 포섭과 탄압을 병행해 이를 무력화한 뒤 혁명위원회를 통해 당의 통제를 회복했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1967년 ‘1월 폭풍’과 그 뒤 상하이 코뮌(상하이 인민공사)을 이끈 것은 장춘차오와 왕훙원 등 훗날 4인방으로 묶인 마오 분파의 인물들이었다. 1966년 중반 운동을 파리 코뮌에 비유하던 마오는 상하이 코뮌이라는 발상 자체를 거부했다. 57 1947~1948년 농민전쟁을 가라앉힐 때 빈농협회에 중농·부농·지주를 받아들이게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인민해방군과 옛 당 간부, 새 조반파를 묶는 ‘삼결합’을 만들어 혁명위원회의 토대로 삼았다. 58
상하이 코뮌은 아래로부터의 조반파 운동과 위로부터의 문혁소조 개입이 교차한 지점에 있었다. 급진 조반파가 당에 맞서 세운 기구로 단순화할 수는 없다. 이 구별은 전진 자신의 핵심 논지, 곧 조반파가 사상적으로 마오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판단을 더 정확히 뒷받침한다. 코뮌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기구조차 마오 분파의 인물들이 이끌었다는 사실은, 급진적 언어와 형식만으로 마오 분파와의 정치적 단절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다. 1966년 말 파업 물결 앞에서 당 중앙은 파업의 원인을 1949년 이후 국가의 축적 추진이 낳은 객관적 조건에서 찾지 않고, ‘자본주의 길을 걷는 한 줌의 실권파’가 선동한 탓으로 돌렸다. 대중이 스스로 통치한다는 국가에서 대중을 ‘오도’하기는 터무니없이 쉬워 보였다. 59 당시 투쟁의 고양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대변할 독립적 노동조합이나 정당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다. 국가의 무력 독점에 맞설 대안 조직을 세우지 못하면, 관료적 국가가 결정적 우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60 전진은 조반파의 한계를 마오 숭배와 분파 싸움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를 노동자의 자기 활동에 뿌리내리고 마오 분파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한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의 부재와 연결해 분석해야 한다. 이는 톈안먼의 교훈과도 이어진다.
7. 넷째 문제: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이라는 규정의 한계
전진은 개혁개방기에도 지배계급이 유지됐다고 강조하지만, 그 시기를 설명할 때는 체제의 단절을 전제하는 서술에 기댄다. 이 긴장은 전진이 원용한 랄프 루쿠스의 서술 틀이 전진의 분석 안으로 스며든 결과일 것이다.
7-1. 지배계급의 연속성과 체제 단절의 서술
전진은 개혁개방 이후에도 마오 시대의 지배계급이 권력을 유지했다고 강조한다. 국가자본주의 지배계급은 시장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내부 권력 다툼을 벌였을지라도 본질적으로는 권력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옳은 판단이며, 필자가 반혁명론을 비판하며 제시한 논지와 같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였다면 노동계급 권력을 파괴하고 새로운 자본가계급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반혁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개혁을 주도하고 권력을 계속 장악한 것은 마오 시대의 당·국가 지배층과 그 후손이었다.
그런데 전진은 이 시기를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 ‘온전한 시장자본주의로 이행한 중국’이라고 명명한다. 이를 자본주의 내부의 축적 형태 변화로 한정한다면, 그런 명명 자체가 지배계급의 연속성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변화가 체제의 본질적 단절인 것처럼 서술된다는 데 있다. 시장의 비중이 커졌다는 사실이 체제의 성격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면, 전진 자신이 강조한 연속성의 이론적 근거가 흔들린다.
우리는 개혁개방기 중국을 여전히 국가자본주의의 틀로 이해한다. 이정구는 1978년 이후 꾸준히 시장 개방이 이뤄졌지만 국가자본주의라는 사회의 기본 성격은 유지됐다고 쓴다. 61 필자도 덩샤오핑 이후의 시장 지향 개혁을 체제의 단절이 아니라 축적 방식의 전환으로 규정했다. 국가적 경쟁과 자본 축적이라는 궁극적 목표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이를 더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의 중국을 국가자본주의가 주축을 이루고 신자유주의와 혼종된 시장 지향 국가자본주의 또는 시장 스탈린주의로 본다. 버드에 따르면, 1978년에는 거의 없던 사적 자본이 GDP의 6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국가는 여전히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한다. 국유기업은 경제 기반 시설의 현대화를 비롯한 영역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고, 금융도 상당 부분 국가 수중에 있으며, 지방정부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성장을 추진한다. 62 국유기업의 산출 비중은 약 30퍼센트이지만, 법적 소유 형태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핵심적 차이로 삼으면 국유기업 안팎의 실제 계급 착취 관계가 가려진다. 63
국유 은행이 투자 배분을 좌우하지만, 그 은행들은 시장에 무자비하게 노출된 노동자들의 높은 저축률에 의존하며,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는 거대한 그림자 금융이 이를 보완한다. 64 2023년의 부동산 위기와 가계 소비 비중을 높이려는 계획의 반복된 실패는 국가가 경제 전체를 일관되게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마오 이후의 변화는 수익성을 경제 활동의 핵심 척도로 강화했으며, 국가의 계획도 세계시장의 경쟁 압력에 종속시켰다. 65
향진기업의 성장도 중요하다. 1980년대 성장의 원동력이던 향진기업은 대부분 지방정부가 운영했다. 찰리 호어가 2004년에 정리한 바에 따르면, 1998년 말 향진기업은 1억 3000만 명, 곧 전국 노동인구의 5분의 1을 고용하고 GDP의 3분의 1과 수출의 절반을 담당했다. 당시 중국 정부의 학술 자문역이던 스티글리츠가 지적했듯, IMF는 향진기업이 공기업이므로 성공할 수 없다고 봤으나 그 이데올로기적 판단은 틀렸다.
지방정부들이 주도한 성장은 중국 경제의 역동성을 낳는 동시에 투자와 자산의 막대한 중복을 초래해 불안정성도 키웠다. 호어는 “부패가 없었다면 향진기업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한 장관의 말을 인용했다. 여기서 호어가 말하는 부패는 개인적 횡령을 넘어 주로 규칙을 집단적으로 조작하는 것이었다. 호어가 재인용한 밀턴 프리드먼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쇠퇴하는 계획경제에서 시장이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지배계급은 지방 관리들이 시장에 반응하고 위험을 무릅쓰며 자본가처럼 행동하기를 요구했다.
이런 과정을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이라는 말로만 설명하면 국가가 시장을 창출하고 관료가 자본가로 변신한 과정의 핵심이 흐려진다. 개방 초기의 산업 현대화에는 시장 개혁과 국가 주도 축적의 전통적 압력이 함께 작용했다. 1978년 한 개혁가는 어떤 기업도 어떤 노동자도 단 1분도 낭비해서는 안 되며, 시간 낭비로 인한 손실에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훗날 경제특구의 노동체제를 예고했다. 66
7-2. 명명의 이론적 대가
전진이 개혁개방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단순한 용어 문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국가자본주의와 시장자본주의를 서로 배타적인 체제로 대비하는 이분법은 체제의 본질적 성격을 시장의 비중에서 찾는 사고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국유화의 비중으로 사회주의를 판별하는 스탈린주의적 ‘국유 물신’의 거울상이다. 필자는 마오주의의 승리를 마르크스주의 원칙의 예외로 보는 것이 중국의 국유화를 사회주의로 오인하는 ‘국유 물신숭배’에서 비롯한다고 비판했다. 같은 논리로, 시장화를 체제의 본질적 전환으로 보는 것은 ‘시장 물신’이다. 자본주의의 본질이 소유 형태나 조정 기제가 아니라 임금노동과 경쟁적 축적이라면, 1978년 전후의 변화는 같은 체제 안에서 축적 형태가 달라진 것으로 서술돼야 한다. 서구 자본주의에서도 국가와 시장의 비중은 위기와 축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 왔다. 국가 통제를 완화해 시장의 역할을 늘렸다가 다시 국가 개입을 확대하는 변화가 거듭됐다. 67 이렇듯 국가와 시장의 비중은 자본주의 안에서도 끊임없이 요동한다.
