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아시아는 다음 전장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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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패권 경쟁, 동아시아,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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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개의 전쟁, 미국과 링 바깥의 중국
지금 지구상에 중요한 두 개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하나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다’고 장담했던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트럼프 취임 1년 5개월이 지났지만 종전은 요원해 보인다. 다른 하나는 트럼프가 전임자들의 “끝없는 전쟁”을 비난하며 다시는 빨려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중동에서의 전쟁이다. 이란 전쟁은 애초 트럼프가 제시한 기간을 훌쩍 넘긴 지 오래 됐다.
트럼프가 즉흥적이고 경박하고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은 맞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은 트럼프의 개성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주도권이 약화되고 있는 것과 그로 인한 딜레마의 반영이다. 이 전쟁들에 대해서 여기서 길게 다룰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지적할 점은, 미국이 두 전쟁을 치르면서 직접 당사자가 아닌 어느 국가를 크게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중국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자. 트럼프가 푸틴과 거래하려고 한 것은 언론에서 흔히 얘기하듯 그가 친러시아파여서는 아니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와 중국이 밀착하게 된 것이 못마땅했다. 미 국무장관 마코 루비오는 러시아와 중국 둘 다를 미국에 맞서는 상황으로 모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며 러시아를 중국에서 떼어내자고 했다. 소위 ‘역 키신저 전략’이다. 키신저는 1972년 마오의 중국을 소련에 맞서는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이번에는 러시아를 떼어내 중국을 고립시키자는 것인데, 지금까지 뜻대로 안 되고 있다.
이란 전쟁은 그 시작이나 전개 과정 내내 미국이 중동에서 동맹과 우방을 이끌고 통제하는 능력이 현저히 약화됐음을 보여 준다. 그 핵심 요인으로 작용하는 힘이 바로 중국이다. 중국은 걸프 국가들에서 생산된 에너지를 가장 많이 사들이는 최대 수입국으로, 지난 수년 동안 중동, 특히 걸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히 커졌다.
그런 만큼 미국은 한눈 팔지 않을 믿을 만한 동맹인 이스라엘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스라엘은 미국이 이라크 전쟁 실패 이후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동안 지역 강국으로서 힘을 강화했지만 적대로 둘러싸인 중동에서 결국은 미국에 기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것이 트럼프가 네타냐후에 이끌려 이란 전쟁을 하게 된 일부 원인이다.
이란은 석유 80~90퍼센트를 중국에 수출하며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의 주요 거점으로서, 중동에서 중국이 영향력을 확대하는 발판 구실을 한다. 미국의 일부 전략가들은 이번 전쟁이 그 발판을 무너뜨리는 효과를 내기를 기대했지만, 그렇게 될 성싶지 않다. 오히려 일부 걸프 국가들도 중국과의 관계 다지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이 이란 공격으로부터 걸프 국가들을 지켜주지 못하자 다른 기댈 곳을 찾으려는 것이다.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 위기를 해소하는 데 중국의 힘이 필요한 형편이다. 미·중 정상회담은 중국의 한층 높아진 위상을 보여 줬다.
사실, 우크라이나와 이란, 두 전쟁뿐 아니라 트럼프가 서반구에서 포식성 제국주의의 면모를 드러낸 일들, 즉 파나마 운하와 그린란드를 장악하려는 것이나 베네수엘라를 습격해 마두로 대통령을 납치한 것도 모두 중국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국가안보전략은 경쟁자들이 서반구에 침투해 미국의 지배력에 도전해 왔다면서, 적대적인 외부세력이 서반구로 진출하거나 핵심 자산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2. 미국의 상대적인 경제적 지위 하락과 중국의 부상
지금까지 말한 바는 미국이 중국의 부상과 영향력 확대를 억제하는 데 집착적으로 매달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일부 국제관계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서반구를 중시해 중국과의 대결에서 한걸음 물러서고, 심지어 G2로서 중국의 세력권을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큰 오해다. 트럼프의 국가안보전략(2025)은 미국이 서반구에서 중국을 밀어내려 하면서도 미국 자신은 인도-태평양에서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인도-태평양은 이미 주요 경제 및 지정학적 전장의 하나[이며] ... 국내에서 번영하려면 그곳에서 경쟁해야 한다.”
트럼프의 국방전략(2026)은 본토 방어와 중국 억제가 미국의 우선순위임을 한층 선명하게 명기했다. “중국은 19세기 이래 미국에게 가장 강력한 상대 국가”라면서 “곧 세계 경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될 인도-태평양 지역[을] 중국이나 다른 어떤 세력이 지배하게 된다면” “미국의 핵심 이익에 극히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인도-태평양에서 미국의 우위를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이 본토 방어보다 멀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면서 말이다.
물론 트럼프의 국가안보전략과 국방전략은 중국과 군사적 대결을 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것이 설사 참말이라고 해도 중국을 경제 전쟁의 핵심 표적으로 삼는 것이 왜 지정학적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지, ‘힘을 통한 평화’가 왜 대결을 부추기는지 뒤에서 살펴보겠다.
