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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주의: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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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주의는 20세기 후반 세계 좌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치 이데올로기의 하나였고, 오늘날에도 여러 형태로 되살아나고 있다. 중국의 부상이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국면에서 중국을 어떤 사회로 볼 것인가 하는 물음은 다시 실질적 쟁점이 됐다. 그리고 그 물음은 필연적으로 1949년 혁명의 성격과 마오 시대의 유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돌아간다.
이 글의 논지는 세 가지다. 첫째, 마오쩌둥주의는 중국 농촌 현실이 자연스럽게 낳은 사상이 아니라 1925~1927년 혁명의 패배와 스탈린주의 노선의 실패라는 조건 위에서 형성된 스탈린주의의 중국적 변형이다. 둘째, 1949년 혁명은 분명한 혁명이었으나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 지식인 지도부가 농민군을 동원해 수행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혁명이었다. 셋째, 그 혁명이 낳은 사회는 사회주의도, 노동자 국가의 변형태도 아닌 관료 지배 국가자본주의였으며, 덩샤오핑 이후의 시장 지향 개혁은 이 체제의 단절이 아니라 축적 방식의 전환이었다.
1. 마오주의의 형성: 1921~1949년
1927년의 패배와 노선의 재편
1921년 코민테른 대표 마링(본명 헹크 스네블리트, 네덜란드인)의 지도로 창립된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는 천두슈(陳獨秀), 취추바이(瞿秋白), 리리싼(李立三), 왕밍(王明=천사오위), 친방셴(秦邦憲=보구)을 거쳐 마오쩌둥(毛澤東)과 류사오치(劉少奇)로 이어졌다. 왕밍과 친방셴에서 마오쩌둥에 이르는 노선은 한마디로 스탈린주의화라고 할 수 있다. 마오주의는 일국사회주의, 즉 실제로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러시아보다 낙후한 중국 현실에 맞게 변형한 결과물이었다.
이 변형의 출발점은 1925~1927년 혁명의 패배다. 그 시기 중국에서는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혁명 운동이 특히 남동부에서 전개됐다. 1925년 5월 상하이에서 영국이 시위대를 학살하자 분노가 폭발했고, 외국 기업에 맞선 파업과 영국 지배하 홍콩의 1년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농촌에서는 농민이 지주와 고리대금업자에 맞섰고 도시에서는 노동조합이 급성장했다. 1926년에는 노동자 시민군이 몇몇 도시의 거리를 장악할 만큼 운동이 발전했다.
그러자 국민당은 1927년 4월 상하이에서 노동자들에게 총부리를 돌려 수만 명을 학살하고 노동자 조직을 파괴했다. 스탈린은 장제스의 공산당원 학살 직전까지도 그와 국민당을 ‘견인’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운동을 파괴한 것은 국민당의 총칼이었지만, 노동자들을 그 총칼 앞에 무장 해제된 채로 세워 둔 것은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전략이었다. 제1차 국공합작(1924~1927) 당시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이 독자 정당으로서 국민당과 공동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원 개개인이 국민당에 가입하도록 강요했다. 이는 ‘당내 (국공)합작’이라는 개념으로 정당화됐다. 마링은 국민당을 부르주아 정당이 아닌 여러 계급의 연합 정당이라고 주장했고, 스탈린과 부하린은 민족 부르주아지와 이에 기반을 둔 국민당의 반제국주의적 역할을 과대평가했다. 장제스의 쿠데타 이후에도 코민테른은 우한(武漢)의 왕징웨이(汪精衛) 국민당 좌파 정부와 동맹을 맺었다가 또다시 배신당했다.
트로츠키는 1926년 공산당이 국민당과 결별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식민지 억압이 민족 부르주아지의 혁명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며,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서 탈퇴해 노동계급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트로츠키의 비판은 국민당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분석에 근거했다. 1 1927년 4월 3일에 쓴 〈중국 혁명에서의 계급 관계〉에서 그는 코민테른 기관지가 “문제 중의 문제”로 국민당의 향방을 꼽은 것을 두고, 수백만 노동자를 노동조합과 공산당의 깃발 아래 각성시키고 단결시키는 과제를 밀쳐낸 의회주의적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국민당 당원 30만 명이라는 숫자도 과거의 계급투쟁 경험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라 상층에서 개별적으로 끌어모은 결과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보기에 국민당은 여러 계급의 연합체가 아니라, 중간계급 지식인들을 매개로 대중 운동을 노골적 부르주아 지도부에 정치적으로 복속시키는 기구였다.
여기서 트로츠키는 인상적인 비유를 남겼다. 지금 형태의 국민당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맺어진 ‘불평등조약’의 구현물이며, 중국 혁명이 제국주의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의 폐기를 요구한다면 중국 노동계급도 자국 부르주아지와 맺은 불평등조약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산당의 국민당 탈퇴는 협력의 중단이 아니라 예속의 중단이었다. 정치적 협력은 대등한 양측의 합의를 전제하지만 중국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조직적 봉인까지 찍힌 채 프티부르주아지의 지도에 복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글에서 그는 홍콩 총파업이 이미 소비에트에 가까운 조직을 낳았다는 점을 근거로, 상하이 노동자들이 전 중국의 본보기가 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평의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뒷날 마오주의가 결코 채택하지 않은 바로 그 요구다.
가장 비극적인 희생자는 천두슈였다. 그는 1925년 10월부터 당내 합작에 반대하며 여러 차례 국민당 탈퇴를 요구했으나, 코민테른의 권위에 눌려 방침을 집행했다. 결국 혁명이 패배하자 모든 책임은 그에게 돌아갔다. 훗날 마오파가 채택한 ‘몇 가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는 1927년 혁명 패배의 책임을 스탈린과 코민테른이 아닌 천두슈에게 돌렸고, 이어 취추바이·리리싼·왕밍·친방셴의 노선을 잇달아 ‘좌익’ 모험주의로 규정했다. 이 비판은 일부 타당하지만 핵심적인 왜곡을 담고 있다. 천두슈의 노선과 이후의 맹동적 모험주의 노선 모두 근본적으로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형성됐음에도, 그 책임을 중국 지도자들에게 전가했기 때문이다.
1927년 패배 이후에는 반대 방향의 오류가 나타났다. 혁명 정세가 퇴조하는 상황에서도 코민테른 대표 로미나제와 취추바이 지도부는 정세가 계속 고양된다고 오판해 무리한 봉기 정책을 추진했다. 1927년 12월 광저우 폭동은 대중에게서 고립된 모험주의의 극단적 사례였다. 이어 리리싼은 1930년 전국적 혁명 고양과 중심 도시의 즉각적 봉기, 홍군의 도시 공격을 촉구했고, 왕밍과 친방셴도 코민테른의 ‘제3기’론과 ‘사회파시즘’론의 영향을 받아 유사한 초좌파적 노선을 고수했다. 1928~1934년 코민테른은 자본주의 위기가 혁명의 길을 필연적으로 연다고 보고 사회민주주의를 파시즘의 일종으로 규정해 공동전선을 거부했는데, 이 노선이 중국에도 그대로 투사됐다. 따라서 현지 지도자들의 책임을 인정하더라도, 이들을 임명하고 총노선을 지시한 모스크바의 책임을 가리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다. 실제로 중국공산당이 1920~1940년대 오류 중 일부에 스탈린의 영향이 있었음을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한 것은 한참 뒤 중·소 논쟁이 벌어진 이후였다.
트로츠키는 광저우 폭동을 단순한 전술적 실책으로 보지 않았다. 1928년에 쓴 〈광저우 봉기〉에서 그는 이 폭동이 1925~1927년의 기회주의 정책 전체에 대한 반작용이며, 그 정책을 결산하거나 공개적으로 재평가하지 않은 채, 위에서 전술 노선을 급전환하라는 군대식 명령만 내린 데서 비롯한 필연적 귀결이라고 분석했다. 폭동주의는 기회주의의 반대물이 아니라 그 짝이었던 것이다. 그는 봉기를 지도부가 위신을 구하려고 벌인 모험으로 규정하면서도, 봉기에 나선 노동자들의 영웅적 행동과 그들이 세운 단명한 소비에트의 계급적 내용은 진지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회주의자가 광저우를 ‘모험’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봉기였기 때문이고, 볼셰비키가 같은 말을 쓰는 것은 그것이 때 이른 봉기였기 때문이라는 지적이었다.
마오파의 공식 역사 서술은 이 모든 실패를 중국공산당 내부의 ‘기회주의자’들에게 전가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왕밍과 친방셴은 리리싼을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의 ‘좌익’ 모험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답습했다. 국민당 좌파계 조직을 비롯한 중간 세력을 ‘가장 위험한 적’으로 규정한 탓에 1933년 푸젠사변(福建事變) 2 당시 국민당 좌파의 반(反)장제스 정부와 제휴하지 않은 것도 그 결과였다.
다만 리리싼이 마오의 농촌 중심 전략을 ‘농민적 심성’의 산물이라고 비판한 것이 과연 단순한 중상이었는지는 따져볼 문제다. 리리싼은 농민이 당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해 당이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잃고 있다고 우려했고, 산업 도시와 산업 지대를 장악하지 않은 채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마오파는 이를 “극좌주의”라고 비판했으나, 오히려 도시 노동계급을 중심에 둔 리리싼의 문제의식 자체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정설이었다. 리리싼의 오류는 도시와 노동자 중심주의가 아니라, 코민테른의 초좌파적 방침을 혁명 퇴조기의 중국에 기계적으로 적용한 데 있었다.
1927년 패배 이후 더 적절한 방침을 제시한 쪽은 천두슈와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혁명이 퇴조한 과도기에 무모한 봉기를 피하고 국민회의, 3 8시간 노동, 토지 몰수, 완전한 민족 독립 같은 민주주의적 요구를 내걸어 당세를 회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에 따라 중국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 혁명 수행 능력을 상실했으므로 노동계급이 민주주의적 과업까지 떠맡아야 하며, 농민전쟁도 도시 노동계급의 투쟁과 결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주장은 혁명 퇴조를 인정하고 모험주의를 배격하며 노동계급의 독립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당시 가장 적절한 마르크스주의적 대안이었다. 천두슈파가 제시한 대안의 또 다른 특징은 당내 민주주의를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혁명 패배의 원인을 관료주의와 연결해 파악하며 코민테른의 지령을 무비판적으로 집행하는 당 조직 구조를 비판했다.
이 대안의 골격은 트로츠키가 1928년 10월에 쓴 〈6차 대회 이후의 중국 문제〉에 정리돼 있다. 그는 혁명이 퇴조하고 부르주아지가 국민회의를 통해 군벌들을 길들이며 외국 자본과 거래할 대표 기구를 마련하려는 국면에서, 공산당이 ‘어차피 새 고양기가 오면 소비에트를 세울 것이니 그때까지 국민회의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피상적이고 공허하며 수동적이라고 비판했다. 공산당은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로 구성되는 전권을 지닌 제헌의회의 소집을 요구하되, 그런 의회가 실제로 소집될지 의심스럽고 설령 소집되더라도 물리력이 국민당 장군들의 손에 있는 한 무력하리라는 점을 대중에게 함께 설명해야 한다고 했다. 바로 여기서 노동자·농민의 무장이라는 슬로건을 새롭게 제기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국민회의 슬로건이 8시간 노동, 토지 몰수, 중국의 완전한 민족 독립과 하나로 묶여야 한다고 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 슬로건들을 시의적절하게 결합해야만 공산당이 지하 상태에서 빠져나와 대중과 결합하고 신뢰를 얻어 소비에트 건설과 직접적 권력 투쟁의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어제까지 4계급 블록을 설교하고 파업 대신 중재위원회를 권하고 소비에트 건설을 금지했던 자들이 이제 와서 이 요구를 ‘입헌주의적 환상’이자 ‘사회민주주의적 일탈’이라고 매도하리라고 미리 경고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다. 4년 뒤 왕밍은 대중운동의 재건, 국민회의 소집, 소련과의 국교 재개라는 좌익반대파의 슬로건을 근거로 이들을 “반혁명적 트로츠키-천두슈 집단”이라고 불렀다.
트로츠키는 장시 ‘소비에트’ 4 와 홍군이 성장하던 시기에도 무장 농민 부대와 프롤레타리아 전위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수천, 수만의 혁명가가 농민전쟁을 지휘한다고 해서 그 조직이 곧 노동계급의 당이 되는 것은 아니며 도시 노동계급의 실제 지지와 조직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경고는 1932년 9월 22일 중국 좌익반대파에 보낸 편지 〈중국의 농민전쟁과 프롤레타리아〉에 가장 명료하게 정리돼 있다. 트로츠키는 먼저 자신의 비판을 농민 운동에 대한 무관심과 구별했다. 좌익반대파는 이미 2년 전 선언에서 농민 반란의 거대한 물결이 산업 중심지의 정치 투쟁을 되살리는 자극이 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었다. 다만 그는 곧바로 물음을 던졌다. 농민군이 승리를 거듭해 도시와 산업 중심지로 진입하면 노동계급과 대면하게 될 텐데, 그 만남의 성격이 반드시 평화롭고 우호적이겠는가?
그는 러시아 내전의 경험을 근거로 들었다. 농민 유격대는 백군의 후방에서 싸우는 동안에는 혁명에 복무했고 일부는 비범한 영웅성을 보였다. 그러나 도시에 들어온 뒤에는 노동자 및 현지 당 조직과 충돌하는 일이 잦았고 때로는 극히 첨예한 형태를 띠었다. 충돌의 뿌리는 우발적 사건이나 개인의 실책이 아니라 계급적 처지와 훈련의 차이에 있었다. 노동자는 착취자에게서 빼앗은 재산을 사회화하려 하지만 농민은 그것을 나누려 하고, 노동자는 문제를 전국적 규모에서 계획적으로 풀려 하지만 농민은 모든 것을 지역적 규모에서 바라보며 중앙집권적 계획에 적대적이라는 것이다. 농민도 사회주의적 관점으로 올라설 수 있지만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정권 아래에서 수년, 수십 년이 걸리는 재교육의 문제였다.
지휘부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해소하지 못한다. 개별 공산주의자가 군대를 지휘한다고 해서 그 군대의 사회적 성격이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다. 트로츠키가 보기에 홍군 지휘관 중 상당수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학교를 거치지 않은 탈계급화된 지식인·반(半)지식인이었고, 몇 해 동안 유격대 사령관과 정치위원으로 살면서 자기 환경의 정신을 흡수했다. 병사 대다수는 진심으로 공산주의자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혁명적 빈민이거나 혁명적 소생산자로 남아 있는 농민이었다. 정치에서 사회적 사실이 아니라 명칭과 딱지로 판단하는 자는 길을 잃는다는 것, 더구나 그 정치가 무기를 손에 들고 수행될 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이 그의 경고였다.
여기서 그는 러시아와 중국의 결정적 차이를 짚었다. 러시아 내전기에는 이미 나라의 대부분에서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쥐고 있었고, 단련된 당이 투쟁을 지도했으며, 중앙집권적 붉은 군대의 지휘 기구 전체가 노동자들의 손에 있었다. 그런데도 유격대와의 충돌이 벌어졌다. 반면 중국에서는 어디에도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없었고 노동조합은 약했으며 노동자 사이에서 당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그런데도 농민 부대는 스스로를 ‘홍군’이라 부르며 소비에트의 무장력과 동일시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혁명적 농민층은 그 지배 계층을 통해, 사물의 본성상 중국 노동자에게 속해야 할 정치적·도덕적 자산을 미리 전유해 버린 셈이었다. 트로츠키는 사소해 보이는 사실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승리한 군대의 참모부와 관청은 노동자의 오두막이 아니라 그 도시에서 가장 좋은 건물, 즉 부르주아지의 저택과 아파트에 들어선다. 이는 농민군 상층이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교양 있는’ 계층의 일부로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론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농민층의 이중성을 잊는 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농민 운동은 대지주와 군벌, 고리대금업자를 겨냥하는 한 강력한 혁명적 요인이지만, 그 안에는 강력한 소유자적·반동적 경향이 있어 어느 단계에서는 이미 무장한 채로 노동자에게 적대적으로 돌아설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전망에 관한 것이다. 옛 중국에서 농민 혁명의 승리는 언제나 새 왕조의 창건과 새로운 대지주 집단의 형성으로 귀결됐고, 운동은 악순환에 갇혔다. 트로츠키는 오늘날의 조건에서도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직접적 지도가 없는 농민전쟁은 아무리 완전한 승리를 거둬도 권력을 새로운 부르주아 집단, 이런저런 ‘좌파’ 국민당이나 ‘제3당’ 따위에 넘겨줄 뿐이며, 그것은 실천적으로 장제스의 국민당과 별로 다르지 않으리라고 내다봤다.
편지의 후기에서 그는 더 나아간 가정도 내놓았다. 좌익반대파가 산업 노동자 사이에서 우세한 영향력을 얻은 상태에서 농민군이 도시를 점령하는 순간이 온다면, 스탈린주의자들은 무장한 농민을 ‘반혁명적 트로츠키주의자’인 선진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으로 맞세우리라는 것이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노동자를 잃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병영을 공장에 맞세운 것과 같은 논리라는 지적이었다. 다만 그는 이런 비극적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가 제시한 과제는 농민군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전쟁의 거대한 혁명적·민주적 의의를 인정하면서 농민 조직과 군사적 동맹을 맺되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독립성과 지도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10월 3일 베이징의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 〈사변이 아니라 행동의 전략〉에서는 ‘소비에트’라는 명칭 자체를 문제 삼았다. 중국의 소비에트 권력은 본질적으로 농촌적이고 주변부적이며 산업 프롤레타리아 안에 아직 아무런 거점도 두지 못했다. 그는 이 권력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할수록 그만큼 덜 소비에트적이라고 못 박았다. 러시아에서도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같은 산업 중심지에서는 소비에트 권력이 1917년 11월 이래 굳건히 유지된 반면, 광대한 주변부에서는 외국의 간섭뿐 아니라 내부 반란 탓에 그 권력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사실을 그는 상기시켰다. 농민 반란자들이 자기 조직을 소비에트라고 부르는 것을 굳이 막을 이유는 없지만 그 말에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에서 좌익반대파가 패배하고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도 천두슈파가 제명·탄압받으면서 트로츠키의 대안은 힘을 잃었다. 이 대안의 좌절은 이후 중국공산당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농촌으로의 선회는 옳았는가?