둘째, 전진은 현대 중국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개념을 놓친다. 시진핑 체제의 권력 집중, 당-자본 관계, 반부패 운동, 국가 안보를 앞세운 기업 통제, 반도체 등 전략산업에 대한 국가 투자, 지방정부 융자 플랫폼을 매개로 한 부채 증대, 일대일로를 통한 국가 금융의 해외 진출을 이해하려면 국가와 자본의 결합을 분석해야 한다. 에이드리언 버드의 3장 ‘당-자본 관계’ 절과 6장은 바로 이 결합을 다룬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백만장자와 억만장자 기업인의 당이고, 시진핑은 그들을 “당과 함께 행진하기로 결심한 기업계 인사들”로 추켜세운다. 68 중국의 제국주의적 확장도 공·사 부문을 아우르는 집합적 지배계급의 권력과 이해관계를 제도화한 국가와 자본, 당과 국가의 긴밀한 연계에 의해 추동된다. 69 이 결합을 분석하지 않고 ‘온전한 시장자본주의’라고만 규정해서는 시진핑이 왜 알리바바를 손보고 ‘공동부유’와 ‘홍색 규제’를 내세우는지 70 , 왜 중국 제국주의가 국가 주도로 전개되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셋째, 전진이 의존한 원자료의 틀이 전진의 서술 안으로 스며든다. 루쿠스는 마오 시대를 사회주의로, 개혁개방기를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으로 본다. 전진은 각주 58에서 이런 입장 차이를 밝히고 원문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적는다. 그러나 본문에는 루쿠스의 분석이 그대로 실려 있다. “돌이켜보면 1971년부터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까지는 중국 사회주의의 마지막 단계”, “이 시점에 중국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데서 마지막 단계만을 남겨 두고”, “사회주의 시초축적”, “새로운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의 위계적 구성”, “사회주의 국가가 거의 붕괴할 뻔한 위기” 같은 표현들이다. 각주 하나로 용어를 바꿔 읽으라고 할 수는 있지만,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한다는 서사 구조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전진이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자본주의로’라는 도식을 택한 것은 루쿠스의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라는 서사를 용어만 바꿔 수용한 결과로 읽힌다. 그 결과 전진의 개혁개방기 서술은 연속성을 주장하면서도 단절의 서사를 따라가게 됐다.
각주 91도 같은 사정을 보여 준다. 루쿠스가 1986년 보수파와 개혁파의 차이를 ‘중국이 자본주의에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 조치’를 둘러싼 차이로 서술한 대목에 대해, 전진은 저자의 시각이 묻어나는 서술이라고 지적한다. 이어 시장자본주의 요소가 강화되면서 중국공산당이 통제력 약화를 두려워한 것으로 고쳐 읽자고 주장한다. 이런 각주가 거듭 필요해진다는 것은 원자료의 틀과 전진의 틀이 서술 전반에서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자본주의로 가는 공산주의의 길》에서 루쿠스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서술하고 중국의 이행을 정면으로 이론화하려 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전진이 받아들인 그의 이론적 틀은 취약하고 때로는 모순된다. 71 루쿠스는 자신이 ‘현존 사회주의’라 부르는 체제가 ‘자본주의와 몇몇 핵심적 특징’을 공유했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그 체제는 산업 발전에 자금을 대려고 “자본 축적의 형태”를 모방했고, 자본주의 기업을 연상시키는 위계적 일터를 조직했으며, 정점에 “새로운 사회주의 지배계급”이 자리 잡은 “경직된 계급 피라미드”를 낳았다. 그리고 이 지배계급은 두 번째 이행기에 “자본주의 지배계급으로 스스로 변모했다”. 72 루쿠스는 국유화, 복지, 중앙집권적 일당 지배를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이 오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요소들을 기준에서 제외한다면 루쿠스의 ‘사회주의’에 무엇이 남는지 알기 어렵다. 73
루쿠스의 후속작 《중국의 좌파: 정치적 지도 그리기》에서도 같은 문제가 나타난다. 루쿠스는 마오 사망 때까지의 체제를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로, 그 아래서 노동계급이 겪은 착취를 “사회주의적 착취”로 부른다. 마오 사망부터 1990년대까지는 이행기로, 그 뒤는 완전한 자본주의로 구분한다. 그러나 책 어디에서도 이 규정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를 사적 소유·시장과, 사회주의를 국유재산·시장 폐지와 동일시하는 듯하다. 74 그러나 사적 소유와 시장의 폐지는 사회주의의 충분조건이 아니며, 결정적인 것은 누가 국가를 통제하느냐다. 이 점에서는 루쿠스도 1949년 이후 국가를 통제한 것이 노동계급이 아니었다는 데 동의한다. 앞서 ‘시장 물신’이라 부른 사고, 곧 시장의 비중으로 체제의 성격을 판별하는 사고가 루쿠스의 시기 구분을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루쿠스의 반박도 허술하다. 루쿠스는 국가자본주의론이 중국 공산주의가 임금노동, 잉여노동 착취, 공장제를 폐지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단 한 나라’에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다는 사실에 근거한다고 보고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론의 더 근본적인 근거는 마오 시대 중국이 자본주의의 결정적 특징, 곧 노동 착취에 기초한 경쟁적 자본 축적을 재생산했다는 데 있다. 경쟁이 주로 시장 경쟁보다 국가 간 군사적 경쟁의 형태를 띠고, 착취로 생산된 잉여를 국가 자신이 축적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자본이 노동을 지배하는 핵심 생산관계는 같다. 개혁개방 뒤에도 국가 주도 축적과 당·국가 지배층의 권력이 유지되고, 관료들이 사적 자본가로 비교적 쉽게 변신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75
루쿠스는 《자본주의로 가는 공산주의의 길》에서 국가자본주의론을 극도로 피상적으로 기각했다. 그는 국가자본주의론이 오늘의 중국을 마오 시대와 똑같은 국가자본주의로 본다고 전제한 뒤, 중국이 그동안 크게 변했으니 그럴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론은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이 이론의 요지는 중국 지배 관료가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쟁에 묶여 있었고, 그래서 국내 시장을 대폭 억제하고 국가 계획을 실행했는데도 사회의 우선순위를 정한 것은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경쟁적 축적이었다는 것이다. 시장 지향 개혁이 ‘반혁명’ 없이 이뤄졌고 마오 시대의 ‘붉은 부르주아지’와 그 자손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도 이 설명과 맞아떨어진다. 76 이것은 단순한 용어 문제가 아니다. 전진이 각주에서만 거리를 둔 루쿠스의 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전진 자신의 연속성 논지와 충돌한다.
우리는 루쿠스의 서술 방법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중국의 좌파》에서는 충분한 근거 없이 폭넓은 일반화를 하고, 각 사건에 참여한 노동자 수나 각 사상을 받아들인 급진파의 규모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부족해 서술이 인상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좌파 권위주의”, “좌파 평등주의” 같은 네 범주로 급진 사상을 분류한 표도 논쟁적이고 단순하다. 무엇보다 1927년 상하이 학살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도 거의 다루지 않는다. 77 《자본주의로 가는 공산주의의 길》에서는 70년에 걸친 아래로부터의 역사와 이행의 이론화를 한 권에 담으려다 너무 많은 영역을 떠안았고,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상층 정책 변화 사이의 연관을 충분히 탐구하지 못했다. 78
이렇게 보면 루쿠스의 연구는 노동체제, 젠더, 문화혁명기 조반파 같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전해 주는 자료로서는 값지지만, 체제의 성격과 1927년 이후 중국공산당의 형성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실제로 전진은 1922~1927년 서술을 소우 미의 글 79 과 해럴드 아이작의 《중국 혁명의 비극》 80 에 기대고, 루쿠스는 1949년 이후 서술부터 인용한다. 81 루쿠스의 책이 1949년에서 출발하니 이런 자료 배치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전진 문서에서는 1927년의 패배와 스탈린주의의 역할을 중심에 둔 앞부분과, 그것을 거의 다루지 않는 루쿠스의 틀에 기댄 뒷부분이 두 시기의 연결을 충분히 해명하지 않은 채 이어 붙여졌다. 루쿠스에 기댄 개혁개방기 서술이 단절의 서사로 기운 것은 이런 이론적 접합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7-3. 톈안먼: 진압은 전환을 ‘완수’했는가
톈안먼에 관한 전진의 서술에는 장점이 있지만, 두 대목에서는 해석이 지나치다. 하나는 톈안먼 진압이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완수했다는 판단이다. 전진은 톈안먼 항쟁이 개혁개방 과정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사건이자, 중국공산당이 이를 진압하며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완수하는 과정이었다고 쓴다. 그러나 진압 뒤 3년 동안 대규모 억압이 이어졌고, 개혁이 톈안먼 항쟁을 낳았다고 주장한 보수파가 일시적으로 우위를 점해 개혁이 보류됐다. 그 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가 새 경제특구 설치를 포함한 새로운 자유화 물결을 열었다. 82 1990년대 초에야 지배계급은 시장 지향 개혁을 본격적으로 가속하는 길에 나섰다.
