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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퇴진 운동 2023~24년 팔레스타인 투쟁과 중동 트럼프 2기 이주민·난민 우크라이나 전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이 기사는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의 온라인 토론회 발표(2021년 12월 23일)를 글로 옮긴 것이다. [  ] 안의 말은 신문 게재를 위해 그 자신이 첨언한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좋아하는 말 같습니다. 실천하느냐와는 완전 별개로 말입니다. 박정희의 정당 이름은 민주공화당이었습니다. 그의 유신체제의 다른 이름은 ‘한국식 민주주의’였습니다. 전두환의 정당 이름도 민주정의당이었습니다. 그는 광주의 민주화 봉기를 진압하면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했습니다. 노태우의 정당 이름도 민주자유당이었습니다.

김영삼 때부터 우파는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국민의힘 등으로 당명을 바꾸며 ‘민주’라는 말보다는 국가나 국민을 가리키는 말을 선호했습니다. 우파에 좀 더 어울리게 말입니다.

그렇다고 우파와 윤석열이 더는 민주주의를 들먹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언론중재법 개악에 반대했을 때 민주주의를 들먹였습니다. 그리고 문재인과 이재명은 독재를 대표하고 자신들은 민주주의를 대표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정치인들이 민주주의 운운할 때는 자기네에게 편리하게, 아전인수 격으로 갖다붙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언론중재법 개악을 ‘민주 개혁’이라고 부릅니다. 국민의힘이 민주당의 언론중재법 개악 시도를 반민주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것이지만, 민주당의 언론중재법 개악이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것임은 맞습니다.

또,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은 청주 평화운동 활동가들을 문재인 정부가 보안법으로 구속한 것도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짓입니다.

서구 정치인들도 민주주의를 아전인수합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략할 때 민주주의 어쩌고저쩌고했고, 지금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서도 그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정상회의’가 그런 것입니다. 반면 서구 정치인들은 자기네 동맹국 사우디아라비아의 독재와 이스라엘의 인종분리주의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이렇게 민주주의라는 말이 장구한 기간 광범한 기성 정치인들에 의해 오·남용되다 보니 민주주의의 의미 자체가 극도로 모호해지면서 극도로 축소됐습니다. 단순히 선거와 투표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선거와 투표가 순전한 요식절차가 아니려면 공개적인 토론과 논쟁이 전제가 돼야 하고, 공개적인 토론과 논쟁이 요식절차가 아니려면 언론과 표현의 자유와 법 앞의 평등이 전제가 돼야 합니다.

[이제 우리 나라에서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론이 공직 선거를 앞두고 특정 후보 낙선을 주장한다거나, 특정 후보에 투표하기를 주장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에 맞서 2000년 당시 급진적인 엔지오들은 4월 13일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낙천·낙선 운동을 벌였다.]

민주노총의 비민주성과 관료주의

그런데 이런 점은 좌파 측에서도 간과되기 일쑤입니다. [금속노조 선거에서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표현물을 내는 것이 해당 노조 선거법 위반이다. 그래서 얼마 전 거기 선거에서 특정 후보의 낙선을 주장한 상근자 하나가 징계 대상이 됐다.]

민주노총 중앙 관료들이 만장일치로 노동자연대 접근 원천 금지 결정을 한 일을 한 번 살펴봅시다. 그들은 단 한 명의 노동자연대 지지 조합원만을 발언하도록 허용하고 곧 그를 밖으로 내보내고 자기네끼리 결정했습니다. 진정한 토론과 논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의 내용도 노동자연대 지지 조합원들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일을 두고 법 앞의 평등도 없었습니다. 두루 알다시피, 노동자연대가 지난 몇 년간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와 중집에 의해 제척(除斥) 조치를 당해 온 것은 민주노총의 규약 중 ‘2차가해’ 규정[성폭력, 폭언·폭행 금지 및 처벌 규정 제2조 제3항]에 따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민주노총 여성위원회가 몇 년 전 어떤 지역관료 하나를 심리적으로 압박해 그가 어떤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자술서를 쓰게 만든 일이 있었는데, 노동자연대가 이를 양심의 자유 침해 행위로 비판해서 중앙 관료들의 반감을 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폭행 가해자로 몰렸던 지역관료는 겨우 조합원 자격 3년 정지라는 비교적 경징계만을 받은 반면, 우리에게 가해진 조치의 효력은 영구적입니다.