코민테른의 잇따른 실패는 중국공산당의 도시 노동계급 기반을 무너뜨렸다. 1926년 말 당원의 약 66퍼센트가 노동자였으나, 1928년에는 10퍼센트, 1929년에는 3퍼센트, 1930년 말에는 거의 0퍼센트가 됐다. 살아남은 당원들은 농촌으로 이동했고, 공산당은 점차 농민을 기반으로 삼고 도시 출신 지식인이 지도하는 군사·정치 조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노선 선회를 중국이 농업국이었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는 없다. 중국의 낙후성과 광활한 영토가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중국공산당은 도시 노동자 운동을 통해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상하이와 광저우 등지에서 일어난 파업과 노동조합 운동은 당의 사회적 기반을 넓혔다. 만약 이 기반이 1927년 국민당의 탄압과 뒤이은 무리한 봉기 정책으로 파괴되지 않았다면, 농민 게릴라가 당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즉, 마오주의의 부상은 중국 농촌의 필연적 산물이라기보다, 혁명의 패배와 스탈린주의 정책의 실패라는 조건 위에서 마오파가 내린 주체적 선택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비춰 보면 그릇된 선택이었다. 도시 노동운동이 무너진 공백을 틈타 농촌에 기반을 둔 마오파가 부상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스탈린의 실패가 마오의 성공을 이끈 셈이다.
마오쩌둥의 부상은 독자성이라는 점에서도 이전 지도자들과 달랐다. 천두슈 이후의 지도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모두 모스크바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아 부상했다. 반면 마오쩌둥은 징강산(井岡山)과 장시(江西)에서 농민 게릴라군을 조직하고 군사적 전과를 올리며 실질적 권력을 축적했다. 1935년 쭌이회의(遵義會議)에서 마오쩌둥은 군사 실패의 책임을 물어 친소련 성향의 왕밍·친방셴 계열을 축출했다. 이 회의는 중국공산당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 회의를 통해 마오쩌둥이 당과 군대의 실권을 장악했고, 왕밍과 친방셴의 ‘코민테른 정통 노선’은 완전히 몰락했다. 모스크바의 승인은 기정사실에 대한 사후 묵인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마가린[유사품] 공산주의자”라거나, 겉은 붉은색(공산주의자)이지만 속은 하얀색(보수반동)이라는 뜻으로 “붉은 무[서양 래디시] 공산주의자”라 조롱하며 장제스 정부를 중국의 유일 합법 정부로 보기도 했다.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서 임명한 지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1949년 직전까지 중국공산당의 승리 가능성을 의심한 이유는 개인적 불신을 넘어, 노동계급 기반이 없는 농민 비정규 부대들이 중국 전역을 장악할 수 있을지에 관한 근본적 회의감과 연결돼 있었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는 멘셰비즘이든 스탈린주의든 2단계 혁명론에서조차 도시 노동계급이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반면 마오의 노선은 농촌과 농민을 중심으로 도시를 포위해 최종 점령하는 전략이었다.
항일전쟁과 1949년
일본의 중국 침략은 중국공산당이 대규모 세력으로 재도약할 기회를 제공했다. 공산당은 항일 투쟁을 통해 대중의 신망을 얻었고, 국민당과의 제2차 국공합작 속에서도 독자적인 군대와 근거지를 유지했다. 전쟁 말기에 이르러 공산당의 군대는 중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며 광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반면 국민당은 극심한 부패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무능한 전쟁 수행 탓에 군대뿐 아니라 도시 중간계급과 노동자의 지지마저 잃었다. 장정을 거치며 공산당의 성격 변화는 확고해졌고, 마오쩌둥은 지주와 군벌을 상대하는 전술적 능력과 농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지도권을 확립했다. 결국 대륙에서 패퇴한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패주해 미국의 지원을 받는 권위주의 체제를 수십 년간 이어갔다.
이 시기 트로츠키의 태도는 1937년 9월 23일 디에고 리베라에게 보낸 편지 〈중일전쟁에 관해〉에 명확하게 표현돼 있다. 그는 일본의 전쟁은 제국주의적이고 반동적이며 중국의 전쟁은 해방적이고 진보적이라고 못 박았다. 중국 노동자 조직의 의무는 자신의 강령과 독자적 활동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대일 전쟁의 최전선에서 적극적으로 싸우는 것이라고 했다. 중국 군대와 일본 군대 양쪽에 똑같이 맞서야 한다는 초좌파적 ‘혁명적 패배주의’는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를 구별하라는 레닌의 가르침을 희화화해 제국주의자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장제스에 대해서는 어떤 환상도 갖지 않아야 함을 전제했다. 장제스는 중국 노동자와 농민의 처형자이고 내일 다시 배신할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오늘은 어쨌든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파업의 비유를 들었다. 지도부가 직업적 배신자라는 이유로 파업에 불참하는 노동자는 파업 파괴자일 뿐이다. 나아가 그는 1925~1927년에도 공산당과 국민당의 군사적 블록 자체를 반대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먼저 제안했다고 밝혔다. 반대한 것은 공산당이 정치적·조직적 독립성을 잃고 국민당에 녹아드는 것이었다. 군사적 전선의 맨 앞에 서면서 동시에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타도를 준비한다는 원칙은 1937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사적 협력과 정치적 융합을 예리하게 가르는 이 구별은 제2차 국공합작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마오는 제1차 합작 때와 달리 군대와 당의 조직적 독자성을 지켰다는 점에서 스탈린의 지시보다 나았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이익을 항일전쟁의 이익에 종속시키고 민족 부르주아지를 ‘인민’의 일부로 편입한 것은 정확히 정치적 독립성의 포기였다. 조직의 독자성은 지켰으나 계급적 독자성은 지키지 않은 것이다. 뒤에서 보듯 이 차이는 1949년 이후 노동계급이 새 국가에서 차지한 위치를 결정했다.
1949년 권력 장악은 분명 혁명이었다. 지주와 군벌, 국민당의 지배가 무너졌고 제국주의 열강의 직접적 지배도 종식됐다. 그러나 이는 노동계급이 평의회와 독자적 조직을 통해 국가 권력을 장악한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 인민해방군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공산당 지도부는 노동자들에게 공장 점거나 독자 행동을 금하고 직장에 남아 생산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새 정권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보다는 국가 통일과 민족 독립, 급속한 경제·군사적 발전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2. 마오주의의 이론 구조
마오쩌둥은 오랫동안 당의 핵심 지도자가 아니었다. 1920년대에는 여러 차례 지도부에서 밀려났고, 장시 ‘소비에트’ 시기에도 보구(친방셴)와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이 실권을 쥐었다. 마오의 권력은 1935년 쭌이회의를 기점으로 본격화됐고, 장정 과정에서 장궈타오(張國燾) 5 와의 노선 투쟁을 거치며 확립됐다. 이후 옌안 시기와 1942년 정풍 운동을 거치며 지도권은 더욱 강화됐으며, 1945년 제7차 당대회에서 ‘마오쩌둥 사상’이 공식 지도 이념으로 격상됐다.
그러나 오늘날 스스로를 마오주의자라 부르는 단체 대부분은 마오쩌둥의 사상이 제대로 실현되기도 전에 중국 지도자들에게 배신당했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공산당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네팔 제헌의회 선거에서 마오주의 정당이 제1당으로 떠오른 직후인 2008년 4월, 중국 지도부는 네팔 상황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네팔의 마오주의 세력이 군주제를 흔들어 서방 경제 우방국들과 중국의 관계가 틀어질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국 밖의 마오주의자 대다수는 중국 정부의 마오주의 재해석을 마오 사후 권력이 택한 ‘자본주의 노선’을 이념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처럼 마오주의라는 이름은 오늘날에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계승되므로, 그 이름을 내건 운동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마오주의의 특징을 규정하는 이론과 전략을 따져봐야 한다. 아래에서는 마오주의를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 구별 짓는 핵심 특징들을 살펴본다.
농민 주체 혁명론
마오는 1927년 《후난 농민운동 시찰보고》에서 민주주의 혁명 승리의 공적을 10으로 친다면 농민의 몫이 7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도시 노동계급의 역할은 극히 낮게 평가됐다. 그의 전략은 농촌에 유격전(게릴라전)을 벌일 무장 근거지를 구축하고, 농민군으로 도시를 포위해 최종 점령하는 것이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도시 노동계급을 혁명의 주된 동력으로 봤으나, 마오는 농민을 핵심 혁명 세력으로 삼았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지식”과 지도력을 갖춘 공산당이 농민을 동원할 수 있다고 여겼다. 1920~1930년대 중국공산당의 농촌 무장투쟁이 그 본보기이며, 이는 결국 1940년대 후반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다.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히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행보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레닌에게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이며, 공산당은 그 전위 부대다. 농민은 민주주의 혁명의 중요 동맹군일 수는 있어도 사회주의 혁명의 주역은 아니다. 따라서 당이 스스로 노동계급을 대표한다고 선언하더라도 노동계급과의 실질적 유대와 유기적 관계가 없다면 노동계급 정당이라 부를 수 없다. 중국공산당은 1927년 이후 노동자 기반을 거의 잃었고, 마오 주도 시기에는 의식적으로 농민과 농민군을 당의 기반으로 삼았다.
당의 사회적 구성이 이를 뒷받침한다. 1956년 중국공산당 당원 중 농민은 약 69퍼센트, 노동자는 14퍼센트였다. 1957년에도 노동자 당원 수는 지식인 당원 수보다 적었다. 당원 수의 추이도 이러한 변화를 보여 준다. 1921년 창당 당시 57명에 불과했던 당원 수는 1927년 4월 장제스 쿠데타 직전 약 5만 8000명까지 급속히 늘었으나 이후 탄압으로 급감했다. 장시 ‘소비에트’ 전성기에는 약 30만 명에 달했으나 1937년 항일전쟁 개전 무렵에는 약 4만 명으로 줄었고, 1945년 121만 명, 1949년에는 440만 명 이상으로 급증했다. 이러한 폭발적 성장의 주축은 산업 노동자가 아닌 농민과 농민군이었으며, 1950년대에도 이 구성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오늘날 많은 포퓰리스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혁명기를 거치며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공산당이 농민을 “무시하게 됐다”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자가 도시 노동계급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봤다. 노동자는 착취와 구조적 차별에 집단으로 맞서며 집단적 의식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반면 농민은 대체로 토지 소유 요구를 중심으로 개인주의적 대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노동자를 낭만적·낙관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가 노동과 투쟁을 집단으로 경험하며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주체로 성장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투쟁이 반드시 도시 산업 중심지에서만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혁명적 정당의 역할 중 하나는 노동계급을 이러한 투쟁으로 이끄는 데 있다.
마오의 농민 주체론이 농민의 중요성을 강조한 여타 논의와 다르다는 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레닌도 후진국에서 농민이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며 민주주의 혁명에서 결정적인 동맹군이 될 수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농촌은 도시와 동등할 수 없다”라며 어느 도시 계급이 농촌을 이끌 것인가를 핵심 문제로 봤다. 마오에게서는 이 관계가 사실상 전도됐다. 도시 노동자 운동이 와해된 상황에서 당이 농촌으로 가 농민군을 조직하고, 그 농민군이 도시를 점령하면 이를 ‘노동계급의 지도’라고 불렀다. 결국 당 자체를 노동계급의 실제 참여와 동일시한 셈이다. 이러한 대리주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천명한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원칙에서 크게 벗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공산당을 농민 정당으로 규정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보다는 민족 독립, 지주제 폐지, 급속한 산업화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업을 수행하려는 스탈린주의적 지식인들을 지도부로 삼고, 농민군을 대중적 기반으로 삼은 정당으로 규정하는 것이 정확하다.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동맹
농민 주체 혁명론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920년대 중국 공산주의 운동은 ‘진보적’ 자본가들과 동맹해 민족해방을 이룬다는 전략을 추진했다. 1925~1927년 중국 혁명이 패배하는 과정에서 이 ‘진보적’ 자본가들은 배신해 중국 노동계급을 잔혹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이 참극에도 불구하고 계급 동맹 노선 자체는 폐기되지 않았다. 폐기된 것은 도시였고, 계승된 것은 부르주아지의 일부를 혁명 전선으로 ‘견인’한다는 발상(환상)이었다.
1905년 혁명 당시 레닌의 2단계 혁명론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도 부르주아지를 지도 세력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노동계급의 독자성과 지도력을 핵심으로 봤다. 코민테른 제2차 대회 테제의 핵심도 공산당이 식민지나 후진국의 민족운동과 일시적으로 협력할 수는 있으나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며,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과 융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그 대회에서 레닌은 식민지 부르주아지가 제국주의와 타협해 자국의 혁명적 대중을 억압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면 마오쩌둥은 중국 부르주아지를 관료·매판 대부르주아지와 민족 부르주아지로 나누고, 후자를 노동계급, 농민, 도시 프티부르주아지와 함께 ‘인민(민중)’ 범주에 포함했다. 이른바 ‘4계급 블록’이다. 그는 신민주주의 혁명에서 이 네 계급의 ‘통일전선’(인민전선)과 인민민주주의 통치(人民民主專政)를 주장했다. 사회주의 건설 단계에 진입한 뒤에도 민족 부르주아지를 강제로 해체하기보다 국가자본주의의 다양한 형태를 거쳐 ‘평화적으로 개조’할 수 있다고 봤다. 레닌의 2단계 혁명론이 반(反)부르주아적 성격이었다면, 마오쩌둥의 노선은 친(親)민족부르주아지적 성격을 띠었다. 이는 단순한 전술 차이가 아니다. 마오주의는 민족 부르주아지가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고 보면서도 이들을 ‘인민’의 일부로 상당 기간 인정했고, 이 견해는 혁명 이후에도 이어져 자본가에게 이윤과 고정 이자를 지급하며 점진적으로 국영 체제에 편입시키는 평화개조론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특징은 ‘통일전선’론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중국공산당의 통일전선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첫째, 1923~1927년의 제1차 국공합작 시기로,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에 가입해 활동한 우경적 국민당 추수주의 시기다. 둘째, 코민테른의 ‘제3기’ 초좌파적 노선에 따라 국민당 좌파 계열 조직들과의 협력마저 거부한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 시기다. 셋째,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의 민중전선(인민전선) 전략과 일제의 침략을 배경으로 성립한 제2차 국공합작 시기다.
마오는 왕밍과 친방셴의 초좌파적인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론에 반대했으나, 처음부터 장제스까지 통일전선에 포함하려 하지는 않았다. 1935년 말에도 장제스를 관료적·매판적 대부르주아지의 우두머리이자 인민의 적으로 규정했다. 노선 전환의 결정적 계기는 1936년의 시안사변(西安事變) 6 이었다. 사변 직후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장제스를 제거하고 서북항일정부를 수립하려 했으나, 스탈린은 오히려 그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다. 마오는 이에 격분했다. 소련은 대일 전쟁에서 장제스를 중국의 중심 세력으로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중국공산당은 저우언라이를 시안으로 파견해 장제스 측과의 협상을 주도했고, 장제스는 구두로 공산당 토벌 중지와 항일 통일전선 구축을 약속했다.
1937년 일제의 전면 침공은 중국공산당에 결정적인 기회로 작용했다. 일제는 장제스 정권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고, 이는 중국공산당이 항일 통일전선의 대표를 자처하는 계기가 됐다. 제2차 국공합작에서 마오는 제1차 합작 때와 달리 군대와 당의 독자성을 고수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당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인 왕밍과 갈등을 빚었는데, 왕밍은 스탈린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국가 안보를 위해 중국의 통일된 대일 전선을 원했으며 그 중심에 장제스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중국공산당이 장제스를 완전히 타도하기보다 국민당 정부에 참여하고 군대를 일정하게 조정하기를 바랐다. 반면 마오는 국민당과 협력하면서도 독자적인 군대와 해방구를 유지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충칭에서 국민당에 타협적인 노선을 취한 왕밍을 ‘우경 기회주의’라고 비판했다.
이 미묘한 이견은 1938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의의 중국공산당 관련 결의에서도 확인된다. 마오가 스탈린주의자였다는 사실이 모스크바의 구체적 지령에 늘 순종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는 스탈린주의의 기본 틀을 공유하면서도 중국 내 권력을 확대하는 데 필요한 독자적 전략을 추구했다. 마오의 통일전선론은 레닌-트로츠키의 관점에서는 친부르주아적이었으나, 스탈린의 국민당 의존 정책보다는 독립적이었다.
강한 민족주의
레닌에게 민족 문제는 노동계급의 국제적 계급투쟁에 종속된 개념이었다. 노동계급은 민족 자결권을 인정하되 모든 민족 노동자의 단결을 더 높은 가치로 뒀다. 구체적인 민족적 요구도 노동계급의 계급투쟁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봤다.
반면 마오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항일전쟁 시기 계급투쟁의 이익이 항일전쟁의 이익에 종속돼야 하며, 각 계급은 공동 항일을 위해 서로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순론》(1937)에서도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이 일어나면 제국주의와 민족 간의 모순이 “주요 모순”이 되고 국내 계급 모순은 부차적 지위로 내려간다고 주장했다. 이는 계급투쟁 우위가 아닌 민족투쟁 우위를 뜻한다. 민족 부르주아지를 혁명 전선에 포함하는 이론도 이 강한 민족주의와 연결돼 있다.
트로츠키는 용어 자체에도 예민했다. 1932년 10월 베이징의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볼셰비키가 피억압 민족의 해방 운동을 외국 제국주의자에 맞서서뿐 아니라 국민당 같은 민족운동 내부의 부르주아 착취자에 맞서서도 지지한다고 확인하면서도, 이미 충분히 더럽혀진 ‘애국’이라는 말을 굳이 끌어들일 필요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런 시도에는 프티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와 어법에 자신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으며, 그 경향이 대열 안에 실제로 나타난다면 가차 없이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오주의는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갔다.
철저한 무장투쟁주의와 인민전쟁
마오는 통일전선, 무장투쟁, 당 건설을 중국 혁명의 “세 가지 보배”로 규정하고 그중에서도 무장투쟁을 가장 중시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그의 유명한 명제는 단순한 전술적 강조가 아니었다. 그는 중국에서 전쟁이 주요 투쟁 형태이고 군대가 핵심 조직 형태이며 다른 대중 조직과 투쟁도 전쟁에 기여해야 한다고 봤다. 심지어 쑨원과 장제스에게서도 군사를 중시하는 태도는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오주의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지식을 지닌 당이 농민을 조직해 농촌 근거지를 구축하고, 장기 게릴라전과 정규전을 거쳐 도시를 점령한다. 이와 관련해 마오주의는 농민이 도시 노동계급의 지원 여부와 상관없이 게릴라전을 포함한 무장투쟁, 즉 ‘인민전쟁’에 동원될 수 있다고 본다. 마오주의 이론에서 게릴라전 자체도 세 단계로 나뉜다. 첫째, 농민을 동원하고 조직하는 일이다. 둘째, 농촌 근거지를 건설하고 게릴라 조직 간 협력을 강화하는 과정이다. 셋째이자 마지막은 정규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마오주의 군사 교리는 게릴라 전사를 농민이라는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에 비유한다. 농민은 전사에게 후방 보급과 병참 지원을 제공한다. 이 전략에서 노동계급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게릴라 농민군이 도시로 진입할 때 그들을 환영하는 보조 부대 역할을 하는 데 그칠 뿐이다. 노동계급이 독립적 권력 주체가 아니라 보조적 위치로 밀려난다는 점, 바로 이것이 노동자들의 집단적 자력 활동을 사회주의의 핵심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와의 가장 중대한 단절이다. 1925~1927년 혁명의 패배 경험으로 마오와 그의 동료들은 도시를 포기하고 농민 운동에 기대를 걸게 됐다.