이 사이의 변화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호어에 따르면, 1989년 중반부터 1990년 중반까지 국민총생산(GNP)은 정체하거나 감소했고, 1989년 9월에는 소비자물가가 떨어졌다. 진압과 함께 관료 부패 단속도 이뤄졌다. 국유기업 적자는 1989년 두 배 넘게, 1990년 다시 거의 두 배로 늘었다. 덩샤오핑은 남부 순방(1992년 1~2월)으로 주도권을 되찾아 ‘홍콩 몇 개’를 만들자고 했고, 그해 당대회에서 반대파를 지도부에서 밀어냈다. 계약액을 기준으로 보면, 1992년의 외국인 직접투자는 1979~1991년의 누계를 웃돌았다. 83
진압은 노동운동을 억눌러 이후 시장화를 추진할 정치적 조건을 마련했지만, 그것이 곧 전환의 완수는 아니었다. 이 구별은 개방의 속도와 국가 통제의 정도를 둘러싼 지배계급 내부의 대립이 왜 1989년 이후에도 계속됐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한쪽은 세계경제에 더 깊이 진입하면서 경쟁력 강화 압력에 노출되는 위험을 무릅쓰려 했다. 다른 쪽은 국가의 경제 관리를 유지하며 그 위험에 점진적으로 대비하려 했다. 이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전략의 차이이기도 했다. 84 두 분파 모두 당-국가 체제의 미래가 경제적 성공과 생활수준 향상에 달려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전진이 인용하는 지한(吉漢)의 추측, 곧 1990년대 국유기업 개혁이 경제적 고려뿐 아니라 도시 노동계급의 조직력과 급진성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나왔을 것이라는 추측은 흥미롭다. 그러나 지한 자신도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인용문에서 인정한다.
7-4. ‘두 개의 운동’ 테제의 과잉 해석
톈안먼에 관한 또 다른 과잉 해석은 ‘두 개의 운동’ 테제다. 전진은 지한의 글에 기대어 학생들은 개혁을 지지하는 탈계급화된 자유민주주의를, 노동자들은 시장주의 개혁과 관료 독재를 동시에 거부하는 계급적 ‘사회주의민주’를 추구했다고 대비한다. 노동자와 학생의 목표 차이를 부각한 점은 흥미롭다. 학생 지도부가 노동자 조직을 광장에서 배척하고, 행진 때 시민이 끼어들지 못하게 인간 띠를 두르고, 해외 기부 물품이 노동자 손에 넘어가지 않게 신경 쓴 행태는 이런 차이를 드러낸다. 총파업을 ‘경제에 손실을 입힌다’며 반대하고, 진압 뒤 노획한 무기를 군대에 돌려준 사실도 운동 내부의 정치적 차이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월더와 궁샤오샤의 연구에 따르면, 공자련의 요구는 처음에는 노동조건 개선, 노동자 대표권, 국유기업과 경영진에 대한 감독권 같은 온건한 수준에 머물렀다가 관료 소득 공개, 여성 고용 차별 철폐 등으로 확대되고 급진화했다. 85 이는 요구가 급진화한 궤적을 보여 주지만, 처음부터 일관된 사회주의 강령을 갖추고 있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운동의 결정적 약점은 학생과 노동자의 요구를 하나의 공동 투쟁으로 묶을 분명한 강령과 전략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노동자 활동가 집단들이 공개 서한으로 혁명적 요구를 제기했지만 체제와 관제 노동조합 안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경향이 우세했고, 총파업 제안도 제기됐다가 사라졌다. 86 학생들 가운데는 처음에는 노동자의 참여를 꺼리다가도, 운동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체제를 무너뜨릴 힘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한 이들이 있었다. 87 두 운동의 분리는 절대적이지 않았고, 운동 안에서는 입장의 변화와 학습이 일어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행동, 곧 규찰대 조직, 바리케이드 설치, 총파업 준비에 내포된 이중권력의 맹아를 강조하는 것은 옳다. 학생들의 반란으로 시작한 투쟁은 5월 20~21일 주말 무렵 노동자 중심의 혁명적 운동으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88 그러나 이런 잠재력을 이미 정립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강령과 동일시하면 1989년의 중요한 교훈이 흐려진다. 노동자의 자기조직화는 급속히 성장했지만, 이를 확산시키고 총파업과 권력 문제로 이끌 혁명적 조직은 없었다. 전진도 공자련 같은 조직이 학생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조직적·사상적으로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다고 쓴다. 이 판단은 옳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사회주의민주’ 지향이 구체적으로 어느 수준에 이르렀고, 그것을 일관된 강령과 전략으로 발전시키는 데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더 따져야 한다.
많은 활동가에게 1989년의 일차적 교훈은 운동의 주도권이 학생 지도부에서 노동자들에게로 옮겨 가야 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중국에 빠진 핵심 요소는 노동자와 피억압자의 투쟁에 뿌리내린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다. 89 이 교훈은 전진의 결론부 원칙과 맞닿아 있지만, 톈안먼 서술 자체에서는 충분히 도출되지 않는다. ‘사회주의민주’라는 명칭을 매우 발전된 의식과 강령의 증거로 취급하면, 노동자들이 보여 준 가능성과 그 가능성을 실현할 정치적 수단 사이의 간극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8. 다섯째 문제: 현대 중국 분석의 공백과 과장
전진의 현대 중국 서술은 ‘세계의 공장’이 된 과정을 설명하는 데서 사실상 멈춘다. 그 뒤에 심화한 모순과 저항, 민족 문제와 대만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으며, 제국주의 규정도 구체적 분석으로 뒷받침하지 못한다.
8-1. 경제 모순과 위기 전망의 부재
경제에 관한 서술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성장한 과정은 설명하지만, 그 뒤 중국 자본주의가 어떤 모순에 부딪혔는지는 보여 주지 않는다.
버드의 2장은 이 공백을 채울 분석을 제공한다. 2억 8000만~3억 명에 이르는 농민공은 연안 경제특구를 비롯한 도시 산업에 막대한 잉여가치를 제공했다. 그러나 노동자 투쟁과 노동연령인구 감소가 임금 상승 압력으로 작용하면서 저임금에 기댄 성장 방식은 한계에 부딪혔다. 성장률이 둔화하자 지배계급은 부채를 늘려 경기를 떠받쳤다. 여러 도시와 지역에서 자산·부동산 거품이 터지기 시작했고, 청년 실업도 급증했다. 경제의 약 25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부동산 부문은 헝다 같은 거대 개발업체의 지급불능 사태로 위축됐고, 그 여파는 가계용품 내수 시장에도 미쳤다. 2015년에 발표된 ‘중국제조 2025’는 산업을 고도화하려는 시도였고, 뒤이은 ‘쌍순환’ 전략은 수출 의존도를 줄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내수 확대는 임금 인상에 대한 자본의 저항에 부딪혀 제한적 성과에 머물렀다. 과잉축적이 심화하는 가운데 성장은 국가의 기반시설 지출에 크게 의존했다. 90
클리프가 1948년에 스탈린주의 체제의 위기가 정체로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한 것은 이런 경향을 이해할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중국 국유 부문에서도 부채에 의존해 연명하는 기업들이 성장을 가로막고 있으며, 여기에 과잉생산과 이윤율 하락이라는 자본주의의 전통적 위기 양상이 겹칠 위험이 있다. 91
버드는 2025년 초 글에서 이 진단을 당시의 수치로 보강한다. 헝다는 약 3000억 달러의 부채를 안고 무너졌다. 버드는 팔리지 않은 주택이 6500만 채에 이른다는 추산도 소개한다. 신규 주택 건설도 2020년에 견줘 크게 줄었다. 버드는 연관 산업까지 합친 부동산 부문이 경제의 약 30퍼센트를, 개발업체에 대한 토지사용권 매각이 지방정부 수입의 약 3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지적한다. 부동산 침체가 지방정부의 부채 위기로 번지는 이유다. 청년 실업률도 2018년 연평균 10퍼센트에서 한때 20퍼센트 이상으로 치솟았다.
2024년 11월 지배계급은 5년간 1조 4000억 달러 규모의 부채 부담 완화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돈은 소비를 직접 늘리기보다 지방정부의 부채 부담을 덜어 축적을 재개하는 데 배정됐다. 버드는 당시까지 드러난 경기 진작 효과가 미미했다고 평가한다. 92
호어는 이 모순의 근원을 다음과 같이 짚었다. 1992년 이후 중국의 고속 성장은 무엇보다 미국이 주도한 1990년대의 투기적 호황에 의존했다. 수출 부문은 수입 부품과 원자재에 의존하는 ‘엔클레이브’, 즉 외부 시장과 연결된 생산 거점으로 발전해 나머지 국내 경제와의 연계가 제한적이었다. 국유기업의 회수 불능 대출 때문에 1990년대 중반에는 국가 은행 체계 전체가 기술적으로 지급불능 상태였다는 추산도 있었다. 중국의 세계시장 통합은 안정성을 보장하기는커녕 새로운 불안정 요인을 낳았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중국의 성장은 세계 원자재 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2003년 중국은 세계 철강의 27퍼센트, 석탄의 31퍼센트, 시멘트의 40퍼센트를 소비했다.