요컨대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와 중집 관료들의 의사결정은 그 절차든 내용이든 완전히 비민주적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에 비춰 본 혐오 표현 금지법

앞에서 저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공개적인 토론과 논쟁, 그리고 선거와 투표를 위한 전제가 될 만큼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법 앞의 평등도 아무리 형식적일지라도 필수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혐오 표현 금지법을 발의하겠다는 발상은 도대체 민주주의의 견지에서 어떻게 봐야 할까요? 노동자연대는 성소수자 혐오 발언 하는 자들과, 이주 노동자와 빈국 출신자 등에 대해 인종 혐오 발언 하는 자들, 여성 비하 발언을 하는 자들을 침묵하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혐오 표현 금지법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혐오 표현 금지법은 정부와 경찰이 차별 반대 활동가들을 향해서도 이용한다는 것이 그런 법이 제정된 나라들에서의 경험입니다. 예컨대 영국의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가들은 유대인 혐오로 경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보안법의 본질도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입니다. 특히, 친북 주장이나 그런 활동을 하거나,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혁명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아니라 F-35A 스텔스기 도입 반대 주장을 한 청주 평화운동 활동가들도 보안법으로 구속됐습니다.

또한 민주노총 규약 중 소위 ‘2차가해’ 금지 조항의 본질도 표현 자유 억압입니다. 이른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언어 사용을 징계하는 규정입니다.

우파의 혐오 표현이 쑥 들어가게 만드는 방법은 대규모 항의 시위와 행진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의 운동가들 자신의 자유로운 표현 공간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보수 우파의 표현 자유에 맞서 우리 자신의 표현 자유를 누리자!”

이에 반해, 혐오 표현 금지법 제안은 차별 일체를 근절하고자 하는 손쉬운 관료적 방법일 뿐입니다. [다양한 단체 관료들이 선거나 언론 보도를 의식해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가해’ 교리를 실행하는 것도 이런 관료주의적 방식의 일종이다.]

도덕주의가 대중 행동과 논쟁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표현 자유 확대는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키울 수 있고, 이는 사회주의적 정치 운동에도 도움이 됩니다.

표현 자유 예외의 대상은 나치밖에 없습니다. 지금처럼 ‘2차가해’가 표현 자유 예외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됩니다. 나치는 표현 자유는 물론 민주주의 그 자체를 말살할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치에 대항하는 경우에도 국가가 표현 자유 억압 법률을 제정해 나치의 입에 재갈을 물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단순한 자유주의적 입장인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은 표현 자유를 지키려 하지만 공손한 대화와 토론에만 관심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공손함과 예의 바름을 넘어 우악스럽게 항의시위 하고 행진하는 등에 좀 더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혐오 표현을 거듭 재발케 하는 불평등하고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시스템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소환 가능성

민주주의의 또 다른 핵심 요소는 선출된 자가 업무수행 평가와 회계감사를 매년 받아야 하고, 그 중간에라도 이에 실격되면 즉시 소환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몇 년마다 한 번씩 우리를 대표한다는 사람들을 뽑지만, 그가 우리에게 했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을 다음 선거 때까지 구경해야 합니다. 그런 수많은 경험을 돌아본다면, 선출된 자들의 소환 가능성은 민주주의의 꼭 필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1871년 파리 코뮌의 공무원들은 선출됐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평균임금만을 받았으며, 부적격으로 드러나면 즉각 소환 대상이 됐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파리 코뮌을 두고 “노동자 혁명,” “노동자 민주주의,” “혁명적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으로 불렀습니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비록 성인 남자 시민에게만 참정권을 제한한 한계가 있는 민주주의였지만, 그럼에도 공직자들은 자유 토론과 논쟁을 거쳐 선출됐고, 공직 부적격 판정시 즉시 소환됐습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그 대안

아테네의 가난한 자유인들은 지배계급의 착취를 경감시키는 데에 민주주의를 이용했습니다. 가령 그들은 지대와 세금과 부역의 부담들을 덜고자 의회를 이용했습니다.

더 나아가 아테네의 보통 시민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통치다. 다수는 가난하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통치다.”

이에 맞서 아테네 지배계급은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왜 하층 계급들의 전유물이냐?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을 뜻하며 따라서 의회는 계급을 초월한다.”

