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플린트 공장점거 파업 70주년:
노동자들이 거대 기업을 굴복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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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2월 30일, 3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미국 미시간주 플린트의 GM 공장을 점거했다(연좌파업). 노동자들은 사측에 노조 인정을 요구했다.
GM 경영자들이 설비를 빼돌리려다 들키자 분노의 함성이 치솟았다. 노동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공장 점거! 공장 점거! 빌어먹을 공장을 점거해 버리자!”
공장을 완전히 장악하자 한 노동자가 창문에서 이렇게 외쳤다. “만세! 어이 밥, 공장은 우리 거라구!”
노동자들은 재빨리 스스로 조직했다. 그들은 공장 입구에 피켓 대열을 배치했다. 노동자들은 또 외부 순찰, 위생 설비, 청소, 식사 제공을 조직했다.
플린트 투쟁은 미국 노동자들이 1930년대 초 대공황을 거치며 몇 년 동안 패배와 심각한 사기저하를 겪은 뒤에 벌어졌다. 전에는 그리 전투적이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이 투쟁을 이끌었다.
자동차 노동자들은 노조를 통한 집단적 조직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미국 남부의 농촌에서 올라와 성장하고 있던 자동차 산업으로 쏟아져 들어온 미숙련 신참 노동자들이었다. 자동차 공장들에는 노조가 전혀 없거나, 극소수 숙련 노동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직능별 노조가 있을 뿐이었다.
자동차 공장 내의 상황은 끔찍했다. “7월 내내 뙤약볕 때문에 온도계가 터질 듯했고, … 노동자들이 픽픽 쓰러지는 와중에도 조립라인은 무자비하리만큼 쉴새없이 돌아갔다.”
노동자들은 대부분 빈민가 주택에서 비싼 월세를 내며 살았다. 이런 집에는 욕실이나 화장실이 따로 없었고, 난방이나 온수도 들어오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플린트 공장을 점거하자 도시 주민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됐다. 그들은 ‘파업 주방’을 조직했고, 지역 농민들과 노동자들에게 기부를 호소해 보급품을 조달했다. 여성과 아이들도 피켓팅에 참가했다.
많은 여성들이 파업을 겪으며 변했다. 여성들은 노조가 설치한 대중 연설 수업에 참가했고, 남성 노동자들과 나란히 정치적 지도에 나서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GM 내의 인종차별에도 맞서 싸웠다. 플린트 파업에 참가한 흑인 노동자는 한 명뿐이었는데 파업 전에 그는 구석에서 혼자 밥을 먹어야만 했다. 그러나 점거가 시작된 첫 날, 동료 노동자들은 그에게 하나뿐인 깨끗한 식탁과 덮고 잘 담요를 내주었다.
반란은 GM을 뿌리째 흔들었다. 사용자들은 연좌 파업을 깨뜨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그들은 공장으로의 음식물 반입을 차단했고 난방을 끊어 노동자들이 추위에 떨게 만들었다. 또, 회사 경비와 경찰을 동원해 피켓 대열에 총을 쏘고 최루탄을 퍼붓도록 했다.
그러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성 지원단’을 조직했던 제노라 돌링거는 확성기를 들고 경찰에게 이렇게 외쳤다. “이 비겁한 겁쟁이들아! 무장하지 않은 남자들에게 총을 쏘고 아이 엄마들에게 총부리를 겨눈단 말이냐!” 경찰은 공격을 중단했다.
플린트 파업은 다른 GM 공장 노동자들을 고무했다. 전국의 다른 15개 GM 공장 노동자들(전체 15만 명 중 14만 명)이 플린트의 모범을 따라 연좌 파업을 벌였다.
1937년 2월 11일, 그러니까 점거파업 시작 44일 만에, GM은 전미자동차노조를 인정하는 협상안을 받아들였다. 이 승리는 전환점이었다.
플린트의 승리는 자동차 공장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산업부문에 걸쳐 점거파업과 노조설립 투쟁 물결을 일으켰다. 미국의 모든 주요 제조업 부문에서 노조가 건설됐다.
플린트 파업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GM 같은 거대 기업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 그들은 생산을 멈췄고 공장을 점거했다. 경제 위기 시기에도 그들처럼 단호히 투쟁한다면 지배자들의 양보를 얻어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