이처럼 트럼프는 중국 억제를 미국의 핵심 이익으로 본다. 그러나 트럼프가 이 문제에 매달린 첫 미국 대통령은 아니다. 미국은 냉전 종식 이후 유일 초강대국이 됐지만, 사실 이미 그 20년 전부터 상대적인 경제적 지위가 하락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협적인 경쟁자(들)의 등장을 예견하고 우려한 전략가들이 적잖았다. 가령 미국 닉슨 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21세기에 미국이 중국과의 심각한 경제적 경쟁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를 경계한 미국 지배계급은 냉전에서 소련에 거둔 승리를 지렛대로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지구적으로 확장해 세계 패권을 확고히 다지려 했다. (규칙 기반 국제질서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블록으로 결집시킨 것을 말한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나토 등 국제기구들과 동맹을 통해 뒷받침됐다.) 냉전 종식 이후 세계무역기구(WTO) 설립이나 나토의 동유럽 확장은 이런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다. 상대적 경제 쇠퇴를 군사력 과시로 만회하기 위한 더 노골적인 시도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성공은커녕 역효과를 불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세계적 불균등 심화와 저항을 낳았을 뿐 아니라 2007~2009년 세계 금융 위기를 초래해 미국의 위신을 추락시켰다. 그리고 나토의 동유럽 확장은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거듭되는 충돌을 낳고 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은 베트남전 때보다 더 큰 지정학적 패배를 겪어, 세계질서 통제 능력이 크게 약화됐다.
그리고 이런 일들과 맞물려 미국의 패권을 가장 위협하는 일로서, 중국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1978년 100억 달러도 안 되던 중국의 수출 규모는 WTO에 가입한 2001년 이후 급속히 커져 2010년 1조 5,800억 달러가 됐다.(그림 1) 1980년 1퍼센트 미만이던 중국의 세계 수출 점유율은 2010년 10.4퍼센트로 미국, 독일,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대 수출국이 됐다.(그림 2)
중국 경제의 성장으로 아시아와 세계 경제 전반이 재편됐다. 일본과 한국은 중국에 기계류와 설비, 반제품을 수출하는 쪽으로 산업을 재편했다. 한국의 최대 수출국은 2003년 이후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었고, 2010년대 중반까지 ‘중국 특수’가 한국 자본축적의 핵심 동력이었다.(그림 3)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으로 에너지와 원자재를 수출하게 된 중동과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에서도 이와 같은 경제 재편이 일어났다.
이를 통해 중국은 아시아에서는 물론이고 중동과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영향력을 키우게 됐다. 2004년 중국은 아랍 국가들과 협력 포럼을 설립했고, 2009년부터는 5대 신흥국인 브릭스(BRICS)의 주도적 구성원이 됐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실패로 미국이 겪는 어려움은 중국이 국제적 위상을 높일 지정학적 기회를 늘려 줬다. 또, 2007~2009년 미국발 경제 위기 이후 중국이 세계경제 회복을 이끌었는데, 이것은 중국의 경제 비중을 세계에 각인시키면서 영향력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됐다.
3. 중국의 경제 성장이 자극하는 국제질서 변동
이처럼 중국은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세계적인 경제 재편과 함께, 정치적 이합집산 구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미국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나라들이 중국과의 무역을 늘리고 투자도 유치하면서 점점 중국으로 기울었다. 이것은 미국의 패권에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전에도 미국의 경제적 경쟁 상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독일과 일본이 그런 나라들이었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미국과 경제적 경쟁을 하더라도 정치적으로는 미국의 주도권 아래 있었다. 즉,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구축한 “규칙 기반 국제질서”와 군사적 보호 아래 머물렀다. 냉전 시기에는 양극화된 미·소 대결이 그들을 억제하는 요인이었는데, 냉전 종식 이후에도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려고 개입하면서 동맹 질서는 유지됐다(비록 갈등은 적잖았지만).
그러나 중국은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구축해 온 동맹 체계 바깥에서 부상했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참여하면서도 경제에 대한 공산당의 정치적 통제권을 유지했고,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와 지정학적 우세를 받아들일 용의가 없었다. 가령 중국이 미국 주도의 IMF와 세계은행 등에 대항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한 것은 이를 보여 주는 한 사례다. 이는 일본이 1997~1998년 동아시아 금융 위기 때 아시아통화기금(AMF)을 만들려다가 IMF의 영향력 훼손을 우려한 미국의 제지로 좌절된 것과 대조적이다.
무엇보다, 중국은 제2차세계대전(태평양전쟁) 종전 후 계속돼 온 아시아-태평양 해역에 대한 미국의 통제가 지속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미국을 서태평양 바깥으로 밀어내려 한다. 상품을 수출하고 원자재를 수입하는 해상 운송로는 중국 입장에서 생명선과 같기 때문에 이를 미국의 통제에 맡겨둘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이 군비 지출을 급격히 늘리면서 해군력을 강화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의 추산에 따르면, 2011년 중국 국방비는 1,300억 달러에 이르러 이미 세계 2위에 올랐다.