마오에게 군대는 혁명의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당과 정권 형성의 핵심 조직이었다. “당이 총을 지배해야 한다”면서도 “총이 있으면 당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한 말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관점에서는 노동조합·파업·평의회 같은 노동계급의 주체적 활동보다 군사조직과 해방구 확대가 전략의 중심에 놓이기 쉽다. 중국 혁명의 실제 전개 과정에서도 도시 노동자의 봉기보다는 농민군의 군사적 진격과 영토 장악이 권력 획득의 수단이었다. 이러한 군사주의적 관점은 이후 중국공산당의 대외 정책과 중·소 논쟁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물론 마오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사상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 점은 인정한다.
농촌주의적 발전관과 단계혁명론
마르크스주의자는 대규모 산업 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산업 발전이 집단성을 핵심으로 하는 노동계급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반면 마오주의는 민족해방 전략으로 농촌 발전을 앞세운다. 마오주의는 대체로 ‘단계론적’ 전략을 고수한다. 먼저 민족 해방을 이루고 훗날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한다는 구상이다. 스탈린화된 1928년 코민테른 강령도 중국과 같은 식민지·반식민지에서는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거쳐야만 노동자 권력으로 이행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마오쩌둥은 인구 대부분이 농민인 현실에서 이러한 전략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의 원칙 자체가 훼손됐다. 농촌 발전을 강조한 마오주의는 1970년대 캄보디아에서 최악의 결과를 낳았는데, 당시 폴 포트는 도시 주민을 대규모로 강제 이주시켜 농촌으로 보냈다.
주의주의와 낭만주의
군사적 규율을 앞세우는 이런 태도에서 또 다른 특징이 파생한다. 주의주의(主意主義), 즉 인간이 의지의 힘으로 물질적 조건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마오는 인간의 의지가 물질적 조건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관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는 사람들이 대를 이어 맨손으로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 고사를 마오가 즐겨 인용한 데서 잘 드러난다. 당장 눈앞에 뚜렷한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밀고 나가는 우직함을 찬양하는 이러한 발상은 혁명적 낙관처럼 보일 수 있으나, 생산력과 생활수준의 실제 조건을 무시한 채 빈곤을 퇴치하기보다 대중에게 빈곤과 희생을 감수하라고 요구하는 논리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뒤에서 보듯 대약진운동에서 이 경향은 가장 파괴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마오주의 전반에는 일종의 낭만주의적 경향이 존재한다. 자기희생적인 민중이 농촌을 조직해 게릴라군을 유지하고, 초인적인 희생과 강인한 의지로 부패하고 잔혹한 정권을 타도한다는 구도다.
이러한 낭만주의는 1934~1935년 대장정에서 신화적 정점에 달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전멸시키려는 토벌군의 총공세를 피해 탈출한 뒤, 중국 북부에 농촌 근거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고난과 희생을 감내했다.
개인숭배와 집권 이후의 통제
마오주의 운동은 기존 정권을 군사적으로 타도한 뒤, 적대적 환경과 외부의 물질적 압력에 맞서 생존을 목표로 하는 정부를 수립한다. 그렇게 군사적 규율을 중심으로 성장한 조직은 개인숭배와 대리주의를 낳기 쉽다. 이 과정은 흔히 ‘위대한 지도자’의 능력과 권위를 찬양하는 ‘개인숭배’로 이어지고, 지도자의 능력과 사상을 당과 계급의 직접적 활동보다 우위에 두는 경향이 반복된다. 마오 시대 중국뿐 아니라 여러 마오주의 운동에서 위대한 지도자의 권위를 체제의 통일성과 정통성의 보증으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마오쩌둥, 북한의 김일성,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가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었다. 장융과 존 핼리데이가 《마오쩌둥 평전》(까치글방, 2006)에서 묘사한 마오쩌둥의 극단적 행적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나, 당이 규정한 ‘농민의 이익’을 관철하고 당의 노선을 따르도록 농민을 가혹하게 통제한 일은 빈번했다.
전쟁 수행을 위해 군사적 규율을 강제해야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는 낡은 질서가 무너진 뒤에도 새 정권에서 지속됐고, 도시에서는 한층 더 강요됐다. 그 결과 주민을 서방의 영향으로부터 차단하려는 기상천외한 조치들이 잇따랐다. 마오주의를 표방한 다른 정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 서양인은 1970년대 초 알바니아 여행 당시 국경에서 제지당한 경험을 회고했다. 그가 착용한 ‘위험한’ 나팔바지와 꽃무늬 셔츠, 긴 머리가 문제가 됐다. 옷은 압수됐고 머리는 깎였다. 퇴폐적인 외세의 영향으로부터 주민을 차단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특징들의 통일성
이러한 특징들은 개별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도시 노동계급의 약화는 농민군 중심 전략을 낳았고, 농민군에 의존한 민족 혁명은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동맹 및 계급투쟁의 민족 투쟁 종속으로 이어졌다. 무장투쟁은 이 전체 전략을 현실 권력으로 전환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무장투쟁주의는 농민 주체 혁명론과 단절된 별개의 특징이 아니라 이를 전략적으로 완성한 요소다. 마오주의는 단순한 전술적 집합이 아니라, 농민 전쟁을 통해 민족 국가 수립과 국가 주도 산업화를 이뤄내려 한 일관된 스탈린주의 체계로 이해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실천론》(1937)과 《모순론》(1937)은 순전한 철학 논문이라기보다 왕밍·친방셴 노선에 맞선 정치적 논쟁의 성격이 강하다. 당시 소련 스탈린주의 철학, 특히 마르크 보리소비치 미틴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영향도 뚜렷하다. “실천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실천론》의 명제는 실용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고(부록 1을 보라), 《모순론》의 변증법도 민족주의와 2단계혁명론을 정당화하는 효과가 있다(부록 2를 보라). 따라서 이 두 논문을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충실한 발전으로 볼 수는 없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의 단절
마오주의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차이는 단지 농민을 중요하게 보느냐 여부가 아니다. 레닌과 트로츠키도 후진국 혁명에서 농민의 거대한 잠재력과 토지 문제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차이는 어느 계급이 혁명의 방향과 국가 권력을 주도하느냐에 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는 생산과 투쟁을 집단적으로 경험하며 자본 축적 과정 자체를 멈출 힘을 지닌 노동계급이다.
사회주의 혁명에서 혁명적 정당은 노동계급을 대신해 혁명을 대행하는 주체가 아니다. 노동자들이 투쟁 속에서 스스로 만든 대중적·민주적 기관, 즉 소비에트와 같은 노동자 평의회가 사회를 통제하고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핵심이 있다. 노동자 권력의 기준은 노동자 대중이 자신의 조직을 통해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는지 여부다. 혁명적 정당의 역할은 이러한 자력 활동을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 속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략을 두고 논쟁하며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을 의식적 목표로 삼도록 돕는 일이다.
이 기준에서 보면 러시아 혁명은 중국 혁명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은 평범한 노동자 대중이 이뤄 낸 혁명이었다. 노동자들은 민주적 자치 기구인 노동자 소비에트(평의회)를 설립했다. 처음에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를 공식 국가기구와 대립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위기 상황에서 사회를 운영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여겼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권력을 포기할 의사가 없으며, 소비에트 권력과 부르주아 국가 권력은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점이 곧 명확해졌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소비에트가 역사상 존재한 그 어떤 제도보다 훨씬 민주적이라고 확신했고, 혁명은 나아가야 했다. 결국 10월 혁명을 통해 소비에트는 국가 권력을 온전히 장악했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결코 홀로 혁명을 완수하려 하지 않는다. 혁명은 수백만 평범한 대중이 주도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의 임무는 그들과 함께 싸우며 가장 효과적인 전략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데 있다. 혁명적 정당은 노동계급이 권력을 쥐어야 한다고 설득할 수 있을 뿐, 그 일을 대신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가 강조했듯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반면 마오주의에서는 당이 농민군을 조직해 권력을 장악하고, 노동계급은 그 과정을 지원하거나 환영하는 위치에 놓인다. 계급의 집단적 자력 활동이 아니라 당의 군사적 대행이 혁명의 실체가 되는 것이다. 중국 혁명은 혁명적 정당이 노동계급과 유리되고 당이 계급의 대행자를 자처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마오쩌둥 세력은 농촌에서 조직한 군대로 도시를 군사 점령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독자적인 노동자 파업과 봉기가 당의 군사·정치 전략과 부딪히면 억제됐고, 공산당이 도시를 장악했을 때는 주민들에게 새 군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안심시키는 선전까지 펼쳐야 했다. 이는 노동자 평의회가 아래로부터 국가 권력의 대안으로 성장한 1917년 러시아와 근본적으로 다른, ‘정복군’에 의한 권력 장악 방식이었다.
강력한 혁명적 정당 없이 노동자 권력의 맹아가 등장한 혁명은 패배하기 쉽다. 1936년 스페인이나 1979년 이란처럼 노동자와 민중의 자발적 행동이 크게 발전한 경우에도, 그 기관들을 기존 국가권력의 대안으로 발전시키고 지배계급의 반격에 맞설 전략을 제시할 혁명적 정당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것이 정당이 계급을 대신해 권력을 장악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정당의 지도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을 동일시하는 대리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원칙에 위배된다.
3. 1949년 혁명과 그 국가의 성격
신민주주의와 그 소급적 재정의
마오쩌둥은 1939년 12월 《중국 혁명과 중국공산당》에서 다가올 혁명의 성격을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했다. 중국은 식민지·반식민지·반봉건 사회이므로 혁명의 주적(主敵)은 제국주의와 봉건 세력이며, 자본주의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다만 그 혁명은 과거의 부르주아 혁명과 달리 프롤레타리아가 지도하고 여러 “혁명 계급”이 연합한 “신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1949년 혁명으로 구현된 신민주주의 경제는 혼합경제였다. 대형 은행과 대규모 공업·상업, 독점 기업은 국유화하되 일반 자본주의 개인 기업과 부농 경제는 허용했다. 국영 경제, 사적 자본주의 경제, 협동조합 경제가 공존했다.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지도 아래 노동계급, 농민, 도시 프티부르주아지, 민족 부르주아지가 연합한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다. 마오쩌둥은 이 시기 부르주아지를 ‘쓸모없다’고 여겨선 안 되며 ‘매우 유용하다’고까지 강조했고, 신민주주의 단계가 상당히 오래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따라서 1949년 당시 중국공산당도 새 체제를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몇 년 만인 1953년부터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과 제1차 5개년 계획에 착수했다. 이에 맞춰 중국공산당은 이전 설명을 사실상 수정해, 1949년에 수립한 인민민주주의 국가가 본질적으로 이미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즉, 노동자 국가)였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건설 선언’을 정당화하려면 마르크스와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원칙이 필요했기에 과거를 소급해 재정의한 것이다. 이로 인한 혼선은 프롤레타리아가 실제로 권력을 장악한 결과가 아니라, 이미 수립된 비(非)노동자 당-국가가 사후에 사회주의 건설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선언한 데서 비롯됐다.
이 재정의는 단순한 용어 변경 이상의 문제를 낳는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혁명론은 농민을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로 보지 않고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주체로 봤다. 반면 중국 혁명은 도시 노동계급이 아닌 농민군을 주역으로 삼아 승리했다. 또한 마르크스와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자체 활동과 자력 해방을 뜻했으나, 중국공산당의 실천은 노동계급 정당의 성격을 잃은 당이 노동계급을 대신하는 대리주의에 불과했다.
루이 알튀세르의 경제학 분야 협력자였던 샤를 베텔라임은 국유화라는 법적 소유 형태만으로 노동자 국가를 판별할 수 없고 실제 생산관계를 봐야 한다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 권력의 기준을 국가기구를 운영하는 인물이나 정당이 ‘프롤레타리아적 이념’을 표방하는지 여부로 봤다. 노동계급이 직접 권력을 행사하는지보다 당의 이데올로기와 정치 노선을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의 보증으로 봤던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론은 명확하다. 파리 코뮌과 소비에트의 역사적 의의는 지도 이념의 순수성이 아니라 공직자의 선출·소환과 대중의 직접 통제 같은 정치적 구조에 있었다. 정당의 올바른 사상이나 지도 노선은 노동계급의 자체 권력을 대신할 수 없다.
무엇이 사회주의인가
그렇다면 중국 혁명과 그 결과로 탄생한 사회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이를 규명하려면 먼저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재확인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주역은 도시 노동계급이다. 농민은 동맹군이 될 수는 있으나 혁명의 주체는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농업 노동자와 빈농 일부를 포괄하는 계급 권력이다. 농민 일반이나 도시 프티부르주아지, 민족 부르주아지까지 아우르는 계급 연합 정권이 아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영구적인 관료 국가가 아니라 국가 소멸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형태다. 레닌은 이를 반(半)국가라고 불렀다. 파리 코뮌을 통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원칙은 공직자 선거 및 소환제, 노동자 수준의 임금 지급, 입법과 행정의 통합, 상비군·경찰 폐지와 무장 인민 조직으로의 대체였다. 공직자는 언제든 소환될 수 있어야 하며 특권적인 보수를 받아서는 안 된다. 입법기관과 행정기관의 분리가 아니라 대중에게 책임지는 집행 기관이 필요하다. 그러한 국가는 스스로를 강화하고 영구화하는 권력이 아니라 계급 소멸과 함께 스스로 ‘시들어가는’(사멸하는) 국가다. 따라서 관료 기구가 사회 위에 군림하고 당과 국가가 대중으로부터 독립해 특권적 권력이 되는 체제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부를 수는 없다. 덧붙여 일당제는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이 아니다. 레닌 시대 러시아의 일당제는 내전과 국제적 고립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형성된 것일 뿐이다.
생산수단 국유화 자체가 곧바로 사회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도기에는 주요 생산수단을 국유화할 수 있으나, 국가자본주의의 국유화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국유화는 엄연히 구별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법적 소유권이 아니라 실제 생산관계다. 노동자가 생산수단과 분리된 채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판매하고, 잉여가 노동자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경쟁적 축적을 위해 처분된다면 국가는 개별 자본가를 대신하는 총자본가(집합적 자본가)로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상품·화폐·임금과 노동력 상품화의 존속 여부, 노동자들의 생산 및 국가 직접 통제 여부, 사회의 우선순위를 인간의 필요와 축적 경쟁 중 어느 쪽이 정하는지가 결정적 기준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에서의 노동에 따른 분배’도 성과급 임금제가 아니라 가치법칙의 지양을 전제로 한 노동증서제이며, 높은 단계에 이르러 ‘필요에 따른 분배’로 나아간다.
마오쩌둥의 생산관계 우선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생산력이 자동으로 역사를 결정한다는 기술결정론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하에서 생산관계는 기술 변화와 생산성 향상을 강제하는 동력이지만, 어떤 생산관계든 일정한 물질적 생산력 수준을 전제로 한다. 특히 공산주의는 한 나라의 의지와 동원만으로 구축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세계적 규모로 발전시킨 생산력과 국제 분업을 해방하고 재편해야 가능하다. 정치·이데올로기와 주관적 의지만으로 물질적 조건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마오주의적 주의주의는 이러한 인과관계를 거꾸로 뒤집는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에는 스탈린식 ‘일국사회주의’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생산력의 국제적 발전이 불충분하면 궁핍이 일반화되고 생필품을 둘러싼 투쟁과 낡은 사회관계가 되살아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혁명도 독일을 비롯한 유럽 혁명의 성공을 자신의 생존 조건으로 봤고, 볼셰비키가 1919년 코민테른을 창립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후진국이 세계 경제에서 고립된 채 낮은 생산력 수준에서 국유화만 시행하면, 생활수준 향상과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 대신에 축적과 군사적 산업화를 우선하도록 압박받는다. 이때 국유화는 사회주의적 해방의 수단이 아니라 국가가 자본 축적을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수단으로 변질된다.
레닌이 후진국의 비자본주의적 발전 가능성을 언급했을 때도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소비에트 국가의 체계적 원조를 전제로 했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레닌은 ‘민족·식민지 문제 위원회 보고’를 제출하며 식민지와 경제적 후발국이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부정적으로 답했다. 단, 선진국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에서 승리하고 소비에트 국가들이 후진국 노동 대중을 경제적·정치적으로 지원한다는 전제하에서였다. 선진국 프롤레타리아의 지원을 바탕으로 후진국이 소비에트 체제로 이행하고 일정한 단계를 거치면,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어 공산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본질적으로 레닌의 전망은 국제 혁명의 틀 안에 있었다.
이를 훗날 소련에서 활용한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 이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1950~1970년대 소련 이론은 민족주의 성향의 신생 독립국이 노동자 혁명 없이도 국가 부문 확대, 토지 개혁, 소련의 원조 등을 통해 비자본주의적 발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논리로 변용됐다. 반면 레닌의 1920년 주장은 국제 노동자 혁명의 승리와 평의회 권력을 명확한 전제로 삼았다. 자본주의 발전의 보편적 단계를 무조건 부정하기보다는, 국제 사회주의 혁명이 존재하는 조건이라면 전(前)자본주의 사회가 서유럽의 자본주의 경로를 답습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였다.
1949~1957년의 ‘사회주의적 개조’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당시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할 수 없다. 제1차 5개년 계획 과정이 이를 분명히 보여 준다.
1949~1952년 중국공산당은 토지 개혁을 단행하고 관료 자본과 외국 자본을 국유화했다. 다만 민족 부르주아지의 사적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일정한 이윤을 보장하며 제한적으로 활용했다. 1953년 이후 농업 분야에서는 토지 개혁으로 자영농이 된 농민을 곧바로 호조조(互助組) 7 로 편성했다. 이어 토지 사유를 유지하는 초급 합작사, 토지와 주요 생산수단을 집단 소유하는 고급 합작사 형태로 협동화를 빠르게 추진했으며, 1955년 하반기부터는 그 속도가 더욱 가팔라졌다.
공업 부문에서는 국가가 사기업에 원료를 공급하고 생산을 발주하며 판매를 통제한 뒤, 국가의 지도 아래 자본가와 공동 경영하는 ‘공사합영’으로 전환했다. 상업 부문에서도 국영상업과 협동조합상업이 공급망을 장악한 상태에서 사영 상업을 대리판매 체계에 편입했다. 민족 부르주아지의 재산은 즉각 몰수하기보다 고정 이자를 지급하는 매수(買收) 방식을 통해 단계적으로 국유화했다. 중국공산당은 이를 사적 자본주의에서 국가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평화적 이행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개조는 순전히 경제적 조치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체제를 공고히 하고 국가자본주의를 완성하고자 전개한 대중 정치 운동, 곧 ‘삼반 운동’ 8 과 ‘오반 운동’이 그 정치적 지렛대였다. 삼반 운동(1951년 말)은 반부패, 반낭비, 반관료주의를 내걸고 내부 기강 확립을 목표로 공공 부문과 공직자를 주로 겨냥한 숙청이었다. 이어진 오반 운동(1952년 초)은 뇌물 제공, 국유 재산 유출, 탈세, 부실 공사 및 납품, 경제 기밀을 이용한 사익 추구 등 다섯 가지 행위의 근절을 내걸었다. 삼반 운동의 대상을 외부로 넓혀 그동안 협조적이었던 자본가와 기업인을 통제하고 사유 재산을 국유화하려는 조치였다. 이 운동으로 민간 자본가 계급은 사실상 몰락했고, 이는 중국 경제가 완전한 국유 경제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평화적 개조’라는 표현 뒤에 가려진 강제의 실체가 여기에 있다.
