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환 씨는 내가 〈레프트21〉 35호에 쓴 글 ‘언어와 여성 차별’에 대해 ‘성 평등한 언어 만들기는 가치 없는 일일까?’라는 반론을 썼다.
무릇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하려면 상대방 주장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내가 여성 차별의 현실을 바꾸기 위한 투쟁만 강조하고 성 평등한 언어 사용의 필요성은 부정했다는 최창환 씨의 비판은 왜곡이다.
나는 “성 차별적 언어는 여성의 자긍심을 짓밟고,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부정적 시각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성 평등한 언어 사용의 필요성을 분명히 지적했다. 그리고 ‘결손가정’이 ‘한부모가정’으로, ‘윤락녀’가 ‘성매매 여성’으로 바뀐 것을 개선으로 인정했다.
최창환 씨의 오해와 달리, 나는 생경한 단어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를 비판하지 않았다. 나는 생경한 단어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성 차별’로 비판하는 것이 과도함을 지적했다.
결혼제도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비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미혼’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는 주장은 지나친 얘기다(그러나 ‘미혼모’라는 표현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여성에 대한 편견을 담고 있고, ‘한부모’라는 더 나은 표현이 있으므로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낸 말들 중에는 진보진영이 수용할만한 좋은 표현들이 제법 있지만, 모든 말이 그렇지는 않다. 내용상 아무리 좋은 의미를 담고 있어도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기 힘든 말이면 대중적으로 쓰이기 어렵다. 예컨대 페미니스트들이 흔히 쓰는 ‘성인지’라는 말이 그렇다(이 말을 사람들이 포르노잡지로 오해한다는 얘기를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우스갯소리로 한다). 사람들이 이런 말을 쓰지 않는다고 성 평등 의식 부족을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비혼’은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정치(라이프스타일 정치)를 드러내기 위해 선호하는 표현이다(결혼을 ‘못’한 게 아니라 ‘안’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 방식 변화를 통해서 여성 해방을 이룬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비혼’이라는 용어 사용을 충분히 꺼릴 수 있다.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흔히 자신을 인습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들과 구분하는 것을 중시하는데, 그리 되면 도덕주의로 흐르기 쉽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습(결혼은 그 중 하나다)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지만,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을 대중에게 대안으로 제시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진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조건에서 살아가므로 당대 사회의 물질적 조건과 가치관 등에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습에 얽매이고 편견에 찌든 대중과 분리하기보다 그들과 함께 투쟁하면서 그 속에서 대안적 세계관을 확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 평등한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 차별에 맞선 대중운동을 건설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