2011년 오마바 정부가 아시아로 중심축을 이동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수렁에 빠져 있는 동안 중국의 부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며 이제 아시아로 미국의 외교·군사적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것이었다. 핵심은 미 해군 전력의 60퍼센트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배치해, 미국의 접근을 막으려는 중국의 해군 전략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오바마 정부는 중국을 포위하기 위한 군사 동맹 강화에 힘을 쏟았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중국을 배제한 자유무역협정으로, 중국 포위 전략의 경제 측면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중국을 자극해 갈등과 긴장을 증대시키면서도,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지는 못했다. 중국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그림 4)와 중국의 대미 수출(그림 5)이 모두 2011년 이후 오바마 집권 내내 높은 수준으로 지속되면서, 중국 경제는 성장을 이어갔다. 구매력 평가(PPP) 기준 중국 GDP는 2013~2014년경 마침내 미국을 추월했고 이후 계속 격차를 벌려 갔다.(그림 6)
이와 함께 중국은 ‘국익’을 대내외적으로 추진하는 데서 점점 더 자신만만하고 적극적이 됐다. 중국 시진핑 주석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향한 ‘중국몽’을 내세운 것은 그 표현이었다. 이런 비전에 따른 ‘일대일로’ 정책은 어마어마한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로, 세계적 수준에서 중국의 영향력 강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또, 2015년 발표한 ‘중국제조 2025’는 중국이 단지 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세계의 공장이 아니라 첨단 기술 경제로 도약하려는 것이다.
4. 트럼프의 무역 전쟁과 디커플링의 모순
이제 중국이 명실상부하게 미국의 주요 경쟁자로 부상했음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웠다. 경제뿐 아니라 정치와 군사 모든 면에서 세계적 영향력을 두고 미국과 다투는 제국주의 라이벌이 된 것이다. 트럼프의 전략가이자 파시스트인 스티브 배넌은 “중국은 미국이 직면한 사상 최대의 경제 및 국가안보 위협으로 부상했다”고 경고했다. 이것이 바로 트럼프가 무역 전쟁에 나선 배경이다.
앞서 말해듯이 트럼프는 중국 견제에 몰두한 첫 미국 대통령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추세로 발전하고 있던 미국과 중국의 적대 관계를 현실로 만들고 극적이고 파괴적인 수단을 통해 심화시켰다. 트럼프는 지난 정부들의 신자유주의적 가정은 완전히 잘못됐다고 비난했다. 그런 가정에 따르면, “중국에 시장을 개방하고 미국 기업의 대중국 투자를 늘리고 제조업을 중국에 아웃소싱하면, 중국이 이른바 ‘규칙 기반 국제질서’에 편입”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책들은 중국 좋은 일만 시켰다는 것이 트럼프의 비난이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중국 기업들에 높은 관세를 매기고 수입 제한 조처들을 도입했다.
그 목적은 비단 대중국 무역적자를 줄이는 것만이 아니다. 트럼프는 중국 경제와의 디커플링을 이루려 한다. 깊이 연계돼 있는 미국과 중국 경제를 끊어내면, 제조업이 미국으로 돌아오고 중국 경제의 확장을 줄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트럼프는 중국이 첨단 기술 경제로 도약하지 못하게 좌초시키려 한다. 지적재산권 침해, 산업 보조금 등을 문제 삼는 것은 이와 관련 있다. 트럼프는 1기 정부 때 중국의 거대 IT 기업 화웨이를 공격하며 미국 기업들이 화웨이와 거래하는 것을 금지했고, 2기 들어서도 미국 최첨단 기술 제품의 수출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1기 무역전쟁의 성적은 별로 좋지 못했다. 특히 미국의 무역적자가 개선되지 않았다. 대중국 무역적자는 줄었지만 전체 무역적자는 오히려 늘었다. 중국이 대미 수출의 우회로(베트남, 타이, 멕시코 등)를 만든 것이 한 요인이었다. 제조업이 미국으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리쇼어링에 관한 연구들은 대다수 기업은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일부가 베트남, 멕시코, 인도 등지로 옮겼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오늘날 거대 다국적기업들이 국가간 경계를 넘나들며 형성된 생산망에 의존하기 때문에, 트럼프가 추진하는 디커플링이 미국 자신도 난관에 빠뜨린다는 문제가 있다. 미국은 각종 중국 제품에 의존하고 있는데, 특히 핵심 광물과 희토류 등에 대한 미국의 대중국 의존과 그 취약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중국 상품에 크게 의존해 온 미국 소비자 시장의 충격도 크다. 그래서 평범한 미국 서민들은 물가 인상으로 관세의 대가를 치렀다. 싼 소비재 덕에 그동안 숙련 노동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던 미국 기업들도 곤란해질 수 있다.
중국은 이 문제를 놓고 더 큰 대처 능력을 보여 줬다. 미국 기업들은 중국산 중간재와 기타 투입재 수입에 더 의존하게 된 반면, 중국은 대미 수출 의존도를 줄였다. 트럼프의 국가안보전략도 이 점을 인정했다. 중국은 미국으로 수출하던 상품을 다른 시장으로 돌릴 수 있었다. 2018년 이후 대미 수출이 줄었지만 총수출은 오히려 증가했다.(그림 7) 이는 중국 경제의 세계적 비중이 커진 덕분이다. 미국보다 중국과 더 많이 교역하는 나라가 2001년에는 30개국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145개국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런 현실 때문에 트럼트 2기 정부의 무역전쟁 전망도 그리 밝아 보이진 않는다. 물론 중국은 트럼프의 관세로 경제적 타격을 입겠지만, 1차전 이후, 2차전에 견딜 능력을 좀 더 키운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파이낸셜 타임스〉는 “중국은 63개 핵심 기술 분야 중 57개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만큼 중국이 미국에서 잃은 시장을 다른 곳에서 만회하기는 비교적 쉬울 것이다.”
