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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해방 ③:
언어와 여성 차별

언어는 현대의 많은 사회 이론들이 그러하듯 페미니스트들의 주요 관심사다. 페미니스트들이 언어에 주목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한 가지 공통된 생각 또는 경험이 깔려 있다. 바로 언어가 여성 차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여성 차별적 언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쭉쭉빵빵’ ‘꿀벅지’ ‘짝퉁녀’ ‘하자녀’같이 여성의 신체를 선정적으로 묘사하거나 외모를 이유로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들이 대중매체에서 흔히 사용된다. ‘밥순이’ ‘부엌데기’처럼 여성의 가사노동을 폄하하면서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도 있다. ‘처녀작’ ‘처녀 출항’처럼 순결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단어들도 있다. 성폭행범을 ‘빨간 모자’ ‘발바리’ ‘산 다람쥐’같이 귀여운 속칭으로 부르는 것도 여성 차별적이다.

여성 비하적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여성 차별로 간주될 수 있는 표현도 많다. ‘똥차 빨리 치워야 새 차가 지나가지’(친척들이 동생 앞에서 결혼하지 않은 언니를 가리켜),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뱁새가 여성, 황새가 남성을 가리킬 경우) ‘아직도 (회사) 다녀?’(과장이 임신하거나 나이든 여직원에게 말할 때) 등등.

여성에 대한 반감이나 편견을 조장하는 언어가 하도 많아서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여성단체들이 미디어 모니터링 결과를 발표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성차별적 언어가 있는지 알 수 있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표현들도 일부 포함되기도 하지만, 무지하게 많은 성 차별 언어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언어 개혁

이런 현실 때문에 언어 개혁이 이따금 화두로 떠오르는데, 이를 이루기 위해 페미니스트들이 사용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공공기관이나 언론사에 차별적이지 않은 언어 사용을 촉구하거나 심지어 행정 조처를 국가에 요구할 수도 있고, ‘여성적 글쓰기’를 통해 ‘여성주의 언어’를 확산하는 것을 꾀할 수도 있다.

평등과 해방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성 차별적이지 않은 언어 사용의 필요성에 마땅히 공감해야 한다. 성 차별적 언어는 여성의 자긍심을 짓밟고,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부정적 시각을 강화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 평등한 언어 사용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경향이 존재하는 것인데, 이는 종종 생경한 단어를 만들어내고 이를 쓰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미혼’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을 ‘성 차별’로 비판한다.

주장인즉슨, ‘미혼’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말로,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관념이 전제돼 있다. 반면, ‘비혼’은 결혼 대신 대안적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비혼’을 쓰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그러나 ‘미혼’이라는 용어 사용 자체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부추긴다는 생각은 과도하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긴 하지만, ‘미혼’이 꼭 그런 의미를 담고 사용되지는 않는다.

‘비혼’이라는 단어를 배타적으로 고집하는 경향에는 언어의 힘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와 라이프스타일 정치가 깔려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 사용을 통해 여성 차별을 없앨 수 있다는 생각과 결혼 거부 같은 대안적 라이프스타일 추구를 통해 해방을 이룬다는 관념이 맞물려 있는 것이다.

언어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는 생각은 페미니스트들이 흔히 받아들이는 생각인데, ‘가부장적 사회’에서 언어를 ‘남성 지배’의 기제로 보고 ‘남성 중심적 언어 해체’를 중요한 실천으로 여기는 페미니스트들이 상당수 존재한다(주로 학술적 페미니스트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언어 전반을 남성이 만들고 통제한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일부 남성(본질적으로 지배계급 남성)들은 언어의 일부 측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모든 남성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언어의 본질은 인간의 실천 ― 비록 종속적 구실일지라도 여성, 어린이, 흑인, 유대인 등의 사회적 실천을 포함한다 ― 을 통해 역사적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한편, 언어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물론 언어는 의식 형성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언어를 둘러싸고 이데올로기 투쟁이 벌어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사회적 의식을 형성하는 것이 단지 언어이거나 주로 언어인 것도 아니다. 사회적 존재(환경과 인간의 신체적·심리적 필요, 사회적 관계의 복합)와 인간 사고와 언어 간에 복잡한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이러한 상호관계에서 사회적 존재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개방적 성 의식의 확산은 단순히 지식인들이 긍정적 성 표현을 많이 사용한 결과가 아니라 여성의 유급 고용과 교육 기회 확대, 피임과 낙태술의 발전으로 낡은 성 관념에 치명적인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여성운동의 성장은 여성의 자의식 변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촉진하는 구실을 했다.

언어의 발전은 사회의 근원에 있는 모순과 충돌을 반영하는 사회의 발전에 매여 있다. 따라서 부정적 이미지의 언어를 긍정적 이미지나 중립적 의미를 담은 언어로 바꾼다 해도 만약 현실이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이름이나 서술은 곧 옛 의미와 함축을 띠게 된다.

이를테면 ‘매춘 여성’을 ‘성매매’ 여성으로 부르게 됐다 해서(심지어 ‘성노동자’로 부른다 해도) 성매매 여성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가사노동’을 ‘돌봄노동’으로 부른다고 해서 이윤 중심이고 성 차별적인 사회에서 가정주부의 가사노동을 평가절하하는 관념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성 차별 언어를 바꾸는 것은 여성 차별의 현실을 바꾸기 위한 대규모 투쟁이 뒷받침될 때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미국에서 ‘깜둥이’를 ‘흑인’으로 바꾼 것은 1960년대 대규모 민권투쟁이 미국 사회를 뒤흔든 결과였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과 여성 운동의 성장 덕분에 공식 언어가 개선됐다. 1998년 ‘결손가정’이 ‘한부모가정’으로, 2004년 ‘윤락녀’가 ‘성매매 여성’으로 바뀌었다.

물론 성 차별 언어는 여전히 만연하다. 그러나 여성 차별적 현실에 맞서는 투쟁이 크게 성장하면 사람들의 의식은 바뀌고 개인들의 언어 사용에서도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노동계급과 천대받는 대중이 착취와 여성 천대 모두에 맞서는 사회 혁명을 시작한다면, 여성 차별적 언어도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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