이정구는 불평등과 그에 대한 지배자들의 두려움을 다룬다. 중국의 지니계수는 1990년대 이후 크게 높아졌고, 시진핑 집권기에도 0.46~0.49의 높은 수준에 머물렀다. 코로나19 시기에 빅테크 기업의 이윤은 폭등했지만 노동 대중은 봉쇄와 실업에 시달렸다. 지배자들은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1989년과 같은 항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공동부유’와 ‘홍색 규제’는 그 불만을 달래고 통제하려는 대응이었다. 93
‘가짜 사회주의’를 폭로하는 데서 멈추는 분석은 그 체제가 무엇이 아닌지는 밝힐 수 있어도, 무엇이며 어디로 가고 어디서 균열이 생기는지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혁명적 조직에는 이 설명이 필요하다. 위기가 어디서 터지고 어떤 계급에 타격을 가할지, 지배계급이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를 전망해야 개입할 지점을 찾을 수 있다. 중국 지배계급은 서방과 비슷한 ‘해법’, 곧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민족주의 강화, 인종차별, 복지 긴축, 임금 억제, 전통적 젠더 관계와 성적 규범의 재강화를 내놓고 있다. 94 버드는 2025년 초 글에서 시진핑이 서방의 신자유주의자들처럼 복지를 ‘나태를 키우는 함정’으로 적대하고, 국가가 사회보험 부담을 사용자에게서 노동자 개인에게로 옮기려 한다고 지적한다. 정년 연장도 이런 맥락에서 시행됐다. 95 이는 한국 노동운동에도 낯설지 않은 일이며, 국제연대의 공통 과제를 밝힐 비교 분석의 소재가 된다.
8-2. 노동운동: 사례 나열과 오류
전진은 2017년에 일어났다고 잘못 적은 제이식 노동자 투쟁과 2022년 폭스콘 공장 노동자 봉기, 배달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 건설 시도를 언급한다. 그러면서 톈안먼 이후 노동자들이 아직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조직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고 쓴다. 그러나 개별 투쟁이 어떻게 생겨나고 확산되며 탄압받았는지에 대한 분석은 없다.
버드의 4장은 2007~2016년의 파업 물결을 다룬다. 이주노동자의 처지, 공장 체제의 전제성, 임금, 파업·조직·의식의 관계, 노동 NGO와 학생·노동자의 활동, 2015년 말 이후의 탄압을 차례로 분석한다. 선전의 노동자 센터 25곳 가운데 거의 전부가 문을 닫았고, 2017년 1월에 발효된 해외 NGO 관리법은 국제적 지원을 크게 제약했다. 2018년 7월 제이식 투쟁은 노동자들이 관방 총공회에 등록하는 방식으로 자체 노조를 결성하려다 해고되면서 시작됐다. 케빈 린의 평가에 따르면, 이 투쟁은 작은 규모로나마 학생·노동자 동맹을 형성해 노동 쟁의를 정치 투쟁으로 발전시켰고, 국가의 마르크스주의 독점에 도전하는 좌파적·계급적 담론을 낳았다. 이것이 특히 가혹한 탄압을 받은 이유였다. 20여 개 대학에서 학생 연대 시위가 조직됐지만, 100명이 넘는 노동자·활동가·학생이 체포되고 대학의 마르크스주의 동아리들이 폐쇄되거나 ‘재편’됐다. 96
버드는 이후의 상황도 신중하게 평가한다. 코로나 봉쇄가 풀린 뒤 2023년에 기록된 파업 건수는 두 배로 늘었고 증가세는 2024년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은 체불 임금, 노동시간 단축, 공장 폐쇄·이전에 맞선 방어적 투쟁이었다. 2007~2016년 수준의 힘을 회복하는 것은 여전히 과제였다. 독립적 노동자 조직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못하는 탓에, 개별 저항을 넘어선 조직적 ‘노동운동’이 형성됐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저항을 낳는 조건과 경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97
호어가 기록한 1990년대의 투쟁도 전진의 서술에는 빠져 있다. 1990년에는 1600건이 넘는 시위에 3만 7000명이 참가했고, 1995년에는 1800건이 넘는 파업이 있었다. 1997년 몐양에서는 실업자와 이주노동자까지 합류한 시위가 이틀 동안 이어졌고, 난충에서는 2만 명의 시위대가 체불 임금을 받아 냈다. 2000년 랴오닝에서는 광원 2만 명이 경찰과 사흘 동안 맞서 싸웠다. 2002년 랴오양에서는 20개 공장의 노동자들이 시장 해임을 요구하며 행진했다. 같은 해 다칭 유전에서는 최대 5만 명이 난방 보조금 삭감에 맞서 거리로 나와 ‘다칭 석유관리국 해고노동자 임시노조위원회’를 결성하고 대표를 선출했다. 신장, 성리, 랴오허 유전의 노동자들도 연대 시위를 벌였다. 호어는 관방 노조의 한 위원장이 공산당이 존재하는 한 중국 노조가 독립적으로 행동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털어놓은 일화도 기록한다.
이 사례들은 톈안먼 이후에도 독립적 조직화의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조직을 만들지 못했다’는 말로 끝내기보다, 조직화가 거듭 시도됐지만 탄압 때문에 지속적인 조직으로 자리 잡기 어려웠다고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 중국 노동자들이 처한 제약과 그들이 보여 준 능동성을 함께 드러낼 수 있다. 연대의 출발점은 수동적 피해자로 그려진 노동자가 아니라, 이런 제약 속에서도 싸우는 노동자다.
8-3. 민족 문제: 원칙은 있는데 적용이 없다
전진은 러시아 혁명 부분에서 민족자결권을 매우 자세히 다룬다. 약소민족의 자결권을 지지하는 것이 국제적 노동자 단결의 조건이라는 원칙을 강조한다. 제국주의 국가의 사회주의자는 약소국 민중과 단결하기 위해 자국 부르주아지에 맞서야 한다. 약소국의 사회주의자도 민족해방 투쟁을 부르주아지에 맡겨 두지 말고 노동자 민중이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 전진은 스탈린이 고려인, 볼가 독일인, 타타르인을 강제 이주시키고 민족 억압을 부활시켰다고 비판한다. 우크라이나인들의 러시아 국가에 대한 반감도 이런 민족 억압의 역사와 연결해 설명한다.
그러나 중국 부분에서는 이 원칙을 거의 적용하지 않는다. 신장 위구르 문제는 서론 격인 민족주의 설명에서 한 문장으로 언급될 뿐이다. 티베트, 내몽골, 홍콩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국제사회주의 전통은 이 문제를 비중 있게 다뤄 왔다. 호어는 2004년에 이미 내몽골, 신장, 티베트의 저항사를 다뤘다. 그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내몽골에서는 문화혁명기에 수십만 명이 체포되고 최대 2만 명이 살해됐다. 신장에서는 1962년 무장봉기, 1980년 아커쑤 폭동, 1989년 무슬림을 모욕한 서적에 항의한 시위, 1990년 바런 봉기, 1997년 이닝 폭동이 있었다. 9·11 이후 중국은 ‘무슬림 테러리스트’ 소탕 흐름에 재빨리 편승해 억압을 정당화했다. 티베트에서는 1959년 봉기 진압 이후 식민지적 지배가 강화됐고, 1987~1989년 라싸에서 봉기가 거듭됐다. 호어는 1959년 이후 45년이 지나도록 대다수 티베트인이 ‘옛 지배계급의 복귀’를 바란다고 평가하며, 이를 중국 지배의 억압성을 보여 주는 역설로 제시했다.
버드는 5장에서 티베트, 위구르, 홍콩을 차례로 다룬다. 위구르인과 다른 튀르크계 소수민족은 대규모 감시, 구금, 이주, 문화 억압을 수반한 정착민 식민 체제를 오랫동안 견뎌 왔고, 수십만 명이 수용소에 갇혔다. 2022년 11월 우루무치에서는 코로나 봉쇄 중 발생한 아파트 화재로 위구르인들이 숨진 뒤 봉쇄 반대 시위가 분출했다. 버드는 이때 주로 한족 주민들이 시위에 나섰다는 점에 주목한다. 위구르인들이 더 가혹한 탄압을 우려하는 상황에서, 국가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어 온 사람들과의 연대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98 시위는 여러 도시와 대학으로 번졌고, 공산당 퇴진 구호도 등장했다. 99
홍콩 활동가들도 위구르인과 연대했다. 이정구는 11장과 12장에서 소수민족 문제와 홍콩 항쟁을 다룬다. 그는 1949년에 제국주의와 봉건제를 무너뜨렸다는 국가가 청 왕조의 질서를 근거로 대만·티베트·신장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적 이익을 정당화하는 논리라고 비판한다. 100
전진이 중국을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규정하면서도 그 지배가 가장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국경 안의 식민지적 관계, 곧 티베트와 신장의 억압을 분석하지 않은 것은 중대한 공백이다. 러시아 혁명 서술에서 그토록 강조한 원칙을 정작 오늘날의 첨예한 사례에 적용하지 않은 셈이다. 2019년 홍콩 항쟁도 한국 좌파 내부에서 첨예한 논쟁을 일으켰다. 일부는 이를 미국이 배후에서 조종한 ‘색깔 혁명’으로 몰았다. 이 논쟁에 대한 입장 없이 중국 노동자와의 국제연대를 말하기는 어렵다.