중국의 핵심 광물과 희토류가 미국에 필수적이라는 점, 중국이 농산물(특히 대두) 최대 수입국이라는 점 등도 중국이 쥐고 있는 카드다. 이미 트럼프는 지난해 ‘해방의 날’ 관세를 선언한 지 6개월 만에 한걸음 물러났다. 중국이 희토류의 수출 통제를 1년 유예하기로 하는 대신 미국도 최첨단 기술 제품의 수출 제한을 1년 유예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트럼프는 별로 얻은 게 없다.
5. 미·중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의 융합
이처럼 경제적 상호 의존 때문에 모순을 빚으면서도 미·중 경쟁은 계속되고 첨예해졌다. 미국과 중국은 관세, 보복 관세, 유예, 다시 보복 등을 거듭해 왔다. 바이든 정부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대중국 정책 설계자인 클리트 윌렘스조차 이렇게 말했다. “바이든 정부는 중국의 자주적 혁신 자체를 미국의 국가안보 위협으로 보고 있다. 이는 우리가 가졌던 인식에서 크게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바이든 정부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중국과의 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국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는 산업정책을 추진했다.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 Science Act)은 반도체 제조와 첨단 기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것인데, 보조금, 연구개발 투자, 세금 감면, 첨단 기술 육성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미국이 중국(그리고 다른 경쟁국들)에 맞서 자국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국가 개입을 강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 목적은 산업 기반을 재건하는 것뿐 아니라 군사력 증강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골든 돔 계획은 둘의 결합을 잘 보여 준다. 골든 돔은 우주 기반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지만, 국가가 막대한 예산을 쏟아 첨단 기술 산업을 육성하는 정책이기도 하다. 골든 돔에는 인공지능, 고성능 반도체, 차세대 통신(6G), 우주항공 기술 등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관련 빅테크 기업들은 어마어마한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 미국은 1980년대에도 전략방위구상(일명 스타워즈)을 통해 군산복합체를 중심으로 산업 기반을 갱신했다. 그 결과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애플 등은 엄청난 수혜자가 됐다.
중국 국가의 경제 개입, 즉 산업 보조금이나 금융 통제 등을 비난하던 미국 지배자들도 미·중 경쟁 심화 속에서 자국 자본을 보호·육성하는 방향으로 국가 개입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 부하린이 자본의 국가화와 국제화 경향이 서로 맞물려 발전한다고 설명한 것은 현재 상황과 잘 부합한다. 부하린은 자본이 점점 거대화되면서 국가와의 융합 경향(국가화)이 증대하는데, 이것은 자본이 세계로 뻗어 나가 경쟁하는 국제화의 맥락 속에서 벌어진다고 했다. 기업들은 국제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점점 더 국가의 지원에 기대게 되면서, 자본 간 경쟁은 갈수록 지정학적 경쟁(즉, 국가 간 영토와 영항력을 둘러싼 대결) 양상을 띠게 된다.
경쟁국들을 특정 지역에서 밀어 내고 그 국가의 영향력을 훼손하기, 다른 국가들의 협력 관계에 끼어들어 파탄내고 그 일부를 자기 편으로 끌어오기, 전략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나라를 병합하려 하거나 경쟁국이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기, 경쟁 국가가 구축하는 협력 틀에 참가하는 국가들을 제재하기. 이런 일들은 마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부를 묘사하는 듯하지만,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미국이 특히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과의 디커플링에 동참하도록 다른 나라들을 압박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런 사례다. 가령 미국은 5G네트워크에서 화웨이를 퇴출시키라고 다른 나라들을 압박하면서 미국 기술을 사용하는 기업들이 화웨이에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판매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압박을 받은 중·동부 유럽 국가들은 안보를 이유로 화웨이를 5G네트워크에서 퇴출시켰다. 이를 통해 그 직전까지 이 국가들과 “16+1” 협력체를 꾸리며 일대일로 사업의 발판을 마련하던 중국의 영향력은 급속히 감소했다.
지난해 트럼프가 브릭스 통화를 만들거나 달러를 대체하려는 시도에 참여하는 국가에는 100퍼센트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한 것은 또 다른 사례다. 중국은 개발도상국 중심의 경제 블록을 구축하려고 ‘글로벌 발전 구상’을 추진하고 있는데, 브릭스에는 그 나라들 중 비교적 강력한 나라들이 묶여 있다. 트럼프의 위협은 중국이 대안적 국제질서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경제 블록을 구축하려는 것에 대한 견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트럼프가 “규칙 기반 질서”를 스스로 붕괴시키며 동맹마저 겁박하고 갈취하고 횡포를 부리는 현실은 오히려 중국이 주장하는 새로운 다자 질서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첨단 기술 분야 경쟁이 전략 광물을 둘러싼 노골적인 위협과 약탈, 긴장 증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가장 적나라한 사례다. 희토류 등 전략 광물은 재생에너지, AI, 전기차, 미사일 유도시스템 등에 필수적이다.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의 60~70퍼센트를 채굴하고 가공·정제 공정의 약 90퍼센트를 통제하며 이를 무기화하고 있다. 이에 맞서고자 미국은 포식성 제국주의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가 그린란드 병합을 압박하는 이유 하나는 대규모 미개발 희토류 매장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에 전략 광물 채굴과 수출에 관한 통제권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이 정의한 34개 핵심 광물 중 22개를 보유하고 있다. 핵심 자원 확보 능력은 갈수록 국가의 지정학적·군사적 능력과 밀접해지고 있다.