결국 민주주의를 거추장스럽게 여긴 아테네 지배계급은 처음에 마케도니아인들과, 그다음에는 로마인들과 합작해서 아테네와 여타 그리스 도시들의 민주주의를 전복해 버렸습니다.

조금 전 저는 고대 아테네의 가난한 시민들이 지배계급의 착취를 경감시키는 데에 민주주의를 이용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평범한 대중은 비슷한 것을 민주주의에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하에서도 착취가 경감되지 않아 빈부격차가 더 벌어진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떨어질 것입니다.

[확대]

한국에서 방영하는 BBC뉴스/코리아는 지난해 초에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조사 결과를 보도했습니다. 조사 결과인즉슨, 선진국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지난 25년 중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영국과 미국이 가장 높은 수준의 불만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보리스 존슨이나 도널드 트럼프 같은 극우적인 정치 세력이 등장해 공공연히 민주주의를 폄하하고 무시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5년 전인 2016년 21세기정치학회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는 그에 대한 조사가 처음 실시된 1995년에 75.3점이었지만 15년간 지속적으로 조금씩 낮아져 2010년에는 64.3점으로 하락했습니다. 제 생각에 더 최신의 조사가 있다면 이 신뢰도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박근혜 퇴진 이후 잠시 높아졌다가 문재인의 배신으로 최근 몇 년 새 급격히 또다시 하락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점증하는 불신에 사회주의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민주주의는 맛이 갔으니 이제 사회주의다!” 하고 말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서,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한계가 있으므로,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민주주의를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노동계급이 민주주의의 주체가 돼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고대 아테네 평민들의 주장을 현대식으로 풀어 말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통치다. 다수는 노동계급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에 의한 통치다. 자본가 민주주의를 넘어 노동자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자. 노동자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결정적 계기이다.”

민주주의를 무한 확장하면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가?

여기서 민주주의를 무한 확장하면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사상을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는 혁명적 사회주의(특히 레닌주의)와 대립각을 세웁니다. 민주적 사회주의의 기원은 120여 년 전 독일 사회민주당의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무한 확장해도 사회주의로 가지 못합니다. 사실, 민주사회주의론이 처음 나오던 19세기 후반에 이미 서구 지배계급들은 선거와 투표를 조금씩 수용해도 괜찮겠다는 계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 분야에는 선거를 적용하지 않고 국가의 일부(의회)에만 선거를 적용하면, 자기네에게 오히려 흔히 유리하게 이용할 수도 있음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거추장스럽지만 유용한 장식품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의 선거와 투표에 대해 이렇게 비꼬았습니다. “억압 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의회에서 대표하며 탄압할 억압 계급의 특정 대표자들을 몇 년 마다 한 번씩 결정한다.”

특히, 대중에게 개혁을 제공하지 않으면 대중이 거대한 반란을 선택할 가능성이 클 때, 지배자들은 대중의 지도자들이 개혁주의적인지 재 보고는 개혁의 길을 통한 지배 연장의 기회를 엿봅니다. 한국 지배자들이 1987년과 1997년에 행한 선택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배자들이 1989년에 행한 선택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거추장스럽다 싶으면 선거와 투표, 심지어 민주주의 자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내팽개쳐 버릴 수 있습니다.

가령 지배자들은 1933년 독일에서, 1936년 스페인에서, 1980년 한국에서 그랬듯이 파시즘이나 군부 쿠데타를 지지해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거나 아니면 선거를 취소시켜 버릴 수도 있습니다.

지배자들이 막강한 외세와 결탁해 선거를 취소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2011년 11월 그리스와 유럽, 특히 독일과 프랑스, 유럽중앙은행의 지배자들은 그리스 사회당 총리 파판드레우를 물러나게 하고 은행가인 파파디모스를 새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비슷한 때 이탈리아 외채 위기가 심각하던 상황에서도 이탈리아와 유럽의 핵심 지배자들은 선거를 우회하며 새 총리 자리에 골드만 삭스 출신 마리오 몬티를 임명했습니다.