8-4. 대만: 침묵
대만에 대한 전진의 침묵은 더 심각하다. 전진은 미·중 대립 구도가 한반도를 지배하고, 사드 배치가 실제로는 중국 군사력을 겨냥한 것이며, 미·일·한 동맹이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적 진지라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주요 군사적 충돌 지점인 대만 문제에 대한 입장도 필수적이다. 대만 해협에서 전쟁이 터지면 주한미군과 한국군이 관여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이정구는 중국의 대만 복속 구상을 제국주의적 강제로 규정한다. 대다수 대만인은 권위주의적 시진핑 정부에 반대하며 중국공산당의 지배를 원하지 않는다. 대만의 장래는 대만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다. 동시에 대만의 노동계급과 좌파는 중국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계급적 단결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대만 지배계급의 친자본·반노동 정책과 미·중 제국주의 모두에 맞서고, 중국 본토와 홍콩의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한다. 101
대만과 중국의 관계를 두고는 통합과 독립을 주장하는 양쪽 모두 역사적 근거를 내세운다. 버드가 집필할 무렵 대만 자본의 대중국 투자는 약 2000억 달러에 이르렀고, 폭스콘이 중국 노동자 약 100만 명을 고용할 만큼 경제적 결합도 깊어졌다. 그러나 그 결합은 중국의 경제 성장과 군사 현대화에 기여하면서 군사적 긴장을 키우는 역설도 낳았다.
미국의 대만 무기 판매 승인액은 트럼프 1기에 180억 달러를 넘었고, 바이든 집권 뒤에도 2023년 중반까지 30억 달러 이상이었다. 2022년 5월 바이든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군사적으로 개입하겠다고 공언했다. 미국은 중국 군용기의 대만 방공식별구역 진입을 비난하면서도 대만 주변에서 대규모 군사 활동을 벌였다. 다만 버드는 책을 집필할 당시 가까운 시기에 대만의 독립 선언이나 중국의 전면 침공이 일어날 가능성을 낮게 봤다. 102
트럼프 2기 들어 미국의 대만 정책에서는 거래적 성격이 더 두드러졌다. 국방부 정책차관 지명자였던 엘브리지 콜비는 2025년 3월 4일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대만이 중요하지만 미국의 ‘사활적’ 이해는 아니라고 증언했다. 이는 대만이 미국의 보호에 값을 치러야 한다는 트럼프의 주장과 연결된다. 그즈음 대만이 미국 무기를 최대 100억 달러어치 추가로 구매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한편 미국 국무부는 대만 개황 자료에서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삭제했다. 버드는 중국이 이를 대만의 독립 선언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보호 의지가 강화된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본다. 그는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대만이 중국 쪽으로 기울 가능성도, 미국이 중국의 무력 통일을 묵인할 가능성도 낮다고 평가했다. 103
필자도 대만 방공식별구역에서 확인된 중국 군용기의 활동이 출격 횟수 기준으로 2023년 연간 약 1703회였는데, 2024년에는 1~11월에만 약 2771회에 이르렀다는 점을 짚었다. 해군 함정의 상시 배치, 해경의 잦은 진먼·마쭈 해역 진입, 대만을 포위하는 형태의 거듭된 대규모 훈련도 지적했다. 이를 근거로 중국이 대만과 남중국해에서 독자적 강압을 추진하며 지역의 군사화를 함께 조장하고, 일부 위기에서는 긴장 고조의 주된 책임을 진다고 규정했다.
찰리 호어의 2004년 글과 이정구의 책 사이에는 자결권 적용과 독립 선언의 정치적 의미를 두고 강조점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호어는 독립 선언이 미국 주도 전쟁의 방아쇠가 될 위험을, 이정구는 중국의 복속 구상이 지닌 제국주의적 성격과 대만 민중의 의사를 앞세운다. 이 차이를 검토할 때는 두 저술 사이 약 20년 동안의 대만 정체성 변화, 미·중 경쟁의 격화, 홍콩 ‘일국양제’의 붕괴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전진이 어느 입장에 서는지, 혹은 다른 입장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중국을 ‘세계 패권을 다투는 제국주의’로 규정하는 좌파 단체가 대만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정세 분석의 결함이자 정치적 준비의 결함이다.
8-5. 제국주의 분석: 규정은 있는데 분석이 없다
전진은 중국을 미국과 세계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규정한다. 북한 부분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러시아의 전략적 패착 때문에 러시아가 중국의 경제 지원에 의존하게 됐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미국과 서방에 맞서는 ‘중국 주도의 견고한 중·러 동맹’이 구축됐으며,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는 미·중 제국주의 대결 구도에 압도적으로 지배된다고 쓴다. 북한은 ‘중·러 제국주의’를 위한 완충 지대이자 필요하면 대리전을 치를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앞으로 중·러의 묵인 속에서 북한의 핵 개발이 더 과감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한다.
중국이 제국주의 국가라는 규정 자체는 우리의 분석과 합치한다. 그러나 그 규정의 근거, 곧 레닌과 부하린이 분석한 자본 집중, 금융자본, 자본 수출, 국가와 자본의 융합, 지정학적 경쟁이 중국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분석은 전진 문서에 없다. 국제사회주의 전통의 연구들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버드는 중국이 2012~2022년에 매년 해외 직접투자 규모 상위 3위 안에 들었다는 점, 중국의 대외 대출이 세계은행을 비롯한 다자기구와 여러 서방 공적 대출기관보다 높은 금리를 부과한다는 점을 짚고 일대일로와 브릭스의 실상을 분석한다. 아울러 굴리엘모 카르케디와 마이클 로버츠처럼 중국을 부등가교환의 피해국, 곧 ‘지배받는 나라’로 보는 논리를 반박한다. 이들은 부등가교환 메커니즘에 집중한 나머지 중국이 다른 글로벌 사우스 나라들로부터 얻는 가치 이전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04
버드는 캘리니코스를 따라 국가 이해관계와 지정학의 논리가 경쟁적 자본 축적의 논리로 단순히 환원되지는 않으면서도 서로 교차한다는 분석 틀을 제시한다. 105 일대일로도 이 틀로 분석한다. 버드가 다룬 당시 약 150개 참여국에 걸친 1조 달러 규모의 기반시설 사업인 일대일로의 핵심 목적은 수출 시장과 원자재·에너지 공급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국내에서 수익성 있는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잉여자본의 수출 통로이기도 했다. 이는 레닌과 부하린이 분석한 제국주의의 핵심 특징이다. 중국 차관이 서방식 거시경제 구조조정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차입국에 불리한 조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에이드데이터(AidData)의 연구는 중국의 대출이 여러 서방 공적 대출기관과 다자기구보다 높은 금리를 부과하며, 원자재 수출대금 등이 들어오는 계좌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상환을 보장받는다고 밝힌다. 브라질의 대중국 수출은 90퍼센트 이상이 농산물·원자재인 반면, 중국에서 들여오는 수입품은 비슷한 비율이 공산품이다. 버드는 이러한 무역·금융 관계를 통해 가치가 글로벌 사우스에서 중국으로 이전된다고 분석한다. 106
그와 함께 제국주의적 힘의 격차도 분석해야 한다. 버드는 홍콩 마르크스주의자 어우룽위(区龙宇 또는 區龍宇)의 규정에 대체로 동의한다. 중국은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매우 강한 지역 강국이자 떠오르는 제국주의 국가다. 약소국을 지배할 의도와 잠재력을 갖췄으나, 세계적 지위를 아직 충분히 공고히 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척도에서 미국보다 상당히 약하다. 107 따라서 중국 제국주의와 세계 최대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의 힘을 같은 수준에 놓을 수는 없다. 108 버드는 2025년 3월 글에서도 두 나라의 격차가 좁혀졌지만 중국이 미국과 대등해진 것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서방은 중국 최초의 해외 군사기지인 지부티 기지를 부각하면서도, 750곳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미국의 해외 기지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109 미국이 말하는 ‘중국의 위협’에는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우위가 도전받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중국을 비롯한 어떤 경쟁국도 이 지역에서 독자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는 미국의 정책 자체가 긴장을 고조시킨다.
필자는 세 층위를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 세계 차원에서는 미국 우위의 비대칭성이 뚜렷하다. 2025년 군사비는 미국 9540억 달러, 중국 3360억 달러로 약 2.8 대 1이고, 미국과 유럽 나토 회원국의 합계 약 1조 5130억 달러는 중국의 약 4.5배다. 미국은 2021~2025년 세계 주요 무기 수출의 42퍼센트를 차지하며 99개국에 무기를 공급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는 2026년 1월 기준 중국의 핵탄두를 약 620기로 추정한다. 2030년에 1000기를 넘는다는 전망을 적용해도, 이는 2026년 1월 기준 미국이나 러시아의 군사용 비축량과 비교하면 약 4분의 1 수준이다. 중국은 지부티 기지 등을 확보했지만 미국과 같은 전 세계 규모의 해외 지휘·통제 체계는 갖추지 못했다.