1950년대 국유화와 계획경제가 확대되면서 많은 노동자는 생활수준 향상과 노동자 통제의 강화를 기대했다. 그러나 국유화가 곧 노동자 통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공장에는 스탈린식 ‘1인 경영’ 원리가 도입됐고, 관리자와 당 기구가 생산을 전적으로 지휘했다. 노동자는 생산의 주인이 아니라 국가 계획이 정한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임금노동자로 남았다. 마오쩌둥은 관리자들에게 임금 격차와 작업 규율을 이용해 노동자의 독립적 행동을 억제하도록 촉구했고, 급속한 산업화를 위해 일부 현장에서는 하루 12시간을 훌쩍 넘는 장시간 노동까지 강요했다.
관료 지배 국가자본주의
본질적인 질문은 소유 형태보다 실제 생산관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중국은 내부 시장의 범위를 대폭 줄이고 국가 계획을 확대했지만, 이것이 자본 축적의 압력을 없애지는 못했다. 중국 지배 관료는 미국·소련·일본 등과 경제적·군사적으로 경쟁해야 했고, 그 경쟁은 국가 정책의 우선순위를 인간의 필요보다 생산성 향상, 중공업, 군사력 확대에 종속시켰다. 노동자가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판매하며 잉여가 국가가 통제하는 축적 기금으로 흘러간다면, 국가는 개별 자본가를 대신하는 집합적 자본가(총자본가)로 기능한다. 중국공산당의 ‘사회주의적 국영경제’는 바로 이런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성격을 띠었다.
실제로 소유 형태가 바뀌었음에도 상품 생산, 화폐, 가격, 임금, 이윤은 계속 존재했고 노동력의 상품화도 폐지되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은 성과급 임금제를 ‘노동에 따른 분배’라고 불렀고, 애국경쟁운동과 생산 할당량을 통해 노동 강도를 끌어올렸다. 노동자의 생활수준 향상 요구보다 중공업 투자와 국가 축적이 우선했다. 마르크스가 성과급 임금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가장 적합한 임금 형태로 분석한 점을 고려하면, 이를 사회주의적 분배로 규정하는 것은 개념의 완전한 전도다.
따라서 국영기업이든 협동조합이든 노동자가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판매하며 상품 생산과 가치법칙이 지배하는 한, 이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로 봐야 한다.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사회주의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낮은 생산력 아래에서 국가가 축적과 산업화를 추진하고 노동자를 임금노동자로 고용하는 체제라면, 국가는 집합적 자본가(총자본가)가 된 형태다.
정치적으로도 인민민주주의 국가는 실질적 연합정권이 아니었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더더욱 아니었다. 백화제방·백가쟁명 운동 이후 반우파 투쟁으로 전환한 데서 드러나듯, 그 실체는 스탈린주의를 답습한 당의 관료적 지배였다. 결국 중국공산당이 표방한 사회주의는 국가자본주의가 극단화한 형태였다. 따라서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 사회는 관료 지배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마오쩌둥이 흐루쇼프의 ‘전인민 국가’와 ‘전인민 당’ 노선을 비판한 방식에서도 같은 사정이 드러난다. 마오쩌둥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공산주의의 고도 단계에 이를 때까지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레닌의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이 존재하는 과도기적 국가 형태이며, 계급이 사라지면 국가도 사멸한다. 사회주의를 공산주의의 첫 단계로 본다면 그 사회는 이미 계급사회 폐지를 전제로 한다. 마오쩌둥은 국가와 당의 장기 존속을 정당화하고자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계급과 국가 통치가 지속된다고 강변했다. 이는 스탈린주의 국가의 영구화를 마르크스주의 국가소멸론과 절충하려 한 이론적 왜곡이었다.
1949년 혁명의 성격
그렇다면 1949년 중국 혁명은 어떤 성격이었는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지식인들이 농촌 프티부르주아지(농민)의 지지를 받아 이끈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혁명이었다. 트로츠키가 20세기 후발국 혁명과 관련해 예측했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었다. 1927년 패배 이후 노동계급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재건되지 못했다. 한편 장제스의 부르주아지도 일본의 침략과 관료 자본주의의 한계 속에서 약화됐다. 그 공백을 노동자 정당에서 지식인 정당으로 바뀐 마오주의 엘리트 집단과 농민군이 메웠다.
1932년에 트로츠키가 내다본 결말과 견줘 보면 무엇이 적중했고 무엇이 빗나갔는지가 분명해진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직접적 지도가 없는 농민전쟁이 승리하면 권력이 ‘좌파 국민당’이나 ‘제3당’ 같은 새로운 부르주아 집단에 넘어가리라고 예상했다. 실제로는 농민군을 지휘한 공산당 자신이 권력을 쥐었고, 새 지배 집단은 옛 지주 질서를 복원하기는커녕 그것을 철저히 해체하고 국유화를 지렛대로 삼아 국가 주도 축적을 실행했다. 트로츠키가 예견하지 못한 것은 그 비(非)노동자 권력이 취할 구체적 형태, 곧 국유화된 자본주의였다.
그러나 명제의 핵심은 오히려 확인됐다. 노동계급이 스스로 권력을 잡지 못한 채 농민전쟁의 지휘부가 국가를 접수한다면 그 결과는 어떤 이름을 달든 노동자 권력일 수 없다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지적한 사회학적 세부, 즉 지휘관들이 도시에 들어와 부르주아지의 저택에 자리를 잡고 스스로를 ‘교양 있는’ 계층으로 여기게 된다는 관찰은 1949년 이후 새 지배층의 형성 과정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다만 그것은 몇몇 지휘관의 타락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로 굳어졌다.
당시 중국에는 제국주의적 종속을 종식하고 국가를 통일하며, 전(前)자본주의적 관계, 특히 지주제를 청산하고 급속한 산업화를 추진해야 할 역사적 과제가 있었다. 마오주의 지도부와 농민군이 이 과제를 대행했다. 그 결과 중국공산당은 민족 독립과 통일, 산업화를 국가자본주의 방식으로 완수하며 새로운 지배 집단으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중국 혁명을 ‘농민혁명’으로 규정하는 것도 부정확하다. 농민 대중은 혁명의 압도적 병력과 사회적 기반을 제공했으나, 독자적 계급 강령으로 국가를 수립하지는 않았다. 혁명의 향방을 결정한 주체는 직업적인 당 조직과 군사 지도부였다. 이 지도부는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전통적인 지주 질서를 해체했으나, 집권 후에는 다시 농민의 잉여 생산물과 노동력을 동원해 국가 주도 산업화를 추진했다. 결국 이 정권은 농민의 이해관계를 직접 표현하기보다 농민을 동원해 민족국가 건설과 산업화를 달성한 관료 엘리트 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점이 중국공산당을 러시아 사회혁명당과 같은 전통적 농민 정당과 뚜렷이 구별 짓는다.
그렇다고 1949년 혁명의 진보적 성과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혁명 이전 중국에서는 극심한 빈곤과 짧은 기대수명이 이어졌고, 전족과 여성 매매 같은 억압적 관습이 만연했다. 1950년대의 토지 재분배와 혼인법 제정은 농민과 여성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했고, 제국주의적 종속과 군벌·지주 질서를 무너뜨린 것도 거대한 역사적 성취였다. 그러나 공장과 촌락을 노동자와 농민이 직접 운영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사회 진보는 1949년 혁명이 진정한 혁명이었음을 보여 주지만, 사회주의 혁명이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마오쩌둥 집권기 중국은 여전히 산업혁명과 본원적 축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국가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근대적 형태이지만, 중국에서는 후발 산업화 및 본원적 축적이라는 역사적 과제와 결합됐다. 역사 발전의 불균등성으로 인해 근대적 형태와 후진적 과제가 하나의 사회체제 안에서 결합된 것이다.
4. 축적의 역학: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후발 축적의 물질적 메커니즘
토니 클리프가 1950년대 중국을 분석하며 강조한 핵심은 낙후하고 자원이 빈약한 농업 기반 위에서 거대한 경제·군사 기구를 신속히 건설해야 한다는 국제 경쟁의 압력이었다. 마오 지도부는 산업을 빠르게 현대화하지 못하면 열강에 다시 짓밟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국유화와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의 증거가 아니라, 후발국 지배층이 축적 자원을 국가에 집중해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수단에 불과했다. 국가자본주의론의 요체는 내부 시장의 폐지 여부가 아니라, 국가가 세계적 경쟁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자본처럼 행동하며 노동자와 농민의 잉여를 축적에 종속시키느냐에 있다.
농촌에서 도시 산업으로 자원을 이전한 방식은 이를 뚜렷이 보여 준다. 마오 시대의 가격 체계는 농산물 가격을 억제하고 공산품과의 부등가 교환을 통해 농업 잉여를 도시 산업화로 이전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노동 현장에서는 장시간 노동, 생산성 경쟁, 성과급 제도가 확대됐고 숙련 노동자의 임금을 억제하려는 압력도 이어졌다. 농민과 노동자의 당대 생활수준보다 중공업과 군사력 확충이 앞섰다. 국유 경제 체제 아래에서도 노동자는 생산의 주인이 아니라 축적을 위해 동원되는 임금노동자로 머물렀다.
이 점 때문에 뒤에서 살펴볼 대약진운동을 단순한 정책 실수로만 볼 수는 없다. 국제적 고립과 군사적 경쟁 속에서 중국 관료는 조속한 산업화를 체제 생존의 문제로 인식했다. 그러나 기존 방식으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압박이 커지자, 마오의 주의주의는 생산력의 한계를 대중의 열의와 초인적 희생으로 돌파하려는 형태로 나타났다. 사회관계와 생산 목표를 행정명령으로 앞당기려 한 결과, 축적 압력은 농민과 노동자에게 훨씬 가혹하게 전가됐다.
인민공사와 대약진운동
이 문제는 1958년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운동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호조조나 합작사가 농사를 공동으로 짓는 수준이었다면, 인민공사는 생활 전반을 통합한 수만 명 규모의 공동체였다. 토지는 물론 농기구와 가축, 가옥 내 취사도구와 식기까지 전부 몰수해 공유화했다. 공공식당, 탁아소, 집단 숙소를 운영하고 부분적 무상 배급을 확대해 농민의 일상까지 집단화했으며, 농촌 노동력을 대규모 수리 사업과 지방 공업에 동원했다. 단순한 농업 조합을 넘어 행정·생산·군사·교육 등 마을의 전 영역을 통제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고 추월하자”고 주창하며 토법고로(土法高爐) 9 를 통한 제철운동과 농촌의 급속한 인민공사화를 추진했다. 1958년 말에는 70여만 개의 농업합작사가 약 2만 6000개의 인민공사로 통합됐고, 거의 모든 농가가 여기에 편입됐다. 결국 인민공사는 협동조합이라기보다는 농민을 병영식으로 편성한 조직 형태가 됐다. 중국공산당은 인민공사를 공업·농업·상업·교육·군사를 결합하고 생산·생활·기층정권을 일체화한 조직으로 규정하며, 이를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최적의 조직 형태라고 선전했다.
모두가 평등하게 일하고 먹는 이상적인 사회를 내걸었지만 현실은 참혹했다. 곡물 생산량이 급감하고 식량 배급마저 끊기면서 1959~1961년 대기근이 발생했다. 희생자 수는 연구에 따라 엇갈리지만, 약 30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대재앙이었다. 결국 인민공사 체제는 실패로 끝났다. 생산력 발전에 맞춰 생산관계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이용해 먼저 생산관계를 고도화함으로써 생산력을 끌어올리려 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고도의 기계제 공업이라는 물질적 토대 없이 거대한 집단화와 생활 통제를 강제한 결과였다. 부분적인 무료 공급 제도도 공산주의식 ‘필요에 따른 분배’의 시초라기보다는 사회보장성 현물 급여에 가까웠다.
후퇴가 입증한 것
실패는 이후 이어진 정책 후퇴에서 확인된다. 1959년 중국공산당은 생산 실적을 수정하고 목표를 낮췄으며 인민공사의 3급 소유제를 확정했다. 이후 자류지와 가정 부업, 농촌 정기시장을 다시 허용했고, 1961년에는 농업, 경공업, 중공업 순으로 우선순위를 조정했다. 이어 1962년에는 인민공사의 기본 경제 단위를 더 작은 생산소대 10 로 축소했다. 같은 해 ‘농업을 기초로 하고 공업을 주도 세력으로 삼는다’는 방침을 확정해, 중공업 우선주의 아래 추진하던 공업·농업 동시 발전 기조를 사실상 뒤집었다. ‘총노선·대약진·인민공사’라는 삼면홍기(三面紅旗: 세 개의 붉은 기) 노선은 공식 폐기되지 않았으나 실질적 내용은 크게 후퇴했다. 자연재해가 겹치며 어려움이 가중된 것은 사실이지만, 정책 자체가 생산력 수준을 무시한 무리한 산업화와 집단화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1959년 이후의 후퇴는 이를 사실상 인정한 결과였다.
이 경험이 남긴 이론적 교훈은 분명하다. 인간의 의지와 행정명령만으로 생산관계를 생산력보다 앞서 끌어올릴 수는 없다. 농기계와 전력, 운송, 비료 등 물질적 조건이 부족한 상황에서 집단화 규모만 확대하면 생산성 향상보다 강제와 통제가 앞설 수밖에 없다. 인민공사는 국가적 축적 충동을 농촌 전체에 강제한 결과물이었고, 대약진운동은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도약이 아니라 후진국의 급속한 국가 축적 시도였다. 1970년대 말 덩샤오핑이 집권해 추진한 실용주의적 개혁은 농민들이 다시 땅을 나눠 농사짓고 수확물을 가질 수 있게 제도를 바꿨고, 인민공사는 1983년경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5. 대약진운동 이후의 정치: 문화혁명에서 1976년까지
파국의 정치적 귀결
대약진운동은 마오쩌둥 정치의 핵심 특징이 집약된 파국이었다. 마오는 일정한 경제 성과를 바탕으로 중국의 후진성을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다고 오판해, 객관적 생산력보다 정치적 의지와 대중의 열성을 앞세웠다. 여기에 관료주의와 개인숭배가 결합하면서 지방 간부들은 성과를 부풀리고 불리한 보고를 은폐했다. 결국 마오의 ‘조사 연구’는 자신의 기대를 재확인하는 메아리 장치로 전락했다. 1959~1961년의 대기근으로 마오의 정책적 권위는 크게 실추됐고 당의 주도권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실용주의 관료들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문화혁명의 정치적 출발점은 1966년이 아니라 대약진운동의 실패에서 찾아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마오의 실질적 정책 권위가 약화될수록 이데올로기적 권위는 강화됐다. 1956년 당 규약에서 제외됐던 ‘마오쩌둥 사상’은 1958년부터 다시 등장해 1960~1961년 대대적으로 학습됐다. 경제·정치적 난관과 중·소 갈등 속에서 지도자의 권위와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성을 강조한 결과였다. 마오는 일상적인 경제 운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훗날 반격에 활용할 이데올로기적 자산을 축적한 셈이었다.
이 시기 마오와 류사오치·덩샤오핑의 충돌은 단순한 개인적 권력투쟁을 넘어섰지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노선 대립은 아니었다. 마오는 주관적 의지와 대중 동원을 중시하는 낭만주의를, 류사오치는 신중한 조직 운영과 객관적 조건을 중시하는 현실주의를 대변했다. 지배 관료 내부의 급진 포퓰리즘 경향과 보수·안정 지향 경향이 정면으로 부딪친 것이다. 대약진운동 실패 이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영향력이 커지자 마오는 최고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당 기구를 뜻대로 장악하지 못해 결국 공식 당 조직 밖에서 돌파구를 모색했다.
그 돌파구는 경제 실패를 계급투쟁의 문제로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1958년에만 해도 공산주의 실현이 머지않았다고 보던 마오는 1963~1964년에 이르러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승부가 수십 년, 길게는 수 세기까지 걸릴 수 있다고 말을 바꿨다. 경제 도약의 전망이 무너지자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도 계급투쟁이 장기간 지속된다는 주장이 전면에 부상했다. 사청운동과 문화혁명은 관료의 부패와 변질을 반복적 정치 운동으로 바로잡으려 한 연속선상에 있었다. 사청운동(1963~1966년)의 공식 명칭은 사회주의 교육 운동으로, 정치·경제·조직·사상의 4대 분야를 정화 대상으로 삼았다. 11 이는 대약진운동 실패로 실추된 권력을 회복하고자 당내 경쟁 관료를 겨냥해 벌인 사상 투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과 류사오치 등 지도자 간 갈등은 극에 달했고, 사청운동은 10년간 중국을 혼란에 빠뜨린 문화혁명(1966~1976년)의 전주곡이 됐다. 다만 마오가 관료주의를 공격하면서도 관료 지배 체제 자체는 유지하려 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1966년: 당을 우회한 대중 동원
마오는 당과 행정기구가 반대파에 장악됐다고 판단하고 학생과 청년을 동원해 이를 우회했다. 관료주의와 특권, 출신 성분에 따른 차별, 경직된 사회질서를 향한 청년들의 불만은 실재했다. 마오는 그 불만을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권파인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는 간부들에게 돌렸다. 목표는 경쟁 세력 분쇄, 마오의 권위 아래 당·국가 재통일, 신진 간부층 선발이었다. 그런 점에서 문화혁명은 기저의 사회적 불만을 위로부터 동원해 당내 권력투쟁에 이용한 정치적 책략이었다.
그러나 홍위병은 마오의 단순한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대중의 불만이 실재했던 만큼 운동은 마오가 설정한 범위를 벗어날 위험을 안고 있었다. 마오가 원한 것은 관료 지배 자체의 폐지가 아니라 특정 관료를 공격해 권력 구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개편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백만 명에게 반란과 권력 탈취를 촉구하자 일부는 군부 권력까지 문제 삼았다. 스탈린이 비밀경찰과 재판을 통해 밀실 음모 방식으로 숙청했다면 마오는 대중 동원을 통한 공개 숙청을 택했고, 결국 자신이 촉발한 운동을 다시 틀어쥐어야만 했다.