많은 국제관계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중국과의 군사적 대결에는 관심이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트럼프가 중국과 벌이는 경제적 경쟁은 이처럼 지정학적 경쟁과 상호작용하면서 세계를 점점 더 갈등과 긴장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 곳곳에서 이미 그러고 있듯이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아시아는 그런 발화점을 여러 개 가진 지역이다.
6. 아시아의 발화점, 대만 위기의 진정한 성격
아시아는 미국과 중국의 힘 겨루기가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이다. 중국의 경제 성장은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적·정치적 이합집산 구도를 바꿔 놓았다. 또, 중국은 상품 수출과 원자재 수입 해상로가 점점 중요해짐에 따라 미군을 제1도련선, 더 나아가 제2도련선 바깥으로 밀어내고자 군사력을 강화해 왔다.(그림 8)
그런데 이 두 가지 상황은 모두 미국의 헤게모니를 위협하며, 미국은 이를 결코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날로 중요해지는 아시아에서 물러선다면 미국은 세계 패권을 잃게 될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고자 막강한 군사력을 이곳에 배치하고 있고, ‘항행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군사 작전과 훈련을 실시하며 동맹과 중국 주변국들을 끌어들여 왔다.
중국이 만만찮게 해군을 현대화하고 군사비를 증강해 왔지만, 미국의 군사력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특히 트럼프 1기 정부 이후 미국의 군사비는 빠르게 증가했다.(그림 9)
아시아에는 미군 기지도 다수 있다. 미군은 제1도련선을 따라 한국, 일본, 필리핀 등에 강력한 전력을 배치하고 있다.(그림 10) 일본과 한국에는 각각 약 5만 3,000명, 약 2만 8,000명의 미군이 배치돼 있고, 일본 주둔 미 7함대와 미 5공군은 규모나 전력 면에서 막강하다. 미 7함대는 항공모함 타격 전력의 상시 전개 능력을 갖추고 있고(군함 70~80척, 항공기 140대, 병력 4만 명 운용), 미5 공군은 F-35A와 F-22 랩터 등 최신 전투기들을 배치하고 있다.
아시아 주둔 미군은 중국의 주변국들과 함께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매년 수차례 대규모 합동 훈련을 실시하는데, 지난 수년 동안 규모, 빈도, 지리적 범위, 참가국 수 모두 크게 증가해 왔다. 가령 발리카탄 훈련은 애초 미국과 필리핀 합동훈련이었지만, 올해는 일본,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프랑스가 참가해 대규모로 치러졌다. 특히 일본은 육상자위대 1,000명을 포함해 병력 1,400명을 파견하고, 자위대함이 대만해협을 통과했다. 이것은 말할 나위 없이 중국을 자극했다. 중국은 대만해협 항모 파견과 오코아테 수로 함대 통과로 맞섰다. 오코아테 수로는 중국군이 제1도련선을 넘어 서태평양으로 향하는 관문이다.
미국은 중국 주변국을 동원한 중국 포위 전력 강화나 군사 훈련이 단지 중국을 억제하는 방어적 성격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엄 촘스키가 지적하듯이, 만약 중국이 미국 앞바다인 멕시코만에 상시 집결해 군사훈련을 한다면 미국은 이를 도발로 여기며 대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트럼프는 ‘힘에 의한 평화’를 말하지만, 그것은 상대국의 반발과 군비 증강을 낳고 갈등을 심화시킬 뿐이다.
이제 남중국해와 동중국해는 세계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불안정한 곳의 하나가 됐다. 이 지역들에서 군사적 충돌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 특히,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경계에 위치한 대만은 유력한 발화점으로 꼽힌다. 대만은 글로벌 반도체 생산 네트워크의 중요한 고리이자 군사적 요충지라는 점에서 중국과 미국 지배계급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핵심 이익이다. 양측 모두 대만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미래의 판세가 달려 있다고 본다.
크리스 호턴은 《애틀랜틱》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이 대만 문제에 몰두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만약 대만이 중국의 일부가 된다면) 중국은 순식간에 태평양의 강대국이 되어 세계 최첨단 기술 일부를 통제하게 될 뿐 아니라, 일본과 한국으로 향하는 원유 수송로를 차단할 능력을 갖게 되며, 이를 지렛대로 양국 주둔 미군 기지의 폐쇄를 요구할 수도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 분석가인 펑광쳰과 야오요우즈도 똑같이 대만의 사활적 중요성을 지적했다. “만약 타이완이 중국 본토와 완전히 분리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중국은 영원히 서태평양의 제1열도선 서쪽에 갇히게 될 것[이며] 중국이 부활하기 위해 전략상 반드시 필요한 지역을 잃게 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대만 통일을 국가적 목표로 거듭 확인하는 한편 미국도 점점 호전적이 됐다. 2022년 바이든은 대만 문제를 놓고 중국과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공언했는데, 이는 미국이 수십 년 유지해 온 전략적 모호성을 내던진 것이었다. 트럼프는 말은 모호하게 하면서도 행동은 그렇지 않다. 미·중 정상회담 직후 트럼프는 ‘대만에 무기를 팔 수도 있고 안 팔 수도 있다’고 했을 뿐 긴장을 증폭시켰던 대규모 무기 판매 계획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그 전에 트럼프는 대만에 16조 원 규모의 무기를 판매하기로 하고 합동 군사훈련 예산도 증액하기로 했다. 이에 반발해 중국은 대만 포위 및 점령 훈련(정의의 사명 2025)을 강화했다.