둘째, 중국 주변에서는 격차가 크게 좁혀졌다. 미 국방부는 중국군이 본토에서 약 1500~2000해리 범위 안에서 미국의 개입을 심각하게 저지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셋째, 사안별 구체적 책임은 다르다. 세계 체제 수준의 구조적 책임은 여전히 미국이 더 크지만, 중국도 지역의 군사화를 함께 조장하고 특정 사안에서는 긴장을 먼저 고조시킨다. 다만 ‘상호 작용’이 있다는 사실이 곧 ‘동등한 책임(50 대 50)’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전진의 ‘세계 패권 경쟁’이라는 규정에는 이런 층위별 분석이 빠져 있다. 그 결과 두 강대국의 힘과 역할이 대칭적인 것처럼 읽힐 위험이 생긴다. 진영론을 피하려다 등거리론의 단순화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반진영론은 두 지배계급 모두에 반대한다는 원칙이지, 두 지배계급의 힘과 구체적 책임이 같다는 주장이 아니다. 이 비대칭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국처럼 미국 동맹 체제 안에 있는 나라의 마르크스주의자가 자국 지배계급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1차 과제로 삼으면서도 중국 제국주의를 미화하지 않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다. 전진도 사드와 미·일·한 동맹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실천적으로는 이 방향에 서 있다. 그러나 힘과 책임의 격차에 대한 분석이 없으면 그 실천적 우선순위를 이론적으로 설명할 근거는 빈약해진다.
‘중국 주도의 견고한 중·러 동맹’이라는 전진의 서술은 우리의 분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미국은 중·러가 단일한 축을 이룬다는 ‘신냉전’ 서사를 이용해 동맹국의 독자적인 대중국 관계를 제약하고 자국 주도 아래 결집시키려 한다. 그러나 협력의 확대가 곧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견고한 동맹을 뜻하지는 않는다. 버드가 검토한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의 관계에서도 이런 한계가 드러났다. 침공 약 3주 전 푸틴과 시진핑은 ‘무제한 우정’을 선언했지만, 실제 협력에는 제약이 있었다. 중국은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늘리는 한편 전쟁에 대한 우려를 러시아에 전달했고, 러시아의 무기 요청에도 당시에는 직접적인 살상무기 지원을 꺼렸다. 전쟁 직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과 브릭스 신개발은행도 러시아 관련 활동이나 신규 거래를 중단했다.
장기전은 러시아의 대중 의존도를 키우고 미국의 관심을 아시아에서 돌린다는 점에서 중국에 이점이 있다. 그러나 중국은 나토의 입지를 강화할 우크라이나의 압도적 승리도, 서방과의 교역·투자를 위협할 지정학적 불안정도 원하지 않는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일대일로와 군사 협력을 통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가 러시아의 전통적 세력권을 잠식하므로 두 국가는 경쟁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버드는 중·러 관계를 공고한 동맹보다 이해가 맞는 사안에서 협력하는 편의적 관계로 봤다. 그가 비교 사례로 든 인도도 쿼드 회원국이면서 우크라이나 전쟁 뒤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크게 늘렸고 수입 무기의 상당 부분을 러시아에 의존했다. 그렇다고 이를 곧바로 미국에 맞선 ‘인도·러시아 축’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110
전진이 중·러 관계를 곧바로 ‘견고한 동맹’으로 묘사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 전략가들의 신냉전 서사를 좌파의 언어로 반복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세계가 더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버드는 냉전기의 적대 관계가 일정한 안정성을 유지한 데 비해, 오늘날에는 유동적인 경쟁과 동맹 관계 속에서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111 트럼프 2기의 대러 접근도 중·러 관계가 고정된 두 진영의 틀로 설명되기 어려움을 보여 준다. 버드는 트럼프가 러시아에 유리한 조건으로라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려 한 데에 러시아와 중국의 유대를 약화시키고 러시아의 대중 의존을 줄여 중국을 견제하려는 계산이 있다고 분석한다. 112 북한이 중·러의 ‘대리전’을 치를 수 있다는 전진의 전망에도 추가 논증이 필요하다. 중·러의 이해가 어디까지 일치하는지, 중국이 교역과 지역 안정을 해치고 미국의 동맹 강화를 촉진할 한반도 전쟁을 감수하려 할지를 따져야 한다.
9. 여섯째 문제: 서로 다른 분석 틀을 검토하지 않은 인용의 결합
서로 다른 이론적 틀을 검토하지 않은 채 긴 인용문으로 이어 붙이는 방식은 서술 곳곳에 균열을 낳았다.
전진 문서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은 긴 인용문의 연쇄다. 본문의 상당 부분이 다른 문헌의 인용으로 채워져 있다. 교육 자료가 풍부한 원자료를 소개하는 것은 장점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체제의 성격과 역사적 전환에 관해 서로 다른 전제를 가진 문헌들을, 그 차이를 따져 보지 않은 채 결합했다는 데 있다.
| 전진 문서의 부분 | 주로 기댄 문헌 | 그 문헌의 이론적 틀 | 전진 서술에 남긴 흔적 | ||||
| 소련의 관료적 퇴보와 반혁명 | 월터 돔, 《스탈린주의의 삶과 죽음》 | 1930년대 후반의 반혁명. 명령경제의 비시장적 특징을 ‘노동자 국가의 잔재’로 설명 | 1936~1939년을 반혁명기로 구분. 노동자 국가가 없었던 중국에는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잔재’론 | ||||
| 1925~1927년 혁명, 마오주의의 형성, 1949년 혁명 | 소우 미, 〈혁명에서 자본주의 복고까지〉(〈레프트 보이스〉) | 1949년 이후 중국을 비자본주의적 체제로 보고 이후 ‘자본주의 복고’를 설명하는 정통 트로츠키주의 계열의 시각 | 1923년 국공합작을 스탈린·부하린의 주도로 설명한 연대기, 농민의 압력을 당이 어떻게 흡수·통제했는지 빠뜨린 토지개혁 서술, 상하이 총파업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한정한 부정확성 | ||||
| 마오 시대, 문화혁명, 개혁개방기 | 랄프 루쿠스, 《자본주의로 가는 공산주의의 길》 | 1949년 이후 체제를 ‘사회주의’로 규정하고 개혁개방을 거쳐 자본주의로 이행했다고 설명 | ‘사회주의 시초축적’, ‘중국 사회주의의 마지막 단계’ 같은 표현. 축적 방식의 변화와 체제의 계급적 성격을 구분하지 못한 전환 서술 | ||||
| 문화혁명 조반파, 톈안먼 | 지한(吉漢), 〈1989년 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6·4운동에 관한 비주류적 서술〉 | 학생과 노동자의 ‘두 개의 운동’, 노동자의 ‘사회주의민주’ 추구 | 노동자 요구에 대한 과잉 해석, 국유기업 개혁 동기에 관한 추론 | ||||
| 1949년 혁명의 성격, 톈안먼 | 찰리 호어, 《천안문으로 가는 길》 | 국제사회주의 전통의 국가자본주의론 | 홍군 구성, 학생 지도부의 파업 반대와 무기 반납 서술 | ||||
이 문헌들은 저마다 가치 있는 사실과 통찰을 담고 있다. 그러나 1949년 이후 중국이 어떤 사회였는지에 관해 서로 다른 답을 제시한다. 그 차이를 설명하지 않고 긴 인용문을 이어 붙이면 각 문헌의 분석 틀까지 함께 들어오게 된다. 앞서 살펴봤듯, 농민의 압력이 토지개혁을 추동했다는 서술(소우 미)은 공산당이 독립적인 농민운동을 통제했다는 사실과 그 자체로 모순되지 않는다. 문제는 전진이 그 압력을 당이 어떻게 흡수·통제했고 그것이 어떤 국가 형성으로 귀결됐는지를 설명하지 않는 데 있다. 한편 ‘사회주의 시초축적’이나 ‘중국 사회주의의 마지막 단계’라는 서술(루쿠스)은 1949년부터 중국이 국가자본주의였다는 전진의 규정과 맞지 않는다. 전진은 루쿠스와의 차이에 대해서만 각주에서 짧게 선을 그을 뿐, 소우 미와 월터 돔의 분석 틀을 어떻게 평가하고 활용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전진은 교육 자료의 각주 43과 58에서 소련과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규정을 향후 다른 문서에서 체계적으로 논증하겠다고 밝힌다. 후속 논증을 약속한 점은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번 문서의 핵심 결론이 아직 충분한 자체 논증으로 뒷받침되지 못했다는 사실도 드러낸다.