마오의 첫 목표는 달성됐다. 류사오치는 숙청돼 1969년 사망했고 덩샤오핑도 제거됐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와 민중의 승리가 아니라 관료 내부의 권력 재편에 불과했다. 문화혁명은 특권과 관료주의를 공격했으나 관료 지배 자체를 폐지하지는 못했고, 마오에게 권력을 다시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문화혁명 속 독자적 노동자 급진주의
문화혁명이 당내 분파 투쟁으로 시작됐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나타난 모든 대중 행동이 마오의 꼭두각시였던 것은 아니다. 기존 관료주의와 불평등, 일터 규율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면서 노동자와 청년의 행동은 때때로 마오가 허용한 범위를 넘어섰다. 특히 1967년 후난성에서 등장한 성무련(省無聯)은 양시광(楊曦光) 등의 문건을 통해 중국 지배층을 ‘붉은 부르주아지’로 지목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분석했다. 나아가 1949년의 ‘해방’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폐지하지 못한 부르주아 혁명이었다고 주장했다. 마오의 정파적 동원이 낳은 공간에서 오히려 마오 체제 자체를 비판하는 혁명적 사상이 출현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마오가 특정 관료 분파를 공격하려 대중을 동원했으나, 대중이 그 비판 논리를 관료 지배 전체로 확장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그러나 운동이 독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자 당과 군대는 다시 통제에 나섰고 성무련을 비롯한 급진적 조직들은 해산·탄압됐다. 가혹한 억압 탓에 이런 독립적 조직이 지속해서 뿌리내리기는 극히 어려웠다. 1974년 무렵 대중 운동과 이른바 ‘극좌파’, ‘아나키스트’는 탄압받았고 숙청됐던 관료들이 국가기구로 복귀했다. 문화혁명은 아래로부터 노동자 권력이 성장한 사회혁명이 아니라, 사회적 불만을 이용한 위로부터의 권력 투쟁과 그 통제를 벗어나려 한 대중 행동이 교차한 과정이었다.
이 경험은 당의 이념이나 지도자의 의지가 곧 노동자 권력이라는 관점의 한계를 다시 보여 준다. 노동자들이 직접 통제하는 민주적 기구가 지속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중 동원은 지배 엘리트 내부의 경쟁에 종속되거나 필요가 끝났을 때 국가기구에 의해 해산될 수 있다.
반복되는 운동과 풀리지 않은 모순
권력 재집중 이후의 궤적은 같은 순환의 반복이었다. 류사오치 제거 과정에서 부상한 린뱌오는 마오 개인숭배 확대에 기여하며 1969년 공식 후계자가 됐다. 그러나 린뱌오 지지 세력이 마오를 ‘현대의 진시황’이자 폭군이라며 공격하자, 마오는 린뱌오를 유교주의자로 규정하며 진시황을 옹호했다. 가장 가까운 후계자마저 순식간에 새로운 적으로 몰린 것이다. 린뱌오는 1971년 쿠데타 및 암살 시도 혐의를 받은 뒤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대외정책에서도 문화혁명기의 ‘좌익’ 노선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오는 우경화 행보를 보이며 1972년 닉슨의 베이징 방문을 계기로 미국과의 타협을 이뤘다. 마오의 정치는 이처럼 급진적 좌선회와 우경화를 반복하며 요동쳤다.
그러나 관료제가 복구되자 부패와 연줄, 특권과 격차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마오는 관료 국가에 의존하면서도 관료제가 낳은 부패가 정권의 정통성을 위협하면 다시 관료주의를 공격하는 운동을 벌였다. 목적이 관료제 철폐가 아닌 재통제였기에 관료제와 부패는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몇 년마다 새로운 문화혁명이 필요하다는 ‘계속혁명’ 구호의 사회적 원인도 여기에 있었다. 1973년 마오와 4인방 12 이 개시한 비림비공 운동은 그 마지막 반복이었다. ‘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하라’는 이 운동은 린뱌오의 진시황 비판에 대한 반격인 동시에, 다시 불거진 관료주의와 특권을 공격하고 측근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전근대적 가족 관계와 연고주의를 비판하려는 문제의식은 있었으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아닌 또 하나의 위로부터 진행된 운동에 불과했다. 반복되는 숙청과 운동은 일부 간부와 특권을 공격했을 뿐 구조적 문제는 이어졌고, 이는 마오식 정치 모델 자체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 줬다.
마오의 딜레마는 끝까지 풀리지 않았다. 그는 관료의 특권과 부패, 보수주의가 대중의 저항을 부를 것을 우려하면서도 노동자와 농민이 아래로부터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는 원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관료제를 철폐하지 못하고 거듭 ‘정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당 기구가 통제를 벗어나면 대중을 동원했고, 대중 운동이 과열되면 당·군·관료제를 동원해 이를 억눌렀다. 정책 위기가 권위에 대한 도전을 부르고, 수정주의·관료주의 비판과 대중 동원으로 경쟁자를 제거한 뒤, 대중 운동을 억압해 관료 질서를 복원하면 다시 부패와 특권이 자라나 새로운 정치 운동을 촉발하는 패턴이었다. 마오는 관료주의를 실질적으로 공격했으나 노동자와 민중의 독립적 권력을 허용하지 않아 관료주의를 끊임없이 재생산했다. 이것이 대약진운동 이후 1976년까지 이어진 마오 정치의 핵심 모순이었다.
1976년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잇따라 사망하자 누적된 모순은 지배층 내부의 후계 분쟁으로 곧바로 표출됐다. 한쪽에는 문화혁명 급진파의 상징인 ‘4인방’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더 안정적이고 실용적인 축적 전략을 선호하는 관료 분파가 맞섰다. 이 충돌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이 아니라, 당-국가 지배계급 내부에서 중국 국가자본주의를 어떻게 재편할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이었다.
마오쩌둥의 대미 화해와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1970년대 서구 신좌파 가운데는 마오주의가 강력한 경우가 꽤 있었다. 특히 미국과 프랑스에서 그랬는데, 서구 마오주의에 가장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마오 자신이었다. 1972년 닉슨과 만나 소련에 맞선 미국의 ‘우호’를 확보한 뒤 중국은 새로운 노선을 국제 마오주의 운동에 수출했다. 소련의 ‘사회제국주의’가 객관적으로 더 큰 악이며 미국은 덜 나쁜 세력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비타협적 반대야말로 마오주의의 간판이었다. 그러나 이제 강경 마오주의 조직들은 앙골라에서 미국과 아파르트헤이트 남아공이 후원하는 세력 편에 섰다. 민족해방운동의 무조건적 지지자에서 방글라데시의 독립과 미국 식민지 푸에르토리코의 독립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바뀌었다. 1974년 포르투갈 혁명이 일어나자 가장 강경한 마오주의자들은 혁명적 좌파가 아니라 나토와 제휴한 사회당 편에 섰다. 서독의 일부 마오주의 조직은 아예 나토 지지로 넘어갔고 미국의 일부는 필리핀 미군기지 증설을 요구했다.
칠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아옌데 정부가 무너지고 3만 명의 좌파와 노동자가 학살당했을 때, 첫날부터 피노체트 치하에서 대사관을 유지한 세 나라 가운데 하나가 중국이었다. 베이징과의 공식 관계를 유지하거나 경쟁 조직에게서 빼앗으려던 단체들은 칠레에 대한 중국의 침묵에 동조했다. 중국공산당이 후원한 캄푸치아 크메르루주 정권의 대량 학살은 일부 마오주의자들에게도 도를 넘는 것이었다. 나중에 전국적으로 2만여 개의 ‘킬링필드’(집단 매장지)가 발굴됐다.
1978년 12월 25일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1979년 2월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으며, 곧이어 소련이 중국 침공을 위협했다. 이후 10년간 국경 분쟁과 게릴라전이 이어졌다. 소위 ‘사회주의’ 진영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불리는 이 사태만큼 마오주의 세계관의 파산을 명확히 보여 준 것은 없었다. 국가 간 경쟁이 계급 연대를 대체한 곳에서 남은 것은 국가 간 전쟁뿐이었기 때문이다.
쓰디쓴 결말
1980년 무렵 서구 마오주의는 사실상 증발했다. 미국에 남은 세력 대부분은 자본주의 정당인 민주당의 대선 경선 운동으로 흘러들었다. 프랑스 마오주의자 중에서는 ‘신철학자’가 되어 신자유주의의 강경한 옹호자로 변신한 자들이 유독 많았다. 다른 나라에서 마오주의자들은 녹색당으로, 학계로, 종파적 무의미함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가장 비극적인 것은 압도적 다수가 그저 좌파 정치를 떠났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자신이 겪은 마오주의 운동과 동일시했기에 깊은 환멸에 빠졌다.
이 실패를 개인의 결함이나 우연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마오주의 이론 구조가 전혀 다른 조건에 이식됐을 때 나타난 논리적 귀결이었다. 당이 계급을 대신하고, 민족이 계급을 대신하며,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이 물질적 조건을 대신하고, 총구가 평의회를 대신하는 체계 말이다. 중국에서 이 노선은 농민전쟁을 통해 민족국가 수립과 국가 주도 산업화라는 역사적 과제를 대행하는 동안 성공처럼 보였다. 그러나 거대한 노동계급이 이미 존재하고 그 계급이 실제로 총파업에 나서는 사회에서, 같은 노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계급에 등을 돌리거나 아니면 아예 추수하는 것뿐이었다. 노동자주의는 노동자를 이상화하면서 그들의 실제 행동을 놓쳤고, 글로벌 사우스 중심주의는 그들을 특권 집단으로 규정했다. 둘은 반대처럼 보이지만 노동계급을 자기 해방의 주체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였다.
손실은 컸다. 1960년대 급진화 세대의 과제는 수십 년에 걸친 스탈린주의의 지배 이후 완전히 새로운 것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1970년대 후반 이후의 투쟁 퇴조와 신자유주의의 승리가 겹쳐 모든 좌파 조류가 예상보다 훨씬 가혹한 고립에 처했다. 그럼에도 만약 스탈린주의의 지배적 대안이 처음부터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였다면 1960년대는 서구 노동계급 운동의 중대한 돌파구가 됐을 수도 있다. 실제로는 반혁명적 공산당에서 일정한 연속성을 물려받은 재탕 스탈린주의가 먼저 그 자리를 차지했고, 몇 해 사이에 수천 명의 용기 있고 헌신적인 활동가를 씹어 삼킨 뒤 스스로 무너졌다.
6. 마오 이후: 시장 지향 개혁과 국가자본주의의 연속성
시장 지향 개혁과 지배계급의 연속성
마오 시대의 국가자본주의적 축적은 막대한 인간적 희생을 치렀으나 1970년대 중반에는 현대적 제조업의 기초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중국은 여전히 빈곤했고 세계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미미했다. 노동자와 농민에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기존 방식만으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점이 명확해지자, 덩샤오핑 지도부는 정치적 통제를 유지한 채 시장 메커니즘과 외국 자본을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국가적 경쟁과 자본 축적이라는 궁극적 목표가 변한 것이 아니라, 이를 더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달라진 것이었다.
덩샤오핑 시기의 전환은 1989~1991년의 동유럽처럼 당-국가 기구를 해체하고 시장을 일시에 자유화하는 충격 요법이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은 정치적 지배력과 핵심 경제 부문에 대한 통제를 유지한 채 서방 다국적기업이 중국을 저비용 생산기지로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새로 성장한 자본가의 상당수는 당-국가 간부 자신이거나 혁명 원로의 자녀였고, 일부는 자신이 관리하던 국유기업의 자산과 연결망을 이용해 사적 부를 축적했다. 즉, 시장 지향 개혁은 옛 지배 엘리트를 제거하기보다 그들이 새로운 축적 방식에 적응하고 부를 사유화할 기회를 넓혀 줬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 시대에서 시장 지향 개혁 시대로의 이행을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반혁명’으로 보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였다면 노동계급의 권력을 파괴하고 새로운 자본가 계급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진정한 반혁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오쩌둥 시대의 당-국가 지배층과 그 후손이 개혁을 주도했고 권력도 계속 장악했다. 국가자본주의론의 관점에서는 사적 자본과 시장의 비중이 커졌을 뿐, 노동계급이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경쟁적 축적이 사회의 우선순위를 결정한다는 핵심 생산관계는 지속됐다. ‘누가 국가와 생산을 실제로 통제하는가’라는 물음이 단순한 국유·사유의 구분에 앞서는 이유다.
시장 지향 개혁은 노동자에게 민주주의와 통제권을 주지 않았다. 덩샤오핑 분파는 한때 ‘민주벽’ 운동을 제한적으로 용인했지만 권력을 공고히 한 뒤 탄압했고, 1989년 톈안먼 운동도 군대를 동원해 유혈 진압했다. 이후에도 홍콩 민주화 운동, 위구르인의 자결 요구, 코로나19 봉쇄 반대 시위와 독립 노동조합 운동은 강한 국가 탄압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노동 조건·임금·환경·교육을 둘러싼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폭스콘 같은 거대 공장에서도 노동자들은 보건·안전과 보상 문제를 둘러싸고 파업을 벌여 양보를 얻어 냈다. 개별 투쟁은 서로 고립돼 보일 수 있지만, 중국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산 네트워크를 멈출 수 있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은 바로 그곳에서 싹튼다. 물론 가혹한 탄압 탓에 독립적 전국 조직을 지속해서 유지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개혁 이후의 불평등은 이러한 계급적 연속성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2022년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가운데 가장 부유한 20명의 재산을 합치면 당시 환율로 약 715조 원에 달한 반면 인구의 약 40퍼센트는 한 달 20만 5000원 정도로 생활했다. 수치 자체는 시점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지만, 공산당 정치 엘리트와 거대한 사적 부가 결합해 있다는 구조적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마오쩌둥과 시진핑 시대 사이에는 경제 운영 방식의 큰 차이와 함께 중요한 연속성도 존재한다. 노동계급의 희생을 대가로 중국의 국가적 부상을 추구하는 민족주의적 지향, 그리고 당 관료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독립적 조직을 억압하는 정치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부상과 미·중 간 제국주의적 경쟁
오늘날 중국의 세계적 부상도 마오 시대의 국가 주도 축적과 단절된 별개 현상으로 단순하게 볼 수 없다. 중국과 미국의 자본주의는 소유 구조와 국가 개입 방식에서 차이가 크지만, 두 체제 모두 시장·원자재·전략 광물·투자처·정치적 영향력을 두고 경쟁하는 세계 자본주의 안에서 작동한다. 레닌과 부하린의 제국주의론이 강조했듯이 자본 간 경제적 경쟁이 국가 간 지정학적·군사적 경쟁과 결합할 때 제국주의 체제가 형성된다.
중국은 세계적 군사력과 동맹·기지·무기 공급망에서는 여전히 미국보다 열세다. 따라서 세계 군사 질서를 유지하고 미·중 군사 경쟁을 조직하는 구조적 책임은 여전히 미국 쪽이 더 크다. 그러나 서태평양에서 양국의 군사적 격차는 크게 좁혀졌고, 중국도 대만과 남중국해에서 독자적인 강압과 군비 증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은 단순한 피해국이 아니라 지역적 군사화의 공동 생산자이며, 일부 위기에서는 긴장 고조의 주된 책임이 있다.
먼저 전체 군사력과 세계적 군사 체계를 보면 양국은 여전히 비대칭적이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25년 군사비는 미국이 9540억 달러, 중국이 3360억 달러로 약 2.8 대 1이다. 2016년에도 미국이 6110억 달러, 중국이 2150억 달러로 거의 똑같이 2.8 대 1이었다. 명목 군사비의 상대적 격차만 놓고 보면 지난 9년 동안 거의 좁혀지지 않은 셈이다. 물론 단순 환율 환산액은 중국의 낮은 임금과 국내 조달 능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므로 이를 곧바로 전투력 격차로 해석하기에는 난점이 있다.
더 중요한 점은 미국 군사력을 미국 한 나라의 국방비로만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2025년 미국과 유럽의 나토 회원국 군사비만 합쳐도 약 1조 5130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중국 군사비의 약 4.5배다. 이 예산이 모두 중국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이 동원할 수 있는 군사·산업·동맹 체계의 규모를 보여 준다. 나토는 현재 32개 회원국으로 이뤄져 있고, 미국은 2021~2025년 세계 무기 수출의 42퍼센트를 차지하며 99개국에 무기를 공급했다. 중국은 이와 비교할 만한 세계적 무기·동맹 공급망을 갖추지 못했다.
핵전력에서도 격차가 상당하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2026년 초 중국의 핵탄두 보유량을 약 620기로 추정한다. 중국의 핵전력이 가장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나, 2030년에 1,000기를 넘어선다 해도 미국이나 러시아가 현재 보유한 핵탄두의 약 4분의 1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해외 전쟁 수행 체계의 차이는 더 크다. 중국은 지부티 기지와 캄보디아 림 해군기지의 지원시설 등을 확보하며 추가 거점을 모색하고 있지만, 미 국방부 보고서조차 중국이 아직 전 세계적 규모의 체계적인 해외 지휘·통제 구조를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출처가 경쟁국인 미 국방부라는 점은 감안해야 하지만, 중국의 해외 군사망이 미국의 전 세계 기지·사령부·동맹망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기본 판단은 타당하다.
따라서 세계 어디에서든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고, 장기간 전쟁을 지속하며, 동맹국을 규합하고, 무기·정보·금융·제재 체계를 결합할 능력에서는 여전히 미국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서태평양에서는 단순한 ‘강한 미국 대 약한 중국’ 구도가 아니다. 지난 9년 동안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중국의 군사력이 미국과 대등해졌다기보다 중국 주변에서 미국의 군사 개입을 저지할 능력이 크게 강화됐다는 점이다.
미 국방부는 중국군이 본토에서 약 1,500~2,000해리 범위 안에서 효과적인 타격 작전을 수행해 미국의 개입을 심각하게 저지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중국은 지상발사 탄도·순항미사일, 방공망, 전투기, 잠수함, 위성·감시체계를 본토 인근에 집중할 수 있다. 반면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 병력과 보급을 투입해야 한다. 따라서 전 세계 군사력에서는 미국이 우세하더라도 대만해협이나 중국 연안에서 벌어지는 국지전 초기 국면에서는 중국이 수적·지리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중국의 군사 활동 역시 단순한 대미 방어적 반응으로 보기 어렵다. 미 국방부 보고서에 따르면 대만 방공식별구역에서 탐지된 중국군 항공기는 2023년 약 1,703회에서 2024년 약 2,771회로 급증했다. 중국 해군 함정이 대만 주변에 상시 배치되고, 중국 해경의 진먼·마쭈열도 진입도 잦아졌다. 중국은 대만을 포위하는 형태의 대규모 훈련을 거듭하며 봉쇄와 타격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 미국과 대등한 세계적 패권국이 됐다는 뜻은 아니다. 중국은 세계 전역에서 미국을 대체하기보다 우선 동아시아 내 미국의 군사적 접근을 차단하고 자국 중심의 지역 질서를 구축하려 한다. 그러나 바로 그 과정에서 타이완 무력 위협, 남중국해 영유권 군사화, 해경·민병대·해군을 결합한 회색지대 압박을 확대하고 있다. 이는 중국 자체의 국가적·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하는 행동이며, 미국의 압박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만은 아니다.