대만을 둘러싼 긴장은 민족 통일이나 독립 같은 자결권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 아시아 지배권을 놓고 벌이는 투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대만에서 충돌의 뇌관이 터진다면, 그것은 반도체와 해양 패권이라는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두 강대국 간의 전쟁이 될 것이다. 미국이 대만 자결권을 보호하려 나선다는 주장은 위선일 뿐으로, 이에 동조해선 안 된다. 대만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중국과의 관계 변화를 반영해 왔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그들은 언제나 아시아와 세계 지배에 관심이 있지 아시아 민족의 자결권에는 일말의 관심을 둔 적이 없다. 동시에, 무력 동원도 마다 않는 중국의 대만 통일 열망은 중국 지배계급의 지정학적 이익의 표현일 뿐으로 이를 지지해선 안 된다.
7. 아시아 국가들의 딜레마와 일본의 재무장
미국과 중국의 갈등 심화에 대한 아시아 국가들의 대응은 이 지역을 한층 더 복잡하고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 이 지역에는 일본, 인도, 호주 등 만만치 않은 강국들이 포진해 있는 데다 경제 규모는 그만 못해도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등 지정학적 갈등의 당사자인 국가들도 있다.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이 그런 사례다. 이런 국가들은 미국과 중국의 상반된 압력을 받고 있지만 나름의 이해관계 속에서 이에 반응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 포위에 그 주변국과 동맹국들을 참여시키려 하지만, 이 국가들의 지배계급은 중국을 경계하면서도 지역적 경제 통합을 심화시키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가 자국 경제 성장에 도움이 돼 왔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관계 때문에 미국이 이 국가들을 중국의 영향력에서 떼어 내기가 쉽지 않다. 가령 필리핀 등 아세안 나라들은 미국과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면서도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참가하고 있다. 2020년 타결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은 트럼프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파기한 공백을 메우면서 역내 경제 통합을 이끄는 중국의 견인력을 보여 줬다.
협력과 충돌의 결합, 경제적 통합과 정치적 분열의 불안정한 균형이 이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자체적으로 군사력을 증강하며 너도나도 군비 경쟁에 뛰어 들었다.(그림 11)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는 2014~2025년 아시아의 군비가 무려 46퍼센트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중국을 제외한 상승세도 중국과 맞먹는 높은 수준이다.
트럼프 2기 정부 이후 상황은 한층 모순적이다. 트럼프는 관세를 지렛대로 경제와 안보 모두에서 미국으로 균형추를 옮기기 위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가 동맹과 우방을 대하는 태도나 미국의 안보 보장에 대한 회의는 원심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란 전쟁을 위해 아시아 주둔 미군 전력을 빼는 상황은 이런 의구심을 더 부추길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아시아 주요국들에 인도-태평양 공동 방위 분담을 촉구하면서 지역 불안정은 한층 높아지고 있다. 이를 기회로 일본은 재무장에 더한층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바마가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 전략을 선언했을 때 일본 총리 아베는 즉각 호응하며 “일본의 귀환”을 선언하고 군사력 강화의 초석을 다졌다. 지난해 트럼프가 대만 해협에서의 중국 억지에 동맹들도 참여하라고 촉구하자 다카이치는 ‘여자 아베’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줬다. “대만 해협 무력 충돌은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에 해당할 수 있다”며 대만 유사사태에 대한 군사 개입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게 말뿐이 아님은 올해 발리카탄 훈련에 자위대를 파견하고 그 군함이 대만 해협을 통과하게 한 데서 잘 드러났다.