10. 결론: 올바른 결론에 걸맞은 탄탄한 이론적 토대를 위하여
전진의 중국론은 올바른 결론에 도달했지만, 그 결론을 지탱할 탄탄한 이론적 토대는 아직 갖추지 못했다.
10-1. 종합 평가
중국과 북한은 사회주의가 아니며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본주의 국가다. 사회주의의 핵심은 국유화 자체가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민주적 권력이다. 사회주의자는 어느 강대국의 지배계급 편도 들어서는 안 되며, 중국·북한 노동자와 국제연대를 건설해야 한다. 전진의 이런 결론은 국제사회주의 전통의 국가자본주의론과 합치하며, 한국 좌파 안의 친중 진영론에 맞서는 데 필요한 입장이다. 문화혁명의 아래로부터의 흐름과 톈안먼 노동자운동을 복원한 서술도 이 전통의 분석을 보강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 결론에 이르는 논증은 불안정하다. 자본주의의 기준을 세계적 경쟁이 강제하는 자본 축적보다 착취와 비민주성이라는 지나치게 넓은 범주에 두고 있다. 그 결과 소련에 대해서는 ‘노동자 국가의 잔재’라는 설명을 끌어오고, 노동자 국가가 없었던 중국에 대해서는 ‘이식’이라는 말로 설명의 공백을 메우며, 체제 재편의 이유는 주로 ‘비효율’에서 찾는다. 1949년 혁명을 이끈 재산 없는 도시 중간계급과 지식인 중심의 당, 이들을 압박한 세계 체제의 경쟁, 그 결과가 트로츠키의 예측에 제기한 이론적 난제는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 개혁개방기에 대해서는 지배계급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도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체제의 본질적 단절처럼 서술해 변화와 연속성의 관계를 흐린다. 현대 중국에 대해서도 경제 모순, 노동운동의 역학, 민족 억압, 대만, 제국주의의 층위라는 핵심 쟁점이 비어 있거나 단순화돼 있다.
이 약점들은 서로 연결돼 있다. 세계적 경쟁이 강제하는 축적을 충분히 분석하지 않으니 중국 국가자본주의의 형성과 변화에 대한 설명이 ‘이식’이나 ‘비효율’에 머문다. 그 결과 개혁개방기의 변화를 설명할 때도 축적 방식의 재편과 체제의 계급적 성격을 구별하지 못한다. 국가와 자본의 융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으니 현대 중국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규정만 앞서고 근거는 빈약하다. 여기에 제국주의의 층위별 분석까지 빠지면서 서술은 ‘두 진영의 대칭적 대결’이라는 신냉전 서사에 가까워진다. 서로 다른 분석 틀의 문헌들을 충분한 검토 없이 이어 붙인 방법은 이런 균열을 더 벌린다.
10-2. 왜 이론적 토대가 중요한가
이론적 토대를 다시 다지지 않으면 전진의 올바른 결론도 조건이 바뀔 때 흔들릴 수 있다. 그 위험이 드러날 세 가지 경우를 살펴보자.
첫째, 중국 국가가 경제 위기 속에서 시장 통제를 강화하고 국유 부문을 확대하는 경우다. 시진핑 집권기에는 이미 그런 경향이 나타났다. 시장과 국가 소유의 비중 변화를 체제의 본질적 변화와 동일시하면, 이를 또 한 번의 체제 전환으로 읽거나 심지어 ‘사회주의로의 이행’으로 오인할 수 있다. 반면 경쟁적 축적을 기준으로 삼으면 국가 소유·통제의 확대가 곧 사회주의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 노동자 통제와 계급 권력의 변화가 없는 한 국가 소유·통제와 계획의 강화는 자본주의 경제 구조의 재편이며, 해외 경쟁자와 더 효과적으로 경쟁하려는 지배계급의 수단이다. 113
둘째, 대만 해협이나 한반도에서 군사 위기가 터지는 경우다. 제국주의의 층위를 구분하지 않고 두 강대국을 대칭적으로만 규정하면, 위기의 순간에 한국 사회주의자가 무엇에 우선 맞서야 하는지 충분한 판단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 필자가 강조한 세계적 비대칭, 지역적 격차 축소, 사안별 책임의 구분이 바로 이런 때 필요하다.
셋째, 중국에서 대규모 노동자 투쟁이나 민족 봉기가 일어나는 경우다. 중국 노동자를 ‘조직을 만들지 못한’ 수동적 존재로만 그리고 민족 문제를 추상적 원칙의 차원에서만 다룬다면, 그런 사태에 구체적으로 대응할 준비를 갖추기 어렵다. 홍콩 항쟁 때 한국 좌파 일부가 보인 혼란은 이 준비의 부족이 실천에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 준다.
10-3. 맺음말
국가자본주의론의 설득력은 결론을 도출하고 뒷받침하는 분석 방법에 있다. 중국이 자본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한국 좌파 안에서도 드문 주장이 아니다. 그러나 왜 자본주의인지, 어떤 사회 세력이 어떤 압력을 받아 그 체제를 만들었는지, 그 체제가 어떤 모순을 안고 어디로 가는지를 일관되게 설명하는 사례는 여전히 드물다. 세계 노동계급의 선진적 부분 가운데 상당수가 1920년대 말부터 1956년 헝가리 혁명 때까지 한 세대 동안 소련의 축적 필요에 정치적으로 묶여 있었던 것은, 10월 혁명의 권위가 그 혁명의 약속을 배신한 체제를 가려 줬기 때문이다. 114 오늘날 중국에 대한 환상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 환상에 맞서려면 올바른 결론을 되풀이하는 데서 나아가, 그 결론을 떠받치는 분석을 스스로 세워야 한다.
전진의 문서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지만, 올바른 결론만으로 이론적 공백이 메워지지는 않는다. 그 결론에 걸맞은 토대를 세우려면 앞서 지적한 분석의 약점들을 정면으로 해결해야 한다. 중국 노동계급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오늘, 마오주의가 우회했던 원칙, 곧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원칙을 정치적 선언에 그치지 않고 중국 사회의 형성과 모순, 저항을 설명하는 분석으로 구체화하는 것이 전진에 남은 과제다.
참고 문헌
평가 대상
- 돌멩, 〈[사회주의 기초학습 #7] 사회주의 바로알기: 중국,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 2025년 12월 17일.
전진 문서가 주로 인용한 문헌(본문 9 참조)
- Walter Daum, The Life and Death of Stalinism, 1990.
- Ralf Ruckus, The Communist Road to Capitalism: How Social Unrest and Containment Have Pushed China’s (R)evolution since 1949, PM Press, 2021(후주에서는 ‘루쿠스, 2021’로 표기).
- Ralf Ruckus, The Left in China: A Political Cartography, Pluto Press, 2023.
- Sou Mi, ‘From Revolution to Capitalist Restoration: 100 Years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Left Voice, 2021.
- 지한(吉漢), 〈1989년 천안문광장에서 벌어진 6·4운동에 관한 비주류적 서술〉, 2019.
- 찰리 호어, 《천안문으로 가는 길》, 책갈피, 2002.
비교 기준 문헌
- 나이절 해리스, 《마오쩌둥의 중국 국가자본주의》, 이정구 옮김, 책갈피, 2026[원서: Nigel Harris, The Mandate of Heaven: Marx and Mao in Modern China, Quartet Books, 1978; 재간본: Haymarket Books, 2015]. 이 글의 쪽수는 국역본 기준이다.
-
Charlie Hore, ‘China’s century?’, International Socialism 2:103, Summer 2004(ETOL 게재본).
-
이정구, 《당신이 알아야 할 현대 중국의 모든 것: 마르크스주의 관점》, 책갈피, 2023.
-
Adrian Budd, China: Rise, Repression and Resistance, Bookmarks Publications, 2024.
-
Adrian Budd, ‘China: Growing Pains for the Ruling Class – part one’, Rebel, 2025년 1월 8일(후주에서는 ‘Budd, 2025a’로 표기).
-
Adrian Budd, ‘China and the Imperialist World System’, Rebel, 2025년 3월 31일(후주에서는 ‘Budd, 2025b’로 표기).
-
최일붕, 〈마오쩌둥주의: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노동자 연대》 596호, 2026년 8월 25일.
-
Simon Gilbert, ‘Theorising China’s transition’(사이먼 길버트, 〈중국의 이행을 이론화하기〉), International Socialism 174, 2022년 4월 20일(후주에서는 ‘길버트, 2022’로 표기).
-
Rob Hoveman, ‘China’s state capitalism isn’t about semantics’, Socialist Worker 2845, 2023년 3월 9일(후주에서는 ‘호브먼, 2023’으로 표기).
본문에서 간접 인용한 문헌
-
Andrew G. Walder and Gong Xiaoxia, ‘Workers in the Tiananmen Protests: The Politics of the Beijing Workers’ Autonomous Federation’(버드와 전진 문서를 통해 인용).