미국도 단순히 중국의 팽창에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미국은 기존의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고자 중국 주변의 동맹망과 군사 배치를 적극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2026년 미국 국방전략은 제1도련선 내 중국의 군사 행동을 저지할 ‘거부적 억제(거부 방어)’를 구축하고, 역내 동맹국이 중국 견제와 세력 균형을 위해 더 많은 군사적 기여를 하도록 요구한다고 명시한다. 이 전략은 미국의 동맹망을 유라시아를 둘러싼 방어선으로 규정하며 동맹국의 국방비 증액과 군수산업 확대를 추진한다. 미국은 한국·일본·호주·필리핀 등을 연결하고, 미사일·기지·정보망을 통합해 대중국 장기 군사경쟁을 제도화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군비경쟁은 한쪽의 행동에 다른 쪽이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단선적 과정이 아니다. 미국은 기존 패권 우위를 고수하려 하고, 중국은 그 질서 내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 자국 중심의 지역적 위계와 영향권 확장을 꾀한다. 양측의 행보는 서로를 명분 삼아 군비경쟁의 악순환을 심화한다.
다만 ‘상호 작용’이라는 사실이 곧 ‘동등한 책임(50대 50)’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은 이미 구축된 전 지구적 기지·동맹·무기·핵·금융제재 체계의 중심이며, 그 체계를 유지하고 중국 포위망을 조밀하게 재편하는 주체다. 따라서 세계 체제적·구조적 책임은 여전히 미국 쪽이 더 크다. 동시에 중국도 지역 군사화를 함께 촉발하고 특정 사안에서 긴장을 선제적으로 고조시키는 주체다.
결론적으로 미·중 간 영향력은 아직 대칭적이지 않으나, 이는 ‘세계 체제 수준의 구조적 책임에 한정할 때’라는 전제가 뒤따라야 한다. 2017년이 미국의 압도적 우위와 중국의 추격이라는 구도였다면, 2026년에는 ‘세계적 차원의 비대칭성, 중국 주변부의 격차 축소, 사안별 상이한 구체적 책임’이라는 세 층위를 엄밀히 구분해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주의자의 출발점은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진영론이 아니다. 물론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이며, 아시아 내 동맹·기지·군사력 확장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그러나 중국 지배계급도 자국 노동자와 주변국을 희생시키며 영향력과 군사력을 확대하고 있다. 두 국가가 상대국을 악마화하며 민족주의를 부추길수록 노동자들은 군비 경쟁과 위기의 비용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대안은 어느 한쪽 지배계급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국의 제국주의 경쟁과 민족주의에 맞서 노동계급의 국제적 연대와 자력 행동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7. 맺음말
서구 마오주의의 파국은 이미 반세기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 경험이 잊힌 만큼, 자본주의와 단절하기 시작한 새 세대가 급진적 대안을 찾을 때 마오주의의 이론적 전제는 새로운 형태로 되살아나곤 한다. 특히 미국과 글로벌 사우스의 신생 좌파 그룹 중에는 마오주의 경험을 근거로, 도시 노동계급만이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라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제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청년들이 있다. 19세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러시아 농촌 공동체의 자본주의 단계 우회 가능성을 인정한 점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장은 러시아 농민의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 가능성을 의미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러시아 농촌 공동체 13 가 고차원적 공산주의 형태로 직접 이행하려면 러시아 혁명이 서유럽 노동자 혁명을 촉발하고 두 혁명이 상호 보완해야 함을 분명히 했다. 특히 엥겔스는 러시아 농민이 서유럽 노동자보다 사회주의에 더 가깝다는 견해를 “완전한 허튼소리”라며 일축했다. 결정적 조건은 서유럽 노동자 혁명의 승리와 그 혁명이 제공할 물질적 토대였다. 앞서 살펴봤듯 레닌이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후진국의 자본주의 발전 단계 도약 가능성을 언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승리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그 평의회 정부들의 체계적 원조, 국제 소비에트 연방과 공동 계획 경제를 전제로 한 구상이었지 후진국 농민이 독자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이 아니었다.
따라서 비판의 핵심은 ‘후진국의 비자본주의적 발전’과 ‘농민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어떤 경우에도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은 후진국 농민군이 독자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국유화를 단행한 것을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중국 혁명을 근거로 도시 노동계급의 역사적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예외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기준 자체를 국유화로 대체한 결과다.
오늘날 중국의 부상을 ‘미국 패권에 맞서는 진보적 균형추’로 보는 진영론도 같은 오류를 다른 형태로 반복한다. 마오쩌둥 시대의 국유화를 사회주의의 증거로 삼거나 현재 중국의 대미 경쟁을 반제국주의로 보면, 중국 노동자와 피억압 대중의 이해관계를 중국 국가의 이해관계와 뒤섞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중국이 미국보다 약하고 미국의 책임이 더 크다는 사실과 중국도 제국주의적 경쟁에 뛰어든 자본주의 강대국이라는 사실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독립적 입장은 특정 국가의 지정학적 승리가 아니라 각국 노동계급의 투쟁에서 출발한다.
마오주의는 중국 농촌이 낳은 자생적 사상이 아니라 1927년의 패배와 스탈린주의 노선의 실패가 낳은 산물이었다. 또한 1949년의 승리는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 아닌 지식인 지도부와 농민군이 수행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혁명이었으며, 그 결과 수립된 체제는 국유화를 수단으로 삼은 관료 지배 국가자본주의였다. 이 세 명제는 서로 맞물려 있다. 노동계급이 주체가 아니었기에 당이 계급을 대신했고, 당이 계급을 대리했기에 국유화가 곧 사회주의로 통용됐으며, 국유화가 사회주의로 통용됐기에 축적의 압력이 노동자와 농민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마오주의의 승리를 마르크스주의 원칙의 예외로 보는 것은 중국의 국유화를 사회주의로 오인하는 스탈린주의적 ‘국유 물신숭배’에서 비롯한 오류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중 누구도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주도 계급이 노동계급이라는 원칙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 노동계급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마오주의가 우회하려 했던 그 원칙이 여전히 유효한 출발점임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읽을거리
- 이정구, 《당신이 알아야 할 현대 중국의 모든 것》, 책갈피, 2023.
- 찰리 호어, 《천안문으로 가는 길》, 책갈피, 2006.
-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제1권/제2권, 이산, 2004..
- 벤자민 슈워츠, 《중국 공산주의 운동사》, 형성사, 1983.
- 佐伯有一 등, 《중국 현대사》, 한길사, 1984의 제17~19장, 제22장.
- Nigel Harris, The Mandate of Heaven: Marx and Mao in Modern China, Haymarket Books, 2015. (이 책은 이정구에 의해 번역돼 곧 출판된다고 한다.)
-
Harold Isaacs, The Tragedy of the Chinese Revolution, Secker & Warburg, 1938. (이 책은 정원섭과 김명환에 의해 번역돼 곧 출판된다고 한다.)
[부록1]
실천이 진리의 기준인가? ― 마오쩌둥 실천론의 이율배반
“실천이 진리의 기준이다”라는 명제는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제2테제를 압축한 표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명제와 마르크스의 제2테제가 똑같지는 않다. 14
마르크스는 “효과가 있으면 참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사유에 객관적 진리가 귀속되는지는 실천과 분리된 순수 이론의 영역에서 결정할 수 없으며, 그 사유의 현실성과 힘을 실천 속에서 입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마오는 「실천론」에서 지식이 “예상한 결과”를 달성할 때 검증된다고 설명하고, 지식이나 이론의 진리는 사회적 실천이 낳은 “객관적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15 이 설명은 객관적 세계의 법칙과 사유의 일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유물론적이지만, “예상한 결과의 달성”을 진리의 판정 기준으로 삼으면 “참된 것은 성공하고, 성공한 것은 참되다”는 실용주의적 순환으로 미끄러진다. 여기서 실용주의란 진리를 당장의 유용성·효과·성공과 동일시하는 통속적이고 도구주의적인 태도를 뜻한다.
1. 마르크스에게 실천은 이론을 시험하는 외부의 실험장이 아니다
마오의 공식은 흔히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해된다: 이론 수립 → 실천에 적용 → 성공 여부 확인 → 이론의 진위 판정.
이 도식에서는 이론과 실천이 서로 분리된 두 항처럼 나타난다. 실천은 이미 만들어진 이론을 사후적으로 검사하는 일종의 시험대가 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제1테제에서 실천은 이보다 훨씬 근본적인 개념이다. 마르크스가 기존 유물론을 비판한 까닭은 그것이 현실과 감각적 세계를 단지 관찰되는 “대상”으로만 파악하고, 인간의 감각적 활동이자 대상적 활동으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혁명적이고 실천적·비판적인 활동”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실천은 다음을 모두 포함한다.
- 인간이 자연을 변화시키며 생산하는 활동
-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재생산하는 활동
-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활동
- 기존 사회의 모순을 이해하고 그것을 변혁하는 활동
- 그 활동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이론적 활동
이론은 실천 바깥에서 만들어졌다가 실천에 “적용”되는 단순한 설계도가 아니다. 이론 자체가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실천의 한 계기다.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것은 “이론이 효과적인 도구인가”만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활동에서 그 이론이 생겨났으며, 어떤 사회관계를 표현하고, 어떤 모순을 드러내고, 어떤 인간적 능력을 발전시키는가이다.
2. 마르크스는 “성공”이 아니라 객관적 진리의 현실적 입증을 말한다
제2테제의 출발점은 “객관적 진리”다. 마르크스는 객관적 진리라는 개념을 실천적 유용성으로 대체하지 않는다. 객관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귀속될 수 있는지를 묻고, 그 사유의 “현실성과 힘”이 실천 속에서 입증돼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실천에서 참임을 입증해야 한다”는 말과 “실천에서 성공한 것이 참이다”라는 말은 같지 않다. 어떤 행위가 목표를 달성했다는 사실은 그 행위를 지도한 이론 전체가 참임을 입증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강압으로 파업을 중단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하자. 이것은 강압이 파업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는 데 효과가 있었다는 사실만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이 노동자들이 정부 정책에 동의한다거나, 계급 갈등이 해소됐다거나, 정부의 사회 이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마오의 「실천론」에서는 지식이 예상한 결과를 실현할 때 검증된다는 설명이 반복된다. 그는 공학 계획의 완수, 농작물 수확, 파업의 승리, 전쟁의 승리 등을 목표 실현의 사례로 제시한다. 16 그러나 다음 문제들이 남는다.
첫째, 목표 자체가 타당한지는 누가 판정하는가.
둘째, 동일한 결과가 서로 다른 원인과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은가.
셋째, 단기적 성공이 장기적인 사회적 모순을 심화시킬 수 있지 않은가.
넷째, 특정 전술의 성공이 세계관이나 사회 이론 전체의 진리를 입증할 수 있는가.
다섯째, 패배가 반드시 이론의 오류를 뜻하는가. 올바른 분석을 가진 운동도 물질적 세력관계 때문에 패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공과 진리 사이에는 자동적인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성공은 하나의 증거일 수 있지만, 그 성공이 무엇을 증명하는지는 다시 이론적으로 분석돼야 한다.
3. 마르크스에게 실천은 반드시 “이해된 실천”이다
이 점에서 제8테제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마르크스는 사회생활이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라고 말한 뒤, 이론을 신비주의로 이끄는 문제들은 “인간의 실천과 이 실천의 이해” 속에서 합리적으로 해결된다고 쓴다. 마르크스는 단지 “실천”이라고 하지 않고 “실천의 이해”를 함께 말한다. 경험이나 결과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동일한 파업 패배를 두고도 다음과 같은 상반된 해석이 가능하다.
- 노동자 투쟁은 무익하다는 증거다.
- 조직과 연대가 부족했다는 증거다.
- 국가와 자본의 결합된 힘을 과소평가했다는 증거다.
- 투쟁의 요구와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는 증거다.
- 투쟁은 패배했지만 노동자들의 의식과 조직력은 발전했다는 증거다.
어느 해석이 옳은지는 “패배했다”는 결과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계급관계, 국가의 대응, 노동자들의 조직 수준, 투쟁이 남긴 효과, 장기적 변화 등을 이론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마오 자신도 「실천론」의 다른 대목에서는 이 위험을 인식한다. 그는 단편적인 경험에 머물고 이론을 경시하는 경험주의를 비판하며, “통속적인 실무가”들이 우연한 성공에 만족하면 혁명을 막다른 길로 이끈다고 경고한다. 또한 감각적 경험에서 사물의 본질과 내적 연관을 파악하는 이론적 인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16 따라서 「실천론」 전체를 단순한 실용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4. 마르크스의 실천은 행위자 자신까지 변화시키는 혁명적 실천이다
마오의 공식이 실용주의로 흐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실천이 주로 외적 목표를 달성하는 활동으로 이해되기 쉽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제3테제에서 혁명적 실천은 외부 환경만 바꾸는 활동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환경과 교육이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유물론이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도 인간이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고 비판한다. 환경의 변화와 인간의 자기 변화가 일치하는 과정만이 혁명적 실천이다.
이것은 마오의 명제를 평가하는 데 특히 중요하다. 당 지도부가 이론을 만들고, 대중은 그 이론을 실행하며, 지도부가 그 결과를 평가하는 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 당은 실천을 해석하는 주체이고 대중은 실천의 재료나 대상이 된다. 당의 노선이 성과를 내면 올바른 노선으로 선언되고, 성과가 나지 않으면 하급 조직이나 대중의 집행 부족 탓으로 돌려진다.
이런 구조에서는 “교육자 자신도 교육받아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요구가 실현되기 어렵다. 실천이 지도부의 이론을 시험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도부가 성공의 기준과 자료와 해석을 모두 통제하게 된다. “실천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말이 도그마에 맞서는 명제가 아니라, 당 노선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명제로 뒤집힌다.
마르크스의 혁명적 실천이라면 실천의 결과에 따라 이론만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도 변화해야 한다.
- 실천을 지도한 조직 자체
- 지도자와 대중의 관계
- 의사 결정 방식
- 노동 분업과 권력 구조
- 실천의 목표를 설정하는 방식
-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기준
실천이 지도부를 비판하고 변화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자기 변화의 실천이 아니라 사회를 위에서 조작하는 기술로 축소된다.
5. 마르크스에게 진리의 실천적 검증은 사회관계의 변혁을 포함한다
제6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이 고립된 개인 안에 들어 있는 추상물이 아니라 “사회관계들의 앙상블”이라고 말한다. 또한 포이어바흐가 역사적 과정을 도외시하고 개인을 고립된 존재로 전제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적 실천은 개인이나 조직이 세운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것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 실천이 어떤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재생산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정책이 있다고 하자. 이 정책이 실제로 생산량을 늘렸다는 점에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노동자들에 대한 강압과 관료적 명령을 강화했고 노동조건 악화, 정보 은폐, 불평등한 분배를 낳았다면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실용주의적 평가는 목표 생산량이 달성됐으므로 정책이 옳았다는 결론으로 기울기 쉽다. 마르크스적 평가는 생산량만 보지 않고 다음을 묻는다.
- 생산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수동적 도구가 됐는가, 능동적인 집단적 주체가 됐는가.
- 생산을 지배하는 사회관계가 변화했는가, 오히려 강화됐는가.
- 노동자들의 집단적 통제와 자유가 확대됐는가.
- 기존 사회의 모순이 해결됐는가,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됐는가.
- 실천의 과정에서 행위자들이 자신의 조건과 능력을 변화시켰는가.
이런 질문을 제거하면 “실천”은 사회 변혁이 아니라 행정적 효율성과 정책 성과를 뜻하게 된다.
6. 마르크스의 실천은 “실천적·비판적”이고 “혁명적”이다
제4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종교적 세계를 세속적 기초로 환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세속적 기초가 왜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돼 종교적 세계를 만들어 내는지를 그 내부의 분열과 자기모순을 통해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세속적 기초를 모순 속에서 이해하는 동시에 실천적으로 혁명화해야 한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실천은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기술이 아니다. 실천의 목표와 조건 자체를 낳은 사회적 모순을 폭로하고 변혁하는 활동이다.
반면 실용주의는 일반적으로 목표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마르크스의 비판적 실천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묻는다.
- 누가 이 목표를 설정했는가.
- 이 목표는 어떤 계급관계를 표현하는가.
- 목표 자체가 해방적인가.
- 수단이 목표를 변질시키지는 않는가.
- 성공으로 규정되는 결과가 누구에게 이익이고 누구에게 손해인가.
- 그 실천은 기존 모순을 해소하는가, 은폐하는가.
따라서 어떤 정책이나 정치 노선이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참되거나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본주의 기업도 생산성과 이윤을 높이는 데 성공할 수 있고, 국가도 억압과 감시를 통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성공은 자본주의나 국가 관료제의 이론적·도덕적·정치적 정당성을 입증하지 않는다.
7. 제11테제는 행동주의나 반이론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제11테제는 흔히 이론보다 행동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제11테제는 앞선 열 개의 테제를 폐기하지 않는다. 세계를 올바르게 변화시키려면 현실을 사회관계와 모순 속에서 이해해야 하며, 변화의 실천도 계속해서 비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변화”는 “해석”의 반대말이 아니라, 참된 해석이 현실적 힘을 얻는 형식이다.
제11테제를 “무엇이든 행동하라”, “성공한 행동이 옳은 행동이다”라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의 명제를 사실상 정반대로 바꾸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론을 행동으로 대체하려 한 것이 아니라, 관조적 이론과 비판적·혁명적 실천의 분리를 극복하려 했다.
8. 마오의 「실천론」 안에 존재하는 두 경향
마오의 「실천론」에는 서로 긴장하는 두 경향이 있다. 첫 번째는 마르크스적인 경향이다.
- 지식은 사회적·역사적 실천에서 발생한다.
- 실천은 생산, 계급투쟁, 정치, 과학과 문화 활동을 포함한다.
- 단편적 경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 감각적 인식에서 본질과 내적 연관을 파악하는 이론적 인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 이론은 다시 현실을 변혁하는 실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 실천과 인식은 반복되며 진리는 계속 발전한다.
마오는 실제로 경험만 존중하고 이론을 경시하는 “통속적인 실무가”를 비판한다. 16
두 번째는 실용주의로 기울 수 있는 경향이다.
- 진리 검증을 “예상한 결과의 달성”으로 설명한다.
- 파업이나 전쟁의 승리를 이론 검증의 사례로 제시한다.
- 이론의 가치를 실천을 지도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기능에 주로 연결한다.
- 실천의 주체를 당과 혁명 지도부로 집중시킨다.
- 누가 목표와 성공의 기준을 정하는지는 충분히 문제 삼지 않는다.
- 특정한 정치적 성공에서 이론 체계 전체의 진리를 추론한다.
따라서 마오의 「실천론」 전체가 실용주의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지만, “실천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압축 명제에는 실천을 성과 판정 장치로 축소할 위험이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객관적 결과”를 “예상한 목표의 실현”과 사실상 동일시하면 그 위험은 커진다.
결론
마르크스의 명제를 더 정확히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객관적 진리는 사회적·역사적 실천 속에서 그 현실성과 힘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실천이 당장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사실이 그 실천을 지도한 이론 전체의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실천 자체도 그 사회적 관계, 내적 모순, 계급적 내용, 장기적 결과, 행위자들의 자기 변화라는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이해되고 비판돼야 한다.