일본은 이미 이런 준비를 착착 갖춰 왔는데, 2022년 방위 3문서 개정이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중국을 “최대의 전략적 도전”이라고 선언했고, 대만 유사사태의 중요성을 명시했으며, 반격 능력 보유를 명문화했다. 방위력정비 5개년 계획도 내놓았는데, 이것이 완료되면 일본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 군사비 지출국이 될 전망이다. 2022년 이후 일본 군사비는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그림 12)
이에 더해 다카이치는 비핵 3원칙(핵무기를 만들지 않고, 보유하지 않고, 반입하지 않는다)도 깨려 하고, 살상무기 수출 금지는 이미 폐지했다. 태평양전쟁 패배 이후 움츠렸던 일본 지배계급이 평화헌법 9조의 ‘전수방위’ 원칙을 사실상 휴지 조각으로 만들면서 아시아로의 제국주의적 재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8. 미·중 갈등 맥락 속의 남한과 북한(조선)
한반도는 아시아의 발화점으로 꼽히는 곳 중 하나다. 남북관계는 최근 수년 동안 악화돼 왔는데, 이는 미·중 갈등 격화와 연결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남북한의 국지적 충돌이 지역 수준의 충돌로 번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드론 공격 도발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한반도는 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돼 왔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아시아에서 군사력 우위와 동맹 질서를 유지하는 명분으로 “북한 위협”을 이용했다. 가령 미국은 천안함 침몰 사건을 미일동맹 강화에 이용했다. 천안함 침몰 이후 미국은 북한의 소행임이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일본 국민도 북한 공격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힐러리 클린턴)며 주일미군의 전략적 요충지인 후텐마 공군기지를 유지했다. 당시 하토야마 일본 총리는 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내세우며 후텐마 기지 이전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런 연결은 미국이 한국에 인도-태평양 지역의 공동 방위(중국 억지) 참여를 요구하면서 그 위험성이 더해지고 있다. 미국은 이를 위한 한미, 한미일 군사훈련을 강화하려 하는데, 이는 북한을 자극한다. 만약 아시아의 유력 발화점인 대만에서 유사사태가 벌어진다면, 한국은 이에 연루될 가능성이 상당하다. 한국군이 직접 개입하지 않더라도 한국이 미군의 발진기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중국은 주한미군 기지가 있는 평택, 오산 등지를 폭격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한국도 전쟁에 직접 뛰어들 가능성이 커지고,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북한도 그에 관여할 수 있다.
일부 국제관계/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이런 위험을 해소하는 열쇠가 남북관계 개선에 있다고 본다. 한국이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는 현실 때문에 미국의 부당한 요구에 끌려 다니게 되므로 원인 자체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남북관계가 너무 경색된 탓에 북미대화를 그 통로로 택해야 하는 실정인데, 미국의 관심사는 북한을 중국 견제 포석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역 키신저 전략, 즉 러시아를 중국에서 떼어내려는 시도처럼 말이다.
트럼프의 의도가 무엇이든, 현재 북미대화 가능성은 2기 취임 직후보다 더 떨어졌다. 한때 북한은 고립무원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미 관계 개선에 관심이 컸었다. 그러나 지금 아시아 세력관계는 크게 변했다. 중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위상이 크게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미국 측의 확실한 양보가 보장되지 않는데도 대화에 매달리거나 중국과의 관계를 훼손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은 중국, 러시아와 밀착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지정학적 이점을 누리고 있다.
게다가 트럼프가 핵 협상 와중에 이란을 군사 공격한 것은 북한의 불신을 키웠을 것이다. 물론 미국의 대북한 정책과 대이란 정책은 차이가 있다. 트럼프의 국방전략은 이란의 위협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할 실질적 기회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북한에 관해서는 핵 전력이 한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 본토에도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이라고 묘사하는 데 멈추고 있다. 트럼프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한을 군사 공격하기는 이란 전쟁보다 몇 배나 더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은 우크라이나와 리비아 꼴이 될 수 있는 비핵화(핵 시설과 핵 무기 폐기 및 반출)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를 열어 두면서도 러시아와 군사 관계를 강화하면서 지정학적 갈등의 한 편에 가담하고 있다. 민족 자주를 외쳐 온 북한이 옛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러시아를 지지해 파병까지 하다니 모순된 일이다. 북한과 그 지지자들은 그것을 반미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런 행위는 지정학적 위기를 완화하기는커녕 심화시킬 뿐이다.
한편, 일부 국제관계/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힘을 길러야 한국이 아시아 지역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며 자주 국방을 강조한다. 그러나 한국의 군사비 인상과 핵 추진 잠수함 등 군사력 증강은 지역 갈등과 긴장을 부추길 뿐이다. 이제 일본에서도 핵 잠수함 추진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이를 보여 준다. 핵 추진 잠수함은 핵 무장력 확보의 우회로로 인식되고 있다. 이종석 국정원장과 박선원 민주당 의원 등은 독자적 핵무장에는 반대하면서도 핵 잠재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핵 잠재력은 필요시 핵 무장으로 가겠다는 말이다. 한국의 군사력은 지역 분쟁에 불참하려는 용도라는 주장은 미국 엘리트 뺨치는 놀라운 예외주의일 뿐이다.
9. 진영론의 문제점과 계급적 반제국주의 운동의 중요성
지금 우리는 강대국 간 경쟁이 격화하고 점점 더 무력에 의존하는 현실을 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현 상황이 20세기 초와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당시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강대국들이 영토와 권력을 둘러싸고 벌이는 충돌을 설명하려고 제국주의론을 개발했다. 레닌과 부하린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인 강대국 간 경쟁 체제로 봤다. 자본 축적의 결과 규모와 힘이 커진 개별 자본들은 점점 국가와 융합하고, 세계로 뻗어 나가 시장과 원료와 투자처 등을 놓고 경쟁하면서 국가의 지원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본들의 경제적 경쟁과 국가들의 지정학적 경쟁이 융합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앞에서 우리는 오늘날 경제적 경쟁이 어떻게 지정학적 경쟁과 맞물리는지 살펴 봤다.
특히 레닌은 오늘날에 딱 들어맞는 중요한 통찰을 보여 줬는데, 바로 불균등 발전의 중요성이다. 자본주의가 균등하게 발전하는 것이 아니어서 소수의 선진국들이 경제력과 군사력을 이용해 나머지 세계를 지배한다. 동시에 불균등한 발전 때문에 경제적 강대국 순위가 바뀌고 이에 따라 정치·군사적 강대국의 순위도 바뀐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는 안정적이고 영원한 협력이 유지될 수 없다고 레닌은 강조했다.
