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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해방 ②: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은 계급 환원론인가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차별이 계급 차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이며, 계급 차별에 맞서는 투쟁 과정에서 여성도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목소리는 진보운동에서 극소수다. 오히려 “성별과 계급 문제를 분리, 대립, 택일해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한국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조차 대부분 이런 견해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마르크스주의가 여성 차별을 곧바로 계급 문제로만 환원하기 때문에 사실상 차별문제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여성 차별에 맞서는 데 무능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스탈린주의의 유산은 이런 오해를 일반화했다. 옛 소련 체제는 전혀 여성해방의 모델이 될 수 없었다. 여성은 아이 낳는 도구로 취급됐고, 여성을 때리는 채찍이 부활했다. 노동시장에서 성차별도 여전했다.

옛 소련 체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름으로 여성 차별적 정책을 합리화했다. 일단 산업화하면 노동자들이 해방되고, 그리되면 여성 차별도 해결될 거라는 조야한 경제결정론이 마르크스주의로 둔갑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도 도매금으로 비난받았다. 한국의 주요 여성단체 리더들도 1980년대까지는 계급 철폐와 같은 사회관계 전체의 변혁과 여성운동의 과제를 일치시켰지만, 1991년에 옛 소련이 붕괴하자 계급 정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억압 문제를 도외시하는 노동자주의(이들 중 일부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기도 한다)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오해를 증폭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이런 경향들은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과 거리가 멀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피억압자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레닌도 노동자 계급이 “민중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작업장 문제에만 시야가 갇혀 있는 경제주의자들과 투쟁하면서 노동자들이 차별에 맞선 투쟁에도 적극 참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볼셰비키는 혁명을 주도하면서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던 부를 여성해방을 위해 적극 투자했다. 그래서 식당 시설이 사회화됐고, 이혼의 자유, 낙태권 보장 등이 이뤄졌다(혁명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스탈린주의가 혁명의 성과를 파괴하면서 나중에 이런 조처들이 후퇴했다).

탈출구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차별을 계급 착취로만 환원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자신도 계급 착취만이 아니라 소외·억압 문제를 중요하게 다뤘고 궁극으로 인간해방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착취와 여성 차별이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차별의 뿌리가 계급 지배라고 분석한다. 엥겔스는 인류학적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계급 발생 이전의 사회에서 여성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혔다. 소수가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다수를 착취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남녀 차별이 발생했다.

계급 사회인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들은 여성 차별을 통해 여성을 양육과 가사에 묶어 둠으로써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절감한다. 그래서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묘사하고 여성들에게 가족을 위해 헌신하라고 강요한다. 따라서 계급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과 여성 차별에 맞서는 투쟁은 결합돼야 한다.

마르크스는 또 여성 차별을 비롯해 모든 차별이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계급 착취를 가린다는 점에 주목했다.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을 열등하게 여기고, 여성들은 남성을 억압자로 여기는 상황은 계급 지배에 대한 노동계급의 저항에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여성 차별은 남성 노동자의 이익도 저해한다.

한편, 같은 여성일지라도 계급에 따라 억압의 정도가 다르다. 부자 여성들도 차별을 받지만, 노동계급 여성보다 훨씬 더 많은 탈출구를 갖고 있다. 가사도우미나 유모를 둬 집안일과 양육 부담을 덜 수 있다. 값싼 무허가 낙태 시술로 죽어간 여성들 중에 부자 여성은 없었다. 오히려 여성 차별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자본가 계급의 여성들은 여성 차별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편에 서 왔다.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억압에 단호히 반대하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계급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노동계급이야말로 여성 차별을 철폐하는 실질적인 힘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여성의 참정권, 낙태권은 노동계급의 거대한 반란 속에 성취될 수 있었고, 가장 멀리 나아간 노동계급 혁명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어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성취한 적 없는 여성해방 조처들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한국의 여성운동도 1987년 항쟁과 그 여파로 생긴 대규모의 노동계급 각성과 투쟁 속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세계를 멈추고 이윤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노동계급 특유의 힘이 여성 차별을 철폐하는 데 사용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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