마오의 “실천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공식은 마르크스의 제2테제를 간명하게 표현하는 듯하지만 다음과 같은 축소를 일으킨다. 마르크스: 객관적 진리 → 사회적·감각적·혁명적 실천 속에서 현실적 힘을 입증함. 실용주의적으로 축소된 마오의 공식: 예상한 결과를 달성함 → 이론이 참임.
마르크스는 이론과 실천, 환경의 변화와 인간의 자기 변화, 현실 이해와 사회관계의 변혁을 하나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마오는 이론을 목표 달성을 위한 도구로, 실천을 성공 여부를 판정하는 시험대로 만든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 비춰 볼 때 문제는 “실천을 중시한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실천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에 있다. 실천을 비판적으로 이해된 사회적·혁명적 자기 활동으로 파악하면 마르크스주의가 되지만, 실천을 주어진 목표의 효과적인 달성으로 파악하면 실용주의가 된다.
[부록2]
마오쩌둥 모순론의 이율배반
마오쩌둥의 「모순론」은 얼핏 고전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해설한 글로 보인다. 마오는 모순이 사물의 운동과 발전의 원천임을 강조하며 모순의 보편성과 특수성,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 모순의 적대적·비적대적 형태를 폭넓게 논한다. 특히 레닌을 거듭 인용하며 대립물의 통일이 유물론적 변증법의 핵심이라고 천명한다.
실제로 「모순론」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변증법을 계승한 중요한 통찰이 적지 않다. 따라서 그 글을 단순히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라고 일축할 수는 없다. 문제는 마오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그 범주 간의 관계를 왜곡·변형했다는 점이다. 특히 ‘모든 차이는 모순’이라는 과도한 일반화, 내적 모순과 외적 원인의 경직된 위계화, 개별 특수 모순마다 단선적인 해결법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방식, ‘주요모순’과 ‘모순의 주요 측면’을 중심으로 복잡한 사회적 총체를 자의적으로 배열하는 구도가 대표적이다.
그 결과 「모순론」에는 서로 다른 두 변증법이 공존한다. 한 축에는 현실을 상호 연관된 역동적 변화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구체적으로 분석하려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변증법이 자리한다. 다른 한 축에는 현실을 파편화된 모순들로 분해한 뒤 임의로 ‘주요모순’을 지정하고 도식적인 해결책을 선택하는 일종의 분류학적 체계가 들어서 있다. 전자가 고전 마르크스주의에 속한다면, 후자는 거기서 크게 벗어난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헤겔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관점, 세계가 하나의 총체(전체)라는 관점, 그리고 이 총체가 내적 모순을 품고 있다는 관점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범주를 추상적인 철학 공식으로 삼아 현실에 적용하지 않았다. 헤겔의 변증법적 범주는 현실의 역사적·경험적 발전 과정과 체계적이고 검증 가능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철저히 재구성돼야 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개념은 매개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모순된 총체라는 것은 경제·정치·국가·이데올로기·법·민족 문제가 모두 동일하다거나 하나가 나머지로 곧바로 환원된다는 뜻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방법은 중심적인 사회관계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어떤 상이한 형태로 나타나는지 추적하는 것이다. 생산·분배·교환·소비는 ‘통일 속의 차이’이며, 생산이 전체적으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해서 교환이나 소비가 독자적 작용을 전혀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각 요소는 서로 작용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중심 모순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모순이 경제·정치·문화·법·이데올로기에서 어떤 특수한 매개를 통해 표현되는지를 경험적으로 밝혀내야 한다.
레닌이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헤겔을 다시 읽으며 새롭게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러한 변증법이었다. 레닌에게 총체는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총체를 움직이는 동력은 내부의 ‘상호 배타적이고 대립하는 경향들’이 벌이는 투쟁이다. 모순과 단절, 비약이 곧 자기 운동의 원천이다. 어떤 대상을 참되게 인식하려면 가능한 한 모든 측면과 연관, 매개를 살펴야 하고, 대상을 변화와 발전 속에서 봐야 하고, 실천을 진리의 척도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레닌이 도달한 결론은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라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도 같은 전통을 잇는다. 트로츠키에게 변증법은 현실을 대체하는 만능열쇠가 아니다. 변증법은 사실에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공식이 아니라 사실의 성격과 발전 과정에서 도출해야 하며, 구체적인 과학적 분석을 대신하지 않고 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끈다. 또한 트로츠키의 ‘분화된 통일’ 개념은 총체의 각 부분이 전체에 속하면서도 고유한 구조와 운동 법칙을 지닌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이를 기준으로 삼으면 「모순론」의 장점과 한계를 비교적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다.
마오가 올바르게 강조한 것
먼저 마오가 정당하게 짚어 낸 대목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마오는 사물의 발전을 외적 충격의 단순한 결과로 파악하는 기계론을 비판하고, 운동의 원천을 사물 내부의 모순에서 찾았다. 또한 어떤 사물도 다른 사물과의 관계를 벗어나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봤다. 이는 기계적 인과론에 대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비판과 일맥상통한다.
마오는 또한 모순이 구체적인 형태를 띤다는 점을 강조한다. 서로 다른 운동 형태와 역사적 과정에는 저마다의 특성이 있으므로, 추상적인 공식을 구체적 상황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마오는 바로 이 점에서 레닌이 강조한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거듭 강조한다.
모든 모순이 곧 적대적 모순은 아니라는 지적도 타당하다. 모순과 적대는 같은 개념이 아니며 적대는 모순의 특정한 형태라는 주장은 레닌에게서 직접 차용한 것이다. 아울러 마오는 경제 토대가 일반적으로 결정적이라 보면서도 국가·정치·이론 등 상부구조가 특정 조건에서는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이는 단순한 경제결정론보다 분명히 진일보한 관점이다.
마오는 또한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을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의 모순으로 규정하며, 이것이 기업 내부의 조직적 생산과 사회 전체의 무정부적 생산 사이의 모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모순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이 대목은 하나의 근본적 사회관계가 여러 형태로 매개돼 나타난다고 본 마르크스의 방법과 상당히 맞닿아 있다.
따라서 쟁점은 마오가 모순, 특수성, 상호작용, 구체적 분석을 간과했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통찰들을 자신의 ‘주요모순’ 체계와 결합하는 과정에서 변증법의 본질적 성격을 변질시켰다는 데 있다.
차이와 모순을 동일시하는 문제
첫 번째 문제는 마오가 모순의 범위를 지나치게 확장한다는 점이다. 그는 데보린 학파를 비판하면서 모든 차이는 이미 모순을 내포하며, 심지어 차이 자체가 모순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노동자와 농민의 차이도 하나의 모순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고전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서 모순은 단순히 서로 다른 두 항을 뜻하지 않는다. 헤겔이 강조했듯, 변증법적 대립에서 한쪽은 단순한 ‘다른 것’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타자’와 마주한다. 채무자와 채권자, 자본가와 노동자처럼 양자가 서로를 전제하는 동시에 부정하는 관계가 전형적인 모순이다. 노동자가 임금노동자로 존재하려면 자본이 있어야 하고, 자본은 임금노동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자본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단순한 차이까지 모두 모순이라고 규정하면 ‘모순’ 개념은 사물의 운동 원리를 규명하는 범주에서 현실의 온갖 차이를 분류하는 명칭으로 전락하기 쉽다. 실제로 「모순론」에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제국주의와 식민지뿐 아니라 공격과 방어, 승리와 패배, 유리함과 불리함, 무지와 지식까지 모두 유사한 방식으로 ‘모순의 두 측면’으로 다룬다.
이렇게 되면 분석은 ‘어떤 관계가 왜 내적 대립을 낳는가’를 밝히기보다는, ‘어떤 두 측면이 대립하는가’를 찾아내는 단순 분류 작업으로 후퇴한다. 또한 현실에서 포착되는 수많은 ‘모순’을 정리하기 위해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이라는 인위적 위계가 덧붙는다. 「모순론」의 주요모순 개념은 이처럼 과도하게 확장된 모순 개념을 수습하려는 과정에서 도출됐다.
‘내적 원인’과 ‘외적 원인’의 위계
두 번째 문제는 내적 원인과 외적 원인을 다루는 방식이다. 마오가 외부 충격만으로 변화를 설명하는 기계론을 비판한 것은 옳다. 그러나 그는 더 나아가 ‘내적 원인은 근본적이고 외적 원인은 부차적’이라는 일반 명제를 도출했다. 외적 원인은 조건이고 내적 원인은 근거이며, 외적 원인은 오직 내적 원인을 통해서만 작용한다는 것이다.
적정 온도에서 달걀은 병아리가 되지만 돌은 병아리가 될 수 없다는 비유는 유기체 현상을 설명할 때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사회 분석에서 ‘내부’와 ‘외부’를 이처럼 고정적으로 이분화하면 구조적 결함이 발생한다.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의 개별 국가는 외부 세계와 분리돼 완결된 하나의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19~20세기 중국은 세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이미 내부 계급구조, 국가, 토지관계, 산업 발전을 재편한 사회였다. 이런 조건에서 세계시장과 제국주의는 선재하는 ‘중국 내부’에 사후적으로 개입하는 외적 요인이 아니다. 그것은 중국 사회의 내부 구조 자체를 규정하는 핵심 관계다.
이 지점에서 트로츠키의 ‘불균등·결합 발전’(또는 결합된 불균등 발전) 개념이 마오의 도식보다 훨씬 변증법적이다. 트로츠키는 후진국의 혁명 전망을 개별 국가로 한정해 분석하지 않고, 세계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전체(총체적) 맥락 속에서 포착했다. 후진국의 특수성은 세계체제와의 단절이 아니라, 세계체제에 불균등하게 결합하는 방식 자체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고전 마르크스주의에서 ‘외부’와 ‘내부’의 관계는 우선순위를 매겨 놓은 관계가 아니라 매개의 관계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은 물론 중국 사회 밖에서 가해진 군사적 공격이라는 점에서는 외적 사건이다. 그러나 그 전쟁이 중국의 자본가·지주·노동자·농민에게 무엇을 뜻하며 어떤 정치적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세계 자본주의와 중국 계급 관계의 총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마오의 내인·외인 공식은 기계적 외인론을 비판하는 데 유용하지만, 사회를 일정한 경계를 지닌 자족적 실체로 취급하는 반대편 오류로 기울 위험이 있다.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특수한 모순들을 고립시키다
마오는 「모순론」에서 특히 모순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각 운동 형태에는 그것만의 ‘특수한 모순’과 ‘특수한 본질’이 있으며, 질적으로 다른 모순은 질적으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의 모순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민(민중)과 봉건제의 모순은 민주주의 혁명으로, 식민지와 제국주의의 모순은 민족해방전쟁으로 해결된다고 제시한다.
이 명제는 매우 그럴듯하다. 서로 다른 문제에는 서로 다른 구체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러나 바로 그 자명성 때문에 문제의 본질을 놓치기 쉽다.
마르크스의 ‘구체적 분석’은 여러 모순을 각각 독립된 상자에 넣은 다음 각 상자에 맞는 해결책을 붙이는 방식이 아니다. 핵심은 서로 다른 현상들이 어떤 매개를 통해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가령 마르크스의 방법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생산과 유통은 서로 다른 구조와 고유한 모순을 지니지만 분리된 두 과정은 아니다.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자본주의 재생산 과정 안에 결합돼 있다. 바로 그 통일과 분리가 자본주의 경제위기를 낳는다.
이런 분석에서 ‘특수성’은 전체로부터의 독립을 뜻하지 않는다. 특수성은 총체(전체) 속에서 다른 관계들과 맺는 특수한 매개로 생겨난다.
반면, 마오의 설명에서는 각 모순이 마치 자기만의 원인과 자기만의 해결법을 지닌 별도의 표본처럼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국의 제국주의 문제, 토지 문제, 계급 문제는 이미 세계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얽혀 있었다.
따라서 마오의 특수성론은 구체성을 강조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구체적 총체성을 약화시킨다.
마오의 인식론도 온전히 변증법적이지 않다
비슷한 문제는 마오가 인식 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인간 인식이 개별적·특수한 인식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나아간 뒤, 다시 일반적 인식을 지침 삼아 새로운 특수 사물을 연구하는 순환을 반복한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 자체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한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변증법보다는 훨씬 단순하다. 마르크스에게 경험적으로 처음 주어진 ‘구체적인 것’은 실제로는 아직 이해되지 않은 혼란스러운 전체일 수 있다. 예컨대 한 나라의 ‘국민’에서 출발해도 국민을 계급으로, 계급을 임금노동과 자본으로, 다시 가치·화폐·교환 등의 관계로 분석하지 않으면 ‘국민’은 추상적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분석은 이 혼란스러운 구체에서 추상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여러 규정과 관계의 풍부한 총체로서 구체를 재구성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레닌도 인식을 단순한 경험의 반영으로 보지 않았다. 과학적 추상은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 배후의 관계를 파악해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다. 그러나 추상은 다시 실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레닌이 정리한 경로는 살아 있는 지각에서 추상적 사고로, 다시 실천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마오의 ‘특수→일반→특수’ 공식에는 본질과 현상, 추상과 구체, 이론과 실천 사이의 복잡한 매개가 충분히 담겨 있지 않다. 그래서 그의 반(反)교조주의는 때때로 ‘구체적인 자료를 많이 조사한 뒤 일반 원리를 알맞게 적용하라’는 경험주의적 교훈에 머무르고 만다.
‘주요모순’은 변증법적 총체를 위계적 목록으로 바꾼다
「모순론」에서 마오 사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주요모순론이다. 복잡한 과정에는 여러 모순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반드시 다른 모순의 존재와 발전을 결정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주요모순’이며, 어느 단계에서나 주요모순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그는 단언한다. 주요모순을 붙잡으면 모든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오의 방법은 고전적 변증법과 가장 뚜렷하게 갈라진다. 물론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사회현상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는 근본적 구조가 있고 그 구조의 핵심에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관계가 있다. 경제적 생산관계와 국가나 이데올로기의 관계도 완전히 대칭적이지 않다. 그러나 ‘근본적 관계가 있다’는 주장과 ‘매 순간 하나의 주요모순만 존재하며 나머지는 그것에 종속된다’는 주장은 다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총체는 단선적 위계가 아니라 ‘분화된 통일’(트로츠키)이다. 현실 사회는 여러 층위의 불균등한 변증법적 상호작용이 복잡하게 얽힌 구조다. 따라서 총체의 다양한 층위를 하나의 중심 모순으로 환원해서는 안 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매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 차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마오의 질문이 흔히 ‘여러 모순 가운데 어느 것이 지금 주요모순인가?’라면, 마르크스의 질문은 ‘이 여러 갈등과 운동이 어떤 사회적 총체 속에서 어떤 관계를 통해 서로를 형성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전자가 서열을 찾는다면 후자는 매개를 찾는다. 마오의 방식에서는 각 모순이 먼저 독립적으로 존재한 뒤 ‘주요/부차적’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마르크스의 방식에서는 처음부터 각 부분의 성격 자체가 다른 부분들 및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따라서 ‘주요모순’은 정치적 정세를 요약하는 제한적 표현으로만 유효하다. 특정 순간 어떤 충돌이 다른 쟁점을 압도할 만큼 첨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윤석열 비상계엄과 탄핵 상황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이를 ‘모든 복잡한 과정에는 반드시 단 하나의 주요모순만 존재한다’는 일반 변증법 법칙으로 일반화하면 문제가 생긴다.
여기서는 ‘구조적 근본성’과 ‘정세적·전술적 우선성’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특정 사안이 당장의 정치 행동에서 최우선 과제가 될 수는 있어도, 이를 발생시키고 규정하는 근본적 사회관계가 ‘부차적 모순’으로 후퇴하는 것은 아니다.
‘주요 측면’론은 관계를 힘의 역전으로 바꾼다
마오는 하나의 모순 안에서도 양측이 동등하지 않다고 본다. 한쪽은 ‘주요 측면’이고 다른 쪽은 부차적 측면이며, 사물의 성격은 주로 주요 측면이 규정한다는 설명이다. 세력 관계가 바뀌어 양측 위치가 역전되면 사물의 성격도 바뀐다고 본다.
여기에도 현실의 중요한 측면은 담겨 있다. 대립하는 사회세력의 힘은 불균등하게 발전하며 역전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모순 자체의 일반 법칙으로 삼으면, 변증법적 관계는 단순한 힘의 크기 비교 도식으로 축소되고 만다.
마르크스가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를 분석한 방식은 다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사적 소유와 프롤레타리아는 하나의 대립관계를 이루지만 두 항은 단순히 세력의 크기에서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사적 소유는 그 관계를 보존하려는 ‘긍정적’ 측면이고, 프롤레타리아는 자신과 사적 소유 모두를 폐지함으로써 그 관계 자체를 해체할 잠재력을 지닌 ‘부정적’ 측면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가가 지배하고 노동자가 지배받던 상태에서 노동자가 지배하고 자본가가 지배받는 상태로 단순히 두 극의 위치를 뒤집는 것이 아니다. 성공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의미는 자본가와 임금노동자로 이뤄진 관계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다.
마오는 대립물의 상호 전환을 설명하면서 ‘지배받던 프롤레타리아가 지배자가 되고 지배하던 부르주아지가 지배받는 자가 된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이 설명에는 혁명의 한순간을 묘사하는 진실이 담겨 있지만, 변증법적 부정의 핵심을 단순한 힘의 역전으로 오해하게 할 위험도 있다.
마르크스의 부정은 A와 B의 위치 교환이 아니라 A와 B를 모두 만들어 내는 사회관계의 변형이다.
같은 문제가 경제 토대와 상부구조에 관한 마오의 설명에서도 나타난다. 마오는 생산력이 일반적으로 주요 측면이지만 어느 시점에는 생산관계가 주요 측면이 되고, 경제 토대가 일반적으로 결정적이지만 특정 시점에는 상부구조가 주요하고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마오가 기계적 경제결정론을 피하려 한 의도는 타당하다. 그러나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해결법은 ‘어느 쪽이 지금 주요 측면인가’를 번갈아 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엥겔스는 국가가 경제 발전에서 상대적 독립성을 획득해 다시 경제에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두 영역의 구체적 매개와 불균등한 상호작용을 분석했다.