이 통찰은 오늘날 격화하는 제국주의적 경쟁을 추동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도와 준다. 미국이 중국의 부상에 직면해 자신의 패권을 지키려 분투하고 있고 이것이 오늘의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동시에, 지역 수준에서도 하위 강국들이 부상하면서 쟁투를 벌이고 있다. 20세기 초에는 영국 제국주의가 떠오르는 두 강대국 독일과 미국에 맞서 자신의 패권을 지키려고 분투한 시기였고, 그 결과는 두 차례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이런 참화를 막으려면, 반제국주의 운동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더구나 미국의 포식성 제국주의는 헤게모니 약화의 반응으로, 더 많은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미국의 지배로 환원되지 않는다. 20세기 초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했듯이, 제국주의는 경쟁하는 국가들의 국제 시스템이다. 이에 원칙 있게 반대해야지 특정 제국주의 국가만 반대하거나, 특정 제국주의 국가에 맞서 다른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제국주의를 미국의 패권으로 축소하고 중국을 이에 맞선 ‘진보적’ 균형추로 보는 진영론은 중대한 착각이다. 중국은 스스로 반식민지 경험이 있고 그 역사를 강하게 상기시키곤 하지만, 지금은 미국의 경쟁자로 떠오른 제국주의 열강이다. 중국이나 그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는 좌파에게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중국이 다른 국가들과 맺는 관계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보다 결코 더 우애롭거나 진보적이지 않다.
일대일로 사업 과정에서 이른바 “채무 함정 외교”가 벌어지는 것은 대표적 사례다. 개도국에게 거액을 대출한 뒤 이를 상환하지 못하면 기반시설 지분이나 운영권을 빼앗는 것이다. 스리랑카, 에티오피아, 잠비아 등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일대일로 사업을 진행할 때 빌린 돈을 중국 기업에 쓰도록 하는 부당한 대출 조건도 여러 국가들의 불만을 샀다. 중국의 오랜 동맹국인 파키스탄조차 부채 상환 계획 재협상을 요구했다.
중국과의 경제 관계 확대가 더 나은 경제 모델 전환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가령 중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교역은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의 기존 교역 패턴을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브라질의 대중국 수출은 84퍼센트가 1차 산품(농산물과 원료)이고, 1차 산품 호황은 이런 산업 취약성을 더 강화했다.
중국이 중동의 걸프 국가들과 잘 지내는 것은 그런 국가들이 비민주적이고 잔혹한 군주정이라는 사실에 개의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은 시장 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의 혼합 경제 체제로 그 운영 방식은 민주주의나 “공동부유”와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중국 총생산의 60퍼센트가 민간 자본에서 나오지만, 국영 기업의 비중이 여전히 높고 금융 시스템은 중앙은행과 4대 국영은행이 지배한다. 민간 자본에 대한 국가 통제력은 막강하다.
그러나 중국의 국가를 통제하는 것은 노동계급이 아니라 소수의 당·국가 관료들이다. 노동자들은 노동의 대가도, 민주적 권리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사회적 불평등은 서구 못지 않다. 2006년 중국 공산당의 내부 보고에 따르면, 중국 백만장자의 90퍼센트가 당·국가 고위 관료의 자녀이다. 연안 지역 자본가 절반 이상이 당과 국가 관료 출신일 정도로 민간 자본과 국가 권력은 긴밀하게 얽혀 있다. 중국 체제의 작동 방식은 자국 노동자 민중의 삶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과의 경쟁에 매여 있다.
최근에는 트럼프의 횡포가 하도 심하고 우방들도 막 대하다 보니,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 국익을 지키는 것이 진보라도 되는 듯 여기는 경향도 있다. 미국으로부터의 전략적 자율성이나 자주의 구호 아래서 말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이나 기존 질서의 균열 틈새에서 책략을 부려 이익을 얻으려는 중견국들(가령 인도, 튀르키예 등)은 지역에서 긴장을 증폭시키는 당사자들인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이런 관점에서 자국 정부를 지지한다면, 제국주의 체제에 맞서기는커녕 그 일부를 떠받치는 꼴이다.
전쟁과 혼돈의 세계에 대한 해법은 제국주의 국가나 그 하위 중견국 국가들이 아니라 오직 아래로부터 생겨날 수 있다. 지금 벌어지는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투쟁 속에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은 전 세계의 노동자 등 평범한 서민들이다. 관세 전쟁으로 미국 노동자들은 소비재 가격 인상으로, 중국 노동자들은 공장 폐쇄와 임금 체불로 고통받고 있다. 이란 전쟁 속에서 전 세계 빈민의 고통이 증가하고 있다.
미·중 간 전쟁은 정말 끔찍할 것이다. 전쟁에 못 미치더라도 갈등 격화나 더 강화될 군비 경쟁은 우리 삶을 망칠 것이다. 인류는 정말이지 재앙 앞에 있다. 이를 피하려면 세계 열강의 증대하는 분열을 이용해 반전·반제국주의 운동을 확대하고, 국제적 경쟁 시스템 자체에 도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