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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와 계급투쟁 (I) ─ 1930년대 미국·프랑스 노동자 투쟁:
1930년대식 신자유주의를 좌절시킨 투쟁

자본주의 경제 위기에 맞서 싸운 전 세계 노동자 투쟁의 사례와 교훈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1929년 미국 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은 농업을 포함한 실물 경제 전반으로 확산하면서 역사상 최악의 생산 감소, 대량 실업, 소득 수준 하락을 낳았다.

1930년대 초 조지 오웰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다. “훌륭한 젊은 탄광 노동자와 방직 노동자 들은 덫에 걸린 동물처럼 갑자기 말문이 막힌 채 자신의 운명을 직시해야 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노동이 당연하다고 교육받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들은 다시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일자리를 잃지 않은 노동자들은 임금 등 노동조건이 크게 악화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정부들은 국가 재정을 사용해 대기업 소유주들의 숨통을 터 주었지만 ─ 이른바 ‘부자들의 사회주의’ ─ 노동자·서민의 고통에는 자유방임 정책을 취하며 나 몰라라 했다.

지배자들은 이것을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동일한 근거로 정당화했다. 당시 미국 재무장관 앤드류 멜론은 이렇게 말했다. “[자유방임은] 체제에서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 위해서다. … 임금이 하락할 것이다.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도덕적인 삶을 살 것이다. 가격이 조정될 것이고, 기업가들은 뒤처진 사람들이 남긴 잔해를 주워 담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부터 일부 나라에서 이런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지배자들 중 일부는 노동자·서민을 쥐어짜는 것은 국내 소비를 위축시켜 경제 위기를 더 심화시킬 뿐이라고 생각했다. 또, 일부 나라들에서 노동계급의 대규모 투쟁이 벌어졌다. 당시 미국과 프랑스의 계급투쟁이 대표적 사례였다.

시장주의

1932년 민주당 대선 당시 훗날 ‘뉴딜’로 유명해진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실업률이 25퍼센트인 상황에서 시장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상대 후보를 비판한 철저한 시장주의자였다. 그의 생각은 노동자들이 정부의 작은 양보정책 ─ 전국산업부흥법(NRA) ─ 을 이용해 폭발적인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바뀌었다.

노동자 투쟁 물결은 1933년에 시작돼 1934년 미니애폴리스·샌프란시스코 시(市) 전체를 뒤흔든 파업을 거쳐 1936~37년 자동차 공장을 중심으로 한 공장 점거파업으로 정점에 달했다. 실업자를 위한 대규모 연방구제제도가 도입되고 미국식 복지제도가 뼈대를 갖추게 된 계기인 ‘뉴딜’은 이런 투쟁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1934년 파시스트 조직의 도발에 자극받아 노동자 대중이 급진화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덕분에 1936년 사회당이 주도해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당(급진당)과 연립한 인민(민중)전선 정부가 집권했다. 당시 사회당 좌파의 지도자 마르셀 피베르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자신감이 충만한 노동자들은 점거 파업에 들어갔다.

화들짝 놀란 자본가들은 임금 대폭 인상, 유급휴가, 임금 삭감 없는 주 40시간 노동 등의 양보 조처들을 내놓았다. 이것은 대공황기 프랑스 지배계급의 대책인 긴축 정책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과 프랑스 노동자 투쟁에서 주도권은 현장조합원들과 그들 속에서 활동하는 좌파 활동가들 ─ 공산당이 가장 중요했지만 미국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들도 한몫 했다 ─ 에게 있었다. 기층 동력이 가장 강력했을 때 비로소 양보를 얻을 수 있었다. 행동을 통해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사유재산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념을 떨쳐버릴 수 있었고 점거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 위대한 투쟁들은 193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약화했다. 특히, 공산당 지도자들이 스탈린의 민중전선 노선에 따라 프랑스에서는 급진당의 뒤꽁무니를, 미국에서는 민주당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그래서 양국 지배자들이 전쟁 준비를 빌미로 양보 조처를 무력화하고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노동자들은 반동 공세와 전쟁에 맞서 반격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투쟁의 성과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해서는 자생성과 노동조합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기층 투쟁을 고무하고 기층 노동자와 투쟁의 방향을 함께 토론·결정하는 변혁적 정치가 중요했다.

결국 자본주의는 알려진 사망자만 7천만 명에 이르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을 통해 대공황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당시 투쟁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1936년 프랑스 노동자들은 전후 프랑스 노동자 운동의 기준이 된 요구들을 쟁취했다. 뉴딜 때 도입된 복지 정책들의 일부(사회보장법 등)는 지금까지도 미국 노동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 경제 위기는 1930년대 대공황처럼 급속도로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당시와 마찬가지로 책임을 노동자·서민에게 떠넘기려 한다. 1930년대 미국·프랑스의 투쟁은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경제 위기에 대처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추천도서

리차드 보이어,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 책갈피, 1996
레온 트로츠키, 《트로츠키의 프랑스 인민전선 비판》, 풀무질,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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