-
Wu Yiching, The Cultural Revolution at the Margins(버드를 통해 인용).
-
어우룽위(区龙宇)의 중국 제국주의 규정(버드, 156쪽을 통해 인용).
-
레온 트로츠키, 〈중국의 농민전쟁과 프롤레타리아〉(1932), 〈6차 대회 이후의 중국 문제〉(1928).
쪽수 표기에 관해
해리스의 쪽수는 국역본(책갈피, 2026)을 따랐다. 버드의 책은 후주에서 ‘Budd’로 표기하고 영어판의 쪽수를 따랐다. 호어의 2004년 글은 웹 게재본이므로 쪽수 대신 절 제목을 가리켰다. 버드의 2025년 글 두 편도 웹 게재본이므로 쪽수 없이 ‘2025a’, ‘2025b’로 구분했다.
후주
- 이정구, 46쪽. ↩
- Budd, 30쪽. ↩
- 해리스, 129쪽 이하. ↩
- Budd, 31쪽. ↩
- 해리스, 435~437쪽. ↩
- 해리스, 437쪽. ↩
- Budd, 7쪽. ↩
- 이정구, 56쪽. ↩
- Budd, 22쪽. ↩
- 해리스, 453쪽. ↩
- Budd, 7, 14쪽. ↩
- 해리스, 450~451, 462쪽. ↩
- Budd, 26쪽. ↩
- Budd, 38쪽. ↩
- Budd, 32쪽. ↩
- Budd, 32쪽. ↩
- Budd, 32쪽. ↩
- 해리스, 440~442쪽. ↩
- Budd, 31쪽. ↩
- Budd, 37쪽. ↩
- Budd, 20쪽. ↩
- 이정구, 46~47쪽. ↩
- 이정구, 221쪽. ↩
- Budd, 18쪽. ↩
- 해리스, 460~461쪽. ↩
- 해리스, 462~463쪽. ↩
- 해리스, 463~465쪽. ↩
- 해리스, 433쪽. ↩
- 해리스, 446, 463~465쪽. ↩
- 해리스, 456쪽. ↩
- 이정구, 220~223쪽. ↩
- 이정구, 225쪽. ↩
- Budd, 21~22쪽. ↩
- Budd, 26쪽. ↩
- 해리스, 465쪽. ↩
- Budd, 17쪽. ↩
- 해리스, 64~66쪽. ↩
- 해리스, 465~466쪽. ↩
- 이정구, 29~30쪽. 1922년 8월 시후회의의 일시는 중공중앙당사화문헌연구원의 관련 당사 자료(2021년 4월 28일)와 대조했다. https://www.dswxyjy.org.cn/n1/2021/0428/c244516-32090464.html ↩
- 이정구, 37~38쪽. ↩
- 이정구, 31쪽. ↩
- 이정구, 31~32쪽. ↩
- Budd, 25쪽. ↩
- 이정구, 51~52쪽. ↩
- 해리스, 186~187쪽. ↩
- Budd, 23쪽. ↩
- 이정구, 56쪽. ↩
-
Budd, 27쪽. 생산 목표의 상향 과정은 해리스 영문판 4장 “The Great Leap Forward, 1958–1965”도
참조. https://www.marxists.de/china/harris/04-gtleap.htm ↩ - Budd, 27쪽. ↩
- 해리스, 472쪽. ↩
- 해리스, 472~473쪽. ↩
- 해리스, 471~472쪽. ↩
- 해리스, 468~469쪽. ↩
- 해리스, 470쪽. ↩
- Budd, 29쪽. ↩
- Budd, 30쪽. ↩
- 해리스, 128쪽. ↩
- 해리스, 127~128쪽. ↩
- 해리스, 125쪽. ↩
- 해리스, 129쪽. ↩
- 이정구, 57쪽. ↩
- Budd, 9쪽. ↩
- Budd, 2쪽. ↩
- Budd, 2~3쪽. ↩
- Budd, 3~4쪽. ↩
- Budd, 33쪽. ↩
- 해리스, 439쪽. ↩
- Budd, 2쪽. ↩
- Budd, 156쪽. ↩
- 이정구, 9장. ↩
-
사이먼 길버트, 〈중국의 이행을 이론화하기〉(《자본주의로 가는 공산주의의 길》 서평), International
Socialism 174호, 2022년 4월 20일. 이하 ‘길버트, 2022’로 표기한다. ↩ - 루쿠스, 2021, 8, 26, 28, 34, 42쪽(길버트, 2022를 통해 인용). ↩
- 루쿠스, 2021, 171쪽(길버트, 2022를 통해 인용). ↩
-
로브 호브먼, ‘The Left
in China by Ralf Ruckus review: saying China’s state capitalism isn’t about
semantics’, Socialist Worker 2845호, 2023년 3월 9일. 이하 ‘호브먼, 2023’으로
표기한다. ↩ -
길버트, 2022. 루쿠스,
2021, 181쪽 참조. ↩ - 호브먼, 2023. ↩
- 호브먼, 2023. ↩
- 길버트, 2022. ↩
-
전진 문서, 각주 46~48,
50~53(소우 미, 〈혁명에서 자본주의 복고까지: 중국공산당 100년〉). ↩ -
전진 문서, 각주 49(해럴드
로버트 아이작, 《중국 혁명의 비극》, 7~10장). ↩ - 전진 문서, 각주 55 이하(Ralf Ruckus, The Communist Road to Capitalism). ↩
- Budd, 37~38쪽. ↩
-
Budd, 8~9쪽. 1989~1992년의 경제 변화는 찰리 호어, 2004, “China’s resurgence after 1992” 절 참조.
1992년 외국인 직접투자의 비교는 실제 유입액이 아닌 계약액 기준이다. 중국 국가통계국, 《중국통계연감 2008》, 표 17-14; USITC, International Economic Review, 1994년 7월, 12쪽 참조.
https://www.stats.gov.cn/sj/ndsj/2008/html/R1714e.htm;
https://www.usitc.gov/publications/ier/ier_1994_07.pdf ↩ - Budd, 33~34쪽. ↩
- Budd, 35쪽. ↩
- Budd, 36쪽. ↩
- Budd, 35쪽. ↩
- Budd, 36쪽. ↩
- Budd, 12쪽. ↩
- Budd, 3, 9쪽. ↩
- Budd, 11쪽. ↩
- Budd, 2025a. ↩
- 이정구, 139~141쪽. ↩
- Budd, 뒤표지. ↩
- Budd, 2025a. ↩
-
Budd, 115~116쪽. 전진의 서술에는 사실관계 오류도 있다. 전진은 제이식 투쟁이 2017년에 일어났다고 쓰지만, 선전의 제이식 테크놀로지 투쟁은 2018년 7월에 벌어졌다. 2017년 11월
광저우에서 노동자들과 연계를 맺은 학생들이 체포된 사건과 혼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2022년 폭스콘
봉기가 일어난 곳도 ‘장저우’가 아니라 허난성 정저우다. 25만 명이 일하던 아이폰 생산 단지에서 코로나19 사망자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자 수천 명의 이주노동자가 집단 탈출했다. 보너스 지급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대체 인력으로
투입된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경찰이 이를 진압했다.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빈부 격차가 큰 나라라는 서술도 과장이다. 버드는 중국을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기술한다. 2010년 상위 1퍼센트 가구가
전체 부의 41.4퍼센트를 소유해 미국(40퍼센트)보다 약간 높았고, 공식 지니계수는
1978년 0.2 미만에서 2008년 0.5 가까이로 높아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브라질처럼 지니계수가
더 높은 나라들이 있다. 중국의 불평등을 고발하는 데 ‘세계
최대’라는 과장은 필요 없다. 과장은 오히려 논적에게 반박의
빌미를 줄 뿐이다. ↩ - Budd, 2025a. ↩
- Budd, 5쪽. ↩
- Budd, 2025a. ↩
- 이정구, 163~164쪽. ↩
- 이정구, 163~165쪽. ↩
- Budd, 183~186쪽. ↩
- Budd, 2025b. ↩
- Budd, 4, 154~155쪽. ↩
- Budd, 156쪽. ↩
-
Budd, 2025b. 대출의 담보 방식은 Anna Gelpern 외, How China Lends: A Rare Look into 100 Debt Contracts with Foreign
Governments, 2021, 3.2절(https://docs.aiddata.org/reports/how-china-lends.html)과 AidData, How China Collateralizes,
2025(https://www.aiddata.org/publications/how-china-collateralizes)도 참조. 이 연구들이 주로 확인한 것은 자원 자체의 소유권 이전이 아니라 수출대금과 채권자 통제 계좌를 통한 상환 보장이다. ↩ - Budd, 156쪽. ↩
- Budd, 153쪽. ↩
- Budd, 2025b. ↩
- Budd, 188~189쪽. ↩
- Budd, 189쪽. ↩
- Budd, 2025b. ↩
- 해리스, 441~442쪽. ↩
- 해리스, 45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