레닌도 1921년 노동조합 논쟁에서 정치가 경제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치와 경제를 ‘한편으로는 이것, 다른 한편으로는 저것’ 식으로 절충하는 부하린의 태도를 비판했다. 필요한 것은 정치와 경제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구체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전면적으로 분석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주요 측면의 교체’보다 ‘불균등한 상호작용과 매개’가 고전 마르크스주의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일본의 중국 침략에서 계급 모순은 정말 부차적이 되는가
주요모순론의 정치적 의미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중일전쟁에 대한 마오의 분석이다. 마오는 제국주의가 반(半)식민지 국가를 침략하면 제국주의와 해당 국가 사이의 모순이 주요모순이 되고, 그 나라 내부의 모든 계급 모순은 일시적으로 부차적·종속적 위치로 밀려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일부 매국노를 제외한 ‘모든 계급’이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에서 일시적으로 단결할 수 있다고 본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우리는 대일 전쟁이 진정한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점을 인정하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공동의 적에 맞서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과 일시적으로 연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다만 스탈린과 마오가 이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계급적·정치적 독립성을 희생시키는 결론을 끌어낸 것은 비판한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레닌이 지적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곧, 식민지·피억압국의 부르주아지는 민족운동을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혁명적 계급을 억압하고자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와 결탁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 대 중국 민족’이라는 모순과 ‘중국의 노동자·농민 대 중국 지배계급’이라는 모순은 별개의 회로처럼 따로 작동하지 않는다. 일본과 싸우는 중국 지배계급조차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할지는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노동자와 농민이 일본의 침략을 겪는 방식도 자본가나 지주가 겪는 방식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일본의 침략이 중국 사회의 계급 갈등을 가릴 수는 있어도 없애지는 못한다. 오히려 특정 조건에서는 갈등을 한층 첨예하게 만들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비판이 민족 문제를 도외시하거나 당면한 정치 과제들 사이의 우선순위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으로 오해돼서는 안 된다. 일본의 침공을 격퇴하는 일이 특정 국면에서(가령 1937년 7월 이후 중일전쟁이 전면전으로 도약하던 시기) 중국 혁명의 압도적인 당면 과제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에 맞선 투쟁이 현재 가장 긴급하다’는 명제와 ‘계급 모순이 부차적 모순으로 후퇴했다’는 명제는 엄연히 다르다. 전자가 정세와 전술의 차원이라면, 후자는 사회구조를 규정하는 차원이다.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전자를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지만 후자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다.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이 제시하는 대안
바로 이 점에서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은 마오의 주요모순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안을 제시한다. 트로츠키는 후진국이 먼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모든 단계를 완수하고 나서 별도 단계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단계론 전략을 거부했다.
트로츠키 분석의 출발점은 한 나라 내부의 발전 단계가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라는 총체였다. 세계체제에서는 서로 다른 역사적 단계와 생산형태가 결합하며, 바로 그 결합 때문에 뒤늦게 발전한 사회에서 민주주의적 과제와 사회주의적 과제가 서로 얽힐 수 있다. 이는 ‘중국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수성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반면 마오의 논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중국에는 제국주의 모순, 봉건 모순, 계급 모순 등이 있다. 현재 어느 것이 주요모순인지 판단하고 그에 맞는 혁명 단계를 정해야 한다.
트로츠키의 논리는 다르다. 중국의 농민 문제, 민족해방 문제, 부르주아 민주주의 문제와 노동계급의 사회주의적 이익이 세계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불균등한 총체 속에서 어떻게 결합됐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마오는 과제들을 분류하고 순서를 정한다. 트로츠키는 서로 다른 과제들이 역사적 발전 속에서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묻는다.
바로 이것이 단계론과 불균등·결합 발전론의 차이이자, 주요모순론과 고전적 변증법의 중요한 차이다.
반(反)교조주의가 새로운 공식으로 변하다
「모순론」의 가장 큰 역설 가운데 하나는 이 글이 교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쓰였지만 그 자체가 새로운 교과서적 공식으로 변하기 쉽다는 점이다. 마오는 글의 서두에서 데보린 학파의 영향과 중국공산당의 교조주의를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명시한다.
실제로 ‘구체적 분석’, ‘특수성’, ‘서로 다른 모순에는 서로 다른 해결법’ 등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전체 체계를 다시 보면 상당히 규칙적인 분류표가 나타난다. 모순은 보편적이지만 각각 특수하다. 여러 모순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주요모순이다. 하나의 모순 안에는 반드시 주요 측면과 부차적 측면이 있다. 주요 측면이 바뀌면 사물의 성격이 바뀐다. 모순은 적대적이거나 비적대적이다. 각각의 특수한 모순에는 그에 알맞은 특수한 해결 방식이 있다.
이렇게 되면 혁명가는 구체적인 사회적 총체의 변동을 재구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 속 여러 모순을 식별하고 종류를 판정하며 서열을 정해 적절한 처방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
아이러니하게도 데보린 학파의 후기 모습이 이러한 위험을 잘 보여 준다. 데보린 학파는 헤겔과 변증법을 강조했으나, 결국 알맹이가 빠진 박제된 공식들의 목록으로 변증법을 전락시켰다. 현실 발전에 끊임없이 대조·검증하는 살아 있는 방법이 아니라 어떤 문제에나 적용할 수 있는 기성 공식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마오가 데보린과 똑같은 철학을 주장했다는 뜻은 아니다. 마오는 데보린의 특정 견해를 명시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변증법의 범주를 고정된 분류 규칙으로 만들어 현실에 적용한다’는 형식주의의 위험에서 「모순론」도 온전히 자유롭지 않다.
트로츠키가 변증법은 만능열쇠가 아니며 오직 구체적 사실에서 도출해야 한다고 역설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노동계급의 자기해방보다 당의 판단이 앞서는 위험
이 같은 방법론은 혁명의 주체 문제로도 이어진다. 마르크스에게 실천이란 이미 완성된 이론을 외부 현실에 ‘적용’하는 일이 아니다. 노동과 실천은 물질적 조건과 의식이 실제 활동 속에서 상호 결합하는 과정이다. 인간은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동시에 자신의 능동적 활동을 통해 그 조건을 변화시킨다.
레닌도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실천을 이론과 현실을 결합하는 결정적 계기로 봤다. 의식은 현실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모사(模寫)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집단적 실천을 매개로 의식은 객관적 현실을 개조하는 동력의 일부가 된다.
트로츠키에게도 혁명적 지도는 객관적 과정 밖에서 역사를 조종하는 ‘조물주’의 작업이 아니다. 혁명적 조직과 지도자는 역사적 계급투쟁의 산물인 동시에 그 과정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주체다. 따라서 주체와 객체는 ‘분화된 통일’을 이룬다.
반면 「모순론」의 문법에는 이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소지가 내포돼 있다. 지도부가 현재의 ‘주요모순’이 무엇인지 판정하고 모순의 주요 측면을 규정한 뒤, 그에 따른 ‘해결책’을 하달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마오는 주요모순만 포착하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손쉽게 찾을 수 있으며, 주요모순과 그 주요 측면을 가려내는 판단이 당의 전략·전술 수립에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이 대목은 중국공산당 내부에 팽배한 관료주의적 지도 방식과 결부된다. 당이 물질적 과정 속에서 주요모순을 능동적으로 ‘발견’하기보다는, 무엇이 주요모순이며 어떤 해법을 강제할 것인지를 일방적으로 ‘결정’해 버리는 것이다.
「모순론」만으로 중국공산당의 관료주의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철학적 구조가 그러한 정치와 친화적인 것은 사실이다. 노동계급의 자기 활동을 통해 모순이 발전하고 의식이 변하는 과정보다 지도부가 객관적 현실을 분류하고 적절한 전략을 선택하는 행위가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에서 혁명적 정당은 계급 바깥에서 모순을 ‘처리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계급투쟁 자체의 일부이며, 계급의 경험을 일반화하고 다시 투쟁 속에서 이를 검증하는 조직이다.
필연주의와 주의주의의 결합
「모순론」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긴장이 존재한다. 한편에는 상당히 강한 역사적 필연주의(결정론)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정치 지도부의 올바른 노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주의주의가 있다.
마오는 ‘새것이 낡은 것을 대체하는 것’을 영원하고 침해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중국은 필연적으로 반(半)식민지에서 독립국으로 변할 것이고, 프롤레타리아는 결국 부르주아지를 타도해 지배계급이 될 것이며, 소련이 이미 밟은 길을 다른 나라들도 필연적으로 걷게 될 것이라고 서술한다.
이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과 달리 결정론적이다. 엥겔스가 자본주의의 ‘부정의 부정’을 말했다고 해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변증법 법칙에 따라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실제 역사적 과정을 먼저 입증한 뒤 변증법적으로 특징지었을 뿐, ‘부정의 부정’이라는 법칙으로 미래의 필연성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실제 계급들이 사회의 지도권을 놓고 싸우기 때문에 결과는 미리 결정돼 있지 않다.
트로츠키에게도 변증법이 보여 주는 것은 가능성이 현실적 필연성으로 발전할 수 있는 형태일 뿐이지, 결과의 자동적 보장이 아니다. 가능성이 현실이 되려면 특정 세력이 강화되고 다른 세력이 약화되는 구체적인 힘의 관계가 필요하다. 계급투쟁은 필연적일 수 있으나 그 결과가 사회주의 쪽으로 미리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마오의 필연주의는 반대편의 주의주의와 결합한다. 그는 1927년 중국 혁명의 패배를 공산당 내부의 기회주의에서, 뒤이은 패배를 모험주의에서 찾으며,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당 정치 노선의 올바름과 조직적 견고성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올바른 지도와 조직이 중요하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패배의 원인을 당내의 노선 오류에서만 찾으면 ‘외적 조건은 내적 원인을 통해서만 작용한다’는 공식과 결합해 주의주의로 흐를 수 있다.
필연주의와 주의주의는 얼핏 정반대처럼 보인다. 하나는 역사가 저절로 나아간다고 보고, 다른 하나는 올바른 의지가 역사를 바꾼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은 실제로 쉽게 결합한다.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복잡한 매개와 계급들의 주체적 활동을 생략하면, 한편에서는 역사의 ‘법칙’이 승리를 보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법칙을 올바르게 인식한 지도부가 승리를 실현하는 주체가 된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은 이 양극단을 모두 거부한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며, 그 결과는 오직 실제 투쟁을 통해서만 결정된다.
‘주요모순’ 대신 무엇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주요모순’ 개념을 완전히 폐기해야 하는가? 완전히 폐기할 필요까지는 없다. 특정 정세에서는 어떤 갈등이 압도적으로 전면에 떠올라 나머지 정치적 쟁점들을 재편하기 때문이다. 전쟁, 혁명, 파시즘의 집권 시도, 군사 쿠데타 같은 상황에서는 혁명가들이 모든 과제를 동일한 층위에 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때 필요한 것은 존재론적 의미의 ‘단 하나의 주요모순’을 찾는 일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구별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고 재생산하는 근본적 사회관계가 무엇인지 밝히고, 그 근본 관계가 구체적인 역사적 정세 속에서 국가·제국주의·민족·성·인종차별·농민 문제·전쟁 등의 갈등을 통해 어떻게 매개되는지 추적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현재 어떤 문제가 계급투쟁 전체를 집중시키고 재편하는지 정치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것은 ‘주요모순의 발견’과 유사하게 들릴 수 있으나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마오의 모델에서는 여러 모순이 존재하며, 그중 하나가 위로 올라가 나머지를 아래로 종속시킨다. 반면 고전 마르크스주의 모델에서는 하나의 모순된 총체가 존재하고, 그 총체의 여러 관계가 불균등하게 발전하면서 특정 정세에서 어떤 매개가 전체 갈등을 집약해 드러낸다.
전자가 위계적이라면 후자는 관계적이다. 전자가 분류를 중시한다면 후자는 매개를 중시한다. 전자는 ‘무엇이 주요모순인가?’라고 묻는 경향이 있다. 후자는 ‘현재 전면에 나타난 갈등이 사회 전체의 모순된 구조와 어떻게 연결돼 있으며, 어떤 계급 세력이 어떤 방향으로 그것을 해결하려 하는가?’라고 묻는다.
이 차이는 단순한 철학 용어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 전략의 차이다.
결론
마오의 「모순론」을 고전 마르크스주의와 완전히 단절된 문헌으로 보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 글에는 헤겔, 마르크스, 엥겔스, 특히 레닌에게서 이어받은 중요한 통찰이 실제로 존재한다. 변화의 내적 원인을 찾으려는 태도, 모순의 보편성과 특수성, 구체적 분석에 대한 강조, 불균등한 발전, 대립물의 상호작용, 양과 질의 변화, 모순과 적대의 구별은 모두 가치가 있다.
그러나 「모순론」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체계화된 부분은 바로 이 유산을 약화시킨다. 마오는 차이를 지나치게 쉽게 모순으로 치환하고, 각각의 모순에 독립된 특수한 본질을 부여하며, 복수의 모순을 주요·부차적 모순으로 배열한다. 다시 하나의 모순 안에서는 두 측면을 주요·부차적 측면으로 나누고, 주요 측면의 교체를 사물의 질적 변화와 연결한다. 각각의 모순에는 그에 대응하는 해결법이 있다고 본다.
그 결과 변증법은 ‘내적으로 모순된 총체가 여러 매개를 통해 변화하는 방식’을 분석하는 방법이 아니라 ‘여러 모순을 분류하고 서열화하며 적절한 해결법을 선택하는 방법’이 된다. 이것이 바로 「모순론」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약점이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에서 총체는 부분들을 압도하는 추상적인 전체가 아니다. 각 부분의 성격이 전체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다시 부분들의 운동이 전체를 바꾸는 ‘분화된 통일’이다. 따라서 중심적 모순이 존재한다고 해서 다른 모든 모순이 그것의 단순한 부차적 파생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심적 모순 자체도 수많은 매개를 통해서만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레닌에게 ‘구체적 분석’은 하나의 주요모순을 올바르게 골라내는 기술이 아니라 대상의 가능한 모든 측면과 관계, 매개를 그것의 발전 속에서 파악하는 일이었다. 그는 특히 전쟁을 분석할 때 표면적·외적인 현상을 생산력과 계급투쟁이라는 근본적 동력과 연결시켰다.
트로츠키에게 불균등 발전은 모순들을 분리하는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다른 발전 단계와 사회관계를 하나의 세계적 총체 안에서 결합하는 원리(결합된 불균등 발전)였다. 그래서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 민족해방과 계급투쟁은 미리 정해진 순서대로 한 단계씩 교대하는 별개 모순이 아니라 구체적 역사 속에서 서로 침투하고 결합할 수 있었다.
이런 (고전적) 관점에서 보면 「모순론」의 핵심 결함은 ‘모순’을 너무 많이 말한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모순들 사이의 매개를 충분히 분석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마오에게는 여러 모순이 있고 그들 사이에 위계가 있다. 마르크스·레닌·트로츠키에게는 모순된 총체가 있고 그 안에 복잡한 매개가 있다. 이 차이가 결정적이다.
그래서 「모순론」의 가장 마르크스주의적인 요소는 ‘주요모순을 찾아라’라는 명제가 아니라 그 글 곳곳에 남아 있는 다른 명제들, 즉 현실을 변화 속에서 보고, 추상적 공식을 거부하고, 구체적 관계를 분석하며, 서로 다른 사회적 힘들의 상호작용을 추적해야 한다는 주장들이다.
반대로 그 글에서 가장 독특하게 체계화된 ‘주요모순-부차적 모순-주요 측면-특수한 해결법’의 도식이야말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는 부분이다.
그 철학적 차이는 정치적으로 결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중국에서 제국주의와의 민족적 모순을 ‘주요모순’으로 선언하면 계급 모순을 부차화하고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계급 협조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기 쉬워진다.
반면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의 압도적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바로 그 투쟁 자체가 중국과 세계 자본주의의 계급관계 속에서 벌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공동의 적에 맞서 다른 계급과 일시적으로 함께 싸울 수 있지만 자신의 정치적 독립성을 포기할 수 없다.
이 점에서 「모순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은 ‘주요모순을 잘못 골랐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현실을 ‘주요모순을 골라야 하는 여러 모순의 목록’으로 이해하는 방법 자체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대안은 주요모순을 더 정확히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모순된 사회적 총체와 그 내부의 계급관계, 다양한 매개, 불균등 발전, 그리고 그 속에서 행동하며 자신과 현실을 동시에 변화시키는 인간의 집단적 실천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에서 레닌을 거쳐 트로츠키로 이어지는 변증법의 핵심이다.
후주
- 아래에서 언급하는 트로츠키의 글은 모두 《중국에 관한 저작집》(Leon Trotsky, Collected Writings on China, Marxists Internet Archive, 2014)에 실려 있다. ↩
- 푸젠사변은 1933년 11월부터 1934년 1월까지 푸젠성에서 일어난 반(反)장제스·항일 무장반란이다. 중일전쟁으로 향하는 상황에서 ‘먼저 공산당을 토벌하고 나중에 일본과 싸운다’는 장제스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군부 내부에서 폭발한 상징적 계기였고, 왕밍·친방셴 지도부의 교조주의적 정통 노선이 얼마나 치명적인 전략적 오판을 내렸는지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
- 국민회의는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를 통해 소집되는 일종의 제헌의회를 뜻한다. ↩
- ‘장시 소비에트’의 정식 명칭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으로, 공산당이 장시성 일대에 세운 지방 정부다. 러시아 혁명에서 솟아난 진짜 소비에트와는 다르다. ↩
- 장궈타오는 중국공산당의 창립 멤버이자 초기 당 역사에서 마오쩌둥의 가장 강력했던 내부 라이벌이었다. 한때 마오쩌둥보다 훨씬 큰 군대와 세력을 거느렸으나 대장정 과정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했다. ↩
- 시안사변은 1936년 12월 12일 산시성 시안에서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張學良)과 서북군 사령관 양후청(楊虎城)이 국민당 정부 총통 장제스를 무력으로 기습해 구금한 사건이다. 장제스는 구금 13일 만인 12월 25일 풀려나 난징으로 귀환했다. 그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자진 동행한 장쉐량은 도착 즉시 체포돼 50년 넘게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다 1990년에야 풀려나 하와이로 이주했다. 양후청은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49년 국공내전 막바지에 장제스의 지시로 가족과 함께 암살당했다. ↩
- 호조조는 1950년대 초 중국 농업 집단화 과정의 첫 단계에 등장한, 토지 사유 인정에 기초한 소규모 품앗이 조직이다. ↩
- 삼반은 뇌물 수수 및 공금 횡령 반대, 국가 자원 낭비 반대, 권위주의적 태도 반대를 뜻한다. ↩
- 직역하면 ‘전통적인 흙 공법으로 만든 용광로’라는 뜻으로, 대약진운동 당시 중국 전역의 마을 뒷마당마다 세워졌던 조잡한 소형 용광로를 가리켰다. ↩
- 인민공사 체제에서 농민을 묶어 놓은 최말단 기초 생산 조직으로, 보통 20~30가구로 구성됐다. ↩
- 정화 대상인 네 분야는 정치(노선 검증), 경제(횡령 및 장부 조작 조사), 조직(불순분자 색출 및 간부 교체), 사상(자본주의 사상 척결 및 마오쩌둥 사상 주입)이다. ↩
- 장칭(江靑),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을 가리킨다. ↩
- 이 농촌 공동체는 ‘미르’ 또는 ‘옵시치나’라고 불렸다. ↩
- 카를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Theses On Feuerbach').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5/theses/theses.htm ↩
- 마오쩌둥, 『실천론』('On Practice').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mao/selected-works/volume-1/mswv1_16.htm ↩
- 마오쩌둥, 『실천론』, 앞의 글. (본문: 1 2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