그런 때 의회는 무력했습니다. 이렇게 의회는 진정한 권력자들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하에서는 민주주의를 아무리 확장해도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권력자들은 경제 영역과 정치 영역 모두에 존재합니다. 경제 권력을 쥔 자들은 기업주들과 금융가들로, 그들은 물가 인상, 금리 인상, 대량 실업, 투자 여부, 물자 배분 등으로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정치 권력을 쥔 자들은 국가 기관 관리자들인데, 그들도 선출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들은 대개 직업 정치인들이지만, 로비스트·이익집단·압력단체 등을 통해, 또 다양한 연줄을 통해 경제 권력자들과 엮여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결코 중립적 실체가 아닙니다. 다양한 갈등을 조정하며 갈등을 초월하는 그런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는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실행하는 그들의 가장 효과적인 정치 조직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는 민주화될 수 없습니다. [문재인 청와대의 검찰 개혁이나 공수처 가동을 국가의 민주화로 본 사람들은 허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해체되고 노동자 국가로 대체돼야 합니다.

민주주의 없이 사회주의 없고 사회주의 없이 민주주의 없다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가짜입니다. 전혀 사회주의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압제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정당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없이도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자유주의적인 꿈입니다. 과거에도 결코 본 적이 없고 미래에도 결코 보지 못할 일입니다.


발제자의 정리

혐오 표현 처벌 지지자들의 논리 구조는 흥미롭습니다. 그 논리 구조란 어떤 예외를 두는 겁니다. 예외를 두고는 그 예외 때문에 안 된다라는 식인 것이죠. 예를 들어, 헌법에는 민주적 권리들이 보장돼 있어요. 그러나 제37조 제2항을 보면, 그런 것을 보장하지 못할 상황 — 그걸 헌법학자들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그게 뭔지 되게 모호하긴 하지만요 — 이 되면 그 민주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고 하죠. 특히, 민주적 권리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하죠. 바로 그걸 근거로 보안법이 존재하고 사실상 헌법보다 더 상위의 법처럼 돼 있습니다.

헌법은 그럴듯하게 민주적 권리를 얘기하지만, 북한을 찬양·고무한다거나, 북한과 연락이 닿는다거나, 북한을 지지하는 조직을 결성한다던가, 북한하고 아무 관계없는 조직이나 사람들, 심지어는 “북한은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다. 거기도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 혁명이 필요한 사회다” 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보안법으로 처벌하고 있죠.

마찬가지로, 지금 나오고 있는 혐오 처벌론도 예외론입니다. 인종 혐오, 여성 혐오(사실 “혐오”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고 “여성 비하”가 맞겠지만), 성소수자 혐오 등 혐오를 발설하는 사람에게는 언론·출판·표현의 자유를 인정할 수 없다는 예외론을 펴는 것이죠. 노동자연대에 대해서도 민주노총이 ‘2차가해는 안돼, 2차가해는 예외야’ 하는 식의 예외론을 펴는 것이죠.

그런데 또 하나 흥미있는 사례를 생각할 수가 있어요. 서구, 가령 미국에서 민주적 권리를 제한하는 애국자법의 핵심 논리가 무엇입니까? 테러예요. 거기서도 예외론이 적용이 되고 있는 거예요.

바로 이 논리 구조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재미있게도(아니, 재미있는 건지 화가 나는 건지 모르겠는데),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는 민주적 권리를 일관되게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네(자본주의적 지배자들)에게 필요하다면 기꺼이 민주적 권리를 짓밟는다는 것이죠.

스페인 내전에서 민주적 권리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을 때 그것을 돌파할 힘과 능력을 가진 것은 바로 당시 탄생하고 있던 노동자와 농민의 아래로부터의 권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권력을 억누른 게 누구입니까? 바로 스페인 공화국, 민주공화국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프랑코는 민주적 권리는 물론이거니와 스페인 공화국 자체도 박살내 버렸고, 그의 파시스트 국가 권력이 수십 년 동안 스페인을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주적 권리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현실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민주주의인데, 이 현실의 민주주의는 민주적 권리를 일관되게 지켜주지 않고, 지배자들이 자기들의 이익이 앞선다면 민주적 권리를 얼마든지 억압해 온 것이 역사이고, 지금도 각종 테러방지법 등을 통해서 그런 걸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진보 세력, 좌파 세력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자칫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혐오는 예외다’라는 식의 예외론이 먹힌다면 누가 득을 보겠습니까? 우익이 득을 보게 되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이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에게 역사를 공부하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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